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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21:10:54

뉴 할리우드

뉴 아메리칸 시네마에서 넘어옴
영화 장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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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태동 배경3. 특징4. 쇠퇴5. 이후의 여파6. 주요 작품들
6.1. 1960년대6.2. 1970년대
7. 주요 감독


New Hollywood
American New Wave

미국 현지에서는 뉴 할리우드라는 용어를 더 많이 쓴다.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라고도 한다.

1. 개요

196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미국의 영화 사조로 1967년 개봉된 아서 펜이 감독한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가 시작점으로 알려져 있다. 보통 1967-1975년을 뉴 할리우드 시대의 정점으로 간주한다.

영화 평론가 로빈 우드는 펜이 이전에 만든 <체이스>(The Chase)[1]를 꼽기도 하지만, 대중적인 파급력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가 강하다.

2. 태동 배경

기존 영화들의 관습상 형태에 대해 정면으로 부딪힌 미국의 영화 운동. 할리우드 황금기(Golden Age of Hollywood)라 불리는 1920년대에서 6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대형 스튜디오들은 영화의 제작, 배급, 상영에 이르기까지 수직계열화로 영화계에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하지만 1950년대 부터 파라마운트 판결, 텔레비전 보급, 교외화로 인한 극장 수입 감소등으로 스튜디오들은 휘청거리기 시작한다. 이들은 처음에는 기존의 강점이던 사극, 뮤지컬로 관객들을 끌어들였지만 치솟는 제작비와 젊은 세대의 외면으로 더욱 곤경에 처한다.

1960년대 말 미국은 베트남 전쟁과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그리고 미국 문화가 히피들로 인해 엄청난 격변기를 겪던 시기이기도 했다. 젊은 영화감독들은 이전의 스튜디오에서 줄곧 만들어져 온 꿈과 희망을 담은 영화들보다는 미국 사회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이는 영화들이 필요하다고 여겼고 그러한 의식들이 영화에 반영되게 되었다. 이것은 당대에 미국과 유럽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인권운동, 히피다운 의식, 미국의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 등으로 대표되는 청년 문화가 영화계에 영향을 준 것으로 파악된다.

젊은 영화 감독들은 존 카사베츠시드니 루멧, 로버트 올트먼, 샘 페킨파, 오슨 웰스 등 뉴웨이브 이전부터 대형 스튜디오와 타협하지 않는 자세로 활동하면서 미국 사회의 현실을 반영한 영화감독들을 숭상했으며, 상기한 감독들이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기에 내놓은 영화들도 큰 영향을 미쳤다.

중심 스튜디오로는 영화감독 밥 레이펄슨과 제작자 버트 슈나이더가 설립한 제작사 BBS가 있다.

3. 특징

1970년대 뉴욕을 중심으로 발전한 실험성을 띤 영화들을 통칭하는 '뉴 아메리칸 시네마'[2]와는 다르지만 같은 시기이고, 뉴 아메리칸 시네마가 뉴 할리우드의 영향을 받았기에 이 둘을 나누어 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는 미국 현지나 한국이나 똑같다.

메소드 연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사조다.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인물들, 고전 할리우드에서 주로 다뤄졌던, 선과 악의 뚜렷한 대비와 대결은 등장하지 않는 전개, 그로 인해 결말 역시 해피 엔딩도 새드 엔딩도 아닌 모호한 결말 등등 이 시기의 영화들 중 가장 유명한 영화들인 1967년작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보니 앤 클라이드), <졸업>, 1969년작 <이지 라이더>, <내일을 향해 쏴라>, 1970년작 <잃어버린 전주곡>[3], 1972년작 <대부 1>, 1973년작 <허수아비>, 1974년작 <대부 2> 등등의 주・조연 배우들이 모두 메소드 연기자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회 현실을 냉철하고 적나라하게 반영하고 해피엔딩을 지양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마치 다큐멘터리와 같은 건조한 촬영 방식들이 영화에 도입되기도 했다. 반사회적이고 반영웅, 쾌락주의적인 캐릭터들이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경향이 잦았다. 그 캐릭터들의 염세주의적 세계관이 영화에 그대로 투영되어 인생을 어둡게만 보아 슬퍼하거나 절망으로 빠지는 결말로 이어지는 영화들이 다반사. 덤으로 상당히 폭력적이고 거친 감성의 영화들도 자주 볼 수 있다.

이것은 영화감독의 권력이 가장 정점에 달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가능한 시도들이었다. 영화의 이러한 특징들은 이전의 스튜디오 중심 체제에서 제작된, 관객에게 꿈과 희망을 선사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던 미국 영화에 사실주의적 관점을 도입시켜, 미국 영화의 창작에서 스펙트럼을 넓힌 새로운 풍조로 인정받게 되었다.

또한 로드 무비라는 장르를 발명하기도 했다. 당시 비트 문학과 히피로 방랑하는 젊은 사람이 많이 늘었는데 이게 존 포드 같은 전통적인 서부극과 네오 리얼리즘, 누벨바그와 결합하면서 하나의 장르로서 탄생했다.

전체에 걸쳐 동부 뉴욕유럽 영화의 영향력이 강했던 시기로도 평가된다. 특히 장뤽 고다르의 영향력이 강했으며, 자크 드미아녜스 바르다 부부처럼 아예 잠시 할리우드에서 일하던 누벨바그 영화감독도 있었다.

4. 쇠퇴

미국의 베트남 전쟁이 종결되면서 미국 각지에서 벌어졌던 반체제 운동이 저절로 시들해졌다. 또한 히피 운동 등 자유를 넘어 방종에 가까워진 청년문화에 대한 반동으로 사회 전반적으로 보수적인 분위기가 강해지자 뉴웨이브 영화들은 대중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것과 동시에 <죠스>에서 시작된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공습도 뉴웨이브의 종언에 확실한 영향을 미친다.

뉴웨이브 영화들은 보통 개인이 사회에 대해 극복할 수 없는 환경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때마침 록키 시리즈처럼 개인이 환경을 극복할 수 있다는 신념을 다룬 영화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스타워즈>, <슈퍼맨> 등이 대히트를 치면서 아메리칸 드림, 영웅주의를 다룬 영화들이 부흥하게 되었다. 이렇게 전쟁으로 인한 허무감이 끝나고 밝고 희망을 주는 작품들이 인기를 다시 끌게 된다.

예외적으로 뉴웨이브 흐름의 끝자락에 등장한 스티븐 스필버그, 조지 루카스, 마틴 스코세이지, 우디 앨런 같은 영화감독들은 현재까지도 왕성히 활동할 뿐만 아니라 할리우드 역사의 중심에 서 있다.[4]

사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죠스>,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는 '뉴 할리우드'라는 영화 사조를 쇠퇴시키고 "블록버스터라는 상업영화냐? 오스카상이 걸맞은 예술영화냐?"라는 양극화를 할리우드에 가져온 작품들의 시작점으로 평가받는다. 이 때문에 스필버그는 그 빼어난 연출력에도 불구하고 미운 털이 박혀 오랫동안 아카데미상의 외면을 받았다. 이와 관련해 배리 레빈슨 감독의 <레인 맨>은 원래 스필버그에게 처음 제안된 작품인데, 스필버그는 모든 장면을 100% 그대로 똑같이 찍어도 엔딩 크레딧에 감독 이름으로 자신의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면 아카데미상을 못 탔을 거란 푸념을 남기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조지 루카스와 스티븐 스필버그는 영화 관련 매체, 논문, 사이트 등지에서 '뉴 할리우드' 감독으로 분류되는 곳도 있고, 이 사조를 끝내고 블록버스터라는 새로운 사조를 만든 게임 체인저들로 분류되는 곳도 있다. 하지만 이런 엇갈리는 평가들과는 별개로 이 둘의 커리어 초기작인 <청춘낙서>와 <슈가랜드 특급>은 뉴 할리우드를 상징하는 걸작으로 반드시 손꼽히는 작품들이다.

근데 사회 풍조의 변화 말고도 메이저 스튜디오의 사기에 가까운 행각으로 단물만 쪽쪽 빨아먹히고 버려진 케이스도 많았다. 대표적인 피해자가 데니스 호퍼피터 폰다였는데, 둘 다 <이지 라이더> 붐으로 제작비 지원을 받았음에도 푸대접과 무자비한 편집으로 버림받았다고 한다. 존 카사베츠도 <이지 라이더> 같은 영화를 만들어 달라고 해서 <별난 인연>을 만들었다가 다 잘려나갔다고 한다.

5. 이후의 여파

시대의 변화에 따라 사그라지기는 했지만,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는 이후의 미국 인디 영화 조류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이후로도 블록버스터 영화와 대척점을 이루는 할리우드의 중요한 유산으로 남았다.

1960년대까지 남아있던 헤이즈 오피스검열 시스템을 벗어나 현재의 미국 영화의 원형이 완성된 시기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가 한창이던 시절에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하던 하길종[5] 한국으로 귀국 후 <화분>, <수절>, <바보들의 행진> 등 이 흐름에 영향을 받은 영화들을 제작했다. 나아가 이장호, 홍파 등과 함께 영상시대라는 동인을 만들어 한국식 뉴시네마 운동을 전개하려는 노력을 했다.

6. 주요 작품들

6.1. 1960년대

6.2. 1970년대

7. 주요 감독



[1] 1966년작으로 아서 펜 감독, 조슬린과 말론 브란도 남매, 로버트 레드포드, 제인 폰다 주연작. 아서 펜은 이 작품 바로 다음 해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를 찍었다.[2] 대표적으로 마틴 스코세이지, 우디 알렌 등의 감독.[3] 국내에는 파이브 이지 피시즈란 제목으로 더 유명하다.[4] 스티븐 스필버그, 조지 루카스는 초기작들에서나 아메리칸 뉴웨이브의 영향이 드러나지 〈죠스〉, 〈스타워즈〉 이후로는 아예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인물들이 됐다.[5]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와 UCLA 동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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