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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9 06:40:41

쿠시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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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시 왕국
Kingdom of Kush
파일:쿠시왕국 최대영토.jpg
쿠시 왕국의 최대 강역
BCE 1070 ~ AD 550
위치 수단 공화국, 이집트
수도 케르마, 나파타, 메로에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 원수 [1]
주요 군주 피이
셰비쿠
샤바카
타하르카
언어 메로에어, 누비아어, 고대 이집트어, 쿠시어
종교 쿠시 전통 종교
고대 이집트 종교
주요 사건 BCE 1070년 건국
BCE 744년 이집트 제25왕조 시작
BCE 656년 이집트 제25왕조 몰락
AD 550년 경 멸망
성립 이전 이집트 신왕국
멸망 이후 노바티아, 마쿠리아, 알로디아, 악숨 왕국
메로이트어 Qes
고전 이집트어 𓎡𓄿𓈙𓈉
콥트어 ⲉϭⲱϣ

1. 개요2. 이름3. 역사
3.1. 초기 역사3.2. 쿠시 왕국의 등장과 이집트 정복3.3. 후기 역사
4. 역대 국왕
4.1. 나파타 시대4.2. 메로에 시대
5.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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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1,000년경에 상부 누비아에서 건국한 고대 왕국. 기원전 8세기에 분열되고 쇠약해진 고대 이집트를 정복하고 제25왕조를 세우며 위명을 떨쳤으나, 50년 정도의 짧은 통치기 후 아시리아의 침략으로 이집트에서 밀려나 누비아로 돌아갔다. 이후 이집트를 정복한 아케메네스 왕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로마 제국과 전쟁과 무역 활동을 번갈아 하며 교역을 이어가다가 3~4세기에 내우외환에 시달리다가 노바티아, 마쿠리아, 알로디아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2. 이름

고대 이집트인들은 자신들의 거주지 남쪽에 사는 원주민들을 "kꜣš"라고 지칭했으며, 원주민들이 사는 지역을 타-세티(Ta-Sety: 활의 땅[2])라고 지칭했다. 고대 이집트어에서는 모음이 쓰이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발음은 알 수 없지만, 훗날 이집트에 자리잡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이끈 그리스인들이 쿠시(Kusi)라고 불렀던 것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정작 쿠시인들이 자기 나라를 뭐라고 불렀는지는 불명확하나, 그들이 이집트를 정복한 뒤 세운 비석에 '쿠시'라는 명칭이 쓰인 걸 볼 때 이집트와 오랜 세월 상호교류하면서 쿠시라는 용어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쿠시 지역은 이집트인들에게 금의 주요 공급원이었다. 이집트인들은 금을 '누브'라고 불렀는데, 여기에서 '누비아'라는 용어가 탄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7세기 이후 이집트와 무역을 하던 그리스인들은 쿠시 왕국을 "불탄 얼굴"이라는 뜻의 ''아이티오피아(Αἰθιοπία)"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쿠시 왕국이 악숨 왕국에 병합되면서, 아이티오피아라는 이름은 공교롭게도 이후 쿠시 왕국의 후신인 수단 공화국이 아닌 그 이웃 국가인 에티오피아의 어원이 된다.

3. 역사

파일:Kush123.jpg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부조에 묘사된 쿠시 왕국 사절단

3.1. 초기 역사

기원전 2400년경, 케르마 문화가 등장했다. 이 문화는 초기에는 상부 누비아(현재 수단 북부와 중부)에 발현되었다가 나중에 하부 누비아와 고대 이집트 남쪽 경계까지 이르렀다. 이집트 비석에는 누비아인들의 침략에 대한 기록이 많이 적혀 있으며, 그들의 습격을 격퇴하기 위해 지어진 강력한 요새도 여러 개 발견되었다. 물론 이집트와 케르마 문화는 무력 충돌만 벌인 게 아니라 무역 거래도 꾸준히 수행했다. 이집트는 금, 흑단, 향, 이색적인 동물, 상아의 수입을 케르마에 의존했다.

케르마 문화의 중심지인 케르마 시는 18미터 높이의 진흙 벽돌로 만들어진 요새화된 종교 중심지인 데푸파(deffufa)를 중심으로 했다. 입구에서 내부 통로와 계단을 통해 평평한 지붕 위의 제단으로 이어져 제사가 행해졌지만, 제사가 어떤 방식으로 이뤄졌는지는 불명확하다. 케르마에는 3개의 데푸파가 있었는데, 그 중 가장 큰 데푸파는 오늘날 "서쪽의 데푸파"로 일컬어진다.

기원전 2060년에서 기원전 2009년에 재위했던 이집트 중왕국 제11왕조 6대 파라오 멘투호테프 2세가 누비아 지역을 정복했지만, 케르마는 번영하는 도시로 남아있었다. 힉소스인이 나일강 삼각주 일대를 정복하고 이집트인들은 상이집트로 밀려났던 이집트 제2중간기 시기에, 케르마의 쿠시인들은 남쪽 경계를 수시로 침공해 약탈을 자행하는 등 이집트인들을 괴롭히면서도 테베에 자리잡은 이집트인들과 무역을 이어갔다.

기원전 1500년대에 힉소스를 몰아낸 이집트 신왕국은 쿠시인들을 잇따라 정벌했고, 케르마 문화는 압도적인 국력으로 밀어붙이는 이집트군에 밀려 쇠락했다. 기원전 1458년에서 1425년까지 집권한 투트모세 3세는 누비아를 최종적으로 평정하고 총독을 세운 뒤, 나파타 시를 새로 짓고 자신의 승리를 대내외에 과시했다. 쿠시인들은 이집트의 지배에 맞서 수 세기 동안 반란을 일으켰지만, 이집트군에게 번번이 제압되었고 누비아 전역이 점차 이집트화되었다. 역대 신왕국 파라오들은 나파타 인근의 게벨 바르칼아문 신전을 짓고 이곳에서 주요 의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3.2. 쿠시 왕국의 등장과 이집트 정복

기원전 1077년경 이집트 제3중간기가 시작되면서 이집트는 여러 세력으로 쪼개졌고[3], 바다 민족에 의해 무역 체계가 마비되면서 경제 상황이 악화된다. 여기에 삼각주 외 영토를 완전히 상실하며 국력이 급격하게 쇠락했고 자연스럽게 누비아 일대를 지배하던 이집트의 힘이 약해졌다. 쿠시인들은 이 때를 틈타 이집트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행보를 걸었다. 쿠시 왕들은 처음에는 케르마에서 통치를 행사했지만, 나중에는 이집트 총독이 있던 나파타를 자신들의 영역으로 확보한 뒤 그곳을 수도로 삼았다.

훗날 이집트를 정복한 25왕조의 비문 기록에 따르면, 이 시기에 알라라라는 인물이 나파타를 쿠시의 종교 수도로 삼고 누비아 전역을 지배했다고 한다. 알라라가 언제 통치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쿠시 왕국의 시조로서 25왕조 내내 신격화되었다. 알라라의 후임자인 카슈타는 이집트 문화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품고 이집트 문물을 수입하여 쿠시 왕국의 이집트화를 이끌었다. 카슈타는 테베를 장악하여 상이집트 지역에서 쿠시 왕국의 영향력을 강화시켰고, 당대 테베의 아문신의 대신녀인 셰페누페트 1세(제23왕조 파라오인 오소르콘 3세의 친딸)에게 자신의 딸인 아메니르니스를 양딸로 들이도록 했다.[4] 카슈타는 일반적으로 25왕조의 초대 군주로 거론된다.

카슈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피이(기원전 746년 ~ 기원전 716년 이후)는 대대적인 군사 원정을 단행해 이집트의 모든 도시를 정복한 뒤 나파타로 귀환하여 승리를 기념하는 비문을 세웠다. 그는 정복된 왕들이 그들의 왕좌를 유지하는 걸 허용하는 대신 자신을 주권자로 인정하게 했다. 피이의 아들 셰비쿠(기원전 716년 이후 ~ 기원전 706년 이후)는 하 이집트 왕족들의 반란을 물리치고 델타 지역에 이르기까지 하 이집트 전역에 쿠시 왕국의 지배를 확고히 했다. 그는 아버지와 형만큼 이집트 문화를 동경했고, 이집트의 전통 신앙을 존중했다. 아들 하레마케트를 테베에 있는 아문의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여 이집트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만들었고, 이집트 전역에서 내란으로 파괴된 건물을 재건하고 새 건물을 건설하는 사업을 개시했다.

셰비쿠의 후계자 샤바카(기원전 706년 이후 ~ 기원전 690년)는 선임자의 건설 프로젝트를 이어갔으며, 아시리아의 위협에 대항하여 유대 왕국을 지원하는 등 이집트를 지키고자 노력했다. 기원전 690년 샤바카의 뒤를 이어 파라오에 오른 타하르카(기원전 690년 ~기원전 664년)의 재위 기간 동안 나일 강이 마침 딱 알맞은 수준으로 범람했다고 전해지며, 덕분에 수확량이 굉장히 풍족해지면서 사람들의 삶은 이전보다 훨씬 살기 좋아졌다. 타하르카는 완전히 이집트화가 되어버린 파라오였기에 아문의 대신전에 막대한 양의 황금을 기부하면서 신관 계급들의 호감을 샀고, 그의 시대에 제25왕조는 옛 이집트 신왕국의 영화에 비견될 정도로 강력한 국력을 자랑했다. 특히 누비아와 이집트의 건축 양식을 섞어 축조한 피라미드들은 아직까지도 이집트의 대표적인 문화유적으로 남아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기원전 671년, 에사르하돈이 이끄는 아시리아군이 이집트로 쳐들어오면서 모든 게 무너졌다. 타하르카는 에사르하돈 왕과의 전투에서 대패해 남쪽으로 밀려났고, 아시리아는 하이집트 일대를 정복하고 수많은 이집트인을 끌고 갔다. 타하르카는 남쪽의 테베로 잠시 피난을 갔다가 쿠시 지방에 있었던 증원군을 모아 반격을 가해 아시리아군을 일시적으로 몰아냈지만, 에사르하돈이 군대를 수습하고 대공세를 펼치자 다시 쫓겨났다. 에사르하돈은 북부의 멤피스를 포함해 대부분의 강역을 정복하고 타하르카의 가족과 궁정 신하 대부분을 포로로 잡아 니네베로 끌고 갔다.

타하르카는 전열을 재정비해 기원전 669년 멤피스를 탈환했다. 에사르하돈은 바로 이집트에 재원정을 떠났으나 원정 도중 세상을 떠났고, 그 뒤를 이어 아시리아 전성기의 정복군주였던 아슈르바니팔이 왕위에 올랐다. 아슈르바니팔은 결국 타하르카를 꺾고 이번에는 남부의 테베까지 함락시키면서 마침내 이집트 전체를 정복했다. 아슈르바니팔은 사이스를 수도로 삼고 네카우 1세를 새 파라오로 앉혀놓은 뒤 물러났다. 그러나 사이스의 귀족들 일부는 이집트와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정복자 아시리아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직 살아있었던 파라오 타하르카에 대한 충성심이 남아있었기에 아시리아에 대한 반란을 기획했고, 이를 눈치챈 아슈르바니팔은 바로 반란을 진압했다.

아시리아를 피해 남쪽으로 도망간 타하르카는 기원전 664년 테베에서 사망했다. 타하르카가 죽자 그가 지명한 후계자인 타누타멘(기원전 664년 ~ 기원전 653년)이 제25왕조의 마지막 파라오로 즉위했다. 티누타멘은 군대를 모아 북부로 진격해 아시리아군을 몰아내고 멤피스를 포함한 이집트의 상당 부분을 회복했고 그 과정에서 아시리아의 대리인이었던 네코 1세를 처단했다. 아슈르바니팔은 바로 이집트로 돌아와 네코 1세의 후계자였던 프삼티크 1세와 함께 연합군을 꾸려 타누타멘의 군대를 공격했다. 멤피스 북쪽에서 대전투가 일어났고, 이 전투에서 결국 타누테멘의 군대가 패배했다. 타누테멘은 쿠시로 도주했고, 상이집트의 중심지인 테베에 도착한 아슈르바니팔은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테베에 무자비한 약탈을 감행했다. 이 약탈로 인해 엄청난 양의 금은보화가 유출되었고 수많은 이집트인들이 노예로 끌려갔다. 신전들은 불타 내려앉았고 왕궁은 무너졌다. 그리하여 쿠시 왕국의 이집트 지배는 끝났다.

3.3. 후기 역사

이집트에서 밀려난 쿠시 왕국은 프삼티크 1세의 뒤이은 원정으로 수도 나파타가 파괴되는 참화를 겪은 뒤 기원전 590년경 안전을 위해 남쪽의 메로에로 천도했다. 메로에에 군림한 쿠시 왕들은 과거의 영화를 잊지 못한 채 무덤을 피라미드로 세웠으며, 이집트의 관습과 복장을 모방했다. 또한 아문 제사장들은 여전히 강력한 권세를 누렸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아문 제사장들은 그들의 신이 왕들에게 통치할 시간을 정해줬다며, "그 시간이 끝났을 때" 신의 계시에 따라 왕을 즉시 폐위하고 새 왕을 세웠다고 한다.

시켈로스에 따르면, 기원전 270년대에 집권한 아라카마니 1세는 그리스 철학을 교육했고, 사제들의 미신에 지배받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이끌고 신전으로 가서 모든 아문 사제들을 학살해 아문 제사를 끝냈다. 이후 이집트 문화를 포기하고 쿠시 왕국 본연의 문화에 초점을 맞췄다. 특히 이집트 상형 문자를 버리고 메로이트 문자로 알려진 다른 문자를 사용했다고 한다. 이후 기존에 섬기던 이집트 신들은 아페데막과 같은 쿠시 신들에 동화되었고, 나파타에 왕족을 매장하는 전통은 사라지고 메로에가 새 매장지로 지정되었다.

쿠시 왕국 후기 역사의 색다른 특징은 여왕이 지속적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칸다케'로 알려진 이 여왕들은 기원전 2세기부터 서기 4세기까지 꾸준히 등장했다. 칸다케는 "왕모(王母)"를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다. 이 여왕들은 주로 종교 행사를 맡았던 것으로 보이나, 때로는 남성 군주처럼 군대를 진두지휘해 전장에서 활약했다. 기원전 170년경에 등장한 샤나크다케테(Shanakdakhete)는 온 몸을 갑주로 덮은 채 최전선에서 용맹을 떨쳤다고 전해진다.

나일 강둑에 자리잡은 메로에는 쿠시 왕국의 수도이자 농업과 산업의 중심지였으며, 철공업과 무역을 통해 부유하게 성장했다. 곡물은 철제 무기 및 도구와 함께 수출되었고, 가축들은 도시 주변의 들판을 돌아다녔다. 이집트를 정복한 아케메네스 왕조샤한샤 캄비세스 2세는 메로에의 막대한 부에 대해 전해듣고 원정을 감행했지만, 보급 계획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아 보급난에 시달렸고 지형과 날씨에 적응하지 못한 병사들이 대거 죽어나가면서 실패했다.

기원전 30년, 로마 제국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무너뜨리고 이집트를 장악했다. 이 일은 오랫동안 이집트와 교류했던 쿠시 왕국에 심대한 충격을 안겼다. 그들은 새로운 외세와 국경을 마주하게 된 것에 긴장했고, 그들이 이집트를 넘어 자기들까지 정복하려 들 것을 우려했다. 당시 쿠시 왕국을 다스리던 아마니레나스 여왕은 로마인들이 쿠시 왕국까지 정복하려 들 것을 우려했다. 그러던 기원전 26년 새 이집트 행정관에 임명된 가이우스 아일리우스 갈루스가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에 따라 아라비아로 출정하면서 이집트의 방비가 약해지자, 아마니레나스 여왕은 이 틈을 타 이집트로 쳐들어가서 큰 타격을 입힘으로써 로마가 쿠시 왕국을 만만히 보지 못하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기원전 25년, 아마니레나스 여왕은 3만 병력을 이끌고 나일강을 따라 북상하여 시에네, 필레, 엘리펀틴을 포함한 트리아콘타스코이노스(Triakontaschoinos) 지역 전체를 정복했다. 이에 갈루스를 대신하여 대행 이집트 행정관을 맡고 있던 가이우스(또는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에 따라 1만 보병대와 800 기병대를 이끌고 쿠시 왕국으로 쳐들어가면서, 쿠시-로마 전쟁이 발발했다. 로마군은 쿠시군을 어렵지 않게 격파했지만, 지나치게 무더운 기후를 이겨내지 못하고 다시 로마로 귀환했다. 이후 아마니레나스가 반격하고 페트로니우스가 방어하면서 소모전 양상으로 흘러가자, 기원전 22년 아우구스투스는 쿠시 왕국과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양국은 아스완을 양국의 국경으로 정했으며, 로마는 쿠시 왕국의 주권을 인정하며 모든 공물 요구를 면제했다.

일설에 따르면, 로마 황제 네로는 쿠시 왕국을 정벌하기 위한 원정을 계획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66년에 나일 강의 수원을 찾아내기 위해 200명을 바르 알 가잘 강까지 보냈다는 기록은 전해진다. 이들은 백나일강을 거슬러 오늘날의 남수단에 해당하는 수드 지역의 늪지대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원정군은 지나치게 무더운 기후로 지친 나머지 식민지 건설을 포기하고 탐사 결과만 가지고 다시 귀환하였다.

서기 1세기에는 쿠시 왕국 남부의 에티오피아 고원 일대의 강우량이 증가하면서 에티오피아 고원 지역 인구가 증가하고, 이렇게 증가한 인구를 바탕으로 악숨 왕국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쿠시 왕국 역시 점차 영토와 영향력을 상실하고 몰락하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기 3~4세기 로마 제국이 갖가지 내우외환을 겪던 당시 쿠시 왕국의 군대는 로마 제국의 변경을 다시금 침공하였으나 격퇴되었다. 이후 자연재해와 내부의 반란으로 인해 약화되다가 320년경 상아 무역을 놓고 악숨 왕국과 전쟁을 벌였다가 메로에가 함락당해 철저히 약탈당하는 참상을 겪었다. 그 후 쿠시 왕국은 노바티아, 마쿠리아, 알로디아의 세 세력으로 분열되었다. 이중 알로디아 왕국이 에리트리아의 일부를 포함한 옛 쿠시 왕국의 남부 영토를 유지하며 6세기까지 버텼으며, 나중에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러나 6세기 중반에 아랍인들의 침략을 받고 멸망했다.
나머지 왕국중 노바티아는 900년대 말에 마쿠리아 왕국에 병합당했고 마쿠리아는 16세기 초반까지 존속한다.


다만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알로디아 왕국은 마쿠리아 왕국처럼 1500년까지 존속했다고 한다.

4. 역대 국왕

4.1. 나파타 시대

4.2. 메로에 시대

5. 창작물에서



[1] 제25왕조 한정으로 파라오 직을 겸임.[2] 쿠시인들이 을 매우 잘 쐈으며, 이집트 정복 당시 궁사들이 전투에서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집트인들은 쿠시 궁수가 너무나 정확해서 '눈의 동공을 강타하는 자들(pupil smiters)'로 불렀다고 한다.[3] 당시 테베의 대제사장들이 상 이집트를 독자적으로 통치했고, 파라오는 타니스 시에서 하 이집트를 통치했다.[4] 이집트 제3중간기 시대에 테베의 아문의 대신녀직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상징성이 있었다. 파라오의 친딸이 임명되었고 그 후계자는 전임자가 후임자를 사전에 양녀로 들이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후계자로 입양된 여성의 아버지는 차기 파라오라는 의미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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