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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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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평가
3.1. 부정적 평가3.2. 긍정적 평가
4. 여담

1. 개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C%A0%95%EC%9D%8D%EB%B0%9C%EC%96%B8.jpg
정읍 선언 당시의 신문 보도.

미군정기인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이 삼남 지방을 순회하던 중에 전라북도 정읍군(현 정읍시)에서 남북미소 통틀어 처음으로 분단에 대해 이야기한 것, 정확히는"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야 할 것"이라는 내용의 발언을 한 것을 가리키는 용어.

2. 상세

1945년 12월의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 한반도 신탁통치안에 대한 오보가 전해지면서 찬탁과 반탁을 놓고 좌 · 우익 세력이 크게 대립하였다. 초기에는 전국적으로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시위들이 일어났고 김구를 필두로 한 임시정부 세력에서도 반대했으며 이승만도 반대했지만 몰래 삼팔선을 넘어 이북으로 갔던 박헌영소련의 지령을 받아 온 후 좌익 세력은 1946년 1월 3일부터 신탁통치에 찬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46년 3월 20일에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소련 측은 '모스크바 3상회의 협정 지지세력에게만 통일 임시정부에 참여할 자격을 줘야 한다'는 주장을 했고 미국 측은 '모든 정치세력에게 통일 임시정부에 참여할 자격을 줘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서로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 결렬되었고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5월 6일 무기한 휴회되었다.

그 와중에 북쪽에서는 1946년 2월에 이미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되어 3월에 토지개혁을 하고 기간산업을 국유화하는 등 공산체제를 굳히고 있었다.
파일:Francesca_and_Syngman_in_the_car.webp
1946년 5월 6일, 전남 보성에 도착한 이승만 민주의원 의장과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1946년 4월부터 6월까지 삼남 지방을 순회(일명 남선순행)하기 시작했는데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마저 실패로 끝나자 1946년 5월 20일 전남 목포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
"공산주의자는 소련으로 보내야 한다. 가족의 일원이라도 거부하라. 공산주의자는 파괴주의자이므로 전부 체포할 것이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 남조선에 단독정부를 세워 38선을 깨트리고 소련군을 내어 쫓고 북조선을 차지할 것이다."

그리고 이승만은 6월 3일 전북 정읍에서 해당 연설을 하였다.
"이제 우리는 무기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다.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다. 그리고, 민족 통일기관 설치에 대하여 지금까지 노력하여 왔으나 이번에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 통일기관을 귀경한 후 즉시 설치하게 되었으니 각 지방에서도 중앙의 지시에 순응하여 조직적으로 활동하여 주기 바란다."

당시 이 발언에 대해 1945년에 작성된 미군정 보고서에 따르면 '미군정은 이승만김구를 지지했으나 민심은 최악 그 자체였으며 매우 흉흉했었다.'고 한다. 이렇게 이승만의 이러한 '남한 단독 정부' 주장은 당시에 민중들에게 별 호응을 얻지 못했고 심지어 '늙은 파시스트'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미군정의 리치 군정장관 등도 "그건 그 사람 생각이고, 난 단독정부 반대다."[1]라는 (의례적일지는 몰라도)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면서 미국의 대외 정책이 이승만의 노선과 같아졌다.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이 2차 회의도 결국 1차 회의 때와 같은 부분에서의 입장차 문제로 사실상 결렬되었다. 결국 한국 문제는 UN으로 이관되었고 UN한국임시위원단이 서울에 입국했으나 북쪽에서는 UN한국임시위원단의 이북 방문을 거부했다. 그 결과 UN은 선거가 가능한 남한지역만을 대상으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하였고 1948년 5월 10일에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3. 평가

3.1. 부정적 평가

정읍발언을 옹호하는 측의 의견에는 주로 지금 시점으로 바라본 단정적인 시각이라는 반박이 따른다.

실제로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는 치안 및 행정을 담당하는 자치기구였으나 주권을 가진 정부로 보기는 어려웠던 반면, 이승만이 주장한 단독정부 수립이란 당연히 "주권"을 가진 정부를 말한 것이다. 그러니 양자를 같은 차원에 놓고 논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 공식적으로 남북분단,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들고 나온 것은 이승만이 최초였다. 이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한 주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통일 정부가 수립되면 자신이 정부의 수반으로 올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되었을 때 거의 동시기인 1946년, 남한의 미군정에서도 자문기관인 민주의원, 이후 입법의원이 만들어졌고 1947년에는 안재홍이 민정장관에 취임했지만 이를 '사실상의 정부'라고 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주권'이 없기 때문이다. 북조선림시인민위도 주요 사항에 대해서는 소련군 당국의 지시나 승인을 받았기 때문에 '주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쳐 주긴 힘들다. 애초에 국제적 승인 같은 것은 아직 생각하기도 어려웠던 시기였다. 본격적인 논의는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 전후로 시작되었다.

3.2. 긍정적 평가

이승만의 정읍발언 이전부터 이미 북한 지역에서는 소련의 지원을 받는 김일성의 단독지배체제가 공고해졌고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라는 사실상의 공산주의 정부가 설립되어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기간산업을 국유화하면서 공산화를 진행하고 있었다. 남쪽에서 단독정부 수립 얘기가 나오거나 말거나 이미 북쪽에서는 단독정부 수립과정을 차근차근 밟아나가고 있었다.[2]지주의 토지를 몰수하고 무상분배하는 등의 토지개혁은 국가 차원에서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단독정부를 수립하자는 말 때문에 오해하기 쉬운데, 정읍발언의 요지는 민족 분단을 하자는 게 아니라 북에서 저렇게 정권 노릇을 하는 체계가 있으니 우리도 그에 따라 임시정부나 위원회를 만드는 등 적절한 대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측에서는 현재 시점에서 바라본 시각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들이야말로 착각한 것이 있다. 남한 내에서만 어떻게 의견을 모아 통일정부를 만들겠다고 주장한다고 실제로 바로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다. 북한의 배후에는 공산국가인 소련이 있었고 김일성도 소련군 장교였다. 애초에 공산주의자들이 북한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데 그 사람들과 통일을 하는 방안은 둘뿐이다. 통일된 공산주의 정부를 만들거나, 김일성을 비롯한 북쪽 공산세력을 다 숙청하고 통일된 자본주의 정부를 만들거나. 왜냐면 공산주의자들이 서구식 민주주의, 자본주의 시스템의 국가 수립에 동의할 거라고 생각한다는 게 넌센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미소공동위원회가 두 번이나 결렬된 것만 봐도 자명하게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소련은 친소 인사가 아니면 통일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도 안 시키려고 했으며 김구[3], 우파들 중 중도적인 성격을 가진 김규식이 남-북 통합 정부 수립을 하려고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을 방문하기도 하였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었으며 오히려 김일성의 선전에 이용당할 뿐이었다. 이런 것들을 보고도 이승만 때문에 분단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차원적인 발상이다.

오히려 이승만은 자유의 나라의 원조이기도 한, 즉 여러 매체도 비교적 자유롭게 접할 수 있는 미국에 거주했으며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에 힘써 왔기 때문에 다른 독립운동가들에 비해 국제 정세를 비교적 잘 꿰고 있는 편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사실상 통일 정부 수립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며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라도 단독 정부 수립을 한 다음 무력 통일을 꾀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는 자치기구일 뿐 주권을 가진 정부가 아니라며 둘을 비교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그런 식으로 따진다면 이승만이 정읍 발언에서 한 말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를 설립해야 한다고 했지, 주권을 가진 정부라고 명시를 안 했다.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라는 표현 자체가 북한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그리고 북한 지역에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1946년 2월 8일에 수립되었고 소련군정은 공식적으로 1946년 2월 15일에 끝났다. 여전히 미군정 중이었던 시기에 만들어졌던 과도입법의원 등과 비교 대상이 아니며 소련군정 후 북한 지역을 넘겨받아 통치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실상의 정부였으며 이후 실제로 정부가 되었다.

4. 여담


[1] 민심을 고려했을 가능성이 크다[2] 우리가 흔히 아는 북한 정부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부터 거의 한 달 정도가 더 지난 9월 9일에 수립되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의미에서의 정부 수립 선포라는 것이지, 이전부터 북한은 공식 선포만 안 했을 뿐, 38선 이북에서는 이미 국가 노릇을 할만한 시스템이 있었다. 토지개혁이 그 증거중 하나인데,[3] 당시 미군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모든 것을 부정하였다. 때문에 연합국 지위 인정을 받지 못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였으며 중국 측으로부터 받기로 한 정치자금 지원도 미-소련 당국 및 좌-우 이념 대립이 심해지던 와중에 유야무야되었다. 그리고 이승만이 정읍발언을 할 때 김구는 이승만을 지지하였다. 김구가 통일정부 수립과 같은 독자행보를 벌이기 시작한 시점은 장덕수 암살 사건의 배후라는 음모론이 생겨난 후이고 이때 김구의 조직력도 강경 우익 세력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