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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독립한 폴란드 제2공화국에 바다로의 길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발트해를 잇는 너비 32~112km의 회랑.2. 언어별 표기
독일어 | Polnischer Korridor |
폴란드어 | Korytarz polski |
영어 | Polish Corridor |
3. 위치 및 구성
1920년대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새로 만든 명칭으로 비스와(Wisła)강 하류를 따라 뻗어있는 지역이다.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바이마르 공화국이 신생 폴란드에게 넘긴 서프로이센의 절반과 포젠[1] 일부분으로 구성된다.4. 역사
4.1. 배경
10세기 이후로 슬라브족이 이곳에 이주해서 살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폴란드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15세기 이후에는 튜튼 기사단과 폴란드 왕국 사이의 여러 차례 전쟁의 결과로 생긴 폴란드 왕령 프로이센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폴란드 분할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왕령 프로이센을 점령한 프로이센 왕국은 엘블롱크 일대 에름란트(Ermland)[2]를 분리시켜 인근의 다른 지역과 병합하여 서프로이센주를 창설했다.4.2. 베르사유 조약에 의한 폴란드 귀속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 협상국은 폴란드를 무려 123년 만에 부활시켰다. 문제는 무려 123년만에 부활한 나라였던 만큼 영토가 분명히 규정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미국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은 14개 조항 중 13번째 항목에서 이미 폴란드에 바다로 가는 통로를 보장해 줄 것을 결의했다. 문제는 이제 어느 나라가 폴란드에 바다로 가는 길을 내주기 위해 자국의 영토를 양보해야 하느냐였다. 그리고 협상국이 지정한 곳이 바로 이 포젠과 서프로이센 지역이었다.[3]이 지역이 독일 본토와 동프로이센을 연결하는 구역이기 때문에 독일인의 반발이 엄청날 것이 뻔히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협상국이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이 지역을 폴란드에 넘긴 이유는 독일 영토를 합병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발트해안이 폴란드인의 거주 지역에서 가장 가까웠으며, 다른 독립국에 영토 할양을 요구하는 것보다 패전국 독일의 영토를 넘기는 것이 가장 반발이 적었기 때문이다. 또한, 패전국 독일이 복수를 다짐하고 다시 전쟁을 일으킬 것을 우려한 프랑스 수뇌부는 동유럽에 여러 강력한 동맹들을 만들고 싶어 하였으며, 폴란드 회랑 할양으로 독일을 약화시키고 폴란드를 강화하는건 프랑스 수뇌부의 의도도 일치했다.
회랑을 할양한 결정은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이념에 부합하는 결정이었다. 폴란드 회랑은 전전 서프로이센과 포젠의 일부로 구성되었는데, 독일화가 덜 진행된 포젠이야 말할것도 없고, 독일화가 더욱 진행된 서프로이센은 독일계가 다수지만 그 중에서 폴란드로 넘어간 지역만 따지면 폴란드계가 다수였다.[4] 흔히 알려졌듯이 서프로이센이 통째로 폴란드에 넘어간 게 아니다. 연합국도 이 지역의 복잡한 민족분포를 잘 알았고 때문에 독일계가 절대다수인 동쪽과 서쪽 변경 그리고 단치히를 폴란드에 할양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폴란드로 넘어간 지역은 서프로이센의 62%, 독일에 잔류한 지역은 30%, 단치히 자유시에 편입된 지역은 8%였다. 이렇게 편입된 지역은 다수의 민족월경지가 분포했지만 민족구성만 보면 민족자결주의에 부합했다.
폴란드 회랑의 탄생 배경에는 경제적 이유도 일정 부분을 차지했다. 신생 폴란드의 탄생을 결코 반기지 않을 독일이 폴란드의 바다를 통한 경제교역을 방해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1차 폴란드 분할 직후 프로이센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무역을 방해하여 경제위기를 일으키고 1937년 무렵 폴란드 무역의 77.7%가 폴란드 회랑의 단치히 자유시와 그디니아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보면 엄연히 현실적인 걱정이었다. 이외에도 양국은 동프로이센의 남부와 상슐레지엔의 영유권을 두고 분쟁을 벌였다. 결국 이 지역들의 운명은 주민투표로 결정되었다. 동프로이센 남부는 국경 마을 몇개를 제외한 모든 지역이 독일에 잔류했고, 오버슐레지엔은 동부 지역이 폴란드에 귀속되었다. 서프로이센과 마찬가지로 오버슐레지엔의 분할도 양국에 다수의 민족월경지를 생성했다.
4.3.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바이마르 공화국은 월경지가 된 동프로이센의 고립을 막고 본국의 경제 지원과 인적 교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1922년 동프로이센 수로부(Seedienst Ostpreußen)를 설치하고 본토와 동프로이센 지역을 오가는 수송선과 여객선들을 정기적으로 운용했다.[5] 물론 폴란드 회랑의 철도를 통하여 이동하는 방식도 있었지만 폴란드 당국의 감시가 너무 가혹해서 독일인은 이를 잘 활용하지 않았다. 단, 폴란드 회랑 일대 방면의 철도를 이용할 때는 폴란드 입국 사증을 받지 않고 무사증으로 오갈 수 있었다. 어쨌든 독일 민간인 사이에서나 정부에서나 자신들의 영토가 강제로 분할되어 한때 자기들이 짓밟은 유럽의 속령이었던 폴란드에게 넘어간 일은 독일인들의 자존심과 결합되어 엄청난 분노를 일으켰다. 한편 독일은 로카르노 조약을 통해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알자스-로렌 지역이 프랑스에 할양되면서 새로 획정된 독일-프랑스의 국경선을 인정하였고, 동부 유럽 지역 이웃 국가들의 경우 나치가 집권하여 주데텐란트 지방을 강탈하기 전까지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국경도 암묵적으로 인정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 획정된 폴란드와의 국경선 승인은 거부하였다. 심지어 아돌프 히틀러의 무모한 대외도발에 전쟁이 날까 염려하던 독일 군부 내에서도 폴란드는 언젠가 한번쯤 손봐줘야 한다는 여론이 다수였다. 이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폴란드에 대한 야욕을 아직 버리지 않고 있다는 인상을 폴란드에게 심어주었다.또한 독일은 폴란드를 상대로 국경선의 수정을 계속 요구하면서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을 일으켰다. 1925년 1월 1일부로 베르사유 조약이 정한 독일과의 무역 특혜 기간이 만료되면서 폴란드는 새로 조약을 체결해야만 했다. 하지만 베르사유 조약의 수정을 추구하던 독일이 폴란드의 석탄 수입을 금지하자 폴란드가 독일 제품에 대한 관세를 인상하면서 맞섰다.
독일과의 무역 전쟁으로 인해 폴란드는 경제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었는데, 독일은 폴란드의 최대 무역 상대국(수입 43%, 수출 35%)이어서 무역 면에서 큰 타격을 입었다. 거기에다가 구르니 실롱스크(오버슐레지엔) 지역의 중공업이 큰 타격을 입었으며, 석탄 수출이 급감하면서 전국적인 경기 침체와 함께 실업률이 증가했다. 이외에도 폴란드에 대한 외국 자본이 빠져나가면서 폴란드는 경제적 위기를 맞이했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 위기는 정치적 위기로 변화하여 1926년 5월에 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가 폴란드 정부를 상대로 5월 쿠데타를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무역전쟁은 1934년까지 계속되었다.
독일 내 폴란드인 지역이 포즈난 봉기를 일으켜 독립한 것과 상관 없이 단치히 지역은 독일계가 90%가 넘어가고, 단치히 자유시 의회에서 독일계 정당의 의석수가 압도적으로 대다수[6]였기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기 전부터 줄곧 독일과 재통일을 요구했다. 이 때문에 단치히(그단스크)의 독일인은 폴란드의 대외 무역에 비협조적이었으나 그래도 폴란드의 대외무역 50% 이상이 단치히(그단스크)를 통해 이루어졌다. 나치 독일 시기 탈퇴하기 전까지 국제 연맹에 폴란드 내 독일인이 폴란드가 소수 민족의 권리를 탄압한다고 신고한 민원들만 대략 1만 건이라고 한다. 이러한 독일의 움직임에 폴란드 역시 강경해서, 어떠한 도전에도 단호히 대응하겠다고 맞받아쳤고 단치히에 난리가 나자 폴란드는 서북쪽 해안에 최신 설비를 갖춘 항구 도시 그디니아(Gdynia)를 건설했다.
4.4. 제2차 세계 대전의 도화선이 되다
자세한 내용은 폴란드 침공 문서 참고하십시오.모두가 알다시피, 이 지역을 둘러싼 독일과 폴란드의 영유권 분쟁은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원인이 되었다. 당시의 폴란드 제2공화국은 폴란드 침공으로 멸망했지만,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망하면서 새로 들어선 폴란드 인민 공화국의 영토가 되었는데 이번엔 동프로이센 남부, 슐레지엔 대부분, 힌터포메른 전역과 슈테틴 등 구독일령 지역을 신규 합병하면서 전간기 시기까지 좁았던 발트해 연안 지역의 영해가 더욱 더 넓어졌으며 여기에 더해 전간기 당시 폴란드 회랑을 사이에 두고 독일 본토 및 오데르강 동쪽 지역의 구 독일령 지역과 지정학적으로 단절되어 있었던 독일의 월경지였던 동프로이센 남부가 확실히 폴란드에게 합병됨으로서 폴란드 제2공화국 시절 서부와 북중부 양면으로 독일 영토와 국경을 맞대야 했던 지정학적 불리함을 타개할 수 있었다. 다만 이는 전간기 시절에 소폴 전쟁으로 폴란드에 병합되었던 현재의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의 서부 지역 등 동부 영토들을 소련에게 할양하는 것에 대한 보상 차원이었다.
5. 둘러보기
[1] 폴란드명 비엘코폴스카(Wielkopolska).[2] 폴란드어: 바르미아(Warmia).[3] 하지만 포젠과 서프로이센 전역이 폴란드로 넘어간건 아니었다. 포젠과 서프로이센의 일부는 포젠-서프로이센 변경주로 바이마르 공화국에 귀속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 지역을 넘겨받은 폴란드는 기존 포젠주의 영역에 포즈난주를, 서프로이센주의 영역에는 포모제주를 설치했다.[4] 폴란드 분할로 폴란드 서부 지역은 점령한 독일 당국은 적극적으로 독일인들의 이주를 장려하고 현지인들의 강제적 문화 접변과 동화정책을 실시하여 지역을 독일화하려고 노력하면서 독일인 인구가 급속히 증가했다. 물론 중세시대 동방식민운동으로 인해 폴란드 분할 전부터 독일계가 대다수인 지역도 있었다. 프로이센 왕국-독일 제국 치하에서 2등 국민 내지는 식민지인 취급당한 폴란드인들은 당연히 폴란드로의 귀속을 원했다. 적잖은 비중을 차지한 소수민족 카슈브인은 독일과 폴란드의 회색지대에 있었다.[5] 동프로이센 해상교통부는 동프로이센과 독일 본토를 오가는 여객선과 수송선의 운항을 담당하였지만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까지 오가는 배편도 운항했다.[6] 참고로 폴란드계 정당 득표율은 2%도 안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