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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카무라 가문의 문장 카도키리긴소쿠(角切銀杏)[1] |
나카무라 칸자부로 (中村勘三郎)
일본 가부키 업계에서 대를 이어 내려오는 배우의 예명 중 하나. 이 이름을 가진 배우가 이끄는 나카무라야(中村屋)는 에도에서 최초로 상설극장을 세운 가문으로, ‘에도 가부키의 원조’라고 불리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가부키 4대 명문가에 드는 가문이다. 아직도 극장을 가지고 있고 오늘날에도 공연이 성황한다.
세습 구도는 '나카무라 칸타로 → 나카무라 칸쿠로 → 나카무라 칸자부로'이며 당주에게 습명되는 “나카무라 칸자부로”는 가부키계에서 제일 오래된 이름이고 그만큼 변천사도 많다. 하위 문단에서 소개하는 마지막 계승자가 열여덟번째 계승자일 정도.[2]
야고 또한, 초대부터 13대까지는 카시와야, 14대부터 16대는 마이즈루야, 17대부터 현재가 나카무라야이다. 여기서 14~16대는 사실상 습명하지 않은 보관명적의 명의로 족보에 올라가 있는 것이기에 편의상 야고를 붙였다. 에도막부 말기에는 별로 사용되지 않던 이름이 되었다가 쇼와 시대에 와서 17대 나카무라 칸자부로가 명성을 되찾았다.
2023년 기준, 마지막 계승자였던 나미노 노리유키가 2012년에 향년 57세 일기로 사망하면서 공석인 상태이다. 아들인 6대 나카무라 칸쿠로가 현재 나카무라 종가의 당주로 활동하고 있고, 가부키계에서의 활동력도 갖추었지만 아직 습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 팬들은 칸쿠로의 장남인 3대 나카무라 칸타로의 활동이력이 차면 부자가 함께 동시 습명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2. 역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 초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무사 나카무라 가베이의 차남, 1597-1658.
- 2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초대 나카무라 아카시를 지내다 2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습명을 받았다. 1647-1674.
- 3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초대 나카무로 칸자부로의 삼남. 1649-1678.
- 4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3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양자. 처음으로 나카무라 시치노스케라는 이름을 사용한 자로 기록되어 있으나 본명일 가능성이 있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1662-1713.
- 5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3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아들로 후세가 없던 4대 칸자부로의 양자. 1666-1701.
- 6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초대 나카무라 칸쿠로의 차남, 또는 4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동생으로 추정. 후에 5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에게 입양돼 양자로 입적된다. 1688-1758.
- 7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6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장남, 1717-1775.
- 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6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차남, 1719-1777.
- 9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양자. 초대 나카무라 시치노스케 → 3대 나카무라 시치사부로 → 9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1765-1785.
- 10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차녀의 사위, 시기 미상-1810.
- 11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삼녀의 사위, 아버지가 2대 이치카와 야오죠우이다. 1766-1829.
- 12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11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차남, 1800-1851.
- 13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12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아들, 1828-1895.
- 14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12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문하생으로 애제자였다고 한다. 어머니가 가부키 계열의 사람이고 안무가였다. 1809-1886.
- 15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13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아들, 1873-1940.
- 16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15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자녀[3], 생몰년 미상.
- 17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3대 나카무라 카로쿠의 삼남, 1909-1988.
- 1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17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장남, 1955-2012.
3. 1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1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十八代目 中村勘三郎| Nakamura Kanzaburō XVIII | |
본명 | [ruby(波野, ruby= なみの)][ruby(哲明 , ruby= のりあき)] (나미노 노리아키, Namino Noriaki) |
예명 | 5대 나카무라 칸쿠로 1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
출생 | 1955년 5월 30일 |
도쿄도 | |
사망 | 2012년 12월 5일 (향년 57세) |
도쿄도 분쿄구 종합병원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65cm, 65kg |
학력 | 교세이 가쿠엔 초등부(졸업) 교세이 가쿠엔 중등부(졸업) 교세이 가쿠엔 고등부(졸업)[4] |
가족 | 친할아버지 3대 나카무라 카로쿠 친할머니 야마모토 로쿠 |
아버지 17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1909-1988)[5] 어머니 나미노 쿠에다[6] 큰누나 나미노 쿠리코 (1945-)[7] 작은누나 나미노 치요에 | |
아내 나미노 요시에 (1980년 결혼)[8] 장남 6대 나카무라 칸쿠로 차남 2대 나카무라 시치노스케 | |
친손 3대 나카무라 칸타로 (2011-) 친손 2대 나카무라 쵸자부로 (2013-) | |
며느리 마에다 아이 처남댁 미타 히로코 | |
직업 | 가부키 배우 |
야고[9] | 나카무라야 (中村屋) |
문장 | |
소속 | 펀우드 |
3.1. 개요
일본의 가부키 배우. 쇼와와 헤이세이의 가부키계를 대표하는 거장이며 가부키 팬들에게 가장 사랑받은 배우 중 한 명이다.3.2. 생애
1959년, 모모타로 역으로 하츠오메미에, 첫 무대를 밟았다 |
혼자서 쿠마도리 그리기를 연습하는 모습 |
큰누나의 생일을 맞이하여 찍은 가족사진 [11] |
1980년, 7대 나카무라 시칸의 차녀인 요시에와 혼인 [13] |
장남의 시치고산을 맞이하여 가족과 함께 |
아들들과 함께 공연 성공 기원 참배에 나선 모습[15] |
아들들과 렌지시로 무대에 선 모습 |
1999년, 제 50회 홍백가합전에서 백팀 사회자로 출연 [16] |
2005년, 뉴욕에서 1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습명 |
장손 나오야의 탄생 기념 참배에서 가족들과 함께 |
아들들과 아버지의 23주기 공연을 준비하는 모습 |
수술 이후, 다시 돌아온 나카무라자에서 장손인 나오야와 함께 |
칸자부로의 관에 마지막으로 입맞춤하는 부인 |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생전 마지막 활동을 담은 영상 |
1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1주기 추도 영상 |
3.3. 연기 스타일
1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무용 |
1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다카츠키(高坏) |
스케로쿠(助六) 中[18] |
칸자부로의 산자마츠리 오도리 |
3.4. 여담
- 장남 6대 나카무라 칸쿠로는 아버지를 기리는 뜻으로 칸자부로의 사망 이듬해에 태어난 차남 2대 나카무라 쵸자부로의 본명을 칸자부로의 본명 ‘노리哲(のり)아키’를 딴 ’나미노 노리유키'로 지었다.
2대 나카무라 시도가 가부키와 배우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2대 나카무라 시도는 칸자부로의 사촌 형의 아들이다. 나카무라야에서 순회 공연을 돌 때에도 장남, 차남과 더불어 10대 시절의 2대 나카무라 시도도 항상 옆에 데리고 다녔다. 이후 프랑스에서 칸자부로의 차남인 2대 나카무라 시치노스케와 시도는 나루히토 천황이 초청된 행사에서 가부키 극을 연기하기도 했다. 현재 시도는 헤이세이 나카무라자에서 자신의 아들과 함께 나카무라야의 무대에도 서고 있다.
- 가부키 명문가 네 가문 중, 가장 영상자료가 많이 남아있는 가문이다. 이유는 칸자부로가 자신과 가족의 사생활을 영상 기록으로 남기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이었기 때문이라고. 덕분에 현재 아들들이 운영하는 나카무라야 유튜브 채널에서 생전의 영상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19]
- 혈연을 중요시하는 가부키계에서 제자 양성에 힘쓰고 제자에게도 주연은 아니지만 주연급에 해당하는 네임드 있는 역할을 잘 맡기는 편이다. 나카무라야는 에도 시대부터 가부키를 배우려는 자들에게는 평등한 기회가 주어져야 생각했기 때문. 대표적인 사례로, 나카무라야의 핵심 배우였던 2대 나카무라 코산자[20]는 17대 칸자부로의 애제자였고, 2대 나카무라 츠루마츠[21]는 18대 칸자부로의 애제자였다. 1995년생인 2대 나카무라 츠루마츠는 2021년에 그간의 활동을 인정받아 가부키에서 주연 역할을 맡게 되었으며 나카무라야의 핵심 배우로 자리 잡았다.[22]
- 가수 호시노 겐의 노래 '괴물(化物)'의 모티브가 되었다. 호시노 겐은 2003년 아마추어 시절, 그와 한 무대에 섰고, 커튼콜 때 주연인 칸자부로의 손을 이끌어 그를 무대로 모셔오는 역할을 맡았었다. 그때 대기하며 서로 잠깐 얘기할 시간이 생겼는데 칸자부로가 '공연이 끝나면 출연진과 관객 모두가 머리 위까지 손을 들고 박수를 치며 환호해주어, 무척 기뻐지지만, 집에 가서 목욕을 할 때는 외톨이가 되어버리는 심정'에 대해 말해주었는데, 그때 그 말과 그의 행실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하여 '괴물'이라는 노래를 작사, 작곡하며 '이 노래는 나에게 부활이란 의미를 알려준 칸자부로 씨가 하늘에서 나에게 선물하신 노래'라 표현할 정도. 이후 'Pop Virus'에서도 칸자부로의 영향을 받았다는 가사가 나오며 칸자부로의 차남 2대 나카무라 시치노스케와 친구가 되어 그의 동창인 마츠모토 준을 소개받기도 했다.
헤이세이를 대표하는 배우 중 한 명이었기에 생전에 많은 CM에 출연했었다. 특히 중년에 들어서는 푸근하고 어딘가 정겨운 이미지로 술, 담배 광고 등도 여럿 맡았다. 네 번째 CM에는 어린 시절의 칸쿠로와 시치노스케도 함께 출연했다. 일본에 맥 커피가 처음 판매되었을 때 나카무라야의 배우들이 CM을 맡기도 했다. #
[1] 스미키리이쵸.[2] 유서가 깊다는 나리타야의 당주에게 세습되는 예명 이치카와 단쥬로도 당대는 13대이다.[3] 딸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4] 치요다구에 위치한 학교 법인 교세이 학원 소속의 유서 깊은 가톨릭 일관제 사립학교이며 남학교이다. 교세이 중등부를 졸업한 학생들만이 교세이 고등부 입학 시험을 치르는 게 허가되었다. 많은 정치인, 연예인들이 이 학교 재단 출신이며 가부키 배우들도 여럿 다녔다. 대표적으로 코오라이야의 초대 마츠모토 하쿠오와 2대 마츠모토 하쿠오. 그의 장남인 10대 마츠모토 코시로가 있으며 오모다카야의 4대 이치카와 엔노스케, 9대 이치카와 츄샤 또한 본교 출신이다.[5] 본명은 나미노 세이지. 일본의 무형문화재 보유자. 즉 인간문화재로 인간국보인 인물이다.[6] 6대 오노에 키쿠고로의 장녀이다. 혼전 성은 테라지마.[7] 유명 신파극 배우로 미시마 유키오를 포함하여 많은 쇼와의 대표 작가들로부터 자신의 작품에서 여주인공을 연기해달라는 러브콜을 계속 받았다. 4세였던 1950년, 아버지인 17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습명 피로연에서 함께 첫 무대를 섰다.[8] 인간문화재이자 나리코마야 출신인 7대 나카무라 시칸의 차녀이다.[9] 가부키 배우로서 가지는 집안 이름. 세습명 구도를 중심으로 창시되며, 가부키계에는 4대 명문가를 포함한 40개 정도의 주요 야고가 있다고 한다.[10] 위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누나가 두 명 있었다.[11] 왼쪽부터 1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큰누나 나미노 쿠리코, 어머니 나미노 쿠에다, 아버지 17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작은누나 나미노 치요에.[프로필] 5대 나카무라 칸쿠로 습명 당시 프로필 [13] 17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1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6대 나카무라 칸쿠로까지 3대가 같은 장소에서 결혼하였다.[14] 혼전 성은 나카무라.[15] 저 당시 각각 5대 나카무라 칸쿠로, 2대 나카무라 칸타로, 2대 나카무라 시치노스케였다.[16] 이후 2012년, 제 63회 홍백가합전에서 아들인 6대 나카무라 칸쿠로가 심사위원으로 출연이 결정되었다. 홍백가합전의 애청자였던 칸자부로가 이 사실을 듣고 매우 기뻐했지만 끝내 아들이 출연한 모습을 못 보고 사망하였다.[17] 후에 3대 나카무라 칸타로가 된다.[18] 12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함께 무대에 올라있으며 은근슬쩍 타카토시에 관해 축하한다는 얘기를 한다.[19] 다른 가문들도 사생활 촬영에 너그러운 반응이지만 NHK에 한정된 특집 다큐멘터리 촬영뿐일 때가 있다. 특히 오토와야의 경우, 기록이 거의 없다시피하다.[20] (中村小山三). 본명은 후쿠이 사다오. 1920년생이며 부모를 여읜 채 4살 때 17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눈에 들면서 가부키계에 입문하게 된다. 18대 칸자부로의 하츠오메미에에서 칸자부로의 옆을 지켰다. 무려 17대, 18대, 18대의 아들과 그의 손자까지 보고는 2015년 4월, 94세의 나이에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그야말로 나카무라야의 선대, 당대, 차세대까지 모든 당주를 섬겼다.[21] (中村鶴松). 본명은 시마즈 다이키.[22] 가부키 배우로서 바빴지만 학업도 놓치지 않아, 와세다대학 문학부를 졸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