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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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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일대기
2.1. 초반부2.2. 알폰소 6세와의 악연2.3. 모타미드(무타민)와의 동맹2.4. 발렌시아 점령2.5. 죽음2.6. 사후2.7. 계보
3. 평가4. 기타5. 미디어6. 관련 항목

1. 개요

엘 치드(El Çid)[1]
(1040(?) / 1043(?) ~ 1099)

중세 스페인의 장군. 본명은 로드리고 디아츠 데 비바르(Rodrigo Díaz de Vivar).[2] 엘 시드는 존칭으로, 아랍어주군 또는 주인이라는 뜻인 سيد (sayyid), 암미야sidi에서 비롯된 말이다. 스페인어 남성 정관사 El을 함께 쓰며, 로마자 알파벳을 쓰는 국가는 저마다 해당 언어의 관사와 함게 Cid를 표기한다. 따라서 프랑스어로는 Le Cid로, 포르투갈어로는 O Cid, 영어로는 The Cid, 이탈리아어로는 Il Cid, 독일어로는 Der Cid 등으로 표기한다.

2. 일대기

2.1. 초반부

정확한 출생연도는 알 수 없고 1040 ~ 1043년생으로 추정된다. 로드리고 디아츠, 즉 엘 시드의 아버지 디에고 라이네스는 카스티야의 소귀족이었고 외가는 넓은 땅을 가진 대귀족이었으므로 엘 시드는 유복하게 자랐다. 엘 시드는 원래 카스티야의 군주 페르난도 1세를 섬겼으나, 1065년 페르난도 1세가 사망할 때 자식들에게 나라를 둘로 나누어 상속했는데, 이 때 형 산초 2세가 다스리는 카스티야와 동생 알폰소가 다스리는 레온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엘 시드는 그 중 형인 산초를 섬기게 되었고 동생인 알폰소는 산초가 다스리는 카스티야로 쳐들어왔다. 하지만 골페헤이라 전투에서 알폰소는 엘 시드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2.2. 알폰소 6세와의 악연

알폰소 6세는 형인 산초 2세에게 거짓 항복을 한 뒤 밤에 골목길에서 같이 만나서 나랏일을 의논하자면서 형을 부른 다음 자신의 부하를 시켜서 형인 산초 2세암살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각종 창작 매체에서는 알폰소 6세를 암살 배후로 취급했으나, 학계에서는 실제 배후는 산초 2세와 알폰소 6세의 누나인 우라카 공주[3]가 그럴듯 하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산초 2세가 암살당하지 않고 병사나 전사로 죽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우라카와 알폰소가 비밀 협약을 맺었다는 의심은 아직도 남아있다.

파일:Jura_de_Santa_Gadea.png
알폰소가 형의 뒤를 이어 카스티야의 왕이 되자 엘 시드는 모두가 보는 광장으로 알폰소를 불렀다. 그리고 알폰소에게 성경에 손을 얹고 자신이 형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만인에게 발표하라고 하였다.

알폰소는 당당하게 이 일을 했다. 사실 엘 시드가 이 일을 한 것은 알폰소가 자신의 형을 죽였다고 국민들에게 반감을 살 것을 우려하여 그를 국민들 앞에서 떳떳한 왕으로 인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폰소 6세는 엘 시드가 자신을 능멸하였다고 생각하였고 그에게 큰 반감을 가진다.

1074년 알폰소의 권유로 알폰소의 조카딸이자 오베이도 백작의 딸 히메나 디아스와 결혼했다. 히메나와의 사이에서 1남 2녀를 봤는데 아들 디에고 로드리게스는 1097년 콘수에그라 전투에서 참전해 이슬람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알폰소 6세는 이러한 혼약으로 회유책을 쓴 다음 엘시드를 어려운 전쟁터로 내몰아 견제도 병행하였다. 한편 톨레도에서 무어인기독교인의 싸움이 일어났다. 왕은 이 곳의 싸움을 진정시키고 이곳을 카스티야의 영토로 선언하라고 로드리고 디아츠[4]에게 지시를 내렸다. 로드리고 디아츠는 이 곳을 진정시켰고 사람들은 그에게 엘 시드라는 별명을 붙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엘 시드에 대한 알폰소의 보답은 엘 시드를 추방하는 것이었다. 엘 시드는 산초 왕에게 받은 세비야의 명마인 바비에카와 자신의 칼인 티소나를 들고 카스티야를 방황하였다. 그의 부인인 히메나와 두 딸 크리스티나와 마리아는 카스티야의 궁전 지하에 감금되었지만 엘 시드에게도 희망은 있었다.

2.3. 모타미드(무타민)와의 동맹

사라고사무어인 영주인 모타미드(무타민)가 그를 후원한 것이었다. 그는 바르셀로나의 백작인 베렝게르를 막아 달라고 엘 시드에게 부탁하였다. 엘 시드는 이 일을 훌륭하게 완수하였고 모타미드에게 카스티야의 왕인 알폰소를 같이 섬기자고 한다. 이로써 사라고사는 카스티야의 영토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카스티야의 신하 중에는 베렝게르 라몬 2세 백작도 있었다. 베렝게르는 모타미드에게 거액의 돈을 요구하였고, 이에 화가 난 모타미드는 북아프리카이슬람 제국 무라비트 왕조의 왕 유수프 이븐 타시핀을 부른다. 유수프가 스페인으로 쳐들어오자 알폰소는 위기에 빠지게 된다. 그는 엘 시드를 불렀고 엘 시드는 군대를 이끌고 카스티야로 돌아와 유수프의 군대를 다시 아프리카로 격퇴시켰다.

2.4. 발렌시아 점령

하지만 이와 같은 엘 시드의 공에도 불구하고 왕은 사태가 해결되자 엘 시드를 다시 추방하였다. 빨리 오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엘 시드는 전과 달리 1만 5천의 병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 병사들은 엘 시드를 추종하는 세력이었다. 이 정도면 도시 하나를 점령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엘 시드는 발렌시아를 점령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베렝게르 백작이 이 도시로 다시 쳐들어온 것이었다. 엘 시드는 베렝게르를 이기게 되었고 그를 지하에 감금하였다. 그 일이 있게 된 후에 엘 시드는 자신의 부인과 딸들을 데려왔다. 그리고 그는 나중에 베렝게르의 몸값을 받고 풀어 준 후에 1096년 정략결혼으로 맏딸 크리스티나를 아라곤 왕자이자 몬순의 영주였던 라미로, 작은딸 마리아를 바르셀로나 백작이자 베렝게르 라몬 2세의 아들 베렝게르 라몬 3세와 결혼시켰다.[5]

2.5. 죽음

유수프는 다시 스페인 정복을 다짐하였고 그의 1차 공격 목표는 바로 발렌시아였다. 모타미드(무타민)는 지난 전투에서 유수프의 포로가 되어서 모리타니에 있었고 알폰소는 그를 도와줄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베렝게르는 현재 그의 포로였고 기독교 왕국인 아라곤 역시 아주 먼 거리였다. 엘 시드는 밤에 적의 창고를 약탈하기 위해서 야습을 하였지만 실패하였고 엘 시드는 큰 부상을 입게 되었다. 그리고 침대에 눕게 된 엘 시드는 자신의 부인인 히메나에게 이렇게 말을 하였다.
"당신은 내 맘을 알지?"
그리고 방금 도착한 알폰소 6세가 엘 시드 앞에 무릎을 꿇자 엘 시드는 또 다시 말을 이었다.
"폐하, 왕은 신하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나서 엘 시드는 세상을 떠났다. 이는 1099년의 일이었다.

2.6. 사후

히메나는 엘 시드의 죽음을 성의 민중에게 알리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여 남편의 시신을 바비에카 위에 앉혀 놓고 그의 칼인 티소나를 그의 주먹에 쥐어 주었다. 그러고는 발렌시아의 성벽 위에 올려 놓았다. 다음날 병사들은 부상을 심하게 입은 엘 시드가 무장을 하고 성벽 위에 올라가 있는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알폰소 6세는 참패하였고 결국 발렌시아는 함락되었다.[6] 알폰소 왕은 전투가 끝나자 모든 사람들에게 엘 시드의 죽음을 공표하였고 그의 시신을 땅에 묻지 말라고 명했다. 당시에 시신을 땅에 묻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이 구국 영웅이란 것이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rgos_-_Catedral_069_-_Tumba_del_Cid.jpg
히메나는 엘 시드의 시신과 함께 당시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였던 부르고스로 피난가서 살다가 나중에 함께 부르고스 대성당에 합장되어 무덤이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7]

발렌시아는 1124년에 아라곤 왕국이 탈환할 때까지 25년 동안 이슬람 세력의 지배 하에 있었다.

엘 시드는 당시에 유일하게 아랍인기독교인들에게 존경을 받았고, 지금도 스페인인들은 그를 존경한다.

스페인의 명고전인 서사시《나의 시드의 노래(Cantar de Mío Cid)》에서는 두 자루의 검을 묘사했는데, 그 검들은 각각 '콜라다'와 '티소나'라고 불리었으며, 티소나는 모로코의 군주인 부카르와의 전투에서 이겨 그를 죽이고 얻은 검이며, 콜라다는 바르셀로나 백작 베렝게르를 이기고 얻은 검이라고 묘사되어 있다. 작품 후반부에 티소나는 신하인 페로 베르무데스에게, 콜라다는 마르틴 안톨리네스에게 하사하게 된다. 비트매니아 IIDX기타프릭스 & 드럼매니아에 수록된 곡인 Tizona d'El Cid엘 시드의 티소나라는 뜻이다. 태클을 걸자면, d'El은 옳지 못 하다. de와 정관사 el이 붙으면 그대로 del이지 부호를 따로 붙일 필요는 없다.
파일:external/www.tienda-medieval.com/Espada-Colada-para-Bodas-419x450.jpg
콜라다의 복원품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izona.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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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라다는 사라져버렸고, 티소나는 부르고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긴 하지만, 사실 15세기에 제작된 복원품이다.[8] 그의 애마 바비에카의 무덤도 산 페드로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2.7. 계보

엘 시드의 아들 디에고는 1097년 후계자 없이 전사해서 자손이 없었다. 맏딸 크리스티나는 라미로와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봤는데 아들은 나바르 왕 가르체아 라미리츠[9]이고 딸은 로드리고 고메스 백작의 부인이 된 엘비라다. 작은딸 마리아는 베렝게르 라몬 3세 사이에서 2녀를 봤는데 베살루 백작 베르나트 3세의 부인이 된 마리아, 푸아 백작 로제르 3세의 부인이 된 히메나다.

3. 평가

"카스티야는 수백년간 반골의 땅이었다."[10]
알폰소 7세 연대기, 12세기 중반 기록
일대기만 보면 굉장히 기사도십자군적 이상에 충실한 모범생 영웅 같은 이미지인데, 13세기에 쓰인 서사시《내 주군의 노래(El Cantar de mío Cid)》이전에 쓰인《로데리쿠스 연대기》등의 그나마 더 역사서에 가까운 문헌에 나오는 기록을 보면 하는 일이 거칠 것 없이 자기가 원하는 건 무력이나 먹튀 등으로 무조건 쟁취하며 자기 이익에 따라 이슬람계 왕국이나 기독교계 왕국이나 할 거 없이 손익에 맞는 곳에서 싸우는 군벌이자 용병이었다. 위의 일대기도 이런 저런 수사적 장식이나 후대에 아무나 지어내서 대충 끼워 맞출 수 있는 상황 설명을 다 빼고 이력 자체만 읽으면 기사도의 화신이란 양반치고는 가톨릭, 이슬람 양측 사이에 굉장히 자주 왔다갔다 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가 묘사된 서사시는 그를 전형적인 충신이자 무슬림의 압제에서 기독교 스페인을 해방시키려는 십자군의 모습으로 묘사하는게 일반적이지만, 실제로는 기독교이든 무슬림이든 필요할 때마다 주군을 갈아 치우다가 기회가 생기니 발렌시아에 빈집털이를 가서 먹튀한 다음 독자적으로 세력화한 용병이자 군벌에 불과하다. 사실 그가 주인공인《내 주군의 노래》에서 표현된 바에 따르면 시드가 추방당한 뒤 가장 큰 고민거리들이 '가족의 안위'나, '자신을 따라오는 부하들을 어떻게 먹여살릴까'이다.

현대 스페인 들어와서 레콩키스타 신화에 기반한 강력한 전투적 가톨릭 민족주의는 프랑코 정권을 겪으며 약발을 다하고, 이제는 알안달루스의 유산도 자국의 역사로 받아들이는 스페인인들 중 다수도 저게 오히려 현실에 더 가까운 모습이라는 걸 충분히 알고, 그것 때문에 엘 시드란 신화와 역사 사이에 반쯤 걸쳐져 있는 인물을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판에 박힌 진부한 완전무결한 영웅이 아니라 복잡하고 위험하면서도 격동적이었던 시대에 지극히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동기와 목적으로 행동하는 캐릭터로서 더 사랑한다.

라사리요 데 토르메스 등의 후기 피카레스크 문학이나 돈 키호테에서 볼 수 있듯 스페인 문화, 특히 중세 서사시에서 돈 키호테나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의 시 같은 바로크 고전 문학까지 이루는 문학적 전통에서는 표면적으로는 무슨 신앙이나 믿음, 현대에 와서는 어떤 사상이나 이상을 위해 완전히 모든 걸 바친 성인 군자 모범생처럼 보여도 까뒤집어 보면 일반적인 사람들처럼 똑같이 치졸하고, 찌질하고, 현실적인 고뇌와 스트레스에 늘상 걷어 채이면서도 오만하고 콧대 높은 높으신 분들만 있는 세상의 중심이 아닌 빈자, 약자, 병자, 광대, 도둑, 창녀들과 함께 있는 변두리에서 극적이고 정열적이며, 무엇보다 훌륭한 이야기거리가 되는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에 열광한다.

역사적으로 당시 높으신 분들의 정책과 의도야 어찌되었든 자신들은 지도자들에게 진작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 스페인 사람들은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20세기 초반 사회 운동의 예를 들자면 당시 유럽에서 유일하게 일사불란하고 상하위계가 분명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해 코민테른의 명을 따르는 공산당이 아니라 수평적이고, 즉흥적이고, 운동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발적으로 정책 결정 과정이나 여론 형성 등에 참여할 것을 권하는 아나키스트들이 훨씬 더 인기도 많고 세력도 큰 나라였을 정도로 반권위주의반골 기질, 하류인생의 감성 등이 뿌리 깊은 편이다.

엘 시드가 거의 천년에 가까운 세월에 걸쳐도 여전히 스페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알아보고 엄숙하게 먼 발치에서 처다만 보는게 아니라 반갑게 다가가서 경의를 표하는 캐릭터가 된 것은 필히 이런 단순해 보이는 액면 아래 세월의 벽을 넘어 인간적으로 공감할 수 있고,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으면서도 결국 하는 짓은 나쁜 의미로든 좋은 의미로든 스펙터클한 다면적인 인물상이기 때문이다.

4. 기타

5. 미디어

6. 관련 항목


[1] 10세기 경부터 15세기 경까지 쓰였던 고전 스페인어(Español Antiguo) 발음이다. 이후 15세기 경부터 18세기 중기까지 쓰였던 근대 스페인어(Español Medio)를 거쳐 18세기 후기 이후의 현대 스페인어(Español Moderno)에선 엘 시드(El Cid)로 발음과 철자법이 바뀌게 된다.[2] 현대 스페인어로는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로 발음한다.[3] 알폰소 6세의 딸인 우라카 여왕과 동명이인이며, 서로간의 관계는 고모와 조카 사이다.[4] 엘 시드의 본명.[5]엘 시드의 노래》는 여기까지만을 다루고 있다.[6] 영화《엘 시드》에서는 엘 시드 사후 유수프가 패하고 전사하여 그의 계획이 실패하는 것으로 나오고 게임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의 엘 시드 캠페인에선 발렌시아를 사수해 엘 시드의 아내 히메나가 성주가 되지만 실제론 전혀 아니다.[7] 카스티야의 수도는 이후 새로운 정복지였던 톨레도로 옮겼다가 15세기 후반에 잠시 바야돌리드, 그 이후 다시 톨레도로 갔다가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정치적 통합 이후 신생 스페인의 수도가 마드리드로 정해지면서 지금까지 내려온다. 실제로 혹이나 스페인 관광을 간다면 이 순서로 여행을 하면 대충 레콩키스타 시절의 중세로부터 현대 스페인이 어떻게 형성 되었는지 잘 느낄 수 있다.[8] 도신에 TIZONA 라고 각인되어 있는데, 엘 시드가 활약하던 시기엔 티손(Tizón)이라고 불리었기에 고증오류라고 할 수 있다.[9] 이 사람을 통해서 엘 시드는 유럽 대부분 왕실의 먼 조상중 하나가 된다.[10] 라틴어 원문:Castella vires per saecula fuere rebelles, 스페인어역: Los hombres de Castilla por siglos fueron rebeldes, 직역하자면 카스티야 사람들은 수 세기 동안 반란자들이었다.[11] 낮아보일지도 모르지만 이 게임에선 20만 넘겨도 탈인간급의 능력치다.[12] 칭기즈 칸은 1 차이로 26이다.[13] 검병의 최종 업그레이드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