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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8 11:54:52

7대 오노에 키쿠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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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오노에 키쿠고로
七代目 尾上菊五郎 | Onoe Kikugorô VII
파일:7대 오노에 키쿠고로.jpg
본명 [ruby(寺嶋, ruby= てらじま)][ruby(秀幸, ruby= ひでゆき)] (테라지마 히데유키, Terajima Hideyuki)
예명 5대 오노에 우시노스케
4대 오노에 키쿠노스케
7대 오노에 키쿠고로
출생 1942년 10월 2일 ([age(1942-10-02)]세)
도쿄도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신체 167cm, 65kg, AB형
학력 쇼난 학원 부속 유치원 (수료)
모리무라 학원 초등부 (졸업)
모리무라 학원 중등부 (졸업)
모리무라 학원 고등부 (졸업)[1]
가족 아버지 7대 오노에 바이코우 (1915-1995)[2]
어머니 테라지마 타마코
누나 테라지마 키요에 (1940-)
남동생 2대 오노에 에이노스케 (1944-)[3]
아내 후지 스미코 (1972년 결혼)[4]
장녀 테라지마 시노부 (1972-)
장남 8대 오노에 키쿠고로 (1977-)[5]
외손 초대 오노에 마호로 (2012-)[6]
친손 6대 오노에 키쿠노스케 (2013-)[7]
친손 테라지마 토모요 (2015-)
친손 테라지마 아라타 (2017-)
직업 가부키 배우
야고[8] 오토와야 (音羽屋)
문장 파일:Yotsuwa.jpg
1. 개요2. 생애
2.1. 연기 스타일
3. 세습명에 관하여4. 여담

1. 개요

일본가부키 배우.

가부키 4대 명문가 중 나리타야 다음으로 명성과 위상이 높은 오토와야 오노에 종가의 현 당주이다. 일본의 무형문화재인 인간문화재에 등재된 배우로 인간 국보이며 일본 예술원의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즉 일본 예술계의 최고 핵심에 서있는 인물.

현대 가부키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인물이며 가부키계에서는 코오라이야의 당주 2대 마츠모토 하쿠오와 더불어 살아있는 역사, 전설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2. 생애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아버지인 7대 오노에 바이코우와 어머니 테라지마 타마코 사이에서 2남 1녀 중 둘째이자 장남으로 도쿄에서 태어났다.
파일:키쿠고로.jpg
도쿄 자택의 정원에서
7대 오노에 키쿠고로의 아버지인 7대 오노에 바이코우는 본래 가부키에 연이 없는 집안의 출신이었다. 아카사카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게이샤 출신의 어머니와 규슈 하카타구 출신의 사업가 아버지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난 7대 오노에 바이코우는 어머니의 뱃속에 있던 시기부터 후계가 없던 6대 오노에 키쿠고로의 양자로 입적되기로 정해져 있었다.

그렇게 7대 오노에 바이코우는 태어나자마자 6대 오노에 키쿠고로의 양자로 오토와야에 입적되어 일본 무용과 가부키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훗날 6대 오노에 키쿠고로에게 친자가 탄생했음에도[9] 7대 오노에 바이코우는 출중한 실력으로 오노에 종가의 직계로 인정받으며 그 위치를 꿋꿋히 지켰다. 그렇게 현재에 이르러 그의 아들과 장손까지 오토와야 오노에 종가의 당주의 명적인 오노에 키쿠고로에 이른 것이다.
파일:키쿠고로 바이코우.jpg
아버지 7대 오노에 바이코우와 함께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7대 오노에 바이코우 일가는 태평양 전쟁을 피하기 위하여 중점 지역인 도쿄에서 하코네마치로 잠시 이사를 하였다. 그리고 종전이 된 1945년, 바이코우 일가는 혹시 모를 불안에 떨며 바로 도쿄로 돌아가지 않고 가나가와현의 오이소마치 후지사와시로 이사하였다고 한다. 일가는 이곳에서 한 어부의 집 2층에 세를 들어 잠시 지내었고 키쿠고로는 이때 잉어에게 먹이를 주거나 해변에서 혼자 놀던 기억이 선명하다고 한다. 안정이 된 이후로 일가는 바로 도쿄로 돌아와 본격적인 가부키 활동을 재개하였다.
파일:키쿠고로 6대.webp
할아버지 6대 오노에 키쿠고로와 함께
7대 오노에 바이코우는 7대 오노에 키쿠고로를 무척이나 아꼈다고 하는데, 당시 장녀 출생 이후 몇 번의 유산 끝에 태어난 아이였기에 아들이었던 것도 컸지만 집안에서는 7대 오노에 키쿠고로를 기적이라 부르며 금지옥엽으로 키웠다고 한다. 6대 오노에 키쿠고로 또한 7대 오노에 키쿠고로를 '나의 손자'라고 부르며 귀여워 했다고 한다. 7대 오노에 키쿠고로도 6대 오노에 키쿠고로를 할아버지(じいちゃん)라 불렀다고.
파일:바이코우.jpg
아버지와 <스케로쿠> 中 찻집 여방
1947년, 5세가 되던 해에 당시 3대 오노에 키쿠노스케였던 아버지가 7대 오노에 바이코우를 습명받는다. 그의 습명 피로연의 대표 연목 중 <스케로쿠>에 본명인 테라지마 히데유키로 하츠오메미에 겸, 첫 무대를 가졌다.[10]

그리고 1948년 4월, 긴자의 가부키좌인 신바시 연무장에서 5대 오노에 우시노스케를 습명받아, 5대 오노에 우시노스케로서 첫 무대를 가졌다. 습명 피로연의 대표 연목은 <스케로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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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시절의 7대 오노에 키쿠고로
학생 시절에는 아버지인 7대 오노에 바이코우가 학교에 다니는 키쿠고로를 배려하여 연습은 많이 하되 무대에 서는 횟수를 줄여주었다고 한다. 대신 중학생 때부터 여러 스포츠 활동을 할 것을 장려하였고 키쿠고로는 부활동으로 야구를 선택하게 된다. 이것이 꽤나 잘 맞았는지 고등부에 진학하고도 야구를 놓지 않았으며 2학년에는 주장까지 맡아 타 학교와 여러 차례 시합을 겨뤘다고 한다.
파일:onoekikugoro.jpg
쇼와 산노스케 (三之助)[11]
파일:4대 오노에 키쿠노스케.jpg
분장실에서 대본을 확인하는 당시 4대 오노에 키쿠노스케
1965년 5월, 4대 오노에 키쿠노스케를 습명받으며 가부키 배우로서, 오토와야의 후계자로서의 길을 순탄히 걷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당시 훤칠한 외모와 청순미 넘치는 목소리로 주력은 온나가타였다.
파일:키쿠고로 요시츠네.jpg
NHK 대하드라마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中 요시츠네 役
1966년, 4대 오노에 키쿠노스케 습명 이듬해에 NHK 대하드라마 시리즈미나모토노 요시츠네(源義経)에서 당시 23세에 최연소 타이틀을 달고 주연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를 열연하였다. 이 작품에서 당시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던 여배우 후지 스미코와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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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관련으로 후지 스미코와 대화를 나누는 키쿠고로
사실 후지 스미코와 7대 오노에 키쿠고로는 세세히 따지고 보면 먼 친척관계에 해당한다. 그렇기에 어린 시절 두 집안의 왕래 또한 잦았고 스미코는 어릴 적부터 7대 오노에 키쿠고로를 '히-짱'(ひㅡちゃん)[12]이라 부르며 우정을 드러냈다. 다만 부부의 연을 맺기에 문제되는 관계는 아니었기에 그녀와의 결혼을 결심한 키쿠고로는 가족 관계를 일일히 따져가며 그녀와 결혼이 가능함을 확인하자 본격적으로 구애하였다고 한다.[13]
파일:키쿠고로 결혼.jpg
아내 후지 스미코와의 결혼사진
1972년 3월, 키쿠고로의 끊임 없는 구애 끝에 둘은 정식으로 부부의 연을 맺는 데 성공한다. 본래의 이름은 슌도 준코였기에 입적한 이후, 테라지마 준코가 된 후지 스미코는 같은 해 12월에 장녀인 테라지마 시노부를 출산한 뒤 육아를 위하여 연예계 활동을 중단하였다.
파일:키쿠고로 습명.webp
아버지와 7대 오노에 키쿠고로 습명을 발표
1973년, 10월 대가부키에서 여러 연기를 완벽하게 해낸 그에게 오토와야 오노에 종가의 당주에게 주어지는 세습명인 오노에 키쿠고로의 습명이 결정되며 7대 오노에 키쿠고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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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습명을 기념하여 아내와 아사쿠사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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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테라지마 카즈야스 탄생 기념 촬영한 가족사진
1977년 8월, 장녀 시노부를 얻은 지 5년만에 장남이자 가문의 후계자인 테라지마 카즈야스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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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과 아들의 시치고산을 맞이하여
2003년, 중요 무형문화재 보유자, 인간 국보 자격을 받게 되면서 할아버지 6대 오노에 키쿠고로, 아버지 7대 오노에 바이코우에 이어, 삼대가 인간 국보로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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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손녀 테라지마 토모요의 탄생 기념으로 촬영한 가족사진
7대 오노에 키쿠고로는 자신과의 결혼 생활로 인해 배우 생활에 공백기가 생긴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에 죄책감을 평생 가졌다고 한다. 그랬기에 장남인 8대 오노에 키쿠고로에게는 '가부키 집안에 대해 잘 아는 일반인 여성과 결혼하라'고 늘 당부했다. 그 시기에 장녀인 테라지마 시노부와 코오라이야의 10대 마츠모토 코시로약탈혼 해프닝이 일어나며 코오라이야와 절연하겠다고 선언한 키쿠고로였지만 코오라이야의 당주인 2대 마츠모토 하쿠오가 자택에 찾아와 진심어린 사과를 전하는 것을 보고는 마음을 풀었다고 한다. 그리고 2대 마츠모토 하쿠오의 소개로 그의 동생인 2대 나카무라 키치에몬의 딸들과 장남인 8대 오노에 키쿠고로의 만남을 주선하게 된다. 그렇게 키치에몬의 4녀와 8대 키쿠고로가 부부의 연을 맺으며 7대 오노에 키쿠고로는 2대 나카무라 키치에몬과 사돈을 맺게 된다.
파일:우시노스케 키쿠고로.jpg
장손 7대 오노에 우시노스케의 습명 발표 회견
2대 나카무라 키치에몬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둘이 함께 손자인 7대 오노에 우시노스케를 위해 창작 가부키극의 각본과 연출을 짜고 무대 하나하나에 공을 들이는 등 지극정성으로 손자의 앞 날을 밀어주었다고 한다.
파일:주일 프랑스.jpg
외손자 초대 오노에 마호로 습명 공표[14]
한편, 장녀인 테라지마 시노부의 장남인 오노에 마호로가 초대 오노에 마호로라는 세습명을 받고 본격적으로 가부키 배우로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무엇보다 '일본-프랑스' 두 국가간의 외교에 큰 역할을 하면서 키쿠고로는 우리 집안에 인재가 났다며 기뻐했다고 한다.

1942년생인 7대 오노에 키쿠고로는 현재 몸 상태가 많이 쇠약해져 대부분의 배역을 장남인 키쿠노스케에게 넘기고 휴연을 취할 때가 많은 편이다. 동갑내기인 2대 마츠모토 하쿠오 또한 같은 상황인데 둘 다 하나 둘씩 작품에서 물러나며 다음 세대들을 위한 작품 양성이나 멘토로 위치를 옮겨가고 있다. 물론 주요 연목의 경우 특별 공연 형식으로 단기간에 공연하기도 하며 티켓을 구하기 어려운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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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과 장손의 동시 습명 발표 회견에서
2024년 5월, 장남과 장손이 동시 습명할 것을 발표하였다. 피로연은 2025년 공연부터 예정돼 있다. 이 날 회견에서는 건강을 많이 되찾은 듯 걱정하지 말라는 반응을 보이며, 아무런 이변이 없다는 가정 하에 장남과 장손의 습명 피로연 무대 출연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한다.

2.1. 연기 스타일

파일:칸진쵸 요시츠네.webp
<칸진쵸>의 미나모토노 요시츠네[15]
젊은 시절에는 온나가타를 주력으로 삼았지만 40대에 접어들고부터 목소리의 변화로 타치야쿠의 비중이 늘더니 이내 더 이상 온나가타는 맡지 않게 되었다. 장남이자 온나가타에서 명연기를 선보이는 8대 오노에 키쿠고로와 부부 역으로 자주 묶여 극에 오르는 편이다.

무용 스타일은 온나가타를 오래 연기한 배우답게 선율이 가볍고 동작의 폭이 좁지만 동선을 많이 확보한 특유의 연기 스타일을 고집하여 볼거리가 풍부하다고 인간 국보 지정 당시 궁내청에서 평했다.

특히 칸진쵸의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의 경우 그가 연기하는 요시츠네가 현대에서 확일할 수 있는 가장 요시츠네 다운 요시츠네라는 평이 자자하다. 이는 키쿠고로의 아버지인 7대 오노에 바이코우가 요시츠네 연기를 오랜 세월 간 주력으로 삼아왔기에 그에게서 직접 연수받았기 때문인 것도 크다.[16]

온나가타, 타치야쿠뿐만 아니라 사자 춤이나 현대극에도 강하며 연기 폭이 굉장히 넓은 배우이다. 흔히 비교 상대로는 나카무라야의 선대 당주인 1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가 꼽혔었고 이를 의식했는지 쇼치쿠 자체의 연말 일본 무용 공연에 둘이 페어로 나온 경우가 잦았다.

최근엔 고령의 나이탓인지 동작들이 많이 뻣뻣해지고 간소화된것을 볼 수 있다.

3. 세습명에 관하여

장남과 장손의 동시 습명 발표 회견에서
7대 오노에 키쿠고로 명적 유지를 선언하는 7대 키쿠고로
이처럼 명문가 당주에 걸맞게 뛰어난 명배우였지만 2019년부터 척추 통증으로 인한 수술로 여러 무대에서 하차하였고 2024년 6월, 장남인 테라지마 카즈야스에게 오노에 키쿠고로의 명적을 8대째로서 물려주었다.

보통 여기서 자식에게 이름을 물려준 배우는 은거명을 사용하게 되지만 7대 키쿠고로는 영원히 오노에 키쿠고로로 남은 채, 이 명적과 함께 영면에 들고 싶다며 은거명의 사용을 거부하였다. 이로써 같은 하늘 아래 두 명의 오노에 키쿠고로가 존재하는, 400년의 가부키 역사상 이례적인 일이 벌어졌다.[17]

4. 여담



[1] 모리무라 재벌의 창립자인 6대 모리무라 이치자에몬이 1910년, 요코하마시에 설립한 일관제 사립학교이다.[2] 본명은 테라지마 세이조. 일본의 무형문화재, 인간 국보이다. 아버지는 사업가였으며, 태어나기 전부터 자녀가 없던 6대 오노에 키쿠고로의 양자로 입적되기로 정해져 있었다. 훗날 친자인 2대 오노에 쿠로에몬이 태어났음에도 양자인 오노에 바이코우가 우시노스케와 키쿠노스케를 습명하며 종가의 후계를 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현대의 오노에 종가 또한 바이코우의 후계이다.[3] 1979년 2월 무대를 마지막으로 가부키를 그만두었다.[4] 본명은 테라지마 준코로, 혼전 성은 슌도. 절세 미녀 연기로 명성이 자자하며 쇼와 시대의 유명 여배우였다. 결혼 후 사실상 연예계에서 은퇴했으나 2010년에 다시 복귀했다.[5] 본명은 테라지마 카즈야스.[6] 본명은 테라지마 마호로. 장녀인 테라지마 시노부의 장남이며 가부키 활동 외에도 혼혈인 아역 배우로서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외삼촌5대 오노에 키쿠노스케와 함께 탑코트에 소속되어 있다.[7] 본명은 테라지마 카즈후미. 장남인 8대 오노에 키쿠고로의 장남이며 직계 후계인 장손이다.[8] 가부키 배우로서 가지는 집안 이름. 세습명 구도를 중심으로 창시되며, 가부키계에는 4대 명문가를 포함한 40개 정도의 주요 야고가 있다고 한다.[9] 2대 오노에 쿠로에몬. 본명은 테라지마 키요아키. 6대 오노에 키쿠고로의 첫 번째 부인은 아니고 후처 테라지마 치요의 소생이다. 6대 오노에 키쿠고로가 병사한 뒤 미국으로 이민하여 하버드 대학교, 컬럼비아 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며 가부키를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고 하와이에서 폐렴으로 사망한다. (1922-2004)[10] 전시 상황이 이어지던 때에 태어났던지라 하츠오메미에를 비교적 늦게 치렀다.[11] 좌측부터 당시 6대 이치카와 신노스케, 초대 오노에 타츠노스케, 4대 오노에 키쿠노스케. 훗날 6대 이치카와 신노스케는 10대 이치카와 에비조를 지낸 뒤, 12대 이치카와 단쥬로를 지냈다. 이 셋을 언론과 팬들은 '산노스케'라 칭했는데 전부 이름에 '노스케'가 들어가며 같은 시기에 태어난 동년배에 서로 친한 사이였기에 삼인방을 묶는 것이 가능했다. 여담으로 산노스케는 이들의 아들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는데 이는 '헤이세이 산노스케'라고 분류된다. 구성원은 그대로 당시 7대 이치카와 신노스케, 2대 오노에 타츠노스케, 5대 오노에 키쿠노스케.[12] 7대 오노에 키쿠고로의 본명인 테라지마 히데유키에서 따온 것.[13] 일본은 법적으로 3촌까지만 친족에 해당되며 4촌 관계부터는 합법적으로 결혼이 가능하다. 키쿠고로 본인이 가부키 배우만 아니었더라면 바로 혼인신고를 올렸겠지만 가문의 당주로서 세세히 따져봤다고 회고한 적이 있었다. 현재는 일반인들도 주변 시선이 안 좋기에 빈도 수가 줄다 못해 소멸했다시피 하여 그리 흔히 볼 수 있는 혼인은 아니게 되었다.[14] 좌측부터 사위 로랑 그나시아, 장녀 테라지마 시노부, 손자 초대 오노에 마호로, 장남 8대 오노에 키쿠고로, 7대 오노에 키쿠고로.[15] 코오라이야의 당주, 2대 마츠모토 하쿠오무사시보 벤케이를 연기했다.[16] 7대 오노에 바이코우는 나리타야의 선대 당주인 12대 이치카와 단쥬로의 습명 피로연 칸진쵸에서도 요시츠네를 연기하였다.[17] 2024년, 요로즈야의 4대 나카무라 토키조가 아들인 4대 나카무라 바이시에게 '나카무라 토키조' 명적을 내려주고, 초대 '나카무라 만쥬'라는 은거명을 직접 만들어 이를 습명한 것과 상반된다. 직접 지은 이유도 집안의 최고 명적이 '나카무라 토키조'로 그 선대 명적은 없었기에 이번에 새로 지은 것이라 한다. 오토와야 또한 '오노에 키쿠고로'가 최고 명적이지만 장남이 아버지가 키쿠고로가 아닌 것은 낯설다며 명적 유지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