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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국왕 ราชาแห่งอาณาจักรไทย King of Thailand | |
<colbgcolor=#ffe800><colcolor=#d50000> 현직 | <colbgcolor=#fff,#1c1d1f> 마하 와치랄롱꼰 |
즉위일 | 2016년 12월 1일 |
지위 | 타이 왕국의 국가원수 |
관저 | 방콕 왕궁 |
[clearfix]
1. 개요
태국 국왕기 |
태국의 국왕. 태국의 국가원수로, 현재 짜끄리 왕조는 1782년부터 이어져왔다. 1932년 시암 혁명 이후 입헌군주제로 전환했다. 짜끄리 왕조의 라마 10세가 현 국왕이다.
태국의 왕은 불교 신자여야하며, 불교 신자가 아니면 절대로 왕위를 계승할 수 없다. 절에 가서 수행하는 것은 필수적인 통과 의례이며, 아주 오랜 시간의 수행을 마치면 왕에 즉위한다. 21세기의 태국의 국왕은 살아있는 부처 정도 위치에 있다고 보면 된다.
선왕 라마 9세 푸미폰 아둔야뎃이 2016년 10월에 서거한 뒤 공위 상태가 되어 추밀원장이 임시 섭정을 하였으나 # 동년 12월에 선왕의 장남 라마 10세 마하 와치랄롱꼰이 즉위하였다.
70년 동안 큰 존경을 받았던 푸미폰 아둔야뎃 전 국왕과 달리 현 국왕 마하 와치랄롱꼰은 엄청난 논란을 몰고 다니면서 현지의 젊은이들은 왕실과 군부에 대한 반감을 품기 시작했다. 대놓고 비방하면 불경죄로 잡혀가기 때문에, 주로 트위터 같은 익명 사이트를 이용한다.
2. 최고존엄
2014년 제정 태국 헌법 | 제8조 국왕은 존경받는 신성한 지위에 있으며, 누구도 이것을 침범할 수 없다. |
2017년 제정 태국 헌법 | 제6조 국왕은 존엄한 지위에 있으며 어떠한 사람도 모독할 수 없다. 그 어떠한 사람도 어떠한 방법으로도 국왕을 비난하거나 고발할 수 없다. |
태국 형법 | 제112조 국왕, 왕비, 왕세자를 비방하거나 위협한 자는 3년에서 최고 15년까지 형이 선고될 수 있다. |
태국인은 왕실을 존경하는 것을 넘어 신성시한다. 전국에 국왕의 초상화가 붙어져 있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국민적 지지를 받는다.
선왕인 푸미폰 국왕이 오랜 기간 재위하면서 수많은 정치 세력과 쿠데타 주모자가 명멸하는 동안에도 오직 국왕만큼은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에 태국에서 그 권위가 대단하다. 형법 제112조에 따라 국왕 모독죄가 최대 징역 15년이며, 속지주의, 속인주의에 근거하여 내외국인을 가리지 않는다. 실제로 술 마시고 푸미폰 국왕이 미소짓는 간판에 낙서했던 외국인 관광객을 체포하여 징역형을 선고하는 바람에 외교적 마찰도 벌어진 바 있다. 다행히 대부분은 국왕의 자비로운 결정으로 국외 추방 정도에 그쳤다. 태국 여행 가이드북이 국왕 칭찬 일색인 이유 역시, 비판적 구석이 있으면 바로 최저 3년의 징역이기 때문이다.
해외에 거주하는 태국 외교관도 공무원 신분으로 태국법의 지배를 받는 만큼 국왕을 비난하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주의를 게을리 했다가 고발당하면 신분을 유지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유명한 탈북자 출신 기자 주성하가 태국 여행 도중 거리 곳곳에서 국왕 초상화와 초상화에 국민이 절하는 모습을 보고 김일성 우상화와 비교하는 글을 올렸는데 태국 대사관에서 우리 폐하는 그렇지 않아!라고 공문을 보내왔다.
이런 법을 국왕 모독죄 혹은 불경죄(lese-majesty)라고 부르는데, 서유럽의 입헌군주국에도 남아 있고 최근 판결 사례도 있다. 그러나 태국은 그 형량이 유럽에 비해 매우 가혹하고, 국왕에 대한 비판에도 매우 예민하여 표현의 자유를 탄압하는 수준이다. 국가가 해외에 거주하는 자국민의 SNS를 감시하고, 국왕을 비판했다간 거의 살인범 수준인 징역 20년의 가혹한 형을 선고하며, 단순히 사진만 태워도 최소 징역 3년에서 최대 징역 15년이라는 가혹한 형까지 선고되는 등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현재 진행 중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국 헌법재판소는 국왕 모독죄 형법 112조가 국민의 자유권을 규정한 헌법에 위반되는 것은 아니냐는 국왕 모독죄로 수감 중인 솜욧 변호인단의 헌법 소원에 대해 형법 112조는 국왕의 안위를 규정한 헌법 8조를 구체적으로 명시한 조항으로 태국 국민은 이 헌법 조항이 규정하는 범위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판결하였다.
사실 법적인 문제나 정치적인 것을 떠나 사적인 자리에서도 왕은 욕하지 않는게 좋다. 태국인은 왕실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이 깊기 때문에, 여느 국가의 정치인 욕하는 수준과 차원이 다르다. 선왕 푸미폰은 능력도 뛰어나고 인품도 훌륭하다는 평판이 있어 태국인 누구나 존경하는 큰 어르신이었다. 법에서 욕하지 말라고 해서 못하는 게 아니라, 태국인 대부분이 진심으로 존경하는 인물인 것이다.[1] 현왕인 마하 와치랄롱꼰은 선왕에 비해 명망이 낮지만, 왕실에 대한 태국인의 애정이 깊기 때문에 외국인이 욕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국왕의 사진은 지폐, 달력, 도로 광고판, 택시, 버스 등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다. 함부로 "저 듣보잡은 누구?"라고 묻는 실수를 하면 골치 아파진다. 그리고 길거리에 떨어진 지폐를 줍겠다고 발로 밟았다가 국왕 모독죄로 잡혀갈 수 있다. 입헌군주제 국가임에도 국왕에게 주어진 정치적 권위는 막강하고, 여론을 좌지우지할만큼 강력하다. #
군부의 쿠데타가 성공하더라도 국왕은 쿠데타의 대상이 아니며, 오히려 국왕의 승인을 얻지 못한 쿠데타는 실패한다. 덕분에 군부에서 쿠데타 일으켰다가 국왕이 하지 말라고 해서 무산된 적도 있다. 왕궁에 함부로 총질했다가는 온 국민이 들고 일어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왕 앞에서는 거의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인사를 하며, 이는 총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규칙이다. 심지어 현지에 진출한 한국 회사도 왕과 왕족이 방문했을 때 무릎을 꿇어 성의를 보였다.
알현 영상[2] |
위 사진은 1992년 9월 20일 밤에 촬영된 것으로, 당시 태국은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수찐다 크라쁘라윤 정권과 청백리로 유명한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이 이끄는 민주화 시위대 간의 대립이 격화되어 유혈 사태가 발생하는 등 사태가 점점 악화되었는데 푸미폰 국왕이 이를 중재하기 위해 둘 다 입궁시켜 꿇어앉혀놓은 모습. 왕이 손짓으로 다가오라고 하자 두 사람 다 무릎으로 기어갔다.[3] 허락이 있기 전까지 고개조차도 감히 들지도 못했고… 맨 왼쪽의 인물이 잠롱 전 시장이고 우측의 인물이 수찐다 총리인데, 잠롱 전 시장은 9월 18일에 시 현장에서 군부 정권의 무장 군인에게 연행되었으나 국왕의 호출로 이틀 만에 풀려났는데, 군인들이 정중하게 대해주었다. 이 날 푸미폰 국왕은 "국민을 위한 민주 정치를 해야 한다."는 말로 수찐다 총리를 꾸짖었고, 그날로 수찐다 정권은 실각하였다. 국왕이 태국 정치에 미치는 영향력을 알 수 있는 사건이다.
국가는 모든 사람에게 속하며, 하나 또는 두 명의 특정 사람들에게는 속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서로 이야기하고 함께 해결하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고한 시민이 피를 흘렸습니다. 사람들은 폭력에 의지하면 마음을 잃을 수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왜 그들이 서로 싸우며 그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단지 그들이 서로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들은 유일한 승자가 되기 위해 이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 길은 승리로 이어지지만 위험합니다. 승자는 없고 패자만 있을 것입니다. 서로 폭력적으로 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패자가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그 패자의 국가가 될 것입니다. ... 유적과 파편에 서있을 때 그대가 승자라는 것을 당신은 스스로에게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 불기 2535(1992)년 9월 20일
그들은 단지 그들이 서로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들은 유일한 승자가 되기 위해 이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 길은 승리로 이어지지만 위험합니다. 승자는 없고 패자만 있을 것입니다. 서로 폭력적으로 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패자가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그 패자의 국가가 될 것입니다. ... 유적과 파편에 서있을 때 그대가 승자라는 것을 당신은 스스로에게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 불기 2535(1992)년 9월 20일
태국은 1932년까지 '전제군주국'이었다. 국왕은 말 그대로 신이나 다름없었으나, 짜끄리 왕조가 일시적인 무능과 혹정을 보여주던 가운데 1932년 6월 24일 무혈 쿠데타가 성공하면서 새로운 변화의 시기를 맞았다. 주모자는 중급 관리 쁘리디 파놈용과 쁠랙 피분송크람 장군. 이들의 혁명으로 150년간 굳건하던 짜끄리 왕조는 일시적으로 힘을 잃고 라마 7세는 영국으로 망명해 거기서 죽었다. 젊어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라마 8세[4]를 이어 즉위한 그 동생인 푸미폰 국왕 역시 초기에는 군부 세력 및 그 후계자의 조종을 받았으나, 차츰 권력을 장악해 승리자가 되었다.
그러나 국왕의 위세가 몹시 강하기 때문에 왕가에 대해 자유롭게 말하지 못한다거나 민주주의를 저해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또한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축출에 푸미폰 국왕의 암묵적 동의가 있었다는 말이 나오는 것을[5] 보면 지금도 왕실의 권력은 막강한 셈.
태국의 왕가인 짜끄리 왕조에 대한 국민의 존경심은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는데, 과거 서방 유럽 열강의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주변국의 식민지화가 진행될 때 태국은 국왕을 중심으로 지리적 이점을 이용한 대나무 외교를 하여 결국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식민지가 되지 않고 독립을 유지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후 냉전 시기 서방으로부터 독립한 주변국에서 서방에 대한 반감으로 사회주의 공산주의 열풍이 불어닥쳤으나, 태국은 주변국이 공산화되는 와중에도 왕을 중심으로 꿋꿋이 군주제를 유지했다. 이렇듯 주변 정세가 어지럽고 혼란한 상황에서도 짜끄리 왕가는 나라의 자주성과 정체성을 지키는 수호자의 역할을 해왔다. 당연히 왕실에 대한 태국인의 지지와 사랑이 엄청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동시기 왕위를 역임한 라마 5세와 라마 9세는 대왕이라는 칭호로서 특히 존경을 받는다.
선왕은 엄청난 존경을 받았지만 뒤를 이은 마하 와치랄롱꼰의 경우 한량스러운 인물[6]인데다가, 폭력적이고 감정 기복이 심한 충동적인 성격이라 평판이 안 좋아[7] 미 외교 대사에 따르면 태국 정세가 불안해질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3. 여담
태국 국왕은 삼종신기가 아니라 오종신기, 즉 5개의 레갈리아를 물려받는다. 일본의 삼종신기와 달리 모두 실체를 확인할 수 있으며, 왕관·검·왕홀·부채와 파리채[8]·신발이다.이외에도 태국 왕실은 보물을 하나 가지고 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인 골든 주빌리이다. 이 다이아몬드는 비교적 최근인 1985년 남아공에서 발견되었는데, 1996년에 푸미폰 아둔야뎃의 즉위 50주년 기념으로 국왕에게 바치기 위해 태국의 보석상 헨리 호의 주도로 태국의 재벌과 기업가가 돈을 모아 드비어스로부터 이 다이아몬드를 구입하여 국왕에게 헌상했다고 한다. 이 다이아몬드는 현재 태국 왕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국왕을 상징하는 색깔은 노란색이다. 왕비는 파란색, 왕족 중 가장 지지 기반이 확고한 둘째 공주는 보라색이다.
태국 왕실의 재산은 비공개이지만, 330억에서 700억 달러로 추산된다.
왕족끼리 결혼하다 보니 근친혼이 상당히 심한 편에 속한다. 개국 군주인 라마 1세로 부터 현재 국왕인 라마 10세까지 7세대밖에 되지 않다보니 따지고 보면 죄다 사촌, 5촌끼리 결혼을 한 셈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현재 왕실의 구성원은 모두 라마 5세의 자손끼리 결혼한 상태인데, 라마 5세부터가 이미 아버지 라마 4세가 형의 손녀와 결혼하여 얻은 아들이다. 문제는 라마 5세의 정실부인 4명이 모두 자신의 이복동생들이었기 때문에 후손들이 이미 매우 근친혼의 농도가 높아 유전적으로 취약한 상황이다. 이런 농도 높은 근친혼 때문인지 모르지만 라마 6세는 후손이 공주 1명 뿐이라 동생 라마 7세에게 왕위를 넘겼고, 라마 7세는 자녀를 얻지 못한 채 죽어 조카인 라마 8세에게 왕위를 넘긴다. 이후 라마 8세가 사고로 사망하면서 동생인 라마 9세가 왕위가 넘어갔다. 이후 라마 9세 또한 자신의 5촌조카인 시리낏 왕비와 결혼했는데, 시리낏 왕비 역시 이미 근친혼 농도가 매우 짙은 가계로 할아버지는 라마 5세의 아들이고 할머니는 라마 4세의 손녀이다. 즉, 현 국왕인 라마 10세는 고조할아버지(조카손녀와 결혼) - 증조할아버지(이복동생과 결혼) - 할아버지(다른 가문과 결혼) - 아버지(5촌과 결혼) 라는 가계를 가지고 있다. 이후 라마 10세의 첫부인(현재는 이혼상태) 또한 외사촌이자 7촌이었으니...
4. 역대 태국 국왕 목록
태국어 표기법에 따라 표기하였다.4.1. 수코타이 왕국
대수 | 왕호 | 재위 기간 |
1 | 시 인트라팃 (ศรีอินทราทิตย์) | 1249년 ~ 1279년 |
2 | 반 므앙 (บานเมือง) | 1279년 ~ 1280년 |
3 | 람캄행 대왕 (รามคำแหงมหาราช) | 1280년 ~ 1298년 |
4 | 르타이 (เลอไท) | 1298년 ~ 1323년 |
5 | 응아남툼 (งั่วนำถุม) | 1323년 ~ 1347년 |
6 | 마하 탐마라차 1세 / 리 타이 (มหาธรรมราชาที่ 1 / ลิไท) | 1347년 ~ 1368년 |
7 | 마하 탐마라차 2세 / 르 타이 (มหาธรรมราชาที่ 2 / ลือไท) | 1368년 ~ 1399년 |
8 | 마하 탐마라차 3세 / 사이 르타이 (มหาธรรมราชาที่ 3 / ไสลือไท) | 1399년 ~ 1419년 |
9 | 마하 탐마라차 4세 / 보롬마빤 (มหาธรรมราชาที่ 4 / บรมปาล) | 1419년 ~ 1438년 |
4.2. 아유타야 왕국
대수 | 왕호 | 재위 기간 |
1 | 라마티보디 1세 / 우통 (รามาธิบดีที่ 1 / อู่ทอง) | 1314년 ~ 1369년 |
2 | 라메수안 (ราเมศวร) | 1369년 ~ 1370년 |
3 | 보롬마라차티랏 1세 / 파 응우아 (บรมราชาธิราชที่ 1 / พะงั่ว) | 1370년 ~ 1388년 |
4 | 통 란 (ทองลัน) | 1388년 |
(2) | 라메수안 | 1388년 ~ 1395년(복위) |
5 | 람라차 (รามราชาธิราช) | 1395년 ~ 1409년 |
6 | 인타라차 (อินทราชา) | 1409년 ~ 1424년 |
7 | 보롬마라차티랏 2세 / 삼프라야 (บรมราชาธิราชที่ 2 / สามพระยา) | 1424년 ~ 1448년 |
8 | 보롬마라뜨라일로까낫 (บรมไตรโลกนาถ) | 1448년 ~ 1488년 |
9 | 보롬마라차티랏 3세 / 보롬마라차 (บรมราชาธิราชที่ 3 / บรมราชา) | 1488년 ~ 1491년 |
10 | 라마티보디 2세 / 체타 (รามาธิบดีที่ 2 / เชษฐาธิราช) | 1491년 ~ 1529년 |
11 | 보롬마라차티랏 4세 / 노푸탕꾼 (บรมราชาธิราชที่ 4 / หน่อพุทธางกูร) | 1529년 ~ 1533년 |
12 | 랏사다티랏 (รัษฎาธิราช) | 1533년 ~ 1534년 |
13 | 차이라차 (ไชยราชาธิราช) | 1534년 ~ 1546년 |
14 | 욧파 (ยอดฟ้า) | 1546년 ~ 1548년 |
찬탈 | 워라웡사 (วรวงศาธิราช) | 1548년 |
15 | 마하 차끄라팟 (มหาจักรพรรดิ) | 1548년 ~ 1568년 |
16 | 마힌트라티랏 (มหินทราธิราช) | 1568년 ~ 1569년 |
17 | 산펫 1세 / 마하 탐마라차 (สรรเพชญ์ 1 / มหาธรรมราชา) | 1569년 ~ 1590년 |
18 | 산펫 2세 / 나레수안 대왕 (สรรเพชญ์ 2 / นเรศวรมหาราช) | 1590년 ~ 1605년 |
19 | 산펫 3세 / 에까톳사롯 (สรรเพชญ์ 3 / เอกาทศรถ) | 1605년 ~ 1610년 |
20 | 산펫 4세 / 시 사오와팍 (สรรเพชญ์ 4 / ศรีเสาวภาคย์) | 1610년 ~ 1611년 |
21 | 보롬마라차 1세 / 송탐 (บรมราชา 1 / ทรงธรรม) | 1611년 ~ 1628년 |
22 | 보롬마라차 2세 / 체타티랏 (บรมราชา 2 / เชษฐาธิราช) | 1628년 ~ 1629년 |
23 | 아티따야웡 (อาทิตยวงศ์) | 1629년 ~ 1629년 |
24 | 산펫 5세 / 프라삿통 (สรรเพชญ์ 5 / ปราสาททอง) | 1629년 ~ 1656년 |
25 | 산펫 6세 / 차이 (สรรเพชญ์ 6 / ไชย) | 1656년 ~ 1656년 |
26 | 산펫 7세 / 시 수탐마라차 (สรรเพชญ์ 7 / ศรีสุธรรมราชา) | 1656년 ~ 1656년 |
27 | 라마티보디 3세 / 나라이 대왕 (รามาธิบดีที่ 3 / นารายณ์มหาราช) | 1656년 ~ 1688년 |
28 | 펫라차 (เพทราชา) | 1688년 ~ 1705년 |
29 | 산펫 8세 / 수리옌트라티보디 (สรรเพชญ์ 8 / สุริเยนทราธิบดี) | 1705년 ~ 1708년 |
30 | 산펫 9세 / 타이사 (สรรเพชญ์ 9 / ท้ายสระ) | 1708년 ~ 1732년 |
31 | 마하 탐마라차티랏 2세 / 보롬마꼿 (มหาธรรมราชาธิราชที่ 2 / บรมโกศ) | 1732년 ~ 1758년 |
32 | 마하 탐마라차티랏 3세 / 우툼폰 (มหาธรรมราชาธิราชที่ 3 / อุทุมพร) | 1758년 ~ 1758년 |
33 | 보롬마라차 3세 / 에까탓 (บรมราชาที่ 3 / เอกทัศ) | 1758년 ~ 1767년 |
4.3. 톤부리 왕조
대수 | 왕호 | 재위 기간 |
1 | 보롬마라차 4세 / 딱신 대왕 (บรมราชา 4 / ตากสินมหาราช) | 1767년 ~ 1782년 |
4.4. 짜끄리 왕조
짜끄리 왕조의 국왕들에게 붙은 '라마(รัชกาล)'는 힌두교의 비슈누의 화신 라마를 의미하며, 왕의 이름이 아니다.과거 태국의 국왕들은 신성화 차원에서 간혹 자신을 라마와 동일시하도록 했는데, 서구화를 이루게 되면서 서양의 왕국들이 'XX n세'로 왕호를 칭하던 것을 본받고자 했으나 이는 군주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던 태국의 관습과는 배치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국왕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고 1대 국왕 하는 식으로 대수를 붙여 말했는데, 여기에 태국 국왕을 상징하는 라마를 덧붙인 것이 '라마 X세' 식으로 정착한 것이다. 이러한 관습을 시작한 것은 라마 6세이다.
대수 | 왕호 | 즉위 | 사망 |
1 | 라마 1세 푸타욧파 쭐랄록 (พุทธยอดฟ้าจุฬาโลก) | 1782년 4월 6일 | 1809년 9월 7일 |
2 | 라마 2세 푸탈릇라 나팔라이 (พุทธเลิศหล้านภาลัย) | 1809년 9월 7일 | 1824년 7월 21일 |
3 | 라마 3세 쩻사다보딘 (เจษฎาบดินทร์)[9] | 1824년 7월 21일 | 1851년 4월 2일 |
4 | 라마 4세 몽꿋 (มงกุฏ) | 1851년 4월 3일 | 1868년 10월 1일 |
5 | 라마 5세 쭐랄롱꼰 대왕 (จุฬาลงกรณ์) | 1868년 10월 2일 | 1910년 10월 23일 |
6 | 라마 6세 와치라웃 (วชิราวุธ) | 1910년 10월 23일 | 1925년 11월 26일 |
7 | 라마 7세 쁘라차티뽁 (ประชาธิปก) | 1925년 11월 26일 | 1941년 5월 30일[10] |
8 | 라마 8세 아난타 마히돈 (อานันทมหิดล) | 1935년 3월 2일 | 1946년 6월 9일 |
9 | 라마 9세 푸미폰 아둔야뎃 대왕 (ภูมิพลอดุลยเดช) | 1946년 6월 9일 | 2016년 10월 13일 |
10 | 라마 10세 마하 와치랄롱꼰 (วชิราลงกรณ) | 2016년 10월 13일 | 재위 중 |
[1] 물론 그도 완벽한 인물이 아니며 부정적인 평가도 있지만, 태국 일반인 사이에서 그에 대한 이미지나 애정은 한국의 세종대왕급이다.[2] 영상 처음에 나오는 인물은 현재 태국 국왕인 라마 10세이다. 당시 왕세자 신분으로 대한민국을 국빈 방문 중이었기 때문에 잘 보면 왼쪽에 태극기가 보인다.[3] 태국 왕실법에 따르면 국왕과 대면할 때 일정거리 이상 물러선 채 엎드려야 하며, 불러서 곁에 다가갈 때 이처럼 기어서 가야 한다. 이 전근대적 법은 현직 총리는 물론 외국인에게도 적용되는데, 후자의 강요는 큰 틀에서 타국에 대한 주권 침탈이다. 한국 온라인에서도 배우 송승헌이 태국 공주를 고급 레스토랑에서 조우했다가 그의 팬이라는 공주에게 이렇듯 기어서 팬미팅하던 장면이 사진 찍혀 퍼져서 논쟁거리가 된 바 있다. #[4] 이 암살 사건에 '작전의 신' 츠지 마사노부가 관련되어 있다, 라마 9세가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5] 일단 태국 군부는 왕실을 지지하니 왕의 허가가 없었다면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6] 부인이 3명이나 되는데 여기에 정부도 뒀다.[7] 게다가 에이즈나 C형 간염, 혈액암 등 혈액 관련 질환을 앓는다는 설이 제기되었다. 또한 본국이 아닌 유럽에서 지내며 민심을 잃은 데다가 2009년에는 셋째 부인인 스리라스미 왕자비가 알몸에 팬티만 걸치고 왕자의 애완견의 생일을 축하하는 외설스러운 비디오 동영상이 공개돼 파문이 일었다.[8] 파리채가 레갈리아의 일부라니 생뚱맞게 여겨질 수도 있으나, 습하고 벌레가 많은 동남아·폴리네시아 지역에서는 날벌레를 쫓는 것도 나름 일인 만큼 웃자고 챙겨놓은 물건은 아니다.[9] 사망 후 낭끌라오(นั่งเกล้า)라는 왕호를 받았다.[10] 1935년 3월 2일 생전 퇴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