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창경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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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표시가 붙은 건물은 현재 창덕궁 영역이다. | |||||||||||||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덕수궁 · 경희궁 |
1. 궁문
사진 | 설명 |
홍화문(弘化門) 창경궁의 정문.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우진각지붕의 건물로, 북쪽에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마련돼 있다. 명정전과 마찬가지로 동향했다. 1484년(성종 15년)에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1616년(광해군 8년)에 재건되어 오늘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동궐도에는 우진각지붕이 아니라 팔작지붕으로 묘사되었다. 2009년경 퇴색한 단청들을 보수한 것이 오늘날 만나볼 수 있는 홍화문의 모습이다. | |
월근문(月覲門) 홍화문 북쪽에 있는 문으로 특이하게 대문과 작은 문이 나란히 붙어있는 형태다. 정조가 친부 사도세자의 묘(廟)인 경모궁에 수시로 참배하기 위하여 1779년(정조 3년)에 건립했다. 정조가 매달 초하루 경모궁에 참배하러 거둥할 때에는 반드시 이 문을 경유했기 때문에 월근문이라 이름했다 한다. | |
선인문(宣仁門) 홍화문에서 이어진 궁 담장의 남쪽에 있는 문으로 1484년(성종 15년)에 초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17년(광해군 8년)에 재건했는데 1857년(철종 8년)에 다시 소실되어 1877년(고종 14년)에 복원했다. '동궐도'에 보면 현재의 월근문과 같이 솟을지붕의 외관을 갖추고 있었으나 고종 때 재건하면서 지금의 형태로 건립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 |
집춘문(集春門) 창경궁 동북쪽 담장에 있는 궁문으로, 문묘가 마주 바라보이는 곳에 있다. 《동국여지비고》에 의하면 이 문은 후원의 동문으로, 태학(太學) 서쪽 반교(泮橋)와 제일 가까워 역대 임금들이 태학으로 나갈 때에는 이 문을 경유했다 한다. 현재 이 문 외부 지역에는 민가가 들어서 있어 출입문으로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
2. 외조
2.1. 정전 권역
사진 | 설명 |
명정문(明政門) 홍화문을 지나면 나오는 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다포계 양식을 하고 있다. 위치로 보아서 명정전의 동서 중심 축선상에 정확히 놓이지 않고 남쪽으로 약 1.2m 벗어나 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명정전과 함께 광해군 때 재건되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 |
상위 문서: 대한민국의 국보 명정전(明政殿) 현존하는 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 창경궁의 정전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에 후퇴(後退)를 한 단층 팔작기와지붕의 겹처마 전각이다. 총 칸수 15칸으로, 다른 궁궐의 정전에 비해 규모가 제일 작다.[1] 창덕궁의 정전과는 달리 남향이 아닌 동향인데, 이는 창경궁의 지세에 따랐기 때문이다. 1484년(성종 15년)에 창경궁이 조성되고 그 정전으로서 세워졌으나 1592년(선조 25년)에 발생한 임진왜란 당시 불타버려 1616년(광해군 8년)에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명정전 앞 조정에 깔린 박석은 일제강점기에 뜯겨지고 잔디를 심어 훼손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복원 작업의 일환으로 다시 박석을 깔았는데, 창덕궁의 조정과 마찬가지로 자연박석이 아니라 인공박석이다. |
2.2. 편전 권역
사진 | 설명 |
문정전(文政殿) 창경궁의 편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내삼출목, 외이출목, 단층 팔작집, 겹처마로 창경궁 창건 당시 세워져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광해군 때 명정전과 함께 중건했다. 중건 당시 문정전이 남향(南向)인 것을 광해군이 문제로 삼아 동향(東向)으로 바꾸고 건물 기둥이 둥그렇지 않고 네모나게 각진 것을 문제 삼아 이를 모두 고치도록 하여 논란이 빚어졌으며, 당시 이미 건물이 거의 완성되어 있었기에 다시 시공을 하려면 백성이 수고로움이 크고 옛부터 이런 형태였다는 신하들의 반박을 광해군이 받아들여 결국 현재의 형태로 완성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30년 이후에 헐린 것으로 보이며 바로 이 주변이 위에 거론한 창경원의 동물원과 식물원 자리였다. 지금이야 모두 서울대공원으로 모두 이전했으며, 현재 그 자리는 소나무가 빽빽하게 심어진 산책로로 바뀌었다. 1984년부터 발굴 조사를 한 후 1986년 창경궁 중창 공사 때 중건되었다. 나중에 위패가 모셔지는 혼전(魂殿)으로 사용됨에 따라 전각 앞에 월랑(月廊)이 덧지어졌고 이는 동궐도를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하나 복원되지 않았다. 문정전이 혼전으로 사용된 것은 신정왕후 조씨가 세상을 떠난 1891년(고종 28년)이 마지막이었다. 이곳의 뜰은 임오화변이 일어난 장소이기도 하다. | |
숭문당(崇文堂) 창경궁의 전각 중 하나로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홑처마로 경종 때 건립되었으며, 1830년(순조 30년)에 큰 불로 소실된 것을 그해 가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명정전 뒤쪽에 있는 빈양문의 남쪽에 맞닿은 전각이다. 현판과 내부에 걸린 일감재자(日監在玆)라 쓴 게판은 영조의 어필이며 학문을 숭상한다는 뜻답게 영조 당시 학문을 숭상하고 인재를 양성했는데, 이곳에서 친히 태학생을 접견하여 시험하기도 하고 때로는 주연(酒宴)를 베풀어 그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
3. 내조(침전 권역)
사진 | 설명 |
경춘전(景春殿) 창경궁의 침전 중 하나로 왕비와 대비의 침전이다. 정면 7칸, 전후퇴칸을 포함해서 측면 4칸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를 하고 있다. 1484년(성종 15년)에 창건되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다가 1616년(광해군 8년)에 재건했으나, 순조 30년에 불탄 것을 1834년(순조 34년)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이 경춘전은 소혜왕후 한씨와 인현왕후 민씨가 세상을 떠난 곳이자 정조와 헌종이 탄생한 곳이며, 현판은 순조의 어필이다. | |
환경전(歡慶殿) 창경궁의 침전 중 하나로 정면 7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이며 1484년(성종 15년)에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616년(광해군 8년)에 중건했다. 그 후 1830년(순조 30년)의 큰 불로 소실되었던 것을 동왕 34년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참고로 왕이 늘 거동하던 곳이며, 중종과 소현세자가 이곳에서 승하했고, 효명세자가 승하했을 때는 관을 모시는 빈궁으로 사용되었다가 화재가 발생해 재궁을 불속에서 가까스로 꺼내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동궐도에는 누마루가 있지만 현존하는 건물에는 누마루가 시설되지 않았다. | |
통명전(通明殿) 창경궁의 침전 중 하나로 정면은 7칸이고 측면이 4칸인 이익공계(二翼工系) 건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했다. 창경궁 창건 때 세워졌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재건이 되고, 다시 이괄의 난과 정조 때 화재를 입었다. 지금의 건물은 1834년(순조 34년)에 중건된 것이다. 통명전 서쪽에 있는 연못에는 석재 수통이 있다. 성종 때 구리 수통을 설치했다가 사치라는 신하들의 반발에 돌로 바꾼 것인데, 정작 설치 비용은 석재 수통이 더 비쌌다. (...) | |
양화당(養和堂) 창경궁의 침전 중 하나로 정면 6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 건물이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파천했던 인조가 환궁하면서 이곳에 거처한 일이 있으며, 고종 15년(1878년) 철종비 철인왕후 김씨가 이곳에서 승하했다. 현판은 순조의 어필이다. | |
영춘헌(迎春軒) · 집복헌(集福軒) 영춘헌은 창경궁의 북쪽에 있는 침전 건물이다. 정조의 서재였으며 이곳에서 승하했다, 정조 대 이후 왕들도 서재로 사용했다. 〈동궐도〉(1824년 ~ 1830년)에 그려진 영춘헌은 집복헌의 동남쪽에 있지만 전면 공간은 담장으로 구획되어 별개의 영역을 형성했다. 그런데 1830년(순조 30년) 8월 1일 환경전에서 시작된 화재로 함께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영춘헌은 1834년(순조 34년)에 중건된 건물로, 화재로 소실된 영춘헌을 다시 지으면서 이전과 달리 영춘헌과 집복헌이 이어져 유기적으로 연결되었으며 집복헌은 영춘헌의 부속 건물이 된, 현재와 같은 건축 형태가 완성되었다. 참고로 집복헌에서 1735년(영조 11년)에 사도세자가 태어났고 1790년(정조 14년) 6월에는 순조가 태어났으며 정조는 영춘헌에서 재위 24년인 1800년 6월 승하했다. |
4. 기타 건축
사진 | 설명 |
빈양문(賓陽門) 명정전을 돌아나와 만날 수 있는 명정전의 후문이자 창경궁의 내전권역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중앙간의 지붕이 솟아있는 솟을지붕 형식이다. 명정전 후면에 설치된 가설툇마루부터 빈양문까지 복도각이 쭉 연결되어 날씨가 궂을 때도 간편히 행차를 할 수 있게 배려했다. | |
함인정(涵仁亭) 창경궁의 정자 중 하나로 환경전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를 하고 있다. 빈양문을 지나나오면 바로 만날 수 있는 건물이며, 내밀한 내전권역으로 가기 전에 거쳐갈 수밖에 없는 건물로, 사랑방 같은 역할의 정자라 할 만하다. 연혁으로는 1484년(성종 15년)에 지은 인양전(仁陽殿)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인조 때에 재건되었다. [2] 이곳은 특히 영조가 문무 과거에서 장원 급제한 사람들을 접견하는 곳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동궐도에는 함인정의 남쪽을 제외하면 벽체를 둘러 막혀 있는걸로 그려져있지만 현재는 사방이 트인 상태다. | |
관덕정(觀德亭) 창경궁 춘당지 동북쪽 야산 기슭에 있는 사정(射亭)으로 정, 측면 1칸에 초익공계 양식이며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공혜왕후 한씨가 잠례를 거행하던 장소에 1642년(인조 20년) 취미정(翠微亭)이란 이름으로 창건되었으나 1664년(현종 5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 |
대온실(식물원) 창경궁 후원 춘당지 북쪽에 위치한 서양식 건물로 1909년 목재와 철재, 그리고 유리로 지어진 한국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다. 일제가 순종황제를 유폐시킨 후 황제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세워졌으며 일본 황실 식물원 책임자였던 후쿠와가 1907년 설계하고 프랑스 회사에서 시공해 건축 당시 동양 최대의 규모였다. 열대 지방의 관상 식물을 비롯한 희귀한 식물을 전시했다. 처음에는 대온실 후면에 원형 평면의 돔식 온실 2개를 서로 마주 보게 세웠으나 후에 돔식 온실 2개는 철거하여 현재 대온실만 남아있다. 건축 양식은 19세기 말 시작된 세계 박람회 전시 건물의 양식을 따른 근대 건축물로 한국 근대 건축사의 보고 중 하나다. 원래는 창경원에 딸린 식물원이었으나 식물원 자체는 창경궁 복원 공사에 따라 1983년에 서울대공원으로 이전하고, 1986년에 궁이 복원된 후에는 자생목본류를 중심으로 야생화를 함께 전시하는 공간이 되었다. 현재 대온실은 2004년 2월 6일에 등록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었다. | |
춘당지 창경궁 후원에 있는 연못. 본래 이 곳은 국왕이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농사를 시연하는 땅인 권농장(勸農場)이 있던 곳이었다. 이를 일제가 1909년에 없애고 이 자리에 연못을 파서 일본식 정원을 만들었다. 광복 후에는 이 위를 떠다니는 케이블카가 개통되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철거되었다. 1980년대 복원 당시 한국식 정원으로 개조했다. |
5. 사라진 건축물
사진 | 설명 |
자경전(慈慶殿) 창경궁의 대비전으로 1777년(정조 1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었다가 1827년부터 1830년까지 효명세자가 대리청정하던 시기에는 이곳에서 순조에게 존호를 올리고 순조 부부의 생일을 축하하며 즉위를 기념하는 잔치를 열었다. 이때 연회공간으로 사용하면서 건물을 증축했고 1865년(고종 2년) 경복궁 중건 때 헐어서 자미당[3]으로 지었다. 이후 다시 짓지 않았고 일제강점기에 빈터에 장서각이 들어섰다가 헐리고 난뒤 현재는 빈 터이고 자경전 터라는 표지판만 있으며 창경궁의 장기 복원계획에 포함되었지만 언제 복원될지는 미지수이다. | |
요화당(瑤華堂) 창경궁의 별당으로 효종대에는 시집간 공주들이 궁내에서 머물던곳으로 숙,영조시기에는 왕의 거처이자 경연장소로 정조이후로는 빈전으로 사용했으며 현종때 화재를 입고 재건했다가 일제강점기에 헐리고 난뒤 현재는 없다. | |
환취정(環翠亭) 창경궁의 정자로 1483년(성종 14년) 옛날 태종이 머물던 수강궁 자리에 대비들을 위해 창경궁을 창건할 때 함께 지었다. 이후 자경전이 근처에 세워진뒤 자경전의 부속건물로 활용되다가 자경전과 함께 헐리고 난뒤 현재는 빈 터이고 창경궁의 장기 복원계획에 포함되었지만 언제 복원될지는 미지수이다. | |
통화전(通和殿) 창경궁의 혼전으로 언제 세워진지는 모르지만 순조 이후로는 혼전으로 사용한 건물이다.1833년(순조 33년) 창경궁 대화재 때 불탄 후 재건하면서 모습이 바뀌었고 창경궁이 창경원이 되면서 휴게소로 개조되었지만 1970년대에 헐리고 난뒤 현재는 빈 터이고 창경궁의 장기 복원계획에 포함되었지만 언제 복원될지는 미지수이다. |
6. 문화재
- 사적 제123호 창경궁(昌慶宮)
- 국보 제226호 창경궁 명정전(昌慶宮 明政殿)
국보 제229호 창경궁 자격루 누기(昌慶宮 自擊漏 漏器) - 보물 제384호 창경궁 홍화문(昌慶宮 弘化門)
보물 제385호 창경궁 명정문 및 행각(昌慶宮 明政門 및 行閣)
보물 제386호 창경궁 옥천교(昌慶宮 玉川橋)
보물 제818호 창경궁 통명전(昌慶宮 通明殿)
보물 제846호 창경궁 풍기대(昌慶宮 風旗臺)
보물 제851호 창경궁 관천대(昌慶宮 觀天臺)
보물 제1119호 창경궁 팔각칠층석탑(昌慶宮 八角七層石塔)
[1] 조선 후기 이궁으로 건설한 숭정전조차도 정면5, 측면4 = 20칸이다.[2] 일설에는 인조 당시에 인경궁(仁慶宮)의 함인당을 이건하여 함인정이라 한 것이라는 설이 한동안 많았으나, 인경궁의 함인당은 그 재목으로 창경궁의 어느 침전 건물의 부속 건물로 쓰였다고 한다.[3] 위치는 경복궁 교태전과 경복궁 자경전 사이이며 이 건물마저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