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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4:23:08

태강릉

강릉(조선 명종)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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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적 제201호
서울 태릉과 강릉
서울 泰陵과 康陵
Taereung and Gangneung Royal Tombs, Seoul
<colbgcolor=#315288><colcolor=#fff> 소재지 서울특별시 노원구 화랑로 681 (공릉동)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조선시대
면적 1,619,903㎡
지정연도 1970년 5월 26일
건축시기 조선 시대, 1565년
관리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조선왕릉중부지구관리소
1. 개요2. 상세3. 역사4. 태릉(泰陵)5. 강릉(康陵)6. 교통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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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에 있는 조선 시대 왕릉군(群)으로, 조선 제11대 왕 중종의 제2계비인 문정왕후가 안장된 태릉(泰陵)과, 태릉으로부터 동쪽으로 1km 정도 떨어져 있는 조선 제13대 왕 명종, 명종비 인순왕후가 함께 잠든 강릉(康陵)과 합쳐 부르는 말이다.

사적 제201호로 지정되어 있다.

2. 상세

주변에는 태릉선수촌삼육대학교, 서울여자대학교, 육군사관학교가 있다. 태릉에서 입장권을 발권하여 태릉을 관람한 후 강릉으로 가려면 해당 입장권을 들고 강릉 매표소에서 보여 주어야 한다. 강릉 입구는 삼육대학교 정문 바로 옆에 붙어 있기 때문에 찾기가 힘들다면 삼육대학교 정문을 찾아가면 된다.

강릉의 경우, 2007년까지는 비공개 능역이었지만 2008년에 40년만에 부분 개방제로 바뀌었다. 한때 7월과 8월, 12월~2월까지는 산불 예방과 관람객 안전을 위해 개방하지 않았지만, 현재는 사계절 내내 관람이 가능하다.

현재는 태릉과 강릉이 연결 되어 있고, 봄(5, 6월), 가을(10, 11월)에 왕복이 가능하다.# 그리고 태강릉으로 묶여 입장권은 한장만 사면 두 곳 다 입장 가능하다.

3. 역사


임진왜란 때 왜군이 태강릉에도 도굴을 시도했는데, 태강릉 모두 너무 단단해서 도굴을 포기했다. 그러나 한국 전쟁 때는 태릉의 정자각이 불타는 피해를 입어 1994년에 복원했다. 이 때문에 과거 사진들 중에서 정자각이 없는 사진도 있다.#

4. 태릉(泰陵)

파일:태릉문정왕후.jpg

조선 제11대 왕 중종의 제2계비인 문정왕후가 묻힌 능으로, 단릉(單陵) 형식으로 조성되었다.

무덤은 십이지신과 구름무늬가 새겨진 12면으로 된 병풍석이 둘러져 있다. 무덤 앞에는 상석·망주석 등이 『국조오례의』에 따라 제작되었다. 사람모양의 돌조각상(석인)은 4등신으로 입체감이 표현되지 않았는데, 당시 석인의 특징을 보여준다.

만석에는 십이간지를 문자로 새겨놓았다. 원래 십이간지가 문자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병풍석을 없애고 신상을 대체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등장한 것인데, 태릉을 시작으로 신상과 문자가 함께 새겨져 있다. 그 밖에 석양, 석호,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문무석인, 석마 등을 봉분 주위와 앞에 배치하였다. 문석인은 두 손으로는 홀(笏)을 공손히 맞잡고 있는데, 왼편의 문석인의 경우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고 있는 반면 오른편의 문석인은 그 반대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능침 아래에는 홍살문, 판위, 향·어로, 수복방,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었으며, 정자각은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94년에 복원하였다.

태릉은 왕비의 단릉이라 믿기 힘들 만큼 웅장한 능으로, 조성 당시 문정왕후의 권세가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실제 명종은 모친의 장례를 왕후의 예법이 아닌 왕의 예법을 따르라고 명했다.[1] 능의 규모에 걸맞게 주변 조경도 잘되어 있어 현대에는 노원구 주민들의 나들이 장소로 애용된다. 참고로 노원구 주민에게는 입장료가 할인된다.

본래 문정왕후는 현재의 강남구 삼성동에 조성된 중종의 능인 정릉에 함께 묻히고 싶어 했으나, 정릉 근처가 지대가 낮아[2] 여름에 비만 오면 침수되었다 하여 결국 강남의 정릉이 아닌 노원구의 태릉에 묻혔다. 당시 침수가 되면 정자각 앞에 배가 떠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침수가 잦자 다시 묏자리를 옮기려고 하였으나 "거듭해서 묏자리를 옮기는 것은 불가하다"는 이유로 상소가 쏟아져서 중단되었을 정도로 당시에도 그런 이야기는 별로 먹히지도 않았다. 풍수지리가 맞건 틀리건 생전에 그만큼 문정왕후가 아들을 죽도록 들볶아 댔던 탓도 크다.

야사에서는 문정왕후가 죽은 뒤, 문정왕후의 무덤을 정릉으로 정했는데, 마침 한강에 큰 물이 들어 정릉이 잠겼다. 그러자 명종은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묻히길 거부하시는구나!' 하며 결국 현재의 공릉동 태릉 자리로 묫자리를 옮겼다는 이야기다.

5. 강릉(康陵)

파일:서울_태릉과_강릉_강릉_정자각 문화재청.jpg
파일:강릉.jpg

조선 제13대 왕 명종, 명종비 인순왕후가 묻힌 능으로, 쌍릉(雙陵) 형식으로 되어 있다.

봉분에는 태릉과 같이 병풍석과 난간석을 모두 둘렀고,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 석호, 석마, 문무석인 등을 배치하였다. 능침아래에는 홍살문, 향·어로, 정자각, 비각이 있고, 정자각 왼편에는 둥근 어정(御井)이 있다. 어정이란 왕이 마실 물을 위해 판 우물을 말한다. 광릉, 숭릉 등지에서도 볼 수 있다.

1567년에 명종이 죽자 이곳을 왕릉 터로 정하였다. 1575년 왕후릉은 명종릉의 좌편에 앉혀 쌍릉을 이루게 하였다. 선릉, 건원릉, 헌릉을 본뜬 16세기 복고풍의 특색을 잘 나타낸다.

어엿한 왕릉이건만 근처에 있는 어머니의 능인 태릉이 훨씬 더 유명하다. 아예 태릉이라는 능호 자체가 지명으로 쓰이기도 할 정도이고, 거리는 멀지만 태릉에서 이름을 딴 태릉입구역이라는 지하철역까지 있어서 인지도는 유명한 편이다. 그에 비해 명종의 강릉은 한때 접근이 제한된 탓도 있겠지만 인지도가 떨어진다. 또 태릉은 산림 사이사이로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어 유료 공원으로서의 가치도 있지만, 강릉에는 정말 능과 부속 건물밖에 없어서 답사 외의 목적으로는 딱히 방문할 이유를 찾기 어렵다.

6. 교통

연계노선은 시내버스론 서울 버스 202, 서울 버스 1155, 서울 버스 2212, 남양주 버스 115가 있으며, 마을버스는 남양주 버스 82(A/B)를 이용하면 된다. 지하철을 통한 교통편으로는 서울 지하철 6호선 화랑대역이 가까우나 실제 거리론 버스환승이 필수이며, 전 역과 전전역인 태릉입구역, 석계역에서 202번과 82번[3]을 제외한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7. 여담

태릉은 세조의 광릉[4], 성종의 선릉, 신덕왕후의 정릉, 명성황후가 처음에 묻혀 있었던 홍릉[5] 등과 더불어 지명화 된 조선왕릉들 중 하나이다.

희한하게 이곳을 [태릉]이 아니라 '[태능]'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었고 특히 태릉선수촌을 '태능선수촌'이라고 발음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잘못된 발음이다. 태릉의 '태'는 받침이 없고 첫 글자의 모음(ㅐ)과 그 다음 글자의 자음(ㄹ)이 서로 이어지기 때문에 자음동화 현상이 발생하지 않는다. 정릉이나 홍릉 등은 앞글자에 받침이 있기 때문에 뒤의 '릉'이 '능'으로 발음됐지만 태릉은 문자 그래도 [태릉]이라고 발음해야 한다.

예전에는 태릉 인근에 사격진흥회가 운영하던 클레이사격장, 태릉 이스턴 캐슬(舊 푸른동산)이라는 일종의 유원지 비스무리한게[6] 있었으나 이스턴 캐슬 中 수영장과 눈썰매장은 2012년에 능역복원사업으로 인해 철거되었으며 웨딩홀과 목우촌마을은 좀 더 버티다가 2014년을 끝으로 없어졌다. 다만 사격장 자체는 아직도 남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1] 예를 8대 임금 예종의 정비였던 장순왕후가 묻힌 공릉(恭陵)이나 9대 임금 성종의 정비였던 공혜왕후가 묻힌 순릉(順陵)등과 비교하면 그 크기는 더더욱 비교된다. 장순왕후의 경우 세자빈일 때 죽었고 따라서 공릉 역시 원래는 능이 아니고 원이었던지라 단출한 게 정상이지만.[2] 원래 강남구 일대는 상습 침수 지역이라 묏자리로 쓰기에는 문제가 많았다. 한강을 정비하고 비상대책이 잘 세워진 지금조차 서울에 홍수 난다 싶으면 가장 먼저 물이 차는 곳이 강남구인데 저때는 말해봤지 입만 아플 테니...[3] 태릉입구역 -> 태릉은 이용 가능하지만 반대로는 이용할 수 없다.[4] 공교롭게도 원래 태릉(泰陵)이란 능호는 이쪽의 능호가 될 뻔했다. 하지만 신숙주의 반대로 광릉(光陵)으로 정해진 것.[5] 최초에는 명성황후의 능이 고려대학교와 경희대학교 사이에 있었으며, 홍릉 수목원이나 홍릉 갈비 등의 이름으로 현재까지 남아있다. 현재는 남양주시 금곡동에 고종과 함께 묻혀 있다. 한편 현재 옛 홍릉 자리에는 고종의 후궁 순헌귀비 엄씨의 영휘원과 영친왕의 장남 이진의 무덤인 숭인원이 조성되어 있다.[6] (하계)워터캐슬(수영장) + (동계)눈썰매장 + 웨딩홀(뷔페) + 목우촌마을로 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