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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10:45:21

러시아계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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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지역별 분포4. 갈등5. 문화
5.1. 언어5.2. 종교
6. 여담7. 유명인
7.1. 러시아계 한국인7.2. 재한 러시아인
8. 관련 문서

1. 개요

파일:안드레이 란코프.png
러시아계 한국인(Russian Koreans/русские корейцы)은 러시아에서 한국으로 귀화한 사람 혹은 러시아계 부모를 두되 한국 국적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을 일컫는다. 러시아 국적을 가지고 한국에 체류하는 경우는 재한 러시아인(Russians in Korea/Русские в Корее)에 해당한다. 편의상 해당 문서에서는 재한 러시아인과 러시아계 한국인을 함께 서술한다.

러시아계 한국인들은 동슬라브 혈통의 러시아인들 외에도 고려인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재한 러시아인 인구 규모는 6만 명 정도로 한국에 체류하는 유럽인 집단 중 압도적으로 1위이다. 규모는 재한 외국인 중 6위이다.

2. 역사

대한민국의 러시아인 공동체는 일제강점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러시아 내전의 결과 1922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부 백군 난민들이 조선에 정착하기도 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원산으로 백군 난민 약 9천여 명이 이주하였는데 이는 당시 일본이 소련을 적대하고 적백내전 당시 백군을 지원하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렇다고 일본에서 이들을 제대로 챙겨준 것은 아니어서 원산 내 난민 수용소에서 상당수의 러시아인들의 질병으로 죽어나가는 등 참상이 나오기도 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다시 미국이나 호주 등지로 흩어졌지만 일부는 당시 조선 땅에 그대로 남아 생활하였다. 영화배우 율 브리너와 그의 가족도 이때 잠시 함경도에서 살았다가 미국으로 이민갔다.
한반도에 남아 일생을 보낸 러시아 난민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을 든다면 바로 유리 양코프스키[1] 가족일 것이다. 1922년 늦가을 유리 양코프스키와 그의 가족 일행은 다른 백계 러시아인들과 마찬가지로 볼셰비키를 피해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유리 양코프스키 가족의 피난생활은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크게 변했다. 1925년 여름 양코프스키 가족은 청진에서 40킬로미터 떨어진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역 부근 온포지역에 한 일본인 온천장 주인에게 아끼던 자동차마저 팔아야만 했다. 감사의 표시로 온천장의 일본인 주인이 양코프스키 가족을 자신의 휴양소로 초대했다. 이날 밤 일행은 등나무 넝쿨로 감겨 있는 작지만 "낙원 같은" 오두막집에서 보낼 수 있었다. 아름다운 주변 환경에 반한 양코프스키는 인근에 있는 한 한국인이 소유한 집을 여름동안 임대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후에 가까운 친척이자 영화배우 율 브리너의 아버지인 보리스 브리너로부터 돈을 빌려 가옥과 대지를 구입했다.

양코프스키 가족들은 점차 주변 농경지, 과수원, 삼림의 주인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일제 강점기 한반도의 대표적 러시아촌인 노비나가 탄생하게 되었다. 노비나는 원래 양코프스키 가문의 문장에 그려진 단검을 의미하는데, 이제는 한국과 일본은 물론 만주, 중국, 유럽과 미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휴양지가 되었다. 1928년 여름부터 상하이와 하얼빈의 부유한 백계 러시아인들이 양코프스키로부터 주변 대지들을 구입해 별장을 신축하면서, 노비나는 급속히 성장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 유리 양코프스키는 노비나에서 남쪽으로 약 18킬로미터 떨어진 함경북도 경성군 염분리 용현리 섬골산 기슭에 새로운 별장지대를 조성했다. 그리고 이 지역을 푸시킨이 지은 시를 인용해 루코모리예로 불렀다. 해안가에 위치한 루코모리예는 노비나보다는 규모가 작았지만 6킬로미터에 이르는 벨벳과 같은 부드러운 황금모래가 해안가에 깔려 있었다. 그리고 모래사장 바로 옆에는 아름다운 해송이 병풍처럼 펼쳐있었다.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에 반한 부유한 백계러시아인들이 유리로부터 대지를 구입해 이 지역에도 별장을 지었다. 이들 가운데는 보리스 브리너도 있었다.

나라를 잃은 백계러시아인들에게 루코모리예는 지상낙원과 같았다. 루코모리예의 여름철 바닷물은 따스하고 파도도 적어 수영하기에 적합했다. 휴양객들은 아침에는 주로 바닷가에서 수영을 하고 오후가 되면 주변 지역을 관광했다. 루코모리예 해안가 남쪽 낮은 언덕 기슭에는 전형적인 어촌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어부들이 잡은 정어리를 모래사장에 펼쳐 말리곤 했다. 백계러시아인들은 뱃사장에 누워 바닷바람이 뿌리는 매캐한 냄새에 취하곤 했다. 간혹 주변 어촌에서 아름다운 한국 여인들이 머리에 바구니를 이고 가져오는 새우나 게 등을 사서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수영 후 이들이 주변 마을을 지나가노라면 어린 아이들이 집에서 뛰쳐나와 “야오시키, 야오시키”하며 외쳐 되었다. 한국 아이들에게 서양인들은 모두 양코프스키처럼 보인 것이다. 하얼빈과 상하이에 거주하는 백계러시아인들은 물론 일본인들도 노비나를 방문했다. 이들 중에는 소기 조선총독도 있었다. 그러나 양코프스키 일가가 누구보다도 우정을 느끼고 인간적인 감정을 느낀 사람들은 바로 한국인들이었다. 양코프스키 가족들이 접촉한 한국인들은 도시의 관료나 사업가와 같은 세련되고 지식이 풍부한 사람들이 아니라 마을의 보통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냥꾼들이었다. 양코프스키 가족들은 사냥을 나가면 한국인들과 함께 김치를 먹고 초가집에서 잠을 자며 생사고락을 같이 했다. 함경산맥의 깊고 험준한 산 속에서 숙련된 한국인 사냥꾼들은 양코프스키 가족에게 친 형제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유리의 장남 발레리 양코프스키는 이들을 아르세니에프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한국의 데르수 우잘라로 부르기도 했다. 이외에도 휴양객들은 아마추어 배우가 되어 연극을 무대에 올리곤 했다. 보리스 브리너의 두 번째 부인인 예카테리나는 러시아의 유명한 배우로 노비나에 살면서 아마추어 연극을 연출하고 제작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출처 : 식민지 시대 러시아인 양코프스키 일가의 한반도 정착기록(KCI 등재논문)

이후 2차대전 말 만주 작전에서 소련군이 한반도 북부에 진주하는 과정에서 함경도에 살던 백군 난민들은 소련으로 송환되었고 서울에 남아있던 러시아인들 역시 6.25 전쟁 과정에서 북한군에 의해 다시 소련으로 압송되면서 한국 내 러시아인 거주 역사는 단절을 겪는다.
1946년 9월 소련군이 노비나에 들어와 남아 있는 모든 사람들을 체포하고 재산을 몰수하면서, 20여년의 노비나 역사는 마침내 막을 내리게 되었다. 1946년 시베리아의 강제수용소로 유배된 유리는 1956년 병과 가난으로 고통 속에 죽었다. 그의 다섯자녀들의 운명도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크게 바뀌었다. 남한과 미국 등 자유세계로 탈출한 빅토리아나 아르세니는 행복한 삶을 살았지만, 탈출하지 못하고 공산세계에 남아 있던 발레리는 차디 찬 추코트카의 수용소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며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 발레리는 짜르의 전제정치, 일제의 식민통치 그리고 공산정권 등 20세기의 다양한 정치체제를 모두 경험한 인물이었다. 2010년 4월 17일 발레리는 9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 발레리는 한반도에서 지낸 기간이 그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출처 : 식민지 시대 러시아인 양코프스키 일가의 한반도 정착기록(KCI 등재논문)

의외로 한국을 떠나지 않은 극소수의 러시아인들도 있었다. 1930년대 경성에서 화장품 판매업을 했던 이반 니콜라예비치 티호노프(Ива́н Никола́евич Тихонов)[2]는 해방 이후에도 한국에 남았고, 한국전쟁 때 북한군에게 납치되어 몇년간 포로생활을 했음에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살았다가 말년에서야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가 만들어 팔았던 화장품은 서민들에게 꽤 인기였으며, 수레에 화장품을 담고선 아코디언, 북을 치며 시장통에서 노래를 부르던 그는 당대 서울의 명물이었다고 한다. 한국 화장품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동동구리무'라는 표기 역시 그에게서 유래됐다.#

한 때 단절된 러시아계 한국인의 역사는 소련 해체를 전후로 다시 시작되었다. 1990년 한소수교 이후, 러시아인 보따리 상인들이 부산항에 드나들게 됐다. 얼마 안 가 소련 해체 이후 블라디보스토크 등에서 상당수의 러시아인들이 다시 대한민국에 터를 잡고, 다른 한편으로 사할린 한인이나 고려인들이 한국으로 귀화하기 시작했다.

2021년 외국인주민자녀 현황 통계에서 재한 러시아인들의 자녀 인구는 1,289명으로 나왔으며, 이는 한국계[3] 자녀 176명을 제외한 수치라고 한다. 재한 러시아인들의 미성년 자녀들 중 부모가 사립 국제학교를 다닐 정도로 부유한 사람들은 대사관 직원 등 일부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여타 한국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일반 한국 학교를 다닌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일어나자 재한 러시아인들이 재한 우크라이나인들과 함께 주한 러시아 대사관 앞에서 반전 시위를 진행했다.##2

2022년 러시아 동원령으로 인해 징집 대상인 러시아 남자들이 대대적으로 외국으로 도주하기도 했지만, 상당수는 국경에서 걸려 징집되기도 했다. 전쟁 전부터 한국에 체류하고 있었던 러시아인 일부는 고향의 이웃들과 소식을 나누면서 은근히(...) 안도하기도 한다는 모양.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65만명의 러시아인들이 국외로 도피했으며, 이 중 한국에만 19,805명의 러시아인이 도피한 것으로 드러났다.#

3. 지역별 분포

국내 유럽권 외국인 중 압도적 1위에다가 고려인 인구의 한국 재정착 그리고 우즈베키스탄 같은 구소련권 이민자들이 서로 러시아어로 의사소통하는 영향으로 한국 곳곳에 러시아타운들이 생기고 있다. 러시아어가 많이 사용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데 고려인들의 경우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 출신이 많지만, 이들 중 우즈베크어나 카자흐어가 유창한 경우는 소수이고, 이 때문에 재한 우즈베크인, 카자흐인들이 고려인들과 소통할 때 어쩔 수 없이 러시아어를 사용하게 되기 때문이다. 러시아계 한국인 혹은 재한 러시아인은 한국 내 러시아어 사용자 인구의 부분집합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4. 갈등

세월호 사건 당시 단원고의 한러혼혈 학생도 희생자로 확인되었다. 당시 다문화 정책을 대표하던 인물이 이자스민이었는데 당시 새누리당 소속인 것도 있고 필리핀인 가수 두 명은 이준석 선장과 함께 제일 먼저 도망나온 것이 찔렸는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 안산과 이태원 등 외국인 커뮤니티에서 상당한 논란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인천 중학생 추락사 사건 때도 비슷한 이유로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아서 재한 러시아인 및 고려인 커뮤니티에서 이자스민을 필리핀밖에 모르는 얌체라고 비판하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천 중학생 추락사 사건 당시 언론에서는 피해자 모친이 고려인이다 보니 피해자가 학교에서 터무니없는 괴롭힘을 당해도 어머니가 대처를 하지 못했던 사례가 보도되면서 안타까움을 주기도 했다.

5. 문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나 부산역 및 인천 연수동 근처에는 러시아인이나 기타 구소련권 출신 이주민들을 위해 러시아산 식자재나 잡지, 책 등을 취급하는 가게들이 많으므로 심심하면 방문해볼만 하다. 러시아 물건만 파는 건 아니고 리투아니아산 초콜렛과 치즈, 몰도바산 주스와 꿀, 아제르바이잔 차, 아르메니아브랜디, 조지아 와인, 우즈베키스탄화덕에서 구워내는 간식 등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특산물을 골고루 구경해 볼 수 있다. 판매 가격은 모스크바보다는 두세배 비싸지만 블라디보스토크와는 별 차이가 없는 수준. 비교하자면 한국인들이 미국 가서도 한국식 짜장면이나 짬뽕 사먹는 거 비슷하게, 대한민국의 러시아 타운에서는 주로 필라프샤슐릭, 카잔 케밥[7] 같은 우즈베키스탄 요리와 다소 겹치는 요리들을 많이 파는 편이다.

파일:일리아나 구츠2.jpg

5.1. 언어

러시아인 디아스포라의 민족적 경계는 불분명하다. 이 때문에 한국 내 러시아계 디아스포라 사회 관련한 연구는 고려인과 러시아인, 우즈베크인 등을 포괄하는 ‘러시아어 사용인구’(Russian-speaking population), 또는 ‘루소폰’(Russophones)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접근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민족적으로 러시아인에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삼는, 과거에 소련 시민이었던 다양한 민족들을 러시아인 디아스포라의 범주에 놓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러시아계 한국인들이 러시아어한국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서울 기준으로는 영어도 잘 하는 편이다. 그리고 한국으로 귀화한 고려인들은 대부분이 러시아어가 모국어이지만, 한국어 교육을 받으면서 한국어를 사용하는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에서 러시아어는 러시아인들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우즈베키스탄계 한국인이나 카자흐스탄계 한국인, 키르기스스탄계 한국인 같은 중앙아시아 출신 그리고 동유럽 출신 재한 외국인들 중에서도 폭넓게 사용되기 때문에, 인천 함박마을이나 서울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일대, 부산역 차이나타운 등에서는 러시아어가 일종의 공용어 역할을 대신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자녀를 키우고 사업을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유창한 한국어가 필수이겠지만, 관광객들이나 단순 노무자들 입장에서는 한국어를 전혀 못하고 러시아어와 영어만 사용해도 한국 내에서 일상 생활에는 큰 지장이 없는 수준이다.

5.2. 종교

상당수의 러시아계 한국인들이 러시아 정교회를 믿고 있다. 서울 성 니콜라스 대성당 문서 참조. 러시아가 다민족국가이기 때문에 일부 무슬림, 유대교, 불교 신자 포함돼 있다. 부랴트인이나 투바인 출신으로 티베트 불교를 믿는 경우도 있으며,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참전 용사가 한국 불교에 귀의한 경우도 있다.#

6. 여담

파일:AKR20200922162700371_01_i_P4.jpg

7. 유명인

7.1. 러시아계 한국인

7.2. 재한 러시아인

8. 관련 문서



[1] 폴란드계 러시아인이다. 논문에서의 표기는 '양코프스키'이나 외래어표기법에 따른 표기는 '얀코프스키'이며, 나무위키에서도 이 인물에 관하여 언급되어 있는 부분에는 대부분 그 이름이 '얀코프스키'로 표기되어 있다.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 볼 수 있는 문서의 경우 '얀코프스키'로 표기되어 있는 경우와 '양코프스키'로 표기되어 있는 경우가 혼재되어 있다.[2] 당대 표기로는 '지호노프'.[3] 통계 자료 링크 상으로는 정확한 설명은 없지만 고려인을 언급한 것으로 추정[4] 러시아인뿐만이 아니라 우즈벡인, 카자흐인, 우크라이나인, 몰도바인 등등[5] 이름대로 본래 구한말부터 화교의 주거지였으나, 세월이 흐르며 화교가 줄어들고 대신 한소수교 이후 러시아인 구역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 화교학교나 중국 요리집이 아직 남아있어 명맥은 잇고 있다.[6] 참고로 이곳 Лакомка는 국내에선 보기 드문 블린 전문점이다.[7] 솥에 넣고 찐 양고기[8] 귀화시험에 합격해서 러시아계 한국인으로도 들어갈수있다.[A] 같은 러시아어권 출신이며, 해당국의 러시아계 인구가 한국으로 귀화 혹은 이민한 경우가 많다.[A] 같은 러시아어권 출신이며, 해당국의 러시아계 인구가 한국으로 귀화 혹은 이민한 경우가 많다.[A] 같은 러시아어권 출신이며, 해당국의 러시아계 인구가 한국으로 귀화 혹은 이민한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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