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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9 09:34:09

황홍(전연)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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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黃泓
(284 ~ 381)

전연의 인물. 자는 시장(始長). 사주(司州) 위군(魏郡) 근구현(斥丘縣) 출신. 황침(黃沉)의 아들.

2. 생애

아버지 황침은 천문학에 능통하였는데, 황홍은 그의 가르침을 받아 그 정묘함을 습득하고 나중에는 아버지를 뛰어넘는 수준에 이르렀다. 또, 경서와 사서를 두루 배웠고, 그 중에서도 《예기》와 《주역》에 특히 밝았다. 성격은 충성스럽고 근면성실하여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영가의 난이 발발하자 황홍은 고첨, 유수, 봉선(逄羨), 송석(宋奭)과 함께 유주(幽州)의 계(薊)로 피난하였다. 당시 모용부는 대인 모용외의 지도 아래 세력을 급속히 확장하고 있었기에, 황홍이 고첨에게 모용외의 밑으로 들어가자 제안하며 말했다.
"왕준은 사리에 어둡고 사나워 필시 성하지 못할 것이오. 오래도록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거취(去就)를 잘 생각해야만 하오. 모용외는 법과 정치가 공명하고 겸허히 인재들을 받아들이는데, '진인(真人)이 동북쪽에서 나온다'라는 참언이 바로 그를 가리킴이 아니겠는가? 함께 그에게 귀순하여 사업(事業)을 일으킵시다."
하지만 고첨은 모용외가 선비족이라는 이유로 따르지 않았다. 황홍은 고첨만 제외한 유수 등과 자신의 친족들을 거느리고 모용부로 귀순하였고, 모용외는 그를 손님으로 예우하였다.

대흥 4년(321년) 10월, 동진에서 모용외를 거기장군, 평주목으로 임명하고 요동공(遼東公)에 봉하자, 황홍은 모용외의 참군으로 등용되었다. 모용외는 황홍에게 군국(軍國)의 사무에 관해서 빈번이 문의하였고, 황홍은 그럴 때마다 일의 성패(成敗)를 유세하였는데, 모두 그의 말대로 이루어졌다. 모용외는 항상 감탄하며
"황 참군으로 내게 있어서 중상(仲翔: 우번의 字)이로다!"
라 칭찬했다고 한다.

함화 8년(333년) 5월, 모용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모용황이 요동공 작위를 계승하였다. 황홍은 좌상시(左常侍)로 승진하여 사관의 업무도 같이 처리하였고, 모용외의 신임을 받아 중용되었다.

함강 4년(338년) 5월, 후조의 천왕 석호가 침공해오자, 모용황은 겁을 먹고 장차 요동으로 도망치려 하였다. 이때 황홍이 반대하며 말했다.
"패기(敗氣)가 적에게 드리워져 있으니 우려할 것 없습니다. 이틀 안에 반드시 달아나 궤멸할 것이니, 의당 병사와 군마를 갖추어 추격할 준비를 하십시오."
모용황이 말했다.
"지금 적의 성함이 이와 같은데, 경은 패주할 것이라 말하고 있으니, 과인은 아직 감히 그 말을 믿을 수 없소."
이에 황홍이 다시 말했다.
"전하께서 성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인간의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은 하늘의 시기에 의하여 적이 패주한다 말한 것입니다. 오랑캐의 패주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과연 황홍이 말한 기한이 지나자 후조군은 퇴각하였고, 모용황은 미리 준비해둔 추격병을 내보내 도망치는 후조군을 대파하였다. 이 일 이후로 모용황은 더욱 황홍을 범상치 않게 여겼다.

영화 4년(348년) 11월, 연왕 모용황이 서거하고 왕세자 모용준이 즉위하자 종사중랑으로 승진하였다.

영화 5년(349년) 5월, 후조의 무제 석호 사후 그 자손들이 골육상쟁하여 중원이 다시 혼란에 빠졌다. 국경을 지키던 평적장군 모용패는 도읍 용성(龍城)으로 급히 달려가 후조의 혼란을 연왕 모용준에게 보고하고 중원 평정을 유세하였다. 좀처럼 확신이 들지 않았던 연왕 모용준이 황홍을 불러 의견을 물으니, 황홍이 답했다.
"지금 태백(太白)이 하늘을 가로질러 북쪽으로 그 빛을 모음으로써 그늘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이는 천하의 주인 바뀌고 음국(陰國)이 천명(天命)을 받는 것을 의미하므로, 청컨대 전하께서는 하늘의 뜻에 응하도록 하십시오."
이에 모용준은 중원 평정을 결심하고 출정을 준비하였다.

원새 원년(352년) 11월, 모용준이 황제로 즉위하자 황홍은 진모장군(進謀將軍), 태사령에 임명되고 관내후(闗內侯)에 봉해졌다. 이후 봉거도위, 서해(西海)태수가 더해지고, 태사령은 계속 겸하였다. 작위도 양정후(陽亭侯)로 진봉되어 평서현(平舒縣) 5등백에 봉해졌다. 황홍은 경소제 모용준의 좌우에 있으면서 국가의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항상 참여했다고 한다.

건원 6년(370년) 12월, 전연을 멸망시킨 전진의 천왕 부견이 전연의 황족과 신하들에게 관직을 차등있게 배분하였다. 황홍은 노환을 이유로 사양하고 고향으로 내려가면서 한탄했다.
"연나라는 반드시 중흥할 것이고, 이는 오왕(吳王)에게 달려있다. 나는 나이가 너무 많아 이를 볼 수 없다는 것이 한스럽도다!"

건원 17년(381년), 세상을 떠났다. 향년 97세. 그의 사망 이후 2년 뒤에 비수대전으로 전진이 패망했고, 바로 그 다음 해에 모용수가 독립했으니 아깝게 놓친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