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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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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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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 왕실
관향 <colbgcolor=#fff,#191919>경기도 개풍군 서면 개성리
창업조 태조
중시조 현종
주요인물 태조, 혜종, 광종, 현종, 문종, 숙종, 예종, 원종, 충렬왕, 충선왕, 공민왕, 우왕, 공양왕

1. 태조 이전2. 고려 전기
2.1. 태조
2.1.1. 왕후 및 왕태후와 그 자녀2.1.2. 추존 후궁과 그 자녀2.1.3. 원주와 그 자녀2.1.4. 기타 기록
2.2. 혜종2.3. 정종2.4. 광종2.5. 경종2.6. 성종2.7. 목종2.8. 현종2.9. 덕종2.10. 정종2.11. 문종
3. 고려 중기4. 고려 말기

1. 태조 이전

태조 왕건 세조 왕륭 의조 작제건
원창왕후
위숙왕후 한씨

1.1. 국조

1.2. 의조

1.3. 세조

2. 고려 전기

표기법
* 는 자신, 부인
* 는 아들, 며느리, 딸
* 는 손자, 손녀, 손부
배우자는 이름 앞에 배우자:를 붙인다.

2.1. 태조

태조 왕건은 부인이 많기로 유명하다.[1]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태조가 많은 부인을 가졌다는 사실 정도는 알 정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즉위 초 불안한 왕권과 낮은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해 유력 귀족들과 혼인을 통해 혈맹을 맺는 혼인정책을 펼쳤다. 사서 등 알려진 바에 따르면, 29명[2]의 부인을 두고 있고 부인들 모두는 유력 지방 호족이거나 공신들의 딸이다.[3] 이 혼인 정책은 태조가 살아있을 때는 그들의 딸을 인질로 삼아 반역을 억제하는 기능을 하였지만, 사후에는 유력 귀족을 외가로 둔 쟁쟁한 왕자들 덕분에 왕위 쟁탈전의 계기를 제공하였다.

분량 문제로 인해 왕후[4] · 태후로 승격된 원주[5], 특정 시호를 받은 원주[6], 그 외 기타 원주, 이외 기록에서 발견되는 자식들로 나눠 서술한다.

2.1.1. 왕후 및 왕태후와 그 자녀

2.1.2. 추존 후궁과 그 자녀

2.1.3. 원주와 그 자녀

2.1.4. 기타 기록

王堯君
王昭君
▨▨大王 弼榮大王 英章正匡 王景大承
淸端宮主   金鎰蘇判 兢達蘇判 王規佐承
權悅佐承 王詢佐承 王廉佐承 誠俊元甫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의 음기(陰記) 부분 판독문 일부

〈징효대사탑비〉는 924년(태조 7년)에 지은 비문을 944년(혜종 2년)에 세긴 것으로, 한동안 잊혀지다가 1997년에 발견되었다.

비석의 뒷부분에 적힌 음기에는 징효대사의 제자 목록이 발견되는데, 징효대사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승려들과 당시 흥녕사(興寧寺)의 실질적인 후원자 역할을 했던 여러 유력자의 명단이다.
▨▨대왕, 필영대왕(弼榮大王), 청단궁주(淸端宮主), 성준(誠俊) 원보(元甫) 등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등장하지 않는다.

태조의 왕자가 문원대왕으로 봉작된 사례가 있어서, ▨▨대왕과 필영대왕도 왕작을 받은 태조의 아들로 추정되고 있다. ▨▨대왕은 비문이 마모되어 정확한 봉호를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나, 남아있는 자획을 통해 보면 '文元'과는 다른 형태의 글자임을 확인할 수 있기에, ▨▨대왕은 문원대왕과 별개의 인물로 파악된다. 이에 따르면 비문에 기록된 순서상 ▨▨대왕과 필영대왕은 정종과 광종보다 항렬이 낮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광종보다도 항렬이 낮은 필영대왕이 '대왕'으로 명기되어 있는 점은 〈징효대사탑비〉가 만들어진 시점에는 이미 죽어서 왕작이 추봉된 상태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청단궁주는 청단궁(淸端宮)을 거처로 삼은 후궁이거나 태조의 딸로 보이며, 여기서 청단은 《고려사》 병지에 나오는 평주와 안서(해주) 사이에 걸쳐있는 청단에서 따온 말로 추정되는데, 한자는 다르지만 현재 북한 체제 하에 청단군이 있는 곳과 동일하다. 고려의 기록에는 없으나 요나라 기록에 따르면 발해 유민 고모한이 왕건의 사위가 되었으나 훗날 고려를 배반하고 요나라에 귀부했다고 하는데, 태조의 딸들 중 배우자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은 순안왕대비이지만, 순안왕대비가 928년 무렵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반면 고모한은 926년 이전에 거란에 투항했으므로 가능성은 낮다. 만약 청단궁주가 태조의 딸이 맞다면 고모한의 아내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 외 원보 성준은 지방 호족으로 추정된다.

최근에는 ▨▨대왕과 필영대왕 부분의 '大王'이 원래는 '대광(大匡)'이었으며 '匚'획이 마모된 것이라는 의견이 등장했다. 왕족 인물로 확인되는 정종(왕요군), 광종(왕소군), 청단궁주 등이 다른 인물들과 달리 대두(擡頭) 표기되어 있지만 ▨▨대왕과 필영대왕은 그렇지 않기에 왕족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주요한 논지이다. 이 의견에 따를 경우 대광 ▨▨과 대광 필영은 같은 행에서 언급되는 영장·왕경과 함께 태조의 장인으로 추측해 볼 수 있는데, 필영은 태조의 후궁 중에 아버지가 확인되지 않는 서전원부인(西殿院夫人)의 부친이자 박질영과 형제 관계일 가능성이 있다.

2.2. 혜종

2.3. 정종

2.4. 광종

2.5. 경종

2.6. 성종

2.7. 목종

2.8. 현종

2.9. 덕종

2.10. 정종

2.11. 문종

2.11.1. 정간왕

3. 고려 중기

4. 고려 말기



[1] 고려를 떠나 한국사 전체의 왕으로서도 가장 확실히 기록된 사례다. 자식의 경우 총 34명(25남 9녀)로 기록.[2] 동국통감에만 나오는 대량원부인은 일반적으로 신성왕태후가 왕태후가 되기 전 호칭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왕건에게는 25비주(妃主)가 있다고 하여 고려사의 기록과 차이가 있다. 다만 고려에서는 조선과 달리 후궁을 비(妃)로 칭했으므로 후궁 23명에 훗날 왕태후로 승격된 명복궁대부인, 대량원부인을 추가하면 정확히 25명이 된다.[3] 태조는 이들에게 고려의 궁원을 봉해주었다.[4] 신혜, 장화, 정덕[5] 신명, 신정, 신성[6] 헌목, 정목, 숙목, 예화, 성무[7] 태조의 제6비 정덕왕후의 아들[추존] [추존] [10] 경장태자의 딸인 원용왕후정덕왕후와 같은 정주 류씨이고, 류씨 성을 따를 수 있는 모계 후계가 있는 사람은 오직 원장태자 뿐이기 때문이다.[11] 경주 평씨(慶州 平氏)[12] 명주 왕씨(溟州 王氏). 현재의 강릉 김씨이며 강릉 김씨 중 몇몇 왕씨로 사성받은 인물들은 강릉 왕씨로 부르기도 한다.[13] 정확히 계모는 아니더라도 국왕을 키워준 사람에게 주던 호칭이다.[14] 진주(진천) 임씨(鎭州 林氏)[15] 사서에서는 성이 누락되어 있으나 태조 즉위 직후 있었던 인사 이동에서 임명필(林明弼)이 순군부령에 임명되는데, 고려 초기에는 같은 이름의 한자 표기가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점으로 인해 임씨로 보기도 한다.[16] 광해주 왕씨(光海州 王氏). 사성정책 전에는 해주 박씨(海州 朴氏)[17] 평주 박씨(平州 朴氏). 이전에는 평산 박씨(平山 朴氏)[18] 태조의 제27비[19] 태조의 제28비[20] 태조의 제11비 천안부원부인의 장남[21] 태조의 제10비 숙목부인(肅穆夫人)의 장남[22] 여담으로 한국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호부견자다.《고려사》에 따르면 인성이 개막장인데다가 질이 나쁜 인간들과 어울려 다녔고, 결국 광종 즉위 이후 반역을 꾀하다 사사당했다.《제국의 아침》에서는 작가가 거열형으로 끔살당하게 만드는 역사 왜곡을 저지른 덕분에 이 드라마 이후 광종을 다룬 다른 작품들에서도 대접이 영 좋지 않다.[23] 경주 임씨(慶州 林氏)[24] 태조의 제10비 숙목부인(肅穆夫人)의 장남[25] 고려사 종실열전 태조소생왕자편 서론에서는 주림(珠琳)이라 기록되어 있으나 본편에서는 림주(琳珠)라고 기록되어 있다.[26] 태조의 제10비 숙목부인(肅穆夫人)의 장남[27] 홍주 홍씨(洪州 洪氏)[28] 협주 이씨(俠州 李氏). 이전에는 합주 이씨(陜州 李氏)[29] 명주 왕씨(溟州 王氏). 사성정책 전에는 강릉 김씨(江陵 金氏)[30] 양근 함씨(楊根 咸氏)[31] 승주 박씨(昇州 朴氏). 현재는 순천 박씨(順天 朴氏)[32] 동주 김씨(洞州 金氏)[33] 이후 같은 가문의 김치양천추태후와 사통하고 그 자식이 왕위를 노리는 사태까지 벌어진다.[34] 신주 강씨(信州 康氏). 지금은 신천 강씨(信川 康氏)[35] 평주 박씨(平州 朴氏). 이전에는 평산 박씨(平山 朴氏)[36] 태조의 25비[37] 태조의 제28비[38] 평주 박씨(平州 朴氏). 이전에는 평산 박씨(平山 朴氏)[39] 태조의 25비[40] 태조의 제27비[41] 위치 미상인 곳은 기록된 순서로 봤을 때 제천과 진천 사이에 있는 “냉정”이 충주, 영월과 영월 사이에 있는 “냉수현”이 영월로 추정된다. “별근”의 경우 “붉은”의 가차로 보이므로 영월과 인접한 단양으로 추정이 가능하며, 한자는 다르지만 단월(丹月)역의 경우 괴산군에 소재한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나와있다.[42] 태조의 제11비 천안부원부인(天安府院夫人)의 아들[43] 태조의 제4비[44] 문원대왕의 아들[45] 할머니 신명왕후의 성씨를 따랐다.[46] 태조의 제6비[47] 이름은 아지(阿志)[48] 태조의 제6비 정덕왕후 류씨의 삼남[추존] [50] 태조의 제7비 헌목대부인의 차남[추존] [52] 대종의 3남[53] 위의 궁인 한씨와는 다른 인물로, 《고려사》 세가에는 "작은 한씨(小韓氏)"로 언급된다.[54] 인경현비의 차남[55] 문종의 동복동생 정간왕 왕기의 아들[56] 문종의 손자인 예종의 제3비[57] 《고려사》 열전 왕영 편에는 정종(靖宗)의 딸로 잘못 기재되어 있다.[58] 禔는 제, 지, 시 세가지로 훈음된다. 《고려사》 한글 변역본에서도 혼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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