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인물을 모티브로 한 야인시대의 등장인물에 대한 내용은 심영(야인시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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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colbgcolor=#000><colcolor=#FFF> 심영 沈影 [ruby(靑木沈影, ruby=あをき じんえい)] | 아오키 진에이 | |
본명 | 심재설 (沈載卨) |
출생 | 1910년[1] 9월 3일 |
강원도 철원군 서변면 (現 대한민국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철원읍) | |
사망 | 1971년 7월 24일 (향년 60세)[2] |
평양시 | |
본관 | 청송 심씨[3] |
신체 | 166cm, 63.7kg |
최종 학력 | 경성제2고등보통학교[4] (퇴학) |
약력 | 조선인민군 소좌 조선연극인동맹 중앙위원 (1952) 공훈배우 칭호 수여 (1957) 조선영화인동맹 위원장 (1961) 인민배우 칭호 수여 (1964) 평양 연극영화대학 교수 (1966) |
부모 | 아버지 심완섭[5] 어머니 강릉 김씨[6] |
배우자 | 이씨(李氏) 이명희[북한명] |
자녀 | 아들 심원보[8] |
친척 | 조부 심상학[9] 조모[10] 연안 이씨[11] 큰아버지[12] 심기섭[13] 외조부 김병섭[14] 외조모 동래 정씨[15], 순흥 안씨[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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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생전의 모습.[17] |
일제강점기부터 활동하였으며 광복 이후에는 북한에서 활동한 연극배우이자, 영화배우. 혼란했던 시기 친일과 종북의 더블크라운을 달성한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친일 행위를 했고, 광복 후에는 공산주의자 행보를 보이다 월북했다.
2. 생애
2.1. 개요 및 성장 과정
본명은 심재설(沈載卨)이며, 아오키 진에이[18]는 창씨개명이다. 그의 아버지는 철원 군수를 지낸 심완섭(沈琬燮[19])[A]이며, 그의 어머니는 조선 말기에 군수를 지낸 강릉 김씨(江陵 金氏) 김병섭(金秉燮)의 딸[A]이다[22]. 본관은 청송 심씨(靑松 沈氏) 안효공파(安孝公派)로 잘 알려져 있다.[23]심영의 증조부는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경택(沈敬澤, 1809년~ 1877년)이었고, 할아버지는 고종 말기에 부사와 통리기무아문에서 개화의 실무 담당을 맡아보았던 심상학(沈相學[24])이었다. 사실 이 정도면 그의 집안은 명문인 청송 심씨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가세가 번성한 편에 속했다. 다만 심영의 아버지 심완섭이 서자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어떤 혜택도 받지 못했다. 초기에 노동과 날품팔이로 생활하던 아버지 심완섭은 늦게 돈을 모아, 그 재력을 바탕으로 철원군수직에 올랐다. 한마디로 맨땅에 헤딩으로 자수성가한 케이스. 다만 심영이 태어나기 전에 사망해서[25] 심영은 홀어머니 밑에서 유복자로 성장했다는 말을 보면 되려 아버지가 임신을 위한 거사를 치른 직후 사망했다는 것 역시 고려해볼 만 하다. [26] 그러나 심영이 1910년생인 것으로 보아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가 집을 나갔을 가능성이 높다.
경성부에 거주했으며 의정부공립보통학교[27]를 졸업하고 경성제2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경성제2고보 재학 시절 무용에 관심을 가지다가 학교의 승인 없이 연극 활동과 사회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한때 퇴학 처분을 받았다가 복학하기도 했다.
키는 166cm[28], 몸무게는 63.7kg이다. 1937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운동을 안 하면 살이 쪄서 취미로 농구와 하이킹을 한다"고 밝힌 바 있고[29], 연애에 대한 생각이 있냐는 질문에는 이미 결혼하였고, 가정에 대한 불만이 없다고 밝혔다. 다만 심영의 아내에 대해서는 성이 이씨(李氏)라는 사실밖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30] 집은 재동 46번지에 있었다고 한다[31].
어느 정도 나이가 찬 뒤에 이명희라는 다른 여성과 재혼하였고, 이 이명희와는 월북 이후에도 해로하였다.
2.2. 일제강점기 때 활동
당시 유명 극단이었던 토월회 연구생으로 입단하면서 연극계에 입문했다. 《연기 초승달》과 《즐거운 인생》에서 데뷔했는데, 대사도 없는 엑스트라 역을 맡았다. 그의 실질적인 데뷔작은 1929년 11월 14일에서 16일에 걸쳐 조선극장에서 상영된 《간난이의 설움》이다. 당시 토월회는 심영의 연기에 대해 크게 호평하며 분발할 것을 주문했다. 이후 심영은 같은 해 11월 21일부터 일주일 동안 아리랑 고개에 출연하면서 확실하게 데뷔를 하게 됐다. 1930년 1월 12일, 심영은 남경의 거리 1막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었다. 관계자들 대부분이 반대했을 정도로 파격적인 캐스팅이었다. 이 연극으로 심영은 극단의 간판 스타 중 한 명으로 발돋움했다. 이 당시 종로 2가 YMCA 근처에서 '카페 멕시코'라는 카페를 운영했다고 한다. 그러나 2년을 채우지 못하고 폐업했다.연기력에 대해선 일본에서도 공연을 하는 등 꽤 호평을 받았지만[32], 이후 라이벌 황철이 부상하면서 인기가 많이 하락했다.
복지만리에 출연한 모습. |
민족문제연구소에서 2009년에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다.[34] 하지만, 2005년에 반민족행위진상규명특별법에 의하여 설치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다수의 연극과 영화에 출연하여 일본의 침략 전쟁을 미화하고 내선일체, 황민화를 선전한 배우였지만 친일반민족행위를 주도하기에는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라는 사유로 친일반민족행위 심의 과정에서 기각되었다.[35]
2.3. 광복 이후
광복 후, 미군정/소련군정 시기에는 극단 혁명극장을 창설하는 등 공산주의자로 활동한다.1946년, 조선연극동맹[36]과 서울신문사가 공동으로 개최한 ‘3·1절 기념연극제’에서 박영호[37] 극작, 박춘명[38] 연출, 극단 혁명극장의 《님》을 국제극장(현 명동예술극장)무대에 올리고 주연으로 출연하였다. 야인시대 드라마에서는 이 《님》이라는 연극이 사회주의 찬양 연극으로 묘사되지만 이는 김두한이 동아방송 인터뷰 링크 에서 한 발언을 바탕으로 창작된 것으로, 당시의 자료#1#2를 보면 실제로는 3·1 운동 당시의 학생들을 소재로 한 연극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창작자들의 성향으로 보아 공산주의적 색채가 농후했을 가능성이 높으나, 1946년, 당시의 사회에서는 용인 가능한 수준으로 보인다. 물론 창작자와 연기자 모두 친일반민족행위자에 사회주의자라 친일파와 비교적 척을 진 데다[39] 반공 우익 진영인 김두한이 보기에는 당연히 화가 날 것이다.
연극 《님》공연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1946년 3월 14일 오후 8시 30분경에 광통교 정중앙[B]에서 괴한의 권총 습격을 받아 하복부에 중상을 입고, 김성진 외과에 입원하였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기사 그런데 하필이면 심영이 권총 습격을 당했던 그 장소가 상당히 골 때리는 위치였는데 바로 종로구와 중구의 정확한 경계선인지라 어느 경찰서에서 수사를 해야 할지 상당히 애매한 위치였다.[B] 이후 동아방송 인터뷰 ≪노변야화≫에서 김두한은 자신이 심영을 습격한 것이며, 죽지 않은 그를 다시 찾아가 죽이려 했지만 어머니의 애원으로 살려주었다고 회고했다.
여기에는 김두한이 심영의 이름을 '심형일'이라고 말하고 극장과 병원 이름을 틀리게 말하는 등 신빙성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 있으나, 실제 그가 회고한 동아방송 ≪노변야화≫ 라디오 인터뷰 육성 녹음본을 들어보면 '심형일이라고 말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 이는 구마적의 본명인 고시형이 한동안 고희경으로 알려진 사례처럼 김두한이 말할 때 발음이 부정확했던 탓에[42] 기록자가 '심영이'을 '심형일'으로 잘못 듣고 글로 쓴 내용이 전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극장의 이름은 헷갈렸다 치더라도 위치는 당시 명동의 국립극장(현 명동예술극장) 자리에 있었다는 건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으며[43], 병원명도 최초 신문 기사에서는 대놓고 '심영이 김성진 외과에 입원했다'고 밝혔으니 김두한이 실제로 한 일이라면 병실의 위치까지 기억하고 있으면서 어느 병원이었는지 착각했을 가능성은 낮고, 백병원에 입원했다가 병원에 들이닥친 김두한에게 살해 협박을 받고 난 이후 김성진 외과로 옮겼거나, 아니면 야인시대의 의사양반의 말처럼 처음 입원한 병원에서 안 되어서 백병원으로 이송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김두한 일당에게 피격된 이후 약 10개월간 치료 및 휴식으로 인한 공백기를 가졌다. 다만 10개월 동안 무대에만 안 나왔을 뿐 본인의 지위를 이용해 남한에서 극단 민중극장을 창설하고 공연을 제작하는 활동을 했으나, 1947년에 좌익 활동으로 경찰에 체포되었고, 기사1, 기사2 동년도 7월에는 대구에서 연극 활동을 하다가 또 총탄에 피격된 일도 있었다.# 탄압이 점차 심해짐에 따라 어머니와 함께 1947년 말 혹은 1948년 초에 월북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북조선국립영화촬영소 연기부장 심영은 조선인민군 육군 소좌 계급장을 달고, 서울에 들어왔다. 심영과 황철은 피난하지 못한 연극, 영화인들을 끌고 와서 서울예술극단을 만들어 공연을 시켰으며, 이들을 강제로 끌고 가 납북시켰다. 최은희도 이때 많은 고초를 겪고 탈출에 성공하였다고 한다.기사
월북한 이후에는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황철과 함께 북한 예술사에서 이름을 날린다. 그가 출연한 작품은 '내고향'(1949),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1952), '정찰병'(1953), '벗들이여 우리 함께 가자'(1960), '두만강'(1960), '다시 찾은 이름'(1963) 등이 있는데, 대부분 비중 있는 배역을 맡았다.북한 백과사전의 심영 설명
1952년에 조선연극인동맹 중앙위원 및 북한의 국립 연극극장 배우가 되었다. 1957년 12월 28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민족예술 발전 사업에서 특출한 공훈을 세운 예술인으로 선정되어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다. 1959년에 조선연극인동맹 부총장을 맡았다. 1961년에 조선영화인동맹 위원장 겸 조선문화예술인총동맹 부위원장을 지냈고, 같은 해에 북한의 영화대표단 단장의 자격으로 소련을 방문했다. 1961년 6월, 황철 장의위원을 지냈다.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연기과장과 평양연극영화대학 강좌장을 역임했으며, 1957년에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고, 1964년에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
2.4. 말년
친일인명사전에는 1966년부터 평양 연극영화대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1971년 7월 24일에 지병으로 인해 공식적으로는 사망했다고 언급되어 있다.심영의 말년에는 여러 가지 증언과 설이 있는데, 귀순 공작원 김용규가 1978년에 출간한 책 '시효인간'에 따르면 # 심영은 1971년에 숙청되어 평양에 소재한 삼신탄광 광부로 추방되어 고생하다가, 기존 사망일인 1971년보다 2년 후인 1973년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내 평생에 제일 큰 실수는 공산주의를 따른 것이다. 너희들을 두고 가자니 내 마음이 안 놓이는구나. 이다음에 통일되면 나를 서울에 갖다 묻어 다오."라는 유언을 자식들에게 남기고 눈을 감았다고 한다. 다만 이 내용은 반공이 국시였던 1970년대 말에 당국의 감시를 받던 귀순자의 이름으로 출간된 반공 수기의 내용이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 외에 김용규의 서술과 다르게 신상옥, 최은희 부부의 납북·탈북 수기에서는, 심영이 숙청되긴 했으나 연극영화학교 교원으로 강등되는 수준으로만 숙청되었다고 하며 쓸쓸하게 지내긴 했어도 편안한 말년을 보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 역시 그들 부부가 직접 심영을 만나지 않고, 북한에서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책으로 옮겼기 때문에 완전히 사실로 볼 수만은 없다. 이들 부부의 수기에는 월북, 혹은 납북된 문화 예술인들의 행적과 근황에 대해 짤막하게 언급이 되었는데, 그 내용들이 잘못된 정보가 적지 않다.[44] 다만 이 수기에 언급된 심영의 경우에는 최은희가 북한에서 직접 만났었던 김연실, 문예봉, 문정복(배우 양택조의 모친)은 심영과 절친한 사이였고, 심영과 동시대에 활동했었던 사람들이다.[45] 따라서 그 기록의 출처가 이들의 증언이라면 신빙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닐 수도 있다.
김현식의 증언에 따르면 남한 출신 예술인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조작된 문화예술단 간첩단 사건에 걸려 지방으로 쫓겨났다고 한다.
2001년 간행된 조선대백과사전에 이름이 실렸으므로 설령 숙청되었다고 하더라도 숙청되었다는 사실이 비밀에 붙여졌거나 사망 후 복권된 것으로 추측된다.
3. 평가
일반적으로 심영은 야인시대 드라마의 출연 장면의 밈화로 대중들에게 알려져있으나, 실존인물 심영은 친일 행위와 종북 행위를 자행한 최악의 민족반역자이다. 적어도 개인으로서는 절대로 미화될 수 없는 인물이다.[47]
심영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유명 연예인으로서 본인의 위치를 악용하여 악랄한 친일 행위를 하였다. 태평양 전쟁과 일제를 찬양하며 독립운동가들을 비하하고 동포들을 전쟁터와 징용지로 내모는 선전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하였다는 점에서 그의 행동은 역사에서 두고두고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해방 후에 좌익 활동을 하고서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의 탄압 끝에 월북한 것 자체는 당시의 시대 상황상 큰 비판점은 아니나, 이후 6.25 전쟁 중에 수많은 동료 예술가들과 배우들을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로 납북시켜서 이들과 가족의 삶을 망가뜨린 점 또한 역사에서 두고두고 비판받을 반인륜적 만행이다. 또한 강제 납북으로 인해서 초기의 한국 영화와 연극 등에서 한국 예술의 발전에도 큰 악영향을 미친 것도 만장일치로 동의된다.
황철 문서의 평가에 있는 증언들로 미루어 볼 때 라이벌인 황철에 비해 연기력에서는 당대에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심영 본인도 이를 알고 있는지 김두한에 의해 첫 번째로 피습당한 이후 10개월 동안의 공백기 동안 러시아 배우들의 연기 톤을 본떠 연습했다고 한다.
4. 기타
- 자녀로는 심원보라는 아들이 있었다. 재소 과학자 장학수의 자서전 "붉은별 아래 청춘을 묻고"에서 이름이 언급되는데 1947년 당시 경복중학교 5학년[48]이었다는 서술로 보아 1930년생으로 추정된다. 좌익 활동을 하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심원보도 학생들의 동맹 휴학을 주도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으며, 이후 아버지와 함께 월북한 것으로 보인다.
- 심영이 젊었을 때에 친일 연극을 많이 한 탓인지, 아니면 자기 나름대로의 사상이 있었기 때문인지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매우 싫어하고 까내렸으며, 그 사이에서도 이황이 동방의 주자(朱子)로 불리며 일본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에 대해서 심영은 특히 부정적으로 생각하였다. 그가 월북한 이후, 그에 대해 이야기하던 사람 가운데 '술만 마시면 이이, 이황을 욕하는 사람'으로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을 정도다.
- '배우 심영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이 있다. 국회도서관에도 등록되어 있다.
5. 출연 작품
- 연극
- 영화
- 아름다운 희성 (1935)
- 바다여 말하라 (1936)
- 은하에 흐르는 정역 (1936)
- 지복만리 (1938)
- 너와 나(君と僕) (1941)
- 망루의 결사대(望樓の決死隊) (1943)
- 내 고향 (1949)
-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 (1952)
- 정찰병 (1953)
- 벗들이여 우리 함께 가자 (1960)
- 두만강 (1960)
- 다시 찾은 이름 (1963)
- 드라마
- 라디오 드라마, 《인도의 달》 (1932)
- 기타
6. 대중매체에서
- 1993년 출판된 책 <비밀결사 백의사>에서 심영이 고자가 되었다고 기술했다.
2화에서 본래 할 연극이 펑크로 인해 연기되자 즉흥 연기를 하는 장면. | 28화에서 연극 님을 연기하는 장면. |
- 2001년 KBS 드라마 <동양극장>에서는 배우 박철호[50]가 연기했다. 주인공인 황철을 극딜하는 라이벌로 등장하지만 극 후반부에 황철과 서로 원만해지면서 김좌진 장군과 독립군들의 활약을 다룬 연극 '님'에 함께 출연하기로 결정하고 공연 장소를 명동의 시민회관으로 정하였고 심영이 연출하게 된다. 마침 김두한이 연극 '님'을 부하들과 함께 관람하였고 심영이 청산리 전투에서 김좌진 장군의 업적을 공산당의 주관하여 승리로 이끈 전투로 왜곡하고 김좌진 장군이 공산당의 꼭두각시로 그려지자 김두한을 이를 보고 열받아서 극장 밖으로 뛰쳐나왔고 김두한의 부하 긴따로는 “청산리 전투는 김좌진 장군의 업적인데 공산당의 업적으로 왜곡한 심영이를 가만히 두면 안 된다”고 말을 했고 김두한은 심영을 죽일 마음을 먹게 되었다. 심영은 공연이 끝난 후에 부인과 함께 광통교 인근의 제과점에 들러 과자를 구입하고 밖으로 나왔고 권총을 들고 있는 김두한을 마주치게 된다. 김두한이 심영에게 총을 쏘았고 다리에 총을 맞은 심영은 털썩 주저앉았는데 결국 심영은 병원에 실려갔다. 심영을 저격한 김두한은 좋게 지내고 있던 황철과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다.
- 2002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배우 김영인이 연기했다. 김두한의 증언에 따르면 연극이 끝난 후 광통교에서 김두한 본인에게 하복부를 저격당했다. 이 작품 덕분에 심영이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시에 이 작품의 패러디 영상이 컬트적인 인기를 끌면서 친일 행위와 종북 행위를 저지른 대가를 다른 사람의 얼굴로 영원히 조롱당하는 식으로 치르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7. 관련 문서
[1] 1909년생이라는 설도 있다.[2] 1909년생일 경우에는 61세.[3] 안효공파(安孝公派)-온양공 인겸(仁謙)파 25세 재(載) 항렬. 친일파에 월북자인지라 본인 족보에는 '庚戌生'(경술생)이라고 적혀있는 게 전부다. 그래도 아예 족보에서 이름이 지워지기까지 한 이완용보다는 처우가 낫다.[4] 現 경복고등학교[5] 1886년 ~ 1908년 / 1968년 12월 14일 (향년 22세 / 82세)[6] 1886년 ~ 몰년 미상[북한명] 리명히[8] 1930년생 추정, 현재 생사여부 불명[9] 1830년 ~ 1890년 (향년 60세)[10] 친조모는 아니다. 친조모는 심상학의 첩이다.[11] 1847년 ~ 1913년 (향년 66세). 군수 이순익의 딸로 진외증조부는 김조순이다.[12] 의붓 큰아버지(심영의 16촌 할아버지의 아들)다.[13] 1878년 ~ 1932년 (향년 54세)[14] 1838년 ~ 1904년 11월 14일 (향년 66세). 34세손 병(秉) 항렬.(족보)[15] 1835년 ~ 1895년 10월 7일 (향년 60세)[16] 1844년 ~ 1916년 11월 26일 (향년 72세)[17] 좌측은 20대, 우측은 중년기의 사진이다. 중년기의 사진은 현재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심영의 프사이기도 하다.[18] 일본어: 靑木 沈影(신자체: 青木 沈影) あをき じんえい(현대 가나 표기법: あおき じんえい). 한국 한자음으로 읽으면 청목 심영이다.[19] 아내의 족보에는 이름의 한자가 沈完燮이라고 써져 있다. [A] 1886년에 태어났다. 심완섭 족보에 '丙戌生'(병술생)이라고 써져 있다.[A] [22] 심완섭 족보에 '配江陵金氏 父郡守秉燮'(배강릉김씨 부군수병섭)이라고 써져 있다.[23] 이 안효공파는 정치적으로 서인 노론에 속했다. 한때 서인의 거두였던 심의겸, 김효원의 반대로 이조정랑에 등용되지 못한 심충겸, 노론 벽파의 영수였던 심환지 등이 바로 안효공파 벌족이었다. 따라서 배우 심영은 소설가 심훈보다 9살 어리지만 항렬로는 조카뻘이다. 요즘 세대 입장에서 보면 둘 사이는 먼 친척이다. 실제로 배우 심영은 소설가 심훈의 17촌 조카이다. 참고로 배우 심영의 직계 6대조는 호조정랑을 지낸 심건지(沈健之)로, 예조판서를 지낸 심풍지(沈豊之)의 친형이자 세도정치(勢道政治)의 기틀을 마련한 김조순의 장인이다.[24] 며느리의 족보에는 이름의 한자가 沈相鶴이라고 써져 있다. [25] 그런데 청송 심씨 족보엔 1968년 12월 14일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심완섭 족보에 '戊申十二月十四日卒'(무신년 12월 14일에 사망함)이라고 써져 있는데, 무신년은 1908년 또는 1968년이다. 심영이 1910년생인 것을 생각하면 1908년에 사망하였을 리는 없으니, 1968년에 사망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는 설이 정설이나, 1909년생이라는 설도 있는 데다, 사망이 12월이므로 심영을 임신시킨 직후 사망했을 가능성도 있다. 심영이 9월 생이므로, 인간의 수태 기간은 38주~40주로 볼 때 성관계 직후 얼마 못 가 죽었을 가능성이 바로 그것이다.[26] 그 모친이 김두한에게 내 아들은 아비도 없이 나 혼자 기른 유일한 자식이니 살려달라고 호소하였다고 한다. 김두한이 훗날 스스로 밝힌 부분.[27] 현 의정부중앙초등학교[28]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작지만 당시에는 보통 키였다. 1935년에 20대 남성 평균 신장이 164cm 정도였으니, 현재의 기준으로 적용한다면 아마도 175~176cm 정도.[29] 당시, 특히나 일제 시대 조선인 중 살이 찔 정도로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유복한 집안 환경과 더불어 배우로서 벌어들이는 돈이 제법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30] 이 부분은 심영 피격 사건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 '부인 이씨와 함께 귀가하던 중'이라는 언급이 있어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김두한에 따르면 당시 심영의 아내가 종각에서 유명한 다방을 했다고 하나 여기에 대해서는 자세히 확인된 바가 없다. 후술할 카페 멕시코로 여기는 경우도 있으나 멕시코는 1931년 8월에 문을 닫았기 때문에 아니다.#[31] 당시에는 왕실의 고위관직에 있거나 왕족이 거주하는 권문세가들의 고급 주거 지구로 유명하였다.[32] 드라마 동양극장 1회에서 "심영씨는 탑스타라 잘 알겠는데, 차홍녀, 황철은 누구죠?"라는 대사가 나올 정도이니 당시 연극계에서 심영의 위상이 어마어마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33] 다만 이 행적은 1940년대에 들어, 친일 연극을 하지 않을 경우 연극 자체를 할 수 없었던 당대 상황도 감안을 해야 할 것이다.[34]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2009), 《친일인명사전 인명편;2 - ㅂ~ㅇ》, 서울:민족문제연구소, 417-420쪽. 2019년 7월 6일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확인함.[35]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2009),《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Ⅱ》. 서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14쪽.[36] 해방 후에 설립된 좌익 계열 연극 단체.[37] 박영호는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선정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며 해방 후에는 좌익 활동을 하였고 월북하였다.[38] 마찬가지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며, 해방 후 좌익 활동을 하였고 월북하였다.[39] 물론 김두한 본인도 일제에 부역한 이력이 있다. 다만 당시 시대상 부역을 하지 않으면 짤없이 징병되거나 징역을 살았을 게 뻔한 데다, 결정적으로 그가 결성한 단체인 경성특별지원청년단(반도의용정신대)에 대한 연구가 거의 되지 않아 그 시기 김두한이 해당 단체에서 깡패들끼리 건설 현장에 모여서 삽질이나 했다는 것 외에는 어떤 일을 했는지도 확실하게 검증하기 힘들어 김두한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지는 않는 편이다. 김두한처럼 일제에 단순 부역한 이들까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본다면 그 범위가 지나치게 넓어져서 친일인명사전이 몇 배는 두꺼워졌을 것이다.[B] 광통교가 중구와 종로구의 경계선인데, 김두한은 여기서 일을 벌이면 중구와 종로구가 서로 자기 관할이 아니라고 떠넘기면서 수사가 지체될 것을 노린 것이다. #[B] [42] 노변야화에 섭외되기 이전, 김두한은 국회 오물 투척 사건으로 인해 모진 고문을 받았고 이후로도 옥고를 자주 치른 탓에 몸 상태가 오늘내일하는 수준으로 좋지 않았고, 실제로 노변야화 김두한 편이 끝나고 2년하고 열 달쯤 되어서 사망했다.[43] 실제 명동예술극장도 당시 광통교가 있던 광교 다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사실 대신증권 본점(당시 중앙극장)도 명동예술극장과 가까이 있다.[44] 예를 들면, 신상옥의 수기에는 이광수가 김일성의 전향 유혹을 끈질기게 거부하다가 지방으로 쫓겨가 1963년에 사망하였다고 적혀 있지만, 실제로 이광수는 1950년 10월에 납북되던 도중에 사망하였다.[45] 특히 문정복은 심영과 같은 극단에서 같이 연기하기도 했었다.[46] 다만 야인시대에서는 심영의 공산주의 활동에만 초점을 뒀기 때문에 심영의 친일 행보는 나오지 않는다.[47] 이러한 점 때문인지 내가 고자라니 밈에서 심영은 실존인물 모티브임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조롱당하나, 실존인물이 워낙에 악행을 많이 저지른지라 이것에 대한 비판은 전무하다. 실제로 야인시대에서 심영 캐릭터는 희화화되었을 뿐 그 자체로는 매우 비열한 악역으로 나오며, 그가 고자가 되는 장면 역시 대놓고 시청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유발시키도록 연출된다.[48] 당시에는 중학교 6년제였다. 지금으로 따지면 고등학교 2학년 정도,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이 분리된 것은 1951년의 일이다.[49] 오빠는 풍각쟁이야를 부른 가수.[50] 2006년 KBS 드라마 <서울 1945>에서는 김일성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