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bc002d><colcolor=#fff> 송혜희 실종 사건 | |
발생일 | 1999년 2월 13일 22시 10분경 |
발생 위치 | 경기도 평택시 도일동 하리마을 |
실종자 | 송혜희 (당시 만 17세, 현재 만 [age(1981-07-14)]세) |
유형 | 실종 ([dday(1999-02-13)]일 경과) |
[clearfix]
1. 개요
1999년 2월 13일 밤 10시경 경기도 평택시 도일동 하리마을에서 당시 송탄여자고등학교[1] 3학년[2]이던 송혜희 양이 실종된 사건.송혜희 양은 1981년 7월 14일생으로, 만약 생존해 있을 경우 현재 나이는 [age(1981-07-14)]세이다.
2. 사건의 전개
당일 송 양은 3학년 반 편성이 있어서 오전에 학교에 갔다가 하교 후 오후 5시 30분경 남자친구를 만나러 남자친구의 집이 있는 경기도 평택시 서정동에 갔는데 친구들과 놀다 보니 이윽고 밤 10시가 되었고 막차 시간이 되자 송 양은 막차 버스를 타고 집에 갔다.송 양이 막차를 타고 가는 모습을 친구들이 배웅했으며, 남자친구가 살던 서정동과 송 양의 집이 있던 도일동은 불과 5km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고로 버스를 타고 갈 경우 10~20분 거리에 불과했지만, 도일동 하리 지역이 원래 주민이 적은 지역이었고 막차 시간이라 당시 버스 안에는 송혜희 양과 30대로 보이는 남성 1명만 있었다.
게다가 당시 송혜희 양이 내린 버스정류장은 집에서 약 1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인 데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는 또 다른 버스 노선이 없었기에 정류장에서 집까지 10분 남짓 걸어가야 했으며, 집으로 가는 길은 논밭, 야산뿐인 골목길이라 송 양이 실종된 시간대인 밤에는 우범지대였다.
3. 수사
송혜희 양이 집에 돌아오지 않자 밤 11시경 아버지 송길용은 송 양의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친구들은 "버스를 타고 집에 갔다"는 말뿐이었다. 다음 날 새벽 6시경 가족은 경찰에 신고했지만 경찰은 단순 가출로 처리했다가 사건이 발생한 지 3일이 지난 후에야 뒤늦게 수사에 착수했다. 경찰은 송혜희 양의 일대 탐문 조사, 우범자 조사 등을 통해 단서를 잡으려고 했으나 별 다른 성과가 없었다. 당시 송 양이 탑승한 노선의 운행사인 평택운수[3]에서 송 양이 탑승한 노선의 막차를 운행했던 버스 기사를 탐문했는데 그는 밤 10시 15분경 송 양이 도일동 하리 입구 도일주유소 앞에서 내리는 것을 기억했으며 좀 신경이 쓰였던 점으로 술 냄새가 나는 의문의 남성이 송 양과 함께 내렸다고 증언했다. 송혜희 양이 버스에서 내릴 때 같이 내렸다는 남성이 사건과 관련된 용의자 또는 최후의 목격자일 수도 있다는 가정 하에 그 남성을 찾기 위해 버스 기사를 불러 조사했고, 버스 기사는 그 남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30대 정도 되는 남성이었다.
- 오리털 파카에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있었으며, 등산화를 신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은 확인하지 못했다.
- 평택 시내에서 버스를 탔다.
- 이 동네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에[4] '어디를 가느냐'라고 물었더니 '도일동 하리부락'이라고 대답했다.
- 몸에서 술 냄새가 났다.
- 버스에서 내린 후, 송 양은 도로를 건너 마을로 향했고 뒤따라 내린 남성은 도로를 건너지 않고 지하도로 향했다.
마지막 진술에서 주목할 점이 있는데 당시 "송 양은 버스에서 내린 후 도로를 건너 하리 마을로 향했지만 남성은 지하도로 들어갔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도로를 건너든, 지하도로 들어가든 하리 마을 방향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버스에서 내린 송 양은 앞에서 걸어가고, 남성은 조용히 송 양의 뒤를 따라 같이 걸어갔다. 이것이 송 양의 마지막 모습이었으며 그대로 [age(1999-02-13)]년이 지난 현재까지 행방이 묘연한 상태이다.
경찰은 이 의문의 남성을 찾기 위해 주변 마을까지 찾고 야간 기술학교와 일대 성매매 업소까지 수색했으나 끝내 남성을 찾을 수 없었고 송 양도 찾지 못했다. 만약 당시 버스에 CCTV가 있었으면 희망이 있었겠지만 당시에는 버스에 CCTV가 없었다. 당시 송 양이 내린 버스정류장에서 집으로 가는 길목은 한밤중인 데다 인적도 드물고 가로등이 없어 어두운 좁은 골목길이었기 때문에 경찰은 인원을 투입해 논밭, 갈대숲, 하수구, 산 등 인근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송혜희 양은 끝내 발견되지 못했다.
수사에 진전이 없자 경찰은 때마침 사건 발생일이 설날을 사흘 앞두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착안해 '설을 보내기 위해 귀성한 전입자일 수 있다'는 것에 가능성을 두고 도일동 일대, 평택 일대를 샅샅이 조사했으나 별 다른 단서를 찾을 수는 없었다.
사건 발생 5년 후인 2004년 경찰은 수사에 별 진전이 없자 송혜희 양이 스스로 잠적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뒀는데 가족은 그럴 리가 없다고 극구 부인했으나 경찰은 여기에 희망을 걸었다. 2월 부산광역시에서 송 양의 명의로 인터넷에 접속한 것을 포착한 경찰은 급히 부산으로 내려가 잠복 수사를 했으며 다시 접속 흔적이 나타나자 경찰은 해당 PC방을 급습해 확인했지만 접속자는 엉뚱하게도 어느 젊은 남녀 커플이었다. 조사 결과 이들은 송혜희 양의 아버지가 딸을 찾기 위해 붙여 둔 전단지에 있던 송 양의 주민등록번호 등 신상정보를 무단도용해 접속한 것으로 밝혀졌다.
사실 이 사건 역시 장기 실종 사건 중 전북대 수의대생 실종 사건과 더불어 쉽게 해결할 수 있었던 사건이지만 전북대 수의대생 실종 사건은 사건 현장을 방문한 실종자의 친구들이 현장을 훼손하는 바람에 수사에 난항이 생긴 반면[5] 이 사건은 납치임이 확실한데도 경찰이 단순 가출로 처리해 버려 3일이나 방치하다가 부랴부랴 수사하지를 않나, 목격자를 상대로 용의자의 몽타주 작성과 탐문 수사도 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잠적했다고 단정짓는 등 사실상 경찰 스스로가 이 사건을 미제사건으로 만들어 버렸다.[6]
안타까운 것은 송혜희 양이 실종된 동네는 작은 동네였고 당시 범인을 목격한 목격자도 있었기 때문에 몽타주 작성과 탐문 수사만 제대로 했다면 많은 증거를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 때문인지 송혜희 양의 아버지는 사건 이후 경찰을 불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김해 부산 부녀자 연쇄실종 사건처럼 2000년대 초중반(정확히는 강호순 검거 이전)까지만 해도 경찰의 (성인에 대한) 실종 수사가 기본기부터 매우 부실한 경우가 많았는데 성인(혹은 성인에 가까운)의 실종에 대해 강력범죄와의 연관성을 진지하게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도 성인 실종에 대한 안일한 인식이 완전히 고쳐지지 않아 고유정 전 남편 살해 사건 등 초동 수사 부실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송 양이 사라진 버스정류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중장비 교육학원과 합숙소가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전국 미아·실종자 찾기 모임의 회장인 나주봉 회장은 "송 양을 따라 간 남성이 아마도 이 학원의 수강생이자 송 양을 납치한 유력 용의자일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4. 부모의 수색 시도, 그리고 부모의 사망
수사에 계속 진전이 없자 경찰은 수사를 잠정 중단했으며 납치 및 인신매매 사건으로 추정되던 이 사건은 결국 2014년 2월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다. 그럼에도 경찰은 장기미제사건은 공소시효가 없다며, 수사를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송혜희 양의 아버지 송길용은 도일동에서 아내와 2명의 딸과 함께 살고 있던 평범한 자영업자였다. 특히 차녀 송혜희 양은 학교에서 전교 1~2등을 다툴 정도로 영특한 아이였고 당시 지역구 국회의원이었던 원유철로부터 장학금을 받기도 했던 아버지의 자랑거리였다. 무엇보다 송혜희 양은 밝고 성실한 성격으로 주변에서 인기도 많았다고 한다.
송혜희 양의 실종 후 부모는 생업을 포기하고 술과 라면으로 끼니를 대신하며 딸을 찾아나섰다. 그러다가 어머니는 딸을 찾지 못한 절망감에 우울장애와 알코올 의존증과 심장병으로 괴로워하다 결국 2003~2004년경, 딸 얼굴이 담긴 전단지를 품 안 가득 안은 채 소주와 농약을 마시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혼자 남게 된 송혜희 양의 아버지는 아내를 따라가려고 결심했으나, 실종된 딸을 찾지 못하고 큰 딸마저 버려두고 갈 수는 없었기에, 본인이 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온갖 고통과 수모를 참으면서 애통한 심정으로 기약도 없는 끔찍한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송혜희 양의 언니는 결혼 후 자식을 낳은 후에도 아버지를 모시며 살고 있었으며, 송 양의 아버지는 딸의 방을 당시 그대로 보존해 놓고 집을 떠나지 못한 채, 트럭을 송 양을 찾는 사진들로 빼곡히 도배하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1999년부터 2024년까지 무려 25년간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이 딸을 찾아다녔다. 송길용 씨가 25년간 전국에 건 현수막은 1만 개에 이르고 돌린 전단은 1000만 장에 달한다고 한다.
그동안 송 양의 아버지는 딸을 봤다는 수 백 번 가까이 되는 제보를 받고 전국 어디든 찾아갔으나 안타깝게도 모두 송혜희 양과 비슷한 사람이거나 장난전화, 또는 착오 제보였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전단지와 현수막을 거는 등 개인적으로 조사를 계속했지만 생업을 그만두고 무리하게 많은 양의 전단지와 현수막을 배부하며 돌아다니느라 상당한 금액의 빚이 쌓여 신용불량자가 된 데다 건강도 악화되고 말았다.
사건 이후 송혜희 양이 다니던 고등학교와 집 일대는 개발이 이루어져 사건 당시의 모습과 상당히 달라졌으며 송혜희 양의 집도 개발지역에 포함되어 결국 이주하게 되었다. 송 양의 사연은 2004년 KBS 프로그램 '공개수사 실종'과 2011년 '채널뷰 사라진 가족'에도 나왔지만 현재까지도 별 진전이 없다. 아직도 송 양의 행방은 알 수 없으며, 송 양의 아버지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현수막을 걸어 딸을 찾아다녔다. 2013년까지만 해도 평택시를 비롯해 전국 곳곳에 송 양의 사진을 내건 '실종된 송혜희 좀 찾아 주세요!!!' 라는 내용의 현수막을 볼 수 있었는데 2014년 들어 많이 없어졌다가 2017년부터 평택 일대에서 현수막을 다시 붙이기 시작했고 서울 시내 주요부에서도 이 현수막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2024년까지도 서울 시내 및 수도권 지역에서 송혜희 양을 찾는 현수막이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여대생 등 부녀자를 한적한 버스정류장 등에서 납치 살해한 강호순 사건과의 유사성 때문에 강호순이 체포되었을 때 송 양의 아버지는 '혹시나 딸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사건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다고 한다.
010 번호 통합 정책에 반대하는 주요 사례로 송 양의 아버지가 자주 오르내리곤 하는데 실종된 딸이 전화를 걸어 올까 봐 자신이 쓰는 016 번호를 바꾸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2015년 5월 7일 조선일보가 송혜희 양의 아버지와 인터뷰를 했는데 시간이 흘러 당시 기준 62세가 되었지만 실종된 딸을 찾기 위해 사용한 자동차를 폐차한 뒤 새로 산 차의 주행 거리가 20만 km에 달한다고 하며 2011년 현수막을 교체하던 중 사다리에서 떨어져 허리를 크게 다치기도 했다. 하지만 기초생활수급 60만 원 중 40만 원을 현수막 및 전단지 제작에 쓰는 등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
2015년 대한민국 메르스 유행 당시 송 양의 아버지가 메르스에 감염되었으나 완치되었다고 한다. 인터뷰에서 딸을 찾기 위한 일념으로 메르스를 이겨냈다고 밝혔다. #
서울동부지방법원의 문유석 판사가 그의 책 <개인주의자 선언> 초반부에 이 사건을 짧게 4줄 정도 언급했다. 사건의 자초지종을 말한 것은 아니고 한남대교를 지나며 마주치는 이 사건의 현수막에 대한 안타깝고 슬픈 감정만을 짤막하게 서술했는데 이 책이 2018년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사건에 대해 잊고 있거나 모르던 사람들에게 다시금 송 양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송혜희 양의 아버지는 꿈에서라도 딸을 보고 싶은데 꿈에 딸이 단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너무 답답해서 무속인을 찾아가봤는데, 무속인은 꿈에 나오면 죽은 사람이라고 얘기 했다고 한다. 이 말이 오히려 송혜희 양의 아버지에게는 딸이 아직 살아있구나라는 희망이 되었다.
하나 안타깝게도 송혜희 양의 아버지 송길용 씨는 끝내 딸을 찾지 못한 채 2024년 8월 26일, 본인의 생계 수단이었던 폐품 수거 트럭을 운전하다가 마주오던 덤프트럭과 충돌하는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결국 자살로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의 뒤를 따라가고 말았다. # # 향년 71세였으며 그의 빈소는 평택 송탄제일장례식장에 차려졌다. # 그는 숨지기 전날에도 "현수막을 만들 돈이 없다"며 걱정할 만큼 실종된 딸을 찾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한다. # 그가 의뢰하던 현수막 제조 업체 사장이 연락이 뜸한 것을 이상하게 여겨 그에 대해 수소문하면서 사망이 알려졌다.
그의 장례식장에 배우 김우빈이 조화를 보냈다고 한다. 고인과 개인적인 인연은 없었지만, 송혜희 양을 찾는다는 현수막이 걸린 걸 지나가다 자주 봤었고 그때마다 안타까운 감정이 들었다 보니 조화를 보내서 애도의 뜻을 표했다고 한다. #
그렇게 송혜희 양의 부모 모두 세상을 떠나면서 남은 가족은 언니와 형부, 조카만 남게 되었으며, 이들 모두 부모처럼 그녀를 찾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기에는 어려운 처지인 걸 감안할 때 그녀를 찾는 현수막과 전단지는 더 이상 보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5. 다른 사건과의 연관성?
공교롭게도 2002년 9월 실종되었다가 141일 만에 인근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전옥분(당시 42세)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버스정류장이 송혜희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버스정류장과 일치한다.[7] 게다가 당시에는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모녀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에 대한 소문이 많이 돌았고 실제로 당시 이 일대는 치안이 좋지 못해서 성범죄 피해가 빈발하였으며 의문점이 남은 채로 종결된 사건도 여럿 있었다고 한다.따라서 정황을 감안할 때 전옥분 살해 사건도 송혜희 실종 사건과의 정황상 한 연쇄살인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프로파일러들은 현재 이 사건과 송혜희 양의 사건의 범인을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고 있고 2004년에 발생한 화성 여대생 살인 사건 역시 이 2건과 수법이 비슷해 이 3개의 사건을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2020년 2월 29일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전옥분 사건을 다룰 때 이 사건도 잠깐씩이나마 언급되었다. # #
6. 관련 방송
- 1999년 4월 21일 KBS 2TV 공개수배 사건 25시에서 처음 "실종된 송혜희 양을 찾는다"는 방송을 내보냈다.
- 2004년 KBS 2TV 공개수사 실종을 통해서도 송혜희 양을 찾는다는 방송을 내보냈다.
- <김복준의 사건의뢰 미제사건> 21화에서 방송했고(#)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서도 방송했다.#
- 법률방송 13회에서도 이 사건을 다루었다.#
7. 관련 기사
8. 둘러보기
[1] 2010년 송탄제일고등학교, 2018년 라온고등학교로 교명 변경.[2] 정확히는 2학년에서 3학년으로 넘어가던 겨울.[3] 당시 사명은 서울고속.[4] 보통 인적이 드문 곳을 자주 운행하는 버스 기사들은 자주 타는 승객들의 얼굴을 잘 안다.[5] 일부가 경찰에 신고하기 위해 경찰서로 향한 사이 남은 인원들이 어지럽혀진 방을 청소했기 때문에 경찰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현장이 훼손된 뒤였다.[6] 사실 미제사건의 대다수가 범인이 치밀해서가 아니라 경찰이 허술해서 미제가 된 경우가 많다. 청주 물탱크실 주부 살인 사건 등이 그 단적인 예.[7] 송혜희 양의 본가와 전옥분의 본가는 걸어서 5분도 안 걸릴 만큼 가까우며 두 사람이 걸어왔을 실종 지점도 일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