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2006 WBC와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대표팀으로 뽑혀 일본 선수임에도 국내 야구팬들에게 잘 알려진 선수. 2006 WBC에서 이진영의 그 유명한 다이빙 캐치로 잡힌 타구를 쳐낸 선수가 바로 이 선수다.2. 프로 이전
2.1. 고교 시절
원래 어릴 때부터 PL학원고등학교[1]에 진학하여 야구를 하는 게 꿈이었으나 떨어져서 오사카 토인고교로 가게 되었다.[2] 참고로 PL학원고교, 토인고교 둘 다 오사카를 대표하는 야구명문 고등학교다. 이 내용은 본인이 찍은 아디다스 광고에서도 나온다. 상당한 쇼크를 받았던 모양. 고치현의 고시엔 단골출전교인 메이토쿠기주쿠(明徳儀塾)고등학교에서도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으나 PL학원을 이기려면 오사카부 지역 학교를 가야하기 때문에 오사카토인고교를 선택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PL학원이라면 악을 품었는지 토인고교 시절 PL학원 상대로는 한 번도 지지 않았다.[3] 이때 고교 선배로 1년 선배 나카무라 다케야, 이와타 미노루 등이 있었다.[4][5]이후 1라운드 지명을 받고 롯데에 입단했는데, 센트럴 리그 팀으로 가고 싶었던 니시오카는[6] 처음엔 롯데 입단을 내키지 않아 했으나 스카우터였던 마츠모토 나오키[7]의 설득으로 끝내 롯데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지명 당시에는 냉정하게 1라운더 급은 아니란 평가가 지배적이었지만, 2005년을 기점으로 포텐이 터지면서 1라운더에 걸맞은 선수가 되었다.
3. 치바 롯데 마린즈 시절
スピードスター |
3.1. 2003 시즌~2004 시즌
2003년 입단하자마자 1군 스프링캠프명단에 이름을 올리며 시작했다. 개막엔트리에는 들진 못했지만, 6월 21일 1군으로 승격하여 프로데뷔를 하게되었고, 첫 타석에서 데뷔 첫 안타를 2루타로 장식하였다.2004년 다카하시 요시히코코치의 지도 아래, 좌타에서 스위치 히터로 전향하였다, 그 해 프로 첫 홈런을 포함해 6홈런을 쳐내며 두각을 나타냈다.
3.2. 2005 시즌
호리 코이치와 코사카 마코토와 병용을하면서 2루수혹은 유격수로 출전을 하면서 선발 출전 기회가 늘어났다. 21살에 도루 41개를 해내면서 퍼시픽 리그 최연소 도루왕이 되었다. 게다가 베스트 나인 유격수부문, 골든 글러브 2루수부문에서 수상을하며 리그우승과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하였다.3.3. 2006 시즌
2005년까지만 해도 2루수로서의 출장 빈도가 더 높았으나, 팀의 주전 유격수였던 코사카 마코토가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한 2006년 이후부터는 붙박이 유격수로 출장했다. 지금이야 테이블 세터지만 고교 시절에는 홈런을 통산 42개나 쳐냈을 정도로 상당한 장타자였다.[8] 심지어 니시오카 전용 시프트까지 있었을 정도. 팀은 전년대비 4위에 그치며 아쉬운 모습을 보였으나 니시오카는 전년과 거의 비슷한 성적을 남겼다. 또한 33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2년 연속 도루왕이 되었다.3.4. 2007 시즌
1월 7일 등록명을 본명인 니시오카 츠요시에서 TSUYOSHI로 변경했다.이 해에는 손목부상이나 목 통증 등 같이 부상이 있었지만 규정타석에 도달하며 데뷔 처음으로 타율 3할을 달성했고. 유격수 부문에서 베스트 나인과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다.
3.5. 2008 시즌
1월 7일 등록명을 본명인 西岡剛(니시오카 츠요시)로 변경했으며 이 해부터 양귀헬멧을 사용하기 시작했다.이 해에는 무릎통증이나 다리부상으로 인해 도루갯수가 18개로 줄었고, 타격, 수비, 주루에서 꾀 괴로운 모습을 보인 1년이 되었지만, 2년 연속 타율 3할 달성과, 데뷔 첫 2자리수 홈런을 달성했다.
시즌종료 후 국가대표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지 2009 WBC에서 대표팀 선발이 되지 못하자 다음 시즌 연봉을 자진 삭감하였다.[9]
3.6. 2009 시즌
도루갯수는 전년도 대비 향상했지만, 타율이 .260으로 크게 침체되면서 안타갯수도 118개로 떨어졌다. 한편 볼넷은 대폭 증가하며 출루율은 전년을 웃돌았다.3.6.1. MVP와의 충돌
시즌 전부터 당시 감독이었던 바비 발렌타인감독의 계약 연장을 둘러싼 구단 프런트와의 트러블이 발생했으며, 일부 강성 팬들과 사설응원단이었던 MVP가 과격한 말을 사용하며 퇴임 반대나 프런트를 비판하는 현수막을 내거는 것에 대하여, 9월 26일 수훈선수 인터뷰에서 무대에 내려와 약 2분간에 걸쳐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감이나 응원단, 팬에 대한 감사를 나타내는 동시에... 어린 팬들을 위해서라도 현수막을 거두고 비판보단 응원을 부탁한다며 호소하였다.선수 1명 1명의 플레이를 보고 꿈을 그리거나, 스탠드의 환성을 듣고 어른이 되면 이런 곳에서 뛰고싶어 열심히 하는 아이들의 꿈을 무너뜨리지 말아주세요. 정말로 롯데를 사랑한다면, 내일부터 현수막을 내려주시고 비판보단 응원 쪽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다음날인 9월 27일, 전날 인터뷰를 본 MVP와 일부 강성팬으로부터 니시오카는 위선자다 , 숙취로 시합 땡땡이치고 꿈을 말하는 스피드스타 , 축 110개 안타 달성(웃음)[10] 등으로 과격한 내용의 현수막을 걸었고 당시 발렌타인 감독을 지지하던 응원단은 니시오카의 타석에서만 응원가 연주를 보이콧하자. 이에 보다못한 팬들이 츠요시 이름을 연호하며 응원해주었으며, 2번타자인 호리 코이치의 타석에서 응원단이 주도하는 응원가를 무시하고 이름을 연호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결국 MVP는 시즌종료후 강제해산되었으며 팬들 사이에서 당시 응원단이었던 MVP의 인식이 나빠지는 계기가 되었고 MVP시절의 응원과 열기는 그리워도 MVP는 그립지않다라고 말하는 팬들이 대부분이되었다.
다음날 니시오카는 자신의 블로그에 자신을 걱정해주는 팬에 대한 감사인사와 이 일에대한 심경을 적었다.
3.7. 2010 시즌
주장으로써의 첫시즌 팀 빅토리 라는 각오를 다졌다 |
개인 통산 시즌 첫 200안타를 달성하였으며 퍼시픽 리그 수위타자&최다안타 1위를 차지했다. 역대 일본리그 단일시즌 200안타 타자는 통산 3명[11] 뿐이었으나 2010년 한 해에만 3명이나 나왔다. 한신의 맷 머튼, 야쿠르트의 아오키 노리치카 그리고 치바 롯데의 니시오카 츠요시 본인이다. 시즌 최다안타는 한신의 맷 머튼이 214안타로 1위에 올랐고 니시오카는 206안타로 퍼시픽 리그 1위에 올랐다. 덤으로 이 시즌에 144경기 전 경기를 1번타자 유격수로 무교체 풀이닝 출장을 기록한 덕택에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한 시즌 역대 최다 타석인 692타석에 들어서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 해 니시오카의 기록은 2017년 현재까지도 스위치 히터로서는 일본프로야구 단일 시즌 최다안타 기록이다.
2010 시즌 타율 0.346, 206안타 11홈런 59타점 121득점 22도루 OPS 0.904의 커리어 하이 성적을 찍으며 팀의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했다.
4. 미네소타 트윈스 시절
스프링 트레이닝에서는 타율 .345를 기록해 2루수로 메이저에 데뷔한다. 하지만 시즌 개막전부터 에러성 플레이가 나온데다 4월 8일 양키 스타디움에서 있었던 뉴욕 양키스전에서 경기 도중 1루 주자 닉 스위셔와 부딪혀 왼쪽 종아리뼈가 골절되어 약 두 달간 결장했다.
2011시즌 최종성적은 68경기 출장 50안타(2루타 5개) 0홈런 19타점 2도루(4실패) 타출장 .226/.278/.249 OPS 0.527로 폭망.
시즌 전 ESPN의 칼럼니스트 키스 로는 타격왕을 차지한 전년도의 성적은 BABIP이 높아 뽀록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92마일 이상의 패스트볼에는 약한 모습을 보인다고 평가했는데 정말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강속구에 배트 스피드가 채 따라가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타격에서는 컨택도 장타도 아무것도 안되는 모습으로 침묵했다.
여기에 뛰는 야구를 표방하며 야심차게 데려 왔으나 도루도 못했다.(...) 사실 도루왕을 몇 번 먹었던 치바 롯데 마린즈 시절에도 도루 실패가 많아 도루 성공률은 안좋은 편이었는데, 출루 자체가 훨씬 적고 주자 견제도 타이트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안좋은 쪽으로 시너지가 터진 것이다.
타격과 주루도 망했는데 수비도 문제. 일본에서도 그다지 수비 잘한다는 소리는 못 듣는 선수이긴 했지만 타구 질의 차원이 다른 메이저리그에서는 수비에서도 가히 블랙홀 급의 임팩트를 주며 망해버렸다.[12] 결국 미네소타 팬들한테는 공격도 안되고 수비도 안되는 천하의 개쌍놈 취급을 받았고, 먹튀 기미가 보이는 조 마우어, 저스틴 모노와 함께 미네소타 현지언론의 집중 포격을 받았다.
여기에다 니시오카의 자리를 만들어 주기 위해 시즌 전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트레이드된 J.J. 하디는 30홈런[13]을 치며 대폭발해 미네소타 팬들의 속을 벅벅 긁어놓았다.(...)
그리고 니시오카가 메이저리그에서 폭망하는 바람에 바로 다음해 포스팅 시스템으로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한 일본인 야수들은 찬바람을 면하지 못했는데[14] 세이부 라이온즈의 유격수 나카지마 히로유키는 헐값+백업이라는 굴욕적인 조건을 제시한 뉴욕 양키스와의 협상이 결렬되어 메이저리그 진출이 좌절됐고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일본 정상급 외야수 아오키 노리치카는 밀워키 브루어스와 2년계약(+1년옵션)을 맺긴 했는데 연평균 연봉이 고작 125만달러로 일본에서 받았던 연봉에 3분의 1로 토막이 났다. 그리고 가와사키 무네노리는 일본 선수 잘 데려가는 시애틀로부터 마이너리그 계약에 스프링 트레이닝 초청선수 신분으로 계약을 하기까지 했다.
2012시즌에는 시범경기에서도 삽질을 거듭하며 트리플A로 강등되었다. 트리플A에서도 타/출/장 .245/.309/.301로 고전 중. 8월 중에 메이저리그로 콜업되었는데 3게임에 에러 2개를 범하는 등, 타격, 수비 모두 안되는 상태로, 올라온지 일주일만에 다시 트리플A로 내려갔다.
결국 9월 28일, "성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내 책임"이라는 발언과 함께 스스로 퇴단을 결정했다. 잔여 연봉인 525만 달러도 전부 반납하는 대인배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사실 구단에서 먼저 방출하는게 아니라 선수가 계약 도중에 FA로 풀리길 원한다면 구단과 합의를 해야하고, 이를 위해 잔여 연봉을 포기하고 팀을 나오는건 적잖게 볼 수 있다.[15]
니시오카가 왜 실패했는가에 대해서 분석한 기사도 나왔다.#
미네소타 퇴단 이후에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내가 할수 있는 것을 하겠다"라고 쓰고 일본 복귀를 선언 하여 사실상 일본 복귀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요 몇년간 폭망중인 한신 타이거스가 대놓고 "담 시즌 주전 3루수는 이미 정해졌음, 우리는 4억정도를 이미 장전하고 성의 있게 교섭할 것임" 이라고 발언하면서 니시오카를 영입후 3루수로 쓰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였다.
5. 한신 타이거스 시절
고향팀으로의 복귀 |
5.1. 2014 시즌
시즌이 시작하자마자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뜬공을 처리하려던 도중 우익수 후쿠도메 고스케와 충돌하여 완전히 몸이 공중에 뜬 채 머리부터 떨어져 정신을 잃고 구급차로 후송되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흉부에 타박상을 입은 것과 동시에 코뼈 골절과 왼쪽 어깨 탈골이란 진단을 받고난 뒤 한동안 공백기를 가졌다.
이 무렵 오승환은 니시오카를 위해 한국에서 하던 것처럼 모자에 니시오카의 등번호를 새겼는데[18], 경기가 끝난 후 심판에게 주의를 받았다. 일본프로야구에서는 모자에 스티커 같은 걸 부착하거나 글로 무언가 표시하는 것이 금지 된 행동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 덕분에 고액 계약이라 까이던 오승환의 이미지가 반대로 크게 상승했다. 일본야구에서는 흔하지 않은 동료애 표현법이라 임팩트가 커서인지 팬들 중에서는 오히려 그정도는 괜찮지 않냐며 심판을 욕하는 반응까지 나왔을 정도.
이후 6월 말에 다시 1군으로 복귀했지만 아직까진 제 컨디션이 아니었던지라 이렇다 할 활약은 보여주지 못한 채 얼마 안 있다가 2군으로 말소되었고 이후 9월달에 완전히 1군으로 복귀했다.
참고로 니시오카는 부상으로 인해 2014년 시즌엔 출전한 경기가 몇 안되는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2014년 올스타전 팬 투표 1위 선수로 선정 되었다. 복귀한 이후에도 활약을 하건 못 하건 그저 니시오카가 스타팅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하고 환영하는 팬들이 대다수였다.
그러나 이후,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요미우리를 4연승으로 꺾고 2014년 일본시리즈에 진출 하여 1승까지 거머쥐며 연승 고공 행진을 달리고 있던 한신 타이거스에게 후술된 사건으로 니시오카는 한동안 한신 팬들로부터 가루가 되도록 신명나게 까이며 전범 취급을 받게 된다. 그게 바로......
5.1.1. 2014년 일본시리즈 고의 수비방해 의혹
2014년 일본시리즈 5차전, 시리즈 1승 3패에 9회초 0:1로 뒤지던 1사 만루 상황에서 어처구니 없는 3피트 라인 위반으로 더블 아웃되면서 한신의 일본시리즈 도전을 끝장내는 바람에 사실상 금지어행이 되었다.니시오카는 경기후 인터뷰에서 "왼손타자는 (타격 후에)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라인) 안 쪽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으니까. (뛰어가면서) 서서히 (원래 뛰어야 할 주로로) 돌아갔다. 고의로 할 수 있는 플레이가 아니다."라고 변명을 했다. 그러나 수비방해를 선언한 1루심 아즈마 도시오(東利夫) 심판은 "명확하게 처음부터 (파울라인) 안 쪽으로 달리고 있어서 아웃을 선언했다. 타격후 처음에는 라인 안 쪽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는 오른손 타자라면 몰라도 왼손타자가 처음부터 안쪽을 달리려고 했던 것은 명백하게 수비방해의 의도가 있었다. 그리고 송구가 몸에 맞은 것도 파울라인 안 쪽이었다."라고 판정의 이유를 분명하게 밝혔다. 위의 리플레이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니시오카는 타격 직후에는 파울라인 바깥쪽을 뛰고 있다가 본인의 변명과는 반대로 도리어 라인 안쪽으로 들어와서 뛰다가 베이스를 밟는 순간에야 밖으로 살짝 빠져나가려는 자세를 취한 것이 보인다. 게다가 공식 인터뷰에서의 변명과는 반대로 자기의 페이스북에는 "규칙 상 안쪽으로 달려서 공이 몸에 맞으면 수비방해인 건 나도 알고 있다. 타구가 맞은 순간 병살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일말의 가능성을 기대하고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뛰어야 되는 것을 라인을 아슬아슬하게 타고 달리면서[19] (송구가) 몸에 맞으라고 생각하면서 달렸다. 나는 송구가 등에 맞을 때 다리가 바깥쪽에만 있으면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달렸기 때문에 내 나름대로는 규칙에 잘하면 안 걸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한 플레이였다."라고 글을 남기면서 결국 라인 안 쪽을 뛰었던 주루가 수비방해를 의도한 고의였음을 자백했다.
이 사건(?)은 곧 시즌 후 동료 선수의 개그네타로 사용 되기도 하였다. 2014년 11월 22일 개최 된 한신 타이거스 팬 감사데이 이벤트에서 매년 개최 되는 이벤트마다 특정 선수의 모노마네를 하는[20] 한신 내야수 이마나리 료타가 니시오카의 수비방해 장면을 그대로 재현해냈다. 이걸 지켜본 니시오카 본인은 "저 스스로도 아직까지 (마음 속에서) 질질 끌고 있는 부분인데, 그 상처는 아물지 않았습니다. 내년엔 수비방해 하지 않고 열심히 하겠다"라고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후 2015년 프리미어 12 결승전에서도 4회 미국의 수비방해에 의한 아웃이 선언되자 해설위원 이승엽이 이 사건을 언급하기도(...)
5.2. 2015 시즌
2014시즌이 끝난후에 중견수로 전향한다고 한다. 토리타니 다카시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대비하여 이전에 중견수를보던 야마토를 유격수로. 영입에 공들이고있는 나카지마 히로유키를 3루수로. 3루를 보던 니시오카가 중견수로 전향할 계획이다. 이에 구단은 5억엔을 들여 낡은 구단펜스를 교체할계획이라고 하는데, 시즌 후에 팔꿈치 뼛조각 제거 수술을 받은 니시오카의 부상방지 측면이 크다.토리타니의 메이저 진출과 상관없이 본인은 2루수 자리를 두고 경쟁할것이라 밝혔다. 2014 시즌 중에 본인이 부상으로 빠졌을때 우에모토 히로키가 2루수로 자리잡았고, 본인은 부상복귀 후 3루수로 뛰었다.
2015 시즌엔 2루수 주전 자리를 두고 경쟁하겠다고 본인 입으로 단언 한 것 치곤 오픈전부터 시작해서 정규시즌 초반인 지금까지 경기 내내 줄곧 2루수가 아닌 3루수로서 선발 출장하고 있다. 한신이 설레발을 떨던 나카지마 히로유키가 오릭스 버팔로즈로 가버렸기에 중견수 변환 계획은 붕 떠버린 셈인데, 불안했던 3루 수비가 작년보단 나아졌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믿고 맡길 만큼 안정적인 수비도 아니기 때문에 팀이 3점차 이내로 리드하고 있는 중요 상황에서 9회가 되면 마무리 투수 오승환과 교체 되면서 자연스럽게 니시오카 수비 위치엔 대수비요원 사카 카즈히코가 들어가는 것이 이젠 그냥 공식이 되어버렸다. 4월 초반인 현재까지 타격 쪽에선 더할 나위 없는 대활약을 펼쳐주고 있다. 개막전부터 줄곧 선발 라인업으로 출장하고 있는데 아직까지 타율 3할 이상을 유지하고 있는 중. 하지만 4월에 접어들면서까지 좋았던 페이스는 어디가고 팀이 급격하기
25일, 드디어 1군에 재등록되었다. 그러나 결국 부상의 여파로 풀타임을 소화하지 못한 채 시즌을 끝마쳤다. 본인 스스로도 자신의 성적에 실망했는지 구단에 연봉 삭감을 요구하고 FA 자격을 행사하지 않는 등 나름대로 동기부여를 했다.
5.3. 2016 시즌
7월 20일 요미우리와의 홈경기에서 좌전안타를 치고 주루하던 중 왼쪽 아킬레스건이 파열되는 중상을 입었다. 카트에 실려나갈 정도로 큰 부상이며 시즌 아웃. 상기 서술된 '14년 후쿠도메와의 충돌로 인한 부상이후 길고 긴 재활을 했던 것처럼, 다시 불운한 재활의 길에 들어섰다.5.4. 2017 시즌
7월 17일 드디어 1군 경기에 복귀했다. 2루에 우에모토 히로키 가 레귤러로 자리를 잡았고 도중에 영입한 용병 제이슨 로저스의 주 포지션이 1루라 외야알바를 뛰기도 했다.. 8월에 3할대 타율을 기록하며 컨디션이 올라오나 했으나 주루중 가벼운 타박상을 입었는데, 아킬레스건에 부담이 갈까 우려한 구단에 의해 다시 1군에서 말소당했다. 9월 5일에 다시 1군에 올라오긴 했으나 이번엔 등에 통증을 느끼며 다시 등록말소.. 일본 복귀후 완전히 유리몸이 되었다.5.5. 2018 시즌
딱히 부상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으나, 타격부진이 길어지며 5월 18일 1군에서 말소되었다. 그후 9월 21일 4개월만에 1군에 복귀했다.시즌 후 결국 방출. 롯데에서 주워가는 거 아니냐는 말도 있는데 롯데에서는 지금 팀 리빌딩 중이라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방출 통보 받은 그 다음날도 대타로 1군 출장을 기록했다. 은퇴하는 선수도 아니고 전력외 통지로 방출예정인 선수를 1군에서 출장시키는건 좀 모양새가 웃긴지라 이게 뭐하는 짓이냐는 이유로 한신 프런트와 가네모토 도모아키 감독은 오늘도 신나게 까였다. 물론 결과는 대타 삼진.[21]
시즌 후 12구단 합동 트라이아웃에 나와 4타수 1안타 2삼진으로 좋지 못했다. 그나마 그 1안타도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나루세 요시히사를 상대로 친 거라...
해를 넘겨 2019년 시즌 개막 직전인 2월 22일 현재까지도 별 소식이 없다. 이대로 은퇴하든가, 아니면 사회인 야구나 독립 리그, 해외 리그 등에서 선수생활을 이어나가는 방법밖엔 없을 듯 한데 아무 소식도 없는 걸로 봐선 이대로 조용히 은퇴하는 방향으로 갈 듯 하다..였는데..
6. 독립리그로 떠나다
2019년 3월 12일, 독립리그인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의 도치기 골든 브레이브스와 계약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작년에 무라타 슈이치가 이 팀에서 뛰면서 현역 재기를 노리다가 결국 재기를 이루지 못하고 은퇴했는데 과연 니시오카가 무라타와 달리 재기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할 듯.여러모로 20대 초반부터 주전 1번 타자로 자리잡으며 도루왕, 수위타자, 최다안타를 꿰차고 메이저리그까지 진출했던한 시대를 풍미한 교타자치고는 다소 씁쓸한 뒷맛을 남기며 일단 프로야구계를 떠났다.[22]
9월 24일 후쿠우라 카즈야의 은퇴경기에서 독립리그 유니폼을 입고 메시지를 보냈다. 똑같이 독립리그에서 뛰던 오마츠 쇼이츠가 양복을 입고 메시지를 보낸 것과는 다른 모습. 현역 연장에 아직도 미련을 보이는 것 같다.
2020년 치바 롯데 마린즈 캠프에 참가한다고 한다. 그러나 입단 테스트는 아니고 단순한 동행이라는 듯. 도치기 골든 브레이브스와는 계약갱신을 유보하고 있다가 9월 1일 갱신에 합의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2021년11월 17일, 토치기 구단을 퇴단하고 큐슈 아시아 리그에 참가하는 신설구단인 후쿠오카 키타큐슈 피닉스에 감독 겸 선수로 취임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2024년 2월 16일 팀의 총감독으로 취임하는 것으로 발표되었다. 발표에는 "선수 겸임"이라는 표기가 없었기에 전임으로 보이며 선수생활은 은퇴 한것으로 보인다.
7. 국가대표 경력
7.1. 2006 WBC
2005시즌이후 제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대표로 선발되었다.1차 리그 1차전 중국전에서 일본 대표팀 1호 홈런이 되는 3점 홈런을 쳤다.
이진영의 그 유명한 다이빙 캐치로 잡힌 타구를 쳐낸 선수가 바로 이 선수다.
이후 일본대표팀의 첫 WBC우승에 기여하였다.
7.2. 2008 베이징 올림픽
8월 2008 베이징 올림픽 일본 대표로 선발되었다.8. 개인 수상 타이틀
니시오카 츠요시의 NPB 수상 경력 | |
2003 | 수상 기록 없음 |
2004 | |
2005 | 베스트 나인 (유격수 부문) / 골든 글러브 (2루수 부문) / 도루 1위 / 월간 MVP 3월・4월 / 올스타 |
2006 | 올스타 / 치바시 시민 영예상 / 도루 1위 |
2007 | 베스트 나인 (유격수 부문) / 골든 글러브 (유격수 부문) / 올스타 |
2008 | 올스타 |
2009 | 수상 기록 없음 |
2010 | 월간 MVP 5월 / 올스타 |
[1] 키요하라 카즈히로, 타츠나미 카즈요시, 마쓰이 카즈오, 후쿠도메 코스케, 마에다 켄타 등 나무위키에 쓰일 정도로 잘 알려진 선수들을 다수 배출하였다. 격전지인 오사카 지역에서도 최강자로 인정받는 학교였으며, 당연히 고시엔 대회에도 여러 차례 진출하였다. 하지만 폭력사건 등 여러 구설수에 휘말린 끝에 현재는 무기한 휴부중. 오사카의 패권도 니시오카가 나온 오사카 토인이나 T-오카다, 야마다 테츠토 등을 배출한 리세이샤 등에 내주었다.[2] 당시 니시오카는 머리가 그렇게 똑똑하지 않았다. 그때 당시엔 니시오카는 악동 이미지 양아치 학생였고, 하라는 공부를 안 하고 야구에 집중 했다고 한다.[3] 다만 당시 PL학원은 징계를 먹어서 2년간 대외 경기 참여가 금지당했기 때문에 맞대결이 몇 번 없었다고 한다. 다른 일화에 의하면 PL학원에 재학중인 동기/선배들이 니시오카를 비웃었다고도 하는데, 이 일화가 사실이든 거짓이든 저기 해당하는 선수들 중 니시오카를 압도하는 선수는 한 명도 없으며, 그나마 성공했던 사람이 2024년 현재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감독인 이마에 토시아키 1명뿐이다.[4] 나카지마 히로유키가 고교 2년 선배로 잘못 알려져 있기도 하나, 이타미북고교 출신이다.[5] 재미있게도 롯데 시절 니시오카와 함께 타선의 축을 이룬 선수들 중에는 오오무라 사부로나 이마에 토시아키 등의 PL 출신 선수들이 있었고 니시오카가 메이저리그에서 실패한 후 한신 타이거스에 입단한 해에는 PL 출신의 후쿠도메 코스케도 메이저리그 생활을 청산하고 한신 타이거스에 입단했다.[6] 세리그엔 고향팀인 한신 타이거스, 니시오카가 한때 동경하던 이케야마 타카히로가 뛰던 야쿠르트 스왈로즈, 니시오카를 3~4라운드 정도에서 뽑으려고 했던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등이 있었다.[7] 스카우터가 되기 전에는 1996년부터 2001년까지 롯데에서 내야 유틸리티로 활약했다.[8] 하지만 아직도 일본 고교야구에서는 알루미늄 배트를 쓴다는 점에서...[9] 딱히 니시오카가 이 시즌에 부진한 건 아니다. 타율 3할을 마크했으며 13개의 홈런을 쳤다. 유격수임을 감안하고, 또 올림픽에 나가는 동안 못나간 게임 수를 생각해보면 부족한 누적 스탯도 커버가 된다. 올림픽에서도 팀이 정신 못차리고 휘청거리는 와중에 아오키과 더불어 제일 잘한 야수 중 한명이었다.[10] 당시 부진했던 성적을 비꼬는 뜻[11] 스즈키 이치로, 아오키 노리치카, 알렉스 라미레스.[12] 이는 KBO에서 수비력이 그닥이라는 평가를 받은 김하성이 절치부심하여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수비형 유격수로 거듭난 것과는 대조된다.[13] 2011 시즌 트로이 툴로위츠키와 더불어 유이한 메이저리그 유격수 30홈런이다.[14] 물론 NPB의 통일구 도입으로 눈에 보이는 성적이 크게 하락한 원인도 있겠지만. 아오키 : 2010년 타율 0.358 14홈런→2011년 타율 0.292 4홈런, 나카지마 : 2010년 타율 0.314 20홈런→2011년 타율 0.297 16홈런.[15] 나중에 박병호도 미네소타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4년 계약의 2년차 시즌 후 남은 연봉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미네소타와 계약을 해지했다.[16] 'Gratitude'를 줄여서 'Gratiii'라고 부른다고 한다. 다만 이 세리머니를 요란스럽다고 좋지 않게 보는 시각도 있었다.[17] 2013년 삼성 라이온즈가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 지었던 순간 마운드에 모여 취했던 세리머니가 이 세리머니다.[18] 2014년 4월 3일 주니치전 홈경기[19] 여기에 대해서도 아즈마 심판은 "달릴 때 양쪽 발이 모두 파울라인 바깥쪽에 있어야 된다. 한 쪽발만 안쪽으로 들어와도 안 된다. (그런데 니시오카는 한 쪽발 정도가 아니라 양쪽 발이 모두 파울라인 안 쪽에 있었다.)"라면서 쐐기를 박았다.[20] 오승환의 투구폼 흉내를 낸 적도 있다.[21] 사실 이번 시즌 라쿠텐에서도 방출 통보를 한 선수를 전력외통보 이후에 1군에서 기용했다. 바로 용병타자 오코에 딕슨.[22] 니시오카가 한신에서 방출당한 해에 은퇴한 동갑내기 드래프트 동기 카나자와 타케시는 통산 176경기에 나올 정도로 2군에만 박혀 있다가 아주 가끔씩 1군에 올라오는 불운한 선수생활을 했으나 원클럽맨으로 음지에서 묵묵히 팀에 공헌해줬다는 이유로 은퇴경기에 은퇴식까지 거하게 치르고사실 롯데가 시즌 다 말아먹어서 은퇴하는 선수들마다 일일이 은퇴경기 치러주면서 주전으로 출전시킬 수 있었다코칭스태프 자리까지 얻으며 명예롭게 은퇴했다. 니시오카와 정반대의 말년을 보낸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