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쟁 준비
태평양 전쟁/배경에서 일본 제국이 미국과 전쟁을 할 요건이 갖추어지자 일본군은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돌입힌다.1.1. 일본의 준비
미국과의 결전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일본군 수뇌부는 남방작전을 수립하여 동남아시아 지역의 유전을 확보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정하였다. 하지만 일본 연합함대 총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남방작전 이전에 미국 태평양 함대를 먼저 공격해두지 않으면 남방작전 내내 두고두고 골칫거리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야마모토 제독의 주장은 일본군 수뇌부 내에서도 논란이 있었다. 당시 일본 제국 해군의 기본적인 대미작전 개념은 점감(漸減)전법으로 개전 후 서진(西進)하는 미국 해군 함대를 잠수함과 항공기로 위치를 파악하고 잠수함과 항공기로 이들에게 1차 손해를 준 후에 이어서 순양함과 구축함 전대를 동원하는 야간전투에서 2차 손해를 준 후 전함간 포격전으로 미군 함대를 최종적으로 격퇴한다는 것이었다.
해당 작전을 위해서는 미국이 대규모 함대를 집결시킨 후 일본이 매복한 해역으로 전진시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전제가 붙기 때문에 점감요격작전이 진행중인 상태에서는 남방작전은 실행이 불가능하거나 몇 척의 군함과 수십대의 항공기 정도의 매우 빈약한 지원만 가지고 진행해야 하는 무리수가 작렬한다. 또한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일본이 동남아로 가기 위해서는 오랜기간 종속시켜온 오키나와와 청일전쟁 이후 획득한 대만을 지나서 필리핀 앞바다(가끔씩 뉴스에 나오는 분쟁지역 남중국해)를 지나가야 한다. 그런데 당시 필리핀은 미국의 영역이였으니 미국과의 관계가 전쟁으로 가게 된다면 동남아로의 진출은 그냥 불가능하다. 어찌어찌 필리핀을 점령해도, 이후 태평양 함대가 필리핀으로 올지, 오키나와로 올지, 아님 본토로 직공할지 모르기에 진출이 가능하지 않다. 설령 필리핀을 일본이 함락했더라도 미국이 괌을 중간 보급으로 삼으면 세 곳 중 어디라도 공격이 가능하고, 전쟁 후반에 실제로 사용된 폭격기들의 비행출격지로도 가능하기에 일본은 전쟁 할 방법이 없다.
여기에 더해서 점감요격작전의 근본적인 문제는 미군이 일본군의 예상대로 움직인다는 보장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지만 어처구니없게도 미국 해군도 일본 해군과 유사한 작전개념안을 가지고 있었다. 즉 선전포고를 먼저 하고 실제 전투는 나중에 진행할 경우 미군도 일본군과 비슷하게 공세적으로 행동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이야기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미군이 일본이 예상한 경로 그대로 진격하지 않고 남방작전을 하러 떠나는 일본군을 측면에서 때린다든지 하는 방향으로 진격할 가능성도 높았다.
실제로 1941년 6월부터 남방작전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에 들어가기 시작했으나 하와이를 공격하는 작전을 연합함대사령부에서 강력하게 요청하기 시작했고 1941년 8월 7일에는 군령부에 연합함대 참모가 방문하여 작전계획의 지시를 요청했으나 하와이 공격 작전이 빠진 것을 발견하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군령부는 미국 태평양함대가 서쪽으로 전진하더라도 남방작전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며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했고 연합함대는 미국 태평양함대를 처리하지 않으면 향후 작전을 진행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양자의 대립이 팽팽했다.
1941년 9월 11일부터 9월 20일까지 해군대학교에서 군령부가 주장한 방식으로 도상연습이 실시되었다. 결과가 매우 심각하여 남방작전 수행시 보유한 제로센의 160%와 보유한 육상공격기의 40%가 소멸하고 보충도 불가능한 상황에 몰린다. 사실상 일본 제국 해군 항공대가 완전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것도 모자라서 일본 제국 육군 항공대까지 모두 동원해도 손실량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이며 당연하게도 남방작전은 망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모든 항공모함을 남방작전에 투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여기에 대해서 연합함대는 미국 태평양함대가 남방작전을 수행하는 지역에 도착하지 않으면 된다고 주장하면서 하와이 공습작전을 주장한다. 그래서 다음 순서로 하와이 공습 특별 도상연습이 진행되었는데 미국 전함 4척 격침과 미국 항공모함 2척 중 1척을 파괴하였으나 일본군 항공모함 3척이 격침되고 1척이 대파되기 때문에 일본군의 항공모함 기동부대가 전멸하는 결과가 도출되었다. 미국 태평양함대를 저지하는 목적은 달성하지만 일본군도 큰 타격을 입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 해군의 머리가 굳으신 높으신 분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게다가 어디까지나 대구경 함포를 장착한 전함이 해군의 주력이라는 사상을 지녔던 다른 제독들도 반대 의사를 표시하였다.
그러나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강한 자신감을 보였고 남방작전으로 일본 제국 해군의 주력이 남쪽으로 내려간 사이에 미국이 도쿄나 오사카를 공격할 가능성을 제시한데다가 무엇보다 승인을 해주지 않으면 연합함대 사령관을 사퇴하겠다고 나오는 바람에 결국 수뇌부도 야마모토 제독의 의견을 수용하여 남방작전과 동시에 진주만 공습을 실시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일본이 진주만 공습에 앞서 연구한 것은 바로 영국 해군이 이탈리아 왕립 해군을 상대로 승리한 타란토 공습이었다. 그 결과 진주만과 타란토의 조건이 거의 유사하기 때문에 어뢰를 통한 공격이 가능하며 400기 정도의 항공기와 숙련된 조종사만 동원한다면 진주만 공습도 성공할 것이란 결론을 도출했다.
이에 따라 일본 제국 해군의 조종사들은 여름부터 철갑탄을 이용한 폭격과 뇌격훈련에 돌입하였다. 더불어 진주만의 지형을 그대로 옮긴 모형을 보여주면서 지형을 익히도록 하였으며 정확하게 미국의 전함과 항공모함을 식별할 수 있는 훈련도 병행하였다. 그리고 훈련장소도 진주만과 비슷한 지형을 보이는 가고시마시 지역의 가고시마만에서 실시하였다.
여기에 더해서 항공어뢰와 항공폭탄을 특별하게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진주만의 수심이 12m 수준으로 너무 얕아서 기존의 항공어뢰처럼 투하시 수심 60m까지 들어갔다가 얕은 수심으로 복귀하는 경우에는 그대로 해저 바닥에 어뢰가 박히면서 뇌격이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래서 91식 항공어뢰를 개조해서 자이로스코프를 개선하고 스태빌라이저를 개조하며 별도의 나무보조판을 설치한 끝에 투하시 어뢰가 수심 10m 이내로만 들어가도록 만들었다. 해당 어뢰는 1941년 10월 30일에 5발에서 10발을 생산해서 훈련중인 뇌격대에 보급했고 1941년 11월 17일에 100발의 개조어뢰를 작전 개시 전에 간신히 납품했다. 진주만 공습에서 40발의 항공어뢰를 사용했는데 그 중에서 너무 깊게 잠수해서 작동하지 못한 어뢰는 1발뿐이었다.
항공폭탄의 경우에는 급강하폭격기인 99식 함상폭격기가 탑재 가능한 한도인 250kg의 폭탄으로는 전함의 갑판장갑을 관통하는 것이 불가능했으므로 뇌격기인 97식 함상공격기가 보유한 탑재량인 800kg을 이용하여 나가토급 전함의 구식 철갑탄인 410mm 구경의 88식 철갑탄을 항공폭탄으로 개조해서 탑재한다. 그래서 97식 함상공격기는 뇌격기와 수평폭격기대로 나누어져서 투입되며 보조함등의 목표에는 99식 함상폭격기가 250kg 항공폭탄을 탑재해서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이와 동시에 일본군 정보계통도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태평양 함대의 정보를 수집하였다. 요시카와 타케오라는 해군 소위 출신 첩보원이 모리무라 타다시(森村正)라는 가명을 사용하면서 돈많은 한량 외교관으로 위장하여 진주만 일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일본으로 보내 공습이 성공하는 데 일조하였다.[1]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한량짓을 하면서 호놀룰루 주재 일본 영사관에는 이름만 내걸고 술잔치를 벌리면서 누가 보더라도 돈많은 고위층 자제가 경력만 쌓으려고 잠시동안 외교관으로 부임한 것처럼 보여서 미국의 감시를 회피함과 동시에 진주만이 내려다보이는 다양한 지점을 몰래 왕래하는 방식으로 어디에 항공기지가 설치되어 있고 어느 군함이 어디에 정박하고 있는가에 대한 정보까지 모두 전달되었다. 게다가 태평양 함대의 모든 군함이 토요일에 입항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가장 최적의 공격시간이 일요일 새벽이란 보고서를 올릴 수 있었다. 이상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일본군 수뇌부는 1941년 11월 17일에 공격하기로 결정하였으나 몇 가지 사정이 겹쳐서 결국 12월 7일이 최종적인 공격일로 확정되었다.
작전일이 확정되자 야마모토 제독은 제1항공함대를 주축으로 나구모 주이치 제독이 지휘하는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조직하였다. 무엇보다 작전이 노출되면 안 되었기 때문에 11월 22일까지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쿠릴 열도 의 이투루프 섬에 위치한 히토캇푸 만(単冠湾)으로 집결할 것을 명령하였으며 항해 중에는 절대 무선교신을 해선 안 된다는 엄중한 경고가 내려졌다. 게다가 승조원들에게는 어디로 가기 위해 모인다는 정보조차 제공하지 않았다. 더불어 집결지인 히도캇푸 만은 미국 첩보원들이 전혀 파악하지 못한 변방의 조그만 항구였으며 이미 1941년 11월 20일부터 해당 지역의 통신을 담당하는 우체국에 선발대가 도착해서 전신선과 전화선을 차단하고 주민들에게 항만에 있는 군함에 관심을 가지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서 기밀엄수에 성공한다. 주민들도 집결하는 군함들이 소련 침공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완벽한 수준의 기밀유지에 성공했다.
11월 26일, 군함들이 한 척씩 따로 빠져나가는 방식을 채택하여 진주만을 향해 닻을 올렸다. 더불어 항로 역시 민간상선이 전혀 다니지 않는 곳과 미국 정찰기가 비행하지 않는 곳 위주로 선정하여 항해했으며 선박이 배출하는 배기가스로 인해 발각될 수 있다는 이유로 모든 군함의 연료로 경유를 사용하는 철두철미함을 보였다.[2] 태평양을 우회한 함선도 있고, 동해를 지난 함선도 있으며 전파 발신을 통제하고 전신키를 봉인 할 정도로 신중하였다. 그리고 히류나 소류처럼 작전에 참가하기에는 항속거리가 부족한 군함들도 있었으나 일본 제국 해군의 상층부가 묵인하는 가운데 갑판에 드럼통 등을 적재하여 추가연료를 적재하는 방식으로 작전에 투입된다.
제1항공함대 비행대가 철수한 규슈 남부의 각 기지에는 다음날 바로 규슈 북부 방면 소재의 제12연합 연습항공대의 교육부대가 이동하여 바로 다음날 부터 쉬지 않고 연습하며, 항공함대의 비행대 이동이 없는 것 처럼 위장하였다. 또한 통신 방첩도 고려하여, 각 기지는 그 전날 까지의 통신량과 차이가 없도록 동일한 호출 부호로 연습문을 주고 받았다. 기동부대 편지는 모두 밀봉하여 그대로 두고, 진주만 기습 성공 소식이 전해 진 이후에야 배달하는 등 보안이 철저하였다.
히도카푸 만에 집결한 병력은 항공모함 6척, 전함 2척,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9척, 잠수함 3척, 급유함 8척등 총 31척이였다. 이제는 누설될 우려가 없다고 판단된 11월 22일 나구모 사령장관은 기동부대 모든 승조원에게 공격의 목표가 진주만이라고 알렸다.
각 항모의 탑재기 대수는 제1항공전대 아카기, 카가에는 각 60대. 제2항공전대 소류, 히류에는 각 50대. 제5항공전대 쇼카쿠와 즈이카쿠에는 각 70대로 합계 360대였다. 모든 탑재기가 한번에 발진 할 수 없기 때문에 제1파 189대, 제2파 171대의 파상 공격을 하기로 하였다. 첫 발진은 일출 30분전으로 정했다.[3] 1파와 2파는 45분의 간격을 두고 발진하기로 하고, 발진 지점은 오아후 섬의 정북쪽 230해리.
1차 목표는 하와이 방면에 있다고 예상되는 항공모함 2척, 전함 8척이며, 2차 목표는 중순양함 10척, 경순양함 6척, 구축함, 잠수함, 기타 보조함정이었다. 또한 미군의 항공 병력을 봉쇄하기 위해 하와이 방면의 6개 항공기지 공습을 제2항공전대가 담당하기로 하였다.
더 이상 미국과 협상의 여지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일본군 수뇌부는 작전시작을 결정하였고 12월 2일 나구모 제독에게 '니타카 산(타이완 섬의 최고봉: 현재의 옥산)에 등반하라 1208(ニイタカヤマノボレ一二〇八)' 암호문이 전달되었다.
12월 6일 현지시간 10시 30분. 야마모토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전보를 보내왔다.
황국의 흥망이 이 정전(征戰)[4]에 있으니, 분골쇄신하여 각자 그 책임을 완수하라
각 함의 돛대에는 Z기가 게양되었다. '어망투척중'을 뜻하는 깃발로, 러일전쟁 때 동해 해전 이후 무려 36년만에 게양된 것이다. 원래는 함대에 물자가 부족할때 그걸 메꾸기 위해 물고기를 직접 잡아 식량조달을 하던 때 걸던 깃발이었다.1.2. 미국의 준비
미국은 비록 미국 태평양함대를 진주만으로 전진배치시켰지만, 이는 일본을 압박하기 위한 정치적 의미였을 뿐 전략적인 목적은 아니었다. 하지만 협상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고 일본과의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자 태평양의 주요 거점을 요새화하고 필요한 군수물자들을 비축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특히 필리핀 자치령에 주둔 중인 연합군과 일본 본토와 근접한 주요 섬들이 공격대상으로 예측되었기 때문에 해당 지역에 작업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본과의 전운이 감도는 시기는 개전되기 직전에 가까웠던 시기며 기존의 해군 군축조약들이 실효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상황이라서 긴급히 작업을 시작했어도 공사기간 등의 문제로 개전 당시 제대로 된 준비가 된 지역은 하나도 없었다.게다가 대서양에서 독일군의 U보트가 악명을 날리면서 대서양 전투에서 피해가 속출하자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 요크타운과 일부 전력을 차출하여 대서양 함대에 편입시켰다. 태평양 방면의 전력 강화도 진행되고는 있었지만 어차피 현재 보유한 전력과 무기만 있어도 일본군 따위는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열성적이지 않았다. '근성이 없어서' 미국이 금방 협상 테이블로 나올 거라고 생각한 일본이나 '쬐끄만 뻐드렁니쟁이들이 뭐 대단하겠어?'라고 일본을 얕잡아 본 미국이나…. 어차피 전쟁은 잘 싸우는 쪽과 못 싸우는 쪽의 대결이 아니라 삽질하는 쪽과 더 많이 삽질하는 쪽의 대결이라는 말도 있으니.
특히 일본 해군의 목표인 진주만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 해군들은 "어차피 걔네들 여기까지는 공격하러 못 와."라고 생각하면서 모두들 퍼져 있었다. 게다가 전쟁이 터져도 필리핀이나 태평양 섬에 있는 아군들이 좀 고생할 거고, 거기서 지원 좀 해달라고 무전 때리면 그때 가서 싸우느라 힘이 빠진 일본군과 좀 놀아주다가 오는 수준으로 일본의 위협을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미 1932년 2월 7일 일요일에 렉싱턴급 항공모함 2척을 동원하여 함재기로 진주만을 습격하는 훈련을 이른 새벽에 실시했는데 152기의 공격으로 진주만에 정박한 모든 군함을 격침하는 동시에 진주만 주변의 항공기지에 있는 모든 항공기를 격파하는 참담한 결과가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일본을 얕보는 인식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미국 육군의 상황도 마찬가지라서 하와이에 주둔한 2개 사단은 병참 문제와 훈련 문제로 인해 항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B-17 중폭격기가 하와이를 경유해서 필리핀과 같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었으나 해당 중폭격기중 일부라도 얻어내서 하와이의 공격력을 강화하거나 부족한 정찰기를 대신하는 용도로 써보자는 아이디어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와이에는 B-17이 필요없을 것이라는 만용이나 부리고 있었다. 육군과 해군의 연략 및 협조체제도 없다시피해서 육군은 해군이 해상정찰을 잘하겠지라고 생각하고 자체적인 순찰활동을 전혀 펼치지 않았다. 하와이 방면의 미국 육군 총사령관인 월터 쇼트 중장은 미국 태평양함대 사령관인 허즈번드 킴멜 제독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고 일요일마다 골프를 같이 쳤지만 서로간에 진지하고 구체적인 작전논의나 협조등은 벌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미국은 일본의 해군보단 일본에서 보낸 첩보원이나 하와이에 체류 중인 일본인들, 특히 당시 하와이 인구의 30%를 차지하고 있던 일본계 이민자들이 벌이는 사보타주를 더 위협적으로 보고 (여러 매체에서 사골로 등장하는) 항공기들을 특정 장소에 빽빽하게 배치하고 감시병을 두는 등 몇가지 내부경계 조치를 강구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는 미국의 오판이었지만.
1941년 8월에 하와이에 있는 미국 육군 항공대 사령관 프레드릭 L. 마틴 소장과 제5폭격대대장 윌리엄 C. 파딩(William C. Farthing) 대령 및 몇몇 참모들은 작전 연구를 실시하여 일본 제국 해군은 6척의 항공모함을 사용하여 북쪽에서 공격할 것이라는 결과를 도출했다. 해당 연구는 일본군의 작전을 거의 완벽하게 예측한 보고서지만 대책으로 항공순찰을 강화할 것을 언급하지믄 못했고 킴멜과 전쟁부에 보고되었지만 사실상 무시되었다. 해당 시기에 이르러서도 미국은 대서양에 집중하고 있었고 태평양에서는 진주만에 대한 공격은 이론상 있을 수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므로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11월에 접어들면서 일본이 분주하게 움직이자 미국도 슬슬 붙을 때가 됐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군의 주력이 서서히 네덜란드령 동인도 방면으로 집결하자 미군은 일본군이 그들의 예상대로 남방으로 움직이고 있다면서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었다. 물론 소수 관계자가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격할지 모른다고 주장하였지만 완전히 묵살되었다. 다만 일본 해군이 전통적으로 6개월마다 바꾸던 함대 호출부호를 12월 1일에 1개월만에 바꾼점에 불안을 느낀 허즈번드 킴멜 제독은 정보 참모로부터 일본 해군의 제1, 2항공전대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긴 했지만 정찰기의 수량이 부족한지라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는 못하였다.
어쨌든 일본의 공격이 임박했다고 판단했기에 전방기지에 항공기와 병력, 물자를 배치하는 일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진주만 지역에는 이미 어느 정도는 충분한 방어가 존재한다고 보았고 다른 곳의 방어상황이 처참할 수준으로 낮았기에 필리핀이나 웨이크섬 등을 방어할 목적으로 많은 병력과 물자와 항공기가 배치되었으며 진주만은 경유지로서만 활용된다.
12월 3일에는 당시 해군참모총장이던 해럴드 레인스포트 스타크(Harold Raynsford Stark) 대장이 일본대사관과 영사관에서 퍼플 암호 기계를 해독하고 있다는 초 극비사항을 일선 사령부에 알렸으며 공습 전날에는 회의도중 하와이의 일본 영사관에서 서류 소각과 암호기계를 파괴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으나 킴멜 제독은 전쟁이 다가오고 있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만 판단해 버렸다. 애초에 스타크 해군참모총장도 대서양 방면에 관심이 많았으며 태평양 방면에는 기존 전력으로 대처가 가능하겠지라고 생각하던 인물이었이고 이런 상황은 킴멜이 스타크에게 편지를 쓰고 답장을 받은 것으로 입증된다. 해당 편지에서 킴멜은 대서양 방면이 중요한 것은 알지만 태평양 방면도 줃대하다라고 말했고 여기에 대한 스타크의 대답은 개인적으로는 일본군이 침공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였다. 나중에는 스타크도 생각을 바꾸긴 했으나 일본과의 전쟁은 있을 것이지만 진주만을 공격당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12월 6일 밤에 영국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지역의 캄보디아 근해에서 일본군 수송선 2척을 발견했다는 보고를 미국에 보냈고 해당 보고는 하와이의 킴멜과 쇼트에게도 전달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이 예상대로 동남아시아 지역을 처음으로 공격할 것으로 판단한 미국 태평양함대 사령부는 항공모함이 없는 동안 주력함대를 출항시키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항공모함들이 돌아올때까지 육군 항공기들이 지키고 있는 진주만에 함대를 그대로 두었으며 이 조치는 미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여기에는 항공모함으로 웨이크섬이나 미드웨이섬같은 곳에 전투기를 배달하러 가는 윌리엄 홀시가 빠르게 배달을 마치고 귀환하기 위해서 미국 태평양함대 소속의 전함들을 끌고 나가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
이리하여 진주만 공습의 전날인 12월 6일에 하와이의 해군과 육군 총사령관인 킴멜과 쇼트는 토요일 저녁을 맞이하여 음주를 했다. 그리고 진주만에 정박한 군함들의 승조원들도 토요일 밤과 일요일을 맞이하여 다수가 군함 밖으로 외출을 나갔으며 남은 일부도 새롭게 건립된 블록 레크리에이션 센터에 모여서 군함별로 밴드 음악대결을 벌이고 술을 마시고 즐겁게 놀았다. 그리고 이렇게 진주만의 미군이 대부분 기강이 해이해진 사이에 12월 7일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일본군의 상륙부대가 영국이 점유한 말레이반도의 코타바루에 진주만 공습 2시간 전에 상륙하여 일본 제국은 영국에게 선전포고 없는 전쟁을 개시했다. 애초에는 말레이반도와 진주만을 동시에 공격해서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도록 하려고 했지만 항공모함의 함재기가 어둠 속에서 발함을 하는 것이 너무 위험해서 겐다 미노루가 임의로 2시간 정도 지연을 시켰고 해당 사실을 대본영이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코타바루 방면 공격부대가 출격한 상황이라 계획변경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영국이 미국에게 공격사실을 통보하면서 진주만이 대응태세를 갖출 수 있는 최후의 기회가 주어졌으나 현지의 혼란 및 보고의 지연으로 인해 해당 사실이 진주만에 있는 킴멜과 쇼트에게 전해진 것은 이미 진주만 공습이 한참 진행되던 시기라 때를 놓쳤다.
2. 선전포고 없는 전쟁
진주만 공습으로 시작된 태평양 전쟁은 선전포고 없이 시작되었다. 다만 일본은 진주만에 앞서 러일전쟁, 중일전쟁에서도 선전포고 전 러시아 발틱 함대, 중국군 등을 공격하였으며, 전쟁이 아니더라도 조선에서의 군사행동 역시 대부분 조약이나 공법에 없는,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특히 비공식적인 군사도발로 상대가 먼저 공격해오기를 일부러 유도하면서, 상대가 이러한 군사도발에 반격을 해오면 이를 자신들을 향한 선제공격으로 날조, 선포하여 전쟁을 벌이는 비열한 행위를 저지르기도 하였다.
12월 7일, 일본은 '제국정부의 대미통첩각서'라는 애매한 내용의 성명서를 보내 간접적으로 전쟁을 알린다. 이 문서의 예상 수령 시각은 진주만 공습 직전이었다. 문서는 총 14개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어 '14-Part Message'로도 불렸으며 처음 13개 부분은 영어로 적혀있었고, 마지막 14번째 부분은 일본어로 적혀 있었다. 일본군이 이 당시에는 그래도 아주 맛이 간 건 아니었는지 야마모토 제독이 진주만을 공습하기 전 선전포고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를 받아들인 정부는 히로히토 덴노의 이름으로 '미국 및 영국에 대한 선전의 조서(米国及英国ニ對スル宣戦ノ詔書)'라는 일종의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한다. (일본어 원문) 그러나 이 조서는 이튿날 저녁이 되어서야 일본 국내 신문을 통해 공개되었다.
정작 노무라 키치사부로[5] 주미일본대사가 대미통첩각서를 들고 미 국무장관 코델 헐에게 찾아갔을 때는 워싱턴 D.C. 시각으로 7일 오후 2시. 암호문에는 공습 직전인 오후 1시에 선전포고문을 발표하라고 나왔지만 노무라 대사는 도저히 시간을 맞출 수 없어서 2시로 연기한 것. 이 시각은 하와이 기준으로 8시 50분인지라 이미 헐 장관이 1시간 전에 진주만 공격 소식을 들은 뒤였다. 이렇게 된 이유는 선전포고문이 5000자나 되는 장문이라 암호 해독이 늦었고 보안 인가를 받은 타자기를 다룰 인원이 없어서 보안인가가 있는 고위 관료인 당시 1등 서기관이던 오쿠무라 가츠조가[6] 직접 독수리 타법으로 방금 해독한 선전포고문을 느리게 타자했기 때문이다. 원래 타자기를 다루는 사람이 외국인이었는데, 기밀문서란 이유로 관내의 모든 외국인들을 다 내보낸 상태였기 때문에 이렇게 되어 버린 것. 거기에 가장 중요한 일본군이 전쟁을 선포한다는 내용은 선언문 가장 마지막에 써 넣어 버려서 일본 대사관 직원들도 해독이 끝날 시점에야 전쟁이 시작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야마모토 제독은 진주만 공격 당시에도 선전포고가 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선전포고문을 보낸 암호 해독이 늦어져서 공습 뒤에 미국 측에 선전포고문이 전달됐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격노했다고 전해진다.
설상가상으로 공문을 전달할 당시 주미 일본 대사관은 사실상 휴업 상태였다. 당시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대단히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일반인도 뻔히 아는 상황인데 외교관들인 대사관 직원들이라면 더욱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대사관 직원들은 비상 근무는 커녕 평시 수준의 근무조차 하지 않았다. 오쿠무라 서기관이 암호문을 해독하느라 낑낑대고 있을 시각에 대다수의 대사관 직원들은 12월 6일(대사관이 있는 워싱턴 D.C. 기준)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로 전근 가는 직원의 송별 파티를 점심부터 오후 내내 하고 있었다. 물론 파티 후 주말이라며 일찍 퇴근해 버린 것은 덤. 그래서 안 그래도 느린 선전포고문 해독 및 정리가 더 늦어버렸다.
...よって帝國政府はここに合衆国政府の態度に鑑み今後交渉を繼續するも妥結に達するを得ずと認むるの外なき旨を合衆國政府に通告するを遺憾とするものなり。
... The Japanese Government regrets to have to notify hereby the American Government that in view of the attitude of the American Government it cannot but consider that it is impossible to reach an agreement through further negotiations.
일본 정부는 미 정부[7]에게 미 정부의 태도로 비추어볼 때 더 이상의 협상을 통하여 합의점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음을[8] 이로써 통고해야 함에 유감을 표하는 바이다.
― 1941년 12월 7일, '제국정부의 대미통첩각서' 마지막 문장
... The Japanese Government regrets to have to notify hereby the American Government that in view of the attitude of the American Government it cannot but consider that it is impossible to reach an agreement through further negotiations.
일본 정부는 미 정부[7]에게 미 정부의 태도로 비추어볼 때 더 이상의 협상을 통하여 합의점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음을[8] 이로써 통고해야 함에 유감을 표하는 바이다.
― 1941년 12월 7일, '제국정부의 대미통첩각서' 마지막 문장
거기에 대미통첩각서 14-part Message도 읽어보면 알겠지만 두서가 없고 내용의 요지를 알아듣기 어려운 엉망진창의 내용인데다가, 결정적으로 선전포고가 성립하는데 필요한 '전쟁을 시작하겠다는 선언(State of War)'이 단 한 단어도 없다. 이는 일본군 측에서 성공적인 공습 작전을 위해 최대한 전쟁이 언급하지 않으려 한 탓이다. 따라서 앞뒤사정을 모르고 보면 엄중한 경고로밖에 볼 수 없는 문장이었다.
당시 미군 측도 일본으로부터 오는 무선을 도청하고 있었고 14-part Message를 일본 대사관보다 먼저 해독하는 데 성공했지만, 구체적인 내용이 하나도 없었고 그저 단교 선언으로만 보였기 때문에 암호를 해독한 관계자들조차도 당장 전쟁은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라 판단하였으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라는 경고밖에 내릴 수 없었다.[9] 그러나 경고가 발령된 때는 이미 진주만이 공습을 당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I must say that in all my conversations with you...during the last nine months I have never uttered one word of untruth. This is borne out absolutely by the record. In all my fifty years of public service I have never seen a document that was more crowded with infamous falsehoods and distortions on a scale so huge that I never imagined until today that any Government on this planet was capable of uttering them.
▷ 진심으로 말하건대, 지난 9개월 동안 본인은 거짓된 말을 한 적이 없으며, 이는 기록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공직 생활을 50년 동안 해 왔지만 이런 문서는 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악질적인 거짓과 왜곡으로 가득 찬 나머지 지구상에 이런 문서를 낼 만한 정부가 있다는 걸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 진심으로 말하건대, 지난 9개월 동안 본인은 거짓된 말을 한 적이 없으며, 이는 기록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공직 생활을 50년 동안 해 왔지만 이런 문서는 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악질적인 거짓과 왜곡으로 가득 찬 나머지 지구상에 이런 문서를 낼 만한 정부가 있다는 걸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이런 상식에서 벗어난 작태를 목격한 헐 장관은 노무라 앞에서 분노에 차서 이렇게 일갈해 버린다. 그리고 축객령을 내려 버렸다. 외교관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만 갖췄지 대놓고 폭언을 한 격이다. 그 정도로 심각했다.
JOINT RESOLUTION
Declaring that a state of war exists between the Imperial Government of Japan and the Government and the people of the United States and making provisions to prosecute the same.
Whereas the Imperial Government of Japan has committed unprovoked acts of war against the Government and the people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Therefore be it Resolved by the Senate and House of Representatives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in Congress assembled, That the state of war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the Imperial Government of Japan which has thus been thrust upon the United States is hereby formally declared; and the President is hereby authorized and directed to employ the entire naval and military forces of the United States and the resources of the Government to carry on war against the Imperial Government of Japan; and, to bring the conflict to a successful termination, all the resources of the country are hereby pledged by the Congress of the United States.
양원 합동 결의
일본 제국 정부와 미합중국 정부 및 국민들 간에 전쟁 상태가 존재함을 선언하며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의한다.
일본 제국 정부는 미합중국 정부 및 국민들에게 정당한 이유 없이 전쟁 행위를 자행하였다.
이에 상원과 하원 합동 회의는 미합중국이 불가피하게 일본 제국 정부와의 전쟁 상태에 들어갔음을 공식 선언하며 일본 제국 정부와의 전쟁을 수행하고 이를 성공적으로 종식할 수 있도록 대통령에게 미합중국의 해군과 육군 및 정부의 모든 자원의 동원을 허가하고 위임할 것을 결의한다.
― 미국 하원에서 발의되어 하원과 상원을 통과한 선전포고문
Declaring that a state of war exists between the Imperial Government of Japan and the Government and the people of the United States and making provisions to prosecute the same.
Whereas the Imperial Government of Japan has committed unprovoked acts of war against the Government and the people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Therefore be it Resolved by the Senate and House of Representatives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in Congress assembled, That the state of war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the Imperial Government of Japan which has thus been thrust upon the United States is hereby formally declared; and the President is hereby authorized and directed to employ the entire naval and military forces of the United States and the resources of the Government to carry on war against the Imperial Government of Japan; and, to bring the conflict to a successful termination, all the resources of the country are hereby pledged by the Congress of the United States.
양원 합동 결의
일본 제국 정부와 미합중국 정부 및 국민들 간에 전쟁 상태가 존재함을 선언하며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의한다.
일본 제국 정부는 미합중국 정부 및 국민들에게 정당한 이유 없이 전쟁 행위를 자행하였다.
이에 상원과 하원 합동 회의는 미합중국이 불가피하게 일본 제국 정부와의 전쟁 상태에 들어갔음을 공식 선언하며 일본 제국 정부와의 전쟁을 수행하고 이를 성공적으로 종식할 수 있도록 대통령에게 미합중국의 해군과 육군 및 정부의 모든 자원의 동원을 허가하고 위임할 것을 결의한다.
― 미국 하원에서 발의되어 하원과 상원을 통과한 선전포고문
반대로 미국 측은 일본에 먼저 선전포고를 한 후, 일본의 편을 들어 미국에 선전 포고를 한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에 차례차례로 선전 포고를 하고, 선전포고 권한이 있는 의회는 하원과 상원을 소집하여 선전포고문을 통과시켰다. 그 후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이 서명을 완료하고 주일 미국대사관을 경유하여 주일 미국 공사[10]를 통해 일본 쇼와 덴노 앞으로 직접 보내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의회가 대통령에게 제출한 전문을 읽어 보면 필요 없는 헛소리는 하나도 없이 짧고 단도직입적임을 볼 수 있다.
미국과 일본이 종전 때까지 서로의 외교공관을 유지하여 협상의 여지를 남겨두었다는 얘기가 있는데 잘못된 소리다. 전쟁이 나자 미국과 일본은 곧 단교하고 외교공관을 폐쇄했다. 다만 지리적 문제로 인해 체류 중이던 외교관들과 시민들을 바로 송환하지 못 했을 뿐이다. 나치독일은 영국과도 선전포고 후 곧 단교하고 외교관들과 시민들을 서로 송환했으며, 소련과도 그랬다. 소련은 독소전 발발 1주일 후 주소 독일대사관을 폐쇄했고, 외교관들의 송환은 당시 중립국이었던 터키를 통해 시행되었다. 미국과 영국은 일본과 중립국에서 협상하여 조셉 그루 대사를 위시한 모든 공관원들과 자국 시민들을 전쟁 중 2차례에 걸쳐 전시 교환선을 통해 지금의 모잠비크와 포르투갈령 고아 등지에서 일본과 교환하여 외교관들은 전부, 민간인들도 할 수 있는 한 귀국시킨다.(#) 따라서 전쟁 중반 이후로는 어떤 식으로든 연합국에 체류 중이던 일본 외교관도 일본에 체류 중이던 연합국 외교관도 없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대체 왜 단교는 안 했다는 얘기가 퍼진 것인지 전혀 알 수 없다.
일본은 진주만 이전에도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 선전포고 없는 선공 전례가 많아 본건에서도 고의성을 의심할 만하다. 애초에 선전포고가 국제법상으로 성문화한 것도 러일전쟁에서 선전포고 없는 기습으로 일본에게 당한 니콜라이 2세가 1907년에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서 강력하게 주장했고 타국이 동의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일본 제국정부 대미통첩각서의 전달 지체는 그다지 중요한 것도 아니다. 선전포고문이랍시고 써놓았지만 전쟁을 개시한다는 직접적인 문구가 없는 등 국제법상 선전포고문의 요건을 갖추지 않았으므로 설령 시간에 맞추었다고 해도 선전포고로 보기가 어렵다. 은유적이고 암시적인 일본의 언급을 미국인들이 초월 해석해서 '이 정도면 개전 선포다'라고 인식해야 했을까? 만일 저런 애매모호한 외교적 수사를 선전포고라 인식해서 선제공격을 했다면 그쪽이 더 비정상적인 전범행위였을 것이다.
3. 진주만 공습
12월 7일 새벽 일본 연합함대는 하와이에서 북서쪽 370km 해상에 도착하였다. 이미 모든 준비를 다 마쳐놓은 일본군은 이제 공격개시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미국 태평양함대의 항공모함이 단 한 척도 보이지 않는다는 최신 정보를 입수했다. 당시 일본군은 미군의 태평양 함대에 항공모함 요크타운, 엔터프라이즈, 렉싱턴, 새러토가가 소속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요크타운은 미국과 영국 사이에서 깔짝대는 독일 U보트와 싸우러 대서양에 가 있었고 새러토가는 샌디에이고 해군기지에서 정비를 받고 있었으며 렉싱턴은 미드웨이섬에 전투기 배달하러 간 상황이었고 엔터프라이즈는 웨이크섬에 전투기 배달을 마치고 전날인 12월 6일에 진주만에 입항예정이었는데 중간에 열대폭풍 때문에 우회하느라 입항이 하루 늦어져서 봉변을 피할 수 있었다.나구모 제독은 미국이 공습을 눈치 채고 항공모함을 진주만이 아닌 다른 곳에 배치한 것 아닌가 걱정했지만 미국 항공모함의 정보를 확인한 후에 움직일 정도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진주만에 대한 공격을 지시하였고 이에 따라 1차 공격대가 이륙하였다. 그리고 한 시간 후 2차 공격대가 준비를 마치고 이륙하였다.
사실 당시 미군 태평양 함대는 일본군의 이상징후를 두 차례 감지했으나 이것을 진주만 공격의 전조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 첫번째 징후는 일본군 잠수함의 출현이었다. 공습 직전 일본군은 갑표적을 파견하여 항공대의 공습작전에 호응하여 어뢰 몇 발 쏘고 쨀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한 척은 좌초했고 최소 2척이 공습이 시작되기 전 진주만에 접근하다가 칸톤 섬(Canton Island)에 육군 804 공병대대 병력과 민간인, 물자 등을 내려 주고 돌아오던 해군 수송선 AG-10 USS 안타레스(Antares) 함에 발견되었다. 안타레스는 인근에 초계(哨戒) 중이던 윌리엄 W. 아우터브리지(William W. Outerbridge) 소령이 지휘하는 구축함 DD-139 USS 워드(Ward) 함에 이를 알렸고, 아우터브리지 소령은 경보를 받은 직후 소해정 USS 콘돌과 함께 갑표적을 찾아낸 후 포격으로 격침시켰다. 그리고 이를 태평양함대 사령부에 보고하지만, 관저에서 보고를 받은 사령관 허스번드 킴멜 제독은 "그 풋내기 함장한테 다시 한 번 확인해 본 다음에 다시 보고하게."라고 답변하며 사실상 보고를 무시했다. 아우터브리지 소령은 구축함 함장으로 막 배치받은 신참이었고, 부임 일자도 불과 2일 전인 1941년 12월 5일이었기에, 킴멜 제독이 미숙한 초임 함장이라며 신뢰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11] 이후로도 워드가 실제 격침시킨 것이 맞는가 의문이 제기되었으나, 2002년에 진주만 근해 해상 400미터에서 실제로 잔해를 발견하면서 증명되었다.[12]
당시엔 어느 나라건 자국 해군 기지에 접근하는 미확인 잠수함은 무경고 공격이 원칙이었고, 외국 영해 내에서의 잠수 자체가 국제법 위반이라 진짜로 공격을 받았어도 일본은 할 말이 전혀 없었다. 또한 아무리 동맹국 잠수함이라도 훈련이나 긴급수리가 필요한 손상으로 인한 후송 등의 이유로 사전 합의도 거치지 않았다면 영해에 들어온 순간부터 즉시 부상하여 수상 항해를 하면서 그 사실을 사전에 통보하는 게 원칙이었다. 여기에 전장에 대한 예측이 안 되어있을 뿐 개전 자체는 머지 않았음은 확실했으므로 일본 잠수함의 접근을 발견했다 해도 진주만을 목표로 한 대규모 기습을 예상하기란 쉽지 않았다.
- 두 번째 징후는 당시 진주만에 갓 설치한 육군의 통신중대 하와이 공습경보대(Signal Company Aircraft Warning Hawaii, SCAWH) 소속 SCR-270 방공용 레이더에서 감지됐다. 이 레이더는 고도까지는 알 수 없는 2차원 레이더였지만, 탐지 거리 240㎞에 달하는 최신 장비였고, 일본 해군기들을 탐지해내는 데 성공하며 레이더 자체는 밥값을 했다. 당직 근무중이던 두 육군 레이더병인 조지 엘리엇 주니어(George Elliot Jr.) 이병과 조셉 로카드(Joseph Lockard) 이병은 무수히 많은 점이 북서쪽에서 다가오는 장면이 포착된 것을 확인하고 당직사관인 육군 제78전투기편대 부편대장 커밋 아서 타일러(Kermit Arthur Tyler) 항공대위에게 보고했지만, 때마침 미 본토에서 육군항공대 B-17 폭격기 편대가 올 예정이었고, 하필 방향도 폭격기 편대의 진로와 얼추 일치했기에, 타일러 대위는 "별거 아냐, 신경 꺼(Well, Don't worry)."라며 도외시했다.
얼핏 보면 타일러 대위가 안이하게 대처한 것으로 보일 수 있고 실제로 공습 이후 해군의 군사 법원에 기소되기도 했으나, 새로운 기술과 장비에 따른 미국 육군의 운용 체계가 설립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당시엔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지사라는 결론이 나와 타일러 대위와 두 레이더병은 처벌을 면했다.참조 사실 이런 경우에 현명한 판단과 착오는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의 예에서 보듯이 정말 한 끝 차이이기도 하였으므로, 진주만 공습이 그만큼 상식적으로 예상하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이런 결론이 나왔다.[13]
참고로 타일러 대위가 오판하게 만든 문제의 B-17 폭격기 편대는 실제로 공습 와중에 하와이에 도착했다. 그것도 오전 8시, 즉 진주만 공격대의 첫 폭탄/어뢰가 명중할 때였다. 당연히 이들 폭격기 편대는 난리통이 된 진주만의 상황에 아연실색했지만, 무장은 커녕 연료도 부족한 상황이었기에 뭘 해보지도 못하고 쑥대밭이 된 오아후 비행장에 그대로 강행 착륙해야 했다. 그 와중에 1차 공습대의 공격과 아군 오사로 11대의 폭격기 중 2대는 파괴되었으며 나머지 폭격기들도 크고 작은 손상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
<rowcolor=white> 영화 《도라 도라 도라》의 공중공격대 출격 씬 |
12월 7일 오전 6시 00분. 각 항모의 해군 비행사들은 머리에 하얀색 하치마키를 질끈 동여매고 하나 둘 출격하기 시작하였다. 약 15분간 제1파 공중공격대 183대가 이륙하였고, 공격 대형을 갖춘 후 오아후 섬으로 향했다. 최선두에는 비행총대장 후치다 미츠오(淵田美津雄) 중좌의 빨간 바탕에 3개의 황색 줄이 그려져 있는 비행기가 있었고, 뒤이어 그가 직접 이끄는 97식 함상공격기로 구성된 수평폭격대 49대가 위치하였다. 우측 500미터 떨어져 고도 200미터 아래로 무라타 소좌가 이끄는 97식 함상공격기로 구성된 뇌격대 40대, 좌측 500미터 떨어져 고도 200미터 위로는 다카하시 카쿠이치 소좌가 이끄는 99식 함상폭격기로 구성된 급강하폭격대 51대, 그리고 이타야 소좌가 이끄는 제공대 43대의 0식 함상전투기가 공격대의 상공을 경비 엄호하였다.
당시 일본기에는 레이더가 없었고, 총대장기에만 미국에서 직수입한 '크루시(Kruesi)'라는 라디오 방향 탐지기 1대가 있었다. 후치다가 라디오 스위치를 키니 호놀룰루 방송국의 경쾌한 재즈가 크고 명료하게 들려왔다. 안테나를 이용한 방향 측정으로 무선 항법을 하였다. 이어진 호놀룰루 방송은 아침 일기예보를 하였다. "오아후 섬 날씨는 개었다 흐렸다 하겠으며, 산에는 구름이 끼겠지만 구름 높이는 3,500피트, 시야는 양호하며 북풍 10노트"라는 중요한 항공 기상 정보를 제공하였다.
오전 7시 30분. 비행대는 한 대의 낙오도 없이 순조롭게 예정된 계획에 따라 비행 방향을 크게 우회하여 섬의 남서쪽에서 진주만 방향으로 접근하였다. 비행총대장 후치다가 전개 명령으로 1발의 신호탄을 쏘자 급강하폭격대는 고도를 높여 급강하 준비를 하고, 뇌격대는 고도를 낮춰 어뢰발사 준비를 하였다. 또 수평폭격대는 맞바람이 좋기에 바람 아래쪽에 위치하였다. 단, 제로센 제공대는 속도를 올려 앞으로 나가 제공작전을 하여야 하나 신호를 보지 못하여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후치다가 다시 한 번 1발의 신호탄을 쏘자 그제야 제공대는 앞으로 나갔다. 그런데 강하폭격대가 이걸 신호탄 연속 2발로 착각하였다. 신호탄 연속 2발은 공격 개시였다. 뇌격대가 먼저 공격을 개시해야 하지만 이 착각으로 뇌격대와 급강하폭격대는 동시에 공격에 들어갔다.
오전 7시 49분. 후치다 비행총대장은 전군 돌격을 명령하였다. 태평양 전쟁의 시작이었다. 도쿄시간으로는 12월 8일 오전 3시 19분이었다.
제로센 제공대가 먼저 나아갔지만 공중전의 기미는 없었다. 지상의 대공포화의 움직임도 없었다. 기습 성공이다.
{{{#!wiki style="text-align:right"
도라 도라 도라}}}{{{#!wiki style="text-align:right"
오전 7시 53분 비행총대장의 명령으로 후방 전신석에 앉은 통신사 미즈기 토쿠신이치 1등 비행병조장은 진주만 기습에 성공하였다는 그 유명한 암호명 "도라 도라 도라"(トラ,トラ,トラ)를 사령부에 발송하였다.[14] 해당 암호는 호랑이란 뜻도 있지만 사실은 돌격을 뜻하는 '토츠게키(突撃)' 와 뇌격을 뜻하는 '라이게키(雷撃)'의 가타카나 표기 맨 앞 글자를 따서 만든 말이며, 단지 우연히 호랑이를 뜻하는 단어와 같은 뜻이 되어 인상깊게 남았다. 항공기에 탑재된 소형 전신기의 출력으로는 3000해리는 기대할 수 없었지만 모함인 항모 아카기는 물론, 도쿄 대본영에서도 직접 수신했다고 한다.
7시 55분. 다카하시 소좌가 이끄는 급강하폭격대 51대는 두 팀으로 나눠 있었다. 대장이 직접 이끄는 쇼카쿠 대는 히컴과 포드 섬 양 기지를 공격하고, 사카모토 아키라 대위가 이끄는 즈이카쿠 대는 휠러 기지를 공격하였다.
7시 57분. 무라타 소좌가 이끄는 뇌격대는 전함 USS 웨스트버지니아에 첫 어뢰를 명중시킨 것을 시작으로 계속해서 어뢰 공격을 하였다.
8시 정각. 비행총대장이 이끄는 수평폭격대 50대는 10개 중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존에는 9대가 각 1발씩 투하하면 1발쯤은 맞추겠지 하는 생각으로 9대가 1개 팀이였지만, 명중률의 상승으로 5대면 충분하다고 판단되어 1개 중대 5대 편제였다. 비행총대장이 소속된 제1중대가 포드 섬 동측 계류장 가장 북쪽에 있던 전함 USS 네바다에 명중탄을 냈다. 그 순간 제2중대가 북쪽에서 2번째 위치한 전함 USS 애리조나의 2번 주포탑 부근에 명중탄을 냈다. 탄약고가 위치한 자리라 대폭발이 일어났다. 다른 전대에 진동까지 올 정도의 대폭발이었다. 이어 3번째 위치한 USS 웨스트버지니아와 테네시도 타올랐고, 4번째 위치한 USS 오클라호마와 USS 메릴랜드와 5번째 USS 캘리포니아도 타오르며 포드섬 동측 계류장 북쪽에 계류되어 있던 전함 8척 중 무려 7척에 명중탄이 났다. 포드섬 남쪽에서는 전함 USS 펜실베니아 함만 타격을 입었다.
8시 30분. 이타야 소좌의 제공대는 적 전투기가 나타나지 않아 할 일이 없었다. 이에 6개 반으로 나눠 각 항공기지에 기관총을 난사하였다.
미군 항공기들도 공습 와중에 간신히 일부가 이륙, 반격에 성공했다. 일제 공습 실시간으로 총 여덟 대가 떠올라 그중에 여섯 대가 한 대 이상의 일본기 격추에 성공한 것으로 인정받는다. 먼저 해리 브라운 육군 소위가 P-36 호크를 타고 이륙하여 휠러 비행장에서 이륙한 육군 제46전투비행대대의 말콤 무어 육군 소위와 짝을 이루어 일본기를 요격, 브라운 소위는 이 과정에서 오아후 섬 북쪽에서 일본기 1기를 격추하여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 조종사로서 최초의 격추를 기록했다. 뒤이어 오아후의 북쪽에 있는 할레이와 육군 비행장에서 육군 제 47전투비행대대 조지 웰치 소위와 케네스 테일러 소위가 탑승한 P-40 전투기가 이륙하여 에바 해병대 비행장 부근에서 일본 해군기와 조우하여 웰치 소위는 급강하폭격기 2대를 격추, 테일러 소위는 급강하폭격기 1기를 격추했다. 휠러 비행장에 내려 무장과 연료를 채우고 다시 이륙하여 웰치 소위는 급강하폭격기를 2기 추가로 격추, 테일러 소위는 급강하폭격기를 추가로 1기를 격추했다.
8시 40분. 시마자키 시게카즈 소좌가 이끄는 제 2파 공중공격대 167대가 도착하였다.
폭격을 받아 전투기들이 파손된 휠러 비행장에서 핑크색 잠옷바람의 필립 라스무센 육군 소위가 다른 세 육군 조종사들과 함께 간신히 멀쩡한 기체에 무기를 장전하여 8시 50분에 제46전투비행대대 소속의 P-36A 전투기 4기가 이륙했다. 이들은 카네오헤 기지 상공에서 제로기 11기와 교전하여 제로기 2기를 격추하고 전투기 1기가 격추되었다. 일본기를 격추한 라스무센 소위는 기체에 500여발 이상 피탄을 맞아 기체 대부분의 기능이 고장난 채 불시착했으나, 소위 본인은 무사히 살아남았다. 휠러 비행장에서는 이날 약 25회에 걸쳐 전투기들을 출격시켰다.
8시 54분. 제2파에서 에구사 소좌가 이끄는 강하폭격대 78대가 공격 개시하였다. 진주만은 이미 불바다여서 검은 연기가 자욱해 목표물 확인이 어려울 지경이였다. 이때 1차 공격에서 살아남은 일부 미 군함이 대공포들을 발포하였는데 강하폭격대는 이 포격 불빛을 보고 공격하였다.
벨로우즈 육군 항공기지에 일본기가 공격해 왔을 때 제 44전투비행대대 소속의 P-40 전투기 12대 중 3대만 발진 준비가 갖추어진 상태였고 조지 화이트맨 소위는 이륙하다가 격추되어 전사, 한스 크리스티안 소위는 전투기 탑승 중 기총 소사를 받아 전사, 새뮤얼 비숍 소위도 이륙 직후 공격을 받아 격추되어 다리에 부상을 입었지만 해안까지 헤엄쳐 돌아오는데 성공했다.
2파 대장 시마자키 소좌가 직접 이끄는 수평폭격대 54대는 히컴 해군 비행장 격납고, 일부는 포드 섬과 카네오헤 격납고를 공격하였다. 격추된 일본기는 단 한 대도 없었지만, 20대가 탄환에 맞아 반복 공격 시에는 사용 불가 판정이 나버렸을 정도였다.
2파 신도 사부로우 대위의 제공대 35대는 1파의 제공대와 마찬가지로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미군 항공기지에 기관총을 난사하였다.
1, 2파 전투가 모두 끝나고도 비행총대장 후치다의 기체는 계속하여 진주만 상공을 돌고 있었다. 전과 확인 때문이였다. 전과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공격해오는 미군기는 단 1기도 볼 수 없었다. 귀환한 후치다는 일단 전함 4척 격침은 확실하며 나머지 4척도 대파하였다고 보고하였다.
- 당시 상황에 대한 증언 및 묘사들
진주만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더군요. 그래서 후방사수한테 말했죠. "육군 새끼들은 대체 일요일 아침부터 뭔 짓을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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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다큐멘터리 『배틀360』 중에서 해군 전투기 조종사의 말}}}{{{#!wiki style="text-align:right"
우린 이렇게 말했지. "해군 새끼들 훈련 한 번 요란하게 한다"고.
{{{#!wiki style="text-align:right"
참전 육군 용사의 증언 중}}}{{{#!wiki style="text-align:right"
갑판에 있던 난 모든 게 불타는 것을 보고 소령님께 배가 불탄다고 보고했다. 소령님은 배를 버리라고 명령했다. 난 마지막으로 배를 떠났다. 시체가 산처럼 쌓여있고, 온몸이 불이 붙은 승조원들이 후갑판으로 달려가 뛰어내렸다. 그 결과 모두 죽거나 크게 다쳤다.
{{{#!wiki style="text-align:right"
애리조나 함에서 살아남은 승조원 '얼 나이팅게일'}}}{{{#!wiki style="text-align:right"
당시 미국 수병들은 일본 전투기가 진입하고 있음에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이는 상당수 수병들이 일본 항공기의 기습을 하와이 주둔 육군 항공대가 훈련 비행을 하는 거라 생각했기 때문. 폭격이 시작됐을 때도 어떤 수병은 감동하며 "와! 훈련 한 번 존내 맛깔나게 하네!"라고 감탄하고 있다가 본격적으로 주변에 폭탄이 떨어지고 아비규환이 되자 그제야 적의 공격을 인지하고 반격에 나섰다.
주둔 중이던 미국 육군도 처음에는 이를 해군이 훈련을 하는 것으로 오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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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일본 해군기가 전함열 공격 성공을 기록한 사진 어뢰에 맞은 배는 웨스트버지니아이다. 캘리포니아와 메릴랜드 사이에 있는 급유함 'USS 네오쇼'는 공습에선 살아남았지만, 산호해 해전에서 침몰한다. 잘 보면 물기둥 우측으로 선회하는 일본 해군기를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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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공습 당시 미 해군 태평양 함대의 함선 위치 |
포드 섬 항공기지가 제일 먼저 폭탄에 얻어맞았으며 곧 포드 섬 인근에 정박 중인 전함들이 폭탄과 어뢰를 얻어맞았다. 폭탄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어뢰의 경우 평상시의 군항(軍港)에는 주요 함선 주변에 어뢰 방지용 그물인 방뢰망이 설치된 경우가 많은데, 이때 진주만의 군함에는 어뢰 그물이 없었다. 어차피 진주만은 수심이 얕아서 어뢰를 쏴도 어뢰가 자세를 잡기 전에 진흙에 처박히기 때문에 안심하고 달지 않았지만 일본은 이걸 알고 어뢰에 목재 부품을 장착하여 어뢰가 중간에 흙에 처박히는 문제를 해결했다.
그리고 일명 전함 열(Battleship's row)이라고 불리는 전함들은 전함 캘리포니아가 최선두로 돌출한 상태고 그 뒤에 전함 메릴랜드와 전함 테네시가 포드섬에 가까운 내측에 위치하고 전함 오클라호마와 전함 웨스트버지니아가 외측에 위치했으며 그 뒤에 전함 애리조나가 내측에 위치하고 수리함 베스탈이 외측에 위치하며 최후미에 전함 네바다가 위치했다. 전함 펜실베이니아는 히컴 비행장 방면의 도크에 구축함 2척과 같이 들어가 있었다. 따라서 외측에 정박한 전함들이 항공어뢰의 집중공격을 받았고 도크에 들어갔거나 내측에 정박한 전함들은 항공폭탄으로 폭격을 많이 받았다.
공습을 목격한 해군항공대 작전참모인 로건 C. 램지(Logan C. Ramsey) 소령은 방송실로 뛰어 들어가 총원전투배치(General quarters) 신호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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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Air raid on Pearl Harbor, This is not a drill!" "진주만이 공습당했다, 이건 훈련이 아니다![15]" |
제일 먼저 전함 대열 외측 선두에 위치하여 5발의 어뢰[16]를 좌현이 집중적으로 얻어맞은 BB-37 USS 오클라호마는 침수를 통제할 수가 없어서 20분 만에 전복되어 승조원 1,354명 중 전사자 429명 부상자 32명이 발생했으며 비슷한 시각 BB-48 USS 웨스트버지니아도 2발의 폭탄과 함께 좌현에 7발의 어뢰를 맞아[17] 오클라호마와 같은 운명을 맞을 뻔 했으나 필사의 데미지컨트롤[18] 덕에 전복은 면했지만 침수가 하도 심하여 착저(着底) 중이었다. 다만 공격 초기에 화재사고가 발생한 걸로 오인하고 당직사관이 소화 및 인명 구조 요원 배치 지시를 내린 덕분에 공격 초기에 많은 인원이 갑판 위로 올라와 오클라호마와 비슷한 공격을 받고도 인명피해는 오클라호마보다 훨씬 적았다. 승조원 1,541명 중 함장 머빈 베닝언 대령을 포함해 전사자 105명, 부상자 52명이 발생했다. BB-44 USS 캘리포니아도 전함 대열에서 약간 남서쪽으로 혼자 떨어진 상태였고 검열에 대비해서 환기 및 청소를 위해 수밀용 해치가 제거되는 등의 상황인지라 어뢰 2발을 맞고 전복될 뻔 했으나 전함 웨스트버지니아처럼 역침수로 전복은 면했다. 그러나 대유폭한 전함 애리조나로부터 불타는 중유가 대량으로 떠내려오는 바람에 퇴함명령을 내렸다가 불타는 중유가 다른 방향으로 가니까 취소했으나 15분간의 지연으로 인해 침수를 막을 수 없어서 결국 웨스트버지니아처럼 착저하고 승조원 1,666명 중에서 98명이 전사하고 61명이 부상을 당한다.
그나마 BB-38 USS 펜실베이니아가 도크에 들어간 관계로 1발의 폭탄 명중이라는 상대적으로 적은 피해를 보았고 전함 대열 내측에 위치한 BB-43 USS 테네시, BB-46 USS 메릴랜드도 폭탄 2발 명중의 비교적 가벼운 피해를 입었고, 메릴랜드는 승조원 1,604명중 4명이 전사하고 14명이 부상을 입는 가장 적은 피해 덕에 공격당한 전함들 중에서 가장 먼저 복귀하였다. 공습 이후 약 3주 만에 항행가능 상태로 복구되었고, 서해안으로 이동하여 대개장을 받았다. 테네시는 1,466명의 승조원 중 5명이 전사하고 21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폭탄 2발 명중으로 피해가 적어서 1941년 12월 20일까지 임시수리를 마치고 미국 본토의 태평양 연안에 위치한 브레머톤에 있는 퓨젯 사운드 해군조선소로 가서 본격적인 수리를 받아서 복귀가 빨랐다. 1942년 2월 26일에 퓨젯 사운드 해군 조선소를 나온 테네시는 시험항해를 거쳐 8월 14일에 진주만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대개장을 위하여 2주 후인 27일에 다시 퓨젯 사운드 해군 조선소로 돌아갔으며 1943년 5월 7일에 대개장을 마치게 된다.
BB-36 USS 네바다는 공습 당시 진주만의 장병들에게 희망과 기운을 준 함선이었다. 어뢰 한 발을 맞았지만 신속한 조치로 피해 확산을 막았으며, 공습이 벌어지는 동안 유일하게 조금이라도 항행한 전함이 되었다. 네바다의 승조원들도 필사적이어서 훗줄을 풀 시간이 없자 부두에서 도끼로 훗줄을 내리찍어 끊었고, 훗줄들을 내리찍느라 배에 승선하지 못한 그 승조원은 훗줄을 다 풀자마자 바다에 뛰어들어 배에서 내려준 줄사다리를 타고 승선했다. 항해 중 불타오르는 아군함들의 옆을 지나갈 땐 방화복을 입고 몸으로 벽을 세워 함의 주요 무장과 갑판 등 시설물들에 불이 옮겨붙는 것을 막았다. 네바다가 진주만을 빠져나가려고 움직이며 좌초, 착저된 다른 아군함들을 지나갈 때 해당 함선의 승조원들이 일제히 환호성과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렇게 네바다는 필사적으로 응전하면서 어떻게든 진주만을 빠져나가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함에 승함하고 있다 현장 지휘관으로 지휘권을 행사한 태평양함대 기뢰전단장 윌리엄 펄롱 소장은 네바다가 탈출하다가 수로상에 있을지도 모를 일본군의 기뢰나 항공기의 공격에 격침될 경우 오히려 진주만으로 드나드는 진입로를 봉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리고 좌초를 지시했다. 이에 네바다는 펄롱 제독의 지시에 따라 폭탄을 얻어맞으며 자력으로 좌초했다가 바닥이 단단한 곳으로 옮기기 위해 2척의 예인선이 다가가 네바다를 끌어내어 바닥이 단단한 곳에 재좌초시켰다. 어쨌거나 항구가 봉쇄당하는 상황은 면했다. 실제로 일본 해군은 항구의 봉쇄를 노리고 진주만을 탈출하려는 네바다에게 급강하폭격기를 집중시켰으므로 당시 펄롱 제독의 판단은 매우 적절했다. 공습 후까지 네바다는 승조원 1,354명 중 60명이 전사하고 109명이 부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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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전함 네바다와 예인함 호가 |
더불어 진주만 공습의 상징이 되어버린 BB-39 USS 애리조나도 카가와 히류의 항공대로부터 4발의 폭탄을 맞았다. 당시 일본군이 쓰던 일반 철갑폭탄은 250kg 정도로 중량이 가벼워서 전함의 갑판장갑을 관통하기 어려우므로 나가토급 전함에 사용된 구식 철갑탄인 88식 철갑탄을 개조하여 급강하가 아닌 수평 폭격으로 투하했다. 해당 폭탄은 800kg의 중량을 가지고 있으나 원래 전함의 주포로 사격하는 포탄이므로 내부 작약은 22.3kg에 불과하므로 관통력은 높으나 폭발력은 낮은 편이며 과관통도 종종 발생했다. 그러나 애리조나는 운수도 없게 마지막 철갑폭탄이 1번 주포탑과 2번 주포탑 사이의 우측 갑판을 관통하고 들어와서 2번 주포탑의 탄약고 안에서 폭발했고, 7초 후에 탄약고가 유폭한다.
그 충격으로 함수 부근 갑판부터 전방 함교 앞 선저까지 함체가 통째로 찢겨지면서 들려 올라가 1, 2번 포탑들이 있는 갑판과 분리되었고, 그 결과 배가 대각선 가로 방향으로 두동강이 났다. 당연히 함수부 및 전방 함체 내 모든 설비가 파괴되었고, 지지해주던 힘이 사라진 전방 포탑 2기와 전방 마스트도 자신의 무게를 버티지 못해 앞으로 기울어져버린다. 그리고 폭발의 충격파로 함교의 장비와 시설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다. 그 결과 용골이 절단되고 전투 갑판의 수평이 깨지게 되었고, 전함 운용에 필요한 장비마저 대부분 손상된 애리조나는 순식간에 폐함이 되었다.
<rowcolor=white> 애리조나 유폭 순간(5분 34초부터) 병원선 AH-5 USS 솔러스에서 촬영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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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아이작 켐벨 키드 소장 |
함교 바로 앞에 위치한 2번 포탑 탄약고의 유폭은 당연히 그 승조원들에게도 치명적인 피해를 주었다. 애리조나에 승선했던 1전함분대 지휘관인 아이작 켐벨 키드 제독[19]과 함장 프랭클린 반 바르켄버그 대령을 비롯해 승조원 1,511명 중 1,177명이 전사했고, USS 애리조나는 21세기 현재까지의 미 해군 역사를 통틀어서 1척의 배로 가장 많은 사망자를 기록하게 된다. 탄약고 유폭 후 발생한 화재가 어찌나 엄청났던지 화재 진압 후 함교에서 시신을 수습하러간 대원들이 발견한 건 하정복 단추와 함교 내 철판에 늘러 붙은 해사 임관 반지가 전부였다고 한다. 키드 제독은 이 진주만 공습에서 전사한 미군 최고위 인사이다.
애리조나 바로 옆에는 군수지원함(공작함) AR-4 USS 베스탈이 있었는데 함교에 있던 함장 캐신 영 대령은 이 폭발에 바다로 날아갔다가 다행히 살아서 자력으로 헤엄쳐 돌아왔고 다른 배들을 구조했다. 베스탈도 2발의 800kg 철갑폭탄이 명중했으나 1발은 내부 폭발해서 화재를 일으켰으나 전방 탄약고 침수로 대응했고 나머지 1발은 과관통해서 함체를 관통하고 해저 바닥에 박힌 후 폭발했다. 그리고 화재는 애리조나에서 발생한 엄청난 유폭으로 인해 순식간에 꺼졌으며 베스탈은 간신히 이탈했다. 승조원 783명중 16명이 전사하고 19명이 부상을 입었다.
전함 이외에도 순양함, 구축함, 표적함으로 전환된 노후 전함 등 기타 함정 등 여러 척이 피해를 입었으며 주요 항공기지들도 공습을 당해서 많은 비행기를 잃은 상황이었다. 그나마 상태가 좀 멀쩡했던 몇몇 지상 기지에서 항공기를 날려 보내기는 했지만 미군 전투기들은 수적 열세로 인해 제대로 상대하지 못하고 격추당했으며 이미 정신줄을 놔버린 대공포들이 하늘에 지나가는 건 마구잡이로 쏴대면서 오히려 팀킬도 벌어졌다. 게다가 다른 곳은 공격을 받고 있는데 조금 외진 곳에 있는 비행장은 늦게야 상황을 알아차리는 등 이래저래 막장 행보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나마 2명의 육군 소위가 조종하는 P-40 전투기 두 대가 일본 해군 폭격기 몇 대를 격추하고 무사히 귀환했다.
육상의 육해군 및 민간 시설, 차량 등도 공격받았다. 사상자 명단에는 민간인도 대거 포함되어 있다. 태평양 함대 사령관 허즈번드 킴멜 제독도 사령부 건물에 날아온 딱 한 발의 기관총탄에 하마터면 죽을 뻔 했다. 7.7mm 총탄 한 발이 유리창을 뚫고 날아들어왔는데 그게 킴멜 제독의 가슴을 툭 치고는 바닥에 떨어졌다. 말 그대로 툭 하는, 지나가던 사람과 살짝 부딪힌 정도의 충격이었다고 한다. 이후 후임 사령관 니미츠 제독과 대화하다가 이때를 회상하면서 "차라리 그 때 총탄 맞고 죽는 게 더 나았다."라고 말했다. 함대 사령관으로서 일본군의 기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금쪽같은 전력을 날려먹은 책임감에서 나온 말로 추정된다.
1차 공격대가 철수하고 약 30분만에 2차 공격대가 진주만 상공에 돌입하였다. 원래 항공모함들을 처리하기로 계획되어 있었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 일본군으로서는 미 항모들이 죄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던 관계로 1차 공격대가 처리하지 못한 잔여 함선과 비행장을 공격하는 것이 임무였다. 이 무렵 미군은 이미 한 차례 공격을 받았으므로 운용 가능한 얼마 안 되는 남은 전투기들도 죄다 이륙시키고 목표를 인지하고 대공포도 쏴대면서 맹렬히 대응하였고 그 결과 일본군은 예정된 목표물들은 공격하지도 못하고 공격 가능한 임의의 목표물을 공격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한편 당시 서쪽에서 진주만으로 오던 USS 엔터프라이즈는 남쪽을 수색하여 일본 함대를 공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는 일본 항공기가 남서쪽에서 접근했기 때문이었지만, 정작 일본 해군은 북서쪽에 있었던 관계로 실패.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일본기들의 엄청난 항속(航續) 능력 때문이었다. A6M의 경우 7시간의 비행이 가능했을 정도였는데, 이 장거리 비행 능력을 이용해 일본군은 자국 전투기들을 일부러 빙 둘러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는 방법으로 항모의 위치를 철저히 꼭꼭 숨겼다. 이러한 장거리 비행 능력은 전쟁 후기까지 일본기들이 가진 유일한 이점이었지만, 대신 저속으로 장시간 비행해야만 하므로 조종사가 피로로 인해 전투력 자체가 떨어지게 하는 문제점이기도 했다.[20][21] 또한 이 수색에 동원된 함재기 중 일부는 엔터프라이즈에 착함하지 않고 진주만 비행장으로 귀환했는데, 이 과정에서 대공포 부대의 오인사격으로 격추당하는 피해도 있었다. 물론 사전에 대공포 부대에게 통지했지만, 공습으로 인해 대공포 인원들이 너무 긴장한 나머지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
공습에 피격 당한 전함 웨스트버지니아의 조리병 도리스 밀러(Doris Miller)[22]는 장교들의 명령을 받아 중상을 입은 함장을 구호하였고, 일본 해군기의 공습이 계속되자 50구경 기관총으로 자발적으로 사격을 시작했다. 다만 그가 손수 1 - 2기의 일본군 함재기를 격추했다는 말이 상당히 많은데, 도리스 밀러의 해군십자훈장 공식 수훈 기록에는 그러한 내용은 없다. 애초에 격추 기록이 아니라 중상을 입은 함장을 구호하고 사전에 대공포 운용 및 훈련을 받은 경력이 없음에도 용기로 맞서 싸운 것에 큰 평가를 내린 것이다. 그리고 적기의 공격이 잦아들자 밀러는 다른 수병들과 함께 폭탄 같은 위험물들을 배에서 내리는 등 피해복구 작업에도 공을 세웠다. 이후 베니온 대령은 웨스트버지니아가 공습당할 때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전사하였고, 웨스트버지니아는 착저했지만 다행히 전복은 면했다. 불행히도 침수로 인해 선체에 갇힌 수병들은 대부분 구조받지 못하고 익사하고 만다.
4. 공습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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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폭격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미 해군 장병들이 불타는 BB-48 USS 웨스트버지니아 함에 접근하고 있다. | 완파된 애리조나의 잔해 |
일본 함대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린 것에 기뻐했으며 3차 공격을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제2항공전대를 이끌던 야마구치 다몬 소장과 몇몇 참모, 조종사들은 3차 공격의 필요성을 주장하였으나 나구모 제독은 미군들이 정신 차리고 대비를 하고 있으므로 기습의 효과가 줄어들어 오히려 피해가 증가할 것이란 점과 미국 항공모함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점을 이유로 들어 공격 중지를 결정하였다.
미국의 모든 항공모함이 이미 출항해 있다는 점으로 보건데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대실패가 된다. 나구모로서는 도상 연습에서 일본 함대에도 반수의 피해가 나올 거라는 결과도 있었고 야마모토 이외의 거의 모든 지휘관들이 반대하는 작전을 수행했지만 운이 좋게도 함선의 피해가 없는 이 정도의 전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상술했듯이 해군 군령부에서 진주만 기습 계획을 계속 반려하자 야마모토는 총사령관직을 사퇴하겠다며 반협박을 한 끝에 겨우 승인을 얻어냈었다. 사실 항공부대 지휘 경험이 전무한 나구모가 기습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된 것도 그가 수뢰전의 전문가이면서 동시에 해군에서 손꼽히는 조함 전문가라는 이유였다. 요는 작전은 실패한다 해도 배는 어떻게든 살려서 끌고 오라는 생각으로 그를 임명했던 것이다.
나구모의 이런 결정은 전후에 두고두고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나구모는 현재 일본에서는 전범 혹은 역적과 비슷한 위치다. 당장 일본의 태평양 전쟁 관련 서적에서 나구모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겁쟁이 혹은 새가슴 정도의 인물로 묘사된다. 그러나 당시 월등한 생산력을 가진 미국과 대결하는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항모(航母)를 한 대라도 잃으면 큰 타격을 입는 데다가, 원래부터가 일본군은 강화를 목표로 전쟁을 시작했기 때문에 결과론적으로는 몰라도 당시의 판단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 레이테 만 해전과 같은 이후의 일본군의 작전을 봐도 이 판단은 나구모의 오판이 아니라 일본군이 가진 단기결전사상에 기반한 것이다.
부하들은 "좋다. 대장이 그만 하고 돌아가자고 하면 따르겠다. 그런데 돌아갈 때는 올 때 처럼 빙 돌아 가지 말고 중앙 항로를 타고 직진하자"고 건의하였다. 항공기 정찰을 통해 돌아가면서 진주만에서 보지 못한 적 항모 2척을 찾아 격멸하자는 것이였다. 그러나 이것도 기각됐다. 나구모 장관은 정찰을 경시하였다. 그냥 전력을 보존한 채로, 왔을 때 처럼 빙 돌아서 퇴각하였다. 사실 나구모의 입장에서는 미항모가 진주만에 없던 시점에서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애당초 미항모가 진주만에 당연히 있다는 것이 작전의 전제였다) 만약 일본이 어떻게 미국 항모를 찾아서 공격을 한다 쳐도 그 성과가 미항모 전멸로 이어질지는 매우 미지수였다. 이미 하루종일 진주만을 두드리느라 일본 항모 항공대는 기력을 소진했지만 미국 항모 항공대는 싱싱한 전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억지로 싸움을 걸었다가 까딱하면 일본이 원래 목적대로 태평양 함대를 잘 격파하고도 되려 미 항모에게 역습을 당해 오히려 손해만 볼 수도 있었다. 즉 나구모 입장에서는 이미 이득을 많이 취한 상황에서 이득을 살려 철수하는 것이 최선이었다.[23]
나구모 제독의 지시에 따라 일본 함대가 신속하게 퇴각하면서 진주만 공습은 종료되었고 이 결정이 알려지자 일본 연합함대 사령부는 발칵 뒤집어졌다. 이참에 태평양 함대를 완전히 궤멸시켜야 된다고 주장하면서 야마모토 제독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려야 된다고 진언했지만 야마모토 제독은 현장에서 지휘하고 있는 나구모 제독의 결정이니 그게 최선일 것이란 이유로 묵살해버렸다.
5. 공습 이후
<rowcolor=white> 내셔널 지오그래픽 - 진주만 공습이 부른 대가 |
5.1. 일본 : 대환호, 그 이면의 논공행상
<rowcolor=white> 태평양 전쟁 개전의 라디오 방송 |
(일본 군가 바다에 가면 방송)
"임시뉴스를 알려드립니다. 임시뉴스를 알려드립니다. 대본영 육해군부 12월 8일 오전 6시 발표. 제국 육해군이 본 8일 새벽에 서태평양에서 미국·영국군과 전투 상태에 들어감.
제국 육해군이 본 8일 새벽에 서태평양에서 미국·영국군과 전투 상태에 들어감.
임시뉴스를 알려드립니다. 임시뉴스를 알려드립니다. 제국 해군은 하와이 방면의 미 함대 및 항공 병력에 대하여 결사의 대공습을 감행하고, 싱가폴 등지도 대폭격하였습니다.
대본영 해군부 오늘 오후 1시 발표.
하나. 제국 해군은 오늘 8일 새벽, 하와이 방면의 미 함대 및 항공 병력에 대하여 결사의 대공습을 감행함.
둘, 제국 해군은 오늘 8일 새벽, 상하이에서 영국 포함(砲艦) '페트렐'호를 격침함. 미국 포함 '웨이크'호는 동 시각 우리에게 항복함.
셋, 제국 해군은 오늘 8일 새벽 싱가포르를 폭격하여 큰 전과(戰果)를 거두었음.
넷, 제국 해군은 오늘 8일 이른 아침 '다바오', '웨이크', '괌'에 있는 적 군사시설을 폭격함."
(일본 군가 군함행진곡 방송)
태평양 전쟁을 알리는 NHK라디오 방송.[24]
"임시뉴스를 알려드립니다. 임시뉴스를 알려드립니다. 대본영 육해군부 12월 8일 오전 6시 발표. 제국 육해군이 본 8일 새벽에 서태평양에서 미국·영국군과 전투 상태에 들어감.
제국 육해군이 본 8일 새벽에 서태평양에서 미국·영국군과 전투 상태에 들어감.
임시뉴스를 알려드립니다. 임시뉴스를 알려드립니다. 제국 해군은 하와이 방면의 미 함대 및 항공 병력에 대하여 결사의 대공습을 감행하고, 싱가폴 등지도 대폭격하였습니다.
대본영 해군부 오늘 오후 1시 발표.
하나. 제국 해군은 오늘 8일 새벽, 하와이 방면의 미 함대 및 항공 병력에 대하여 결사의 대공습을 감행함.
둘, 제국 해군은 오늘 8일 새벽, 상하이에서 영국 포함(砲艦) '페트렐'호를 격침함. 미국 포함 '웨이크'호는 동 시각 우리에게 항복함.
셋, 제국 해군은 오늘 8일 새벽 싱가포르를 폭격하여 큰 전과(戰果)를 거두었음.
넷, 제국 해군은 오늘 8일 이른 아침 '다바오', '웨이크', '괌'에 있는 적 군사시설을 폭격함."
(일본 군가 군함행진곡 방송)
태평양 전쟁을 알리는 NHK라디오 방송.[24]
기지로 복귀한 후 진주만 공격대원들은 그야말로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다. 신문에서는 대서 특필하였고 일본 쇼와 덴노가 직접 치하하였다. 일본 전 국토는 흥분과 열광의 도가니에 휩싸였고, 일본 젊은이들은 앞다투어 일본 해군에 자원 입대를 하러 몰려들었다. 이는 일본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를 지지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일본 국민들은 전쟁도 원치 않았는데 군부의 협박으로 어쩔 수 없이 따른 희생양이라는 주장은 이 증거에 비추어 보건대 추잡한 변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막상 연합함대 사령부에서는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비교를 하자면, 진주만 공격 당일 별도로 출격한 특수 잠수정 10명 중 9명은 전사로 취급되어 2계급 특진을 받고 9군신(軍神)으로 모셔지며 장례도 국장으로 치러졌다. 나머지 1명인 공격대의 사카마키 가즈오 소위는 포로로 잡혔으나 일본군은 이를 기밀 취급하여, 공격대 정장 5명이 서명한 서장에서 서명을 지우고, 출격전 10명의 단체 사진에서도 삭제해 버렸다. 다만 이들이 전과가 0인것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공중 공격대의 최대의 전과였던 애리조나 함 격침을 특수 잠수정의 전과로 돌렸다. 제3국을 통해 들어온 뉴스 사진에 애리조나 격침 사진이 들어왔고 이것을 바탕으로 전 국민이 열광하는 가운데 성대한 국장이 치려졌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2월 11일 표창장을 수여하며 이들에게 "무훈발군"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그에 비해 이이다 후사타 대위[25]를 제외한 공중공격대 전사자 54명에 대한 2계급 특진 소식은 없었다.(일본군은 전사자에 한하여만 특진이 가능하였다.) 그것도 모자라 최대의 전과인 애리조나 격침을 빼았기는 수모를 당하였다. 잠수정 공격대의 전과는 전혀 없었고, 공중 공격대는 1개 함대 자체를 괴멸시킨 대전과였음을 생각해 봤을 때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차별이였다. 여기에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표창장이 한참이나 지난 4월 15일에 나왔고, 그것도 잠수정 공격대 보다 한단계 낮은 "무훈현저"였다.
알고 보니 연합함대 참모였던 미와 요시타케 대좌가 "무훈발군"으로 상신하였으나, 야마모토는 "나구모 장관이 더 적극적으로 연속 공격을 가했더라면 당연히 '무훈발군'이었는데, 한 번에 끝냈기 때문에 '현저'로 하라"고 한 것이다. 그외에도 참모장 우가키 마토메 중장이 자신의 일지에 "도둑이 작은 성공에 만족하여 달아나는 것 같은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불과 30대를 손상한 수준에서는 전과의 확대는 매우 중요함"이라고 기록하는등 연합함대 사령부에서는 나구모가 한번의 공격으로 끝낸 것에 대해 매우 강한 유감을 갖고 있었다.
이런 이후로 공격대 총지휘관이었던 나구모 제독은 진주만에서의 대전과와 이후 이어진 남방작전에서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 발언권이 전혀 늘어나지 않았다. 항모기동부대에 대한 대우도 미묘해서 전쟁 내내 전함부대에 비해 여전히 격이 낮은 취급을 받다가 전쟁 후반인 1944년이 되어서야 함대의 중핵이 되었지만 이 때는 이미 전세가 기울어진 뒤였다.
5.2. 무사했던 전함 외 시설물들과 숙련된 승조원들
일본 해군은 태평양 함대가 한동안 전함 전력을 굴리지 못할 정도로 막대한 피해를 입혔지만 정작 뻔히 보이는 데 있는 미국 태평양함대의 유류저장시설은 멀쩡했다. 사실 당시 이 시설에는 고작 정박시 두 달 치 분량의 연료만 있었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있지만 4,500,000 갤런의 연료가 폭발했다면 인명피해는 고사하고 화재 진화가 불가능했을것이다. 그리고 설령 아주 적은 양의 연료가 있었더라도 파괴된다면 그 순간 잔존한 태평양 함대 군함들은 연료가 없어서 항구에 주저앉게 된다. 이럴 경우 미국 군함들은 공격은 고사하고 다시 공습이 날아와도 탈출도 못하고 항구에서 그대로 고철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당장 필요한 연료도 미국 본토에서 느린 수송선으로 호위도 별로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위험하게 운송해야 한다. 거기다 유류저장시설이 살아 있으면 나중에라도 연료를 채워서 보급에 충분히 사용할 수 있으니 일본군 입장에서는 완전히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남겨뒀던 셈.여기엔 여러 요인이 겹쳤는데 우선 진주만 공습을 입안하였던 야마모토 대장과 겐다 중좌, 오니시 소장은 목표에 적의 함대의 균형을 무너트리기 위해 순양함들도 공격해야 한다는 등 약간의 견해차는 있었지만 공통적으로 목표를 진주만의 미 해군 주력함과 지상발진 항공기로 잡았다는 점을 우선적으로 알아야 한다. 애당초 진주만의 중유저장소와 공창, 건선거와 잠수함 기지등은 목표가 아니었다. 이는 태평양함대가 남방작전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였다. 공습 입안할 때와 실제로 전쟁을 지휘 할 때에 상황이 다르기에 현장 지휘관이 판단하여야 하는데, 나구모 중장은 이 판단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게 비단 나구모 주이치만 갖고 있던 방식이 아니라는 것. 일본군의 누구든 이 경직된 사상을 갖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작용한건 진주만을 살펴보고 온 스즈키 소좌의 브리핑이였다. 스즈키 소좌는 성실하게 미군의 전력을 파악하긴 했으나 오아후섬의 항공세력을 과다평가하였는데 그의 판단에 따르면 B-17 40대를 포함한 폭격기 140대, 최신형이던 P-38을 포함한 전투기 270대, 기타 45대로 판단하였는데 실제로 사용가능한 항공기는 143대에 불과하였고 신형인 P-38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런 정보부의 오아후섬의 항공세력에 대한 과다평가는 나구모 중장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기습으로 큰 피해를 주었음에도 아직 미군의 지상 항공세력이 충분히 반격을 가할수 있다고 믿었기에 이런 상황에서 3차 공격을 감행한다는건 있을 수 없는 일이였다.
게다가 해군 공창과 잠수함 기지[26]도 아주 멀쩡했다. 사실 일부 드라이 독에 들어가 있던 배들은 폭격을 받았으나 독 자체는 무사했다. 게다가 잠수함 기지는 처음부터 폭격을 염두에 두고 설계되어서 공격 받아도 별 타격이 없었을 거라고 한다. 이 점도 치명적이었는데 격침된 애리조나와 오클라호마를 제외한 모든 전함들은 인양되어 수리를 마치고 다시 전열에 복귀했기 때문에 진주만에서 침몰당한 전함은 4척이 아니라 사실상 2척이 된다.[27] 격침된 전함인 애리조나는 완전히 아작나서 21세기인 지금까지 포탑과 상부 구조물 등 수면 위로 나온 부분만 철거한 채 선체는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고, 오클라호마는 전복되면서 상부 구조물이 완전히 망가져서 인양된 후 해체를 위해 본토로 이송되다가 풍랑에 침몰되었다. 그리고 산호해 해전에서 중파당한 미 항모 요크타운이 신속하게 전열에 복귀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살아남은 드라이 독 덕분. 한편 이때 살아남은 미 해군의 잠수함들은 이후 사방에서 일본군의 보급선을 끊어버렸다.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던 요크타운과 잠수함 함대는 결국 미드웨이 해전,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 등의 전장에서 일본 해군에 엄청난 손실을 입힌다.
그렇지만 미드웨이 해전에서 70기가 넘는 함재기들의 공습에도 불구하고 미드웨이 비행장이 마비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해군 공창 같은 대규모 기반시설을 폭장량이 낮은 함재기들의 1회성 공습으로 파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나치 독일이 대량의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해서 강화한 곳이지만 영국은 독일의 유보트 기지를 파괴하기 위해서 5.4톤의 항공폭탄인 지진폭탄 톨보이까지 동원했었다. 그래서 진주만의 대규모 기반시설들을 파괴하려면 적어도 어느 정도 폭장량이 보장되는 중/대형 폭격기들로 지속적인 공습이 가해져야만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진주만의 유류저장고는 단순히 커다란 하나의 시설이 아닌 54개의 탱크로 된 시설이며 중유는 끓는점이 높은 관계로 불이 붙기 어려워서 연쇄적인 유폭을 기대할 수가 없으며 미군의 대공포화와 남아있는 전투기들의 요격을 감안하면 충분한 타격을 주기란 무척 힘들다. 당시 일본군 측 동원 가능한 폭격기가 75기 정도고 200미터가 넘어가는 전함을 상대로 명중률이 20%에 지나지 않아서 전함보다 훨씬 작은 유류저장고에 폭격기를 모두 투입하더라도 많이 파괴해봐야 54개중 10개도 파괴 못한다.
해군 파일럿의 포상 특성상 군함이 유류저장고나 시설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도 생각해봐야 한다. 군함, 특히 전함같은 주력함을 격침해야 훈장과 진급을 할 수 있는 파일럿들은 자연히 그쪽을 더 우선시하게 된다. 그것은 일본군만이 아니라 만국 해군 파일럿들의 공통된 사항이므로, 결국 상부에서 강제적으로 지시를 내리지 않는 한 파일럿들이 시설물을 더 파괴하긴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3차 공격을 감행하고 나면 겨울인지라 해가 빨리 지는 관계로 야간 착함을 해야 하는데 필리핀해 해전에서 미군이 등화관제까지 무시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했는데도 야간 착함 과정에서 80기가 넘는 함재기 손실이 난 것을 보면 3차 공격을 감행할 경우 일본군의 함재기 손실이 엄청날 것임을 생각해볼 수 있다. 진주만 공습때 2차 공격 후 공격대가 귀환한 시간이 12시 15분 가량인데, 그날 하와이의 일몰은 5시 12분이였다.
하지만 시설의 완전파괴가 아니라 부분적인 파손만 하더라도 미국 태평양함대의 복구속도를 줄일 수 있으며 하와이에 위치한 진주만의 특성상 군함과 관련된 중공업이 발달하지 못했고 모든 필요한 물자를 태평양을 절반이나 건너서 수송선으로 모두 수송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조금이라도 연료시설과 수리시설에 공격을 하지 않은 점은 일본군 입장에서는 매우 아쉬운 일이다. 실제로도 진주만에서 침몰한 전함을 인양하고 수리할 때 각종 자재와 공구 및 기계시설이 모자라서 지장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진주만을 2차로 공격한 항공대는 항공모함을 목표로 했으나 이미 없는 것이 1차 공격대 발진 이전에 확인된 상황이었으므로 일부라도 목표물을 시설물이나 보조함, 지원함쪽으로 돌리는 유연성이 있어야 했다. 실제로 2차 항공대는 임의로 공격을 진행했고 전함 네바다에 23기가 집중공격을 하는 등 비효율적인 공격을 했기에 이들 중에서 일부라도 공격의 목표를 돌렸으면 미국 태평양함대가 재건하는 기간을 상당히 늦출 수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 비록 3,000여명의 희생자를 내긴 했지만 숙련된 승조원들이 다수 살아남은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니미츠 제독은 만약 출항하여 해전을 벌였다면 대부분의 함정이 침몰하고 숙련된 승조원 2만여 명을 잃을거라 추산하였는데 정박 중 그것도 일요일이라 다수의 승조원들이 상륙(외출, 외박)을 나가고 영외자들의 경우 당직자 빼고 육상 거주지에서 쉬고 있는 상태에서 공습을 받았기에 대부분의 승조원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들은 나중에 급팽창하는 미 해군의 근간이 되었는데 2만명에 달하는 숙련된 승조원들을 모두 잃어버렸다면 미 해군의 어려움이 더욱 심해졌을 것이다. 일본 해군은 공습 당시 승조원들이 일요일엔 영외로 나가거나 쉬는 인원이 많이 대응이 느릴 것을 노렸고, 실제로 의도대로 되었으나, 그 반대 급부로 숙련된 인원들을 손실시키진 못할 것을 감수한 것이며 그 대가도 전쟁 기간 내내 치르게 된다.
종합해서 정리하면 분명히 전술적, '단기' 전략적으로는 매우 완벽했다. 괜히 완벽한 기습이라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태평양함대의 전함을 불구로 만든 것은 좋았으나 운이 나쁘게도 항공모함이 거기에 없었는데, 당시엔 몰랐으나 나중엔 이게 거대한 실책으로 돌아왔다. 더불어 미국에게 반격의 가능성을 제공함으로써 이는 바로 몇달 후에 둘리틀 특공대로 황궁이 있는 수도 도쿄를 대놓고 폭격당하면서 단 한 대의 폭격기도 격추를 못 시키는 치욕을 당할 뿐 아니라, 나중에 미드웨이에서 큰 피해를 입게 되었고[28] 항공모함의 가능성을 깨닫게 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초래함으로써 장기' 전략적으로는 대실패라고 말할 수 있다.[29]
5.3. 일본군의 하와이 상륙
한편 진주만에서는 일본군이 상륙작전을 펼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미군들이 잔뜩 경계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 활동가능한 군함들을 바다로 내보내서 일본 함대에 대한 수색을 반복하였다. 그리고 공습에 대한 노이로제가 생겨서 비행기만 지나가면 피아식별은 일단 뒤로 미뤄두고 대공사격부터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 때문에 아군의 대공포에 파손되거나 격추된 전투기도 여럿 있었다. 미국이 조금만 생각했다면, 일본군이 그렇게 철벽같이 요새화된 섬에 상륙할 리가 없다는 걸 생각할 수 있었을 정도의 혼란이었다. 실제로 진주만 공습은 상륙이 아니라 공습이었다.기본적으로는 진주만이 있는 오아후섬의 방어력이 매우 높다. 하와이 제도를 구성하는 섬 중에서 유일하게 중앙부에 위치하면서 근처에 인접한 섬이 없다. 오아후섬과 가장 가까운 섬이 몰로카이섬인데 양 섬 사이의 거리가 최소 45km이라서 드럼 요새를 공략하듯이 근처 섬에 상륙해서 포병진지를 건설하고 포격전을 진행하려고 해도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서 야마토급 전함의 주포인 94식 40cm 45구경장 함포도 사정거리가 최대 42km이므로 모자라고 유일하게 해안포용으로 단 1문 있는 열차포인 90식 24cm 열차캐논포(九〇式二十四糎列車加農)밖에 없는데 해당 열차포도 50.12km가 사정거리의 한계라서 몰로카이섬의 바닷가 해안 코앞에 설치해도 중요시설이 없는 오아후섬 동쪽 끝만 타격이 가능하다. 진주만을 몰로카이 섬에서 직접 포격하려면 최소 75km의 사정거리가 필요한데 그러려면 일본군이 보유하지 못한 유효사정거리 130km의 파리 대포라도 설치해야 할 것이다. 덤으로 둘다 열차포라서 설치하려면 철도를 따로 부설하던지 아예 요새포 수준으로 고정진지를 만들어야 할 지경이다.
그리고 하와이 자체의 방어력도 무시무시했다. 미국은 1945년 초부터 승리를 확신하게 되었고, 드넖은 본토에 단 1개의 연방 육군 사단도 남겨두지 않고 전부 유럽 전선과 태평양 전선으로 파견하고 본토 방어는 주방위군 육군에게 맡겼다. 그러나 진주만에는 태평양 전쟁이 끝나는 순간까지 1개 육군 사단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진주만 공습 당시에는 2개 육군 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해군과 해병대를 빼고도 말이다. 그리고 진주만이 있는 오아후 섬은 미국이 20세기 초부터 공을 들여 요새화시킨 세계 최강의 요새였다. 당시 요새화 수준을 놓고 분석하는 결과 중에는 2020년의 미군이 1945년의 오아후를 공격해도 24시간 내의 함락을 장담할 수 없을 정도라는 말도 있다. 일본군이 하와이를 상륙하는 것보다 차라리 미국 본토 서해안에 상륙하는 게 더 현실성이 느껴질 정도라는 얘기가 있었으니 말이다. 참조
하지만 애초에 공군으로 뚫렸다는 의미는 아무리 최강이란 소리를 들어도 그건 애초에 실제로 공격당하기 전 까지는 보증된게 아니다. 결국 공군 화력에 뚫렸다는건 결국 이론상 최강이란 의미인 셈, 그래서 진주만 공습 이후에는 미군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와이를 지킨다는 방침을 정하고. 어마어마한 수준의 병력증원을 실시한다.참조
따라서 진주만을 진심으로 함락시키려고 하면 기존의 진주만 공습에 참가한 병력에다가 연합함대가 동원가능한 대부분의 전력을 추가해서 진주만 공습을 진행하는 동시에 상륙부대를 진격시키고 상륙부대를 지원할 전함과 순양함도 동시에 출격시켜서 해안포와 군항 내부에 정박한 군함 및 각종 진지를 초토화시켜야 한다. 이렇게 할 경우 진주만 공습의 타격으로 혼란에 빠진 미군을 대상으로 승리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일본 제국의 육군과 해군의 모든 병력을 몰빵해서 진주만 공습과 함께 동시에 상륙 작전을 진행하면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막대한 희생도 동시에 감수해야 할 것이다. 일본군도 공수부대를 보유했으나 항공모함의 비행갑판에서 수송기를 발진시킬 수 없으므로 실질적인 투입이 불가능하며 일본군의 상륙 작전 능력도 대발동정으로 보병을 상륙시키는 수준에 불과하여 희생이 클 가능성이 높다.[30] 그리고 수송선을 좌초시키는 방법으로 간신히 상륙시킨 95식 경전차나 97식 중전차 기본형으로는 대전차능력이 낮아서 미군의 스튜어트 전차를 막기 어려우며 극소수가 투입가능할 것으로 예상되는 치하 개(改)만 1식 47mm 전차포를 탑재해서 스튜어트 전차를 정면에서 상대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상륙 작전에 대한 노하우 면에서도 당시의 일본군의 수준으로는 어려움이 예상되는데 미군도 수많은 희생을 치르고 상륙전술을 정립했고,(리치먼드 K. 터너 제독이 상륙전 최고 권위자였다) 그러고도 이오지마 전투 같은 참사가 났음을 고려하면 오하우섬 공략에 참가하는 일본군의 상륙전 노하우는 부족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여기에 더해서 앞서 설명했듯이 인근 섬이나 육지에 상륙해서 미군의 거점을 상대로 포격전을 전개하는 일본군의 공격방법을 적용할 수 없고 1식 육상공격기같은 육상비행장에서 이륙이 가능한 폭격기류도 동원할 수 없기에 전함이나 순양함들의 함포만으로 16인치 수준으로 구경이 크고 다양한 종류를 자랑하는 해안포를 상대해야 하므로 지원병력도 피해가 막대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일본군의 상륙병력의 규모도 상당히 축소된다. 물론 우쑹 전투에서 일본군이 사단 단위로 대규모의 병력을 상륙시킬 수 있다는 것은 입증되었으나 해군과 공군의 능력이 미미한 국민혁명군을 대상으로 했는데도 불구하고 해안선에 기관총을 설치한 벙커 때문에 전사자 2,640명과 부상자 7,569이 발생한 상황에서 광대한 태평양을 절반이나 건너서 오하우섬에 병력을 상륙시키려면 일본군에도 얼마 없는 고속수송함을 모조리 털어서 참가시켜야 하며 수송가능한 병력도 크게 줄어들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남방작전을 제대로 수행하기가 어렵게 된다. 안그래도 남방작전에 일본이 투입가능한 병력 규모가 아무리 많아도 12개 사단이 한계이며 그것도 상륙작전이 아니라 항구간의 운송 및 하역에 해당한다. 안그래도 중일전쟁으로 인해 다른 곳으로 동원 가능한 일본 제국 육군 병력에 한계가 있는데 남방작전을 하면서 하와이 함락까지 진행하려면 병력부족문제까지 발생하는데 이렇게 되면 남방작전이 실패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진다. 이래서 애초에 일본군의 수뇌부들이 하와이 함락은 생각도 안했고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 사령장관도 진주만 공습만 생각했던 것이다.
여기까지 오게 되면 진주만 공습과 하와이 함락을 동시에 추진하는 것은 어렵고 일단 원래 역사처럼 진주만 공습과 남방작전을 진행한 후 곧바로 다시 병력을 집결시켜서 하와이 공격을 추진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이미 방어력과 병력을 강화한 하와이가 해군전력과 항공력을 총동원해서 감시망까지 제대로 돌리는 상황이므로 말 그대로 여기서 함대결전급 대전투가 벌어지며 일본군에게 손해가 심해지기 때문에 이후에 하와이 함락을 성공할 가능성이 낮아지며 함락시키더라도 유지할 가능성도 매우 적게 된다.
여기에 더해서 하와이 공략과정이 길어질 가능성도 매우 높아지기에 마우이같은 하와이 제도의 다른 섬을 점령해서 임시 항구를 확보하고 파손된 군함을 수리하며 비행장을 확보해서 육상공격기와 공수부대를 투입할 준비등 부수적인 작전도 추가해야 한다. 이 정도쯤 되면 말 그대로 일본의 운명을 건 건곤일척급의 전투가 되며 패배하면 말 그대로 엄청난 손실로 인해 일본의 완전패배가 결정될 수준이 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았을때 하와이 점령을 처음부터 시도하지 않은건 이후 전쟁양상에 있어 조기에 전쟁을 끝내지 못한 중일전쟁만큼 절대적인 패착 요인었다. 진주만 공습당시 일본은 미국의 항모를 1척도 침몰시키지 못한데다 하와이도 미국 손에 그대로 쥐어준채로 철수 하였기 때문에 이후 미국은 하와이를 발판으로 서태평양에 해군을 적극 전개가 가능했다. 이는 스노우볼처럼 굴러가 기껏 일본이 점령한 동남아 지역에서의 제해권 상실로 이어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동남아지역을 상실하면서 일본의 고질병인 자원문제에 시달리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만약 일본이 하와이를 점령했다면 미해군의 서태평양 진출도 난항을 겪었을 것이고, 당시 일본에 가장 중요한 자원줄인 동남아를 탈환하는데도 실패하거나 장기전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1] 개전 직후 다른 공관원들과 함께 연금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정체를 들키지 않고 미일간 전시 볼모 교환선으로 일본으로 무사히 귀국하였다. 더 자세한 정보는 링크 참조.[2] 참고로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활동한 군함들의 연료는 중유를 많이 사용했다. 이는 당시 군함의 주기관이던 증기터빈에 증기를 공급하는 보일러가 중유 사용을 전제로 설계된 데서 연유한다. 무엇보다도 중유는 경유에 비해서 불순물이 상대적으로 많아서 가격도 저렴했기에 디젤기관에 비해서 많은 연료를 소모하는 증기터빈기관에 안성맞춤이었다. 덤으로 보일러와 경유는 상성이 상대적으로 좋지 않아서 2차대전 후 세계 각국의 해군이 중유 대신 경유를 연료로 사용할 때 보일러 사고가 빈발하여 상당히 골치를 앓았다. 당시 해군에서 경유는 디젤-전기추진을 채용한 잠수함에서나 사용했다.[3] 12월 초 하와이의 일출 시간은 현지 시간으로 오전 6시 30분. 도쿄시간 오전 2시[4] 정벌전쟁[5] 윤봉길 의사가 던진 물통 폭탄에 한쪽 눈을 잃었던 사람이다. 훙커우 의거 후 외교관으로 전향했다.[6] 해당 인물은 일본의 항복 후 더글러스 맥아더와 히로히토가 직접 대면한 자리에서 통역을 맡기도 했다.[7] 구어체 표현으로, 중대한 외교 문서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결례이다. 선전포고문 전체에서도 "American Government"와 같은 비형식인 명칭이 여러 번 등장한다. 일본어 원문에서는 '합중국 정부'라고 되어 있는데 이를 제대로 번역할 경우 Government of United States로 번역했어야 했다. 심지어 번역본을 보내기 직전에 상대방을 "America"라고만 호칭하는 것은 모호하지 않느냐는 질문도 '헷갈려할 리가 없다'면서 묵살되었다.[8] 아무리 잘 해봐야 '숙고하다'에 해당하는 무게감의 동사인 consider를 사용했기 때문에, '결론을 내렸음을'으로는 해석될 수 없는 문장이다. 해당 부분은 일본어 원문에서는 認むる(인정함)이라고 되어 있다.[9] Prange, Goldstein, and Dillon, At Dawn We Slept, pp. 424 and 475[10] 주일 미국대사 조셉 그루는 일본 제국이 정부청사 및 황거 출입금지를 통보해 주일 미국대사관 안에서 억류되었다.[11] 그러나 아우터브릿지는 이후로도 다른 배를 타며 해군에 복무하여 해군 소장까지 올라갔다. 한편 워드는 구형 구축함이다보니 쓰임새가 줄어 수송선으로 개조되었다. 특이한 점으로 1944년 워드는 카미카제 공격을 받아 화재가 발생하자 승무원들을 퇴함시킨 후 알렌 M. 섬너급 구축함 오브라이언이 포격으로 처분했다는 것인데, 이 오브라이언의 함장이 바로 아우터브리지였다.[12] 폭뢰를 투하했으나 맞지 않았고, 코닝타워에 한 발을 제대로 맞아 격침된 것이 확인되었다.[13] 이후 타일러 대위는 별 문제 없이 군 생활을 이어나가고, 1961년에 중령으로 전역하였다.[14] 49분에 있었던 공격 개시 신호 '도 도 도'랑 헷갈려 표기하는 경우도 있는데, 일본 모스 전신부호상 장음은 "쓰", 단음은 "도"였다. '도라 도라 도라'와는 전혀 관계 없다.[15] 위의 전문을 자세히 보면 This is not a drill에서 관사 a가 빠져 있는 'This is not drill' 이고, DRILL 역시 I부분을 E로 썼다가 수정한 것을 볼 수 있는데, 긴급상황에, 비상사태이기 때문에 한 자, 한 자 일일이 확인해가며 보낼 수 없어서 그냥 보낸 것이다.[16] http://www.navsource.org/archives/01/37a.htm The Honorable Brad Henry, Governor of Oklahoma, delivers his remarks during a joint Oklahoma Memorial Committee/National Park Service dedication ceremony for battleship Oklahoma (BB-37) on historic Ford Island. The memorial honors the 429 Sailors and Marines aboard who lost their lives after being hit by five torpedoes and capsizing at Pearl Harbor on 7 December 1941.[17] http://www.navsource.org/archives/01/48a.htm West Virginia (BB-48) shown here on 17 June 1942 being made seaworthy for the trip to the mainland for permanent repairs. The extent of the damage to the port side above the armor belt is evident in these two photos. The shallow depth running of the torpedoes and the initial list of the ship concentrated most of the damage above the side protective armor belt of the ship. A total of seven torpedoes and two bombs (modified 16"armor piercing naval shells fitted with fins) struck the ship during the Japanese attack.[18] 배에 구멍이 나서 물에 잠기거나, 폭격으로 화재가 발생할 때 다른 구역으로 화재, 침수가 번지지 않게 막으면서 최대한 응급수리를 하는 것이다. 침수의 경우 방수 격벽 등을 이용하여 침수된 부분이 다른곳으로 번지지 않도록 막고, 불을 끄고, 유폭 위험이 있는 탄약에는 바닷물 부워 유폭을 방지하고 전기는 차단하는 등의 활동을 말한다.[19] 'Isaac C(Campbell). Kidd'. 이 사람의 이름은 키드급 구축함 1번함을 거쳐 알레이 버크급 구축함 100번째 함선의 함명이 되었다. 트랜스포머 2에서 장착된 레일건으로 데바스테이터를 아작냈던 그 함선이다.[20] 일본군의 대표적인 에이스 사카이 사부로조차 이런 장기간 비행으로 인한 피로 때문에 후방기총을 장착한 SBD 돈틀리스를 후방기총이 없는 F6F 헬캣으로 착각하는 실수를 범했고, 결국 한쪽 눈을 잃었다.[21] 그러나 장시간 비행에 따른 조종사의 피로는 국가와 기종을 불문하고 임무 자체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 조종사가 누릴 수 있는 공간이 작은 전투기일수록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비단 일본군이나 제로기만의 문제점이 아니다. 그리고 이는 훗날 한국 공군이 공중급유기를 도입하려고 할 때 반대론자들이 근거로 들이미는 논리이기도 했다.[22] 도리스 밀러는 CVN-81 제럴드 포드급 항모 4번함의 함명으로 명명된다.[23] 그리고 실제로 나구모가 취해온 이득만으로도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매우 유리하게 시작했다. 그 뒤로 야마모토의 조급증과 망상으로 비롯된 미드웨이 해전등으로 기껏 취한 이점을 하나씩 차례차례 날려먹었다.[24] 참고로 저 차임음은 음계만 약간 바뀌어 현재도 NHK의 긴급지진속보에서 지진속보 첫 고지 이후 각 지역별 진도를 알리기 전에 나온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KBS, MBC의 정오/저녁 라디오 종합뉴스에서도 비슷한 실로폰 차임음이 나오는데, 그 이유는 별 거 없이 전자음악이 태동하던 1970년대 이전부터 계속 쓰여오던 수단으로 사실상 전자음악이 없던 시절엔 스튜디오 한 켠에 비치된 실로폰이나 오르골이 라디오 방송 중 국면 전환 용도로 써먹기 딱 좋은 음향효과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일본국유철도 문서에 있는, 1950년대말 제작된 도쿄발 모리오카행 디젤동차에 관한 다큐멘터리에도 오르골을 사용해 차내방송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25] 소류 전투기대 분대장으로, 연료탱크가 피탄당해 격추당하자 미군 기지를 향해 충돌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전사했다. 이에 이이다 대위는 2계급 특진을 받았고 미군도 정중히 장례를 치러줬다. 현재도 하와이에는 그가 추락한 지점에 그의 묘비가 남아있다.[26] 니미츠가 태평양 함대 잠수함대 지휘관 시절 본토에서 잉여 물자를 끌어다가 지었다.[27] 미국과 영국 해군 항공대가 공동으로 구레를 두들겨서 일본의 잔존 군함들 거의 대부분을 갈아버린 1945년의 구레 군항 공습을 갖고 정신승리하는 것도 이것과 대조해보면 그냥 정신승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이것을 놓고 미국의 수리능력이 뛰어났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지만 꼭 그렇게 보기도 어려운 것이, 타란토 공습 때의 이탈리아도 침몰한 전함 3척 중 2척을 수리해 현역에 복귀시켰다.[28] 미드웨이에서의 피해가 좀 크긴 했지만, 치명적이랄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가장 큰 건 1942년 후반부터 벌어진 과달카날에서의 소모전이다. 괜히 과달카날 전선이 독소전쟁의 쿠르스크 전투와 동급 그 이상으로 평가받는 게 아니다.[29] 같은 섬나라임에도 전투에선 자주 패배하지만 전쟁에선 이긴다는 영국과 비교되는 일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긴 하다. 일본이 벤치마킹한 프로이센을 계승한 독일 제국, 나치 독일도 전장의 승리에 집착해서 전쟁의 패배를 불러오는 공통점은 흥미로운 요소다.[30] 일본군의 수륙양용전차인 특 2식 내화정 카미는 1942년에나 개발이 완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