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시 / 화성시 / 오산시의 행정구역 변천사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행정구역 | 수원시 | 오산시 | 화성시 | }}}{{{#!wiki style="margin: 0px 0px;"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 마한 | 모수국 牟水國 | |||||||||
백제 | 3세기 | 모수성 牟水城 | ||||||||||||||
고구려 | 475 | 매홀군 買忽郡 | 당성군 唐城郡 | |||||||||||||
신라 | 553 | 신주 新州 | ||||||||||||||
557 | 북한산주 北漢山州 | |||||||||||||||
561 | 남천주 南川州 | |||||||||||||||
604 | 한산주 漢山州 | |||||||||||||||
통일신라 | 757 | 한주 수성군 水城郡 | 한주 당은군 唐恩郡 | |||||||||||||
고려 | 940 | 수주 水州 | 당성 南陽 | |||||||||||||
995 | 관내도 수주 水州 | |||||||||||||||
1012 | 양광도 수주군 水州郡 | |||||||||||||||
1271 | 충청도 수원도호부 水原都護府 | |||||||||||||||
1308 | 충청도 수주목 水州牧 | 남양부 南陽府 | ||||||||||||||
1310 | 충청도 수원부 水原府 | |||||||||||||||
1362 | 양광도 수원군 水原郡 | |||||||||||||||
1366 | 양광도 수원부 水原府 | |||||||||||||||
조선 | 1395 | 경기도 수원부 水原府 | 경기도 남양군 南陽郡 | |||||||||||||
1413 | 경기도 수원도호부 水原都護府 | 경기도 남양도호부 南陽都護府 | ||||||||||||||
1526 | 경기도 수원군 水原郡 | |||||||||||||||
1535 | 경기도 수원도호부 水原都護府 | |||||||||||||||
1793 | 경기도 화성유수부 華城留守府 | |||||||||||||||
1895 | 인천부 수원군 水原郡 | 인천부 남양군 南陽郡 | ||||||||||||||
1896 | 경기도 수원군 水原郡 | 경기도 남양군 南陽郡 | ||||||||||||||
일제강점기 | 1914 | 경기도 수원군 수원면 水原面 | 경기도 수원군 성호면 城湖面 | 경기도 수원군 水原郡 | ||||||||||||
1931 | 경기도 수원군 수원읍 城湖面 | |||||||||||||||
1941 | 경기도 수원군 오산면 烏山面 | |||||||||||||||
대한민국 | 1949 | 경기도 수원시 水原市 | 경기도 화성군 오산면 烏山面 | 경기도 화성군 華城郡 | ||||||||||||
1960 | 경기도 화성군 오산읍 烏山邑 | |||||||||||||||
1989 | 경기도 오산시 烏山市 | |||||||||||||||
2001 | 경기도 화성시 華城市 |
1. 개요
수원시의 향토사, 지역사를 정리한 문서이다.2. 시대별 변천
주로 행정구역에 관한 내용이다.2.1. 삼국시대 ~ 남북국시대
마한의 54소국 중의 하나인 모수국(牟水國)이었다. 이후 백제 땅이었다가, 고구려가 백제를 한강 이남에서 몰아낸 이후 매홀군(買忽郡)으로 개칭되었다.진흥왕에 의해 신라에 편입됐고 9주 5소경 중 한주에 속했으며 통일신라 경덕왕 때 수성군(水城郡)으로 개칭되었다.
2.2. 고려 시대
태조 신성대왕 때인 940년 수주군(水州郡)으로 개칭하였다. 강종 원효대왕의 등극 전 봉지가 바로 현 수원시였다.[1]2.3. 조선 시대
1413년(태종 13년)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로 개편되어, 현재의 수원이란 명칭이 확립되었다. 한편 현재의 평택시 안중읍 일대를 관할하는 용성현을 흡수하였다.조선 중기까지 한적한 촌락에 불과하던 수원은 정조(正祖)가 아버지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무덤 영우원(永祐園)을 양주에서 수원의 화산(華山/花山)으로 이전하여 현륭원(顯隆園)으로 개칭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원래 있던 수원부 치소와 시가지를 현재의 수원화성으로 옮겨버리고, 그 자리에 현륭원을 조성한 것. 그로 인해 연구가들이 옛 수원의 연구에 애를 먹고 있다. 현재의 화성시 화산동(안녕동, 송산동 일대) 지역이 바로 옛 수원의 중심지였다.[2] 그 와중인 1789년 광주유수부의 일용면[3] 과 송동면[4]을 편입하였다.[5]
이원(移園)과 함께 도시 방어를 위한 수원 화성과 왕의 능행차 시 묵었던 화성행궁이 건립되었다. 그리고 정조는 자신의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수원에도 배치시키고, 상업을 발전시켰다. 수원 역시 도호부에서 유수부로 승격되어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또한 다른 곳에서는 종2품을 두던 유수부였지만, 수원유수는 정2품으로 한성부판윤과 동급이었다.[6] 그러나 정조의 죽음으로 수원은 쇠퇴하고, 정조가 수원에 베풀던 특권 역시 폐지되었다. 다만, 유수부라는 지위는 박탈당하진 않았다...만 이마저도 1895년 23부제 시행으로 인해 인천부 수원군으로 강등된다(...).
2.4. 일제강점기
1914년 당시 수원시 일대
1914년 조선총독부의 부군면 통폐합으로 현재의 수원 생활권이 확정되었다. 남쪽의 넓은 지역[7]을 진위군에 내주고, 남양군의 육지 지역[8]과 안산군 일부, 광주군 일부를 가져왔다. 대충 의왕시와 안산시 남동부까지 영역을 확장한 것. 이 시기에 옛 수원군과 남양군 시절 면들의 통폐합이 이루어져, 남부면·북부면이 수원면으로, 태촌면·장주면이 태장면으로, 안녕면·용복면이 안용면으로, 일용면·형석면이 일형면으로, 음덕리면·둔지곶면·화척지면이 음덕면(해방 이후 남양면으로 개칭, 현 화성시 남양읍) 등으로 통합되었다. 이 중 현재의 수원시 영역은 1914년 당시 수원면(팔달구 매산동, 매교동, 행궁동 일대), 일형면(장안구 전역 및 권선구 구운동, 서둔동, 팔달구 고등동, 화서동 일대), 안용면 일부(권선구 서남부), 태장면 일부(권선구 권선동, 팔달구 동부 및 영통구 일대) 등의 영역에 해당된다. 당시 화성행궁 내의 낙남헌을 수원군청으로 사용했다.[9]
일제강점기 당시 수원읍의 로고. 1937년에 정해졌다.
1931년 수원면이 수원읍으로 승격되었다. 이때에 수원에 일본식 지명이 도입되었다.
1930년(소화5년) 조선총독부령 제103호(1931년 4월 시행) | |
개편 전 | 개편 후 |
수원면 남창리 | 수원읍 남창정 |
수원읍 본정3정목 | |
수원면 남수리 | 수원읍 남수정 |
수원읍 매향정 | |
수원읍 본정4정목 | |
수원면 산루리 | 수원읍 궁정(宮町) |
수원읍 남부정(南部町) | |
수원읍 본정1정목 | |
수원읍 본정2정목 | |
수원읍 구천정 | |
수원읍 영정 | |
수원면 매산리 | 수원읍 매산정1정목 |
수원읍 매산정2정목 | |
수원읍 매산정3정목 | |
수원면 북수리 | 수원읍 북수정 |
수원면 신풍리 | 수원읍 신풍정 |
수원읍 장안정 |
1936년 일형면, 안용면, 태장면의 각 일부를 수원읍에 편입하였다. 이때 일형면의 잔여지역은 북쪽의 의왕면과 통합하여 일왕면으로 개칭되었다.
1936년(소화11년) 조선총독부령 제94호 | |
개편 전 | 개편 후 |
일형면 고등리, 동리, 지소리, 영화리, 서둔리 | 수원읍 고등정, 화서정, 지소정, 영화정, 서둔정 |
태장면 지리, 인계리 일부, 인계리 일부 | 수원읍 지야정(池野町), 인계정, 우만정 |
안룡면 평리 일부, 세리 | 수원읍 대평정(大坪町), 세류정 |
일형면 상광교리, 하광교리, 조원리, 파장리, 정자리, 송죽리, 이목리, 율전리, 천천리, 구운리, 탑리 | 일왕면 상광교리, 하광교리, 조원리, 파장리, 정자리, 송죽리, 이목리, 율전리, 천천리, 구운리, 탑리(이상 현재의 수원시 지역), 학의리, 포일리, 내손리, 청계리, 오전리, 이리, 삼리, 왕곡리, 고천리(이상 현재의 의왕시 지역) |
의왕면 학의리, 포일리, 내손리, 청계리, 오전리, 이리, 삼리, 왕곡리, 고천리 |
1941년, 성호면이 오산면으로 개칭되었다.
2.5. 대한민국
1949년 8월 14일 수원읍이 수원부로 승격되면서(바로 다음날인 1949년 8월 15일 수원시로 개칭), 수원군의 잔여지역이 화성군으로 개칭되었다. 이와 동시에 수원의 일본식 지명이 정리되었다.
1949년 대통령령 제161호 | |
개편 전 | 개편 후 |
수원군 수원읍 본정(本町)1정목 | 수원부 중동 |
수원군 수원읍 본정2정목 | 수원부 팔달로3가 |
수원군 수원읍 본정3정목 | 수원부 팔달로2가 |
수원군 수원읍 본정4정목 | 수원부 팔달로1가 |
수원군 수원읍 남창정 | 수원부 남창동 |
수원군 수원읍 영정 | 수원부 영동 |
수원군 수원읍 구천정 | 수원부 구천동 |
수원군 수원읍 남수정 | 수원부 남수동 |
수원군 수원읍 매향정 | 수원부 매향동 |
수원군 수원읍 북수정 | 수원부 북수동 |
수원군 수원읍 장안정 | 수원부 장안동 |
수원군 수원읍 신풍정 | 수원부 신풍동 |
수원군 수원읍 남부정(南部町) | 수원부 매교동 |
수원군 수원읍 궁정(宮町) | 수원부 교동 |
수원군 수원읍 세류정 | 수원부 세류동 |
수원군 수원읍 대평정(大坪町) | 수원부 평동 |
수원군 수원읍 서둔정 | 수원부 서둔동 |
수원군 수원읍 매산정1정목 | 수원부 매산로1가 |
수원군 수원읍 매산정2정목 | 수원부 매산로2가 |
수원군 수원읍 매산정3정목 | 수원부 매산로3가 |
수원군 수원읍 고등정 | 수원부 고등동 |
수원군 수원읍 화서정 | 수원부 화서동 |
수원군 수원읍 영화정 | 수원부 영화동 |
수원군 수원읍 지소정(紙所町) | 수원부 연무동 |
수원군 수원읍 지야정(池野町) | 수원부 지동 |
수원군 수원읍 우만정 | 수원부 우만동 |
수원군 수원읍 인계정 | 수원부 인계동 |
1963년 화성군 태장면, 안용면, 일왕면의 각 일부를 편입하여 시역(市域)이 대폭 확장되었다.[10] 1967년 서울특별시에 있던 경기도청이 수원시로 이전됐으며[11], 1970년 북수동(행궁동) 후생병원 자리에 있던 화성군청이 오산읍으로 이전됐다.[12]
1963년부터 2001년까지 사용된 수원시 휘장.
1983년 용인군 수지면 이의리, 하리를, 1987년 화성군 매송면 금곡리, 호매실리(현 금호동 지역)를 편입[13]하면서 시역을 계속 넓혀 갔다.
1988년 구제가 실시되어 장안구와 권선구로 분구되었다. 1993년 장안구와 권선구의 일부를 팔달구로 분구하였다. 일반구를 최초로 설치한 부천시보다 6개월 늦게 분구됐다.
1994년 수원시 시역 확대 | |||
종래 수원시 | 화성군 반월면 | 화성군 태안읍 | 용인군 기흥읍 |
1995년 수원시 시역 확대 | |||
종래 수원시 | 화성군 태안읍 |
1994년 12월(1994년 대한민국의 행정구역 개편)과 1995년 3월(1995년 대한민국의 행정구역 개편) 두 차례에 걸쳐 화성군 반월면 입북리, 당수리, 태안읍 영통리, 신리, 망포리 및 용인군 기흥읍 영덕리 일부(현 영통지구의 황골마을 및 청명마을 일부)를 편입했다.
2003년 팔달구 일부를 영통구로 분구하였다.[14]
2007년의 실질월경지 조정 |
초록색이 편입한 지역, 빨간색이 이관한 구역 |
2007년, 영동고속국도로 분절된 도로 이북지역을 수지구로 넘기고, 이남 지역은 편입하는 식의 행정구역 개편을 하였다. # 이 때부터 수원시는 이웃한 지역과 실질월경지, 땅거스러미를 정리하기 시작했으며, 법정동 경계도 수시로 바꿀 정도로 행정구역 개편에 적극적이었다. (이를 규정한 대통령령)
이 즈음 김용서 시장이 수원시를 토요타시처럼 삼성시로 바꾸겠다는 헛소리를 지껄였다가 진보/보수 막론하고 크게 욕을 먹었다.
2012년 왕송호수공원을 중심으로 의왕시와의 경계조정을 추진했다. 2013년 2월 2일 경기도 수원시와 의왕시의 관할구역 변경에 관한 규정을 통해 시행되었다.
2019년 9월, 용인시 기흥구 영덕동 일부(청명센트레빌, 영통업타운코트더테라스 일대)가 영통구 영통동에, 영통구 원천동 일부(나촌말삼거리 일대 중 중부대로 북쪽 지역)가 용인시 기흥구 영덕동에 맞교환 방식으로 편입돼 경계가 조정됐다.
2013, 2019, 2020년의 땅거스러미 조정 |
초록색이 편입한 지역, 빨간색이 이관한 구역 |
2020년 7월 24일, 화성시 반정동 일부(땅거스러미 형태로 나있는 반정4지구 예정 일대)가 영통구 망포동, 영통구 신동 및 권선구 곡반정동에, 영통구 망포동 일부(망포2지구 일부, 망포고등학교 서쪽 지역)이 화성시 반정동에 맞교환 방식으로 편입돼 경계가 조정됐다.
일제강점기에 화성행궁이 철거되고, 2차대전 종전 이후 한국 전쟁으로 화성마저 총탄과 포격 등으로 심한 피해를 입는 등 수난을 겪었으나, 현재는 화성과 화성행궁의 대부분이 복원된 상태이다.
2022년 1월 13일 특례시로 지정되었다
3. 주제별 역사
3.1. 고대 지명 관련
마한의 모수국(모수: 못, 물)이었다가 각각 백제, 고구려, 신라의 지배를 거친 삼국시대에는 매홀(물골)이라 불리었으며[15], 남북국시대 경덕왕 이후의 통일신라~고려 시대에 수성, 수주를 거쳐 조선 시대에 수원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됐다.고대로부터 현대까지의 지명 변천 과정에서 '물'의 의미가 그대로 내려져 온 것. 수성이라는 지명은 수원시 내에 수성고, 수성중 등 수성이라는 명칭을 쓰는 학교들이 여기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보인다. 물과 관련한 의미는 수원의 소지역 명칭에도 많이 남아있어 지동(못골:池洞), 인계(인도내:仁溪), 유천(버드내:柳川-세류동의 옛이름), 원천(먼내:遠川) 등이 있으며, 또한 수원에는 유난히 '매'자로 시작하는 지명이 많은데(매탄, 매향, 매교, 매산 등) '매'가 물을 뜻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16] 광교산, 칠보산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물이 지역하천으로 잘게 쪼개어져 남류하는 모양새에서 나온 이름이라는 추측도 있다. 이 흔적은 근처 지역인 오산시에도 '매홀'이라는 초, 중, 고등학교명을 통해 남아있다.
3.1.1. 오늘날의 지명 문제
현재의 화성시 일대는 예전에 '수원군'의 일부였는데, 수원군의 핵심지역인 수원읍이 수원군으로부터 분리되어 수원부(現 수원시)로 승격되면서, 수원읍이 떨어져가고 남은 수원군의 이름을 화성군으로 변경했다. 이 화성이란 이름은 다름아닌 수원시(구 수원읍)에 있는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水原華城)에서 따 왔다. 따라서 한자도 같다. 수원군청 이름 역시 화성군청으로 바뀌어 1970년 오산읍으로 이전할 때까지 수원시 내에 남아있었다.[17] 1995년 도농통합 대상에서 배제되어 수원시와 통합되지 않았고, 2001년 화성시로 승격되면서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이 때문에 화성시라는 명칭과 달리 화성이 화성시가 아닌 수원시에 있어서 헷갈려 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정작 당사자들인 수원시민 및 화성시민 대부분은 이에 대해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하다. 다만 타 지역에서 출신지역을 소개할 때 동부 지역의 경우 위의 이유로 그냥 수원 산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옛 수원군 수원읍이 1949년 수원부→수원시로 분리 승격될 때, 시와 군이 분리되면 둘 중 하나의 명칭을 바꿨던 당시의 관행에 따라 수원군의 잔여 지역을 수원의 전통적인 상징이자 옛 명칭인 화성에서 이름을 따와 '화성군'으로 개칭한 데서 출발한다. 수원화성 축조 이후 수원유수부를 '화성유수부'로 개칭되어 지명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이후에 다시 수원부로 격하되었다가 1895년 수원군으로 개편되었다. 1963년 수원시의 행정 구역이 대대적으로 확장되기 전까지만 해도, 당시의 화성군은 화성 성곽에 좀 더 근접한 곳(정자동, 송죽동, 조원동, 매탄동, 권선동[18] 등)까지 관할하고 있었다. 즉 그때만 해도 화성군에서 화성 성곽을 관할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볼 수는 있었다. 이것이 시 승격 이후에도 현재까지 '화성시'란 이름으로 이어진 것이다.
다만 역사적으로 수원화성이 축조되기 전의 수원읍성은 현재의 화성시 안녕동 일대에 위치했다.[19] 조선 정조가 구 수원읍치를 헐고 조성한 것이 바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융릉)이며, 수원화성을 축조하여 이를 새 수원읍치로 삼았다. 이 때문에 오늘날 수원화성은 수원시에 있고, 구 수원읍성은 화성시에 위치하게 된 아이러니한 상황이 된 것.[20] 수원시가 화성시로, 화성시가 수원시로 이름을 바꾸면 깔끔하고 알맞게 역사에 부합하겠으나 이미 상당시간 현재의 이름을 써온데다 각 시민들도 이런 내력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앞으로도 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다. 참고로 수원읍성 유적은 경기도 기념물 제93호로 지정되어 있다.[21]
수원시-화성군(시)의 명칭 부여 방식과 유사한 사례로 대구시-달성군(달성은 대구시내에 위치했던 성곽), 경주시-월성군(월성은 경주에 있는 신라 왕성의 이름), 금성시-나주군(금성은 나주성의 별칭이자 나주의 고호)이 있다. 참고로 이들은 훗날 각각 월성군→경주군, 금성시→나주시로 명칭이 환원되었고 1995년 도농통합 당시 경주시, 나주군과 통합되었다.
3.2. 정조와 정약용의 지원
정조와 정약용이 만들었던 조선 최초의 신도시로 정조, 정약용, 수원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이다. 과장이 아니고, 정조랑 정약용이 곧 수원이고, 수원이 곧 이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왕권강화와 조선개혁을 목표로 하던 정조는 현 경기도 수원시에 정약용을 포함한 당대 실학자들과 함께 수원화성을 건설하였고 자신의 꿈을 실현하고자 하였다.[22] 또한 자신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고자 하는 것도 화성 건설에 있어 큰 비중을 차지 한다.화성 축성이 완료된 다음해 왕명을 받들어 판중추부사 김종수가 지은 화성기적기 비문에는 "이 사업은 수원부가 기호의 요충지라고만 해서 하는 것이 아니며 5천의 병마가 있다고 해서 하는 것도 아니다. 사도세자를 모신 선침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며 한편으로는 행궁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다."라는 정조의 하교가 실려있어 도시 건설의 표면적인 이유를 엿볼 수 있다. 그때까지 경기감영 소재지였던 수원은 정조의 압도적인 지원으로 당시 평양을 넘어 조선의 수도인 한양과도 어깨를 견줄만한 도시로 성장하였다. 정조는 수원으로 사도세자의 묘를 이전시키고 부친에 대한 효를 다하고자 했는데, 이것이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융건릉이다. 그리고 틈만 나면 도성인 한양에서 수원으로 행차하였는데[23] 이 정조의 행차는 '정조행차축제'로서 수원의 문화축제로 남아 있다.
이처럼 조선 후기의 수원은 정조의 개혁을 지지하는 든든한 지원군으로서, 정조의 고향과도 같은 존재로서 압도적인 위상을 자랑하였다. 한중록에 따르면 정조는 아들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와 노후를 보내려고 했는데 이에 따라 화성행궁의 규모를 대대적으로 늘리며 수원을 상왕의 수도로 만들 계획을 치밀하게 준비한 것이다.[24] 그리고 한양은 이미 노론으로 대표되는 기득권들이 좌지우지하는 지역이었다. 정조가 아무리 개혁을 추진한다 하라도 이들 기득권이 따라주지 않고 오히려 맞대결을 벌인다면 정조로서는 큰 낭패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정조는 완전히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수원을 자신의 개혁의 터전으로 삼는 한편 사도세자를 왕으로서 추존하는 정치적 복권 등 원대한 꿈을 품고 화성을 축성해 수원을 계획한 것이다. 하지만 정조 사후 정조가 수원에 베풀던 특권 역시 폐지되고, 유수부라는 지위만 유지하다가 1895년 23부제 시행으로 인해 인천부 수원군으로 강등되는 등 쇠퇴의 길을 맞는다. 이렇듯 정조와 가까운 도시이기 때문에, 수원에는 정조대왕 동상도 있으며 도시 자체가 효의 도시를 모티브로 하는 등, 정조와의 인연을 강조하고 있다. 정조가 건설한 세계유네스코 문화유산인 수원화성은, 서양적 요소와 조선의 미를 적절하게 융합한, 조선 건축의 꽃으로 불리고 있으며 수원을 상징하는 절대적인 존재이다. 여기에서 나오는 수입도 매우 짭짤한 편이다.
3.3. 구한말~일제강점기의 위상
1886년 경기감영이 수원으로 옮겨왔다가 1910년 한일합방 이후 경기도청이 경성부에 설치되면서, 일제강점기에는 예전만큼의 위상은 없었다. 경부선 철도가 지나가는 지역 특성상 역을 중심으로 도시화가 진행되었으나, 부로는 승격되지 못했다.1919년 3.1운동 당시 평안북도 의주, 황해도 수안과 함께 3.1운동 3대중심지로 알려져 있다. 1919년 3월 1일 서울과 수원에서 동시에 3.1운동이 있었던 것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중 일제에 의한 최대의 학살사건이라고 알려져 있는 제암리 학살사건이 당시 수원군(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에서 일어났다. 이에 수원에는 일제강점기와 항일관련 유적도 어느정도 있는 편이다.
4. 관련 문서
[1] 당시는 한남군(漢南郡), 작위는 한남공.[2] 즉 정조의 수원화성 축조 이전까지 오리지널 수원의 중심지는 현 수원시가 아닌 화성시 화산동 일대였다는 것이다. 거꾸로 수원화성은 화성시에 없고 수원시에 있다. 마침 오리지널 수원의 중심지 근처인 화성시 봉담읍에 수원대학교가 있다. 통합을 해야하는건가[3] 현재의 장안구 영화동, 조원동, 상광교동, 하광교동, 송죽동, 정자동, 파장동 등[4] 현재의 화성시 매송면 야목리, 송라리, 원리[5] 견아상입지여서 성남시나 광주시 및 서울특별시 강남구와 강동구 등 성남/광주권 지역이나 서울 강동권 지역과는 연계성이 거의 없다. 당시 송동면은 광주군 북방면, 성곶면, 월곡면과 접했고, 일용면은 의곡면, 왕륜면에 접했으며, 이 지역들은 모두 인접한 타 군으로 편입되었다.[6] 이것은 오늘날로 치면 수원광역시를 사실상 수원특별시로 승격, 취급한 셈이다. 물론 당연히 오늘날의 수원은 특별시는 커녕 광역시도 못 되는 상황이라...[7] 현재 평택시 안중읍·포승읍·오성면·청북면·현덕면의 일부와 고덕면의 일부, 서탄면 황구지리에 해당하는 지역. 해당 지역 중에서는 현재의 천안시인 직산군의 영역 또한 있었기에 이쪽은 약간 천안과 교류가 많았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8] 제부도와 국화도 일대를 제외한 도서 지역(대부도, 영흥도 등)은 통째로 부천군에 이관되었다.[9] 이후 (시기 미상) 북수동(행궁동) 후생병원 자리로 이전됐다.[10] 이때 태장면, 안용면의 잔여지역은 통합되어 태안면(훗날의 태안읍, 현재의 병점 일대)이 되었으며, 일왕면은 옛 의왕면 영역만 남게 되어 다시 의왕면으로 명칭을 회복하고 시흥군으로 넘어갔다.[11] 당대의 지역구 국회의원 이병희가 삭발시위까지 하여 유치했다는 이야기가 있다.[12] 이후 화성군청은 2000년 남양읍으로 이전하였고, 현재 이 자리에는 롯데마트 오산점이 들어섰다.[13] 사실 금곡동이나 호매실동은 매송면과는 별로 연관이 없다. 칠보산을 넘어가야 매송면사무소가 있는 어천리가 나오기 때문에 오히려 구운동 지역과 더 연관이 있다.[14] 이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 장안문이 장안구에 있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영통구가 분구됨과 동시에 북수동, 장안동, 신풍동, 화서동이 팔달구 소속으로 개편되었기 때문. 이외에도 매교동, 교동, 매산로1~3가, 고등동이 권선구 소속에서 팔달구 소속으로 개편되었다.[15] 인천의 옛 이름인 '미추홀/매소홀(밋골, 미숫골/맷골, 매솟골)' 역시 '물의 고을'이란 뜻으로, 지역은 다르지만 어원이 같다. 한편, 고구려는 수원 일대에 '매홀군'을 설치했었는데, 신라가 이 명칭을 받아들인 것이다.[16] 호매실은 매실 또는 매화나무에서 그 이름을 따 왔다. 한자로는 모두 매화나무 매(梅) 자긴 하지만, 전자의 사례들은 물의 고대어인 미, 매 등을 음이 비슷하거나 같은 한자로 음차한 것으로 볼 수 있다.[17] 화성행궁 앞 지금의 후생병원 자리에 있었다. 군청이 있었음을 알리는 표석[18] 현재 수원버스터미널이 있는 곳이다.[19] 수원대학교도 이 옆의 봉담읍에 있는데, 학교 명칭과는 달리 수원시가 아닌 화성시에 있지만 옛 수원읍치 일대에 들어섰고 화성시 자체가 역사적으로 수원군이란 이름으로 연원을 같이 하므로 학교 명칭이 아주 잘못된 건 아니다.[20] 경상남도 창원시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마산합포구의 유래인 합포성터는 마산회원구에 있고, 반대로 마산회원구의 유래인 회원현 성터는 마산합포구에 있다.[21] 「수원고읍성 (水原古邑城)」, 문화재청[22] 사실 이러한 전략은 정조와 수원 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 전반에서 여러번 볼 수 있는 일이다. 발해 문왕이 당의 장안성을 모방해서 상경성을 건설해서 천도, 장수왕의 평양 천도, 백제 무왕의 익산 개발, 고려 인종의 서경 천도 운동 등이 이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왕조가 오래 지속될수록 왕도(=수도) 인근에 기득권 세력이 쌓여가기 마련이고, 이들은 보통 개혁 전반에 반대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행정기능의 이동 내지 분산은 이에 대처할 훌륭한 수단이다.[23] 한양에서 수원을 오가는 길목이자 현재도 수원시와 의왕시의 경계점인 의왕시 고천동에 지지대고개라는 곳이 있다. 화성유수 홍명호가 쓴 비문도 같이 보존되어 있다. 정조대왕이 화성 융건릉을 참배하고 다시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를 넘으면 아버지의 묘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고 한탄하며 자꾸 융건릉 쪽을 바라봐 걸음이 지체됐다. 그래서 생긴 이름이 지지대고개다. 이 고개 명칭에서 비롯된 축구 더비명이 지지대 더비.[24] 한양은 주상(主上)의 수도, 수원(화성)은 상왕의 수도로 상왕은 조선 모든 관리들의 인사권과, 사법권 그리고 군대통수권을 갖던 조선의 전례를 활용하려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