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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와 스웨덴의 관계에 대한 문서이다. 양국은 역사적으로 대립하는 기간이 길었으며, 스웨덴은 현재까지도 나토 가입 등으로 러시아를 견제하고 있다. 특히 스웨덴의 고틀란드는 러시아 해군 발트함대를 압박하는 요충지로서 러시아의 눈엣가시로 자리잡고 있다.2. 역사적 관계
2.1. 중세
중세 초 키예프 루스는 흑해에서 북해에 이르는 하천 무역을 통해서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동로마 제국 및 압바스 칼리프조 사이를 연결하며 번영을 누렸다. 스웨덴 입장에서 키예프 루스는 무척 중요한 무역 파트너로서, 이를 반영하듯 노르웨이의 울라프 2세는 스웨덴의 울라프 3세 쇠트코눙의 딸인 잉리드와의 결혼을 청했으나 울라프 3세 쇠트코눙은 잉리드를 러시아의 키예프 대공 야로슬라프 1세와 결혼시킨 역사가 있다.[1] 하지만 스웨덴은 가톨릭으로 키예프 루스는 정교회로 각기 정체성이 벌어지고,[2] 루스인들이 현지 동슬라브인들과 동화되며 결정적으로 키예프 루스의 흑해 무역이 쇠퇴한 것을 계기로 양국은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국가로 거듭나게 되었다.2.2. 근세
러시아와 스웨덴은 노브고로드 공국, 모스크바 대공국 시절부터 여러차례 전쟁을 벌였다. 15세기 이전 양국 사이의 전쟁은 국지전 성격이 강했더라면 16~17세기부터 스웨덴과 루스 차르국 양국은 리보니아[3] 및 라도가 호수 일대를 두고 적극적으로 패권을 다투게 되었다. 1557년,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1세 바사는 이반 4세의 루스 차르국과 노브고로드에서 강화조약을 맺었으나, 이반 4세 사후 루스 차르국에 혼란 시대가 이어지고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모스크바를 점령하자 여기에 자극을 받아 스웨덴도 잠시나마 노브고로드를 점령하였다.[4]구스타브 2세 아돌프 치세에 신흥 강국으로 거듭난 스웨덴은 1617년, 미하일 1세와 스톨보바 조약을 체결하여 잉에르만란드(Ingermanland)를 빼앗아 러시아인이 발트해로 나오지 못하도록 원천 차단하는 방면 핀란드와 에스토니아를 육지로 연결하는데 성공하여 발트해 동부에서 막강한 세력을 과시하였다. 이후 루스 차르국은 발트해 진출을 위해 애썼고 알렉세이 1세는 칼 10세 구스타브가 폴란드-리투아니아, 덴마크와 연달아 싸우는 동안 뇌테보리[5]와 리보니아를 침공하기도 했으나 결국 격퇴당했다.
18세기 초반까지 러시아는 철, 구리, 주석, 무기를 스웨덴으로부터 수입해와야 하는 처지로 스웨덴이 군수 물자를 러시아에 수출하는 입장에서 러시아가 스웨덴을 압도하기 어려웠었다. 심지어 러시아군은 숫자만 앞섰을 뿐 편제나 전술도 구식이어서 대북방전쟁 초창기에는 최신 전술을 구사하고 고도로 훈련된 스웨덴군을 상대로 졸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서구화 정책으로 러시아 내에서 야금술과 제철업이 발전한 것을 계기로 무기 개발과 경제 발전에 박차를 가한 표트르 대제는 스웨덴의 편제와 전술을 카피하여 칼 12세에게 다시 도전장을 내밀었다. 1708년 9월, 칼 12세는 러시아 제국에 충성하던 코사크 지도자 이반 마제파와 밀약을 맺고 모스크바 침공을 위해 우크라이나 일대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반 마제파가 칼 12세와의 밀약이 발각되면서 마제파의 코사크 군대는 본격적으로 스웨덴군을 돕기도 전에 쓸려나갔고, 스웨덴군은 폴타바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칼 12세와 이반 마제파는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하였다. 스웨덴군을 궤멸시킨 표트르 대제는 여세를 몰아 카리알라의 비보리, 에스토니아의 레발, 리보니아의 리가까지 석권하였고 발트함대를 창설하여 스웨덴과 핀란드 해안가를 초토화시켰다. 칼 12세는 노르웨이 침공 도중 전사하였고 스웨덴 왕위 계승 분쟁 끝에 왕위를 물려받은 여동생 울리카 엘레오노라의 남편 프레드리크 1세가 1721년에 뉘스타드[6] 조약을 체결하여 루스 차르국은 카리알라, 에스토니아, 리보니아, 잉에르만란드 등 발트해 연안 지역을 석권하였다. 표트르 대제는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며 러시아 의회로부터 '대제(Великий)' 칭호를 받았고 러시아 제국을 선포하여 열강으로의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반면, 발트해 패권을 지키지 못한 스웨덴은 2등국으로 전락하였다.
이후 스웨덴은 실지를 되찾기 위해 1741년, 1788년 두 차례 전쟁을 다시 일으켰지만 1741년에는 쪽도 못쓰고 발리면서 오히려 퀴미 강 동쪽의 사이마 호에 이르는 영토를 추가로 할양했고 1788년~1790년 구스타브 3세가 일으켰던 전쟁은 피로스의 승리로 끝나며 실익을 얻지 못했다. 그리고 후자에서 비보르크만 해전으로 함대 대부분을 잃은 스웨덴은 나폴레옹 전쟁 중 나폴레옹의 암묵적 동의를 얻은 러시아의 침공을 막아내지 못하고 1809년, 프레드릭스함[7] 조약으로 핀란드 전역을 러시아에 할양하였다. 그리고 알렉산드르 1세는 핀란드 대공국이란 괴뢰국을 창설하여 러시아 황제가 지배하는 자치국을 선언하면서 스웨덴과 러시아가 직접적으로 국경을 접할 일은 사라졌다.
스웨덴과 러시아의 전쟁 와중에서 라도가 호 일대의 여러 민족들은 토속신앙에서 정교회로 개종되었다가 다시 개신교로 개종하다가 정교회로 환원되는 등 복잡다단한 역사를 겪었다. 한 때 잉에르만란드를 장악한 스웨덴은 해당 지역에 루터교회를 믿는 핀인들을 정착시켰는데 이들은 잉그리아 핀인의 기원이 되었다. 이 외에도 대북방전쟁 당시 포로로 잡힌 스웨덴인 상당수는 시베리아의 토볼스크 등으로 강제이주당했는데, 이러한 연유로 시베리아의 주요 도시들[8] 스웨덴 문화 유산 등등이 적잖이 남아있는 편이다.
2.3. 19세기
19세기에 스웨덴이 경제적으로 침체되었을 무렵, 일부 스웨덴인은 러시아 제국으로 이민을 떠나기도 했다. 대부분은 스웨덴어가 공식어로 지정되어있던 핀란드 대공국에 정착하였지만 일부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건너갔는데 이 가운데 성공한 사람이 알프레드 노벨의 형 루드비그 노벨(Ludvig Nobel 1831~1888)이다. 러시아어로는 류드비크 에마누일로비치 노벨(Лю́двиг Эммануи́лович Нобе́ль)로 읽는 루드비그는 러시아 제국령 아제르바이잔 바쿠에 브라노벨(Branobel)이라는 석유 회사를 설립해 막대한 이익을 남겼다.2.4. 20세기
러시아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기간에 혁명이 일어난 뒤에 몰락하고 소련이 출범했다. 소련이 출범한 뒤에 일부 러시아 귀족들이 스웨덴으로 망명했다. 소련과 스웨덴은 정치적으로 갈등이 존재했다. 게다가 핀란드가 독립국이 된 뒤 내전이 일어날 때 스웨덴이 개입하면서 소련과 갈등을 빚었다.제2차 세계 대전 기간에 스웨덴은 중립을 지켰다. 일부 스웨덴인 자원병들이 겨울전쟁 및 계속전쟁에 핀란드 편으로 참전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냉전 시대 당시 소련은 공산주의 진영을 대표했다면 스웨덴은 사회민주주의 진영을 대표하였다. 스웨덴은 중립정책을 추구했지만, 소련과는 잠수함 사건이라든지 스페츠나츠의 스웨덴 침투 등등 이런저런 위협이 없지 않았었기 때문에 미국과 군사협력을 했다. 1990년대 초에 소련 해체가 일어났고 스웨덴은 유럽연합에 가입했다.
2.5. 21세기
양국은 현재에도 정치적인 갈등이 존재한다. 스웨덴은 유럽연합에 가입하면서 러시아를 견제하는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2010년대부터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을 막기 위해 미국, 나토와의 협력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러시아가 유로마이단 사태로 크림 반도를 합병하고 돈바스 전쟁을 일으키자 러시아를 제재했다. 그리고 세르게이 스크리팔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나자 러시아 외교관 추방정책을 실시하는 등 러시아를 견제하기 시작했다.스웨덴 내에는 일부 러시아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푸틴 정권의 독재를 피하기 위해 망명하는 러시아인들이 늘고 있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시기에 스웨덴은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급할 것을 천명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도 유지하던 중립을 깬 것으로 화제가 되었다. 이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스웨덴과 핀란드에게 나토에 가입한다면 가만 안놔두겠다고 협박을 했지만 스웨덴은 이에 나토에 가입여부는 우리가 결정한다라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러시아 폭격기가 스웨덴 영공을 침범했다.#
2022년 4월 14일, 메드베데프 국가안보위원회 부의장은 스웨덴과 핀란드가 나토 가입시 발트지역에서 상응하는 조치를 취한다고 밝혔다.# 러시아가 스웨덴 외교관들에 추방령을 내렸다.#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스웨덴과 핀란드 양국 모두 5월에 나토 가입을 신청하기로 했다.#
이케아는 러시아에서의 사업을 임시 중단했지만, 직원들의 월급은 준다고 밝혔다.#
스웨덴이 러시아를 상대로 쿠란 소각 시위와 관련해 가짜뉴스를 퍼트리는 배후라고 지목하며 경고장을 꺼내 들었다.#
2024년 3월 2일, 러시아 측은 스웨덴과 핀란드가 나토에 가입한 이후, 무기를 추가배치한다고 밝혔다.#
3. 여담
과거 동스칸디나비아어를 사용하던 스웨덴인 조상들은 오늘날의 러시아로 진출하여 루스 카간국을 건설하고, 동로마 제국에서 바랑인 친위대에서 복무한 것으로도 유명하다.[9] 당시 아직 스웨덴인 정체성이 확립되기 전이었다만 확실한 것은 당시 스웨덴 영토에 살던 스웨덴인 조상들은 흑해와 북해, 스칸디나비아를 하천으로 연결하는 무역을 장악하고 번영하였다는 것이다.
4. 문화 교류
양국은 전술했다시피 갈등이 존재하지만, 문화 교류가 일부 존재한다. 러시아어 교육이 스웨덴에서 실시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러시아 대사관에서 문화교류행사를 실시하고 있다.노벨문학상과 러시아 문학계 사이의 악연도 유명하다. 러시아와 스웨덴 사이의 다소 험악한 관계가 노벨문학상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의혹과 논란이 있는 편이다. 안톤 체호프는 일찍 타계해서 기회가 별로 없었다고 쳐도, 노벨문학상 최초의 후보 중 하나로 거론되었던 레프 톨스토이는 알프레드 노벨의 개인적인 가치관 차이로 노벨상 수상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러시아어 작가 중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반소 성향 러시아 난민이었던 이반 부닌이었는데, 이반 부닌이 러시아 문학 전성기 작가들을 제치고 최초의 수상자가 되는 것이 적합했는지는 다소 논란이 있는 소재이다.
이 외에도 소련 내 반체제 인사였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등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스웨덴을 포함한 서방 세계와 소련 사이의 갈등을 빚었던 바 있다. 물론 소련 친정부 성향 작가였던 미하일 숄로호프의 수상 사례를 보듯 예외도 있긴 했다.
5. 대사관
스톡홀름에 주 스웨덴 러시아 대사관, 모스크바에 주 러시아 스웨덴 대사관이 존재한다.6. 관련 문서
- 러시아/외교 / 러시아-유럽 관계 / 유럽연합-러시아 관계
- 스웨덴/외교
- 유럽 평의회 / 북극이사회 / 발트해 국가 이사회
- 러시아/역사
- 스웨덴/역사
- 북방전쟁 / 대북방전쟁 / 신냉전(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 러시아/경제
- 스웨덴/경제
- 러시아인 / 스웨덴인 / 스웨덴계 러시아인 / 러시아계 스웨덴인
- 러시아어 / 스웨덴어
- 대국관계일람/유럽 국가/동유럽 국가
- 대국관계일람/유럽 국가/북유럽 국가
[1] 이는 스웨덴과 노르웨이 사이의 전쟁으로 이어졌다.[2] 제4차 십자군 전쟁 이후 가톨릭과 정교회의 갈등이 격화된 지 1백여 년 즈음 지나면 해당 갈등이 동로마 제국 이외에도 북유럽과 동유럽 각지에서도 심화되었다.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 문서 등 참조[3] 오늘날의 에스토니아 남부와 라트비아 북부 비제메 지역[4] 폴란드와 마찬가지로 스웨덴도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동생 칼 필리프 왕자를 루스 차르국의 차르로 옹립한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미하일 로마노프가 선출되면서 백지화되었다.[5] 현재 러시아 실리셀부르크(Шлиссельбург).[6] 현재 핀란드 우시카우풍키(Uusikaupunki).[7] 현재 핀란드 하미나(Hamina).[8] 토볼스크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 건설 이후로 중요성이 감소했고, 옴스크와 크라스노야르스크, 이르쿠츠크 등이 있다.[9]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측에서는 루스 카간국의 스칸디나비아 기원설을 최대한 부정하거나 축소시키려 하지만, 스칸디나비아 기원설은 일단 중세 문헌 기록에서 검증이 되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