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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Portuguese Mexicans
스페인어:luso-mexicanos
1. 개요
포르투갈계 멕시코인 포르투갈에 기원을 두거나 포르투갈계 조상이 있는 멕시코인을 의미 한다.2. 이민사
2.1. 멕시코 독립 이전
멕시코를 식민 지배했던 스페인은 이웃 국가 포르투갈과 60년 동안 이베리아 연합이라 하여 동군연합을 구성한 적이 있었다. 두 국가는 이웃 국가인 이유로 동군연합이 해체된 이후로도 인적 자원 교류가 활발한 편이었고, 누에바에스파냐 식민지에 파견된 페닌술라르 중에서도 적지 않은 수의 포르투갈인이 포함되곤 했다. 당장 에르난 코르테스의 아즈텍 제국 정복 과정에서도 포르투갈인 한 명이 포함되었다는 기록이 발견될 정도. 하지만 이렇게 누에바에스파냐에 정착한 포르투갈인들은 현지 스페인계 멕시코인 사회에 금세 동화되곤 했고,[1] 이들은 자체적인 포르투갈계 디아스포라 커뮤니티를 구성하는데 이르지는 못하였다.대항해시대 당시 배를 타고 장거리 이동을 하는 것은 다소 위험한 일이었고,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성이었다.[2] 당시 여성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는 경우는 종교적 소수자에 속하는 경우가 많았다. 누에바에스파냐로 이민 오는 유럽인 여성들은 대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콘베르소[3] 출신이 많았는데, 한동안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콘베르소들을 대상으로 한 종교 재판, 추방 및 재산 몰수가 빈번했기 때문이었다.
17세기 포르투갈 출신의 유대인들이 이곳으로 대거 유입되면서 누에바에스파냐의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당시 이곳으로 흘러들어온 사람들의 대부분은 스페인의 포르투갈 합병(1580~1640)으로 야기된 유대인 박해를 피해 도망쳐 온 포르투갈 유대인들로서, 이들 대부분은 브라질, 아르헨티나, 페루 및 누에바에스파냐에 거주하고 있었다. 포르투갈 유대인들은 여러 분야에서 상업 활동을 했었는데 이들로 인해 누에바에스파냐에 살았던 유대인들의 직업은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라이킨 엘킨이 언급한것을 보면, 이들이 지녔던 직업이나 종사했던 일은 상인, 탄광 소유자, 배 목수, 고기 납품업자, 승려, 장의사, 울타리 장인, 신발 제조업자, 행상인, 목수, 광부, 재단사, 참모, 여관주인, 앙돈업자, 약제사, 성직자, 공공서기관, 과자제조인, 중국과의 무역상인, 도미니크 교단 수도사, 아프리카 노예상인, 비서, 시장, 사탕공장주, 의사, 군인, 주교대리, 목축판매업자, 농민, 은세공인, 가게주인, 마술사, 직공, 보석상, 아시엔다 소유자, 치안 책임자 등이었다(2014: 8). 당시, 포르투갈 유대인들이 대규모적으로 종사했던 분야는 노예무역이나 갤리언 무역과 같은 국제 해양 무역이었다(Quiroz, 1986: 244). 이런 무역은 스페인의 새로운 경제정책에서 나온 것으로서 대서양이나 태평양을 통한 이런 국제무역 시스템에 가장 적응을 잘 했던 사람들이 바로 이 포르투갈 유대인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멕시코 유대인 이민과 종교재판 - 식민시기 초기 누에바에스파냐
멕시코 유대인 이민과 종교재판 - 식민시기 초기 누에바에스파냐
포르투갈의 아시아 식민지에서 태평양을 가로질러 멕시코로 이민오는 포르투갈 제국 신민들도 적지는 않았다. 포르투갈 왕국은 아시아 각지에 식민지를 건설하는데는 성공했으나, 중국의 명나라, 청나라로부터 여러 물산을 충분히 수입할 정도로 자본력이 충분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자본력이 풍부했던 누에바에스파냐의 갤리온 무역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멕시코의 사카테카스나 페루 부왕령의 포토시 은광에서 채굴된 은은 멕시코 아카풀코 항구에서 필리핀 마닐라로 이동된 후 현지 화교들에 의해 다시 마카오에서 중국산 물산을 수입하는 대금으로 활용되었다. 이렇게 수입된 중국산 물산은 다시 아카풀코 항으로 이송된 후 노새를 이용하여 대서양의 베라크루스 항구로 이동되어 이베리아 반도 본토로 운반되었다. 이 태평양 갈레온 무역 과정에서 인도나 마카오의 포르투갈인들이 멕시코로 이동하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 후안 가리도(Juan Garrido) : 위에 그림에서 갑옷 입은 백인들 사이에 있는 흑인. 서아프리카 출신으로 포르투갈인들에게 납치되었다가 1510년 리스본에서 가톨릭으로 개종. 이후 스페인 콩키스타도르에 합류하였다. 군공을 인정받은 후 멕시코에서 최초로 밀밭을 일구고 흑인 노예들을 최초로 멕시코로 데려와서 광산 개발을 시도했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멕시코로 유입된 포르투갈인들 중에는 유럽인 이외에도 아프리카나 아시아 식민지 주민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4] 1540년에는 캘리컷(오늘날 인도 케랄라의 도시) 출신 요리사가 누에바에스파냐에 정착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포르투갈 제국 식민지의 인도인 신민들은 다 노예만 있는 것은 아니었고 자유민 신민들이 적지 않았다.
포르투갈인들이 멕시코 유입은 포토시 은광의 고갈, 영국과 청나라 사이의 무역 활성화를 이유로 침체되기 시작했다. 19세기 초반 멕시코가 현지 크리오요들을 중심으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는 와중에 멕시코에 체류하던 포르투갈인들 역시 페닌술라르 침략자로 간주되어 멕시코 현지 폭도들에게 학살당하곤 했다.
2.2. 멕시코 독립 이후
포르투갈인들의 멕시코 이민은 포르투갈계 브라질인의 사례처럼 금광이나 농장 개발을 위해 대규모의 이민 붐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고, 개인이나 가정 단위의 이민이 주가 되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이민 현황 통계 등은 알기 어렵다.20세기 들어서는 브라질에서 멕시코로 이민/귀화하는 경우가 생겨나면서,[5] 멕시코 사회 내에서도 포르투갈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오늘날 멕시코인들의 90% 가까이가 스페인계 혈통을 물려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현대 브라질인 대다수는 포르투갈계 혈통을 어느정도 물려받은 사람들이고, 이들 일부가 멕시코로 귀화하면서 멕시코인 중 포르투갈계 조상 가계를 기억하는 경우 혹은 포르투갈어를 모어로 구사하는 경우가 다시 늘어난 것이다.
3. 유명 인물
4. 관련 문서
[1] 포르투갈어는 스페인 북서부에서 사용되는 갈리시아어와 상당히 유사하다. 다만 이를 두고 포르투갈인=갈리시아인이라는 등식을 두긴 애매한 것이, 오늘날 포르투갈어는 중세 갈리시아 세력이 레콩키스타를 통해 남부로 확장하던 과정을 통해 성립된 언어이기 때문이다.[2] 유럽인 남성들이 현지 원주민 여성들과 통혼하는 과정에서 낳은 혼혈인들 중 금발이나 벽안은 극히 드물었고, 바로 이 때문에 누에바에스파냐 사회에서 금발벽안은 고귀한 신분이나 혈통을 나타나는 척도 역할을 했다. 오늘날에도 멕시코에서는 금발이나 벽안을 가진 배우나 모델 관련한 수요가 큰 편이다.[3] 가톨릭으로 개종한 세파르드 유대인[4] 이는 포르투갈 왕실이 군인과 선원의 복지에 다소 인색해서 발생했던 일인데, 스페인 제국에서는 본토에서 식민지로 파견나간 사람들을 페닌술라르라고 해서 감투를 씌워주고 이런저런 특혜를 제공했던 것과 다르게, 포르투갈의 경우 식민지 내 백인 병사나 선원들의 처지도 노예랑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본토에서 식민지로 파견나간 병사들이나 선원들에게 제대로 급료는 커녕 보급품도 지급되지 않아 병사들이 파견나간 식민지에서 현지인들에게 구걸해서 끼니를 해결하거나 담요가 없어서 비오는 날 벌벌 떨며 자다가 황열병에 걸리거나 하는 일이 흔해 인력 손실이 극심했기 때문이다. 결국 선원과 군인이 부족해지자, 포르투갈 왕실은 인도 식민지의 기독교인들을 대규모로 징집해서 상황을 땜빵하곤 했다.[5] 1964년 브라질 쿠데타 이후 브라질에서 멕시코로 1백여 명 정도가 망명한 것을 시작으로 브라질인들의 이민 귀화 사례가 증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