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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트니 휴스턴/커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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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io Album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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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hitney
Houston

(1985. 02. 14.)
Whitney
(1987. 06. 02.)
I'm Your Baby Tonight
(1990. 11. 06.)
My Love Is Your Love
(1998. 11. 17.)
파일:Justwhitney-1024x1024.jpg
파일:onewish.jpg
파일:Ilooktoyou(Album).jpg
Just Whitney
2002. 12. 10.
One Wish
(2003. 11. 18.)
I Look To You
(2009. 08. 28.)
[ Soundtrac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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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akaoTalk_Photo_2020-04-19-22-51-5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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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parkle_-_Official_Album_Cover.png
||
The Bodyguard OST
(1992. 11. 25.)
Waiting to Exhale OST
(1995. 12. 22.)
The Preacher's Wife OST
(1996. 11. 26.)
Sparkle OST
(2012. 07. 31.)
[ Compilatio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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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hitney: The Greatest Hits
(2000. 05. 16.)
Love, Whitney
(2001. 11. 20.)
The Ultimate Collection
(2007. 10. 29.)
The Collection
(2010. 04. 19.)
파일:The_Best_of_Whitney_Houston.jpg
The Best of
Whitney Houston

(2012. 11. 13.)

[ Singles ]
||<tablebgcolor=#FFFFFF,#191919><tablecolor=#000000,#E5E5E5><tablewidth=100%><width=10%><colbgcolor=#efeee9><-2> ↓ 1980년대 ↓ ||
1984년 Hold Me[1]
1985년 Someone for Me[A] · Thinking about You[데뷔싱글] · You Give Good Love · All at Once · Saving All My Love for You · How Will I Know
1986년 Greatest Love of All
1987년 I Wanna Dance with Somebody (Who Loves Me) · Didn't We Almost Have It All · So Emotional
1988년 Where Do Broken Hearts Go · Love Will Save the Day · One Moment in Time · I Know Him So Well
1989년 It Isn't, It Wasn't, It Ain't Never Gonna Be[4]
↓ 1990년대 ↓
1990년 I'm Your Baby Tonight · All the Man That I Need
1991년 The Star-Spangled Banner · Miracle · My Name Is Not Susan · I Belong to You
1992년 We Didn't Know[5] · I Will Always Love You
1993년 I'm Every Woman · I Have Nothing · Run to You · Queen of the Night · Something in Common[6]
1994년
1995년 Exhale (Shoop Shoop)
1996년 Count on Me[7] · Why Does It Hurt So Bad · I Believe in You and Me
1997년 Step by Step · My Heart Is Calling
1998년 When You Believe[8] · Heartbreak Hotel[9]
1999년 It's Not Right but It's Okay · My Love Is Your Love · I Learned from the Best
↓ 2000년대 ↓
2000년 If I Told You That[10] · Could I Have This Kiss Forever[11] · Same Script, Different Cast[12] · Fine
2001년 The Star-Spangled Banner[재발매]
2002년 Whatchulookinat · One of Those Days
2003년 Try It on My Own · Love That Man · One Wish (for Christmas)
2004년
- 2008년
2009년 I Look to You · Million Dollar Bill · I Didn't Know My Own Strength[A]
↓ 사후 ↓
2012년 Celebration · His Eye Is on the Sparrow · I Look to You[15]
2016년 Memories[16]
2019년 Higher Love · Do You Hear What I Hear?[17]
2021년 How Will I Know[18]
[ 각주 ]

[1] Teddy Pendergrass와의 합작[A] 프로모션용 싱글[데뷔싱글] [4] Aretha Franklin과 합작[5] Stevie Wonder와의 합작[6] Bobby Brown 싱글에 피처링[7] Cece Winans와 합작[8] Mariah Carey와 합작[9] Faith Evans, Kelly Price와 합작[10] George Michael과 합작[11] Enrique Iglesias와 합작[12] Deborah Cox와 합작[재발매] [A] [15] R. Kelly와의 듀엣 버전[16] Siti Nurhaliza와 듀엣 버전[17] Pentatonix와의 듀엣 버전[18] Clean Bandit과의 듀엣 버전
[ 관련 문서 ]
||<tablebgcolor=#fff,#191919><tablewidth=100%><width=240><colbgcolor=#efeee9> 일생 ||<width=760>커리어 · 공연 · 투어 ||
음반 목록 음반 · 싱글
영화 목록 필모그래피 · <프린세스 다이어리> · <The Cheetah Girls>
관련 문서 수상 목록 · 세계 3대 디바
다큐멘터리 휘트니 · I Wanna Dance with Somebody

1. '63 ~ '85 : 유년 시절 및 데뷔 이전2. '85 ~ '87 : 1집 《Whitney Houston》 시절3. '87 ~ '90 : 2집 《Whitney》 시절4. '90 ~ '92 : 3집 《I'm Your Baby Tonight》 시절5. '92 ~ '95 : 영화 <보디가드> 시절6. '95 ~ '98 : 배우 활동 기간7. '98 ~ '00 : 4집 《My Love Is Your Love》 시절8. '01 ~ '09 : 5집 《Just Whitney》, 그리고 몰락9. '09 ~ '12 : 6집 《I Look To You》 시절10. '12 ~ : 죽음, 그 이후

1. '63 ~ '85 : 유년 시절 및 데뷔 이전

파일:bbzt53h-1596061157.jpg
유년 시절의 휘트니 휴스턴
1963년 8월 9일 미국 뉴저지 주 뉴어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가스펠 가수인 씨씨 휴스턴이고 아버지가 연예 기획사의 최고 경영자인 존 러셀 휴스턴 주니어이며, 사촌인 디온 워윅, 디디 워윅 역시 가수인, 뮤지션 집안 혈통이다.[1] 1967년 뉴어크에서 폭동이 발생한 후 휘트니의 가족들은 뉴저지 주의 이스트 오렌지(East Orange)로 이사를 갔다.

9살 때 휘트니 휴스턴은 어머니 씨씨 휴스턴과 함께 녹음실에 갔고 거기서 처음으로 '전설의 가창력'이라 불리는 아레사 프랭클린을 만난다. 11살 뉴저지 주 뉴호프 침례교회에서 교회 성가대의 독창자로 활동하였고, 한편 어머니가 나이트클럽에서 공연할 때 같이 무대에 서기도 했다. 가족 특징 상 가수와 접점이 많았던 덕분에, 휘트니 휴스턴은 어린 시절부터 아레사 프랭클린 이외에도 글래디스 나이트, 샤카 칸, 저메인 잭슨[2] 등 다양한 가수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의 음원 작업에 백보컬로 참여하면서 가수의 꿈을 키워갈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10대 시절에 휘트니가 백보컬에 참여한 곡이 1978년 발매된 샤카 칸의 "I'm Every Woman"이다.[3] 그리고 'Mount Saint Dominic Academy'라는 여자 고등학교에 진학하는데, 이때 휘트니가 결혼하기 전까지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친구 로빈 크로포드를 이때 만난다.


파일:whitney-houston-seventeen-magazine-model-lva.jpg
모델 활동을 하던 휘트니 휴스턴

활동을 이어 가던 중 한 사진작가의 눈에 띄어 1980년 십대 패션 모델로서도 활동하기 시작하였으며, 잡지 Young Miss, Cosmopolitan 등 하이틴 패션 잡지 seventeen 등에서 표지 모델로 활동했다.[4] # 한편 모델 활동 중에도 그는 각종 녹음 활동을 꾸준히 이어가는데, 1982년엔 밴드 Material의 정규 3집 《One Down》의 'Memories'를 리메이크했으며,[5] 1983년엔 폴 자바라의 정규 4집 《Paul Jabara & Friends》의 'Eternal Love'의 리드보컬을 맡았다. 위에서 보듯, 휘트니 휴스턴은 처음엔 어머니와 연이 있는 가수들의 음원에서 백보컬을 맡았지만, 이후 가수들에게 실력을 인정받아 점차 어머니 인맥 밖의 가수들의 앨범에 자신만의 음원을 실으면서, 빠르게 경력을 쌓고 있었다. 요컨대, 활동 범위와 역할을 점점 넓혀가며 이름을 알려갔다는 것이다. 이후 나이트클럽에서 공연하던 도중, Arista Records의 신인 발굴 팀에 우연히 발견되어 음반 기획자이자 프로듀서인 클라이브 데이비스에 소개됐으며, 그의 눈에 들어서 데뷔했다.


1983년 'The Merv Griffin'에서의 데뷔 공연

정식 데뷔는 1985년 싱글 "Thinking about You"였지만, TV에서는 1983년에 'The Merv Griffin'에서 "Home"을 독창하고 어머니와 함께 "I Say a Little Prayer", "Ain't No Way", "You Send Me"를[6] 공연하여 더 일찍 데뷔를 한다. 이 중 "Home" 공연은 여러 매체들에 의해 휘트니 휴스턴 최고의 라이브 공연 중 하나로 꼽히며, 그 중에서 1등으로 꼽히기도 한다.[7] #A #B #C[8] 이 곡은 휘트니 최고의 라이브 공연을 모아놓은 컴필레이션 앨범 《Her Greatest Performances》에도 실려있다. 이후 1집 《Whitney Houston》이 발매될 때까지 듀엣곡들을 작업했는데, 대표적인 곡이 1984년 발표된 Teddy Pendergrass와의 합작 "Hold Me"와 동년에 발표된 저메인 잭슨과의 "Take Good Care of My Heart"였다. 이 중 "Hold Me"는 휘트니 휴스턴의 커리어 사상 최초로 빌보드 핫 100에 진입하여 18주 동안 차트인하였고 최고 46위를 기록하였다. 정식 데뷔도 하지 않은 무명의 신인치고는 꽤나 히트한 셈. 그러나 1집이 발매되기 전에 발표된 이 두 곡은 1년 6개월여 뒤 1집의 상업적, 비평적 대성공에도 불구하고 휘트니가 1986년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신인상에 후보로 지명되지도 못하는 원인이 된다.

2. '85 ~ '87 : 1집 《Whitney Houston》 시절

파일:Whitney Houston_young.jpg
데뷔 때의 휘트니 휴스턴

1985년 2월 셀프 타이틀 데뷔 앨범인 1집 《Whitney Houston》을 낸다. 이 앨범은 장장 2년에 걸친 프로젝트로 제작비로 40만불을 쏟아부은 대형 프로젝트이다. 허나 이 데뷔음반이 초반에 부진하여 빌보드 200에 들지도 못했었고, 이에 Arista Records는 3개의 싱글을 각각 다른 지역에서 1집의 첫 싱글로 발표함과 동시에 흑인 여성은 출연하기 어려웠던 자니 카슨의 'The Tonight Show Starring Johnny Carson'나 'Late Night with David Letterman'과 같은 심야 토크쇼에 휘트니 휴스턴을 출연시킴으로써 데뷔음반을 홍보하려 했다. 휘트니 역시 클럽 무대나 루서 밴드로스 등 가수들의 콘서트 오프닝 공연에 올라서 자신의 데뷔음반을 홍보하려 노력했다. 이런 홍보에도 불구하고, 발매된 3개의 싱글 중 "Someone for Me"는[9] 큰 인기를 얻지 못하고 차트에 들지 못했다. 한편 1집 앨범은 빌보드 200에 차트인한 후 꾸준히 상승하여 차트인 4주 만에 100위권을 돌파하면서 조금씩 인기를 얻는 등 나름 기대되는 성과를 거두고 있었지만, 큰 상업적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1985년 'The Tonight Show Starring Johnny Carson'에서의
"You Give Good Love" 공연

그러나 나머지 2개의 싱글, "All at Once"[10], "You Give Good Love"[11] 중 "All at Once"가 네덜란드벨기에 차트에서 TOP 5에 올랐고, "You Give Good Love"은 발매된 지 3개월만에 빌보드 핫 100에 진입하고 끝내 캐나다에서 7위, 빌보드 핫 100에서 최고 3위를 기록하며 북아메리카에서 히트곡이 된다.[12] "You Give Good Love"의 싱글차트 성공을 발판 삼아 1집도 빌보드 200 50위권에서 치고 올라와 TOP 15을 기록한다. 참고로 위 공연은 휘트니 휴스턴1983년 'The Merv Griffin'에서의 데뷔 공연 이후 처음으로 TV에 출연하여 이뤄진 공연이었다.

1985년 8월 중순 1집의 4번째 싱글인 "Saving All My Love for You"가 발매됐다. 앞선 싱글 "You Give Good Love"의 성공과 1집의 판매량 상승에 힘입어 이 곡은 휘트니 휴스턴의 첫 번째 빌보드 핫 100 1위곡이자 첫 번째 빌보드 연말 차트 진입곡[13], 빌보드UK차트 동시 1위곡이 된다. 연이어 1985년 11월 발매된 5번째 싱글 "How Will I Know"도[14] 빌보드 핫 100 1위를 2주간 기록하는 등, 휘트니의 싱글은 연달아 히트를 쳤고, 1집도 이 흐름에 편승하여 "You Give Good Love"의 성공 이후 오래도록 뚫지 못했던 빌보드 200 TOP 10의 장벽을 뚫고 TOP 5에 진입하는 것까지 성공한다. 한편 이 앨범은 비평적으로도 성공했는데, 당시의 앨범에 대한 찬사는 주로 Rolling Stones의 Don Sheway가 "휘트니 휴스턴의 목소리는 몇 년 동안의 가장 흥미로운 목소리 중 하나"와 평가한 것과 같이 주로 그녀의 완벽한 보컬에 기인했다.[15] 이를 바탕으로 1986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앨범'[16], '최우수 여성 팝 보컬'[17], '최우수 여성 R&B 보컬'[18]에 후보로 지명된다. 또한 "You Give Good Love"은 '최우수 R&B 노래'에 후보로 지명되었다.[19]

연이은 싱글히트 덕에 휘트니 휴스턴1985년 12월 빌보드에 의해 'New Black Artist', 'New Pop Artist'로 선정되었고 1986년 AMA에서 6개 부문에 후보에 올라서 이 중 'Favorite Soul/R&B Single'[20] 부문과 'Favorite Soul/R&B Video'[21] 부문을 수상한다. 한편 1986년 Grammy 이전까지 1집 《Whitney Houston》은 빌보드 200에서 최고 순위 2위를 기록한 뒤 점차 순위가 낮아졌으나, 1986년 3월 그래미 어워드 이후로 속칭 '그래미 버프'를[22] 받은 이후에 순위가 상승하여 마침내 빌보드 200에서 14주 1위를 차지하였고 그 후 2년 반 가량 차트인하여 총 3년 반 넘게 차트인하였다.[23] 또한 미국 내 총판 1,300만장(RIAA 13×플래티넘 인증) 및 전세계 2,20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여자 가수 데뷔 음반 최고판매기록을 갱신했다.[24]


1986년 Grammy에서의 "Saving All My Love for You" 공연

하지만 1집의 이러한 상업적 성공과 비평적 찬사에도 불구하고 1986년 Grammy에 후보로 지명된 3개 부문 중 단 한 부문, 그것도 장르 부문인 '최우수 여성 팝 보컬'만 수상하였으며, 본상 수상에는 실패하였다. 특히 신인상에는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는데, 공식적인 이유는 과거 참여했던 듀엣곡 'Hold Me'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후 앨라니스 모리셋이나 에이미 와인하우스, 노라 존스 등의 예를 보면 그냥 당시 그래미가 지금보다 훨씬 흑인에게 매정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25] 80년대는 흑인 여자 솔로가수의 존재 자체가 금기시되었던 시절이기 때문이다.[26][27] 이 당시에 휘트니 휴스턴의 그래미 스넙은 꽤 큰 논란을 불러왔으며 Arista 레코드의 클라이브 데이비스가 공식적으로 항의 메일을 보내기도 했지만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편 위 공연은 그 예술성을 인정받아 프라임타임 에미상의 'Outstanding Individual Performance in a Variety or Music Program'[28] 부문을 수상하였다. 이는 휘트니 휴스턴의 유이한 에미상 노미네이션 경력이자 유일한 에미상 수상 경력이 되었다.

그래미 어워드 이후 1986년에 앨범의 마지막 싱글 Greatest Love of All[29]이 발매되고, 이 싱글이 빌보드 핫 100에서 3주 연속 1위, 1986년 빌보드 연말 차트 11위를 기록함으로써 여성 아티스트 최초로 3개의 1위곡을 한 앨범에서 배출하는 성적을 거두며 휘트니 휴스턴의 국내외적 인기는 끊임없이 상승한다. 이를 바탕으로 휘트니 휴스턴1986년 7월 말 "The Greatest Love World Tour"라는 제목의 월드투어를 시작한다. 1986년 7월 26일 미국 메릴랜드 주의 'Merriweather Post Pavilion'에서의 첫 공연부터 1986년 12월 1일 미국 하와이 주의 'Neal S. Blaisdell Arena'에서의 마지막 공연까지 약 4개월 동안 진행되었으며 총 53회의 공연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현재는 해당 투어의 라이브 공연 영상이 소셜미디어 상에 거의 남아있지 않은 듯하다.

동시에 1986년 빌보드에서 '올해의 아티스트'[30]로 선정되고 1집 《Whitney Houston》은 여자 가수의 앨범으로서는 최초로 '올해의 앨범'으로 선정되었다. 빌보드 뮤직 어워드가 이때 있었다면 휘트니 휴스턴은 그해 시상식에서 5개 이상의 상을 받았을 수도 있으며, 아무리 적어도 3개는 받았을 것...이나[31] 아쉽게도 이때 빌보드 뮤직 어워드는 없었다.[32] 또한 1987년 1월 AMA에서 7개 부문에 후보지명 및 'Favorite Pop/Rock Female Artist', 'Favorite Soul/R&B Female Artist'를 포함한 5개의 상을 수상하며, 1987년 영국 브릿 어워드에서 'Best International Solo Artist' 부문에 후보에 오른다. 단 2년 안에 화려한 수상이력을 남기며 그는 세계적 아티스트로 발돋움 해나갔다.


1987년 Grammy에서의 "Greatest Love of All" 공연

1987년 그래미 어워드에서는 올해의 레코드상에 후보로 지명되었다. 앞선 화려한 수상이력을 바탕으로 제너럴 필드를 수상하나 싶었지만 아깝게도 수상하지는 못했다. 이 그래미 공연 이후 약 2달 뒤 휘트니 휴스턴의 정규 2집 《Whitney》 가 발매되면서, 정규 1집 《Whitney Houston》 활동은 휘트니 휴스턴이 세계적인 크로스오버 스타가 되었지만 음반의 뛰어난 상업적 성과와 비평적 호평에도 불구, 그래미 어워드의 기저에 깊게 깔려있는 인종차별 때문에 그래미 어워드의 제너럴 필드를 수상하지 못한 채 조금 아쉽게 마무리된다. 한편 위 "Greatest Love of All" 공연은 롤링 스톤을 위시한 여러 매체들에 의해 휘트니 휴스턴의 최고의 라이브 공연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1 #2 허나 휘트니 최고의 라이브 공연을 모아놓은 《Her Greatest Performances》에는 실려있진 않고, 1990년 휘트니의 소속사 Arista Records의 15주년 기념 공연인 'That's What Friends Are For: Arista Records 15th Anniversary Concert' 에서의 라이브 공연 버전이 대신 실려있다.


1986년 MTV에서의 "How Will I Know" & "Greatest Love of All" 공연[33]

그래도 휘트니 휴스턴의 1집이 큰 성공을 거둠으로서 흑인 여자 솔로 가수의 유리 천장이 깨지기 시작했는데, 당시 흑인을 외면하고 백인 중심으로 돌아가던 MTV에 "How Will I Know" 뮤직비디오가 쏟아져 나왔으며, 1986년 "Best Female Video"를 수상했던 것이 이를 상징한다. 2001년 MTV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휘트니 휴스턴 본인 역시도 "그 당시 MTV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참여하는 것은 큰 진전(a major breakthrough)이었는데 이는 MTV 아티스트, 백인 아티스트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마이클 잭슨이 가장 중대한 진전을 이루었고, 티나 터너, 나 자신, 바비 브라운 외 몇몇 다른 아티스트들도 진전을 만들었다." 고 회고했다. 그리고 자넷 잭슨, 메리 제이 블라이즈, 토니 브랙스턴, 비욘세, 앨리샤 키스1980년대 이후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자 가수가 대중음악계에 대거 진출한 것 역시 이 앨범의 대성공이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현재 《Whitney Houston》 이 비평적으로 호평을 받는 또 다른 이유이다.[34][35] 한편 휘트니 휴스턴은 이 시기부터 빼어난 가창력을 바탕으로 오페라의 주역 프리마돈나에게 쓰였던 호칭인 디바라고 불리기 시작했으며, 이 이후로 사람들은 빼어난 가창력을 가진 가수들에 디바의 호칭을 붙여 주기 시작한다. 2020년대에도 여전히 그는 '디바의 원조, 시초'로 평가받고 있는데, 그 이유가 바로 휘트니 휴스턴디바란 용어를 대중음악계에 최초로 도입했기 때문이다. 한편 위 "How Will I Know" 공연은 롤링 스톤을 위시한 여러 매체에서 휘트니 휴스턴의 가장 훌륭한 라이브 공연 중 하나로 꼽힌다. #1 #2 그렇지만 휘트니 최고의 라이브 공연을 모아놓은 《Her Greatest Performances》에는 실려있지는 않고, 1987년 브릿 어워드에서의 라이브 공연 버전이 실려있다.

3. '87 ~ '90 : 2집 《Whitney》 시절

파일:Whitney Houston_I wanna dance with somebody_1987.jpg
1987년의 휘트니 휴스턴

1987년에 발매된 2집 《Whitney》로 대성공을 거두면서 소포모어 징크스를 피해[36] 프린스, 마돈나와 함께 대표 가수로 자리매김함과 동시에, 마이클 잭슨을 잇는 세계적인 흑백 크로스오버 아티스트로 부상한다. 대중적 인기의 마돈나[37]를 물리치고 1987년 AMA에서 'Favorite Pop/Rock Female Artist'상을 수상할 정도로 대중성을 겸비하였다. 2집 Whitney 앨범은 전작의 히트메이커였던 나라다 마이클 월던과 마이클 매서를 주축으로 전작의 히트 공식을 충실히 따라갔으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여가수 최초로 빌보드 200 1위 데뷔에 성공하여 총 11주간 정상에 머물렀으며 빌보드 핫 100 1위 곡을 4개 배출[38]하고 빌보드 연말 차트 TOP 10곡 2곡을 배출[39] 함과 동시에 전세계 2,00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이 앨범, 특히 타이틀 곡 'I Wanna Dance with Somebody (Who Loves Me)'는 UK Official 차트 2주 1위, 연말차트 3위를 기록하는 등 유럽에서 전작보다 히트하여 휘트니를 확고부동한 월드스타로 만들어준다. 그러나 이러한 상업적 성공과는 별개로, 전작의 성공을 답습한다는 이유 때문에 비평적으로는 별로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한편 휘트니 휴스턴은 2집을 발매하자마자 'Moment Of Truth World Tour'라는 제목의 월드투어를 시작한다. 1987년 7월 4일 미국 플로리다 주 'Tampa Stadium'에서의 첫 공연부터 1988년 11월 20일 홍콩 'Hong Kong Coliseum'에서의 마지막 공연까지, 월드투어는 총1년 4개월 넘도록 진행되었으며 투어 동안 147회의 공연이 개최되었다. 이 투어는 2000만 달러 이상[40]의 수입을 거두며 '1987년 여자 가수의 투어 중 가장 높은 수익을 거둔 투어', '1987년 가장 높은 수익을 거둔 10개 투어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휘트니 휴스턴은 2개의 음반[41]과 2개의 투어[42]를 바탕으로 포브스가 선정한 '86-87년 가장 많은 돈을 번 연예인 TOP 40' 목록에 총 4400만 달러(2021년 기준 한화 약 1116억)[43][44] 수익을 올린 것으로 집계되면서 8위에 올랐다.#1 이 리스트에서 휘트니 휴스턴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린 흑인 여성 연예인, 2번째로 높은 수익을 올린 여성 연예인이자,[45] 3번째로 높은 수익을 올린 흑인 연예인이었다.[46] 차트, 판매량, 대중적 인기뿐만 아니라 두터운 팬층을 확보하고 투어도 성공함으로써 휘트니 휴스턴1987년자신이 세계적인 흑백 크로스오버 아티스트이자 1980년대 대표 가수로 자리매김하는 해로 만들며 성공적으로 보냈다.


1988년 Grammy에서의 "I Wanna Dance with Somebody" 공연

평론가들에게 좋은 평을 듣지는 못 했으나, 1986년과 똑같게 1988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앨범', '최우수 여성 팝 보컬'[47], '최우수 여성 R&B 보컬'[48] 총 3부문의 후보로 지명된다.[49] 이로써 휘트니 휴스턴은 3년 연속 그래미 어워드 제너럴 필드에 후보 지명되었으나, 이번에도 역시 제너럴 필드 수상은 불발되었고, 1986년 그래미 어워드에서와 마찬가지로 '최우수 여성 팝 보컬'을 수상하는 데 그쳤다.

그래미 어워드에서 제너럴 필드를 수상하는 것은 불발됐지만, 이와는 별개로 당시 휘트니 휴스턴의 인기는 지속적으로 올랐다. 2집 《Whitney》의 3번째 싱글 "So Emotional"은 1988년 빌보드 연말 차트에서 6위를 기록하여 그의 3번째 빌보드 연말차트 TOP 10 히트곡이 되었고, 연이어 발매된 4번째 싱글 "Where Do Broken Hearts Go" 역시 빌보드 핫 100 1위에 성공하며 한 앨범에서 4개의 1위곡을 배출한 최초의 여자 가수의 앨범사상 최초로 연속으로 발매된 7개의 싱글이 1위를 달성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후자의 기록은 비 지스비틀즈의 연속된 6개 싱글 1위의 기록을 갱신한 것이며 현재까지도 유일하게 휘트니 휴스턴만이 달성한 것이다. 이후 당해 7월과 11월에 각각 5번째, 6번째 싱글 "Love Will Save The Day", "I Know Him So Well"이 MV나 별도의 프로모션 없이 투어 중에 발매되고 전자의 싱글은 빌보드 핫 100 TOP 10을 기록한다. 12월에는 'Moment Of Truth World Tour'가 성황리에 종료되고 그해 말 휘트니 휴스턴은 '87-88년 가장 많은 돈을 번 연예인 TOP 40' 목록에 지난해에 이어 다시 올랐다.#2 한편 1989년 AMA에서는 87년, 88년에 이어 3년 연속으로 'Favorite Pop/Rock Female Artist' 부문을 수상했고 88년에 놓쳤던 'Favorite Soul/R&B Female Artist' 부문도 수상하면서[50] 팝 음악R&B라는 두 개의 큰 장르를 모두 섭렵한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임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 이렇게 휘트니 휴스턴1988년 역시 성공적으로 보내고, 2집 《Whitney》의 활동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다. 이후로는 1990년 11월 정규 3집 《I'm Your Baby Tonight》이 발매될 때까지 약 2년 간 간간히 싱글을 발매하고 짧은 투어를 다니는 정도로만 활동하며 휴식기를 갖는다.


1989년 Grammy에서의 "One Moment in Time" 공연

1988년 하반기에 《1988 Summer Olympics Album: One Moment In Time》의 타이틀 트랙인 "One Moment in Time"이 발매되었는데, 미국에서의 성적[51]에 비해 영국, 독일에서 1위를 달성하는 등 유럽에서 더 히트했다. 곡은 1989년 Grammy '최우수 여성 팝 보컬'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고, 휘트니 휴스턴은 89년 Grammy에서 좀 더 웅장한 분위기로 편곡된 곡을 공연했다. 이 공연은 그래미 어워드에서의 상징적인 무대를 모아둔 컴필레이션 앨범 중 하나인 《Grammy's Greatest Moments, Volume II》에 수록되었으며, 선정 매체에 따라 다르지만 휘트니 휴스턴의 가장 훌륭한 라이브 공연 중 하나로 꼽히며, TOP 3에 선정되기도 한다. #3 #4 #5 #6 위 공연은 휘트니의 최고 라이브 공연을 모아놓은 음반 《Her Greatest Performances》에 실려있다.

1989년 Grammy 3개월 이후 그는 평소 동경해오던 아레사 프랭클린과 합작하여 아레사의 정규 32집 《Through the Storm》의 2번째 싱글 "It Isn't, It Wasn't, It Ain't Never Gonna Be"라는 듀엣곡을 발표한다. 빌보드 핫 100에 최고 41위, UK차트에 최고 29위를 기록하였으며, 1990년 Grammy에서 '최우수 듀오 또는 그룹 알앤비 보컬' 부문에 후보로 지명된다. 수상에는 실패하였다. 한편 1990년 새해가 밝자마자(1월 1일) 휘트니 휴스턴은 'Feel so Right Tour'라는 제목의 투어를 시작했다. 앞선 2개의 월드투어와는 달리 이번 투어는 오직 일본에서만 개최되었으며, 일본 요코하마 'Yokohama Arena'에서 첫 공연을 시작하고 또 마지막 공연을 하기까지[52] 24일간 14회의 공연이 진행되어 아주 짧은 기간 동안만 투어를 했다. 이 투어는 정규 3집 《I'm Your Baby Tonight》 발매 전에 이뤄졌음에도 3집에 수록된 곡들 중 일부가 세트리스트에 들어있었다. 즉 일본 팬들에게만 먼저 새 앨범을 선보인 셈. 이 투어는 음반 발매 전 사전 프로모션을 위해 기획된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한편 휘트니 휴스턴은 에이즈, 암 등 질병으로 고통받거나 노숙하는 아이들을 돕기 위해 기금을 마련하는 단체인 'The Whitney Houston Foundation for Children'을 1989년에 설립하였다. 설립 이후 1990년대까지 꾸준히 활동해왔으나, 2000년대 이후 휘트니의 개인사에 여러 악재들이 겹치면서 활동이 중단되었다. 팬들은 2004년에 재단 활동이 중단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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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Arista Records 15주년 기념 공연[53]

1990년 휴식기 도중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소속사 Arista Records 15주년 기념공연에서 위의 3곡을 공연한 것이 있다. 선보인 곡들은 1990년까지 자신의 최고 히트곡이었던 2곡[54]과 휘트니 사촌인 디온 워윅의 최고 히트곡 1곡[55]이었다. 위의 라이브들 중 "I Wanna Dance with Somebody" 라이브는 휘트니 휴스턴의 가장 훌륭한 라이브 공연 중 하나로 꼽힌다. #7 #8 휘트니 최고의 라이브 공연을 모아놓은 《Her Greatest Performances》에 실려있으며, 한편 이때의 "Greatest Love of All" 공연도 상술된 음반에 실려있는데, 롤링 스톤 포함 많은 매체에서는 이 공연보다는 87년 Grammy에서의 공연을 더 호평하고 있다.

1~2집 시절에는 백인 취향의 음악만 한다는 (주로 흑인 평론가들의) 비판에 시달리기도 했다. 백인 취향 어덜트 컨템포러리 팝을 소울 창법으로 부른 것에 불과하다는 평이었는데 실제로 백인 대중의 입맛을 잡기 위한 마케팅이기도 했다. 댄스곡인 How Will I KnowI Wanna Dance with Somebody 는 확실히 아이돌스러운 댄스 팝 음악이지 진지한 음악은 아니었다. 본인이 노래를 엄청나게 잘 해서 고급스러웠을뿐... 휘트니보다 조금 더 일찍 활동을 시작해서 80년대 리듬 앤 블루스계를 불태운 아니타 베이커에 비하면 확실히 덜 검은 음악인게 사실이다. 일례로 1989년, 대표적인 흑인 음악 시상식 소울 트레인 어워드에서 후보로 휘트니 휴스턴을 지명하자 관객들이 일제히 야유를 터트렸다고 한다. 흠좀무. 이런 비판에 스스로도 스트레스가 많았던 것 같지만 한 인터뷰에서는 특정 집단의 취향에 맞춘 음악이 아닌 자신만의 음악을 하겠다는 당당한 답변으로 자신이 가진 생각을 나타냈다. 당시 잘나가던 바비 브라운[56]을 만나기도 했는데 그녀에게 흑인 가수로써 자부심을 심어줬다고 한다.

한편 2집 《Whitney》 활동 이후[57]부터는 휘트니 휴스턴의 목소리가 조금씩 굵어지고 악화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과도한 라이브 공연, 즉 거의 모든 공연을 100% 라이브로 진행함과[58][59] 동시에 마약 투여, 흡연, 음주의 증가 등 휘트니의 자기관리 부실에서 비롯되었다. 실제로 1987년 공연, 1991년의 공연, 1994년의 공연을 각각 들어보면 시간 순서대로 목소리가 굵어지며, 고음에서 음을 유지(hold)하는 시간이 짧아지고,[60] 음역대(Range)가 줄어든다.[61] 이렇듯 1990년대 들어서면서 휘트니 휴스턴의 보컬은 1980년대보다 악화한 탓에, 팬들(혹은 80-90년대 팝계에 관심있거나 깊이 아는 사람들)은 2집 《Whitney》까지를 휘트니 휴스턴의 보컬의 전성기로 평가하기도 한다. 물론 3집 《I'm Your Baby Tonight》까지를 보컬의 전성기로 보거나, OST 《The Bodyguard OST》까지를 보컬의 전성기로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62] 96년부터는 휘트니의 성량, 파워, 밀도 등 전반적으로 목소리가 악화되는 게 눈에 띄게 드러나면서, 이 시기 이후의 목소리를 전성기로 꼽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는 해당 시기를 서술한 문단에 더 자세히 후술하겠다.

4. '90 ~ '92 : 3집 《I'm Your Baby Tonight》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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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의 휘트니 휴스턴

회사의 요구에 따르기만 했던 1~2집과 달리, 슈퍼스타가 된 휘트니는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기 시작했다. 1989년 말부터 시작한 3집 《I'm Your Baby Tonight》의 작업에서 1,2집의 성공의 주역인 기존 프로듀서진의 참여를 최소화시키고 베이비페이스LA 리드를 메인 프로듀서로 수혈했으며 자신도 프로듀싱에 참여하여 본격적인 흑인 음악을 시도하게 된다. 한편 이 시기 활동의 특징으로는 공연에서 안무 비중이 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2집 활동 당시에는 "How Will I Know"나 "I Wanna Dance with Somebody"와 같은 댄스 음악을 공연 때 가볍게 무대를 옮겨다니며 아주 가벼운 안무를 했고, 이외의 곡을 공연할 때는 주로 백댄서 없이 가만히 서있으면서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3집 활동 시기에는 흑인 음악을 시도하면서는 체계적인 안무를 하며 공연하면서, 안무와 라이브를 동시에 소화하게 된다.[63] 이 시기 "I'm Your Baby Tonight"의 공연 영상을 보면 확연히 안무의 비중이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알앤비 소울에서 뉴 잭 스윙까지 당시 흑인 음악 트렌드를 충실히 반영했고 흑인 음악의 대부 스티비 원더와 R&B계의 신사 루서 밴드로스까지 참여한 이 앨범은 흑인 사회에 휘트니의 위상을 재정립할 계기가 된 의미있는 앨범이었다. 실제로 '89년엔 소울 트레인 뮤직 어워드에서 흑인 관중들의 야유를 받았었지만 이 앨범의 발매와 '91년 국가 제창을 계기로 하여 흑인들 사이에서 휘트니에 대한 인식은 180도 달라진다. 허나 이때의 휘트니의 흑인 음악으로의 전환에 음악 평론지들은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놓는다. 롤링 스톤의 James Hunter가 내놓은 "휘트니의 앨범 중 가장 뛰어나고 가장 통합된 앨범"과 같은 몇몇 긍정적 평가가 있었지만, AllMusic의 Ashley S. Battel이 내놓은 "이 앨범은 실망스러운 무언가이고, 그는 댄스 음악으로의 진출을 시도했지만 머라이어 캐리와 테일러 데인과 같은 아티스트들의 크로스오버 임팩트를 만드는 데 실패했다"와 같은 부정적인 평가가 많았다.

1990년 10월 3집의 리드 싱글 "I'm Your Baby Tonight"이 발매되었다. 이 곡은 팝 음악의 색채가 짙던 기존 휘트니의 싱글들과는 달리 당시 유행하던 뉴 잭 스윙 장르의 곡이었다. 음악계를 뜨겁게 달구던 당시의 신인 머라이어 캐리의 'Love Takes Time'의 4주 연속 1위를 저지하면서 1위를 얻어내면서, 당시 마돈나와 함께 여자 가수들 중 빌보드 핫 100에서 가장 많은 1위곡을 보유한 가수[64]가 된다. 1주 1위를 달성한 후 Stevie B의 'Because I Love You (The Postman Song)'에 1위를 내주었으며, 19주 간 차트인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전 싱글들과 비슷한 수준의 인기를 누린 듯 보이지만, 1991년 빌보드 연말 차트에서 42위라는 높지 않은 순위를 기록하면서, 이때까지 휘트니의 빌보드 연말 차트 진입곡들 중 가장 낮은 순위를 기록하게 된다. 이 노래는 1991년 그래미 어워드에 '최우수 여성 팝 음악 보컬'에 후보로 지명되었으나, 수상에는 실패하였다.

연이어 1990년 12월 3집의 두 번째 싱글 "All the Man That I Need"가 발매되었다. 직전 싱글과 달리 휘트니의 1,2집 성공을 이끌었던 Narada Michael Walden이 프로듀서로 참여하였기에 1,2집의 수록곡들과 유사한 느낌의 곡이었다. 이 곡은 2주 1위를 차지한 후 머라이어 캐리의 "Someday"에 자리를 내주었으며, 1991년 빌보드 연말 차트에 16위에 올라서, 1,2집의 이전 수록곡들과 비슷한 상업적 성취를 거두었다. 허나 이 이후로 3집 음반은 빌보드 핫 100 1위 곡을 배출하지 못하며 최종적으로는 2곡의 1위 곡을 배출[65]했고 빌보드 200에서도 최고 3위에 전세계 1,000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는 데 그친다. 이외에도 1집, 2집 때는 빌보드 연말 차트 TOP 10 곡을 각각 1곡,[66] 2곡[67] 배출하였던 반면 3집 활동 시기에서는 연말 차트 TOP 10 히트곡을 배출하지 못하는 등 전작에 비해 다소 저조한 상업적 성취를 거두었다. 일반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 1위 곡을 배출하고 1,00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한 이 앨범을 망했다고 말하기는 힘들겠지만 당시 휘트니의 엄청났던 인기와 비교해본다면 아쉬운 성적임을 알 수 있다.

5. '92 ~ '95 : 영화 <보디가드>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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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보디가드'에서의 휘트니 휴스턴

1992년, 휘트니는 바비 브라운과의 결혼과 보디가드라는 영화 출연을 통해 인간으로서, 그리고 가수로서 전환점을 맞이하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영화에 대해서는 보디가드 항목 참조. 영화는 비평적으로 처참했지만 흥행은 대성공했고 OST 앨범4,5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OST 앨범,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여가수 앨범,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 3위와 같은 무수한 기록을 세우며 공전의 히트 및 전 세계적으로 신드롬적인 인기를 누렸다. 빌보드 200에서 총 20주간 정상의 자리를 지켰으며 1곡의 1위 곡[68]과 2곡의 Top 5곡[69]을 배출했다.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1993년 BBMA에서 대상인 'Top Artist'상을 포함하여 총 11개의 상을 수상하였고, AMA에선 총 8개의 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1994년 그래미 시상식에선 그래미 최고 알짜배기인 올해의 앨범상올해의 레코드상, 그리고 최우수 여자가수상을 받으며 비평적으로 최고의 호평을 받는다. 아카데미 시상식 주제가상에는 'Run to You'와 ' I Have Nothing'이 노미네이트 되었으나[70] 알라딘A Whole New World에게 지고 말았다. 또한 보디가드 투어를 통해서 미국 유럽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돈을 쓸어 담았지만 한편으로는 목 상태도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71]

영화에서 휘트니 휴스턴이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가수' 역으로 등장한 데서 알 수 있듯 OST 자체가 휘트니 휴스턴의 앨범과 다름없이 만들어졌으며 특히 OST 앨범의 리드 싱글인 'I Will Always Love You' 가 역대 가장 많이 팔린 여가수 싱글, 빌보드 HOT 100차트 14주 1위, 1993년 연말차트 1위, 1990년대 Song 차트 7위, 빌보드 올타임 차트 54위라는 기록을 세우며 큰 인기를 끌었다. 이 곡은 원래 1974년 컨트리 가수인 돌리 파튼이 작곡하고 불렀던 곡이었는데 프로듀서 데이비드 포스터가 매끈한 알앤비 곡으로 변모시킨다. 본래 《What Becomes of the Broken Hearted》를 메인 테마로 사용하려 했지만 다른 영화에서 이미 사용해서 케빈 코스트너의 추천으로 이 곡을 사용하게 된다. 돌리 파튼이 본래 작사해 두었지만 자신이 버전에 발표하지 않았던 곡의 3절 가사를 휘트니에게 선물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해당 OST 앨범에서만 네 곡의 빌보드 5위권 싱글이 나왔으며 20위권 내에 네 곡이 동시에 머무르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특히 데이비드 포스터가 작곡에 참여한 'I Have Nothing'과 'Run to You'[72], 샤카 칸의 원곡을 리메이크 한 'I'm Every Woman'[73]은 이후 휘트니 휴스턴의 대표곡이 되기도 했다. 이 OST 앨범의 빌보드 싱글 차트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이 앨범에서는 전작보다 훨씬 굵어진 목소리를 사용하기 시작하고 음역은 조금 낮아진 듯하다[74]. 이후에는 마약 투여와 과다한 흡연, 살인적인 콘서트 투어로 성대 결절을 앓게 되고 1996년 브루나이 공연을 보면 보컬 파워가 확연히 떨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시기에 하나뿐인 딸 바비 크리스티나를 얻기도 한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임신을 하지만 모두 유산했다.

6. '95 ~ '98 : 배우 활동 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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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ting To Exhale' 에서의 휘트니 휴스턴

'The Bodyguard World Tour'를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휘트니 휴스턴은 배우로서의 커리어를 쌓는데 집중하기 시작한다. 1995년에 '사랑을 기다리며 (Waiting To Exhale)'를 촬영하였고,1996년에 영화 '목사의 아내 (The Preacher's Wife)', 1997년에 신데렐라 (Cinderella)를 촬영하였다.

한편 영화를 촬영하면서 OST도 꾸준히 발매하였는데, '사랑을 기다리며 (Waiting To Exhale)'의 OST전세계 총 120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하였으며 OST의 리드 싱글 'Exhale (Shoop Shoop)'은 빌보드 HOT 100에 1위로 핫샷 데뷔하고, 1주 1위, 1996년 연말차트 14위[75][76]를 기록하였다.
또한 '목사의 아내 (The Preacher's Wife)'의 OST전세계 총 60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하여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가스펠 앨범이 되었고 OST의 리드 싱글 'I Believe in You and Me'는 빌보드 HOT 100 최고 4위를 기록하였다.

비록 전성기에 비해 차트 성적이 상대적으로 떨어지긴 하였지만 이 시기에 발매된 음반들이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은 OST라는 점, 또 The Preacher's Wife OST의 가스펠이라는 장르적 특성을 고려한다면 여전히 좋은 성적을 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목 상태 역시 과도한 투어와 마약, 흡연 등으로 성대 결절을 앓으면서 전성기에 비해 다소 기량이 떨어지긴 했으나 여전히 좋은 라이브를 보여주었다. 1997년 10월 휘트니 휴스턴의 라이브 공연

한편 이 시기 브로드웨이 뮤지컬 드림걸즈를 영화로 옮기는 작업이 시도되기도 했다.

7. '98 ~ '00 : 4집 《My Love Is Your Love》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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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트니 휴스턴의 마지막 그래미 수상

1998년, 4집 《My love is your love》로 8년 만에 정규 앨범을 발매하며 컴백한다. 이 앨범은 비평적으로 본인의 앨범 중 최고의 찬사를 받는다. 성숙해진 목소리와 완연한 리듬감으로 R&B 가수로도 인정받으며 2000년 그래미에서 '최우수 R&B 보컬'까지 수상하였다. 상업적으로도 전세계 총 130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하였고 싱글로 발매한 3곡[77]이 모두 빌보드 HOT 100 Top 5에 오르며 특히 실력파 R&B 신예인 Faith Evans[78], Kelly Price[79]와 함께 한 싱글 'Heartbreak Hotel'은 빌보드 HOT 100 최고 순위 2위 및 1999년 연말 차트 4위를 기록하면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인기가 식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와이클리프 장이 만든 이 앨범의 타이틀 싱글 'My Love Is Your Love'는 레게풍 팝으로 휘트니 휴스턴의 마지막 빌보드 싱글 탑텐 히트곡이다. 레게로 된 원곡은 물론 조나단 피터스가 한 댄스 버전 클럽 리믹스도 당시에 함께 풀려서 큰 인기를 얻었다.

2000년에는 베스트앨범 《Whitney: The Greatest Hits》가 발매되었다. 앨범은 1000만장 가량이 팔린 것으로 추산되고 새로 수록된 엔리케 이글레시아스와의 라틴 팝 듀엣곡 'Could I Have This Kiss Forever'이 유럽 국가들에서 차트 상위권에 안착하며 휘트니 최후의 히트작으로 남았다.

8. '01 ~ '09 : 5집 《Just Whitney》, 그리고 몰락[80]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수많은 루머에 시달리며 대중들과 점점 멀어졌다. 대표적으로 레즈비언설, 남편과의 불화설, 그리고 마약이었다. 2001년 마이클 잭슨 데뷔 30주년 기념 공연에서 보여준 해골같이 마른 모습은 그런 논란을 더더욱 가중시켰다. 특히 뉴 에디션 출신인 바비 브라운과 1992년에 결혼한 후로 휘트니의 이미지는 완전히 달라진다.[81] 본래는 백인 흉내내는 흑인 신데렐라 이미지에 가깝던[82] 것이 악동 남편을 만나면서 많이 변했고 흑인계들의 지지도 역시 엄청나게 올라갔다. 하지만 남편 바비 브라운의 가정 폭력, 외도 및 여러 돌발 행동으로 인해 끊임없이 뉴스에 오르내렸다. 신혼여행지에서 바비가 깨뜨린 유리잔으로 얼굴에 상처를 입어 흉터 제거 수술을 받기도 했고, 왼쪽 뺨이 멍든 상태로 법원에 나타나기도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여전히 함께한다.' 라고 바비와 껴안으며 인터뷰를 해 남편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것을 내비치기도 했지만 이후 술, 마약에 빠지면서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이후 2009년 컴백과 함께 이루어진 오프라 윈프리와의 인터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바비 브라운은 휘트니에 대한 질투와 자격지심에 휘트니의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정신적 폭력도 가했고 그 때문에 휘트니의 음악 활동에 대한 의지가 거의 사라졌다. 다만 맨 위 단락에 나왔듯이 휘트니의 마약복용은 훨씬 전인 16살때부터 시작했다. 증거 링크 오히려 바비 브라운이 그녀와 그녀의 형제들에게 마약을 배운것이 다큐멘터리 영화 휘트니에서 휘트니의 친인척들을 통해 밝혀졌다. 하지만 바비 브라운은 자서전에서 코카인 판매책이었던 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코카인을 밀가루로 착각해 요리한 적이 있을 정도로 마약을 접하기 쉬운 환경에서 자랐으며, 휘트니와의 교제 이전 어린 시절부터 마약을 했다고 고백했다.

2002년 정규 5집 앨범인 《Just Whitney》를 발매하고 루머를 해명하겠다며 다이안 소어와 인터뷰를 진행했지만 역효과만 불러일으키고 그나마 있던 긍정적인 이미지까지 망치게 된다. 이 인터뷰로 휘트니는 마약 사용을 간접적으로 시인하고 희대의 명언인 Crack is cheap. Crack is wack을 남긴다.[83] 번역하면 '(마약의 일종인) 크랙은 싸구려야. 최악이라고.' 이후 자신은 크랙을 쓰기엔 너무 부자라는 터무니없는 해명이 이어졌다. 틀린 말은 아닌 것이, 크랙 항목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크랙은 하류 계급이 사용하는 싸구려 마약이 맞다. 그리고 휘트니 휴스턴과 바비 브라운은 코카인을 사용했다. 나름대로 진솔한 인터뷰였고 동정 여론도 있었지만 방송에서 가장 주목 받은건 'crack is wack'이라는 발언과 인터뷰 내내 시종일관 이어진 뻔뻔한 태도였다. 그 결과 5집 앨범은 첫 주 판매량에서는 휴스턴의 모든 앨범 중 가장 높은 판매량을 기록하며 데뷔했지만 결과적으로는 190만장을 판매하며 상업적 실패를 기록했다. 2009 오프라 윈프리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보면 크랙 역시 복용했다고 한다. 이 인터뷰 말미를 보면 휘트니는 더이상 가수로서 욕심이 없음을 나타낸다.

명콤비였던 클라이브 데이비스와 결별하고 발매한 첫 앨범이라는 상징성이 있는 앨범이었다. [84] 그러나 싱글 발매된 곡들 모두 빌보드 Top 50 진입에 실패했고, Hot Dance Club Play 차트에서의 소소한 성공만이 위안이 되었다. 특히 첫 타이틀이었던 《Whatchulookinat》은 자신을 공격하는 타블로이드 및 가십 언론계 전반을 비판하는 곡이었는데 이 곡 이후 휘트니의 라디오 방송이 어려워졌다고 한다. 이는 에어플레이의 저조를 의미한다.

더구나 이 앨범은 프로모션을 거의 하지 않았고, 진행했던 프로모션조차 곡에 대한 홍보 효과보다 대중에게 목상태가 완전히 가버렸다는 사실을 각인시킬 뿐이었다.[85] 이후 2004년 러시아나 일부 아시아 지역 투어도 돌고[86] 세계 여성의 날 시상과 월드 뮤직 어워드에서 보여준 공연을 보면 어느 정도 상태가 회복되는 듯 했지만 이후 토리노 올림픽 축하 공연 등을 보면 목 상태는 회복 불능의 지경까지 가버린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후 사실상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 오프라 윈프리와의 인터뷰를 보면 휘트니는 이미 'I Will Always Love You'를 부르던 시절부터 마약에 중독되어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강한 중독으로 치닫았음은 물론이다.

2003년 2월 2일, 휘트니 휴스턴의 아버지인 존 러셀 휴스턴이 향년 8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한 때 휘트니의 마약 문제 등으로 사이가 많이 경색되기도 했었지만, 2000년 휘트니가 하와이에서 대마초 소지 혐의로 체포됐을 때 아버지 존이 새로운 소속사와 계약할 수 있도록 많이 도와준 것을 계기로 관계를 회복해 말년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휘트니는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른 뒤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 말하기도 했다.
We've hollered and screamed at each other. But it was always over business. If it were anything else, I would not be screaming at my father . . . I'll never find anyone to love me like my daddy does. I will always be daddy's girl.
우리는 서로에게 소리치고 많이 싸웠습니다. 하지만 이건 모두 비즈니스 때문이었죠. 저는 저희 아빠에게 다른 이유로는 절대 소리지르거나 싸우지 않습니다. 아버지만큼 저를 사랑해준 사람은 아마 찾을 수 없을 거에요. 전 언제나 아빠의 딸일 겁니다.

2003년 연말에는 캐롤 앨범으로 구성된 정규 6집 <One Wish: The Holiday Album> 을 발매했으나 흥행은 5집보다도 저조했고, 같은 해 12월 7일에는 바비 브라운에게 구타당해 입원하기도 했다.[87]바비는 경찰이 들이닥치자 도주했지만, 3일 뒤 결국 자수하여 체포됐다. 휘트니는 바비의 처벌을 불원한다는 입장을 밝혀 바비는 간신히 교도소행을 면하게 됐다.

2004년 바비 브라운과 함께 출연한 리얼리티 쇼 'Being Bobby Brown'에서 팬들에게 보여준 모습은 더욱 실망감을 안겨 주었다. 당시 유행이던 셀러브리티들의 막장 생활을 보여주는 붐에 편승한 형식으로 시청률만 놓고보면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 자신에게는 더 이상 떨어질 나락이 없는 현실을 방증했다. 이후 유일하게 잘한 일은 시즌 2 거절이었다. 클라이맥스로 2006년 충격과 공포의 주유소 파파라치로 완전히 망가진 모습을 보여줘 모두를 충격에 빠트리기도 했다.

9. '09 ~ '12 : 6집 《I Look To You》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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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2007년 4월 24일, 바비 브라운과 이혼했다. 직전 해 9월 휘트니가 법원에 이혼 소송을 냈고 14살 된 딸의 양육권은 휘트니에게 넘어가는 것으로 합의됐다.

2년 뒤인 2009년, 재기를 위해 심기일전해서 정규 음반 6집 《I Look to You》 를 발표했으며 오프라 윈프리 쇼 Season Premier, 굿모닝 아메리카 Summer Concert Series 참여와 같은 대중과의 재회는 여전히 수많은 팬들이 휘트니 휴스턴을 기억하고 사랑한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이런 지지에 기반하여 빌보드 앨범차트 1위로 데뷔했다.

같은 해, 그녀의 오랜 벗이었던 마이클 잭슨이 먼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했을 때 그의 죽음에 대해 묻는 질문에 "충격이었다. 그와 함께 보낸 좋은 추억들이 많다. 가족들도 오랫동안 알고 지냈는데... 믿을 수가 없다" 라고 답하며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2010년 시작된 월드투어에서도 마이클 잭슨을 추모하는 무대를 꾸몄다.

그 후 'Nothing But Love World Tour'가 시작되었다.[88] 하지만 그 당시의 목 상태는 도저히 장기간 투어를 소화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녀의 컴백에 팬들은 환호했지만, 동시에 전성기와 비교도 안 되는 가창력은 많은 실망도 안겨주었다. 유명 팝스타의 내한 공연에 항상 칭찬 일색이던 배철수조차 음악캠프 라디오에서 '대단히 실망스러웠다' 고 공개적으로 언급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한술 더 떠 호주에서는 티켓 환불 소동까지 일어났다.

10. '12 ~ : 죽음, 그 이후

2012년 2월 11일(현지 시각)에 숨을 거두었다. 이 때가 향년 48세. 사망 장소는 캘리포니아 베벌리힐스에 있는 베벌리 힐튼 호텔. 이 날은 그래미 시상식 전날 축하 파티가 있던 날로 파티 도중에 발견되었다. 그래미 시상식 바로 전에 세상을 떠난 데다 시대를 풍미했던 디바의 씁쓸한 최후에 동료들은 물론 팬들도 큰 충격에 빠졌다.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는 슬픔으로 가득찼고, 그 해 구글 검색어 1위는 '휘트니 휴스턴'이었다. 마이클 잭슨의 사망 때와 비슷하게, 휘트니 휴스턴을 잔인하게 비난하던 타블로이드는 일제히 추모의 물결에 휩싸였다.

2012년 2월 22일에는 미국의 National Enquirer지에서 시체 사진을 공개해 논란이 되었다. 제목은 'Whitney : The Last Photo'. 2012년 3월 22일에 정확한 사인이 밝혀졌다. 코카인 흡입 후 익사라고 한다.기사

2015년 2월 5일에는 바비 크리스티나 브라운(22)이 마약 과다 복용으로 욕조에서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된 후 뇌사 상태에 빠져 있다 퇴원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나 이 퇴원이 사실상 '포기'로서 치료 거부인지 '호전'으로 인한 이송이나 자택 복귀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태이다. 더욱이 뇌사 상태 이후에 바비 브라운과 바비 크리스티나 브라운의 남편[89] 닉 고든은 진흙탕 싸움을 벌였고 와중에 딸이 유품으로 갖고 있던 2억 원 상당의 반지를 도난당하는 등 악재가 겹쳤다. 결국 7월 26일 바비 크리스티나 브라운은 22세의 나이로 요절하여 먼저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뒤를 따라갔다. 기사

장례식은 뉴저지 주 뉴워크의 뉴 호프 침례교회에서 행하였다. 데뷔 전 휘트니 휴스턴이 성가대로 활동하면서 노래 실력을 쌓은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장례식에는 보디가드 때의 상대 배우였던 케빈 코스트너도 직접 참석하여 추도사를 하였다. 휘트니 휴스턴의 유가족들이 케빈 코스트너에게 참석을 요청했다고. 휘트니의 시신은 2003년 사망한 아버지와 합장되었다.

2020년 11월 18일 오후 의붓아들 바비 브라운 주니어(28)가 로스앤젤레스(LA) 자택에서 사망한 채 발견됐으며 현장에서 사망 선고가 내려졌다. 기사

2022년 12월, 휘트니의 전기 영화인 <I Wanna Dance with Somebody>가 OST와 함께 공개되었다. OST에는 기존 휘트니 히트곡들의 원본과 리믹스가 수록되어있다.

2023년 3월 24일 휘트니의 가스펠 곡들을 수록한 앨범 《I Go to the Rock: The Gospel Music of Whitney Houston》이 발매되었다. 해당 앨범에는 미공개 트랙 6곡과 기존에 발매된 9곡, 합쳐서 15곡이 수록되어있는데, 미공개 트랙 중에는 휘트니가 1981년에 녹음했던 "He Can Use Me"라는 곡이 포함되어있다.


[1] 흔히 휘트니 휴스턴의 대모가 아레사 프랭클린이라고 알려져 있고, 많은 한국 언론에서도 휘트니 휴스턴의 대모가 아레사 프랭클린이라고 얘기하나, 이는 잘못됐다. 실제로 아레사 프랭클린과는 씨씨 휴스턴이 그의 백보컬을 맡는 등으로 친분이 있었을 뿐이지 그는 휘트니의 대모가 되는 것에 동의한 적이 없다. 아마도 이 오류는 휘트니 휴스턴이 어릴 적 아레사 프랭클린을 매우 동경하며 했던 말이 와전됐기 때문에 생긴 것으로 추측된다. 후에 디온 워윅이 휘트니 휴스턴의 장례식에서 아레사 프랭클린을 휘트니 휴스턴의 대모로 소개했던 것에 대하여, 아레사 프랭클린은 2017년 Associated Press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매우 화를 냈다.[2] 마이클 잭슨의 형[3] 1993년 휘트니 휴스턴이 가수로서 성공을 이룬 뒤 리메이크하여 《The Bodyguard OST》의 3번째 싱글로 발표했다.[4] 참고로 휘트니 휴스턴seventeen 잡지 최초의 유색 인종 표지 모델이었다.[5] 휘트니 휴스턴이 처음으로 리드보컬을 맡은 곡으로, 상징성 있는 곡이다.[6] 아레사 프랭클린의 곡들이다.[7]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데뷔 공연이라 휘트니 최고의 라이브 공연으로 꼽히는 게 놀랍기도 하다.[8] 제시한 자료에서는 모두 1985년에 "Home" 공연을 했다고 하지만, 위 자료들이 전부 1983년의 "Home" 공연 영상을 게시했다는 점, 해당 공연을 휘트니의 첫 TV 데뷔 공연으로 소개했다는 점, 1985년에 휘트니가 방송에 출연하여 "Home"을 공연한 사실이 확인되지 않는 점 등등을 고려해 봤을 때 연도 기재는 오류로 보인다.[9] 영국에서 1985년 1월 중순 발매됨[10] 베네룩스에서 1985년 3월 말 발매됨[11] 북아메리카호주, 일본, 영국 등 일부 지역에서 1985년 2월 말 발매됨[12] 북미를 제외한 다른 곳에서는 그닥 반응을 얻지 못했다.[13] 1985년 빌보드 연말 차트 23위[14] 원래 자넷 잭슨3집 앨범에 실릴 예정이었던 곡이다. 그러나 자넷이 거절했다고 한다.[15] 이외에도 'Consequence of Sound'는 이 앨범을 "R&B와 팝 음악 장르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앨범"으로, '빌보드'는 "R&B와 팝 시장 간의 크로스오버를 달성한 결과"로 평가하였다.[16] 1집 《Whitney Houston[17] "Saving All My Love For You"[18] "You Give Good Love"[19] 이 부문은 사실 휘트니와 관련이 없는 부문이다. 왜냐면 이 부문은 작곡가를 대상으로 한 부문이기 때문.[20] "You Give Good Love"로 수상함[21] "Saving All My Love for You" 로 수상함[22] 그래미 어워드에서 공연한 이후 공연된 음원이나 음반의 차트 순위가 올라가거나 판매량이 증가하는 등의 상업적 효과가 나타나는 현상을 일컫는다.[23] 1집은 총 187주 동안 차트인했다. 1년 = 52주이므로 3년 반 = 180주[24] 1995년 발매된 앨라니스 모리셋의 데뷔 앨범 'Jagged Little Pill' 이 3200만장이 판매되면서 기록 갱신. 사실 앨라니스 모리셋의 Jagged Little Pill은 데뷔음반이 아닌 세 번째 앨범이지만, 1,2집은 캐나다 한정으로 발표한 앨범이고 세계무대에 들고 나온 앨범은 3집이기 때문에 Jagged Little Pill을 1집 취급하기도 한다. 비요크의 데뷔앨범을 1977년에 내놓은 Bjork가 아닌 1993년에 내놓은 Debut로 여기는 것과 비슷한 케이스.[25]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 1988년 그래미 어워드인데 당시 마이클 잭슨Bad 앨범에서 3500만 장의 판매량을 기록하고 빌보드 1위곡을 5곡이나 배출하며 Bad World Tour를 대성공으로 마무리했지만 6개 부문에 지명되기만 하고 단 하나의 상도 받지 못했다.[26] 1980년대에 데뷔하여 메인스트림에서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흑인 여가수를 꼽자면 휘트니 휴스턴과 재닛 잭슨, 샤데이 정도밖에 없을 정도다.[27] 2010년대에도 그래미는 흑인에게 박하긴 하다. 특히 현재도 흑인 여성은 그래미 본상을 받기가 하늘의 별따기이다. 단적인 예로 올해의 앨범상을 받은 마지막 흑인 여성은 로린 힐인데, 이것이 벌써 1999년이다. 그 이후로 올해의 앨범상을 받은 흑인 여성은 한 명도 없었다. 다른 부문인 올해의 신인상 역시 박한데, 99년 로린 힐 이후 2002년 앨리샤 키스, 그리고 무려 19년이 지난 2021년 메간 디 스탤리언이 수상했다.[28] (해석 : '버라이어티 또는 음악 프로그램에서 뛰어난 개인 공연')[29] 전설적인 재즈 기타/보컬리스트이자 팝으로도 성공한 조지 벤슨이 77년에 먼저 발매했다. 원곡에서는 'The' 가 앞에 들어간다. The Greatest Love of All[30] 'Top Pop Artist of The Year[31] 휘트니 휴스턴1986년 빌보드 연말 결산에서 6개 부문에 1위에 올랐는데, 빌보드 뮤직 어워드빌보드에서 집계한 각종 연말결산 중 일부 부문(대표적으로 'Top Artist', 'Top Billboard 200 Album', 'Top Billboard 200 Artist' 등의 부문들)의 1위를 시상하기 때문에, 본문의 추측이 무리한 비약은 아닐 것이다.[32] 빌보드 뮤직 어워드1990년부터 개최되었다.[33] 영상 기준 4분 25초까지가 "How Will I Know"이다.[34]휘트니 휴스턴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대중음악계 메인스트림 성공의 물꼬를 텄다는 뜻이다.[35] 자넷 잭슨의 경우 1982년에 1집, 1984년에 2집을 내면서 휘트니 휴스턴보다 약 2년 가량 먼저 활동했지만, 그의 1집의 곡들은 빌보드 핫 100 TOP 50을 기록하지 못했고 2집의 곡들은 아예 차트인 하지 못했다. 휘트니 1집의 싱글과 앨범이 모두 성공하고 휘트니가 그래미 어워드를 수상한 뒤에 1986년 3월 발매된 정규 3집 Control을 계기로 자넷이 본격적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물론, 자넷 역시 3집부터 가족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새로운 프로듀서와 함께 작업해 음악성을 업그레이드 시켰기에 성공한 측면도 있다.[36] 소위 말하는 2년차 징크스. 1집은 엄청나게 흥했는데 2집은 폭망하는 그런 경우다.[37] 1987년 당시는 마돈나가 정규 3집 《True Blue》로 최전성기를 보낼 때였다.[38] I Wanna Dance with Somebody (Who Loves Me), Didn't We Almost Have It All, So Emotional, Where Do Broken Hearts Go[39] "I Wanna Dance with Somebody"가 1987년 빌보드 연말 차트 3위, "So Emotional"이 1988년 빌보드 연말 차트 6위를 기록했다.[40] 현재 시세로는 약 4700만 달러 (참고)[41] 1집 《Whitney Houston》과 2집 《Whitney[42] 1986년 'The Greatest Love World Tour'와 1987년 'Moment Of Truth World Tour'[43] 그때 당시 환율이 1$ = 792.3원이므로 4400만 달러 = 한화 약 349억 정도이다. 현재 화폐가치로는 한화 약 1116억. 현재 미국 시세로는 대략 1억 350만 달러. (참고1 / 참고2)[44] 다만 이 수익은 'Moment Of Truth World Tour'의 1988년도 수익이 반영되지 않은 수치이다. 즉 'Moment Of Truth World Tour' 투어 기간 중 약 35% 수익만 반영된 셈[45] 1위는 마돈나. 86-87년에 4700만 달러를 벌었다.[46] 빌 코스비(8400만 달러), 에디 머피(5000만 달러)가 각 1, 2번째로 높은 수익을 올린 흑인 연예인이다.[47] "I Wanna Dance with Somebody (Who Loves Me)"가 노미네이트 되었다.[48] 정규 2집《Whitney》의 3번째 싱글 "So Emotional"의 B사이드 싱글인 "For The Love of You"가 노미네이트 되었다.[49] 그래미 어워드가 비평적 성과를 중요시하긴 하지만, 상업적 성과를 아예 무시하진 않아서, 당해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둔 앨범들이 노미니(Nominees)가 되는 경우가 있긴 있었다.[50] 88년에는 아니타 베이커가 해당 부문을 수상하였다.[51] 최고 5위[52] 첫 공연과 마지막 공연 사이에 오사카, 나고야 등 다른 지역을 가기도 했다.[53] 좌에서 우로, "I Wanna Dance with Somebody" - "Greatest Love of All" - "That's What Friends Are For"(디온 워윅과 듀엣) 순서로 공연했다.[54] "Greatest Love of All"과 "I Wanna Dance with Somebody". 1993년 I Will Always Love You가 대성공하기 이전까지는 앞선 2곡이 가장 성공한 휘트니 곡이었다. 전자는 I Will Always Love You 이전까지 휘트니의 최장 기간 1위곡(빌보드 3주 1위)이었고, 후자는 UK차트 & 빌보드 동시 1위를 거머쥔데다가 휘트니의 가장 많이 팔린(Best-Selling) 싱글(420만 장 판매고)이었다.[55] "That's What Friends Are For". 이 곡은 정확히는 Dionne & Friends(엘튼 존, 스티비 원더, 글래디스 나이트)의 곡이다. 1985년 빌보드 연말 차트 1위 곡이며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노래상을 수상했다.[56] 앨범의 5 싱글이 모두 top 10에 안착하고 싱글차트 1위곡 2곡 배출, 뉴 잭 스윙의 신성이자 당해년도 빌보드 종합 1위 가수였다.[57] '91 ~[58] 가수 생활을 오래 하려면 목관리가 필수이기 때문에 가수들도 목관리에 각별히 신경써서 투어 공연 중 일부는 라이브로 진행하고 나머지는 사전 녹음, 립싱크 등등을 활용한다. 그런데 휘트니 휴스턴은 특수한 몇몇 경우, 91년 슈퍼볼에서 "The Star-Spangled Banner"를 부를 때, 그리고 92년 말 임신 기간 등를 제외하면 공연에서 립싱크를 한 적이 없다.[59] 심지어 2010년에 지속적인 흡연으로 성대가 망가질 때까지 망가져서 콘서트 때 1-2곡 부르고 쉬는 걸 반복하는 지경까지 갔을 때도 100% 라이브를 고수했다.[60] 사실 이는 1996년Waiting To Exhale OST》 활동 때부터 눈에 띄게 드러난다. 더 자세히 후술하겠지만, 휘트니는 《The Bodyguard OST》의 대성공 이후 하루에 한 번(!) 마약을 할 정도로 심하게 중독되어 있었고 흡연음주도 계속 했다. 나이가 들면서 피지컬이 떨어지는데도 자기관리는 더 부실해지니 예전보다 목의 악화가 쉽게 드러났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61] 1993년The Bodyguard OST》활동 때부터 드러난다. 93년 이전까지는 웬만한 고음도 무리없이 소화했지만 93년 이후부터 "I Will Always Love You, "I Have Nothing"의 키를 낮춰 부르고 "I'm Every Woman"의 고음을 부르지 않고 넘긴다. 예전에는 소화할 수 있던 고음이 목 상태 악화로 소화할 수 없게 된 것[62] 95년까지.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95년 라이브들을 찾아보면(거의 자료가 없긴 하지만) 대부분 94년의 목소리와 비슷하다.[63] 이는 당시 뉴 잭 스윙 열풍을 이끌며 전성기를 누리던 자넷 잭슨의 영향을 받은 것일 수도 있다.[64] 마돈나가 "Vogue"로 총 8개의 1위 곡을 먼저 만들어내면서 이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이후 휘트니가 타이 기록을 달성했다.[65] "I'm Your Baby Tonight", "All the Man That I Need"[66] 1집 《Whitney Houston》에서 "How Will I Know"(1986 연말 6위)[67] 2집 《Whitney》에서 "I Wanna Dance with Somebody"(1987 연말 4위) / "So Emotional"(1988 연말 6위)[68] I Will Always Love You[69] I Have Nothing, I'm Every Woman[70] 왜 I Will Always Love You가 아닌가 싶지만 본래 아카데미 주제가상의 공식 영어 명칭이 'Academy Award for Best Original Song'인 만큼 'original'을 만족하지 못하는 리메이크 곡은 심사 대상이 아니다. 시상식에서 휘트니는 건강 문제로 참여 못하고 이 두 곡을 나탈리 콜이 부른다. (굉장히 안 어울린다, 나탈리 콜은 재즈 보컬에 적합하다.) 이로써 휘트니의 Run to you 라이브는 영영 볼 수 없게 됐다. 1994년 보디가드 투어에서의 Run to You 라이브가 영화 보디가드 OST 발매 25주년 앨범(I Wish You Love: More from 'The Bodyguard'(2017))에 수록되었다.[71] 하지만 서울은 오지 않았는데, 당시 공연이 성사 직전까지 갔지만 마지막 계약금 문제로 취소됐다고 한다.[72] 3옥 파샾을 넘는 고음역 곡으로 휘트니 자신도 버거워 하는지 I have nothing은 라이브에서 항상 키를 낮춰 불렀고 Run to you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라이브를 한 적이 없다. Run to You는 라이브를 한 적이 거의 없어 라이브 녹음본이 존재하는지 여부가 팬들의 관심사였다. 휘트니는 이 곡을 1993년-1994년에 진행된 The Bodyguard World Tour에서 부른 적이 있으며, 그 중 1994년에 부른 버전이 영화 보디가드 OST 발매 25주년 앨범(I Wish You Love: More from 'The Bodyguard'(2017))에 수록되어 팬들의 갈증을 해소해 주었다.[73] 원곡인 샤카 칸의 곡은 휘트니가 백업 보컬로 참여한 곡이다.[74] 라이트 팬들 중에는 휴스턴과 머라이어 캐리의 듀엣이나 이 곡, 압도적인 성량 때문에 여자치고 두꺼운 목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초창기 및 전성기 당시에는 성량이나 파워와는 별개로 목소리 자체가 곱고 예뻤다. 게다가 이 예쁜 목소리로 어마어마한 파워를 뽐내는 걸 보면... 실제로 (목소리가 변하기 전) 인터뷰할 때 장면을 보면 기본적으로 미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75] 참고로, 빌보드 HOT 100 역사상 최초의 1위 핫샷 데뷔곡은 마이클 잭슨의 'You Are Not Alone'이며, 2번째 1위 핫샷 데뷔곡은 머라이어 캐리의 'Fantasy'이다.[76] 이 곡이 휘트니 휴스턴의 11번째이자 마지막 빌보드 HOT 100 1위 곡이다.[77] My Love Is Your Love, It's Not Right But It's Okay, Heartbreak Hotel[78] 노토리어스 B.I.G.의 부인이다.[79] 머라이어 캐리의 백보컬로 활동했을 정도로, 뛰어난 성량을 자랑한다.[80] 5집이 2002년 12월 발매된 이후 2003년에 캐럴 앨범인 정규 6집 《One Wish》가 발매되었지만, 휘트니의 커리어에서 그닥 짚고 넘어가지 않는 앨범이라 생략한다.[81] 뉴 에디션잭슨 파이브를 모델로 기획사에서 오디션을 통해서 외모와 춤, 노래 실력이 갖춰진 멤버들을 모아서 만든 팀. 데뷔 당시 평균 16세로 현재 K-POP의 주류인 기획형 댄스 아이돌의 시초로 평가된다. 이 팀의 백인 버전이 1990년 초반을 강타한 뉴 키즈 온 더 블록, 한국 버전은 H.O.T. 정도로 볼 수 있다.[82] 아예 영화 신데렐라에 출연하기도 했다. TV용 영화 신데렐라에서 요정 대모 역할을 맡았다. 이 영화의 제작진은 등장인물들을 일부러 color-blind로 캐스팅했으며, 가수 Brandy는 영화에서 신데렐라 역을 맡은 최초의 유색인종 배우가 되었다.[83] 사실 이것은 앤디 워홀의 말이다.[84] 마이클 잭슨과 퀸시 존스와의 결별 이후와는 대비된다.[85] 가장 유명한 공연이 2003 VH1의 Try It on My Own 공연이다.[86] 트랙리스트를 보면 5집 곡은 빠졌다. 상업적인 성패와 별개로 휘트니 자신조차 5집을 맘에 안들어 하는 듯하다.[87] 두 사람이 말다툼을 하다가 바비가 "계속 그러면 진짜 패버린다(I'll beat her ass) 라고 협박을 했고, 이에 휘트니가 물러서지 않고 맞서자 폭발한 바비는 아내에게 2차례 주먹을 날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휘트니는 얼굴에 멍이 들고 입술이 찢어지는 부상을 입었다. 자세한 사건 내용은 여기서 볼 수 있다. ##[88] 원래 일본에서 2010년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 주간에 시작하기로 된 투어는 현대카드의 과감한 투자로 인해서 2010년 2월 6일과 7일 한국에서 시작했다. 현대카드 측은 이틀 간의 공연에 대략 150만 달러를 제시한 것으로 추측된다.[89] 바비 브라운의 주장에 의하면 법적인 남편이 아니며, 뇌사 상태가 된 원인도 닉 고든이 욕조에서 밀쳤기 때문이라고. 바비 크리스티나 브라운이 사고 전 sns에 닉 고든과 결혼했다고 올린 적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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