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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삼성 라이온즈의 전·후반기 통합우승으로 한국시리즈가 열리지 않았다. [B]: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개최일 연기, 고척 스카이돔 중립경기 개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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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한국프로야구 포스트시즌 | ||
1991 KBO 준플레이오프 | 1991 KBO 플레이오프 | 1991 KBO 한국시리즈 |
1991년 한국시리즈 우승팀 | |
해태 타이거즈 | |
MVP | 장채근 |
[clearfix]
1. 개요
1991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 |
빙그레 이글스 | 해태 타이거즈 |
시리즈 MVP는 팀의 주전 포수로서 15타수 7안타 8타점을 친 장채근이다.
2. 일정
1991 한국시리즈 빙그레 이글스 VS 해태 타이거즈 | |||||||
<rowcolor=#ffffff> 경기 | 경기 시간 | 경기장 | AWAY | 결과 | HOME | 방송사 | |
1차전 | 10월 9일 18:00 | 무등 야구장 | 빙그레 이글스 | 4 | 9 | 해태 타이거즈 | |
2차전 | 10월 10일 18:00 | 2 | 11 | ||||
3차전 | 10월 12일 14:00 |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 | 해태 타이거즈 | 4 | 1 | 빙그레 이글스 | |
4차전 | 10월 13일 14:00 | 5 | 4 |
3. 엔트리
3.1. 해태 타이거즈
해태 타이거즈 1991년 한국시리즈 엔트리 | ||
<colbgcolor=#09081e> 감독 | 1명 | 김응용 |
코치 | 8명 | 백기성, 유남호, 김봉연, 서정환, 차영화, 이상윤, 김경훈, 조충열 |
투수 | 8명 | 선동열, 김정수, 신동수, 문희수, 조계현, 이강철, 송유석, 강태원 |
포수 | 2명 | 장채근, 정회열 |
내야수 | 7명 | 김성한, 한대화, 박철우, 윤재호, 홍현우, 김태완, 백인호 |
외야수 | 5명 | 김종모, 이순철, 이건열, 김성규, 이호성 |
3.2. 빙그레 이글스
빙그레 이글스 1991년 한국시리즈 엔트리 | ||
<colbgcolor=#000000> 감독 | 1명 | 김영덕 |
코치 | 6명 | 김명성, 이희수, 함학수, 송일섭, 황병일, 정구선 |
투수 | 9명 | 한용덕, 한희민, 송진우, 이동석, 진정필, 김대중, 장정순, 김인권, 김홍명 |
포수 | 3명 | 김상국, 양용모, 유승안 |
내야수 | 8명 | 강정길, 전대영, 장종훈, 강석천, 황대연, 조양근, 지화동, 김용선 |
외야수 | 6명 | 이정훈, 이강돈, 이중화, 임주택, 진상봉, 임성우[1] |
4. 시리즈 전 상황
전년인 1990년 간발의 차로 정규시즌 우승에 실패하고, PO에서 삼성 라이온즈에게 충격적인 3연패를 당한 후, 김응용 전 감독은 바로 지리산에 칩거하며 팀의 문제점을 분석했고, 그 결과를 통해 1991년에는 그야말로 칼을 갈고 나오며 시즌을 임했다. 그렇지 않아도 강해진 전력에 독기를 품은 해태는 1991년에 시즌 전체를 지배하다시피 했다. 시즌 초반 김성한의 부상으로 잠시 주춤했지만, 5월부터 치고 나간 해태는 압도적인 정규시즌 1위를 차지했다. 618득점/409실점으로 피타고리안 승률을 이용해 기대승률을 따지면 역대 2위(.695)[2]로 91승을 거둔 2000년의 현대보다 더 높았다.[3] 그러나 뒤집어 말하면 실제승수보다 피타고리안 승률이 현저히 낮으려면 크게 이기고 작게 지는 경기가 많아야 한다. 실제로 그해 해태는 1점차 승부에서 7승 18패로 8개 구단 중 압도적인 꼴찌를 기록한다. 전체 패배의 43%가 1점차 패배였던 것이다. 피타고리안 승률에 의하면 87승 1무 38패 또는 86승 3무 37패 쯤을 거두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79승 5무 42패로 거기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1점차 승부에서 약하다는 점과 빙그레와 8승 3무 7패로 호각이라는 점 때문에 페넌트레이스에서 압도적인 승률을 기록하고도 분위기의 차이는 그정도로 대단하지는 않았다.빙그레 역시 전력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1980년대 말 최고의 전력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는데, 타선은 이 해 35홈런을 친 장종훈을 위시하여 여전히 강했지만, 마운드의 원투펀치인 이상군과 한희민이 그동안 무리한 대가를 치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 자리를 송진우와 한용덕이 등장해 메우고 있었지만, 마운드의 높이에서는 해태에 비해 분명 약했고, 여기세 PO에서 준PO에서 4경기나 치르면서 전력을 소모한 삼성을 상대로 생각보다 시원하게 이기지 못하면서 앞선 1989년과는 달리 이번 시리즈는 해태가 절대 우세한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 분위기대로 결과가 나왔다.
5. 결과
5.1. 1차전
한국시리즈 1차전, 10월 9일 수요일, 18:00, 무등 야구장 | ||||||||||||||
팀 | 선발 | 1 | 2 | 3 | 4 | 5 | 6 | 7 | 8 | 9 | R | H | E | B |
빙그레 | 한희민 | 0 | 1 | 1 | 0 | 0 | 0 | 0 | 2 | 0 | <colbgcolor=#dcdcdc,#222222> 4 | 8 | 2 | - |
해태 | 선동열 | 0 | 3 | 1 | 0 | 0 | 2 | 0 | 3 | - | 9 | 6 | 0 | - |
중계방송사: | 캐스터: 이장우 | 해설: 하일성[타사중계1] |
빙그레의 타선은 나쁘지 않았다. 찬스도 잘 잡았고, 무엇보다 선동열 상대로 4점을 내면서 끈질기게 공략했다. 만일 정상적으로 한용덕이 나왔다면, 승부는 정말 알 수 없었던 일. 어쨌거나 해태는 마운드에서 선동열이 9이닝 4실점으로 완투하며 시리즈 첫 승을 챙겼다.
여담이지만, 이날 빙그레의 경기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김영덕 전 감독은 경기 도중 덕아웃에서 호통 치는 장면이 중계화면에 잡히기도 했었다.[5]
5.2. 2차전
한국시리즈 2차전, 10월 10일 목요일, 18:00, 무등 야구장 | ||||||||||||||
팀 | 선발 | 1 | 2 | 3 | 4 | 5 | 6 | 7 | 8 | 9 | R | H | E | B |
빙그레 | 한용덕 | 1 | 1 | 0 | 0 | 0 | 0 | 0 | 0 | 0 | <colbgcolor=#dcdcdc,#222222> 2 | 7 | 3 | - |
해태 | 김정수 | 0 | 1 | 1 | 0 | 6 | 1 | 2 | 0 | - | 11 | 13 | 1 | - |
중계방송사: | 캐스터: 양진수 | 해설: 허구연, 김소식 |
승부는 5회말에 갈렸다. 2사 후에 이건열의 역전 홈런을 신호탄으로 제구가 흔들린 한용덕을 공략하면서 한용덕을 마운드에서 끌어 내린다. 후속 투수는 그 해 8승을 거둔 신인 김인권이었다. 그러나 신인으로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여기서 해태는 한대화와 장채근의 연속 적시타를 묶어 대거 6득점에 성공했다. 그리고 7회말과 8회말에도 점수를 추가하면서 빙그레를 대파하면서 기선을 확실하게 제압했다.
5.3. 3차전
한국시리즈 3차전, 10월 12일 토요일, 14:00,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 | ||||||||||||||
팀 | 선발 | 1 | 2 | 3 | 4 | 5 | 6 | 7 | 8 | 9 | R | H | E | B |
해태 | 문희수 | 0 | 0 | 0 | 0 | 0 | 0 | 0 | 4 | 0 | <colbgcolor=#dcdcdc,#222222> 4 | 4 | 1 | - |
빙그레 | 송진우 | 0 | 1 | 0 | 0 | 0 | 0 | 0 | 0 | 0 | 1 | 8 | 0 | - |
중계방송사: | 캐스터: 정도영 | 해설: 하일성[타사중계3] |
- 심판: 구심 이규석/1루 /2루 /3루 /좌선 /우선
홈으로 돌아온 빙그레는 송진우를 기용했고, 해태는 문희수을 내세웠다. 빙그레는 2회말 1점을 얻어 앞서갔고 송진우는 8회 2사까지 퍼펙트를 이어갔다. 그때까지 해태는 송진우를 전혀 공략하지 못하며 철저히 끌려가는 상황이었다. 빙그레 입장에서는 2회 점수를 낸 후, 무사 1루, 3루 찬스와 3회 무사 1루, 2루의 찬스를 놓친 것이 아쉬웠지만, 송진우의 구위가 워낙 좋았기 때문에 경기를 이기는 데 문제가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8회 2아웃 이후 대타 정회열 타석에서 충분히 잡을 수 있었던 파울플라이를 이중화가 놓친 것이 화근이 되었고[7], 2-2에서 회심의 공을 볼로 판정하면서 결국 정회열은 볼넷을 얻어 출루했다.[8] 퍼펙트가 깨진뒤 송진우는 홍현우에게 안타를 맞으며 노히트노런도 무산되었고 이어 장채근에게 역전 2타점 2루타, 윤재호에게 3루타를 허용하며 연속 3실점을 하고 강판된다. 그 후 구원등판한 장정순이 이건열에게 안타를 맞고 추가 1실점을 하여 결국 1:4로 빙그레가 패했다. 이로써 빙그레는 1차전, 2차전, 3차전을 모두 내주며 말 그대로 벼랑끝에 몰렸다.[9]
5.4. 4차전
한국시리즈 4차전, 10월 13일 일요일, 14:00,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 | ||||||||||||||
팀 | 선발 | 1 | 2 | 3 | 4 | 5 | 6 | 7 | 8 | 9 | R | H | E | B |
해태 | 김정수 | 0 | 0 | 0 | 0 | 0 | 0 | 0 | 3 | 2 | <colbgcolor=#dcdcdc,#222222> 5 | 7 | 0 | - |
빙그레 | 한용덕 | 1 | 0 | 0 | 1 | 0 | 0 | 0 | 2 | 0 | 4 | 8 | 1 | - |
중계방송사: | 캐스터: 양진수 | 해설: 허구연, 김소식 |
빙그레는 한용덕을 이틀 쉬고 내보내는 도박을 걸었고, 이 도박은 7회까지는 먹혔다. 빙그레가 1회 이정훈의 홈런과 4회 연속 2루타로 2:0으로 앞서갔다. 그러나 빙그레는 한 끗이 부족했다. 8회초에 무사 1루, 2루 찬스를 잡은 해태는 보내기 번트가 아니라 강공을 선택했고, 이 작전이 적중하여 대타 김태완의 동점 2루타로 동점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보내기 번트와 땅볼로 역전에 성공했다.
빙그레도 호락호락하지는 않아, 8회말 선동열을 상대로 강석천이 역전 2점 홈런을 치면서 승부를 다시 뒤집었다. 아웃카운트 3개만 잡으면 잠실로 가는 상황에서, 구원으로 나온 한희민은 장채근에게 동점 적시타를 허용했고, 3루수 실책이 나오면서 1사 1루, 2루의 찬스가 이어졌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이순철이 역전 적시타를 치면서 결국 9회초 다시 2실점하여 빙그레는 패배했다. 반대로 해태는 불리했던 경기를 기어이 뒤집으면서 2년 만에 한국시리즈 정상에 복귀하며 통산 6번째 우승을 달성했다.
6. 여담
- 앞선 1991년 준플레이오프는 3차전 무승부가 있었던 관계로 4차전이 치러졌다.[10][11][12] 또한 1991년 플레이오프는 4차전 끝에 3승 1패가 나왔다. 그리고 1991년 한국시리즈는 해태가 4차전만에 스윕하면서, 포스트시즌 모든 시합이 4차전만에 끝났다는 진기록을 남겼다.[13] 그리고 전년 시리즈에 이어 2년 연속 스윕으로 끝난 유일한 시리즈다.
- 3차전 8회 2아웃 정회열 타석의 2-2에서 바깥쪽 직구에 대한 볼 판정은 지금도 논란거리이다. 송진우 본인은 아직도 그 공을 스트라이크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당시 경기를 본 기자들은 그 공은 스트라이크를 줘도 할 말이 없는 공이었다고 인정한다. 반대로 당시 주심인 이규석 씨는 아직도 그 공은 볼이라고 확신하고 있고, 이후 당시 포수였던 유승안의 동의를 받았다고 주장했으나, 유승안의 인터뷰와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 3차전이 대역전패로 끝나자 그 공 하나로 경기가 바뀌었다고 생각한 대전의 일부 관중 + 잠실 경기 표를 미리 산 암표상이 합세해서 심판 숙소를 점거하고, 심판과 한 판 뜬 사건이 벌어졌다. 21세기인 지금이야 대전 보살팬으로 성향이 완전히 바뀌었지만 이 당시만 해도 마산아재, 대구아재, 도원아재, 광주아재 저리가라 할 정도로 성깔있는 대전아재들이었다.[18] 어쨌든 결과는 의외로 심판의 승리. 대신에 경찰에 가서 치료비는 다 물어줘야 했다고 한다.
- 김영덕 전 빙그레 감독의 '큰 경기에 약한' 이미지가 굳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오죽하면 4차전까지 내주며 홈에서 시리즈가 끝나자, 대전의 빙그레 홈 관중들이 "앞으로 빙그레는 정규시즌만 김영덕 전 감독에게 맡기고, 한국시리즈는 감독을 따로 써라"고 성토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듬해 롯데와의 한국시리즈마저 패하며 김영덕 전 감독은 두고두고 큰 경기에 약한 감독으로 남게 되었다.[19]
- 한희민은 전년도 빙그레의 시즌을 종료하는 경기였던 (삼성과의) 1990년 준플레이오프 2차전 9회말에, 김용철과 이만수에 각각 홈런을 허용하면서 패전투수가 된 적이 있었다.[20] 그리고 1991년 한국시리즈 빙그레의 마지막 경기인 4차전에서도, 9회에 역전을 허용하면서 패전투수가 된다.
- 빙그레는 한국시리즈에서 해태를 상대로 이 시리즈까지 세번 맞붙어서 모두 패했다. 빙그레-한화 이글스의 첫 우승이 늦어진 것도 따지고 보면 해태 때문이었다.[21] 하필 빙그레의 전성기[22]가 해태의 전성기와 일치했기 때문에 빙그레-한화팬들은 삼성팬 못지 않게 해태-기아에 대한 반감이 높았다. 하지만 이후 빙그레-한화와 해태-기아가 한국시리즈에서 만난 일은 약 30년이 되도록 없다.[23]
- 선동열 야구 인생에서, 포스트시즌에 마지막으로 선발 투수로 등판한 경기가 바로 1991년 한국시리즈 1차전이다. 이후 4차전, 그리고 1993년 한국시리즈, 1994년 준플레이오프에서는 모두 구원투수로만 등판한다.
- 우승 엠블럼에 오타가 있었다. 'SERIES'가 'SERISE'
시라이즈로 적혀져 있었던 것이다.[24]이것이 오랫동안 고쳐지지 않고 있다가 최근에 와서야 겨우 수정되었다. # 또한 이 당시 우승 횟수는 6회인데 별도 6개가 아니라 7개가 표시되어 있다. 이 시절에 별은 그저 장식일 뿐, 갯수에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승 횟수만큼 별을 삽입하기 시작한 시기는 13년 후인 2004년부터이다.
- 온라인 야구게임 마구마구에서 해태 타이거즈 년도덱들은 인기가 없었지만 블랙카드와 베테랑, 듀얼포지션 등이 패치되면서 현재 1991년 해태덱은 큰 인기를 자랑한다.
- 4차전 우승 확정이 TV로 중계되지 못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당시 중계방송사였던 MBC가 8회말 종료 후 정규방송 관계로 중계를 끊어버렸기 때문이다.[25][26] 당시 이것 때문에 엄청난 비판을 받은 탓인지, 이후 지금까지도 한국시리즈 우승이 확정되는 경기는 어떤 일이 있어도 지상파로 생중계하는 게 관례가 되었다.[27]
- 4차전에서 동점타를 친 김태완은 대전, 북일고 출신인데 한동안 대전구장에만 가면 대전아재들에게 배신자라고 하는 등 온갖 욕을 들어야 했다고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술회했다.
- 2024 시즌을 끝으로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파크에서 1군 경기가 열리지 않게 됨에 따라 이 구장에서 챔피언 트로피를 들어올린 유일한 시리즈가 됐다. 정작 한밭야구장을 홈으로 썼던 OB 베어스와 한화 이글스는 중립 구장 경기에 의거해 각각 동대문야구장과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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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등번호는 52번이며, 4차전 9회말 2사 상황에서 선동열에게 삼진을 허용한 타자다.[2] 피타고리안 승률은 팀득점의 제곱 ÷ (팀득점의 제곱 + 팀실점의 제곱)으로 단순히 득점/실점을 따져 기대승률을 구하는 공식. 점수를 많이 이기고 적게 주는 팀이 높은 승률을 올리는 건 상식적으로 당연한 일이기에 그팀이 전력에 비해 얼마나 좋은 승률을 올렸는지 가늠하는 지표이기도 하다.[3] 1위는 1982년 삼성 라이온즈이며 당시는 한팀이 80게임만을 치렀다.[타사중계1] MBC 라디오: 고창근 - 허구연.[5] 자세한 내막을 소개하자면, 6회초 빙그레의 공격때 무사 1루, 2루에서 3번타자 장종훈이 2루 땅볼로 간발의 차로 아웃된 사이에 2루주자 이정훈과 1루주자 이중화가 각각 3루, 2루로 진루하였고, 곧 이어진 1사 2루, 3루에서 4번 강정길이 유격수 플라이, 그리고 후속타자 이강돈이 1루 땅볼로 맥없이 물러나버렸다. 안타 하나면 동점도 가능했는데 중심타자들이 제 역할을 못해주니 감독 입장에선 분노 폭발할 만 했던 상황. 그리고 빙그레는 6회말에 곧 2실점을 함으로서 1차전의 승부가 기울어지고 만다.[타사중계3] MBC 라디오: 송인득 - 김소식.[7] 파울플라이만 잡았으면 퍼펙트게임이 완전히 굳혀질 가능성이 컸었다.[8]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정회열이 밝힌 바에 따르면 스트라이크를 줘도 할 말 없는 공이었다고 한다. 송유석-정회열 출연 회차에 당시 송진우와 정회열의 맞대결 영상이 있다.[9] 이후 이규석 구심의 인터뷰에서 송진우의 5구째 판정에 대해서 생각이 많았었다라고 밝혔다.[10] 당시 1991년 준플레이오프는 3전 2선승제였다.[11] 두번째 오버시리즈는 2004년 한국시리즈였는데, 이때는 경기 개시 후 4시간이 지나서도 무승부일 경우, 더 이상의 진행을 안해서 무승부가 속출하다 보니 7차전을 넘기는 촌극이 나온 탓이었다.[12] 준플레이오프 4차전은, 2005년 준플레이오프가 5전 3선승제로 바뀌면서 다시 나오게 된다.[13] 이후 2016년 포스트시즌에서 2차전이 최종전인 와일드카드 결정전을 제외하고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 한국시리즈가 모두 4차전에서 끝났다. 공교롭게도 이 때 한국시리즈 MVP도 포수였다.[14] 서울 연고였던 OB, LG는 진작에 4강 탈락했고, 한국시리즈가 5차전까지 갔으면 잠실에서 열릴 가능성도 있었는데, 해태가 스윕으로 막은 것이다. 더불어 이 당시에는 플레이오프 5차전마저 잠실 중립 경기가 있었는데 빙그레가 3승 1패로 이겨서 5차전이 치러지지 않았다.[15] 한국시리즈 한정으로는 1987년 한국시리즈 이후 두 번째로 서울에서 단 한 경기도 안열리고 끝난 시리즈이다. 이후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세 번째로 서울에서 한국시리즈가 열리지 않고 끝났다.[16] 한편 서울에서 열리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2020년~2021년에는 대규모 전염병의 유행으로 일정이 지나치게 밀리자 한국시리즈 전 경기를 고척 스카이돔에서 중립경기로 치르기로 결정하면서 역사상 4~5번째로 한국시리즈가 잠실에서 한 경기도 열리지 않게 되었다. 2022년에도 잠실에서 열리지 않았고 2023년에 4년 만에 잠실에서 열리게 된다.[17] 송우석, 유원상과 유민상은 은퇴를 하였고 송우현은 음주운전으로 임의탈퇴가 되어 현역으로 뛰고 있는 2세는 정해영이 유일하다. 그리고 이 2세들 5명 중 송우현을 제외하고는 모두 아버지가 현역으로 뛰었던 팀에서 뛴 경력이 있다. 송진우 외조카인 이우찬도 LG트윈스에서 뛰고 있다.[18] 그러나 아직도 악명높은 대구아재, 마산아재들과는 달리 대전아재들은 2000년대를 끝으로 직관이 줄어들음으로서 세대교체가 되어 자연스럽게 보살 응원 문화로 바뀌었다. 실제로 2010년대 이후의 한화 홈구장은 10대부터 40대까지 다채로운 연령대가 오지만, 1980~1990년대에 한참 날렸던 대전아재 세대에 속한 50대~60대들은 별로 직관을 하지 않고 야구 얘기가 나와도 무덤덤하다.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굳이 추론하자면 오랜 암흑기로 인한 체념 + 영남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점잖은 충청의 지역 성향이 작용함에 따라 대전아재들의 야구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것으로 추측된다.[19] 1982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지만 이후 준우승만 하면서 큰경기에 약한 이미지가 남게 되었다.[20] 이만수에게 허용한 홈런은 끝내기 홈런이다.[21] 하지만 삼성은 이미 1985년에 통합우승으로 V1을 달성한 바 있다. 그러나 한국시리즈 한정 첫 우승은 통합 우승 이후 17년이나 지난 후에서야 했다. 그것도 자신들을 해태 시절 그렇게 한국시리즈에서 괴롭힌 감독 휘하에서.[22] 1988년~1992년 5시즌 동안 한국시리즈에 4회나 진출했는데, 이는 해태보다도 1회 많다.[23] 1994년, 2006년에 만난 적도 있긴 하나 둘 다 한국시리즈가 아닌 준플레이오프였다. 그리고 1994년에는 2승 스윕으로 한화가 해태를 눌렀으나 플레이오프에서 태평양에게 스윕패로 탈락했고, 2006년에는 2승 1패로 한화가 KIA를 누르고 플레이오프에서 현대를 연파하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해태-KIA는 한국시리즈에서는 극강이어도 준플레이오프와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는 이상하게 단 한 번도 승리를 못할 정도로 약했다. 그건 준플밖에 못 올라올 정도면 그해의 전력이 별로였다는 의미라고 볼수 있다.[24] 이 오타는 1997년 한국시리즈 우승 엠블럼에서도 나타난다. 다만 나무위키에 업로드된 우승 엠블럼은 오타 및 별 수가 수정된 형태가 업로드되어 있다.[25] 8회말 종료시점에서는 빙그레의 1점차 리드 상황이기는 했다.[26] 1991년 당시는 케이블TV 출범 전이다. 대신 KBS 제2라디오에서 라디오 중계는 계속했다.[27] 당장 이듬해인 1992년 한국시리즈 마지막 경기인 5차전도 MBC 지상파 중계였다. 경기시간은 밤 9시를 넘어갔고 정상적이라면 9시 뉴스가 방송됐어야 했지만(당시 MBC 뉴스데스크는 밤 9시에 방송시작이었다), 전년도 기억 때문인지 정규방송 대신 끝까지 야구 중계를 계속했다. 그리고 이후에도 (방송 3사를 통틀어서) 정규방송 때문에 한국시리즈 중계가 경기 중간에 끊기는 일은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