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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카와 단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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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이치카와 단쥬로 하쿠엔의 출연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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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이치카와 단쥬로 하쿠엔
第十三代目 市川團十郞 白猿 | Ichikawa Danjūrō ⅩⅢ Hakuen
파일:이치카와 단쥬로 프로필.jpg
<colbgcolor=#BC002D> 본명 [ruby(堀越, ruby=ほりこし)][ruby(寶世, ruby= たかとし)][1](호리코시 타카토시, Horikoshi Takatoshi)
예명[2] 제7대 이치카와 신노스케
제11대 이치카와 에비조
제13대 이치카와 단쥬로 하쿠엔(2022년 11월 습명)
출생 1977년 12월 6일([age(1977-12-06)]세)
도쿄도 메구로구 아오바다이
거주지 도쿄도 시부야구 요요기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신체 176cm, AB형
학력 아오야마 학원 유치원(수료)
아오야마 학원 초등부(졸업)
아오야마 학원 중등부(졸업)
호리코시 고등학교(졸업)
가족 친증조 7대 마츠모토 코시로(1870-1949)[3]
친할아버지 11대 이치카와 단쥬로(1909-1965)[4]
친할머니 호리코시 치요
아버지 12대 이치카와 단쥬로(1946-2013)[5]
어머니 호리코시 키미코(1952-)
여동생 4대 이치카와 스이센(翠扇)(1979-)[6]
아내 코바야시 마오(2010년 결혼/2017년 사별)[7]
장녀 (혼외자)(2002-)[8]
차녀 4대 이치카와 보탄(2011-)[9]
장남 8대 이치카와 신노스케(2013-)[10]
고모 초대 이치카와 쥬코(1949-)[11]
당숙 2대 마츠모토 하쿠오
육촌 10대 마츠모토 코시로, 마츠 다카코
칠촌 조카 8대 이치카와 소메고로
취미・특기 농구, 스모 감상
직업 가부키 배우
야고[12] 나리타야(成田屋)
문장 파일:172F4A4A-1F52-4F32-9E40-FF0AF2490E0C.png
링크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Ameba 아이콘.svg
1. 개요2. 생애3. 연기 스타일4. 세습명에 관하여5. 나리타야 단명 징크스6. 논란 및 사건 사고
6.1. 11대 이치카와 에비조 폭행 사건
7. 여담
[clearfix]

1. 개요

가부키 제1명문가 나리타야 이치카와 종가의 현 당주로 일본의 인간 국보이다.[13]

영화브라운관에서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는 배우이며 어린 시절부터 대단한 집안, 잘생긴 외모,[14] 뛰어난 연기력으로 주변 사람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으며, 이를 증명하듯 어떤 배역을 맡든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다.

하지만 젊은 시절부터 지속된 여성편력과 더러운 술버릇, 유아독존형 성격 때문에 그만큼 많은 욕을 들어먹고 있고, 그 오만한 성격 때문에 술집에서 얻어맞은 피해자임에도 도게자를 한 추태를 보여준 인물이기도 하다. 현재는 나이도 나이이지만 아내의 사별과 함께 재혼도 하지 않은채 아이들을 키우며 여러가지 논란도 줄면서 이미지 반전에 나름 성공하고 있다. 여러모로 복잡한 인물.

이름의 표기와 세습명에 대한 건 아래 문단을 참고.

2. 생애

파일:8EBEF236-E878-4C25-82BB-5DA83772AFEB.jpg
부모님과 오미야 참배
1977년 12월 6일, 가부키 배우이자 당시 이치카와 종가 나리타야의 당주를 지내던 12대 이치카와 단쥬로와 부인 호리코시 키미코[15]사이에서 1남 1녀 중 첫째로 장남이자 외아들로 도쿄에서 태어났다.

친조부로는 쇼와 시대 가부키 스타이자 원조 '에비사마'로 불렸던 11대 이치카와 단쥬로를 두었다.

친가인 나리타야 가문은 에도시대부터 시작해 350여 년의 역사를 지닌 가부키 4대 명가 중에서도 제1가문으로 일컬어지는 이치카와 종가였고, 현대까지 내려오는 수많은 '18번' 드립의 원조가 된 가부키 18번(歌舞伎十八番)을 창시했다.[16] 에비조는 그 자체가 가부키역사이자 수많은 가부키 가문의 최정점에 서 있다고 해도 무방한 나리타야의 장자로서, 전설이자 간판급 이름인 '이치카와 단쥬로'를 습명받을 하나뿐인 후계자였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파일:호리코시타카토시.jpg
네 살의 13대 이치카와 단쥬로 하쿠엔
당시 호리코시 타카토시 군이라 불렸다
파일:나리타야 동시 습명.jpg
1985년 12월, 동시 습명 피로연에서 아버지와 함께
5살이 되던 1983년에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에서 주인공 히카루 겐지의 아역을 맡아 하츠오메미에[17]를 치렀다.
파일:12대 단쥬로.jpg
습명을 앞두고 아버지 12대 이치카와 단쥬로에게 발성 지도를 받는 모습[18]
파일:신노스케 단쥬로 칸자부로.jpg
동시 습명식에서 니라미를 피로하는 아버지와
1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와 함께
이후 7살 때 아버지 12대 이치카와 단쥬로와 함께 동시 습명을 받으면서 '7대 이치카와 신노스케(7代目市川新之助)'라고 불리게 된다. 습명 피로 공연은 1년에 걸쳐 진행되었으며,[19] 일본의 내로라하는 톱스타들과 정재계 인사는 물론이고 아키히토미치코 황후까지 피로연에 참석했다.
파일:27D00ADB-5391-4360-8804-5E009A540600.jpg
습명 피로연에서 아버지와 우이로우리를 연기한 모습
3살 즈음에 집 앞 공원에서 유도심문이 있었고,[20] 그 후로 혹독한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 하루에 렌지시(連獅子)[21] 동작을 100번 넘게 하거나, 몇 시간동안 쥐가 나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정좌를 하고 앉아 대사를 읊어 목이 다 쉬어버리는 일은 다반사였으며, 가부키 외에도 고전 무용, 악기 연주, 노래까지 전문가 수준으로 습득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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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야마 학원 초등부 5학년의 이치카와 단쥬로
이 때문에 본인은 엄청나게 힘들었던 기억뿐이라서 '가부키 가문 아들들은 좋겠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 말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으며, 고된 연습과 가문을 이어야 한다는 중압갑이 부담스러웠다고 한다. 항상 다정하던 아버지가 연습만 할 때면 도깨비(鬼:おに)처럼 변하는 것도 싫었다고. 때문에 중학생 시절에는 머리를 금발로 염색하고 다니거나 하는 식의 반항도 했었다고 한다.

또래 가부키 가문 자녀들과 어린 시절부터 친분을 맺었고, 나리타야 다음가는 최고 명문가인 오노에 종가 오토와야의 장남 8대 오노에 키쿠고로[22]와는 나이도 동갑일 뿐더러 아오야마 학원 유치원부터 중학교까지 함께 다녔던 소꿉친구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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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이치카와 신노스케 시절의 프로필
1989년, 8대 오노에 키쿠고로와 함께 고전 무용 수업[23]을 받는 단쥬로

이치카와 종가 나리타야의 유일한 적통자인 만큼 단쥬로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늘 대접받으며 자랐는데, 그 때문인지 이런 일화도 있다. 8대 오노에 키쿠고로의 초대를 받아 놀러간 별장에서 심한 장난을 치자 8대 키쿠고로의 어머니[24]가 단쥬로를 엄하게 야단쳤고, 이때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가 아닌 사람에게 혼이 난 경험이었다고 한다.
파일:ichikawa ebizo 1990.gif
1990년, 아오야마 학원 중등부 1학년의 이치카와 단쥬로
집안 고용인들은 귀한 도련님께서 다른 길로 새지 않고 연습에 주력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단쥬로가 초등학교 4학년때 국회의사당 견학을 갔는데, 이제 연습하러 가야한다고 말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커다란 하얀색 롤스로이스가 에비조를 태우러 와서 다들 깜짝 놀랐다고 한다. 참고로 일본사립부속학교 대부분이 그렇듯 아오야마 학원 역시 금수저들이 많이 다니는 부자 학교였음에도 불구하고 반 아이들은 '호리코시[25]는 역시 대단하구나'라고 수근거렸다고.

이 시기쯤 13대 이치카와 단쥬로는 매번 힘든 연습과 외워도 끝이 없는 대사, 혼내기만 아버지에 의해 잠시 가출을 했었다. 어머니인 키미코는 장남이 사라졌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아 졸도하기도 했다고. 심지어 바로 그 주간의 주말에는 13대 이치카와 단쥬로의 칸진쵸 연목이 예정돼 있었기에 가문의 사람들은 당장 그를 찾아야 한다며 당시 가문의 당주이자 13대 단쥬로의 아버지인 12대 이치카와 단쥬로를 재촉했지만 12대 단쥬로는 사람을 보내지 않고 그저 아들인 13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돌아오는 것을 묵묵히 기다려주었다고 한다.

이때 13대 이치카와 단쥬로는 결국 '나는 가부키를 해야 하는구나, 이것이 나의 일이구나'[26]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 연습장에 돌아와서 아버지와 연습을 마무리하고 무사히 칸진쵸 무대에 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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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NHK 대하드라마 <꽃의 난(花の乱)>에서 마츠 타카코와 함께
1994년, NHK 대하드라마 <꽃의 난(花の乱)>에서 아버지 12대 이치카와 단쥬로의 아역으로 출연해[27] 브라운관에 정식으로 데뷔한다. 이때 상대역이였던 인물이 2대 마츠모토 하쿠오의 막내딸이자 동갑내기 6촌 여배우 마츠 타카코였다.[28]

이후 두 사람은 다니던 학교를 중퇴하고 함께 호리코시 고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단쥬로는 아오야마 학원, 다카코는 시라유리 여학원에 재학중이었는데, 단쥬로는 학력미달로 고등부에 진학하지 못하고 유급한 것이 이유였고, 다카코는 '연예계 활동 병행 금지'라는 학칙이 이유였다.
파일:0606BFFD-FBFC-4FBE-9CA6-50A9ECA72D89.jpg파일:에비조 단쥬로 보탄.jpg
1995년, 아버지 12대 이치카와 단쥬로, 여동생 4대 이치카와 스이센과 함께 자택에서
파일:1E38FA97-E4F9-4B44-86C7-D88FD480A275.jpg
2000년, 첫 데뷔 무대였던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의 주역 '히카루 겐지'
22세였던 2000년에는 첫 데뷔 무대였던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의 주역 '히카루 겐지'를 연기했는데, 보름 내내 만석이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하면서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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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NHK 대하드라마 <무사시(武藏)> 中 미야모토 무사시 역
2003년에는 NHK 대하드라마 <무사시(武藏)>에서 시대의 풍운아 미야모토 무사시 역으로 브라운관에서 첫 주연을 맡았다.

<무사시>에서 미야모토 무사시 역으로 호연을 펼쳤으나 드라마 자체는 문제가 많았다. 난잡한 각본과 원작 훼손,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영화의 표절, 외설적인 표현, 심지어는 이치카와 본인도 주연 중 한 명인 츠츠미 신이치와 크게 트러블이 생겨 촬영을 거부한 적도 있었다. 이 때문인지 드라마는 16.5%라는 그리 높지 않은 평균시청률을 기록했고, 평가 역시 높지 않다.

이 시기에 달에 50번 이상은 초밥을 먹으러 다니고 , 담배에 맛들렸다. 건강 상태도 갈수록 악화되어 갔으며 특히 초밥의 영향으로 살이 쪄서 연습 도중에 힘들다며 두 시간 가량을 누워서 쉬기도 했었다고. 보다 못한 12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심하게 꾸짖자 이치카와 에비조 습명을 위해서라도 금주, 금연하기로 결심하였고 생선과 고기류는 식탁에 오르지도 못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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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대 이치카와 에비조 습명 직전
7대 이치카와 신노스케 시절의 모습
당시 7대 이치카와 신노스케로서 일본에서는 신짱, 신노스케라 하면 이 캐릭터가 아닌 7대 이치카와 신노스케를 뜻하기도 했을 정도로 인기 몰이를 했다. 오죽하면 '신노스케 씨'[29]와 '신 짱'으로 구별하여 불리며 완화되기도 하는 등 이름 때문에 여러 해프닝이 있기도 했다.

참고로 혼외자 딸에 대한 존재가 알려진것도 이 시기였다. 기자 회견에서 아이의 어머니와 이미 상의를 마쳤으며,[30] 월 100만엔 이상의 양육비를 지원해주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해애 몇 번은 아이를 만나는 시간을 가지고 있으며, 성인이 돼서도 아이가 원한다면 교류할 생각이 있다고 했다. 일단 가부키 배우에게 있어서 혼외자가 있다는 것은 그리 큰 흠이 되지 않는다. 무대에서 본업에 충실하고 아이를 경제적으로 책임지기만 해도 계속해서 활동하는것을 용인해주는 분위기이기 때문이다.[31] 심지어 13대 이치카와 단쥬로의 부친인 12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아들에게 사생아가 있다는 사실보다 욕실에서 발목을 다쳐서 공연에 못 올라간 것을 꾸짖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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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1대 이치카와 에비조 습명 피로연의 니라미
2004년 5월, 드디어 아버지에 이어 이치카와 에비조(海老藏)를 물려받아 '11대 이치카와 에비조'로 불리게 된다. '이치카와 에비조(市川海老藏)'라는 이름은 일본 가부키계에서 상당히 중요한 이름으로, 나리타야에선 대대로 계승자의 이름을 '신노스케(新之助) - 에비조(海老藏) - 단쥬로(團十郞)'의 순으로 물려줬기 때문에 이 이름을 물려받았다는 것은 순조롭게 가문의 후계자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뜻했다.

그 뒤 프랑스 파리에서도 가부키 공연을 하고, 이 공연이 프랑스는 물론이고 유럽 전역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게 되면서 국제적인 명성까지 얻게된다.[32] 이후 각종 CF와 영화, 드라마에 출연하며 일본 연예계의 톱스타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

이후 남성다움과 잘생긴 외모로 '에비사마'로 불리면서 가부키계의 젊은 인기 스타로 떠오르는데, 당시 에비조를 보려는 사람들 때문에 가부키좌의 좌석이 매일같이 북새통을 이뤘을 정도. 또 삭발로 등장한 이토엔(伊藤園) '오이오챠(お-いお茶)' 광고로도 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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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29일,
코바야시 마오와의 약혼 발표
파일:에비조 마오 결혼 피로연.jpg
2010년, 결혼 피로연에서
2009년 말, 니혼 테레비 아나운서인 코바야시 마오(1982)와의 약혼을 발표했으며, 다음 해의 7월에 도쿄 프린스 호텔에서 성대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11대 에비조와 마오의 결혼식은 황실계 다음가는 수준으로 진행되었으며 같은 가부키 배우들은 물론이고 연예계와 정재계의 거물들이 여럿 참석하였다. 또한 해당 결혼식은 NHK를 비롯한 많은 방송사에서 결혼식 1부와 2부, 그리고 피로연을 생중계하였고 특집 다큐멘터리를 중간중간 편성하였으며 재방송 일정까지 잡혀있을 정도였다.[33][34] 아내인 마오의 허락으로 이치카와 에비조 습명 이후로 금식하였던 고기, 생선류를 다시금 먹게 되었고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 금연은 유지하되 금주는 그만두었다. 그러나 이는 후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말았는데...
파일:호리코시 일가.jpg
레이카시치고산을 맞아 촬영한 가족사진.
결혼 이듬해인 2011년 차녀 호리코시 레이카를, 2년 뒤인 2013년에는 장남이자 후계자호리코시 칸겐을 얻었다. 동년 2월에는 부친상을 겪었는데, 12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그토록 고대하던 장손의 탄생을 딱 한달 앞두고 백혈병으로 사망한 것이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샀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사망에 슬퍼할 겨를도 없이 예정된 공연 일정을 전부 소화해내야 했던 13대 이치카와 단쥬로는 아버지의 발인식 이후, 연습장으로 돌아가 일부러 울음소리를 크게 내질러야 하는 역들을 위주로 연습하며 연습장이 떠나가라 목소리를 긁고 울부짖으며 연습하였다. 당시 그와 함께 연습 현장에 있던 문하생들이 그의 모습에 눈물을 참았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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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장남 칸겐의 하츠오메미에
2015년에는 큰 경사가 있었다. 아들인 호리코시 칸겐이 가부키 배우로서의 첫 데뷔나 마찬가지인 하츠오메미에를 치르게 된 것. 당연히 특집 다큐로도 방영됐으며, 단쥬로는 만 2세의 어린 나이답지 않게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야무지게 자기 소개를 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흡족해 했다. 그러나 1년 남짓 후인 2016년 6월 9일, 직접 기자회견을 열어 아내 코바야시 마오가 유방암 3기 진단을 받았다고 밝혀야 했다. 실은 1년 6개월전 받은 건강검진에서 암 진단을 받아 투병중이였고, 투병 사실을 알리지 않았으나 극장을 포함한 공식석상에 단쥬로와 아이들만 등장하여 온갖 억측이 돌자 직접 기자회견을 열었다고.
파일:에비조 기자회견.jpg파일:1000012431.jpg
2017년, 마오의 사망을 고하는 11대 이치카와 에비조
2017년 6월 22일, 유방암으로 투병하던 아내 코바야시 마오가 끝내 사망했다. 22일, 여느 때처럼 연습을 하던 11대 에비조에게 마오가 위독하다는 라인 메세지가 왔고 에비조는 급히 달려가 마오의 임종을 지켰다. 코바야시 마오는 자신의 투병 생활을 블로그에 공개했다. 82년생인 그녀가 너무 젊은 나이에 왕성히 활동하던 남편과 생때같은 두 아이를 두고 떠나게 된 걸 일본 국내는 물론 외국 외신들도 전하며 안타까워 했다.[35]
파일:1C2000CE-0E56-4EEB-8C42-C3E3DF557AFA.jpg파일:칸겐 타카토시.jpg
2017년 7월, 아내가 사망한 후 장남 호리코시 칸겐의 첫 무대를 준비하는 당시 11대 이치카와 에비조
마오의 사망 직후에 이뤄진 무대였기에 리허설 시작 전에 마오의 영혼을 기리는 의식을 진행하였다. 아직 어린 칸겐은 이를 어머니의 죽음이라 받아들이지 못하여 그저 해맑게 웃으며 아버지를 따라 합장을 하는 모습에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 했다. 영상[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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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장녀 4대 이치카와 보탄, 장남 8대 이치카와 신노스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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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섰던 무대를 35년 뒤, 자신의 아들과 다시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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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13대 이치카와 단쥬로 하쿠엔 습명을 앞두고 자녀들과 스카이트리 산바소 피로 점등식에 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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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13대 이치카와 단쥬로 하쿠엔 습명 기념으로 SEIKO 행사에 초청
2023년 1월 28일, 제69대 요코즈나 하쿠호 쇼(白鵬 翔)의 단발식에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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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8대 이치카와 신노스케의 스케로쿠 무대에서
2023년 6월, 나리타야의 습명 피로연에서 장남 8대 이치카와 신노스케의 스케로쿠 무대를 옆에서 지켰다. 기념비적인 첫 무대였고 워낙 신노스케가 연습을 많이 한 연목이었기에 훌륭하게 해냈다고 자랑스러워 했으며 최고의 아버지의 날 선물이었다고 평했다. 사별한 아내인 마오가 생전에 좋아했던 연목이었고 '언젠가 칸겐이 연기하는 스케로쿠가 보고 싶다'고 여러 차례 말했었으며, 작고한 아버지 12대 이치카와 단쥬로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던 연목이었기에 두 사람이 함께 없는 것이 안타까워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파일:이치카와 종가.jpg
2023년 6월, 이치카와 종가 호리코시 일가[37]

3. 연기 스타일

훤칠한 외모로 여러가지 배역들을 소화 가능하며, 허스키한 목소리와 물 흐르는 듯한 자연스러운 연계와 강력한 동작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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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이치카와 단쥬로 하쿠엔의 니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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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이치카와 단쥬로 하쿠엔의 무사시보 벤케이
니라미, 미에 스타일은 우키요에 속 야쿠샤에 그림들과 비교해 똑같다고 해도 될 만큼 정석적인 스타일로 한다.

가부키 외의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도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다. 덧붙여 큰 목소리를 낼 때 입이 마우스피스를 문 것처럼 공간이 생긴다.

기본적으로 가부키 출연에 집중하는지 영화나 드라마 출연 비율은 적다. 다만 유명세 때문에 출연하면 비중 있는 역이 많다. 영화 쪽에서는 미이케 다카시 영화에 자주 출연한 편.[38]
2020 도쿄 올림픽 개막식 中 시바라쿠
나리타야 역대 이치카와 단쥬로들의 대표 연목이자 자신작인 시바라쿠를 도쿄 올림픽 개막식에서 선보였다.
11대 이치카와 에비조 습명 직전 촬영한 CM

4. 세습명에 관하여

파일:초대 이치카와 단쥬로 가고일.jpg파일:초대 이치카와 단쥬로 후대.jpg
9대 이치카와 단쥬로[39]의 석상 앞에서
12대 이치카와 단쥬로, 13대 이치카와 단쥬로 하쿠엔 父子
나리타시를 연고지로 둔, 나리타야의 이치카와 단쥬로라는 세습명은 이 인물의 전 세습명이치카와 신노스케, 이치카와 에비조와 마찬가지로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세습명이다. 본 항목의 당대 단쥬로는 13대째이며 13대 이치카와 단쥬로 하쿠엔()을 자칭한다. 이는 본래 5대 이치카와 단쥬로 하쿠엔이 최초로 자칭하였던 세습명인데 이를 당대인 13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200여 년이 지난 지금 부활시켰으며 13대 이치카와 단쥬로 습명 당시, 5대 이치카와 단쥬로의 하쿠엔을 그대로 습명받겠다고 선언하였다.

하쿠엔이란 2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미마스 이외에 사용하였던 일종의 배우명이었다. 2대 이치카와 단쥬로는 莚이라 자칭하였는데 이를 5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원숭이사람에게 털이 세 올 모자르다'라는 속담[40]에 빗대어 지금의 으로 만든 뒤 '나의 실력은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따라가기에 턱 없이 부족하며 선조들의 실력을 따라잡기 위해서, 그리고 그러한 마음가짐을 잊지 않겠다'라는 의미를 부여하였다. 5대 이치카와 단쥬로 이후로 그의 손자인 7대 이치카와 단쥬로와 후손인 8대 이치카와 단쥬로, 7대 이치카와 에비조가 같은 마음가짐으로 자신의 배우명으로서 사용한 기록이 있다.[41] 다만 정식 세습명으로 간주된 경우는 5대 이치카와 단쥬로 하쿠엔 이후로는 13대 이치카와 단쥬로 하쿠엔이 유일하다.

13대 이치카와 단쥬로 하쿠엔은 자신이 '하쿠엔'을 쇼치쿠에 부탁한 경위에 대하여 자신이 아버지와 조부의 실력에 미치지 않은 상태에서 습명을 받게 된 것이 가장 크며 그들이 활동한 이치카와 단쥬로의 명예를 실추 시키고 싶지 않다는 포부를 담고 있다 밝혔다.

이처럼 언론 등의 대외적으로는 편의상 13대 이치카와 단쥬로라 불리지만 가부키 활동명이자 정식 세습명으로는 공식적으로 13대 이치카와 단쥬로 하쿠엔이라 표기하는 것이 맞다.

여담으로 당대의 장남이자 후계자8대 이치카와 신노스케가 이 하쿠엔이라는 배우명이 멋있어 보였는지 자신이 이치카와 단쥬로의 명적을 습명받게 되면 하쿠엔도 함께 잇고 싶다는 의지를 보였다.

5. 나리타야 단명 징크스

나리타야 이치카와 단쥬로 명적은 가부키 가문 내에서도 역사 깊고 선망 높은 가문의 당주의 명적이라 그 가치가 고귀하다. 그러나 그런 명성에도 불구하고 나리타야 이치카와 단쥬로 명적에는 초대부터 이어져온 징크스가 하나 있는데, 바로 단명이다.

초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악의를 품은 타 가문의 배우인 이쿠시마 한로쿠에게 공연 도중, 향년 45세의 나이로 살해 당한 것을 시작으로 역대 단쥬로들은 대체로 불행한 사고와 병, 자살 등으로 인해 단명하였다.

3대 이치카와 단쥬로와 6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향년 22세라는 이른 나이로 병사, 8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향년 32세로 자살. 9대, 10대 11대, 12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차례로 병사하였으며 이중 10대[42]를 제외한 역대 이치카와 단쥬로들은 모두 일흔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당대인 13대 이치카와 단쥬로 하쿠엔은 쇼치쿠의 관리 하에 최상급의 건강 관리를 받고 있으며 13대 단쥬로 본인 또한 자신의 건강에 늘 신경 쓰고 있다. 특히 할아버지 11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앓았던 의 경우, 유전성도 있기에 아버지 12대 이치카와 단쥬로와 함께 꾸준히 검진을 받으러 다니기도 했다.

13대 단쥬로 본인도 저러한 징크스를 알고 있으며 매일 운동을 하는 이유에 대해 적어도 할아버지[43]보다는 오래 살아서 장남아이가 태어나는 것까지 보고 영면에 들고 싶기 때문이라 밝힌 적도 있다.

6. 논란 및 사건 사고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6.1. 11대 이치카와 에비조 폭행 사건[44]

2010년 당시 11대 이치카와 에비조라는 세습명으로 활동하던 13대 이치카와 단쥬로 하쿠엔이 직접적으로 연관된 폭행사건이다. 그의 커리어는 물론이고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도 최악의 흑역사를 남긴 사건이다.

2010년 11월 25일, 이치카와 에비조는 미나토구의 고급 바에서 과음하고 인사불성 상태에서 비틀거리며 또 다른 술집에 들어왔다. 그리고는 다른 자리가 비어 있음에도 남의 술자리에 멋대로 가서 사람을 밀치고 주사를 부리기 시작했는데, 하필이면 그 술자리가 악명 높던 범죄 조직 한구레 관동연합 패거리[45]의 자리였다.

이때 에비조는 그 테이블에 앉아 있던 이시모토 타이치(石元太一)[46]의 머리를 농구공처럼 손으로 여러 번 치면서 웃더니 그의 머리채를 잡은 채 재떨이에 위스키를 따라서 들이밀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인간국보다! 네 이놈, 감히 인간국보가 주는 술을 안 받아?"

그러면서 머리를 잡고 흔들며 마실 것을 계속 강요했는데 이시모토는 그간의 악명과는 달리 꾹 참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옆에 있던 조직원인 이토 리온(伊藤リオン)[47]이 결국 참지 못하고 폭발해 에비조의 얼굴을 수차례 가격했고, 그가 쓰러졌음에도 폭행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이토 리온을 시작으로 다른 일행들도 폭행에 가담해 에비조에게 집단 린치를 가했고, 이 와중에 이시모토 타이치는 오히려 침착하게 일행들을 말렸다.

이때 폭행을 당한 에비조는 복합 골절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일반적으로 이런 사건이 발생했다면 집단 폭행을 저지른 범죄 집단이 단체로 단죄를 받아야 마땅하겠지만, 그간 이런저런 구설수와 언행으로 이미지가 좋지 못했던 데다 명백히 먼저 시비를 걸어 폭행을 유발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여론이 에비조가 잘못했다는 쪽으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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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직후, 기자회견에서 사죄하는 11대 이치카와 에비조[48]

결국 에비조는 본인의 잘못이 큰 만큼 폭행 피해자임에도 기자회견을 열어 대국민사죄와 함께 도게자까지 했을 정도였다. 일본의 네티즌들은 '자기가 드라마나 영화에서 무적의 사무라이만 맡아 진짜로 센 줄 알고 나대더니 꼴좋다'는 반응을 보였다.[49] 이때 에비조는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일방적으로 맞았다"고 거짓말을 하다 들통나서 그야말로 재기불능의 이미지 타격을 입었다. 이때 아내 코바야시 마오[50] 임신 중인 상태에서도 남편의 잘못을 수습하기 위해 사과하고 다니며 심한 마음고생을 했다. 아내는 참한 이미지에 사생활도 깨끗한 인물이라 안쓰러워 하는 여론이 많았다.[51]

에비조를 폭행한 자들의 행위가 정당화 되는 건 아니지만 이 사건은 명백히 에비조의 잘못이 맞으며, 이 사건에 한해서는 한구레들이 피해자가 맞다. 에비조의 아버지인 12대 이치카와 단쥬로도 이 사실을 인정했다. 이로 인해 에비조가 출연했던 광고들이 전부 내려가고 출연하기로 했던 드라마와 영화에서의 주역 캐스팅들이 전부 취소당하면서 관련 기업들이 에비조에게 줄소송까지 거는 등 이 사태의 후폭풍은 엄청났다.

이 폭행 사건을 주도한 이토 리온은 총대를 메고 약 1년 정도 감옥을 다녀왔고, 변호사 입회 하에 관동연합 쪽에서 에비조의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보복하기 위해 접근하지 않는 다는 각서를 쓰는 대신 이치카와 쪽에서 거액의 합의금 지불하는 선에서 사건이 마무리 되었다. 참고로 관동연합 측에서는 합의에 적극적으로 나서 얌전하게 일을 빠르게 마무리 지으려 했다. 앙심을 품어 보복하려고 해도 상대가 명문 가부키 집안이라 잘못 건드리면 오히려 자신들이 풍비박산 날 것이 명백했기 때문이다.[52]

그리고 이 사건 이후 엉뚱한 쪽으로 영향이 미쳤다. 이시모토 타이치는 이 사건으로 인해 몰려드는 기자들을 거부하지 않고 일일이 인터뷰를 해주면서 지명도를 올렸다.[53] 그리고 이러한 지명도를 바탕으로 자서전까지 내며 그 자서전이 영화화되어 그 영화에 본인이 본인역으로 출연하는 방식으로 연예계에 진출하면서 과거를 참회하고 자기과 같은 문제아를 갱생하는 데 힘쓰겠다는 뜻을 밝혔다.[54][55] 그러나 살인을 비롯한 각종 범죄에 연루되면서 밑천이 드러났다.[56][57] 이 사건으로 이시모토 타이치는 2016년 6월 15일 최고재판소가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징역 15년 형이 확정되었고 연예계 데뷔는 일장춘몽으로 끝났다.

후일담으로 이 사건을 주제로 하여 마케팅 하는 술집도 생겨나서 재떨이 모양 잔에 따르는 술을 파는 케이스가 생겨나기도 했다.

법적으로 사건이 수습된 이후에도 못난 아들의 잘못을 수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던 아버지 12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67세의 이른 나이에 급사했고, 마찬가지로 뒷수습을 위해 고생하던 아내인 코바야시 마오도 유방암에 걸렸다. 극심한 스트레스가 각종 합병증과 암의 원인인 것을 생각하면 두 사람의 때 이른 죽음은 에비조의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받은 스트레스가 원인으로 보여 많은 욕을 먹었고, 현재도 종종 거론되어 비난을 받는다. 본인 이미지 또한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58] 그나마 아내를 잃은 후 재혼하지 않고 열심히 자녀들을 양육하며 본업인 가부키 일에 충실히 임하는 등 정신차리고 조용히 살고 있어 사건 직후에 비해 이미지가 나아졌다.

가부키 배우의 폭행 사건이라는 것과 관련하여 비슷한 사건으로 4대 명문가 중 한 곳인 6대 나카무라 칸쿠로의 친동생 2대 나카무라 시치노스케의 경찰관 폭행 사건이 있다. 이쪽도 에 만취한 것이 사건의 발단으로 출동한 경찰들에게 폭행을 가해 체포되었다 풀려났다.

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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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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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매를 제외한 나머지 외모는 어머니 키미코를 많이 닮았다. 눈매의 경우, 아버지인 12대 이치카와 단쥬로와 할아버지 11대 이치카와 단쥬로를 포함하여 선대들의 눈매가 모두 똑같은데 이건 전형적인 조몬인 계열의 영향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단쥬로의 자녀들인 4대 이치카와 보탄8대 이치카와 신노스케는 어머니의 비중이 더 크며, 둘이 같이 있으면 정말 닮은 것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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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탐정 코난의 TV 스페셜판인 코난과 에비조, 카부키 18번 미스터리에서는 본인 역으로 직접 성우 출연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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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상한 가부키 배우라는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운동 능력이 꽤 좋다. 사실 가부키 배우는 수십 킬로그램에 달하는 무거운 의상을 입고 무대에 나가는 경우도 흔하고, 스턴트맨 뺨치는 격렬한 동작을 하거나, 힘든 포즈를 취한 채로 장시간 정지상태로 있어야 하는 등 체력 소모가 심한 직업이기 때문에 평균 이상의 운동능력과 운동신경이 없으면 하기 힘들다. 가부키극의 대표적인 작품중 하나인 렌지시(連獅子)의 경우 극의 내용중 길고 무거운 가발을 손으로 잡고 지속적으로 머리를 돌리며 사자처럼 춤추는 파트(髪洗ヒ)가 따로 있다. 가부키 배우에 도전해본 이쿠타 토마는 첫 연습 당시 허벅지가 부어오르고 근육통이 심했다고 했을정도. 때문에 단쥬로 본인도 웨이트 등 자기단련을 꽤 하고 있으며, 취미 활동 중 하나가 연습 뒤 사우나에 들어가는 것이다. 요가와 근육 트레이닝도 굉장히 좋아하며 자주한다고. 피지컬 100 일본편이 있다면 나가고 싶다고 할 정도다. 그 덕분에 드라마에서는 사무라이나 운동선수 역을 자주 맡는 편이다. 물론 자신의 지위와 신체능력을 과신하고 관동연합 술자리에서 시비 털다 진짜 범죄자들 앞에서 곤죽이 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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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드래곤볼을 좋아하여 작중 기술인 카메하메하를 자택의 화장실에서 많이 따라해 보았다고 한다. 주로 카메라 플래시, 손전등이나 빛이 반사되는 거울을 이용했다고.

[1] 출생명은 堀越였지만 본인 의사로 2015년에 프로필란에 기재된 한자로 개명하였다. 읽는 방법은 타카토시로 동일하다. 다만 나리타야의 공식 웹사이트에서는 출생명을 그대로 사용하며 가끔 로 표기되기도 한다. 역시나 읽는 방법은 동일.[2] 가부키 배우로서의 예명이다.[3] 본명은 후지마 킨타로.[4] 본명은 호리코시 하루오. 본래 코라이야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렇기에 출생명 또한 후지마 하루오. 초대 마츠모토 킨타로를 습명받아 본격적으로 가부키 영재 교육을 받던 시절에 당시 후계가 없던 나리타야 10대 이치카와 단쥬로의 양자로 입적하였으며 코라이야는 바로 밑의 남동생인 후지마 준지로가 습명을 받아 대를 이었다.[5] 본명은 호리코시 나츠오. 일본의 인간 국보이자 나리타야 이치카와 종가의 선대 당주.[6] 본명은 호리코시 치에코. 3대 이치카와 보탄(ぼたん)을 지내다가 조카인 호리코시 레이카에게 물려주고 이치카와 스이센을 습명받았다.[7] 조치대학에서 심리학부를 전공했으며, 기상캐스터로 시작해 니혼테레비에서 아나운서로 활동했었다.[8] 고등학생 때부터 교제했던 前 가수 히오키 아키코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이다. 다만 히오키가 가부키 명문인 나리타야에 시집을 오기에는 격에 안 맞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가부키 협회 + 집안 어른들의 강력한 반대로 인해 공식적으로 호적에는 올리지 못한 상태다. 현재 히오키와 장녀 앞으로 매달 100만엔의 양육비를 보낸다고 한다.[9] 이치카와 보탄은 나리타야의 직계 영애가 일본 무용계에서 사용하는 예명으로, 본명은 호리코시 레이카. 애칭은 '레이(レイ)'. 위로 혼외자인 이복언니가 있기 때문에, 코바야시 마오에게는 장녀이지만 단쥬로에게는 차녀다. 다만 적녀이고 이치카와 보탄이기 때문에 언론에서는 장녀라고 칭해진다.[10] 3대 독자에다 늦둥이 고명아들이고,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어 단쥬로의 금지옥엽이라고 한다. 본명은 호리코시 칸겐. 애칭은 '칸칸(かんかん)'. 별탈없이 가부키 배우업을 이어나간다면 칸겐이 훗날 12대 이치카와 에비조, 14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될 수 있다.[11] 본명은 호리코시 하루요. 11대 이치카와 단쥬로의 장녀이자 12대 이치카와 단쥬로의 여동생이다. 현재 일본 무용 이치카와류의 수장을 맡고 있다.[12] 가부키 배우로서 가지는 집안 이름. 세습명 구도를 중심으로 창시되며, 가부키계에는 10대 명문가를 포함한 40개 정도의 야고가 있다고 한다.[13] 야고를 딴 사업체인 주식회사 나리타야의 대표이사이기도 하다.[14] 아버지의 부리부리한 눈매와 어머니의 윤곽, 코, 잘 맞물린 입매 등 좋은 유전자만 빼닮은 미남으로, 십대시절 사진을 보면 웬만한 아역 배우쟈니스 주니어는 씹어먹게 생겼었다.[15] 자산가의 딸로, 가쿠슈인을 졸업했다.[16] 18번뿐만 아니라 현재 가부키 하면 생각나는 대표적인 것들(쿠마도리, 아라고토 등)은 전부 이치카와 종가에서 창시된 것으로, 나리타야가 망하면 일본 가부키도 망한다는 말이 있다.[17] 아직 습명을 받지 않은 가부키 가문의 아들이 무대에 올라 첫 인사를 올리는 중요한 행사다. 이때부터 암묵적인 배우로 데뷔한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에 모자이크 등의 신상보호를 할 의무가 없어지며, 정식 프로필 사진도 촬영하게 된다.[18] 오른쪽은 어머니 키미코와 여동생 4대 이치카와 스이센.[19]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습명 기념 공연을 하러 다닌다. 공연의 기한은 가문의 위상과 인기에 따라 달라지는데, 나리타야의 습명은 가부키계의 큰 경사이기 때문에 1년이라는 긴 기한동안 순회 공연을 하는 것.[20] '가부키 배우가 될래 말래?'라는 식의 질문이었다고 한다. 본인은 어릴 때라 당시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자라면서 '그때 네가 (가부키를) 하겠다고 했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21] 아비 사자와 새끼 사자의 이야기를 다룬 가부키 공연. 본인 키만한 기다란 털이 달린 사자 탈을 쓰고 공연하는데, 털의 길이가 배우의 나이에 따라 점점 길어져 동작을 잘못하면 목이 아프고 머리가 어지럽다고 한다. 13대 이치카와 단쥬로의 7촌 조카인 8대 이치카와 소메고로는 렌지시는 가면을 쓰고 춤을 추기때문에 손만 보이고 얼굴에는 땀이 차는데다 숨도 쉬기 어렵다고 밝혔다.[22] 본명은 테라지마 카즈야스. 당시 6대 오노에 우시노스케로 불렸다. 부친인 오노에 종가 오토와야의 당주 7대 오노에 키쿠고로의 뜻에 따라 가부키 명문가 하리마야의 넷째 딸과 혼인해 슬하 1남 2녀를 두었다. 참고로 8대 오노에 키쿠고로의 친누나가 여배우 테라지마 시노부이다.[23] 영상 속 장소는 롯폰기에 위치한 일본 무용 5대 류파인 '후지마 류(藤間流)'의 종가다. 두 사람을 지도하고 있는 여성은 당주의 딸인 후지마 칸소인데, 9대 이치카와 츄샤와는 의붓남매 사이가 된다.[24] 테라지마 준코. 연예계 활동명은 후지 스미코. 쇼와 시대의 유명 여배우였다.[25] 13대 이치카와 단쥬로의 본 성씨.[26] 사실 이는 유명 가부키 집안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며 자국민들은 이를 '가부키 클리셰'라 일컫는다. 가부키 가에 태어난 아들이 가부키를 배우는 것을 죽도록 싫어하지만 결국 사회에 나가보니 자신의 존재가 어느 정도였는지 자각하며 다시 가문으로 복귀하는 루트.[27] 무로마치 막부 시대 8대 정이대장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아역이였다.[28] 8대 이치카와 소메고로의 고모이기도 하다.[29] (新之助さん) 신노스케 상.[30] 아이 어머니가 임신 사실을 밝히고 낳고 싶다는 의사를 표하자 ‘그렇냐. 하지만 난 당신과 결혼힐 생각이 없다. 그래도 괜찮겠느냐’라고 물었고, 그녀기 괜찮다는 답을 하자 ‘그럼 내가 (아이의 경제적 지원을) 책임지겠다’라고 했다고. 저 당시 그녀와는 이미 미련없이 끝난 관계였고, 요네쿠라 료코와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었다.[31] 다만 어디까지나 배우로서 활동하는 데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뿐이지 혼외자의 존재가 세간에 밝혀진 이후, 여자문제로 구설수가 많던 13대 이치카와 단쥬로의 이미지는 더욱 나빠졌다.[32] 오토와야의 5대 오노에 키쿠노스케도 친구로서 그와 함께 출국길에 올라 습명 피로연에 함께 했다.[33] 이는 황실이나 정재계 인사의 결혼식은 비공개로 진행할 권리가 있는 반면, 가부키 배우는 하츠오메미에를 기점으로 이를 비공개로 돌릴 의무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34] 2009년 '인생을 바꾼 만남'이란 주제로 코바야시 마오 단독으로 13대 이치카와 단쥬로와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이때 이후 13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코바야시 마오한테 첫눈에 반하게 되었고 적극적으로 구애를 하였다고 한다. 자세하게 정리된 내용[35] 유방암은 유전이기도 하지만 가부키 종가 며느리로서 이행해야 할 어마어마한 업무량과 부담감에 후술할 13대 단쥬로의 문제들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와 마음고생으로 젊은 나이에 암이 생겼을 가능성이 크다. 아내의 사망 직후 기자회견 때 밝힌 내용 중에 코바야시 마오가 유언으로 '사랑해요(愛してる)'라고 한 마디를 하고 숨을 거뒀다고 한다. 기자회견도 어떤 기자가 엠바고를 깨는 바람에 예정치 못하게 기자회견을 한 거라고 한다. 아내의 사망 직후 진행된 기자회견이라 관련 영상이나 위 사진을 보면 13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계속 울면서 기자들의 답변에 대답을 하는 통에 다들 안타까워 했다.[36] 해당 공연은 2017년 7월 7일에 열렸으며, 칸켄은 백여우 역을 맡아 첫 데뷔를 하였다. 커튼콜 때는 무대에 서지 않았던 딸 레이카도 등장하여 아버지와 함께 인사하였다.[37] 좌측부터 단쥬로의 여동생 4대 이치카와 스이센, 어머니 호리코시 키미코, 13대 이치카와 단쥬로 하쿠엔 본인.[38] 영화 출연작 세 편이 미이케 타카시 영화다.(하라키리(영화) 리메이크, 쿠이메, 무한의 주인)[39] 초대 이치카와 단쥬로의 우키요에를 채택하여 제작되었다.[40] 원숭이가 사람만큼 똑똑할 수 있다지만 따라잡기에는 멀었으며 그만큼 지혜도 떨어진다는 의미이다.[41] 이 경우는 세습명에 붙인 것이 아니었기에 이치카와 하쿠엔이라 자칭하였다.[42] 9대 이치카와 단쥬로의 사위로, 그의 사후 이치카와 단쥬로의 명적이 추존되었다.[43] 5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44] 한자로는 '11代目市川海老蔵暴行事件'[45] 10대때 폭주족을 하면서 각종 폭력행위로 악명을 떨친 탄 이들로, 성인이 된 이후 범죄조직으로 재구성했다.[46] 관동연합 내에서도 가장 또라이 팀으로 유명했던 블랙엠페러의 후신 격 팀의 총장(두목)을 맡았던 인물이다. 학창 시절 패거리 10여 명과 같이 아무런 잘못이 없는 일반 미성년자 학생을 적 조직원으로 오인하여 폭행치사한 도요볼 사건(トーヨーボール殺人事件)을 주도해 소년원까지 갔을 정도로 악명이 높았다. 나이를 먹고 폭주족 생활에서 은퇴한 이후에는 폭력단 관계자로 추정되는 인물로부터 자금을 출자 받아 Soulmate라는 이름의 체육관과 격투가팀을 만들어 운영했다. 이는 한구레 조직이 합법적인 사업을 하기 위해 위장용으로 차린 업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47] 파나마 국적 흑인 혼혈이다. 이시모토와 함께 살인을 저질러 소년원에 수감된 전적이 있고, 무엇보다도 운동 능력이 좋아서 도쿄 베르디 축구단 유소년팀에서 우월한 피지컬로 활동하다 폭력단에 들어가서 주먹으로 이름을 날릴 정도였다. 심지어 적대 조직에 의한 배트 습격을 당했을 때는 오히려 배트를 뺏어서 역으로 상대 여럿을 제압했다고 하며, 이 때문에 적대 조직들이 두려워했다고 한다. 배트 습격이란 적대관계에 있는 한구레 조직 간 둔기나 방망이를 이용해 단체로 적대 한구레나 찌마(폭력써클) 조직원 한 명을 타깃으로 무자비한 폭행을 가하는 테러이다. 일본의 법 헛점을 이용한 행위로 날붙이 같은 흉기가 아니기 때문에 죽여도 살인죄가 잘 성립이 안 되고 잘 해야 폭행치사에 변호사만 잘 쓰면 죽일 의도가 없었다고 둘러댈 수 있기 때문이다.[48] 사진을 잘 보면 눈에 출혈이 있는데 당시 얼머나 두들겨 맞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쇼치쿠 관련인들과 아버지인 12대 이치카와 단쥬로는 상황 수습 전에 니라미나 미에를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며 한동안 우려했었다. 기자들도 이에 대해 물었으며 당시 에비조는 당분간 니라미는 힘들 것이라 응답하기도 했다.[49] 앞서 언급된 대로 평소 언행 문제로 구설수와 논란을 많이 일으켰던 만큼 일본 내에서도 안티가 꽤 많았다. 그리고 이 사건이 터지기 이틀 전에는 폭행 사건이 일어난 날 예정된 가부키 공연을 몸이 안 좋다고 취소하고는 술집들을 돌며 음주가무를 하다 일을 낸 것이 추가로 밝혀져 더욱 거센 비난에 몰렸다.[50] 1982-2017. 니혼테레비 아나운서 출신으로 만 34세 나이에 유방암으로 사망했다. 죽기 전까지 자신의 투병기를 블로그에 공개해 다른 암환자들의 용기를 북돋기 위해 힘썼고, 이 활동이 일본에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켜 2016년 영국 BBC에서 주관하는 올해의 여성 100인에 선정 되기도 하였다.[51] 관동연합 폭행건으로 수습을 하고 사죄하러 다니다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암이 발병했다고 생각하는 팬들도 있어서 에비조가 원망을 사기도 했다. 다만 가부키 가문은 일본 예능(藝能)의 주축이자 엄연한 상류층의 일원인 만큼 가부키 명문가의 안주인이라는 위치가 그만한 부와 명예를 누리고 상류 사회의 일원으로 편입할 수 있기 때문에 에비조의 이런 면들을 감수하고 결혼했을 것이라는 반응도 심심찮게 나왔었다.[52] 거물급 가부키 가문은 정재계와 연줄이 두터운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황실, 재벌, 구 화족(귀족) 등 사회 지도층과 연줄이 깊고, 오랫동안 유지되었다보니 가문의 경조사에 총리, 장관 등이 직접 참석할 정도다. 제 아무리 잔악무도한 관동연합이라고 해도 일개 폭력조직에 불과하므로, 일본 정재계를 좌지우지하는 이들과 연줄이 있는 가부키 가문과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살인 전과도 있던 이시모토가 조직원들로 하여금 에비조를 두들겨 패게 놔두기만 했을 뿐, 본인이 행동에 옮기지 않았던 것이다.[53] 자신에게 봉변을 줬던 애비조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기위한 언플의 의도가 강했지만 에비조씨가 본심으로 그랬을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잡지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54] 이처럼 범죄자가 멀쩡하게 재기하는 건 일본 사회 특유의 구조 탓이기도 하다. 이시모토 뿐만 아니라 사가와 잇세이 같은 범죄자도 베스트셀러 작가 노릇을 하면서 방송활동을 했다. 그외 유명 배우나 가수 출신중에도 이런 한구레와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었음에도 멀쩡히 활동하는 경우가 많다. 일전에 타카오카 소스케미야자키 아오이 부부가 관동연합 일원들과 찍은 사진이 논란이 된적이 있다. 이후 이 둘은 이혼을 하였고 타카오카 소스케는 여러 논란을 일으키다가 현재는 연예계에서 은퇴하였다. 그 외에도 국민 여동생으로 불렸던 히로스에 료코는 첫번째 남편 오카자와 타카히로가 관동연합 조직원에 김강홍과 학생시절부터 호형호제하던 사이였고 두번째 남편 캔들준도 공식적으로는 양초 예술가로 활동하지만 실제로는 폭력단과 연계된 인물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히로스에 료코 본인이 어지간히도 폭력단쪽 남성들을 자신의 의지로 사귀었기에 이쪽부터 괴담만 우수수 쏟아지는 수준이고...김강홍이 살해 되었을 당시 오카자와 타카히로가 돌연 종적을 감추었고 히로스에 로쿄도 남편과의 이혼을 발표하여 의혹이 증폭되었다.[55] 사실 이시모토는 에비조 사건 이전부터 꾸준히 제도권 연예인이 되는것에 관심을 가졌는데 관동연합이 적대 한구레나 폭력조직원에게 가한 테러나 린치도 많았지만 적대 한구레나 폭력단으로부터 역으로 테러나 린치를 당한 경우도 많았다. 이 무렵 같은 관동연합 간부 시바타 다이스케도 적대 한구레 조직에게 곤죽이 되도록 맞아서 몆달동안이나 병원신세를 져야했고 이시모토는 자신이 제도권 연예인이 되면 적대조직의 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수 있다고 여기고 꾸준히 기회를 노렸다고 한다. 일단 관동연합 멤버들 중에서도 얼굴이 출중한 편인데다 입담이 좋았었고 자신을 드러내기 워낙 좋아하는 성격이기도 했다.[56] 해당 사건은 한구레 조직간 알력다툼과 연관되어 있다. 관동연합 산하 조직인 '신주쿠 젝스'의 리더였던 카네무라 타케히로(김강홍)가 부친의 일을 돕고 새벽에 퇴근하다 적대 한구레 조직(기무라 형제 일파로 추정) 다수에게 배트 습격을 당해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카네무라는 두개골이 완전히 부서지고 뇌수가 일부 터졌으며 눈알 두 개가 튀어나올 정도의 끔찍한 몰골의 시체로 발견됐다.[57] 관동연합의 실질적 수장이었던 '미타테 신이치'는 유난히 아꼈던 김강홍이 비명에 가버리자 울음까지 터뜨리고 장례식장에서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다짐을 하고는 보복을 지시하고 오랜 준비 끝에 2012년 9월 기무라 형제에게 보복을 감행했고 이때 이시모토가 가담을 했다. 타깃은 기무라 형제중 둘째인 키무라 코지로였는데 문제는 사람을 오인하고 엉뚱한 레스토랑 주인을 배트 습격으로 잔인하게 죽였다는 것. 다만 그 레스토랑 주인도 평범한 시민은 아니고 기무라 형제와 어느 정도 연관이 되었었다는 설도 있다. 불행히도 이 레스토랑 주인이 키무라 코지로와 같은 머리스타일을 하고 있던게 불운이었다. 참고로 카네무라 살인사건은 한국 언론에서도 여러 곳에 보도가 되었다. 이 당시에는 증오범죄의 희생자가 된 재일교포 출신 회사원으로 보도되어 공분을 샀지만 곧 이 사건의 실상이 밝혀지자 그런 여론은 사라졌다.[58] 코바야시 마오의 언니인 코바야시 마야는 언론을 통해 동생이 유방암 투병 당시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였으며, 동생을 앞세워서 본인의 이미지 세탁을 우선시 한다며 에비조의 민낯을 폭로하였다. 단, 이쪽은 남편이 정상적인 사회인이 아니면서도 마야를 계속 가스라이팅 해왔고, 마야도 이해할 수 없는 언행과 기행을 계속 저지르고 있어 가려들을 필요는 있다.[59] 가부키에 출연할 때 무색 가발을 두르고 그, 위에 민머리 분장을 하기 때문에 아예 밀어버린 듯. 아버지 12대 이치카와 단쥬로도 말년에 투병하면서 머리카락이 빠지자 같은 이유로 삭발을 했다.[60] 가부키가에 태어난 남자아이는 초상권이랄 게 없이 만 2살부터 공인이 되지만 여자아이에게는 그것을 지켜줄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미 보탄이라는 세습명을 습명받은 순간부터 보탄 역시 공인이긴 하다만 대외적인 장소, 검증된 매스컴 등에서만의 공식적인 사진촬영과 인터뷰를 허가한다.[61] 일종의 허세로도 보일 수 있다. 일본에서의 좌핸들 차량은 정식으로 일본 라이센스 수출이 된 물건이 아닌 일본 외의 해외 판매 차량을 그냥 샀다는 얘기가 된다.(회사마다 일본 수출정책이 달라서 무조건 적으로 이렇다고 볼 순 없지만) 일본의 딜러를 통하지 않고 직구로 산 외제차라는 돈 좀 꽤 쓴다는 인상으로 각인 되기 딱 좋다. 물론 단쥬로의 평소 행실을 보면 100% 허세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62] 코바야시 마오와 결혼하기 전 이미 사생아 딸이 있어 양육비까지 대고 있던 상황이었다.[63]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여, 아이들과의 일상을 공개하고 있다. 2020년에 자녀들과 함께 찍은 마스크 광고영상.[64] 사별 후 재혼 루머가 떴는데, 심지어 재혼 루머 당사자가 코바야시 마오의 언니인 코바야시 마야였다. 애초부터 말도 안 되는 내용이라 코바야시 마야 측에서도 사실무근이라며 반박했으며, 13대 이치카와 단쥬로도 어처구니 없어 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애처가 이미지가 생겼다.[65] 양육비만 지급하고 교류는 일절 하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대표적인 예로 단쥬로의 6촌 형이자 8대 이치카와 소메고로의 아버지인 10대 마츠모토 코시로는 혼외자 딸의 존재를 밝히던 기자회견에서 '내 아이가 맞고, 경제적인 지원은 하고 있다. 그러나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만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해 사실상 남남으로 살아갈 것을 밝혔다.[66] 다만 집안 어른들이 엮이면 안 좋다고 만류해 고민 끝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67] 사실 결혼 전에도 자주 만나지는 않았다. 딸이 생후 3개월 때 처음 대면했다고.[68] 일본의 10대들 사이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고 팬층도 두터운 인물로 쉽게 설명하자면 일본판 초통령이다.[69] 당시 단쥬로의 세습명이었던 이치카와 에비조의 '에비'가 일본어로 새우를 뜻하여 많은 팬들에게 에비사마라고 불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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