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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엽 야구장 | vs 타이론 우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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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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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승엽에 대한 평가를 다룬 문서.2. 플레이 스타일
2.1. 타격
상대가 어떤 공을 던질지 미리 예상하고 해당 코스로 휘두르는 비중이 높은 게스 히터다. 밀어치는 법 없이 거의 대부분의 공을 노려서 당겨치는 스윙을 했다. 2000년 이후 꾸준히 몸을 키워 나갔지만, 이전까지는 거포치고는 호리호리한 몸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서 유도를 했었기 때문인지 등, 복근의 근력과 양손의 악력이 리그 평균에 비해 매우 높았다. 또 오른손잡이지만 왼손 근력도 오른손 근력과 비슷하다. 이런 코어와 악력, 그리고 하술할 역대 타자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홈런 스킬 덕분에 극단적인 외다리타법과 홈런타자라기엔 가냘픈 팔뚝을 가지고도 무거운 900g 배트를 강하게 당겨 홈런을 만들 수 있었다.
이승엽은 플라이볼 혁명으로 요약되는 21세기 메이저리그 타격 스타일에 가장 근접한 타격 스타일을 가진 선수로, 소위 말해서 공을 띄워 멀리 보내는 능력에 있어서는 이견의 여지가 없는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로 평가된다. 이승엽의 타격기술에 대해 분석한 기사들의 공통적인 내용이라면 힘보다는 기술로 넘긴다는 것이다. 즉 타격시 공의 중간에서 아주 약간 아랫부분을 때려 역회전으로 인한 양력을 이용해 타구를 효과적으로 멀리 보낼 수 있는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 났다는 것이다. 사실 커봐야 지름이 7.5cm 밖에 안되는 야구공이 시속 130-150km 이상으로 날아오는데 중심보다 약간 아랫부분을 의식적으로 노려서 때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러한 타격스킬은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말그대로 타고난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승엽은 홈런타자면서도 공을 쪼갤 듯이 후려쳐 총알처럼 관중석으로 날리는 전형적인 파워히터와는 대척점에 있는 스타일이다. 게스히터다보니 최대한 히팅포인트를 앞에 두고 당겨치는데 이경우 실제로 타구에 힘을 싣는데 유리하기도 하고 중계 카메라 각도상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치는 것처럼 착시가 일어나 임팩트에 비해 생각보다 훨씬 더 날아가는 느낌을 받게 된다. [1] 선배 양준혁이 대단한 선구안을 기반으로 풀스윙을 후려쳐도 3할을 넘기는 교타력을 보유했다면, 반대로 이승엽은 뛰어난 근력과 유연성, 그리고 정확한 타격 감각을 기반으로 절제된 스윙을 했으나 밥먹듯이 담장을 넘기는 장타력을 보유했다. 가장 좋을 때에는 대놓고 떨어지는 안 좋은 공도 게스 히팅으로 정타로 받아쳐서 가볍게 넘겨버릴 수준.
이런 선수들은 대부분 공을 정확하게 치지 못해 타율이 낮거나 삼진이 매우 많은데,[2] 이승엽은 컨택마저도 매우 좋은 편이다. 통산 홈런 10위권 중에 타율이 3할을 넘는 것은 이승엽, 양준혁, 이대호, 최형우 뿐. KBO 리그 통산 홈런왕을 3회 이상 기록한 선수들 중 통산 타율 3할을 기록한 선수는 없다. 힘으로 넘기는 타자들이 제대로 맞으면 까마득하게 날려버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대신 맞지 않을 경우엔 시원한 헛스윙으로 물러나는 경우가 많아서 타율이 낮고 삼진 비율이 높은 편인데, 이승엽은 기술로 공의 중심을 타격해 타구를 멀리 보냈기 때문에 단타나 2루타의 비중도 높고 삼진의 비중은 평범한 편이다. 실제로 홈런과 2루타 등 장타는 물론이고, 안타 개수도 KBO 통산 10위권, 개인 통산을 따지면 KBO 출신으로는 이대호 바로 다음의 2위, 한국인으로는 장훈까지 포함해 3위다. 타석당 삼진 비율은 교타자인 김태균과 비슷하다.
그러나 자신의 예상과 완전히 다른 공이 왔을 경우 대처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이 단점이다. 때문에 변화구 대응력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고, 정말 어이없게 벗어나는 공을 스윙하여 스트라이크 판정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몸쪽 종변화구에 취약했는데 이는 NPB에서 부진했던 원인 중 하나로 꼽혔다. 포크볼은 KBO에서는 던지는 투수가 드물지만, NPB에서는 노모 히데오와 사사키 가즈히로의 영향으로 스테디셀러에 가까운 변화구였다. 대부분의 NPB 투수들은 유리한 카운트에서 포크볼과 같은 종변화구로 승부했고, 이승엽은 그 때마다 크게 헛스윙하며 물러났다. 그래서 이승엽의 약점을 나타내는 말은 떨공삼(떨어지는 공에 삼진)이다. 이 떨공삼은 신인 때부터 은퇴하는 날까지도 온전히 극복해내지 못했다. 덕분에 이혜천이나 구대성에게도 상당히 약한 모습을 보였다.[3]
일본 언사이클로피디아에서는 이승엽을 타석에서 춤추는 선수, 발레 선수로 묘사한다. 그러나 사실 한국에서의 이승엽은 볼넷 대비 삼진 비율이 좋은 편에 속하는 타자이다. 한국프로야구 1기 9년 동안 0.306의 통산타율에 0.409의 출루율을 유지했으며, 한국 복귀 이후 성적까지 포함한 통산 출루율은 .389이다. 일본에서는 투수들의 심각한 수준의 실력 차이로 인해 엄청난 제구력과 변화구를 당해내지 못해 게스 히팅도 전혀 안 먹히고 삼진이 폭등해버렸다.
물론 4할에 근접한 출루율이 순전히 선구안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승엽 정도의 홈런 타자라면 투수들이 가급적이면 '헛스윙 해주면 좋고 아니면 볼' 식의 승부를 하게 되기 마련인데, 상술한 대로 게스 히터인 이승엽은 그런 공에도 스윙을 해서 삼진을 당하는 경우가 꽤 있기 때문이다. 이승엽의 뒷 타순에서 나온 경험이 많은 마해영은 대기 타석에서 보면 어차피 뒷 타석에 자기가 있는데 볼을 골라내지 않고 쳐서 나가려고 하는 모습이 답답해 보인 적이 있다고 유튜브에서 밝힌 적이 있다. 허나 거기에 당하기만 했다면 공갈포로 전락했을 것이고,[4] 그 정도의 타자였다면 지금과 같은 위상을 가질 수도 없었다. 이승엽은 KBO 통산 16년 동안 볼삼비가 1:0.8 정도를 유지하는 타자다. 공격적인 성향 때문에 삼진당하는 모습을 많이 목격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KBO리그에서 선구안이 좋은 편이었다. KBO에선 선구안을 갖춘 게스 히터였다면 NPB에선 수준차로 인해 공갈포가 된 셈이다.
NPB에서의 볼삼비를 부진의 원인으로 보는 시각이 많지만 볼넷 비율 8.5%에 타출갭 0.067로 볼을 아주 못 골라낸 것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2할 중반에 머물렀던 타율. 2006년까지만 해도 속구에 대한 대응력이 매우 뛰어났으나 이후 지속적으로 속구 상대타율이 점점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 노쇠화가 진행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다. 이에 대해 근력 향상을 위해 근육질로 몸을 키우고 유연성을 외면한 것[5]이 역으로 배트스피드 저하와 부상이라는 부작용을 가져왔다는 분석이 있다. 이승엽은 통산 타율이 3할을 넘고 컨택률이 80%를 상회하는, 홈런에만 올인하는 타자가 아니라 컨택의 비중이 적지 않은 타자였다.[6] 일본 커리어하이인 06시즌의 BABIP가 0.350으로 상당히 높아서 이를 운이 좋았던 시즌으로 치부하기도 하는데, 06시즌은 BABIP뿐만 아니라 홈런 비율(6.7%)과 볼넷 비율(9.5%)이 모두 NPB 커리어 평균 이상이었던 시즌이었다. 부진에 빠진 08년도부터는 오히려 볼넷 비율 10%를 찍을 정도로 볼은 더 잘 골라냈으나 컨택이 되지 않아 25%에 육박하는 삼진율과 2할 초반대를 겨우 찍는 BABIP가 발목을 잡았다. 그러다보니 말년에 노쇠화가 왔을 때 그동안 쌓인 경험을 살려 OPS 히터로 변하기 마련인 일반적인 홈런타자들과는 달리 이승엽은 벌크업을 줄이고 배트를 눕히고 스윙폭을 좁혀 타율을 높인 컨택형 홈런타자로 변신했다.
현재 기복이 심한 선수로 KBO에서는 후배 구자욱이, MLB에서는 애런 저지가 언급되는데, 이승엽은 그런 선수들의 원조격이라고 불릴 정도로 기복이 심한 선수이기도 하다. 이것은 일본프로야구는 물론 한국프로야구에 있었을 때도 언급되었던 문제점. 즉 타격 감각이 올라왔을 때는 한 경기 2~3개 홈런을 연달아 치면서 홈런 개수를 급격히 늘리는 재주가 뛰어나나, 부진할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삼진머신으로 돌변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월별 성적 뽑아보면 한 시즌내에서 좋을 때와 안좋을 때의 월별 성적이 3할 가까운 차이를 보이는 등 컨디션과 멘탈에 좀 지나치게 영향을 많이 받는 경향이 있다.
이렇듯 약점이 뚜렷하지만 장점이 엄청나기 때문에 이를 상쇄하는 선수다. 독보적으로 뛰어난 부분은 없었지만 타격면에서 약점이 없어 대단한 성적을 기록한 이대호와는 반대의 케이스. 한국보다 한 수 위인 일본프로야구에선 오랜 부진을 겪었지만, 그 일본프로야구 성적을 합쳐 계산해도 타율, 출루율, 볼넷을 제외한 스탯에서 KBO 누적의 왕 양준혁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국제대회 성적도 좋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부터 시작해 국가대표에 꾸준히 뽑혔고, 현역 메이저리그 올스타와 추후 명예의 전당 입성자들로 이루어진 팀을 국제대회에서 볼 수 있었던 역대 유일한 대회였던 2006년 제 1회 WBC에서는 대회 홈런왕과 타점왕에 오르는 등 현재까지 국제대회 통산 홈런 1위는 그의 몫이다. 무엇보다 부진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발휘되는 스타성과 클러치 능력 덕분에 국가대표 하이라이트 필름에서 단골 손님이다.
포스트시즌 통산 홈런 1위(14개) 역시 이승엽인데, 포스트시즌 통산 성적으로는 이승엽보다 뛰어난 선수도 많지만 그의 진가는 꼭 필요한 순간 한 방을 쳐준다는 스타성에 있다.
일반적인 슬러거 이미지(힘은 좋지만 발은 느린 근육돼지라든지)와는 달리 주루능력도 있다.[7] 컨디션 관리와 부상 방지 등의 이유로 도루 횟수 자체는 많지 않지만, 주루사가 적고 허를 찌르는 도루도 한 번씩 하는 편이다. 통산 57개의 도루를 성공했으며 성공률은 70%이다. 병살타도 굉장히 보기 힘든데 8천타석을 넘게 들어서는 동안 병살타 개수는 겨우 120개다.[8] 일본에서도 3,000타석 가까이 들어섰지만 병살 갯수는 40개로 대략 75타석에 1번꼴이다. 이는 좌타자인 것을 감안해도 손꼽히는 수준이며 이승엽보다 타석에 많이 들어선 선수중에 이승엽보다 병살 비율이 낮은 타자는 KBO내에 오직 전준호 한 사람뿐이다. 이는 이승엽이 기본적으로 퍼올리는 어퍼스윙형 타자이기에 생기는 현상으로 이승엽은 쓸데없이 퍼올려서 뜬공으로 죽거나 삼진을 당했으면 당했지 끔찍한 타구질의 땅볼을 만들어내는 일은 잘 없었다.
2.2. 수비
홈런왕의 면모에 묻히지만 수비 면에서도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1루 수비수로 평가된다. 노쇠화 이후의 평가를 다룬 후술할 사도스키 리포트에서도 타격 면에서는 약점을 지적받았지만 수비는 고평가받았다. 세이버메트릭스 상의 지표는 신뢰성이 낮은 뉴탯티즈발 스탯이라 의미는 크게 없고, 한창 일본에서 타격이 죽을 쑬 때도 지명수비, 대수비 소리를 듣던 선수였다.KBO는 말할 것도 없고 NPB에서도 센트럴리그 연속 무실책 기록(1,225이닝)을 가지고 있다. 1루 수비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라고 볼 수 있는 포구나 번트 수비시 숏 바운드 처리 능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1루 선상수비도 아주 좋다. 다만 왼손잡이 1루수답게 1루선상 강습타구 수비는 가끔씩 약점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 때문에 한창 요미우리에서 삽 푸고 있을 때 이승엽이 나오면 '오늘은 수비 위주 라인업'이라고 우스갯소리로 얘기할 정도다.
기본은 1루수지만 커리어동안 딱 2년간 좌익수를 본 적이 있다.
한국 시절에는 1996시즌으로, 당시 전 해의 신인왕 이동수가 부상 이후 복귀하였는데, 원래 3루수였지만 수비가 불안하였다. 고로 1루로 전향을 꾀하였고 이승엽은 1루수에서 밀려나 좌익수를 맡았다.[9] 이 때 양준혁과 이만수도 있었던 삼성은 우익 양준혁–좌익 이승엽–지타 이만수–1루 이동수 순으로 클린업 쿼텟을 선보이곤 했다. 한국에서 좌익수로 나온 경기는 통산 47경기로, 이중 46경기가 1996년 출장이다. 나머지 1경기는 1997년 출장.
일본에서는 치바 롯데 소속이었던 2005시즌에 좌익수로 기용된 적이 있다. 당시 치바 롯데의 1루수는 1루 전문 스페셜리스트이자 팀의 최고 인기선수였던 후쿠우라 카즈야[10]였는데,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기도 힘든 게 1년차 이승엽이 워낙 성적이 안 좋았던 반면 후쿠우라는 워낙 수비가 좋은 선수였던데다[11] 그 시점에서 4년 연속 3할 타율을 기록할 정도로 타격도 빼어난 선수였기 때문이다.[12] 이 때문에 이승엽은 입단 첫 해부터 주로 지명타자로 나왔는데, 지명타자도 외국인 타자만 4명(이승엽, 맷 프랑코, 베니 아그바야니, 발렌티노 파스쿠치)일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좌익수 경험을 살려 이듬해인 2005시즌에는 좌익수로 출장하게 되었다.
다시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2012~2013년까지는 전임 1루수 채태인의 부진으로 1루 출장을 많이 했다. 2014년부터는 채태인 - 구자욱 - 다린 러프로 1루수 계보가 이어지며 지명타자 출전 빈도가 훨씬 높았다. 이승엽과 채태인이라는 압도적인 1루 수비를 봐왔던 삼성팬들에 의해 수비가 부족했던 구자욱이 상당히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13]
현역 마지막 시즌이 될 2017년에는 다시 1루수 출장 비중을 늘리겠다고 선언했다. 개막전 1루수로 선발 출장하고 1루수로 100경기 이상 출장하는게 목표라고 한다.[14] 현역 마지막 시즌이라 은퇴 전 팬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더 보여주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삼성 라이온즈가 1루수비가 안정적인 용병을 데려오면서 결국 지명타자 출장이 늘게 되었다. 그래도 마지막 경기에서만큼은 1루수로 선발 출전했다.
2.3. 라이언 사도스키 리포트
한국의 전설적인 타자지만 기량이 쇠퇴했다. 모든 타석에서 ‘테드 윌리엄스 시프트’를 사용할 것. 땅볼의 95%가 오른쪽을 향한다. 외야수들은 정위치를 지킬 것. 몸쪽 직구에 약하다. 쳐도 파울이 된다. 몸쪽 공에 손이 일찍 덮이고, 그래서 실망하고 나면 더 일찍 치러 나온다. 이때쯤에도 아직 아웃되지 않았다면 바깥쪽 낮은 직구가 효과적이다. 오른손투수들은 커브나 슬라이더를 던지면 안 된다. 체인지업은 통하겠지만 직구가 더 나은 해결책이다. 좌투수는 몸쪽 직구를 보여주고 나면 슬라이더로 헛스윙을 유도할 수 있다. 주력은 평균 정도지만 상황 판단이 좋다. 세 명의 1루수 중에 수비력이 가장 좋다.2.4. 종합
이승엽은 KBO 리그 역사상 최고의 장타자이자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1루수로 평가받는다.[15] 또한 삼성 라이온즈 역사상 최고의 선수이기도 하다.[16] 고졸 데뷔 시즌인 1995시즌부터 연령대에 따른 기대치를 크게 상회하는 활약을 보여주더니 만 21세 시즌인 1997시즌부터 7시즌 중 5시즌 홈런왕을 차지하는 등 2000년 전후 KBO 리그를 상징하는 선수였다. NPB 진출 이후 만 36세 시즌에 팀에 복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나이에 비해 훌륭한 활약을 펼치며 엄청난 누적 기록을 쌓아나갔다.통산 OPS 0.960은 규정 3,000타석 이상 타자 중 1위이며, 특히 해외 진출 전인 2003년까지의 타/출/장은 0.305/0.407/0.614로 OPS가 1.021에 달했다. 거기다 8년의 NPB 시절에도 불구하고 양준혁의 누적 기록을 다수 꺾고 KBO 1위 자리를 차지했었다. KBO 기록만으로는 최정이 홈런 1위, 최형우가 타점 1위지만 NPB 기록을 합치면 까마득하게 멀리 있다. 당연히 이 두 선수는 15시즌을 뛴 이승엽에 비해 훨씬 더 오랜 기간을 KBO에서만 뛰어서 겨우 뛰어넘은 것이다.[17] 23년(한국 15년 + 일본 8년) 동안 한국 국적으로 가장 많은 홈런[18]과 2루타를 쳤으며 세 번째로 많은 안타를 친 타자[19]이다. NPB에서는 아쉬운 성적을 거두었지만 장타력만큼은 잃지 않았으며, 대한민국에서 홈런으로는 견줄 대상이 없는 강타자였다.
국가대표팀에서는 합법적 병역 브로커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결정적인 순간마다 적시타와 홈런같은 한방을 쳐주면서 영웅으로 등극했다. 클러치 히터는 있는가 없는가 하는 논쟁이 뜨겁지만 국가대표 팀에서의 이승엽에게는 분명 스타성이 있었다.
삼성의 이만수 - 양준혁 - 이승엽 본좌라인이며, 영결라인이다. 언론상에 주로 나오는 별명 겸 수식어는 국민타자 또는 라이온킹. 인터넷 상에선 합법적 병역 브로커와 오푼이, 그리고 일본에서 부르던 애칭이던 승짱, 국민적(敵)[20] 등이 있다. 시민타자라는 표현은 대구내에서만 응원하라고 비하하려고 부른거 같은데.. 엄밀히 말하면 맞는 표현. 당시 대구 운동장은 대구로만 불렸지 타지 사람들한테는 정식 표현인 대구 시민운동장이라는 표현이 없었다. 말그대로 홈구장인 시민구장에서 원정경기보다 많은 홈런을 쳤으므로 맞는 말이다. 시민구장의 대표타자라고 하면 손색이 없다. 말그대로 이만수와 양준혁의 위에 올라가므로...[21]
2008 베이징 올림픽 덕분에 디시인사이드 국내야구 갤러리에서 "중요한 순간 꼭 2점을 뽑아준다"라고 하여 "이점엽"이라는 별명을 만들었다. 또한, 슬럼프도 없이 부진하지 않고 언제나 꾸준하게 좋은 활약을 펼친다고 해서 자칭 이름에다 호를 붙여서 "역시 이승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이와세 히토키를 상대로 투런 홈런을 날린 후. |
하나씩 적어보자면 2000 시드니 올림픽 당시 일본과 치른 예선전에서 괴물투수로 불리던 마쓰자카 다이스케를 상대로 2점 홈런을 날렸고, 동메달 결정전에서 또 다시 마쓰자카를 상대로 결정적인 2타점 2루타를 날렸다. 2006 WBC 때 도쿄 돔에서 일본과 예선을 치르며 8회에 결승 역전 2점 홈런, 2Round 멕시코전에서 결승 2점 홈런,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일본과 치른 준결승전 당시 8회에 결승 역전 2점 홈런, 쿠바와 치른 결승전에서도 1회에 선제 2점 홈런 등 2와 인연이 깊다. 마지막 은퇴 경기에서도 1회 선제 2점 홈런에 2회 연타석 홈런까지 했다.
또 다른 별명인 합법적 병역 브로커는 2008 베이징 올림픽 이후에 붙은 별명이다. 이유는 지금까지 합법적으로 후배들에게 병역 특례 티켓을 쥐어준 것만 해도 엄청난 숫자에 이르기 때문. 2000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금메달, 2006 WBC 4강, 2008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로 40명 정도의 선수들에게 병역 특례를 선물로 주었다. 자신은 팔꿈치 수술로 면제가 되었지만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현하는 대인배적 면모를 보여준다.
2000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 결정전에서 일본을 침몰시킨 장본인도 다름 아닌 이승엽이였고, 2006 WBC에서 미국을 1회 초구 홈런으로 관광시킨 장본인도 이승엽이였다. 결국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로 구성된 팀마저도 이승엽을 고의사구로 골라내는[22] 굴욕을 맛봐야 했다. 일본에서 말하듯 정말 국민적인 타자다.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거칠고 터프한 스포츠 선수의 이미지와는 달리 사생활도 깔끔하고 신사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다만 2000년에 풍파를 불러온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사건 때 아무런 일도 하지 않다가 뒤늦게 참여한 경력이 있어 이 때문에 이미지가 많이 깎이고 비난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승엽이 선수협 파동 당시 만 24세였고[23], 나이에 비해 한국 야구계에서 비중이 지나치게 무거웠던 관계로 당시 어린 이승엽이 옳은 판단을 내리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이며 특히나 당시 삼성 구단의 주장을 맡고 있던 사람은 선수협 오적으로 유명한 김기태였고, 당시 양준혁과 주먹다짐까지 벌여가며 삼성 선수들을 선수협에서 발을 빼도록 주도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24] 이승엽의 참가는 무리였다는 점 때문에 비난 여론이 그리 많지는 않다.[25] 그리고 비난하는 사람들의 주장과 달리 정작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창립 당사자들이 이승엽을 옹호했었다는 점[26]을 감안하면 다소 무리가 있는 셈이며 이 후 2001년에는 결국 단독으로 선수협에 가입했고 그 후로도 선수협과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 가입 당시 기사 #1#2#3
3. NPB 시절에 대한 평가
NPB 시절 세이버메트릭스 성적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리그 적응에 실패한 2004 시즌, 준수한 성적의 2005 · 2007 시즌(각각 wRC+ 131, 118), 리그 정상급 타자였던 2006 시즌(wRC+ 172), 그리고 2008~2011년의 기나긴 부진으로 요약할 수 있다.[27] 특히 요미우리와 일본 역대 최고의 초대형 계약을 맺은 이후 4시즌 동안 극도로 부진하여 제대로 된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점이 먹튀라는 평가를 받게 했다.[28]
다만 역으로 보자면 2006년의 이승엽이 요미우리가 눈을 돌아가게 할 만큼 얼마나 몬스터급 활약을 펼쳤는지를 알 수도 있는 부분이다. wRC+ 172는 통상적으로 한 리그에서 타자가 뽑을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성적이며,[29] 2005년과 2007년도 30홈런 이상을 쏘아올린 준수한 시즌이었다. 2006년의 활약이 너무 독보적이라 그렇지, 2007 시즌 종료까지 4시즌동안의 이승엽은 'NPB 진출 실패'와는 거리가 매우 멀었음이 분명하다.
아무튼 이승엽이 08년부터는 먹튀였다는 데 별다른 이견은 없고, 이런 면에서는 흔히 리그의 수준차이가 가장 많이 거론된다. 당장 국내복귀 직후 시즌인 2012년만 하더라도 일본에서 부진했던 시즌인 2008~2011년과 비교한다면 마치 다른 사람같은 성적을 내고 있다. 더구나 2014년에는 3할 30홈런 100타점을 할 정도로 기량은 죽지 않았다. 이승엽의 나이를 고려한다면 일본 성적과 매우 매치가 되지 않는다. 다만 이 때 KBO가 극심한 타고투저였다는 것은 감안해야한다. 일본 가기 전인 1997~2003년까진 역대 최고의 홈런 타자였지만 2004~2011년에는 2할 5푼에 평균 20홈런도 못치는 선풍기가 되어 버렸고 국내 돌아오자마자 30대 후반 나이에 다시 활약한다는 것 자체가 한일간의 수준 차이를 뒷받침해준다. 이런 사례는 굳이 예를 들 필요도 없다. 성공사례라 할 수 있는 류현진이나 이대호, 오승환도 각자의 리그에서 정상급 기량을 보여준 바 있지만, 전체 커리어에서 비교해보면 국내의 기록보다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병규, 이범호, 정민철 등 이미 국내 레전드 선수들이 일본 가서 망하거나 수준 이하의 성적을 보인 사례는 많다. 또한 한국 리그를 폭격한 용병들 역시 일본 리그에 진출하고 폭망한 사례들이 즐비하다. 그만큼 KBO와 NPB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보여주는 방증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승엽의 먹튀화는 KBO와 NPB의 수준차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승엽의 성적은 2005~2007 시즌과 나머지가 NPB 시절 내부에서도 너무 극단적으로 차이가 나며, 이는 리그 수준차이가 아닌 이승엽 개인에게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위에서는 2011년 NPB의 이승엽과 2012년 KBO의 이승엽이 마치 다른 사람 같다고 지적했지만, 2005~2007년의 이승엽과 2008년의 이승엽도 마치 다른 사람처럼 극단적으로 다른 건 똑같다. 즉 이승엽은 NPB 안에서 정상급과 바닥급을 왔다갔다 한 것이지, KBO에서 NPB를 갔다고 바닥이 된 것이 아니다.[30] 리그 수준의 차이는 분명하게 존재하지만, "이승엽은 자기 기량으로 이겨낼 수 없는 NPB를 갔기에 실패했다"라는 평가는 분명하게 틀린 것이며, 이런 단순화는 NPB 안에서조차 극단화된 시즌별 차이를 설명해주지 못한다. 가장 설득력있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NPB 초창기 시도했던 무리한 웨이트 트레이닝이다. 실제로 NPB에서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한 2008년에는 국제대회인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부진했는데, 이 때 타석에 선 이승엽은 거포 치고 호리호리하다는 커리어 전반적인 분석과 반하는 엄청난 몸집이었다. 이는 리그 스타일의 차이가 아니라 이승엽 개인의 문제가 더 크다는 분석에 힘을 실어준다. 이후 2012년 한국에 복귀한 이승엽은 2008년에 비해 벌크업이 확 빠진 모습을 보여주며, 이후에는 2013년의 부진이 있긴 했으나 종합적으로는 은퇴할 때까지 좋은 성적을 유지했다. 이를 증명하는 것 중 하나가 KBO 복귀 후의 비율스텟인데, 2012년 이후 이승엽의 출루율은 0.361, 장타율은 0.511로 통산 성적인 0.389, 0.572와 제법 차이가 나는 반면 타율은 0.298로 통산 타율인 0.302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부진에 시달렸던 13년도를 제외하면 오히려 KBO 1기 시절보다 타율은 더 높았다. 즉 일본에서는 자신에게 바랐던대로 홈런에 집중해서 처음에는 결과를 냈으나 무리한 벌크업과 노쇠화로 한계가 찾아왔고 KBO 복귀 이후 플레이 스타일을 바꿔서 한계를 극복했다고 설명이 가능하다. 또한, 수술까지 받았던 손가락 상태가 큰 영향을 줬다고 할 수 있다. 일본시절 한참 엄지손가락 부상으로 힘들어했었고 결국 수술까지 받으면서 컨디션이 떨어진 상태였다. 후일 본인이 직접 밝히기로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엄지손가락이 낫지 않아 진통제를 맞으면서 경기에 나섰다고 한다.
종합적으로 보자면 수준 높은 NPB에서 이승엽의 약점을 좀 더 잘 공략할 수 있었다는 차이점도 있겠지만 무리한 벌크업, 부상여파와 수술, 거포 용병이라는 포지션의 심리적 문제 등 이승엽 개인의 이유까지 모두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커리어하이 시즌은 리그에서도 손꼽힐만한 대단한 성적이었고 우승 경험도 있었으며 부진을 겪으면서도 계속 불러주는 구단이 있었다는 것은 운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인정받는 부분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4. 탁구장+타고투저로 고평가된 타자?
이승엽이 뛰던 시절은 거의 대체로 타고투저였으며, 그가 뛰던 시민구장이 타자 친화 구장이라는 이유로 그에 대한 과대평가 논란이 있으나, 결론적으로 그는 KBO 리그에서는 그러한 저평가 요소들을 이겨낼 정도의 매우 뛰어난 성적을 올렸고, 세이버메트릭스상의 보정을 거치고도 당대 최상위권~최고 수준의 타격 생산성을 기록했다. 다만, 그가 MVP를 받았던 시즌들 중 일부는 세이버상으로 그가 최고 수준의 성적을 기록하지 못한 적이 있기에 논란이 되기도 했다.WAR로 이승엽은 1999년 9.72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2002년은 9.7로 역대 5위다. 2003년 심정수가 WAR이 12점대다. 실제 기록으로 봐도 이승엽이 타이틀은 많이 가져갔지만 심정수가 MVP를 받아도 이상할게 없을 정도로 잘했다. 타자의 공격력을 객관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수치인 WRC+의 역대 단일시즌 순위를 보면 이승엽은 톱이 아니다[31]. 이승엽은 97·99·01~03시즌 총 5회의 홈런왕을 수상했으며, 특히 03시즌에는 56개의 홈런을 때려 프로야구 단일시즌 최다홈런 기록을 수립했으나, 당시 이승엽이 사용하던 구장의 규모와 리그의 분위기를 거론하며 그의 홈런 기록을 평가절하 하는 주장이 있다. 즉 당시 삼성의 홈구장이었던 대구시민야구장이 리그에서 가장 작은 규모였기 때문에 이승엽이 홈런에서 상당한 이득을 보았다는 주장과 그가 활약한 시즌은 대부분 타고투저 시즌이기 때문에 그의 홈런 개수에는 거품이 끼어 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실제로 그가 2003 시즌에 기록한 56홈런 중, 홈 홈런의 비율은 62.5%로 원정보다 월등히 높았으며, 그의 전성기인 97~03 7시즌 중 5시즌이 타고투저 시즌이었다.[32]
이러한 논란은 그의 일본 시절로까지 확대된다. 그가 일본 시절 최고의 기록을 올린 2006 시즌 41홈런은 홈런이 잘 나오는 도쿄돔에서 기록된 것이며, 당시 일본리그 또한 타고투저 시즌이었기 때문에 이 역시 거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당시는 리그 총 홈런이 지금보다 1.5~2배는 더 많이 나오던 시절이었고, 도쿄돔의 홈런 파크팩터 또한 센트럴리그 최고 수준이었기 때문에 이 또한 나름대로 타당한 주장으로 보인다.
게다가 여기서 화룡점정으로 우즈가 등장하기도 하는데 KBO에서는 이승엽의 성적이 더 좋았음에도 우즈는 일본에서 이승엽을 성적면에서 압살하게 된다. 이 때문에 이승엽은 KBO에서 온갖 수혜를 받은 타자, 심지어는 거품이 아니냐는 주장인데 이는 밑에 항목을 참조.
4.1. 반론
2007년 넓이가 확장되기 이전 대구구장의 크기에 대한 오해가 있으므로 이에 대해 반드시 정리 해 둘 필요가 있다. 대구구장은 이승엽이 54홈런을 기록한 1999년에는 좌우거리 95m, 중앙거리 117m의 규모로서 당시 프로야구 홈구장으로 사용되던 11개 구장 중 중앙거리 5위, 좌우거리 7위 정도의 위치였다[33]. 나아가 이승엽이 56홈런을 기록한 2003년을 살펴보면, 7개 구장 중 중앙거리 5위, 좌우거리 4위 정도로 대체로 리그에서 중간정도의 크기로 볼 수 있다[34]. 더구나 사실상 가장 큰 잠실과 담장이 높은 사직구장을 제외한 나머지 5개 구장들은 대체로 비슷한 규모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유독 대구구장만이 특출나게 작은 구장으로 인식되어 탁구장이란 조롱을 받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즉, 대구구장은 옛날에도 평균정도의 규모를 가지는 구장이었으며, 확장을 하면서 국내에서 2~3번째로 큰 구장이 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다음으로 1999년 이승엽이 친 54개의 홈런을 분석해 보겠다. 그는 54개 중 중앙으로 22개, 우중간으로 15개, 우측으로 7개, 좌중간으로 9개, 좌측으로 1개의 홈런을 날렸다. 각 방면 홈런의 평균비거리는 중앙 123m, 우중간 120m, 우측 108.5m, 좌중간 110.5m이고, 좌측으로 넘긴 1개 홈런의 비거리는 125m이다. 전체 평균비거리는 118.5m이다. 다만 홈런비거리는 기록원의 주관이 개입되기 때문에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기록원도 나름의 기준에 따라 최대한 근사치에 가깝게 기록할 것이며, 110m의 담장을 겨우 넘기는 홈런이 130m로 기록되지는 않을 것이므로 적어도 본 주제에 한해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홈런에 대한 특정 구장의 유·불리 여부를 따지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홈런 파크팩터가 활용되지만, 이는 팀의 구성원 등 여러 요인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2013년 잠실구장의 홈런 파크팩터는 두산일 때 0.804, LG일때 0.699로 상당한 차이가 난다. 2003년의 대구구장 홈런 파크팩터는 1.274였지만 이듬해인 2004년에는 1.059로 급락한다. 파크팩터의 이러한 들쑥날쑥함을 보완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최소 3년 이상의 누적자료를 활용하지만, 그것마저도 부정확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수치들은 그저 대략적인 경향성만을 확인하기 위한 참고자료일 뿐 절대적 보정 수치로 활용할 수는 없다. 당시 프로야구 구장의 평균 크기는 96-116-96이고, 좌중간과 우중간은 중앙거리를 기준으로 4~5m 짧은 것이 일반적이니까 대략 112m로 잡아도 무리가 없다. 이 정도 크기의 가상구장을 기준으로 하고 각 방면의 개별 홈런을 비교했을 경우 115m의 비거리를 기록한 중앙 3개의 홈런과 100~110m의 비거리를 기록한 좌·우중간 9개 홈런이 넘어가지 않은 것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 좌·우중간 7개 홈런이 생산된 대구구장의 좌·우중간 거리는 적어도 112~3m였을 것이므로 이 타구들은 실제로는 좌·우측에 가까운 위치에 떨어진 것들로 보아야 하며, 나머지 2개의 홈런들도 같은 사례들이기 때문에 좌·우중간 9개의 홈런은 어느 구장에서든 당연히 홈런이 되는 타구들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중앙으로 날아간 3개의 타구가 모두 홈런이 되지 않았다 치더라도, 50개 이상의 홈런을 쳤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대구구장이 그 당시 특출나게 작은 구장은 아니었고, 따라서 그의 홈런 기록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승엽이 잠실을 홈으로 사용했더라면 홈런수가 급락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지만, 잠실구장에서만 132경기를 치렀을 경우를 가정하여 적용하더라도 30+홈런은 거뜬했을 것으로 판단할 수 있고[35], 이미 다른 선수들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조건에서 훨씬 많은 수의 홈런을 쳐냈던 이승엽에게만 이런 극악의 가정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이승엽의 30+홈런 시즌인 97~03년에 기록된 총 홈런의 수는 302개이고 이 중 대구구장에서 친 홈런이 182개니까 60%로 평균보다 10% 높은 수치이다.[36] 참고로 2015 시즌 KBO리그에서 각 팀별 홈런 TOP3에 랭크된 선수들의 홈런 홈/원정 비율을 살펴보면,[37] 분명히 동일한 조건에서 활약한 선수들임에도 불구하고 비율 수치가 제각각으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삼성의 경우 박석민이나 최형우처럼 홈에서 더 많은 홈런을 친 선수들이 있는가 하면, 이승엽·나바로와 같이 원정에서 더 좋은 활약을 한 선수들도 있다. 롯데의 경우도 강민호는 홈에서 62.8%의 홈런을 기록했지만, 최준석은 홈에서 고작 35.4%의 홈런밖에 치지 못했다. 다른 구단에 속한 선수들 역시 잠실을 홈으로 사용하는 팀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구장에 따른 홈런수의 경감에서 특별한 연관성을 찾기 어렵다. 더불어 이승엽이 각각 54·56홈런을 기록한 1999·2003시즌 삼성 라이온즈 홈런 TOP3에 랭크된 선수들의 홈경기 홈런비율을 살펴보면, 이승엽보다 훨씬 높은 수치를 보이는 선수도 있고, 평균에 수렴하는 선수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38] 구장의 크기가 이들의 홈런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면, 김기태, 마해영이 타석에 들어서면 구장의 크기가 극도로 줄어들었다가, 스미스, 양준혁이 들어서면 다시 고무줄처럼 쭉쭉 늘어났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이러한 사례에서도 확인 할 수 있듯 동일한 홈구장을 사용하는 선수들끼리도 홈런의 홈/원정 비율이 천차만별이다.
그 이유는 선수에 따라 홈에서 더 심리적인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일 수도 있고, 원정경기가 더 체질에 맞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냥 단순한 우연일 수도 있다. 물론 구장환경의 차이도 일정한 영향을 미칠 것이며, 이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다음으로 이승엽이 활약한 시기가 우연히 타고시즌과 겹치는 점을 들어 그의 홈런 기록을 폄하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의 전성기 시즌을 살펴보면 97·98년은 투고시즌, 99·00·01·02·03년은 타고시즌이라 할 수 있는데, 02·03년은 지표상 99·00·01년보다 타고가 상당히 완화된 시즌이었다[39]. 이 기간 그의 홈런 기록을 보면 32·38·54·36·39·47·56개로 투고시즌인 97·98년에도 30홈런 이상을 기록하고 있으며, 타고가 심했던 99·00·01년는 각각 54·36·39홈런을 때려 99년을 제외하면 투고 시즌과 홈런 생산력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이후 타고가 상당히 완화된 02·03년에는 오히려 47·56홈런을 때려 타고가 심했던 시절보다 더 많은 홈런을 치고 있다[40].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승엽은 홈런수가 타고나 투고와 같은 시즌의 분위기에 따라 격동의 차이가 발생하는 유형의 타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또다른 프로야구 스타의 기록을 살펴보자.
이대호는 전성기라 할 수 있는 04~11년에 각각 20·21·26·29·18·28·44·27홈런을 기록했다. 이 중 04~05년은 타고시즌, 06~08년은 투고시즌, 09~10년은 타고시즌, 11년은 평균적인 시즌이었다[41]. 타고시즌과 투고시즌에 따른 홈런수의 경감에서 별다른 연관성을 찾을 수 없다. 이 선수는 연평균 23~4개 정도의 홈런을 치다가 10년에 갑자기 44개의 홈런을 때려 홈런왕에 올랐다. 이 기록은 거품이 한가득 낀 타고시즌의 유산으로 마땅히 까내려야 할 기록일까?
다음으로 그의 일본 시절 구장환경과 홈런의 관계에 대해서도 정리해 보겠다.
도쿄 돔의 구장형태와 정체불명의 상승기류[42]등 애매모호한 근거를 주워듣고는 막연히 이승엽이 홈런에서 엄청난 이득을 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06~10년에 이승엽이 홈구장으로 사용한 도쿄돔의 홈런 파크팩터는 센트럴리그 최고 수준이지만, 1988년 도쿄돔 개장이후 요미우리의 클린업으로 활약한 파워히터들 중 이적한 선수들의 홈런수 증감 수치를 보면 특별히 구장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는 느낌이 없다.[43]. 더불어 이승엽의 일본 시절 홈경기 홈런 비율을 살펴보면, 홈런 파크팩터가 퍼시픽리그 최악 수준이었던 지바마린스타디움에서조차 원정과 동일한 수의 홈런을 기록하고 있으며, 도쿄돔을 홈으로 사용하면서 이 비율이 7% 증가하지만, 이정도면 한 시즌 20홈런 기준[44]으로 불과 1.4개의 이득을 보고있는 것이 되므로 특별히 큰 수혜를 받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45]. 다시 말해 도쿄돔이 비교적 홈런이 나오기 쉬운 구장인 것은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 비거리가 긴 파워히터 유형의 타자인 이승엽에게 이러한 구장 환경은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그가 06시즌 기록한 41개 홈런의 개별 비거리 수치 분석으로도 충분히 증명된다[46]. 도쿄돔은 좌·우중간 길이가 110m로 짧기 때문에 홈런이 나오기 쉬운 구장으로 알려졌는데, 이승엽은 홈런 41개 중 14개를 도쿄돔의 좌·우중간으로 날렸다. 여기에 당시 센트럴리그 구장의 평균 좌·우중간 길이인 112.9m[47]를 기준으로 하면 넘어가지 않았을 홈런은 도쿄돔의 좌중간 담장을 살짝 넘어가 110m의 비거리를 기록한 19호 홈런 단 1개 뿐이다. 즉 나머지 40개의 홈런은 비거리상 리그 평균급 구장에서도 방향을 가리지 않고 모두 넘어가는 타구들이므로 이승엽이 도쿄돔을 홈으로 사용함으로써 얻은 이득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2006년 이승엽의 성적에 대하여 단지 해당 시즌이 타고시즌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평가절하되는 문제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이런 식의 방법은 타고시즌에 타율 0.312을 기록하여 리그 18위에 오른 A선수와 투고시즌에 타율 0.276를 기록하여 리그 7위에 오른 B선수를 비교하여 B선수가 더 낫다는 주장을 하는 것에나 유용한 것이지 특정 시즌에 한정한 성적을 파악하는 데는 적합한 방법이 아니다. 당시 이승엽이 거둔 성적은 센트럴리그 타율 2위, 홈런 2위, 안타 7위, 타점 4위, 득점 4위, OPS 3위로, 수많은 선수들이 타고투저 열풍을 타고 스텟의 이득을 봤지만 이승엽은 그 이득 속에서도 최상위권[48]에 위치하고 있었다. 시즌마다 기준이 달라지는 WAR이 6.6이라는 압도적인 수치였다는 것이 2006년 이승엽의 가치를 증명한다.
결론적으로 KBO에서 주변 조건은 그의 클래식 스탯을 향상세키는 데 도움을 주기는 하였으나, 그것 이상으로 그가 뛰어난 성적을 기록하며 장기적 관점에서 리그를 확실히 지배하였음이 세이버상으로 기록되어있으며, NPB에서도 2006년 1년만큼은 확실히 잘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노쇠화 이후 컴백한 삼성 라이온즈 2기의 경우 정말 잘했던 2012년을 제외한 2014-2017년 마지막 시기는 클래식 스탯은 매우 뛰어나나, 리그 역대 최악의 타고투저 시기의 수혜를 크게 입은 것으로 판단된다. 물론 나이를 감안하면 이 정도의 성적도 매우 뛰어난 것이 사실이다.
[1] MLB의 잔칼로 스탠튼의 스윙이 대표적. KBO에서는 양의지의 성의없어보이는 스윙이 이런 케이스.[2] 대표적으로 팀 후배 김영웅이나 본인이 감독직을 맡은 두산의 주장 양석환같은 경우 둘 다 모두 게스히팅과 어퍼스윙을 시도하는 풀히터인데 김영웅은 삼진이 많고 양석환은 삼진은 적은 대신 병살과 내야플라이가 많다.[3] 다만 이혜천이나 구대성이 좌타자들이 제일 껄끄러워하는 투구폼을 가진 것도 주된 이유였다.[4] 일본에서 이승엽의 스탯은 장타율이 더 높다는 것을 제외하면 한국에서 김상현의 스탯과 매우 유사하다.[5] 역시 FA로 거인으로 온 키요하라 카즈히로가 겪었던 테크트리이다. 정확히 말하면 2006~2007년 무렵 힘을 키우기 위해 체중을 크게 불렸다.[6] 사실 박경완 등의 일부를 제외하면 리그 톱 수준의 거포들은 타율도 높다. 또 다른 50홈런 타자인 심정수도 03시즌 53홈런에 0.335의 타율을, 박병호도 15시즌 53홈런에 0.343의 타율을 기록했다. 애초부터 공을 맞추지 못한다면 담장을 넘길 수 없다. 굳이 말하자면 여기서 말하는 컨택은 흔히 얘기하는 공을 맞히는 능력이 아니라 양질의 타구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며, 때문에 홈런을 많이 치는 타자들은 BABIP도 높은 경향이 있다. 담장을 넘길 정도로 양질의 타구를 양산한다면 안타나 2루타도 많을테니.[7] 그의 체격은 실제로 일반적인 슬러거들에 비해 상당히 호리호리한 편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홈런타자지만 힘으로만 승부하는 타입이 아닌지라 육중한 체격이 아니고 덕분에 발도 늦진 않은 편이다.[8] 이종범보다도 좋은 수치. 다만 이종범은 우타자라 조금 불리한 면이 있다.[9] 1995시즌만 놓고보면 이동수의 성적이 좋았기 때문인데, 95년 이동수는 22홈런을 기록했다. 참고로 이승엽은 13홈런.[10] 이 선수는 롯데 원클럽맨인데다가 고향부터 치바, 초중고가 전부 치바라서 그야말로 롯데 프랜차이즈 끝판왕이었다. 2021년 현재는 2군 타격코치 겸 수석코치를 맡고 있고, 다음 감독으로 대놓고 내정된 상태.[11] 그 이승엽보다도 수비가 좋았다. 팀메이트들이 말하길 "후쿠우라가 없었으면 송구실책이 2배가 됐을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온갖 괴상한 폭투성 송구를 다 캐치했으니. 또한 이 사람은 은퇴경기 때 44살이었는데도 다이빙 캐치로 마지막 수비를 할 정도로 수비 능력이 살아 있었다.[12] 이 연속 3할은 6년동안 이어졌고, 후쿠우라는 이승엽과는 다르게 교타자였지만 그래도 전성기에는 15홈런 안팎은 쳐줬던 중장거리 타자였다. 통산 홈런도 100개는 넘겨줬고 무엇보다도 이 선수는 2000안타를 찍었다.[13] 러프도 수비가 나쁜 편이 아니었고, 러프 후에는 오재일이 1루를 맡으며 삼성의 1루수 수비 계보는 중간중간 1~2년씩 빠지긴 하지만 계속 이어지고 있다. 2024시즌에는 오재일이 트레이드로 이적하고 맥키넌이 역대급 1루수비를 보여주기는 했으나, 곧바로 타격 부진에 빠지며 방출.[14] 기존 1루수 구자욱이 외야수로 전업할 예정이다.[15] 이만수는 포수이며, 이대호는 전성기 시절엔 주로 1루로 뛰기는 했지만 한국 시절 커리어하이 시즌인 2010년 등에는 아예 풀타임 3루수로 뛴 적도 있고, 양준혁은 외야수/지명타자이며, 최정은 3루수이다. 그나마 김태균 정도가 이승엽에 견줄 만한 1루수일 듯하나, 홈런 갯수와 수비력 차이가 있기에 이승엽의 우위라는 평.[16] KBO 초창기 포수로 뛰던 이만수의 기록을 넘어선 것은 물론 세이버메트릭스 상으로는 양준혁이, 상위리그 경력을 감안하면 오승환이 역사상 최고로 간주될 수 있으나 엄청난 클래식 누적 성적과 압도적인 전성기, 스타성과 상징성 등을 종합해 이승엽이 팀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고 실제로 벽화도 가장 먼저 그려졌다.[17] 최정은 20시즌째인 2024년, 최형우는 18시즌째인 2023년에 이승엽의 15시즌 KBO 기록을 넘었다. 물론 두 선수 모두 이승엽의 개인 통합 통산 기록에는 한참 모자라다.[18] 626홈런으로 2위인 장훈과 100개 이상 차이난다. 이승엽과 장훈 이외에는 500홈런을 넘긴 한국인이 없다. 이대호는 486홈런을 쳤다.[19] 1위는 유일하게 3,000안타를 친 장훈(야구선수), 2위는 2,895안타를 친 이대호이다. 이승엽은 2,842안타를 쳤다.[20] 일본어로 과녁을 뜻하는 '적'과 '테키'로 독음이 같다. 야갤에서는 여기서 파생해 읍민타자, 읍민적이라는 별명으로 부른다.[21] 다만 이승엽의 전성기를 모르거나, 팬서비스 관련해서 했던 잘못된 인터뷰를 보고 팬서비스를 중요시하는 삼성 팬들에게 이승엽은 비교적 이미지가 좋지 않다.[22] 하지만 이후 타석에 들어선 최희섭이 쓰리런 홈런을 날려버렸다.[23] 다만 그보다 불과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은 김재현, 심정수 등이 선수협에 참가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할 부분이다.[24] 게다가 삼성그룹은 무노조를 경영정책으로 내세워서 기업을 경영하는 걸로 유명하다.[25] 실제로 선수협을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던 삼성 구단에서는 그 당시 이미 국민적 스타로 떠오른 이승엽에게 갖은 회유책을 썼으며 이승엽 본인도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모르겠다"라고 선배 선수들에게 울면서 통화했다는 기록도 있다.[26] 절친한 선후배 관계였던 양준혁의 옹호야 그렇다 치더라도, 심지어 그 강병규조차도 이승엽에게 선수협과 관련해서는 어떠한 비난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자.[27] 다만 2009 시즌은 세이버메트릭스가 보급된 오늘날의 시선에서 보자면 비율스탯은 생각보다 꽤 괜찮은 편이다. 비록 타율은 0.229 밖에 안되지만, 출루율(0.327)은 NPB 시절 중 두 번째로 높은 시즌이고, wRC+는 2007년의 118보다 높은 120이다. 물론 규정타석 미달이기에 이 비율스탯의 의미가 다소 모호하기는 하지만, "플래툰을 적용하지말고 더 기회를 줬어야 했다"라는 당시 국내언론들의 호소는 의외로 단순 국뽕설 쉴드라고 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물론 당장 눈에 들어오는 타율이 너무나 초라했고, 이승엽 본인부터가 타자치고도 한 시즌 안에서 기량이 너무 극단적으로 롤러코스터를 탄 바람에 플래툰을 마냥 비판할 수는 없지만, 2009년 시즌엔 이런 복합적인 면이 존재했음을 감안해야 한다.[28] 04~05시즌 지바롯데와 2년 5억엔, 06시즌 요미우리와 1년 2억 1000만엔, 07~10시즌 요미우리와 4년 30억엔, 11시즌 오릭스와 1+1년 연봉 1억 5000만엔 수준의 계약을 맺었는데, 연봉으로만 따지면 04~06시즌이 대략 10위권, 07~10시즌 일본 최고, 11시즌이 30위권 정도로 리그 탑이었던 07~10 이외의 시즌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연봉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29] 비록 2006년의 NPB에 후쿠도메 고스케(wRC+ 203), 타이론 우즈(wRC+ 186), 마쓰나카 노부히코(wRC+ 185), 오가사와라 미치히로(wRC+ 177)라는 쟁쟁한 선수들이 있어서 이승엽을 최고라 하기는 어렵지만, 절대적인 스탯이 높다는 건 분명하다. 참고로 2024년 KBO 최고 타자인 김도영의 wRC+가 172다.[30] 비록 NPB 첫 해인 2004년엔 부진했고 이승엽 스스로도 일본에 적응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였지만, "30살의 이승엽이 2차 포텐을 터트렸다"라는 만화스러운 설명보다는 그냥 NPB 첫 해에 적응에 실패했다고 보는 게 더 합리적이다.[31] 1위 82백인천 227.0 / 2위 15테임즈 222.4 / 3위 83장효조 215.4 / 4위 93양준혁 212.0 / 5위 03심정수 210.7[32] 약간은 아이러니한 부분이 02년 47홈런 기록당시 잠실구장 19경기에서 7개의 홈런을 쳤는데 전경기를 잠실에서 했다면 49홈런 을 쳤다는 계산이 나온다.[33] 잠실:95-125-95(2.5) / 군산:98-122-98(2.3?) / 수원:95-120-95(2.5) / 사직:95-118-95(4.8) / 대구:95-117-95(3.0) / 마산:97-116-97(2.0) / 대전:99-115-99(2.5) / 광주:98-114-98(2.1?) / 청주:99-110-99(2.5?) / 전주:98-110-98(5.8) / 도원:91-110-91(4.8) → 평균:96-116-96(3.2) 이었다.[34] 잠실:100-125-100(2.6?) / 문학:95-120-95(2.8) / 수원:95-120-95(2.5) / 사직:95-118-95(4.8) / 대구:95-117-95(3.0) / 대전:97-114-97(2.5) / 광주:97-113-97(2.1?) → 평균:96-118-96(2.9)[35] 단 홈 구장 차이로 홈런이 수치상 떨어질 경우 01년도 MVP도 보증할 수 없으며 02, 03년도에는 심정수가 홈런왕이 될 수 있기 때문에 MVP 수상 쪽에서는 손해를 볼 수 있다. 1998년 타이론 우즈에게 MVP를 뺏겼을 때 홈런갯수 차이를 본다면 MVP 수상에 홈런왕 프리미엄을 무시할 수는 없다.[36] ‘목동 홈런왕’이라는 누명을 쓴 박병호가 2014년 기록한 홈경기 홈런 비율은 67.3%다. 어떤 이는 이것이 이승엽의 홈경기 홈런수치와 비슷하기 때문에 그의 홈런이 구장빨이라고 주장한다. 참고로 박병호와 동일한 년도 동일한 팀에서 동일한 구장을 사용한 강정호가 홈경기에서 기록한 홈런의 비율은 52.5%로 평균에 수렴한다. 상식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37] ●SK ▫브라운14/28(50%) ▫박정권17/21(80.9%) ▫이재원6/17(35.3%) ▫최정5/17(29.4%) ●삼성 ▫나바로19/48(43.2%) ▫최형우19/33(57.5%) ▫이승엽9/26(34.6%) ▫박석민17/26(65.3%) ●두산 ▫김현수 11/28(39.3%) ▫양의지 6/20(30%) ▫오재일4/14(28.5%) ●롯데 ▫강민호22/35(62.8%) ▫최준석 11/31(35.4%) ▫아두치16/28(57.1%) ▫황재균19/26(73%) ●KIA ▫이범호12/28(42.8%) ▫필15/22(68.2%) ▫김주찬7/18(38.9%) ●LG ▫박용택4/18(22.2%) ▫오지환 2/11(18.2%) ▫히메네스2/11(18.2%) ▫이병규2/11(18.2%) ●넥센 ▫박병호28/53(52.8%) ▫스나이더16/26(61.5%) ▫유한준19/23(82.6%) ●한화 ▫김태균7/21(33.3%) ▫최진행7/18(38.8%) ▫김경언10/16(62.5%) ▫김회성8/16(50%) ●NC ▫테임즈24/47(51%) ▫나성범16/28(57.1%) ▫이호준 12/24(50%) ●kt ▫ 김상현12/27(44.4%) ▫박경수14/22(63.6%) ▫마르테10/20(50%)[38] ●1999년 ▫이승엽32/54(59.2%) ▫스미스21/40(52.5%) ▫김기태 20/28(71.4%) ●2003년 ▫이승엽35/56(62.5%) ▫마해영26/38(68.4%) ▫양준혁17/33(51.5%)[39] 경기당 득점 비율(100이상은 타고, 100이하는 투고) → 97년:97 / 98년:97 / 99년:119 / 00년:111 / 01년:114 / 02년:102 / 03년:102 (출처:statiz)[40] 이승엽 타석당 홈런수는 97년 18.03타석, 98년 14.94타석, 99년 11.37타석, 00년 15.11타석, 01년 14.71타석, 02년 13.12타석, 03년 10.64타석 and 이승엽 타수당 홈런수는 97년 16.15타수, 98년 12.55타수, 99년 9.00타수, 00년 12.61타수, 01년 11.87타수, 02년 10.87타수, 03년 8.55타수[41] 경기당 득점 비율(100이상은 타고, 100이하는 투고) → 04년:103 / 05년:101 / 06년:87 / 07년:94 / 08년:99 / 09년:114 / 10년:110 / 11년:100 (출처:statiz)[42] 돔 내부의 온도차나 환기시설에 의한 상승기류는 도쿄돔뿐 아닌 어떤 돔구장에서든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 다만 도쿄돔에서는 관중석 상단에 천장의 형태를 유지하기 위한 송풍기를 설치한 것이 문제가 된다. 즉 플라이볼이 될 타구가 일정 고도에 다다르면, 송풍기에서 주입되는 공기의 영향으로 비거리가 늘어나 홈런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승엽과 같은 파워히터들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승엽이 2005년 지바롯데에서 기록한 30개 홈런의 평균비거리는 120m이고, 2006년 요미우리에서 기록한 41개 홈런의 평균비거리는 121.2m로서 불과 1m 정도 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하물며 06시즌은 벌크업으로 인한 파워상승으로 홈런의 비거리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질적으로 도쿄돔은 이승엽의 홈런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43] ● 落合 博満 (Ochiai Hiromitsu): 17 → 15 (1993~1994) (나고야구장 → 도쿄돔) ● 広澤 克実 (Hirosawa Katsumi): 26 → 20 (1994~1995) (메이지진구구장 → 도쿄돔) ● ジャック・ハウエル (Jack Howell): 20 → 14 (1994~1995) (메이지진구구장 → 도쿄돔) ● 清原 和博 (Kiyohara Kazuhiro): 31 → 32 (1996~1997) (세이부프린스구장 → 도쿄돔) ● ドミンゴ・マルティネス (Domingo Martinez): 30 → 16 (1998~1999) (세이부프린스구장 → 도쿄돔) ● 江藤 智 (Eto Akira): 27 → 32 (1999~2000) (히로시마시민구장 → 도쿄돔) ● 小久保 裕紀 (Kokubo Hroki): 32 → 41 (2002~2003) (후쿠오카돔 → 도쿄돔) ● ロベルト・ペタジーニ (Roberto Petagine): 41 → 34 (2002~2003) (메이지진구구장 → 도쿄돔) ● タフィ・ローズ (Tuffy Rhodes): 51 → 45 (2003~2004) (오사카돔 → 도쿄돔) ● 李承燁 (Lee Seung-yeop): 30 → 41 (2005~2006) (지바마린스타디움 → 도쿄돔) ● 小笠原 道大 (Ogasawara Michihiro): 32 → 31 (2006~2007) (삿포로돔 → 도쿄돔) ● アレックス・ラミレス (Alex Ramírez): 29 → 45 (2007~2008) (메이지진구구장 → 도쿄돔) ● 村田 修一 (Murata Shuichi): 20 → 12 (2011~2012) (요코하마스타디움 → 도쿄돔) ● ホセ・ロペス (José López): 22 → 25 (2014~2015) (도쿄돔 → 요코하마스타디움) 나고야구장·메이지진구구장·히로시마시민구장·요코하마스타디움은 도쿄돔보다 작은 구장, 세이부프린스구장은 비슷한 크기, 후쿠오카돔·오사카돔·지바마린스타디움·삿포로돔은 도쿄돔보다 큰 구장이라고 할 수 있다.[44] 요미우리 시절 이승엽의 평균 홈런 수[45] ● 지바롯데 마린즈: 22/44 (50%) ● 요미우리 자이언츠: 59(2)/100 (59%) ● 오릭스 버팔로스: 9(3)/15 (60%) 요미우리 시절 홈경기 홈런 중 2개는 각각 삿포로돔과 오사카돔에서 기록한 것, 오릭스 시절의 홈경기 홈런 중 3개는 홋토못토필드고베에서 기록한 것[46] 41개 중 35개는 미디어의 보도내용을 활용하였고, 기사를 찾지 못한 6개 홈런은 유튜브에 업로드되어 있는 영상자료를 참고하여 추정하였다. 추정한 홈런은 1호(우중간115m)·26호(좌중간115m)·27호(우중간115m)·29호(중월120m)·31호(중월125m)·41호(좌중간115m)임을 밝혀둔다.[47] 고시엔구장:118m / 나고야돔:116m / 메이지진구구장:112.3m / 요코하마스타디움:111.4m / 도쿄돔:110m / 히로시마시민구장:109.7m → 평균:112.9m[48] 심지어 이 성적은 심판의 오심으로 홈런이 하나 취소된 성적이다. 명백한 오심이었다는게 일본에서 밝혀졌고 그러면 홈런, 장타율, OPS, WAR등이 모두 소소하게 더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