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인 디아스포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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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계 멕시코인(러시아어: русско-мексиканец, 스페인어: ruso-mexicano)은 러시아계 혈통을 가진 멕시코인이다. 원칙적으로 러시아인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소수민족 출신의 이민자도 러시아계 멕시코인으로 분류되는 경우도 있다. 후술하는 이유로 다른 러시아계 디아스포라보다 비중이나 인지도가 낮은 편이다.2. 이민사
러시아에서 멕시코로의 이민 인구 | |
1895년 | 70명 |
1900년 | 62명 |
1910년 | 447명 |
1921년 | 692명 |
1930년 | 3,140명 |
1940년 | 1,037명 |
1950년 | 791명 |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멕시코 측에서는 당시 부족한 인구를 만회하고 우수 인력을 유치하고자 러시아 각지에 영사관을 건설하고 이민을 유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에서 멕시코로 이민오는 인구는 미국[1]이나 캐나다, 아르헨티나, 브라질로 이민오는 인구에 비하면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포르피리오 디아스 재임 시절 멕시코는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 등에서 유럽인 이민을 많이 받아 국력을 신장시킨 것을 모방하여, 유럽에서 많은 이민을 받기 위해서 이런저런 노력을 했지만 정작 당시 러시아인들은 기후가 완전히 다른 멕시코 이민보다는 미국/캐나다 이민을 희망하는 편이었다. 러시아 제국 내 유대인들 일부가 미국에 이민가기 힘든 경우 멕시코로도 이주 및 정착했으나, 대개 멕시코에서 발만 담그고 다시 미국으로 이민하는 경우가 많았다. 멕시코 측의 기대와 다르게 러시아-멕시코 관계는 멕시코 혁명(1910-1917)과 러시아 혁명(1917-1923) 동안의 양국 역사의 격동기를 거치며 교류 규모가 계속 더 축소되었다.
- 디에고 리베라와 그의 첫 번째 부인 안젤리나 벨로프
대중적으로는 널리 알려진 사례로는 디에고 리베라의 가족이나 친구들 사례를 들 수 있다. 디에고 리베라의 할아버지 역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 유대인이었으며,# 그의 첫 번째 배우자로서 여류 화가 안젤리나 벨로프(Angelina Beloff) 역시 상트 출신이었다. 이 외에도 리베라의 친분관계가 있던 소련인 중 스탈린에 의해 추방되었던 레프 트로츠키는 리베라의 도움으로 1937년부로 멕시코로 망명할 수 있었다.[2] 이후 레프 트로츠키는 디에고 리베라의 부인 중 하나였던 프리다 칼로와 멕시코에서 불륜 관계를 맺는 것으로 보답했다.
트로츠키의 암살 이후에도 그의 가족이나 지지자 일부는 멕시코에 잔류하였다. 오늘날 미국 약물남용연구소(NIDA) 소장으로 일하고 있는 멕시코계 미국인 노라 노라 볼코우가 트로츠키의 증손녀로 알려져 있다.
소련 해체 이후 알렉산드르 발라킨 같은 이공계 분야 전문가들이 멕시코에 정착한 사례도 있다.
2.1. 몰로칸족의 이민
러시아 제국에서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근교로 이주했던 일군의 몰로칸파[3] 신도들이 땅값은 비싼데 농장을 구매할 돈이 없어서 발을 동동 구르다 멕시코의 바하 칼리포르니아로 재이민한 경우도 있었다.# 몰로칸파 신도들은 같은 몰로칸파 신도들하고만 결혼하고 고립된 농촌 공동체를 구성하기 때문에 몰로칸족으로 불릴 때도 있다.[4] 문제는 당시 멕시코로 이주했던 몰로칸족들은 50여 가구 105명 정도밖에 안 되는 규모였던 것. 이런 소규모 공동체에서 몇 세대가 결혼을 반복하면 죄다 근친혼이 되어버릴테고,[5] 적당한 배우자를 찾지 못한 몰로칸족들은 공동체를 이탈하여 이웃한 멕시코인 가톨릭교도들과 통혼하거나 아니면 미국 내 다른 몰로칸족과 결혼하러 다시 미국으로 이민하면서, 이들 공동체는 수십년을 넘기지 못하고 해체되었다.3. 독일계 러시아인 재침례파 신도의 멕시코 이민
독일계 러시아인 혈통의 멕시코인은 조상이 러시아 제국의 재침례파 탄압을 피해 캐나다로 이주했다가 1910년대 캐나다에서 의무 교육을 요구하자 이를 피해 1920년대 멕시코로 재이민한 경우이다.사진 보기 주로 치와와 주를 중심으로 정착했다. 캐나다에서 라틴 아메리카로 이주한 메노나이트파 신도들은 현재도 출산율이 엄청 높은데 한 예로 1920년대 7,000여 명의 메노나이트 신도들이 멕시코로 이주하여 한 가정당 자녀를 8~12명 정도씩 낳았고 2010년대 기준 인구가 11만여 명 정도에 달한다.[6]#1#2 메노나이트파 신도들은 멕시코 이민 후에도 종파 차이로 가톨릭을 믿는 다른 멕시코인들과 거의 통혼이 이루어지지 않는 편이다.
4. 관련 문서
[1] 이 쪽은 오히려 동유럽 유대인에 대한 이민 쿼터제를 세워서 이민을 막던 편이다.[2] 당시 멕시코 대통령 라사로 카르데나스가 직접 트로츠키를 마중나온 후 항구에서 멕시코 시티로 이동하는 특별 열차까지 마련해 줄 정도로 환대를 받았다고 한다. 디에고 리베라가 당시 이미 멕시코의 거물급 예술가였고, 그가 트로츠키에게 호의를 베풀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3] 러시아 정교회의 고의식파에서 갈라져 나온 소수종파로 양심적 병역거부 때문에 따돌림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4] 초창기 소련에서는 몰로칸을 일종의 소수민족으로 분류하였다.[5] 참고로 유사한 케이스에 해당하는 조지아의 두호보르파 정착촌의 경우 작은 마을에서 고립된 사람들이 수십여 세대간 결혼을 반복해서 유전병이 심각한 수준이다. 두호보르파 역시 같은 두호보르파하고만 결혼한다.[6] 1970년대까지는 일반 멕시코인들도 자식 다섯은 기본으로 낳았기 때문에 그리 두드러보이지 않았지만 1980년대 이후로 멕시코의 출산율이 급속히 낮아지기 시작하면서 부각되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