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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19:04:10

니시오카 츠요시

니시오카 쓰요시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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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1962년 1963년 1964년 1965년
드래프트 제도 미시행 오츠카 야스오
1966년 1967년 1968년 1969년 1970년
소노다 요시노리 무라타 쵸지 아리토 미치요 마에다 고스케 히에이 다다오미(5)
1971년 1972년 1973년 1974년 1975년
이노우에 케이이치 다테 야스지 사토 히로마사 박덕용(키쿠무라 토쿠요) 다나카 요시오
1976년 1977년 1978년 1979년 1980년
모리 시게카즈(5) 하카마다 히데토시 후쿠마 오사무(4) 다케모토 유키오(5) 아이코 다케시
1981년 1982년 1983년 1984년 1985년
이베 야스지 이시카와 마사루(4) 히가 요시토모(4) 가사하라 에이이치 이시다 마사히코(4)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1990년
세키 기요카즈 이라부 히데키 마에다 유키나가(4) 코미야마 사토루(4) 고이케 히데오(5)
1991년 1992년 1993년 1994년 1995년
요시다 아츠시 타케무라 준이치로 가토 다카야스(3) 사부로 사와이 료스케(4)
1996년 1997년 1998년 1999년 2000년
시미즈 마사우미(3) 와타나베 마사토 고바야시 마사히데(3) 다카하시 카오루(3) 다나카 료헤이
2001년 2002년 2003년 2004년 2005년
키타 타카시 니시오카 츠요시 우치 타츠야 쿠보 야스토모(3)
테지마 사토시(3)
야나기타 마사토시(1)
네모토 슌이치(2)(6)
2006년 2007년 2008년 2009년 2010년
오미네 유타(1)
코베 타쿠미(2)(6)
카라카와 유키(1)
핫토리 야스타카(2)(4)
키무라 유타 오기노 타카시 이시미네 쇼타(4)
2011년 2012년 2013년 2014년 2015년
후지오카 타카히로 마츠나가 타카히로(4) 이시카와 아유무 나카무라 쇼고 히라사와 타이가
2016년 2017년 2018년 2019년 2020년
사사키 치하야(4) 야스다 히사노리(4) 후지와라 쿄타 사사키 로키 스즈키 쇼타(4)
2021년 2022년 2023년 2024년 2025년
마츠카와 코 키쿠치 리쿠(4) 우에다 큐토(4) 니시카와 미쇼
(1) 고교생 드래프트
(2) 대학생, 사회인 드래프트
(3) 역지명, 희망 입단 범위
(4) 하즈레 1라운더
(5) 지명 후 미입단
(6) 1순위가 아니지만 그 해 첫 번째로 지명된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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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오카 츠요시의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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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치바 롯데 마린즈 우승 엠블럼 V3.svg파일:치바 롯데 마린즈 우승 엠블럼 V4.svg
NPB 일본시리즈
우승 반지
[1]
2005 2010

파일: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로고.svg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c7bc69 우승 반지}}}
2006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2005~2006년 퍼시픽리그 최다 도루
2004년
카와사키 무네노리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42도루
니시오카 츠요시
(치바 롯데 마린즈)
41도루(2005년)
33도루(2006년)
2007년
카타오카 야스유키
(세이부 라이온즈)
38도루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2010년 퍼시픽리그 수위타자
2009년
텟페이
(토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327
니시오카 츠요시
(치바 롯데 마린즈)
.346
2011년
우치카와 세이이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338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2010년 퍼시픽리그 최다 안타
2009년
나카지마 히로유키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173안타
니시오카 츠요시
(치바 롯데 마린즈)
206안타[2]
2011년
사카구치 토모타카
(오릭스 버팔로즈)
175안타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2005, 2007, 2010 퍼시픽리그 유격수 부문 베스트나인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13 센트럴리그 2루수 부문 베스트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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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30615 니시오카 츠요시.jpg
니시오카 츠요시
西岡剛 / Tsuyoshi Nishioka
생년월일 1984년 7월 24일 ([age(1984-07-24)]세)
국적
[[일본|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출신지 오사카부 다이토시
신체 182cm, 80kg
포지션 내야수[3]
투타 우투양타[4]
프로 입단 2002년 드래프트 1순위
소속 구단 치바 롯데 마린즈 (2003~2010)
미네소타 트윈스 (2011~2012)
한신 타이거스 (2013~2018)
토치기 골든 브레이브스[5] (2019~2021)
후쿠오카 키타큐슈 피닉스 (2022~2023)
지도자 후쿠오카 키타큐슈 피닉스 총감독 (2022~)
응원가 카츄샤 (2005~2009)[니시오카버전][츠요시버전]
Oi-SKALL MATE-Bring On Nutty Stomper fun (2010)[8] [9]
구단 자작곡 (2013~2018)
SNS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선수 경력3. 플레이 스타일4. 한국 선수들과의 인연5. 여담

[clearfix]

1. 개요

일본의 프로 야구 선수. 현재는 일본의 독립 프로 야구 리그 중 하나인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의 도치기 골든 브레이브스에서 활동 중이다. 일본프로야구 스위치 히터 단일시즌 최다 안타 기록 보유자이다.

등번호는 치바 롯데 시절에는 7번, 트윈스에서는 1번. 한신에선 다시 7번을 달았다가 이토이 요시오가 한신에 입단한 후에는 5번으로 바꿨다. 도치기 골든 브레이브스에서는 1번을 달고 있다.

2. 선수 경력

통합 선수 경력: 니시오카 츠요시/선수 경력
파일:NPB 로고.svg
2003년~2004년 2005년 2006년 2007년
2008년 2009년 2010년 2014년 2015년
2016년 2017년 2018년 독립 리그 시절
파일:MLB 로고.svg 파일:MILB 심볼(2008~2021).svg
2011년~2012년
파일: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2006년 2008년

3. 플레이 스타일

스위치히터로 전성기에는 두자리수 홈런이 가능한 적절한 갭파워와 3할을 기록가능한 정교한 타격, 도루왕을 기록한 적이 있는 빠른발을 무기로 한 클래식한 테이블세터이자 유격수였다. 역동적이고 근성있는 플레이스타일로 인기를 구가했던 지바롯데 마린스의 프렌차이즈 스타이기도 했다.

단일시즌 206안타를 기록했을 정도로 공격력은 좋았지만 수비력은 평범한 수준이였다. 이 시기 퍼시픽 리그에는 공수밸런스가 좋은 유격수가 나카지마 히로유키, 카와사키 무네노리 등 많이 있어 소위 '파리그 3대 유격수'로 꼽히며 그들과 치열하게 경쟁했다. 일반적으로 공격력에 있어서는 펀치력이 좋은 나카지마>니시오카>카와사키 순으로 꼽는 사람이 많았고, 수비는 반대로 카와사키>니시오카>나카지마로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공통점이 있다면 셋 다 MLB 레벨에서는 실패했다는 점. 수비가 좋았던 카와사키는 낮은 기대치와 마이너 계약이란 수모에도 불구하고 백업 및 분위기 요원으로 어찌저찌 살아남았지만 선수로서의 실적은 남기진 못했고, NPB에서도 수비가 어정쩡했던 니시오카는 MLB에서 공격은 물론이고 수비력 하나만으로도 멸망적인 지표를 찍었다. 나카지마는 MLB 무대를 밟지도 못했다.

물론 NPB 레벨 안에서는 전성기 손꼽히는 유격수였다. 6회의 올스타, 4회의 베스트나인, 3회의 골든글러브를 기록했고, 06WBC, 08베이징 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선출되기도 했다. 수비력에서 카와사키에, 공격력에서 나카지마에 밀렸기 때문에 국대에서는 주로 2루수나 지명타자로 출전했다. 구대성을 상대로 홈런을 기록하고, 올림픽 4강전에서 김광현을 상대로 첫 실점을 빼았는 득점을 기록하는 등 국가대표에서 한국 대표팀 상대로 성적이 좋았다. 본인도 국가대표에 대한 열망이 매우 커서 나카지마와 카와사키, 카타오카 야스유키(2루수)등에 밀려 09WBC에 출전이 불발되자 유격수로 3할이라는 좋은 타격을 기록하고도 자진해서 연봉 삭감을 요청하기도 했다.[10]

비슷한 시기에 경쟁했던 동급 유격수인 토리타니 타카시, 나카지마 히로유키 등에 비해 일찍 전성기가 가버린 감이 있다. MLB에서 대실패한 후 국내에서 중요한 나이에 큰 부상을 여러번 당해서 한신 시절은 거의 다 부상과 부진으로 날려먹었다.

그래도 오사카 토박이인 로컬보이였던 덕에 한신팬은 그가 잘하건 못하건 나오기만 하면 아낌없는 환호를 보냈고, 비인기 구단인 롯데에서 골드글러브를 쓸어담을 때보다도 인기팀 한신에서 먹튀를 할 때가 팬과 언론으로부터 인기는 훨씬 많았으며 주목도도 높은 스타 선수였다는 점이 아이러니한 부분.[11]

4. 한국 선수들과의 인연

한국 선수가 자기 팀 소속이 되면 발 벗고 나서서 신경 써주고 잘해주려고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앞서 거론된 것처럼 각각 다른 시즌이긴 했지만 치바 롯데 마린즈 선수였던 시절엔 이승엽김태균에게 잘해주었고[12] 김태균김석류의 결혼식 때는 오기노 타카시,나카지마 히로유키와 함께 한국까지 날라와 결혼식에 참석해 축하해줬다. 또한 개인 후원회에도 초대해주었다고 한다. 지금 현재 소속 되어있는 한신에선 오승환에게 시즌 들어가기 앞서 훈련할 때부터 말을 걸며 가까워지고자 신경 쓰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중에서도 특히 오승환과 스스럼 없이 지내는 것 같이 여겨지는 모습이나 일화 등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파일:/pds/201504/07/73/a0063673_5522b05e61f4f.gif

오승환의 그림 같은(?) 베이스러닝 모습을 흉내내며 본격 능욕 들어가는 니시오카

5. 여담


[1] 사실 2010년의 경우는 말이 우승반지지 일본시리즈 우승을 엔트리에서 겪었다는 기록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치바 롯데 마린즈는 2010년에 공식적인 우승반지를 만들지는 않았기 때문. 다만 2005년에는 만들었다.[2] 일본프로야구 스위치 히터 시즌 최다안타 기록이자 유일한 시즌 200안타 기록.[3] 2루수, 유격수, 3루수[4] 원래는 좌타였다고 한다.[5] 독립리그 야구단.[니시오카버전]
전주 : (演奏) オイ!(x7) (演奏) オイ!(x7)(演奏) 西岡!

(演奏) オイ! (演奏) オイ!
オオオ... オイ! オイ! オイオイ!
かっ飛ばせ! 西岡!
[츠요시버전]
전주 : (演奏) オイ!(x7) (演奏) オイ!(x7)(演奏) 剛!

(演奏) 剛! (演奏) 剛! オオオ... (x2)
岡ヒット(x4)!
[8] ララララララ ララララララ 剛!
ララララララ ラララララララ Let's go!
ラララララララララララララ ラララララ スピードスター!
ラララララララララララ 剛!西岡!

라라라라.. 츠요시
라라라라.. 렛츠 고
라라라라.. 스피드 스타
라라라라.. 츠요시 니시오카
[9] 팬들에게는 スピードスター(스피드스타) 라는 이름으로 알려져있으며 니시오카가 2011년 미국행을 결정하며 1년밖에 쓰지못한 비운의 응원가다. 팬들은 후지와라 쿄타 응원가로 썼으면 좋겠다는 반응은 있지만 2023년 후지와라 쿄타가 새로운 응원가가 발표되며 가능성은 없어졌다.[10] 유격수로 3할을 치고 괜찮은 장타력을 보여준데다가 앞선 국제대회인 올림픽에서도 호성적을 기록했지만, 이 대회에서 일본은 무라타 슈이치-나카지마 히로유키-이와무라 아키노리라는 수비력 보다는 공격력에 주안점을 둔 내야진을 구축해 백업 내야진을 공격력 보다는 수비력을 우선해 구성한 측면이 있다. 니시오카도 2루수비가 가능하기는 하지만 해당시즌을 전업 2루수로 뛴 카타오카에 비할바는 못되었고, 무엇보다 카타오카는 3루수 수비도 가능해 무라타를 보좌할 수 있었다. 역시 3루수비가 가능했던 오가사라와라도 있었지만 오가사라와라는 해당 대회에서 주로 1루를 담당했다.[11] 물론 롯데 시절에도 인기 자체는 준수한 편이었다. 국가대표로도 활약했고, 특유의 튀는 언동과 스타성 덕분에 tv출현 등 메스컴에도 자주 등장했기 때문. 사사키 로키 등장 전까진 롯데소속 선수 중 몇 안되는 전국구 인지도를 가진 선수였다.[12] 이승엽롯데에서 활약한 2004~2005년 동안 이승엽과 상당히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13] 여담이지만 이대호는 무거운 배트를 쓰는 강타자들 사이에서도 독보적으로 무거운 배트를 사용한다. 대략 930g에서 950g 정도 되는데(다른 선수들은 평균적으로 850~900g의 배트를 쓴다) 기본적으로 무거운데다가 장타를 염두에 두어 배트 머리 부분에 무게가 집중되게 설계하므로 단타를 노려야 하는, 그리고 타격할 상황이 많지 않은 마무리 투수인 오승환이 쓸만한 배트는 아니다.[14] 출처는 한신 타이거스 잡지 인터뷰[15] 전형적인 망한 1라운더로 게이오기주쿠대학 출신의 고학벌에 장타툴과 빠른 발까지 가진 공수주를 갖춘 외야수 유망주였다. 그러나 프로에선 무툴 플레이어가 되어 1라운더라는 높은 순위 덕분에 어찌어찌 생존왕처럼 버티다가 31세의 나이로 전력외가 되었다. 이후 독립리그에서 몇년 더 뛰고 은퇴했다.[16] 당시 NPB 코칭스태프들 중에는 제자를 때리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고(대표적으로 뭐 하나 잘못하면 구타를 했던 호시노 센이치.), 김성근은 2000년대 기준으로도 노인 축에 들었기 때문에 구시대적인 마인드를 갖고 있어서 한 번 때린 것은 그다지 나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게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