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백석의 생애를 정리한 문서.2. 초기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지면 익성리(현 정주시 오산동)에서 아버지 백시박(白時璞)[1]과 어머니 단양 이씨 이봉우(李鳳宇)[2]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래로 남동생 백협행(白協行)·백상행(白祥行), 여동생 백현숙(白賢淑)이 있었다. 아버지 백시박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사진 기술을 가지고 있어, 조선일보에서 사진기자로 근무하면서 사진반장을 지내다 낙향했다.1924년 그는 오산소학교를 졸업하고 오산(五山)고등보통학교[3]로 진학한다. 장난꾸러기 같던 어린 시절과는 달리 백석은, 독서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게 된다. 당시 오산학교 학생들은 문학에 대한 열정이 뛰어났는데 백석 또한 예외가 아니었고, 백석은 학과 수업뿐만 아니라 문학 수업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4]
내가 아는 백석은 성적이 반에서 3등 정도였으며 문학에 비범한 재주가 있었다. 특히 암기력이 뛰어나고 영어를 잘했다. 회화도 썩 잘해 선생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백석은 용모도 준수했지만 나이가 어린 편이었다.(나이가 어렸지만 용모도 출중하고 재주가 비범했다.) 백석은 부친을 닮아 성격이 차분했고, 친구가 거의 없었다.
조만식, 당시 백석의 담임교사
조만식, 당시 백석의 담임교사
동기의 회고에 따르면, 백석은 학과 공부에만 치중하는 학생들을 속된 학생들로 보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석은 학과 성적도 상위권에 속했다. 독립운동가가 설립한 학교답게 일본어 교육에 신경쓰지 않아, 일본어 성적은 낮았다고 한다. 또한 체조에는 소질이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를 제외하면 15과목 모두 우(75점~100점)을 받았다고 한다. 다만, 평균성적이 아닌 ‘우, 양, 가’로 등수를 매기다 보니 평균점수가 높았음에도 전교 등수가 낮아 선생님들이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오산학교의 인원이 50명 내외였는데, 이 중 10등 안에 들면 중상위권이었기 때문.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으나, 그 후 집안 사정으로 인해 진학하지 못하고 있었다.
3. 유학 생활
1929년 조선일보 후원 장학생 선발시험에 붙어 일본의 아오야마학원 전문부 영어사범과에 입학하고,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에 당선된다. 당선작은 농촌에서 일어난 남녀의 불륜을 공동체의 소문 형식으로 그려낸 <그 모(母)와 아들>. 조숙한 솜씨로 인간 욕망을 다뤄 눈길을 끌었다.당시 백석의 성적 정도면 평양의학전문학교[5]에 진학해 의사가 될 수 있었지만, 백석은 교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집이 가난하여 한동안은 기회를 얻기 위해 집에서 지내야 했다. 그러던 중 방응모[6]의 지원[7]을 받아 이갑섭, 문동표, 정근양 등과 함께 당시 일본에서 가장 학비가 비싸다[8]는 아오야마가쿠인 영어사범과에 다닐 수가 있었다.
아오야마가쿠인에서 백석은 공부에만 전념하며 어학을 중점적으로 공부했다고 한다. 1학년 영어 마스터, 2학년 프랑스어, 3학년 러시아어를 집중 공부했다고 한다. 특히 교내의 교회에서 외국인 교수들과 자유로이 영어로 대화하는 모습을 보이며 아오야마 학생들에게 경이감을 선사할 정도로 유창했다 한다. 정작 영어사범 전공이면서도 정식 수업은 독일어를 들었고, 독일어 교수는 그를 무척 아끼며 애제자로 여겼다 한다. 해방 이후 북에서는 수많은 번역에 집중하였고, 이때는 주로 러시아 문학에 집중했고, 일부 프랑스 문학, 중국 문학도 번역했다. 그래서 영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중국어, 일본어에 능통했다고 할 수 있는데, 역설적이게도, 일본에서 유학한 적 있는 사람이 위 외국어 중에서 일본어를 가장 못했다고 한다.
이렇게 공부한 후 졸업 즈음, "최우등은 백석일 것"이라는 믿음이 동기들 사이에 퍼졌다. 그러나 실제 최우등상은 일본인 동기 모리가 받았다고 한다. 졸업식 답사도 물론 모리가 했다고.
백석의 거주지는 한때 길상사(기치조지)로 잘못 알려졌으며, 이에 대한 오인으로 인해 실제 길상사라는 절이 지어지게 된다. 백석의 거주지가 길상사로 알려진 것은 백석 연구가인 송준이 백석의 일본 유학 시절 3학년 시기의 주소를 도쿄 길상사 1875 번지[9]에서 살았던 것으로 잘못 추정했기 때문이며, 이는 훗날 공식적 문서를 통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길상사는 "나는 백석의 연인이었다"고 주장했던 김영한(김자야)이 말년에 전재산 1,000억원을 기부하여 지어진 절의 이름으로, 길상사라고 잘못 알려져 있던 백석의 거주지를 참고해 절 이름을 정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백석의 일본 거주지로 알려져있던 길상사[10] 역시 실제 절 이름이 아니다.
백석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세기 시인에 연구 결과에 따라, 일본 유학 당시 백석의 정확한 실제 주소가 알려지게 된다. 실제 백석의 3학년 시기 거주지는 도쿄 센다가야 정(町) 167, 조일옥(朝日屋)[11]이었다고 한다. 이는 아오야마가쿠인대학 학적부와 동창회부를 통해 확인되었다.
4. 회사 생활
신문에 실린 백석의 모습 (1937년) |
백석은 신문사에서 결벽증이 심한 멋쟁이로 통했다. 남들이 20~30전짜리 양말을 신을 때 1원이 넘는 양말을 고집했고, 최고급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었다. 결벽증에 가까운 기질 탓에 그날 입을 옷 한 벌, 양말 한 짝도 허투루 고르지 않는 사람이 바로 백석이었다. 지저분한 식당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았고, 전화를 받을 때는 손수건으로 수화기를 감싸서 통화했다. 주변에서 힐난의 눈치를 보내면 "여러 사람의 손과 입김이 닿은 것이니 어쩔 수 없다"고 대꾸했다. "얼굴색은 거무스레했는데, 스타일은 여간한 모던보이가 아니었다"고, 문학평론가 백철은 나중에 쓴 글 <1930년대의 문단>에서 회상했다.
백석은 1935년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해 드디어 시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출판부로 자리를 옮겨 잡지 <조광> 창간에 참여해 발간 1주일 만에 3만부 매진되는 성공을 거뒀다. 백석은 <조광> 창간호에 수필 「마포」를 발표했다. 잡지 편집자로 인정받은 백석은 <조광>에 이어 <여성> 창간 작업에도 투입되었다.
1936년 1월 20일, 백석은 틈틈이 쓴 시를 모아 첫 시집《사슴》을 자비로 간행하였다. 백석이 신문사 번역 일을 하는 틈틈이 준비한 초기작 33편을 담은 시집으로 문단으로부터 호평을 받는다. 당시 시인과 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를 지내던 김기림이 조선일보에 서평을 실었다. "<사슴>의 세계는 그 시인의 기억 속에 쭈그리고 있는 동화와 전설의 나라"라면서도 "주착없는 일련의 향토주의와는 명료하게 구별되는 '모더니티'를 품고 있다"고 평했다.
당시 《사슴》의 가격이 2원이었는데, 다른 시집과 비교하였을 때 2배 가량 더 비싼 가격이었다. 그때 쌀 가마 가격이 13원, 고급 양복이 30~40원이었으니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선광 주식회사 혹은 선광인쇄 주식회사에서 100부 한정판으로 찍어내어, 나중에는 구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12] 신경림의 경우 우연히 헌책방에서 《사슴》을 구하게 되었을 때[13] 매일 품에 안고 다니면서 줄줄 욀 정도로(!) 몇 번이고 읽고 다녔고[14] 윤동주의 경우 아무리 찾아봐도 시집을 구할 수 없어서 연희전문학교 도서관에서 노트에 시를 베껴 적고 다녔다고. 당시 <사슴>이 구하기 어려운 책이라 많은 문인 및 팬들이 필사본을 만들어 애독하거나 선물했다고 한다. 노천명의 시 <사슴> 역시 백석의 별명이기도 한 <사슴>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이 시집의 가격이 비싼 이유는 두꺼운 흰색 표지에 내지와 본지 모두 전통 한지를 사용하였고, 자루매기[15] 방식으로 양장제본하여 출판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비싼 책의 대부분을 증정용으로 썼다. 일단 출판기념회에 회비 1원을 내고 참석한 손님들 모두에게 친필 서명한 <사슴> 20여권, 그리고 몇몇 학교 도서관에 증정, 참석 못한 친우 및 선배들에게 또 증정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서점에서는 찾아볼래야 볼 수 없었던듯 하다. 표지는 정지용의 시집이 출간된 것을 보고 백석도 따라 아무 그림 없이 두꺼운 하얀 표지 위에 <사슴>이라고만 썼다.
1937년 백석은 「통영(統營)」, 「오리」, 「탕약(湯藥)」, 「연자ㅅ간」, 「황일(黃日)」 등을 조선일보에 발표하고 1937년 <조광>에 「함주시초(咸州詩抄)」 연작시를, <여성>에 산문 「가을의 표정-단풍」을 발표한다.
5. 시인 활동
1937년 겨울, 2년간 묶여 있던 신문사 교정직을 버리고, 본격적으로 시를 쓰고자 함경도로 내려간다. 그는 이때의 전후 상황을 같은 해 9월 조선일보에 게재한 산문 「가재미. 나귀」라는 글을 통해 밝힌다. 여행을 즐기던 그는 이 무렵 여러 고장을 돌아다니며 고유의 민속, 명절, 향토 음식 같은 갖가지 풍물과 방언 등을 취재해 시에 담아낸다. 이런 풍물과 방언은 특히 「남행시초(南行詩抄)」를 기점으로, 이후 해마다 나오는 백석의 기행시 형식의 연작시에서 잘 표현된다.1938년 백석은 함경남도 함흥시의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와서 다시 <여성>의 편집을 맡는다. 그는 같은 해 <조광>에 「산중음(山中吟)」 연작시와 「물닭의 소리」 연작시, <삼천리문학>에 「석양」, 「고향」, 「절망」, <여성>에 「설문답」, 「내가 생각하는 것은」, 「가무래기의 약(藥)」, 「멧새 소리」 등을 발표하고, <현대문학전집>에 「외가집」, 「개」와 <조선문학독본>에 「고성 가도(固城街道)」, 「박각시 오는 저녁」 등을 수록한다.
중일전쟁 이후 승전국인 일본제국의 괴뢰국인 만주국(滿洲國)이 건국되며 일본 제국(日本帝國)이 승승장구하며 동아시아의 지배자로 군림할 것임을 예상했던 조선의 문인 및 예술인들은 춘원 이광수를 필두로 하는 조선작가협회를 창립하고 본격적인 친일행위에 가담하게 되고, 조선일보의 사장 방응모 또한 일제에 군자금을 상납하며 적극적인 친일행위에 가담하게 된다. 이때 유명 시인이었던 백석에게도 조선작가협회에 참여하라는 권유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백석 본인은 오히려 발표한 「북관(北關)」 이라는 시에서 '얼근한 비릿한 구릿한 이 맛 속에선 까마득히신라(新羅) 백성의 향수(鄕愁)도 맛본다' 라는 구절과 「북신(北新)」 이라는 시에서 ' 나는 문득 가슴에 뜨끈한 것을 느끼며 소수림왕(小獸林王)을 생각한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을 생각한다' 라는 구절을 넣어 발표하는 패기를 보여준다. 이후 적극적으로 1939년 조선일보에 산문 「입춘」과 연작시 「서행시초(西行詩抄)」와 시 「안동」을, <문장>에 「함남도안(咸南道安)」, 「동뇨부(童尿腑)」, 「넘언집 범 같은 노큰마니」 등을 내놓은 그는 1940년 <조광'에 「목구(木具)」, 「북방에서」, 「허준(許俊)」 등을 발표한다.
1940년 1월 만주 신징(新京)[16]에 도착한 백석은, 먼저 시영주택 황씨방(黃氏方)에 방을 얻는다. 곧이어 친구들의 도움으로 만주국 경제부에 자리를 얻고, 시작(詩作)과 직장 일을 충실히 병행한다. 당시 친구와 함께 살던 황씨방은 토굴이나 마찬가지여서, 주말마다 그는 근교의 '러시아인 마을'로 방을 얻으러 돌아다닌다.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에서 근무하게 된 백석의 업무는 측량 보조원이었다. 당시 국무원은 대(大)신경 건설을 위해 러시아어를 할 수 있는 측량사를 고용하고 있었기에 특채로 들어간다. 백석은 사범학교에 이어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시절에도 러시아어를 배웠다지만, 통역을 직업으로 삼은 만큼 러시아어에 통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백석은 러시아 마을에 머물며 러시아인에게 러시아어를 배웠다. 낮에는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의 통역으로, 밤에는 관성자에서 러시아어 습득에 매진하던 백석은, 시간을 쪼개 테스까지 완역한다. 이런 일로 북만주 두메산골의 원시 부족 사람들과도 얼굴을 익히게 되고, 밤이면 시 1백 편을 건지려고 시작에 몰입하였다.
1940년 백석은 <인문평론>에 「수박씨 호박씨」를 발표하고, <조광>에 토머스 하디 원작의 「테스」를 번역해 발간하고, 이듬해에는 생계를 위해 만주에서 측량 보조원과 측량 서기로 일한다. 1941년 그는 <조광>에 시 「국수」, 「흰 바람벽이 있어」, 「촌에서 온 아이」, <인문평론>에 「두보(杜甫)나 이백(李白)같이」, 「귀농(歸農)」 등을 발표한다.
1942년 만주 안둥(安東)의 세관으로 직장을 옮기고 엔 패아코프의 원작 소설 「밀림 유정」을 번역한다. 한편, 그가 만주에 있는 동안 동료 김소운은 백석의 시 「산우(山雨)」, 「미명계(未明界)」 등 7편의 작품을 일본어로 옮겨 '조선시집'에 싣는다.
해방 후 평안북도 신의주시로 귀국했다가, 고향 정주군으로 돌아온 백석은 그곳에서 남북 분단을 맞았고 자연스레 북한 사람이 되었다. 당시 백석은 신의주에서 얼마 동안 머물다가 고향 정주로 갔고 1947년 <신천지>에 「적막 강산」, <신한민보>에 「산」을 발표하고, 1948년 <신세대>에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학풍>에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문장>에 「칠월 백중」 등을 발표한다.
그는 월북 시인으로 규정돼 출판금지 대상이 됐다가, 1988년 납북·월북 작가 해금 조치가 되며 문학사에 복귀했다. 이후 백석의 시는 시선집이 처음 나온 이래 문단과 학계의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활발히 조명되기 시작한다. 해금 이후 그와 관련된 연구 논문만 600편이 넘는 것만 봐도 그 관심을 알 수 있다. 백석의 첫 시집 《사슴》은 2005년 <시인세계>가 시인 156명을 대상으로 지난 100년 동안의 시집 중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시집이 무엇인지 설문 조사했을 때 1위를 차지했으며, 2000년대에도 관심이 지속되며, 2012년 백석 탄생 100주년을 맞아 <백석문학전집>(총 2권)이 발간되었다.
6. 북한 잔류
8.15 광복 후 스승 조만식의 부름을 받고, 평양에 머무르면서 비서 겸 러시아어 통역으로 조만식을 도왔다.# 후배 고정훈이 백석에게 2차례 월남을 제안했으나, 다음과 같은 이유로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1. 고당 조만식 선생을 모셔야 한다.
2. 처 그리고 큰아들 화제만 데리고 혹은 혼자만 못 간다. 다른 가족과 친지가 너무 많아 월남하면 남은 가족 친지가 고초를 겪을 것이다.
3. 가족 친지 모두 터전이 북에 있는 서민이다. 모두 같이 간다 해도 남에서 생활 터전이 없어 더 힘들지도 모른다.
4. 이젠 감시가 심해 가고 싶어도 못 간다.[17]
2. 처 그리고 큰아들 화제만 데리고 혹은 혼자만 못 간다. 다른 가족과 친지가 너무 많아 월남하면 남은 가족 친지가 고초를 겪을 것이다.
3. 가족 친지 모두 터전이 북에 있는 서민이다. 모두 같이 간다 해도 남에서 생활 터전이 없어 더 힘들지도 모른다.
4. 이젠 감시가 심해 가고 싶어도 못 간다.[17]
그의 시 세계에서 가족과 친지, 그리고 고향이 의미하는 바가 남달랐음을 생각하면, 월남이 어려웠을 처지가 충분히 짐작된다.
조만식이 연금당한 이후로는 러시아 문학 번역과 아동문학(특히 동시)에 천착하며 정치와는 거리를 두었다. 6.25 전쟁 중 서울이 북의 손에 떨어지자 월북한 문인들이 서울로 와 정치 선동에 참여[18]했지만, 백석은 일절 참여하지 않았다. 이 때가 1년에 10권씩 번역하던 시기, 그것도 최고 수준으로 번역했다는 평이 중론이다.
7. 말년
1958년 김일성 정권의 문예정책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자아비판을 강요당한 뒤 양강도로 추방됐다. 전후 동시에 집중하는 과정에 '붉은 편지 사건'으로 고난을 겪게된 것이다. 즉 "사상과 함께 문학적 요소도 중요시하자"는 주장을 했다가 숙청당해 추방된다. 1959년 6월 '부르주아적 잔재'로 비판받고 외지고 험한 지방인 양강도 삼수군[19]의 협동농장 축산반(양치기)으로 쫓겨났으며, 1962년 이후로는 아예 북한 문단에서 사라졌다.삼수군에서는 양치기와 농사를 했으며, 그 솜씨가 너무 형편없어 웃음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부인 이씨의 증언에 따르면, 밤새도록 밭에 나가 연습을 해서 나중에는 능숙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평양에서 유명한 시인이 왔다"는 소문이 퍼지고, 백석의 훌륭한 인품[20]을 겪어본 사람들이 백석에게 자녀들의 교육을 맡겨서, 많은 젊은이들의 문학 관련 교육에 힘썼다고 한다. 또한 지역 당국도 그러한 백석을 그냥 내버려 뒀다고 한다.
이 시기 백석이 북한 문학계에서는 완전 잊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친우들은 여전히 그를 삼수군까지 와서 백석을 찾았다고 한다. 특히 친우인 허준은 당국의 눈치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장 많이 백석을 찾아와 그들의 우정을 과시했다고 한다.
그 후 1996년[21] 사망하기까지의 반평생에 대해서는 알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다.#[22]
소수의 증언에 의하면, 나중에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문학창작지도에 나섰는데, 개중에 재능을 인정받은 이도 있다고 한다. 거창한 삶을 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간다든가 하는 비참한 삶을 산 것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죽는 날까지도 북한 문단에 공식적으로 돌아오지는 못했다.[23] 백석이 1990년대까지도 생존했음에도 백석의 근황이 알려지지 못한 것은 이러한 이유가 컸다.
1980년대 중반, 양강도 삼수군에서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백석의 옆이 부인 이윤희, 뒤에는 차남 중축과 막내딸 지제. 좌측은 그의 공민증 사진이다. |
또한 1996년은 고난의 행군 때라 노령에 제대로 된 영양 공급을 받지 못하여 죽은 것이 아닌가 하는 얘기도 있다. # 다만 아내 리윤희는 "남편(백석)은 노환으로 숨졌다"고 증언했다. 다만 사망 열흘 전 감기에 걸려 고생하다가 갑자기 사망했다고. 이 부분은 북한 당국을 의식한 증언일 수도 있으니 적당히 이해해야 할 듯 하다.
다만 무작정 음모론을 제기하기는 힘들다. 당시 만으로도 83세였던 백석 시인의 당시 연령을 감안하면, 급성 폐렴 등의 질환이 와서 지병과 합병증이 발생하여 급속도로 건강이 악화되어 타계하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물론 이런 경우라도, "춥고 살기 힘든 지역이라 83세인 고령인 백석 시인의 면역력이 저하되어 병세가 더 빠르게 악화되었다"는 추론 역시 가능하다. 즉 이 정도 시인을 살기 열악한 지역에 낙향하게 만들고 정권찬양을 노골적으로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게 정책의 가혹함까지는 논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양공급 관련해서는 북한 내에서도 살기 힘든 지역이었다는 점도 동시에 고려해보고, 고령자들의 직접적인 주요 사망원인 중 하나가 폐렴합병증임도 동시에 고려해보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북한 기준으로는 장수한 걸 생각해보면, 숙청당했다고는 해도 북한 기준에서 '숙청당한 사람들' 중 온건한 대우를 받았다는 추정 역시 가능하다.
북한에서 쓴 글을 보면 조선로동당을 찬양하는 시를 쓴 것이 많다. 남한에서 구할 수 있었던 글들이 <백석문학전집(전 2권, 서정시학, 2012년)>에 수록되어 있다. 그런 체제 찬양시들을 읽어보면 이게 문장은 백석 시인이 맞긴 맞는데, 백석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질이 낮다. 서정성을 나타내려 고심한 흔적이 보이는 시에서도, 결국은 당이 어떻고 하는 구절을 집어넣어 버렸다. 역시 강요로 작품을 뽑아낼 수는 없는 듯. # 아동문학 평론에서는 "사상만이 아니라 문학성 자체에 대해서도 중점을 두자"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하였는데, 정황상 바로 그 직후에 숙청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월북 작가로 취급받긴 했지만 이북 태생이고 조선일보 재직 시절 및 일본 유학시절을 제외하면 쭉 이북에서 살았기에, 원래 고향이 이북인 사람을 월북 작가로 취급하는 것은 다소 어폐가 있다. 즉 일제강점기에 이북에 태어나서 살았던 백석이기에 해방 후 갑자기 북한 공산주의를 선망하거나 북한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것. 즉 원래 고향이 이북인 것에 더해 주위 상황으로 인해 이북에 잔류했다고 보는 것이 더 맞다. 실제로 문학 학계에서는 백석을 '월북' 작가로 분류하기보다는 '재북(在北)' 작가로 분류하기도 한다. 백석 외에도 이렇게 고향이나 활동 장소가 북부 지방이어서 여러가지 사정으로 북한 지역에 남게 된 인사들이 자진 월북으로 도매금당한 사례가 있다.
[1] 자는 용삼(龍三), 이후 백영옥(白榮鈺)으로 개명했다.[2] 종3품 인동도호부사(仁同都護府使)를 지낸 이양실(李養實)의 딸이다.[3] 오산중학이라는 교명은 1930년대 내선일체 정책 강화로 일본인 학교와 조선인 학교의 학교 명칭을 통합하면서 바뀐 이름으로, 백석 재학 당시에는 오산고등보통학교라는 이름을 쓸 때였다. 화가 이중섭이 백석의 후배였다. 물론 1929년에 입학했기 때문에 서로 알았을 리는 없었겠지만, 백석의 시를 감명 깊게 읽었다고 전해진다.[4] 김소월 시인이 백석의 선배였다. 백석보다 6년 앞서 오산고보에 재학했던 김소월을 김억이 교사로 지도했었는데, 1939년 소월에 대한 기사를 쓰기 위해 백석이 김억을 직접 찾아가 그의 습작노트를 받아왔다고. 나중에 백석은 <여성>이라는 잡지에 소월의 습작 <제이 엠 에스>를 지면에 싣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소월이 백석으로 하여금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도록 간접적인 영향이 되었지만, 백석이 선배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소월은 민요의 4/4조 운율을 시에 적극적으로 사용했지만 백석은 이보다는 오히려 시의 서사적 구성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5] 당시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졸업 성적 10등 안에 들면 무시험 입학이 가능했다.[6] 백석의 부친은 한때 조선일보 사진부에서 일했는데, 동향 사람인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와 친구 사이였다고 한다. 방응모와 백석의 밀접한 관계는 시 「고향」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백석과 의원이 말하는 아무개 씨가 바로 방응모로, 백석 본인이 시에서 '아버지같이 섬기는 분'이라고 대답한다.[7] 1929년 12월 10 탈고한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1930년 조선일보 신년현상 문예에 당선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계초 방응모가 장학금 월 60원을 지급하게 된다.[8] 아오야마가쿠인은 외국인 선교사가 설립한 미션스쿨이었기에 일본 정부의 지원금이 매우 적어서, 학비가 비쌌다.[9] 아오야마가쿠인대학까지 차로 30분 거리[10] 에도 시대에 스이도바시 근처에 있었던 '스와 산 기치조지'(諏訪山吉祥寺)라는 절 이름에서 유래한 지명이나, 실제 절은 아니다. 스와산기치조지가 화재로 유실되고 근처 살던 사람들 소개되면서 현재 위치로 옮겨와 지명을 기치조지, 즉 길상사로 지었다 한다.[11] 현재의 시부야구 신주쿠 교엔 근방. 아오야마가쿠인대학까지 대충 걸어서 20~30분 거리.[12] 2014년에는 온라인 경매가가 5,500만원부터 시작되어 7,000만원에 낙찰되었다. 기사. 낙찰자는 장인제약 지경환 대표 기사[13] 6.25 전쟁 와중이라 수많은 장서들이 헐값에 매매되던 시기이다. 당연히 신경림도 장서 더미 속에서 <사슴>을 발견, 참고서 1권 가격 정도에 샀다고 한다.[14] 안타깝게도 나중에 박정희 정부 치하 집이 압수수색당했을 때 책 40권을 압수당했는데 그 중에 《사슴》이 있었다고 한다.[15] 종이의 한 면에 두 페이지를 인쇄하여 반으로 접어 한쪽을 실로 묶는 방식. 단면으로 보면 자루 같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16] 現 중국 길림성 장춘시.[17] 실제 백석은 유명하여 감시가 붙었을 것이다.[18] 백철의 회고에 따르면, 문인 중 오장환 같은 이는 평소 친했건 아니건 정치적으로 맞지 않은 문인들을 처벌하고 싶어 안달했다고 한다.[19] 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삼수갑산은 김소월의 시에서 등장하는 것처럼 무척 외진 곳이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도 알 수 있다. 중죄인의 유배지로도 유명했기 때문. 실제로도 산으로 둘러싸여 무척 험한 곳으로 유명하다.[20] 하루에 동일한 사람을 10번 만나더라도 손을 가슴에 얹고 정중히 인사했다고 한다.[21] 1963년 사망설이 있었으나, 최근 연구를 통하여 1996년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22] 백석 연구자 송준은 해금 이후 백석 연구에 몰두하며 일대기 1~2권을 냈다가, 1963년에 숙청당했다는 백석이 살아 있음을 1994년에 알게 된다. 중국에서 백석의 아내 이윤희를 직접 만났다. 이후 살아 있는 백석에게 해가 될까 봐 출간 계획이 있었던 일대기 3권 계획을 접고 1, 2권까지 절판시켰다.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은 후에도 꽤 나중에야 3권을 포함한 일대기를 냈다고. #[23] <나루터>라는 김일성을 찬양하는 시를 썼다. 그런데 아래도 언급되지만 백석의 시가 맞냐 싶을 정도로 형편없다. 고의성이 다분한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