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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명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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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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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c5b356> 고구려 제21대 태왕
문자명왕 | 文咨明王
[1]
파일:Tomb of King Dongmyeong.jpg
문자명왕릉으로 추정되는 동명왕릉 전경.
출생
(음력)
<colbgcolor=#fff,#1c1d1f>430년대 추정[2]
고구려 평양성
사망
(음력)
519년 (향년 80대 추정)
고구려 평양성
능묘 동명왕릉(東明王陵) (추정)[3]
한왕묘(漢王墓) (추정)
재위기간
(음력)
고구려 왕태손
연대 미상 ~ 491년 12월
고구려 제21대 태왕
492년 1월 ~ 519년 (2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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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고(高)
나운(羅雲) / 나운(亽雲) / 운(雲)
부모 부친 고조다
모친 미상
왕후 고흥안의 모후
자녀 2남 1녀
태자 고흥안
왕자 고보연
왕녀 안학공주[4]
종교 불교
시호 문자명왕(文咨明王)
명치호왕(明治好王)
문자명치호태왕(文咨明治好太王)
작위 사지절 산기상시 도독영평이주제군사 정동대장군 낙랑공[5] 남제 }}}}}}}}}

1. 개요2. 전성기
2.1. 최대 영토로 확장2.2. 불교 정책
3. 실패가 거듭된 대외 정책
3.1. 상실되는 주변국 통제력3.2. 지지부진한 남진정책3.3. 외교
4. 평가5. 《삼국사기》 기록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고구려의 제21대 태왕. 《삼국사기》 기록상으로는 한국사에서 두 번째로 태손(太孫)으로서 성장했다.[6]

삼국유사》 〈왕력〉에는 '명리호(明理好)', '나운(亽雲)', '고운(高雲)'이라는 이름이 전하고 있다. '명리호'는 문자명왕의 별호인 '명치호왕'에서 고려 제6대 임금인 성종의 이름 '治(치)'를 피휘한 것이다. '고운'은 이름인 고나운에서 나를 빼고 두 글자로 이름을 줄인 중국식 이름으로 보인다. 실제로 중국 사서에서는 문자명왕의 이름이 운(雲)으로 축약 표기되었다.

고구려의 공식 시호는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처럼 길었을 가능성이 큰데 문자명왕, 명치호왕 등의 명칭은 '◯강상 문자 명치 호태왕(◯岡上 文咨 明治 好太王)' 같은 형식의 축약일지도 모른다.[7] 시호에 들어가는 好 글자는 岡上과 짝지어 등장하기 때문.

장수왕의 아들인 고조다(高助多)의 아들이었다.[8] 아버지인 고조다가 할아버지인 장수왕보다 먼저 죽어버려서[9] 손자인 나운이 장수왕의 뒤를 잇게 되었다.[10]

2. 전성기

교과서 등에서는 흔히 고구려전성기가 문자명왕의 치세까지 유지되었다고 나온다. 하지만 기록들을 보면 문자명왕 말년부터 서서히 쇠퇴기에 접어드는 모습이 보이기도 하여 6세기 중반 고구려 침체기의 근원을 이때부터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2.1. 최대 영토로 확장

문자명왕 대에 북부여를 흡수하면서 고구려가 최대 영토를 일구었다고 보는 시각이 학계에서도 제기되지만 반론도 있어 확실하지는 않다. 영토를 확장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물길의 침략으로 쫓겨난 부여의 유민을 받아들인 것이며 부여 영역의 회수는 이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이후 《당서》에 고구려 국경이 기존 2,000리에서 동서 3,100리로 확장되어 요서조양(朝陽, 영주)에 접했다는 기록이나 《통전》, 《태평환우기》에 수나라 시절 고구려 영토가 동서 6,000리였다는 기록 등이 전해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전성기 이후에도 고구려가 영토를 확장했다고 보기도 한다.[11][12]

2.2. 불교 정책

을 제법 세웠다. 평양 대동강변에 금강사(金剛寺)를 창건하여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북한 학자들은 금강사가 아마도 청암리 사지에 있는 절과 동일할 것이라는 추측을 하고 있다. 어쩌면 증조할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정책을 이어받았을 것이며, 장수왕이 그를 교육할 때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알려주기 위해 평양에 자주 데리고 갔었을 것이다.

3. 실패가 거듭된 대외 정책

3.1. 상실되는 주변국 통제력

물길에게 북쪽 변방이 그대로 쓸려나갔고, 거란 등에 대한 통제가 점차 약해지는 상황이 조공 기록에서 드러난다. 특히 《위서(魏書)》와 《북사(北史)》에 기록된 북위의 8대 황제인 세종 선무제와 고구려 사신 예실불(芮悉弗)의 대화를 보면 부여가 물길에게 쫓기고 섭라(涉羅)[13]가 백제에 병합되어 고구려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바람에 그들이 생산하는 황금과 옥이 조공 품목에서 빠졌다고 하자 이를 두고 세종이 “니네 구역은 너네가 잘 관리해야 할 거 아냐!”[14]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이는 광개토대왕-장수왕대에 비해 주변 국가들에 대한 통제력이 점점 약화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고구려는 대대로 큰 나라의 도움을 받아 외국을 다스리고 오랑캐의 교활한 무리들을 모두 정복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보물이 줄어들어 우리를 부끄럽고 창피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누구의 잘못인가? 지난날 조공이 충실하지 못한 책임은 지방의 관리한테 있는 거지. 그대는 나의 뜻을 문자명왕에게 전달하여 위엄과 회유의 책략을 잘 사용하여 나쁜 자들을 없애고, 동방의 백성들을 편안케 하여 부여섭라가 각각 옛 땅으로 돌아오게 하여[15] 토산물의 공납을 지키라고 하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문자명왕

3.2. 지지부진한 남진정책

장수왕 재위 후반기의 남진 정책도 그대로 계승했다. 다만 장수왕의 후광에 미화되는 경향이 있어서 그렇지 정작 기록에 나와있는 남진과 관련된 업적은 생각보다 적은 편이다.

500년 이전까지는 장수왕 시절부터 매년마다 신라를 연례 행사처럼 공격하더니 신라 지증왕이 즉위하는 500년부터는 갑자기 40여 년간 신라와의 전쟁이 뚝 끊겨버리는데, 기록상 뭐라고 나오는 건 아니지만 뜬금없이 전쟁이 중단된 것은 양국이 일종의 휴전을 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16] 이후 문자명왕은 신라보다는 백제 공격에만 힘을 쏟았다. 그러나 이 마저도 512년 9월 전쟁에서 무령왕에게 패배한 뒤로는 전쟁을 오랫동안 하지 않았다.

이때쯤 백제무령왕이라는 걸출한 중흥 군주가 나타나 국정을 진두지휘하기 시작하면서 단순 1:1조차 서서히 버거워지는 형국으로 고구려가 몰렸고, 신라도 예전에는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면 백제에 지원군을 보내곤 했지만 지증왕부터 진흥왕 이전까지는 백제에 지원군을 보낸다거나 하지도 않았다. 즉 예전에는 백제와 신라가 힘을 합쳐야 고구려를 겨우 막았는데 이젠 백제 혼자서도 고구려에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521년 11월에 〈무령왕 본기〉에는 백제가 여러번 고구려를 격파하여 비로소 그들과 우호관계를 맺고, 다시 강국이 되었다.라는 기록이 등장한다. 한마디로 고구려의 위세가 이전에 비해 상당히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아래는 문자명왕 치세에 벌어진 고구려와 나제동맹간의 전투다.
이처럼 수차례 남쪽을 침공했지만 확실한 승리가 기록된 것은 497년 8월에 우산성을 함락한 것 하나뿐이다.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말갈의 침공이 고구려의 계획이었다고 가정하더라도 506년 7월에 백제의 고목성에서 승리를 거둔 거 하나가 더해질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은 안장왕의 즉위 및 백제에 대한 공세 전환으로 인하여 또 다시 백제가 밀리는 형국이 된다.[17]

3.3. 외교

북위, 제나라, 양나라와는 대체로 친선 외교를 지속했다. 할아버지의 외교 정책을 계승한 것이다. 장수왕이 유언으로 중국과의 외교를 잘 맺어 백제ㆍ신라ㆍ가야를 늘 경계하라고 당부했었을 것이다. 거란의 기병을 이용하여 북위의 변방을 약탈하기도 했다. 그런데 문자명왕이 죽자 북위의 영태후는 동당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그외 《일본서기》에 따르면 고구려 사신이 왜국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일본서기》에서 처음으로 고(구)려 사신이 등장한 것이다. 아마 이때 처음으로 왜국과 "긍정적"인 접촉이 이루어진 듯하다.
무인(14일) 백제가 작막고(灼莫古) 장군과 일본의 시나노노 아히타(斯那奴 阿比多)를 보내었는데 고(구)려의 사신 안정(安定) 등이 따라와 내조(來朝)하여 우호를 맺었다.
일본서기》, 514년 9월

4. 평가

무색무취한 태왕, 전성기를 무난히 유지한 태왕으로 보이지만 적은 사료로도 상당히 많은 문제를 내재한 군주라고 평가받을 만하다. 사실 후대인 안장왕이 깔끔하게 뒤처리를 하며 전성기를 유지시켰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전성기가 백제처럼 광개토대왕장수왕 단 2세대로 끝나버렸을 수도 있었다.

이렇게 선대 왕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박한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외정에서 북방, 남방을 가리지 않고 실책을 거듭했기 때문. 북방의 기마 민족들인 물길, 거란과 남방의 농경 국가인 웅진백제동성왕, 무령왕과 같은 중흥 군주들에게 힘에서 밀리기 시작했으며 특히 백제와 1:1에서 밀리기 시작한 게 문자명왕의 시대였다. 덕분에 장수왕 시기에 차지한 한강 유역을 일시적으로 빼앗긴 것으로 추측되는 사료들도 나오며 장수왕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추진되던 남진 정책이 중단된 것 또한 문자명왕의 시기였다.[18] 또한 지지부진한 외정의 결과 주변의 장악력도 장수왕 시기에 비해 떨어졌고 고구려의 국력이 이전과 같지 않음을 보여주고 말았다.

이 이후 안원왕 말기부터 평원왕 초반까지 고구려는 침체기에 접어들게 된다.

동국통감》의 평가는 평범한 치세를 지닌 왕으로 평가했다.
"문자(文咨)·안장(安藏)·안원(安原)은 모두 중재(中材)로서 평범한 군주였으며,(후략)"

5.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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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문자명왕 본기〉
一年 문자왕이 즉위하다
一年春三月 북위 효문제가 왕의 즉위를 축하하다
一年夏六月 북위에 조공하다
一年秋八月 북위에 조공하다
一年冬十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다
三年春一月 북위에 조공하다
三年春二月 부여항복해오다
三年秋七月 신라·백제와 전투를 하다
三年 남제가 문자명왕에게 벼슬을 주다
三年 북위에 조공하다
三年冬十月 겨울에 날씨가 따뜻하여 꽃이 피다
四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四年春二月 큰 가뭄이 들다
四年夏五月 북위에 조공하다
四年秋七月 남쪽 바다에 제사를 지내다
四年秋八月 백제를 공격하니 신라가 백제를 돕다
五年 남제가 왕의 벼슬을 올려주다
五年秋七月 신라 우산성을 공격하였으나 니하에서 반격을 당하다
六年秋八月 신라 우산성을 빼앗다
七年春一月 흥안을 태자로 책립하다
七年秋七月 금강사를 창건하다
七年秋八月 북위에 조공하다
八年 백제인이 기근으로 투항해오다
九年秋八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年春一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年冬十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一年秋八月 농작물에 병충해가 발생하다
十一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 사상자가 발생하다
十一年夏四月 양 고조가 왕의 벼슬을 올려주다
十一年冬十一月 백제가 침입하다
十一年冬十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二年冬十一月 백제가 수곡성을 침략하다
十三年夏四月 사신이 북위를 방문하여 황제를 면담하다
十五年秋八月 사냥을 하다
十五年秋九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五年冬十一月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눈과 추위로 인해 실패하다
十六年冬十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六年 백제를 공격하다
十七年 양이 조서를 보내 문자명왕의 벼슬을 올려주다
十七年夏五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七年冬十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八年夏五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九年夏閏六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九年冬十一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十一年春三月 양에 조공하다
二十一年夏五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十一年秋九月 백제 가불· 원산 두 성을 빼앗다
二十二年春一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十二年夏五月 북위에 조공하다

조공 기록이 전체의 절반이다. 다만 이걸 가지고 '문자명왕은 고구려의 자존심 같은 건 내던져 버린 건가요?' 라고 생각하면 곤란한데, 삼국시대에는 외교 사절도 조공 사절이라는 이름으로 파견했기 때문이다. 즉, 조공을 많이 바쳤다는 건 그만큼 외교에 적극적이었다는 뜻도 된다. 상기된 항목에서 장수왕의 뒤를 이어 북위와 친선 관계를 계속했다는 부분이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19][20][21]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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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왕실의 계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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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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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자명태왕"이라는 호칭이 맞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는데, "명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유리명왕이 이전에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명왕", "신왕", "양왕" 등의 호칭이 태왕과 구분되는 다른 군주의 호칭이었는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중이다. 다만 장수왕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호칭과 구분되게 장수태왕의 호칭을 쓴 것이 거의 확정적으로 비정되는 중이다.[2] 장수왕의 손자이지만 장수왕이 97세까지 장수했고 장수왕 승하 시점에 고조다가 살아 있었다면 80세 전후였을 것이기에 그 역시 즉위할 당시엔 50~60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문자명왕 역시 80대 이상까지 장수했던 것이다.[3] 고려시대에 동명성왕의 릉으로 전해지던 능묘이나 문자명왕의 왕릉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4] 신채호의 《조선상고사기록.[5] 使持節·散騎常侍·都督營平二州·征東大將軍·樂浪公, 고구려왕은 생략되었다고 본다. #[6] 한국사 최초의 태손은 신라조분 이사금.[7] 《고구려의 태왕호와 태왕가인식의 확립》(시노하라 히로가타, 2004), 《고구려 태왕호의 제정과 국강형 왕릉입지의 성립》(여호규, 2010)[8] 고조다는 고추대가라는 직책을 겸직했는데 이는 왕족 가운데서도 최상위 호칭으로, 고구려가 졸본성-국내성의 도시 국가에서 영토 국가로 성장하면서 흡수한 세력들의 호칭을 태왕 아래에 일원화시키면서 등장했다. 고구려가 5부족 체제였을 때는 왕족인 계루부와 전왕족인 소노부, 왕비족인 절노부의 수장을 고추가라고 해서 별도의 조직을 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계루부의 최고 수장은 당연히 왕이니까 정통 계승자가 고추가의 자리를 차지했다. 신라갈문왕이나 백제의 길사와 같이 왕권에 버금가는 세력의 흔적인 것이다. 태자라는 공식 직위와는 별도로 붙는 타이틀로서 영국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비슷하게 볼 수도 있다.[9] 고조다가 요절한 것은 아니고 장수왕이 현대인 기준으로도 워낙 오래 산지라... 그리고 당시 평균 수명을 생각하면 고조다도 나름 오래 산 편이다.[10]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 스웨덴의 칼 16세 구스타프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나서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되었다. 단, 구스타프 아돌프 왕자의 경우 왕세손 시절에 비행기 사고로 요절했다.[11] 북한의 경우에는 이 기록을 역사 부도에 적극 반영하는 편이라 남한의 고구려 강역 표시랑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학계에서는 한국사로 취급하는 왕조 중 역대 강역이 가장 컸던 나라로 척박한 연해주 땅이 많기는 했지만 발해를 추정하는 학자들이 많다.[12] 국내에서는 경복대학교 교수, 윤용구 인천도시공사 문화재부장, 윤병모 작가, 정원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 등이 이쪽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들은 고구려 동서 6,000리라는 표현을 거란말갈 방면, 대릉하 하류, 의무려산 이동~연해주 방면으로 뻗은 것으로 보는 편이다. 이정빈은 좀 더 구체적으로 1차 고구려-수 전쟁 이후 수나라가 점차 동진해오면서 요하 하류까지 세력을 넓힌 것으로 보기도 한다. 고구려가 동서 3,100리로 요하를 넘어 영주에 이르렀다는 《신당서》·《구당서》의 기록도 윤용구와 윤병모는 동서 6,000리와 뭉퉁그려서 동북쪽과 서북쪽에 있던 거란과 말갈 방면으로 고구려가 세력을 확장한 것으로 본다.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가 설치한 9주 중에 월희주가 있었는데 발해의 15부 중 회원부, 안원부에 있던 월희말갈로 추정된다.[13] 이병도는 음운상의 유사성을 근거로 섭라를 지금의 제주도 일대인 탐라국으로 비정했으나, 노태돈신라로 비정하면서, 섭라가 백제에게 병합됐다는 기록도 신라가 고구려의 통제에서 벗어나 백제와 연합하던 상황을 나타낸 것이라고 추정했다.[14] 이는 북위가 고구려의 독자적인 세계관을 인정해 준 발언이다.[15] 두 나라를 고구려의 영향권에 다시 넣으라는 말이다.[16] 신라가 지증왕~법흥왕~진흥왕 초반까지 내정 개혁에 집중해서, 그 전엔 삼국시대 2강 1약 중 1약 정도였던 국가에서 백제와 고구려의 체제 및 국력을 따라잡는 국가로 발돋움했다. 신라 왕의 내정 관련 업적이 유독 이 시기에 집중되는 것을 보면 신라가 문자명왕 중반부터 삼국간 소모전에서 갑자기 빠졌다는 해석이 단순히 기록 부족을 넘어 신빙성이 있다.[17] 이러한 기록을 근거로 일각에서는 동성왕 ~ 무령왕 시기에 웅진백제가 다시 밀고 올라와 고구려로부터 한강 유역을 빼앗아 지배권에 넣었지만, 고구려가 다시 공세를 취하기 시작한 안장왕 때 다시 내주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실제로 동성왕에서 무령왕에 이르는 시기 동안 백제가 한강 유역을 지배하였다는 뉘앙스의 기록이 나오며 안장왕과 한씨 미녀 설화에도 웅진백제가 한강 유역 지역인 개백현, 그러니까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까지 태수를 두고 지배했다는 언급이 있다.[18] 고구려에게는 다행히도 다음 대에 안장왕이 다시 국력을 회복해 백제와 전쟁에서 한강 유역을 되찾는 등 영토를 회복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연히 남방에 대한 공세적 기조도 안장왕 때부터 다시 시작되었다.[19] 애초에 조공은 소국이 대국을 섬긴다는 식의 차원을 넘어 동아시아 특유의 상호 외교 및 무역 체제로 보는 것이 더 맞다는 게 현 학계의 중론이다. 명분을 주고 실익을 취하는 것. 때문에 대대로 중국의 북방을 위협했던 흉노돌궐 같은 유목 민족 역시 표면상으로는 중국의 왕조와 조공 관계를 맺었다. 고구려 뿐만 아니라 역대 이민족 국가들 역시 중국의 왕조들과 조공 관계를 맺었고, 국력이 강성했던 시기에는 말이 조공이지 상대적으로 대등한 취급을 하거나 아예 상전 노릇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상국 노릇하던 왕조도 임금마다 성향 차이는 있겠지만, 표현에서 마냥 하대하기보단 굉장히 위하고 사모한다는 식의 공손한 표현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20] 이 부분은 동아시아의 특징이 반영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유럽에서 로마가 로마제국의 발상지였고 교황이 사는 곳이고 중동에서는 메카가 이슬람의 발상지였기에 특별하게 여겨지듯 동아시아에서는 중원이 동아시아 전역에 영향을 끼친 중화문명의 발상지였다. 그런데 중원은 한나라 때부터 거대한 통일제국이 통치하였고 여기서 나오는 경제력도 어마어마했다는 점이 두 지역과 달랐다. 당장에 고대인 한나라 시절부터 이 지역을 차지한 나라들은 인구가 천만 단위였다. 문화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그리고 국력으로도 중원국가는 주변국보다 앞섰고 그러니 중원쪽이 위이고 주변국이 아래일 자격은 충분했다.[21] 반면 로마와 메카의 경우 로마는 카톨릭의 총본산인 만큼 교황의 위세가 높을 때야 어느정도 권위가 섰지만 세속군주들의 힘이 세지며 세속군주에 의해 강제로 교황이 옮겨살거나 교황이고 뭐고 그냥 로마가 약탈당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그나마 있는 권위도 종교개혁이 일어나며 개신교에게서는 무시당했다. 메카의 경우 역시 종교적 권위는 있었으나 메카가 위치한 땅이 전근대 기준으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땅이다 보니 대부분의 이슬람 제국들은 이 가문을 통치하는 하심 가문에게 이 지역을 맡기고 특별히 터치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