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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엽/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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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VS 타이론 우즈3. 야구4. 가족
4.1. 결혼 및 아들부자
5. 취향6. 인맥7. 기타 이야깃거리

1. 개요

이승엽의 기타 사항 내역을 정리한 문서.

2. VS 타이론 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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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야구


3.1. 유발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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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이승엽 와도 자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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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족

4.1. 결혼 및 아들부자

파일:이승엽 가족.jpg
2017년 이승엽 은퇴경기에서 가족들과 함께

5. 취향

6. 인맥

7. 기타 이야깃거리

파일:hxdOcWV.jpg

파일:이승엽 평창올림픽.jpg
Q: 야구를 그만 둔 이유
A: 후배들과 한국 프로야구를 위한 것이고 현역 시절, 누구보다 열심히 해왔으며 그만큼 힘들었던 시기를 다시 보내기 싫기에 다시 야구를 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Q: 야구를 하면서 포기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냐는 질문
A: 자신의 마음을 건드리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도중에 포기하고 싶기도 했다고 말했다.
Q: 본인에게 삼성 라이온즈는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질문
A: 본인의 꿈이었던 구단이며 앞으로 지도자가 된다면, 삼성 이외의 유니폼을 입을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운동으로 성공하는데에는 재능과 노력,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




[1] 종목은 다르지만 이와 반대되는 케이스가 안정환이다. 안정환은 지금도 이탈리아에 갈 수 없다고 한다.[2] 결혼 생활 때문에 캠퍼스 생활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지만 어찌어찌 졸업은 했다고 한다. 인터넷 강의를 듣다가 이승엽을 따라 일본을 간 후 중앙대와 자매결연을 맺은 니혼대학교에서 1년 반 정도 학교를 다니며 졸업장을 땄다고.[3] 둘째 아들의 이름이 '은엽'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이승엽의 마지막 올스타전 시타자로 나왔을 때 입은 유니폼 마킹은 '이은준'으로 되어 있었다.[4] 증언이라기보다는 경북고 문서에 기록된 부분을 인용.[5] 한국인 대다수가 행운의 숫자로 여겨 좋아하는 숫자이다.[6] 36번에 대해서는 이 감독이 36번을 감독으로서 다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여 고사했다.[7] 36, 33, 25, 3번.[8] 1위는 총액 2000억 3000만원을 기록한 추신수로 총액 1521억 4000만원을 벌어들여 2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류현진이 향후 연봉에 따라 1위 자리에 오를 가능성도 있으나 이 기록 또한 1497억 5700만원을 벌어들인 이정후가 갈아치울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9] 야구선수들이 운동선수치곤 유독 흡연자 비율이 높은 편이다. 경기시간 내내 뛰어다니는 종목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심폐지구력이 덜 요구되기 때문.[10] 2000 시드니 올림픽,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2008 베이징 올림픽. 참고로 WBC의 경우 2006년 대회 한정으로 병역특례가 적용되었다.[11] 비슷한 사례로 정대현이 있다. 정대현은 경희대학교 4학년 시절 2000 시드니 올림픽 국가대표에 뽑혀 동메달을 목에 걸었기에 이때 병역특례를 받았다고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그전에 제2국민역 판정을 받은 상태였다.[12] 직접 옆 소파에서 보고 작성한 내용인데 당시 이승엽에게 사인 부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표정이 처연하고 인터뷰에 몰입해 있었다.[13] 일본에서 이승엽의 별명은 아시아의 대포였다.[14] 카와카미의 빈볼에 대해 추가적으로 설명하자면, 2005년 5월 20일 교류전 경기였던 주니치 대 롯데 경기에서 8회 2사까지 주자를 한 명도 내주지 않았던 카와카미는 이승엽에게 홈런을 얻어맞으며 퍼펙트 게임이 깨지는 경험을 했다. 당시 빈볼은 이에 대한 보복이었지만, 결국 보복구도 통하지 않고 되려 큰 홈런을 얻어맞아 버렸다.[15] 여담으로 <성공시대>에 출연할 당시 만 23세로, 이 프로그램 전체로 통틀어 봤을 때 최연소 출연자였다.[16] 이런 이야기는 사실 과거 다른 유명 야구인들에게도 흔히 있는 이야기이긴 하다. 재일교포 스포츠인의 신화이자 위대한 야구인인 장훈과 한때 같은 팀에서 뛰었던 백인천 역시 밤에 자다가 목이 말라 숙소에 있는 식당에 물을 마시러 갔다가 장훈이 불 꺼진 식당 구석에서 속옷만 입은 채로 방망이를 휘두르는 걸 보고 “장이형, 뭐하우?”라고 하자 “오늘 훈련할 때 좀 스윙이 안 좋아서 잠깐 연습한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당시 최고의 타자였던 그가 자신의 위치에 자만하지 않고 꾸준히 연습을 한다는 걸 알고 크게 감명을 받아 자신도 더 노력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17] 실력 때문에 부각이 잘 되지 않았고 야구 팬덤 자체가 남초 성향이 그렇지 사실 이승엽의 외모도 꽤 잘생긴 편이다. 김재현과 더불어 서울시장 오세훈과 닮았다는 말이 있다.[18] 군 면제를 이미 받아 놓고 대학을 갔다.[19] 타자로서의 롤모델은 이만수였다.[20] 이승엽야구장학재단[21] 두산 시절에서는 이승엽의 상징 번호인 36번을 달았었고, 삼성으로 이적할 때에는 36번이 영구결번으로 남아있으니 이렇게 된 것이라고.[22] 하지만 두산과의 PO에서 패하며 최종 순위는 3위를 기록하게 되었다.[23] 특히 2008년 한신과의 13경기차를 만회하고 역전 우승하는 데 기여한 점이 크게 작용했다.[24] 게다가 이승엽이 요미우리 초창기 엄청나게 활약하자 한국의 방송사들이 요미우리 구단에 1년에 수십억 원을 중계권료로 지불하면서 연봉 보전을 성공적으로 해 주면서 금전적인 손해는 거의 없었다. 어차피 연봉만큼 중계권료를 받고 경기에서도 활약하면 데려온 값은 하는거다.[25] 사실 성적만 보면 그럭저럭 평타는 친 선수들도 많은데, 교진의 문제는 돈을 시세보다 너무 많이 준다는 점. 원래 잘하던 선수는 당연히 많이 주고, 이승엽이나 후일의 카타오카, 노가미, 게레로, 야마구치, 카지타니 등등 커리어 내내 시원찮다가 딱 한해 잘한 성적을 찍은, 누가 봐도 FA로이드인 선수들도 덮어놓고 비싼 값에 모셔온다. 이러니 당연히 먹튀가 많을 수밖에 없다. 특히 야마구치와 카지타니의 경우는 전성기가 지나서 요미우리에 들어온 이후 드러누우면서 그야말로 망해버렸다. 야마구치는 잠시 메이저리그에 진출 했지만 그 전에 쳐놓은 사고가 많아서 이미지가 좋지만은 않다.[26] 당장 다니시게는 이승엽에게 결정적인 홈런 두 방을 얻어맞은 적이 있다. 2007년에는 요미우리와의 시즌 최종전에서 당시 리그 최소 피홈런을 기록하던 아사쿠라가 이승엽에게 동점 홈런을 얻어맞아 리그 우승 타이틀을 요미우리에게 내줘야 했고, 바로 다음해인 2008년 클라이막스 시리즈에서는 당시 팀 에이스 가와카미 켄신이 이승엽에게 결정적인 역전 쓰리런을 얻어맞는 바람에 시리즈를 내준 바 있다.[27] 이승엽 감독은 현역 시절 36번(삼성, 지바 롯데), 33, 25번(요미우리), 3번(오릭스)과 감독 데뷔 후 77번(두산)을 사용했다.[28] 강병식 코치는 3번을 사용하지 않았다.[29] 강병식은 우투, 이승엽은 좌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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