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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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郭敬생몰연도 불명
후조의 인물. 자는 계자(季子). 병주 태원군(太原郡) 오현(鄔縣) 사람이다.
2. 생애
무향(武鄕)의 갈족 석륵이 사람을 모을 뜻을 품고 인재들과 사귀려 하였는데, 사람들은 석륵의 비천한 출신을 비웃으며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고향에서 농사짓던 평범한 농부였던 곽경이 석륵의 비범함을 눈치채고 그와 깊이 교제하니, 석륵도 적극적으로 농사일을 도와주는 등 친근하게 대하였다.병주(幷州)에 여러 해 동안 기근이 들어 곤궁해진 석륵은 가족들을 거느리고 곽경을 찾아왔다. 오랫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해 굶주림과 배고픔에 시달렸던 석륵은 곽경을 알아보고 그에게 엎드려 눈물 흘리며 도와달라 애원하였다. 곽경은 놀라 이런 몰골이 된 연유를 물었고, 석륵의 처지에 공감하며 더불어 눈물을 흘렸다. 이후 석륵에게 수중에 있는 돈을 내어주고 의복과 식량을 지원하면서 석륵과 그 일족을 보살폈다.
영흥 2년(305년) 8월, 병주에 대기근이 지속되자 병주자사 사마등은 산동(山東)의 여러 이민족들을 잡아다 노예로 팔아 군수물자를 충당하였다. 이때 사마등의 부하 장륭(張隆)이 석륵을 끌고 가면서 마구 폭행하고 모욕을 주니, 이를 측은하게 여긴 곽경이 이민족 호송 임무를 맡고 있던 사촌형 곽양(郭陽)과 그 아들 곽시(郭時)에게 석륵을 돌봐달라 부탁하였다. 곽양과 곽시는 곽경의 부탁대로 장륭의 폭행으로부터 여러 차례 석륵을 보호하고, 그에게 약과 먹을 것을 나눠주었다.
영가 원년(307년) 정월, 비록 팔왕의 난은 종결되었지만, 병주 북부에서 조한(趙漢)을 세운 유연이 남하하기 시작하여 병주의 백성들은 끝없이 고통받았다. 곽경은 병주를 떠나 유민군인 걸활군(乞活軍)에 소속되었다가, 용양장군 이운(李惲)에게 항복하여 범향(苑郷)으로 갔다.
영가 원년(313년) 7월, 조한에 항복해 서진과의 전투에서 큰 활약하고 기주(冀州)목에 임명된 석륵은 업(鄴)을 함락시키면서 세력을 뻗쳐나갔다. 석륵이 상백(上白)에서 청주(靑州)자사 이운을 격파해 참수하고, 투항한 이운의 병사들을 모조리 생매장시키려던 찰나, 말 위에서 감독하다가 우연히 그 무리 속에서 곽경의 얼굴을 알아보고 반신반의하여 다가가 말했다.
"그대 혹시 곽계자(季子)가 맞는가?"
곽경이 머리를 조아리며 그러하다 답하자, 석륵은 곧바로 말에서 내려 그의 손을 붙잡고 울면서 말했다."오늘 우리가 서로 다시 만난 것은 바로 하늘의 뜻이다!"
그리고는 곽경에게 의복과 개마(鎧馬)를 하사한 뒤, 곽경을 상장군으로 임명하고 투항병들을 모두 사면해 곽경의 휘하로 배속시켰다. 이후 형주(荊州)감군으로 옮겨져 번성(樊城)에 주둔하였다.건평 원년(330년) 9월, 곽경은 남만교위 동유(董幼)와 함께 동진의 양양(襄陽)을 공격하였다. 이에 동진에서도 명장 주방의 아들인 남중랑장 주무(周撫)를 감면북제군사(監沔北諸軍事)로 삼아 양양을 수비케 하면서 대응에 나섰다. 그때 석륵이 칙서를 보내 곽경에게 계책을 내리니, 곽경은 석륵의 계책을 그대로 이행하여 다시 번성으로 돌아가 기치를 모두 숨기고 성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꾸몄다. 이후 미심쩍어 하던 주무가 정찰병을 보내 살피게 하자, 곽경은 정찰병에게 말하길
"너는 의당 돌아가 성을 단단히 지키는 편이 좋을 것이다. 7~8일 후면 장차 대규모의 기병대가 이를 것이고, 그때가 되면 너희들은 도망치는 것조차 어려울 테니 말이다."
라 하였다. 그리고 며칠 뒤에 곽경은 강가로 사람을 보내 말을 씻기게 하고, 밤낮으로 계속 사람만 교체하면서 계속 말을 씻게 하여 적에게 마치 군마가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정찰병의 보고를 들은 주무는 석륵의 기마 군단이 왔다 착각하여 싸우지도 않고 무창(武昌)으로 달아나 버렸다. 이리하여 곽경은 피 한방울 흘리지 않은 채 양양을 얻을 수 있었고, 서진의 유민 무리를 이끌던 석성(石城)의 위하(魏遐)를 비롯해 하남(河南)을 떠돌던 여러 유민 무리들이 곽경을 찾아와 후조에 귀순하였다. 곽경은 양양성을 허물고 그 백성들을 번성으로 옮겨, 번성의 수비를 훨씬 더 강화하였다. 이 공적으로 곽경은 형주자사로 승진하였던 반면, 동진 조정에서는 주무의 추태를 듣고 그를 면직시켰다. 건평 3년(332년) 4월, 곽경의 군대가 양양에서 물러난 것을 본 동진 조정에서 군대를 보내 양양에 주둔시키니, 곽경은 다시 양양을 공격해 동진군의 진영을 뽑은 뒤 수자리를 두고 돌아왔다.
건평 3년(332년) 7월, 곽경이 남하하여 강서(江西)를 노략질하자, 무창에 주둔해있던 동진의 태위 도간은 아들 평서참군 도빈(陶斌)과 남중랑장 환선을 파견해 곧장 번성을 공격하게 하여 그 무리를 사로잡았다. 보고를 받은 곽경은 황급히 군사를 돌려 번성을 구원하러 가다가 열수(涅水)에서 환선의 군대와 조우하여 교전하였다. 곽경은 비록 환선의 병사들을 많이 전사시켰으나, 결국 패하여 물러났고 약탈한 물건들도 모두 빼앗겼다. 이때 도간이 조카 도진(陶臻)과 경릉(竟陵)태수 이양(李陽)을 보내 신야(新野)를 쳐 함락시켰다. 순식간에 북형주 일대를 죄다 상실한 곽경은 숨어서 도망치고, 환선은 양양까지 공격해 탈환하였다. 이후로 곽경의 행적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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