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대외 전쟁·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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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독립 전쟁 Ελληνική Επανάσταση του 1821 Yunan İsyanı يونان عصياني Greek War of Independence | ||
기간 | ||
1821년 2월 21일 ~ 1829년 9월 12일 | ||
장소 | ||
그리스, 에게해 | ||
원인 | ||
(아래 배경 문단 참조.) | ||
교전 국가 및 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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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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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 ||
그리스, 연합군의 승리 | ||
영향 | ||
그리스의 독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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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21년 그리스 혁명가들이 그리스를 지배하던 오스만 제국에 봉기하여 일어난 독립 전쟁. 최종적으로 그리스가 서구 열강인 대영제국, 프랑스 왕국,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아 전쟁에서 승리했으며 그 결과로 그리스 제1공화국이 탄생했다.2. 배경
그리스는 15세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후 몇 세기 동안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동안 그리스에서 봉기가 몇 차례 일어났지만 매번 성공을 이루지 못했다가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을 휩쓴 민족주의의 여파로 그리스에서 독립을 향한 열망이 더욱 커졌다. 1814년 "친우회"(Φιλική Εταιρεία, 필리키 에테리아)라는 비밀 조직이 결성되어 그리스 해방 운동을 벌였다.친우회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다뉴브 공국, 코스탄티니예 등지에서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는데 반란은 1821년 3월 25일에 계획되었다. 그러나 친우회의 계획은 오스만 당국에 의해 발각되어 반란이 앞당겨졌다.
3. 전개
첫 번째 반란은 1821년 2월 21일 (또는 3월 6일) 다뉴브 공국에서 시작되었다. 혁명 지도자인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가 오스만 치하 왈라키아에서 봉기를 일으킨 투도르 블라디미레스쿠와 합세하기 위해 프루트 강을 건너 오스만 치하의 다뉴브 공국으로 진군했으며 이 사건은 그리스 독립 전쟁의 시작을 알렸다. 오스만 제국은 정교회에 책임을 묻고 코스탄티니예에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와 정교회 인사들, 수많은 민간인들을 처형했다. 입실란티스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남하할 예정이었지만 러시아와의 관계가 틀어져 지원을 받지 못했다. 다뉴브에서 입실란티스는 부쿠레슈티를 점령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다뉴브에서의 반란은 얼마 못 가 진압되었다.한편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총독의 부재를 틈타 반란을 일으켰고 테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가 이끌던 그리스 독립군은 펠로폰네소스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했으며 뒤이어 크레타 섬, 마케도니아, 그리스 중부에서도 반란이 잇따랐다. 그리스 독립군은 점령지의 유대인, 무슬림, 오스만 제국의 동조자로 의심되는 기독교인들을 학살했으며 오스만 제국은 아나톨리아, 크레타, 콘스탄티노폴리스, 키프로스, 마케도니아, 에게 해 제도에서 그리스인들을 학살했다.
1822년 1월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는 독립을 선언하고 헌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그리스의 파벌들이 서로 간의 내전으로 약해졌고 오스만 파디샤인 마흐무트 2세는 이집트 총독인 메흐메드 알리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메흐메트 알리는 영토를 얻는 대가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그의 아들 이브라힘 파샤와 함께 그리스에 군대를 보내기로 동의하였다. 이브라힘은 1825년 2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상륙하여 펠로폰네소스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메솔롱기는 1826년 4월 오스만에 의해 함락되었으며 아테네도 함락되었고 혁명은 실패한 것처럼 보였다.
그때 러시아, 영국, 프랑스가 개입을 결정했고 연합군은 1827년 해군 함대를 그리스로 보냈다. 이는 당시 서유럽 국가 내부에서 강력한 그리스 지지 여론이 불었던 것이 한몫했는데, 서유럽 국민들은 압재자 오스만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그리스를 당시 빈 체제 이후로 조금씩 부활하고 있던 자유주의적 시각에 투영하여 보았기 때문이다.[1] 오스만-이집트 연합 함대가 이드라 섬을 공격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럽 삼국 연합 함대는 나바리노에서 오스만 해군을 요격했다. 나바리노 해전에서 연합군이 승리함으로써 오스만 제국의 상륙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1828년 이집트 군대는 프랑스 원정군의 압력으로 철수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오스만 수비대는 항복했고 그리스 독립군은 그리스 중부를 탈환했다.
4. 종전
1829년에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와 아드리아노플 화약을 맺고 그리스의 독립을 인정했다. 같은 해에 그리스는 런던 회의에서 국제적인 독립 국가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열강의 간섭으로 그리스는 공화국 대신 군주국으로서 독립하게 되었다. 열강은 바이에른 왕국의 왕자 오토를 그리스의 초대 왕 오톤으로 세웠다.이 전쟁으로 오스만 제국 역사상 처음으로 오스만 제국 산하의 민족이 독립해 떨어져나가게 되었다. 다만 이때 성립된 그리스인의 민족국가는 봉기의 근원지였던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아티카 주변만을 포함하고 있었고 여전히 다수의 그리스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산하에 있었다. 이후 그리스는 현재의 영토를 확보하게 되는 1912년 발칸 전쟁까지 천천히 오스만 제국이 점령하던 그리스 반도와 지중해의 섬 지역 영토를 병탄해 나갔다.
5. 여담
한편 이 전쟁은 빈 체제의 모순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빈 회의를 통해 성립된 빈 체제는 당시 유럽 내에서 타국의 영토, 주권 존중 및 간섭 금지를 내세웠으나, 예외적으로 내셔널리즘 및 자유주의 운동이 벌어지면 체제 국가 모두가 힘을 합쳐 이를 진압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그리스 독립 전쟁은 위에서 열거한 모든 사항들과 정확하게 반대되는 행위였던 것.[2] 물론 이 전쟁의 당사자인 그리스와 오스만 제국이 모두 빈 회의를 주도한 5개국이 아니었고 그리스의 독립이 유럽 내적으로 굉장한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이때는 유야무야 넘어갔으나, 결국 빈 체제는 1854년 크림 전쟁으로 신성 동맹이 붕괴되며 외교적으로는 끝을 맺는다.[3]열렬한 그리스빠였던 조지 고든 바이런이 참전했다가 사망한 전쟁이다. 이후 그리스에서는 바이런을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운 영국의 헌신적인 영웅으로 대접하고 있으며, 아테네의 제우스 신전 근처에 '바이런을 안은 아테나 여신상'을 세워 그를 기리고 있다.
[1] 이러한 자유주의 열망은 멈추지 않아서, 결국 프랑스에서 3년 후 1830년 혁명으로 샤를 10세가 퇴위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으며, 21년 후에는 전 유럽을 뒤흔든 대사건을 일으킨다.[2] 엄연한 주권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의 정치에 개입하였으며, 자유주의적 행위를 저지하기는 커녕 도왔다.[3] 물론 이후로도 빈 체제 자체는 여러 차레 부활과 붕괴를 반복하였고, 최종적으로는 1914년 벌어진 제1차 세계 대전을 거점으로 완벽하게 소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