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해태 타이거즈2. 삼성 라이온즈 1기3.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4. 시카고 컵스5. 삼성 라이온즈 2기6. KIA 타이거즈 2기7. 은퇴 선언8. 국가대표 경력
8.1. 1998 방콕 아시안 게임8.2. 1999 서울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8.3. 2000 시드니 올림픽8.4. 2002 부산 아시안 게임8.5.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8.6.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8.7. 2014 인천 아시안 게임8.8.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9. 연도별 성적1. 해태 타이거즈
광주진흥고 시절에는 언더핸드 투수였다가 사이드암으로 전향하였다. 본인 인터뷰에 따르면 언더핸드로 던질 당시에는 구속이 130km/h도 채 넘지 못해서 팔을 조금 들어올렸고 그 이후로 구속이 나왔다고 하며 그 뒤 광주진흥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 대신 1995년 연고 팀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였다. 해태는 진작부터 주목했었다지만, 당시 진흥고가 약체였던 데다 그마저도 2년 선배인 이대진, 1년 후배인 김상진에 밀려 그리 유명했던 건 아니었다.
놀기 좋아하는 성격 때문에 입단 초에는 2군을 밑돌던 날라리라는 이미지를 벗지 못했었다. 방황하던 임창용을 다잡아준 이는 김성근 당시 해태 2군 감독. 임창용이 놀다가 팀 훈련을 제끼는 등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자 어느날 "너 집에 가 임마 이제 야구 하지마"하고 쫓아냈는데, 감독실을 나선 임창용이 가만 생각해보니, 평생 야구만 한 자신이 이제 야구장에 안오면 정말로 할 게 없더란다. 그냥 가면 안될 것 같았던 임창용이 감독실 앞에서 무릎 꿇고 앉아있었는데, 감독실 안의 김성근은 그 나름대로 임창용이 진짜로 가버리면 어쩌나 전전긍긍[1], 결국 신경전에서 승리한 김성근 감독이 밖에서 읍소하고 있던 임창용[2]을 다독이며 "나랑 같이 딱 1년만 해보자"고 설득, 전설이 시작되었다. 김성근 2군 감독은 갓 스물이 된 임창용을 위해 30일동안 여관에서 숙식을 같이 하기도 했다.[3] 그런데 바로 이듬해 김성근이 쌍방울 레이더스의 감독으로 부임해서 96~97 2년간 해태와 페넌트레이스 1위 경쟁을 했기에 결과적으로는 적에게 비수를 심어준 격이 되었다. 사람의 운명은 참으로 알 수 없는 법이다.
어쨌든 그때 임창용은 정신적인 부분은 물론, 체력적인 부분에서도 상당한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김성근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임창용은 6월에 1군에 콜업되어 9월까지 29이닝을 던지면서 안착에 성공한다. 특히 6월 18일 대구 삼성전 당시,[4] 중계를 담당했던 하일성 해설위원[5]은 크게 지고 있는 상황에서 가비지 이닝을 먹는 투수에 불과했음에도 임창용에 대한 칭찬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했으며, 후에 당시 주전 포수였던 최해식이 해태 선수들 중에서 가장 좋은 직구를 던졌다고 칭찬하기도 했다. [6][7]
입단 2년차인 1996년부터 1군 주전으로 도약했는데, 주 포지션이 셋업맨이었지만 선발로도 7경기[8]를 나왔을 정도로 전천후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시즌이었다. 114이닝동안 평균자책점 3.22, 7승 7패를 거두면서 당시 마무리였던 김정수와 더불어 선동열이 빠진 타이거즈의 뒷문을 책임졌다. 1996년 6월 11일 해태 타이거즈의 900번째 승리 투수[9]로 이름을 남기기도 하는 등, 해태의 8번째 우승에 공헌하였다. 이 해 한국시리즈에서는 단 한 타자만 상대하고 내려왔다.
이후 1997년에는 마무리 투수로 보직을 변경, 40세이브포인트를 기록하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한다. 당시 선발등판 없이 135이닝을 기록, 당연히 규정이닝을 넘기면서 평균자책점 2.33, 14승 8패 26세이브를 기록했다. 그런 혹사 가운데서도 평균자책점과 WHIP이 2위, sWAR 3위를 마크하는 괴력을 보이며 리그를 대표하는 마무리로 떠오르게 된다. 대략 이 때부터가 임창용 전성기의 시작.창용불패라는 별명 또한 이 때 생겼다. 1997년 한국시리즈에서도 3경기에 나와 5.1이닝 무실점 3세이브를 기록, 해태 우승의 일익을 담당했다.
그러나 이 해 9월 10일 잠실 LG전에서 9회말 투아웃까지 잘 잡아놓고 허문회에게 1루수 강습 안타를 내주고 어설픈 견제로 1루 주자를 2루로 보낸 다음 이병규에게 동점 적시타를 내준 것은 임창용 커리어에서 가장 잊고 싶은 4경기 중 하나일 것이다.[10] 결국 해태가 LG를 1.5게임 차로 물리치고 정규시즌 1위에 올랐기에 임창용은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11]
1998년에는 더욱 향상된 기량을 보여주면서 133⅔이닝 8승 7패 34세이브 141삼진 평균자책점 1.89, sWAR 7.42를 기록, 최연소 구원왕에 오르며 리그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임창용 본인 피셜 자신의 커리어하이.[12] 이 해 임창용 이후 타이거즈는 20세이브 투수가 나오는 데까지 10년 걸렸고, 30세이브는 20년 정도를, 구원왕]은 거기서 또 1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13] 이 시즌 기록한 1점대 평균자책점은 2010년 류현진이 기록하기 전까지 나오지 못한 대기록이었지만, 당시 임창용은 정명원에 단 0.03의 차이로 2위로 밀려 아쉽게도 최우수 평균자책점 타이틀은 시상하지 못했다. [14]
흔히들 삼성 시절 서정환 아래에서부터 엄청 굴려졌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시절에도 만만치 않게 굴려졌다.[15] 일례로 해태 유니폼을 입고 등판한 마지막 경기에서는 3회에 등판하였다. 이 정도면 그냥 땜빵 선발 수준.[16]
97년부터 98년까지 이적 직전까지 임창용은 2년간 123경기에서 268이닝 평균자책점 2.11 22승 60세이브 261삼진 sWAR 13.29라는 압도적인 피칭으로 팀을 이끌었다. 98년 해태의 에이스는 선발 원투펀치였던 이대진과 이강철이었지만, 투수진 운용의 핵심키는 임창용이었다. 당시 김응용 감독은 마치 90년대 초반 선동열을 쓰듯이 임창용을 중무리로 운용하면서 송유석, 신동수, 조계현의 이탈로 헐거워진 마운드를 어떻게든 막아내곤 했다. 이 시기의 임창용의 등판수는 애니콜이라 불렸던 이듬해 삼성에서의 등판 수와 별다른 차이가 없던 수준. 이렇게 마운드를 지탱하던 임창용이 삼성으로 팔리고, 이대진과 이강철이 부상으로 아웃, 선발 유망주로 착실히 커가던 김상진은 위암 투병으로 인해 경기에 제대로 나올 수가 없었다. 결국 99년 해태는 홍현우-양준혁-트레이시 샌더스라는 역대급 클린업 트리오를 구축했음에도 불구하고 투수진이 타이거즈 역대 최악의 평균 자책점을 기록하며 추락한다.
2. 삼성 라이온즈 1기
2001년 한국시리즈 5차전에 선발등판한 모습
2000년 5월 25일 대구 한화전에서 최연소 150세이브포인트를 기록한 뒤.
2007년 8월 18일 잠실 LG전에서 9회초 대주자로 출장한 모습. 왼쪽은 당시 주루코치였던 류중일 전 삼성 라이온즈 감독.
98년 해태 타이거즈의 경영난이 심각해지자 시즌 트레이드 마감 직전 삼성과 현금 트레이드 논의가 되었으나 김응용 감독과 구단 프런트진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1998년 시즌 후 그룹이 버틸수가 없었던 해태는 자매구단인 주니치에 영입을 요청했고, 주니치는 이상훈의 부진등으로 임창용을 영입하려고 했으나 이상훈이 마음을 고쳐먹고 마무리 캠프에 참여해 좋은 모습을 보이자 임창용 영입을 백지화 해버렸다. 그러자 삼성이 영입을 제안해 양준혁, 황두성, 곽채진에다가 거액의 현금[17]을 얹어서 임창용을 상대로 맞바꾸는 트레이드로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하였다. 당시 언론에서 빅 딜이라는 별칭을 붙일 정도로 초대형 트레이드였다. 트레이드 시기가 아시안게임 금메달 획득 직전이였는데 우승 후 기자들이 승리 투수에게 가는것이 아니라 트레이드 인터뷰를 하러 임창용에게 몰려드는 해프닝이 있었다.
참고로 이 중 황두성은 해태 측 담당자의 착각으로 트레이드된 경우. 황두성을 두고 담당자가 '덩치 크고 밥 잘 먹는 투수'라고 말했는데, 원래 원하던 그 진짜 덩치 크고 밥 잘먹는 투수는 정현욱였다.
당시 공수겸장의 젊은 포수 박경완이 백업 및 신예급 선수 둘 +9억원에 팔려가고, 리그 최고의 타자였던 김기태, 구원으로만 20승을 올렸던 투수 김현욱의 가치가 20억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임창용의 가치는 당시 리그탑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1. 1999~2004 시즌
1999년 삼성으로 이적한 후에도 레전드급의 활약을 선보이며 그해 71경기에 등판하여 138⅔이닝 13승 4패 38세이브 평균자책점 2.14를 기록, 규정이닝을 채우고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거머쥐며 창용불패의 신화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 창용불패의 신화 이면에는 애니콜이라는 달갑지 않은 또 다른 별명이 있었다. 애니콜이라 불린 이유는 부르기만 하면 언제든지 나온다 해서. 마무리 투수가 규정 이닝을 채우고[18], 그럼에도 팀 내 다승 2위까지 했으니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19] 하지만 서정환 감독에 의해 1999년 정규 시즌에 워낙 무리한 탓에 체력이 방전되며 1999년 플레이오프에서 결국 무너졌다.이렇게 해태 시절을 포함해 1997년~1999년 3년동안 중무리 투수로 뛰며, 이런 혹사에도 매해 2점대 초반 이하 방어율에 40세이브포인트를 기록하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방어율만 보더라도 그 무시무시한 활약이 느껴진다. 1997년부터 1999년까지 2위, 2위, 1위의 방어율을 기록했는데, 1997년의 방어율왕은 바로 구원 20승 신화를 이룩한 김현욱. 게다가 1998년에 방어율 1위를 차지한 정명원과 임창용은 그 이후 류현진이 1점대를 찍을 때까지 12년 간 한번도 나오지 않았던 1점대 방어율의 주인공이다. 또한 99년은 한국프로야구계에서 역대급 타고투저 시즌으로 기록된 시기인데[20], 이 시기에 2점대 초반의 방어율을 기록했다! 2000년에는 서정환 감독이 물러나고 김용희 감독이 부임하자 전년도인 1999년에 비해 그나마 조금 관리받으며 등판할 수 있었다.[21][22]
2001년 외국인선수 벤 리베라[23]를 전문 마무리로 영입하며 선발로 보직을 전환했다. 임창용은 개막전 선발투수로 나온 것은 물론, 그 해 14승을 따내며 단연 1선발로 등극했다. 2001년 6월 26일 대전 한화전에서 데뷔 첫 완봉승을 거두기도 하였다.영상 참조 그러나 2001년 한국시리즈에서는 그다지 재미를 보지는 못했다. 2002년에는 36경기 중 29경기를 선발로 나오고 204⅓이닝이나 던지며 17승을 따내는 등 2002년 삼성이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데 큰 공로를 세웠다.
그리고 이 기세를 이어 2002년 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진출 의사를 밝히며 포스팅을 신청했으나 제시받은 포스팅 비가 기대치에 못 미치는 65만 달러에 불과하며[24][25] 삼성이 포스팅 수용을 거부했고, 결국 국내 잔류를 선택했다. 이후 2003년에도 13승을 따내며 배영수와 삼성 선발 한 축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2003년 초에 간통죄를 저지른 바 있고 이것 때문에 한동안 곤욕을 치렀다. 이 때문에 생긴 별명이 임간통.[26][27][28]
2004년 해태 시절 선배였던 선동열이 삼성 수석코치로 부임한 후 노장진과 보직을 맞바꿔 마무리로 돌아왔고, 그해 36세이브를 올리며 세이브왕에 올랐다.[29] 다만 이 해는 선동열 코치의 의견에 따라 기존처럼 중무리로 굴려지지 않고, 철저히 1이닝 마무리로 관리받으며 61경기 67이닝을 소화했다. 하지만 시즌 막판 들어서는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그해 포스트시즌에서도 좋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특이하게도 2002년에 완투 없이 204.1이닝을 기록했는데, 완투 없이 시즌 200이닝+를 기록한 선수는 02임창용과 16켈리(200.1이닝 완투 없음) 둘 뿐이다.[30]
2.2. 2005~2007 시즌
2005년 1월 해외 진출에 실패하고 귀국한 임창용이 선동열 당시 삼성 감독과 겸언쩍은 악수를 하고 있는 모습.
2004년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은 뒤 삼성과의 협상을 거부하고 해외 진출을 시도하였다. 일본프로야구 지바 롯데 마린스,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 당시 신생팀이었던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가 임창용에게 관심을 보였고 이중 라쿠텐은 3년 5억 엔을 제시했으나 최종 협상이 결렬되었고,[31] 지바 롯데는 막판에 1년 1억엔을 제시했다고 한다.[32] 이와중에 메이저리그까지 노크하였고,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와 보스턴 레드삭스가 임창용에게 관심을 보인다고 했으나, 정작 계약은 이루어지지 못했다.[33] 이 와중에 삼성 감독이 된 선동열은 임창용을 두고 20억도 아깝다라고 하여 논란이 있었다.
사실 2005년~2007년은 임창용의 흑역사. 해외 진출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후[34] 결국 해외 진출을 포기하고 삼성 라이온즈와 2년 간 옵션과[35] 계약기간 종료 후 해외진출을 원할 시 풀어주는 조건을 추가해 총액 18억 원에 FA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계약을 체결한 다음 날 임창용의 아버지는 삼성에게 계약을 취소하거나 다른 팀으로 이적시켜줄 것을 요구했다. 물론 삼성 구단이 받아들일 리 없었다. 신임 김응용 사장은 계약을 물러주느니 차라리 임의탈퇴를 시켜버리겠다며 격노했다.[36]
김응용 감독이 사장으로 승진하고 선동열이 신임 감독으로 부임한 뒤 마무리를 권오준에게 넘겨주고[37] 1년 만에 다시 선발 투수로 보직을 변경했으나, 5승 8패 평균자책점 6.50이라는 프로 데뷔 후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였다. 결국 그 동안의 혹사 후유증이었는지 2005년 시즌 중 팔꿈치 부상으로 시즌 아웃, 토미 존 서저리를 받았고 당연히 한국시리즈는 못 등판했댜. 2006년은 사실상 재활로 날리며 재기를 꿈꿔 오던 그는 2006년 시즌 막판 1군에 복귀해 그해 1경기 등판에 그쳤으나 그 경기에서 승리 투수가 되었고 2006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도 들었다. 한국시리즈에서도 상대팀 한화의 지연규와 마찬가지로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잘 던져 팀이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데 제 몫을 했다.[38]
2007년에는 5선발로 자리잡았고 그해 4월 8일 두산전에서 통산 100승을 기록했다. 그러나 시즌 성적은 5승 7패 평균자책점 4.90으로 부진하며[39] 2005년부터 2007년까지 3년 간은 한물 간 퇴물이라는 평가만 받았다.[40]
결국 2007 시즌이 종료되고 아무도 모르는 새 일본프로야구 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이적했다. 이 당시에는 임창용의 선수 생활이 거의 끝났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삼성과 FA 계약을 체결하면서 계약 기간이 끝난 후 선수가 원하면 해외 진출을 허락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꿈을 위해 간 것이기는 하지만 당시 사장이었던 김응용과 감독이었던 선동열과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것도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임창용은 KIA에서 은퇴하고 싶다고 공개적으로 밝히면서 삼성과의 불편한 관계를 숨기지 않기도 했었다.[41]
어찌됐건 임창용은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일본으로 떠나게 된다. 그리고...
3.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입단식에서.
3.1. 2008 시즌
모두 임창용이 곧 국내로 복귀하거나 일본에서 은퇴하리라 생각했지만, 여기서 창용불패 전설의 제 2막이 열렸다. 첫 시범경기에서 1이닝 1실점 이후 6경기 연속 무실점으로 시범경기 최종 ERA 1.29를 기록한 것도 모자라 무려 155km/h의 빠른 공으로 일본 타자들을 압도하자 타카다 시게루 감독도 "일본 타자들이 공략하기 힘들 정도로 직구는 정말 최고 수준이다."라며 기대감을 보였다.
그리고 대망의 정규시즌 개막 후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당시에 초호화 클린업 이었던 "오가사와라 - 이승엽 - 라미레즈"를 뜬공 - 삼진[42] - 땅볼 처리하며 1이닝 무실점을 막아 성공적인 데뷔를 치른 직후, 당시 야쿠르트의 주전 마무리였던 이가라시 료타가 허벅지 부상으로 빠지자 정규시즌 1경기 만에 바로 마무리로 보직 변경이 되었다.[43] 그렇게 4월에 총 9경기 등판하여 실점 하나 없이 6세이브[44]로 야쿠르트의 수호신으로 떠올랐다. 특히 상황에 따라 팔 각도를 바꾸고 타이밍까지 조절해가면서 일본 타자들을 압도하는 모습은 국내는 물론, 일본 현지에서도 엄청난 파란을 일으켰고, 이에 대해 호시노 센이치 감독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공을 던진다. 팔꿈치 수술을 한 투수가 아닌 것 같다."는 코멘트를 남길 정도였다. 산케이 스포츠도 "미스터 제로 임창용이 야쿠르트 투수진을 이끌고 있다."고 하면서 놀라운 퍼포먼스에 극찬을 보냈다.
7월에는 선동열 이후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로 NPB에서 20세이브를 돌파했고, 9월 4일 세이브를 수확하면서 NPB 사상 세 번째로 데뷔 첫 해 30세이브 고지에 올라섰다. 시즌 최종 기록은 54경기 등판하여 51이닝을 소화하면서 1승 5패 33세이브 평균자책점 3.00 탈삼진 50개, 볼넷 9개의 로또 대박 급 활약을 보이며 단숨에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새로운 수호신으로 떠올랐다.#
3.2. 2009 시즌
2009년 5월 15일과 16일 한신 타이거즈 전에서는 이틀 연속으로 최고구속 160km/h의 공을 뿌렸다. 참고로 이 시점에서 160km/h을 넘긴 일본 프로야구 소속 최고의 파이어볼러 선수는 마크 크룬과 사토 요시노리, 임창용 단 3명 뿐이었다. 당시까지는 마크 크룬이 찍은 162km가 일본 최고 구속.[45]일본 2년차인 2009년 시즌은 그야말로 후덜덜한 활약을 보였다. 개막전부터 7월까지 단 한 개의 자책점도 허용하지 않았으며, 무패 행진을 이어가며 야쿠르트 구단 기록을 갈아치우는 대활약을 한다. 이시이 가즈히사가 세운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팀내 연속 무실점 기록인 19이닝의 벽을 넘어 20이닝 연속 무실점의 대기록을 달성하기에 이른다.[46] 이때 그의 별명은 미스터 제로. 정말로 방어율이 0.00이었다. 2ch 등지에서 야쿠르트의 상대 팀 팬들은 9회말 임창용이 나오면 자포자기하는 모습을 보여줄 정도. 오죽하면 "야쿠르트와의 경기에는 9이닝이란 게 없다." 라고 했다. 7월 12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전 9회 말 등판에서 포수의 도루 허용과 희생번트, 이어지는 희생플라이로 역전을 허용하면서 결국 첫 패를 기록하고 말았고 이후 후반기 체력 소진 등으로 페이스가 약간 떨어졌지만 최종 5승 4패 28세이브 5홀드 ERA 2.05, WHIP 1.04의 뛰어난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한편 2009년 시즌부터 진구 구장 홈 경기 한정으로 야쿠르트 구단에서 임창용이 등판할 때만 나오는 PV를 만들어 방영하는데 가히 폭풍간지다. 셋업 이가라시 료타의 경우도 비슷한 PV가 있지만, 배경음 덕분인지[47] 간지는 오히려 임창용쪽이 훨씬 좋다. # 2011년버전 게다가 PV를 틀어주기 전에 응원석에서 외쳐주는 "창용불패!" 는 정말 멋있다. 외치지 않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지만 임창용이 나왔다고 좋아하는건 다를 게 없다.
초기에 연봉 30만달러에 2년+1년 옵션으로 계약하고, 2009년에는 50만달러를 받았는데 야쿠르트 입장에서는 이게 초대박이 터진 셈이었다. 이 때문에 200만달러 이상(300% 이상)의 연봉 상승을 기대하기도 되었고, 후반기 약간의 하락은 있었지만 뛰어난 평균자책과 WHIP, 그리고 초반의 추세를 생각한 구단 덕에 임창용은 160만달러(220% 상승)에 야쿠르트와 재계약했다. 이 정도만 해도 대박.#
3.3. 2010 시즌
2010년에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니, 엄청난 구속으로 돋보였던 2009년보다도 좋은 활약이다. 구속을 낮춘 대신 제구력과 기술을 가다듬었다는 평가. 9월 16일 30세이브를 돌파했으며, 9월 26일 기준으로 ERA 1.34에 33세이브를 기록하며 일본 진출 이후의 본인 기록(2008년 33세이브)과 타이를 찍었다. 후반기가 됨에도 불구하고 ERA가 오르지 않는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결국 엔트리에서 제외되면서 35세이브 노 블론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참고로 이때 별명이 '관록의 4범'. 깔끔하게 3명 딱 막질않고 꼭 1명씩은 내보내는데 그래도 관록있게 실점은 잘 안하고 4자 범퇴시킨다고 한다.[48]시즌 후 재계약 과정 중 한때 교섭이 결렬되었을 정도로 진행에 난항을 거듭하였으나, 결국 3년 총액 15억 엔[49]이라는 초대형 계약으로 야쿠르트 잔류가 결정되었다.
3.4. 2011 시즌
이렇게 재계약한 임창용은 5월 3일 일본 통산 99세이브를 기록하여 과거 선동열의 한국인 일본프로야구 최다 세이브 기록을 경신했고 바로 다음날 100세이브를 기록했다. 2011시즌 최종성적을 보면 투고타저의 리그 상황을 감안할 때 다소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64경기에 나와 61⅓이닝 4승 2패 32세이브 3홀드 평균자책점 2.20. 68탈삼진을 기록했지만 5블론세이브를 기록하여 다소 불안한 모습을 노출했다. 요미우리와의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 1차전에서는 공 1개로 세이브를 기록했지만 2차전에서는 ⅔이닝 동안 2개의 안타를 맞고 4실점했다. 당연히 분식회계. 경기 직후 임창용은 구위 문제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으나 오가와 준지 감독은 제구, 구위가 모두 불만스러웠다면서 마무리 보직을 맡기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하지만 감독의 이야기와는 달리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 3차전에 나와 세이브를 기록했다. 준지 감독의 발언은 현재 그저 언플&선수 관리 차원의 발언인 것으로 보인다.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 3차전 이후 준지 감독은 경기에서 선발이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김성근 감독마냥 투수를 팍팍 내리고 주전 타자들도 가차없이 교체하면서 이기고자 하는 의지를 강력히 내비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팀은 주니치에게 패퇴. 결국 임창용은 2011시즌을 다소 아쉽게 마무리지었다.3.5. 2012 시즌
2012 시즌은 안타깝게도 2군에서 시작하였다.[50] 이후 1군에 복귀했지만 얼마 못 가서 팔꿈치 인대가 끊어졌고 또 팔꿈치 수술을 받게 되었다. 일단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1년 정도의 재활 기간을 가졌다. 다만 토니 바넷[51]이 대체 마무리로 대활약하며 임창용이 마무리 자리를 보장받기는 어려워졌다.2012년 9월 11일경 재계약이 불투명하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때문에 국내 복귀의 가능성도 생겼다. 일본 진출시 임의탈퇴를 거쳤기에, 국내로 복귀한다면 삼성 라이온즈로 가야만 한다. 일단 류중일 감독은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지금은 대답할 상황이 아니다[52]
2012년 11월 15일 결국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퇴단을 발표, 방출이 공식화되었다.
3.6. 일본 시절 평가
부상으로 1년을 거의 통째로 날려버리고 나서 이적한 데다 또 고액 연봉자라면 보통 하는 떠들썩한 입단식도 없이 조용히 시카고 컵스로 이적해버렸고, 팀에서도 별다른 잡음 없이 그의 빈자리도 토니 바넷이 훌륭히 채웠기에 야쿠르트 팬들은 그의 부재를 떠올릴 틈도 없었다. 컵스에서 메이저에 콜업되었을 때 축하보다도 언제 갔냐는 리플이 더 많았던 것을 보면. 심지어 15억 엔에 달하는 고액 연장계약을 맺고 나서 1년 정도 활약 후 나머지 기간은 부상으로 날린, 잘 생각해보면 명백한 먹튀임에도 워낙 홀연히 사라져버려서 욕도 안 먹는 신기한 선수. 다만 사이드에서 뿜어져 나오는 공 끝 더러운 강속구라는 독특한 플레이 스타일은 인상을 크게 남겨, 일본에서는 아직까지도 사이드암 강속구 투수를 꼽으라 하면 빠지지 않는 중이다.[53] 그래서 스왈로즈 50주년 레전드 경기에 유이한 외국인 선수로 초청받았다.[54]참고로 2019년 즈음에 일본에 가서 일본의 야쿠르트 팬, 혹은 야쿠르트 팬은 아니지만 일본프로야구를 즐겨 보는 일본인과 얘기를 하다가 야쿠르트에 있었던 한국인 얘기가 나오면 대부분 임창용이 먼저 튀어나온다. 이혜천의 경우는 잘 모르거나, 알고 있는 사람도 "임창용 말고 그즈음 한국인이 한명 더 있었는데 이름은 모르겠다." 정도로 얘기하는 경우가 많았고[55] 하재훈은 아는 사람이 아예 없는 수준이었다.[56]
4. 시카고 컵스
2012년 12월 13일, 시카고 컵스와 계약하기 위해 미국으로 출국했다는 기사가 떴다.#그리고 같은 날 오후, 컵스와의 계약서에 사인하게 됐다. # # 인터뷰 조건은 1+1년, 옵션이 다소 복잡하게 얽혀있는 스플릿 계약으로 보장 금액은 계약금 10만 달러에 추가 금액은 메이저리그에 승격됐을 때 연봉 500만달러를 기준으로 일할 계산 후 지급될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써 일본 프로야구 최고의 마무리 투수인 후지카와 큐지와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그것보다도 다저스의 류현진, 신시내티 레즈로 이적한 추신수와 함께 오래간만에 한국 선수들의 대대적인 메이저리그 러쉬를 볼 수 있게 되었다.
4.1. 2013 시즌
자세한 내용은 임창용/선수 경력/2013년 문서 참고하십시오.4.2. 2014 시즌
2014년에는 자신을 논텐더시킨 시카고 컵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고 스프링캠프에 초청선수 자격으로 참가했다. 연습 경기와 시범 경기를 통틀어 블론세이브를 기록하기도 하고 1이닝 퍼펙트를 기록하기도 하는 등 구위와 제구력이 들쭉날쭉한 모습을 보였다.이 와중에 인터뷰에서의 발언으로 컵스와의 계약 문제로 전 에이전트한테 사기를 당했다는 의혹이 퍼지기도 했다. 임창용 인터뷰
나이가 나이이니만큼 젊은 선수들이 많은 컵스 조직 특성상 25인 로스터 진입을 위해서는 특별히 더 좋은 모습을 보어주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고, 결국 개막 로스터 진입에 실패하여 마이너리그 캠프행 통보를 받았다. 결국 3월말 방출되었는데, 임창용 스스로 방출을 원했다고 한다.
4월 20일 네이버 이영미 칼럼에 인터뷰 기사가 올라왔다. 여기서 임창용은 컵스가 불펜에 좋은 선수가 많으니 불펜이 약한 다른 메이저리그 구단을 알아보고 싶어했지만, 컵스가 임창용을 25인 로스터에 넣긴 그렇고 다른 메이저리그구단에 내주긴 아깝다는 심보로 임창용의 에이전트를 거치지 않고 구단 독단으로 삼성과 연락을 취해 계약을 성사시켰다고 설명했다. 컵스가 갑인 만큼 을인 임창용으로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한다.
5. 삼성 라이온즈 2기
5.1. 2014 시즌
자세한 내용은 임창용/선수 경력/2014년 문서 참고하십시오.유독 삼성 프랜차이즈 배영수를 집중으로 하는 블론이 많았지만, 배영수의 FA우선협상 결렬이 난 이후로 재평가를 받았다.[57]
5.2. 2015 시즌
2015 KBO 리그 세이브 1위 |
자세한 내용은 임창용/선수 경력/2015년 문서 참고하십시오.
그런데..... 현재 2015년 [TV조선 단독] 임창용 '원정도박' 거액 입금 확인, 임창용·윤성환·안지만 원정도박 정황 확보…검찰도 수사 착수 도박혐의로 검찰에서 조사를 받고 있으며 결국 도박사실을 시인했다#. 자세한 것은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 문서를 참조 바람.[58] 결국 시즌 뒤 방출되었다. 그러던 차에 2015년 12월 31일 임창용 선수가 대리인을 통해 사과문을 남겼다.
6. KIA 타이거즈 2기
6.1. 2016 시즌
자세한 내용은 임창용/선수 경력/2016년 문서 참고하십시오.2016년 와일드 카드 게임 1차전에서 역대 포스트시즌 최고령[59]이자 타이거즈에서 6,927일(약 19년) 만에 포스트시즌 세이브를 달성한 모습.[60]
6.2. 2017 시즌
자세한 내용은 임창용/선수 경력/2017년 문서 참고하십시오.6.3. 마지막 FA 포기
FA 재취득 조건을 만족했지만 본인이 FA 취득을 포기했다. 앞으로는 1년씩 단년계약으로, 매년 최선의 모습을 보여가다가 KIA에서 꼭 은퇴하고 싶다고 밝혔다. 팀 입장에서는 2차 드래프트가 있는 해라 유망주 보호를 위해 신청하도록 해서, 그간 공로를 생각해 계약금 1~2억 정도 보너스로 얹어주면 팀과 임창용 모두 윈윈인 상황이었지만, 본인이 신청하지 않겠다고 한다.무엇보다 임창용 본인이 18년 2차 드래프트에서 지명당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음을 생각하면, 그 열정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는 상황이다. 40인 로스터라는 게 1, 2군 다 묶고 정말 남는 자원들이라 40인 외에서 지명된 선수가 1군 전력이 되는 경우가 드물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장 나이가 많은 게 문제일 뿐 1군 즉전감인 임창용은 KIA 입장에서는 나이가 너무 많아 보호하기 애매하고, 타 팀 입장에서는 그럼에도 충분히 지명해볼만 한 카드다. 물론 임창용이 멀고 먼 길을 돌아와 저렇게까지 기아에 남겠다고 한 만큼 임창용을 지명하는 것은 선수의 명예와 의사를 깡그리 무시하는 처사기도 하니 욕도 많이 먹을 것이다. 그러나 욕을 먹든 말든 보호명단에서 빠진다면 전략적으로 지명할 가치는 있다는 게 문제다. 설령 임창용이 타이거즈에서 은퇴하고 싶다고 지명시 은퇴를 택하더라도 KIA 필승조가 당장 1명 없어지는 셈이니, 어차피 2군 붙박이 선수 하나 늘리느니 우승팀 필승조 하나를 없애는 선택을 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이번 FA 미신청은 진짜로 위험한 선택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임창용이 FA 미신청 의사를 빨리 밝히기도 했고 구단이 그 의사를 존중하기 위해 보호명단에 넣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2차 드래프트에서, KIA는 고효준만 롯데로 떠나보내면서 걱정은 기우가 됐다.
2018시즌에는 KBO 리그 전체 선수 중 두 번째로 연장자가 된다.(박정진과 같은 1995년 졸업이지만 생일은 박정진이 약간 빠르다.[61])
이호준, 강영식이 각각 은퇴, 방출로 선수 생활을 끝내면서 팀 동료 정성훈과 함께 각각 투타 최후의 해태 출신 선수가 되었다.
그러나 FA 미신청에도 불구하고 돌아온 것은 감독의 개차반같은 대접이었고 결국 시즌 후 방출 통보를 받게 되었다.
6.4. 2018 시즌
자세한 내용은 임창용/선수 경력/2018년 문서 참고하십시오.6.4.1. 방출
2018년 10월 25일, 구단으로부터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았다. 하지만 그 전날, KIA 타이거즈 구단에서 임창용 한미일 1000경기 기념품 세트를 예약받고 있었으나, 방출을 하더라도 기념품은 계속 팔겠다는 촌극이 빚어졌다.이 사건들은 올 시즌 김기태 감독의 운영에 적대감이 높았던 KIA 타이거즈 갤러리는 물론이고, 김기태 감독에 상대적으로 호의적이었던 V12를위하여 응원하는 기아타이거즈 네이버 카페에서도 반감과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라는 말이 나오면서 김기태 감독 퇴진 운동 까페에 가입자수가 급격히 증가하는 등 팬들의 여론이 많이 좋지 않음을 보여주었고, 이 행동은 이대형의 kt 이적 당시 보호선수 명단 제외건에 이어 많은 기아 팬들을 화나게 하였다.
팬들은 이와 같은 결정에 불복하여 임창용 방출 반대 집회 + 김기태 감독, 조계현 단장 퇴진 집회를 하기로 결의하였고 호랑이 가족한마당이 열리는 10월 27일 토요일 오전 11시로 잡혔다. 이후 김기태 감독이 난입해 해명을 한다고 하면서 임창용이 자유계약 선수로 풀어달라며 방출을 요구했다는 발언을 했다.기사 원문
이게 문제가 되는게 무엇이냐면 임창용은 방출 이후 집회 전에 발표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갑자기 방출돼서 당황스럽고 자유계약선수나 지도자 연수 등 선택을 하게 해줬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뉘앙스와 그리고 선수생활은 고향팀 기아에서 마무리하려고 했다는 인터뷰를 했고 항간에 떠돌던 김기태와의 불화설에 대해서도 간접적인 언급을 했기 때문이다.
[스포츠타임] '방출' 임창용 심경 "연봉 필요없다. 불러주는 팀만 있다면"
임창용 방출 후폭풍…KIA에 '섭섭' 팬들에 '감사'
그리고 임창용이 방출 직전 조계현 단장과의 면담에서 선수 생활 의지에 대해 더 하고 싶다는 말을 하였고[62] 그리고 조계현 단장은 조건없이 방출을 하겠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게 임창용과 조계현 단장 모두 이 부분에 한에서는 같은 발언을 하였다. 그러니까 구단에서 먼저 방출을 통보했다는 얘기인데 이는 김기태 감독의 주장인 임창용이 먼저 방출을 요구했다.라는 부분에 있어서 배치가 되어버린다. 정말로 임창용이 선발을 원했는지는 항목 참조.
다만 이 발언이 김기태 前 감독의 사퇴이후 인터뷰를 통해 팬들도 대부분 동조한다는 의견이지만 사퇴 이후 박흥식 대행으로 팀 분위기가 오르는 가운데 적절하지 않다라는 감정 섞인 의견도 기자 중심으로 나오고 있다.
7. 은퇴 선언
결국 2019년 3월 11일에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는 기사가 떴다. 타 구단 이적을 모색했으나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지 못해 결국 현역 은퇴를 결심했다고. 향후 야구 관련 업무를 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이렇게 한 시대를 풍미한 최고의 옆구리 투수가 은퇴식도 치러보지 못한채 쓸쓸하게 마운드를 떠났다. 은퇴 후에는 NPB의 야쿠르트 스왈로스 창단 50주년 기념 경기에 초대되어 오랜만에 유니폼을 입었다.2019년 10월 5일 SBS Sports에서 제작해서 방송될 다이나핏 파이어볼러 챔피언십에 프로그램 심사위원 자격으로 출연한다고 한다.
사실 2018년에 일어난 시위가 KBO에서의 커리어를 끝장냈다 봐도 무방하다. 비록 팬덤 내에서 쌓였던 불만이 폭발한 계기가 임창용의 방출이지, 임창용을 방출시킨 이유 하나만으로 들고 일어난게 아니지만, 다른 시선에서 보면 임창용이 방출된 이유가 팀 내 케미스트리 문제고 항명사태까지 있었다는 걸 반증해버린 상황인지라, 시위를 한 팬들이 임창용 커리어를 끝장내기 위해서 들고 일어난 건 아님에도 불구하고 결과론적으로 임창용의 커리어를 끝냈다. 당장 임창용의 이미지를 고려해봤을때 실력과 부차적인 문제로 실력 외적인 이슈가 너무 많다보니 영입 자체를 꺼릴 수밖에 없다. 아무리 합리적인 이유로 항명을 했다 하더라도 결국 감독의 권한에 대해서 항명한 것은 사실이기에 영입 시 팀 내에 미칠 파급력에 대해서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평생 타이거즈를 짝사랑하던 한 선수의 커리어는 그렇게 끝났다.
8. 국가대표 경력
사이드암 강속구 투수라는 강점으로 인해 국가대표팀에 정대현 못지않게 선발되었다. 대체적으로 좋은 활약을 펼쳤으나 하필 2009 WBC 결승전 때 스즈키 이치로에게 통한의 2타점 적시타를 허용하며 우승이 아쉽게 좌절된 직후 발생한 논란이 다소 임팩트가 커서 왠지 국제전에서는 약하다는 엉뚱한 꼬리표가 붙곤 했다. 어쨌든 연금 점수는 70점[63]이 였으나 상습도박 혐의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아 연금이 박탈되었다.8.1.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당시.[64]
경기 | 선발 | 타수 | 이닝 | 방어율 | 승 | 패 | 홀드 | 세이브 | 피안타 | 실점 | 자책점 | 4구 | 삼진 | 상세 |
2 | 0 | 11 | 2⅔ | 3.38 | 0 | 0 | 0 | 0 | 2 | 1 | 1 | 2 | 3 |
1996년 프로 데뷔 2년차 시즌부터 선발과 클로저를 오가며 리그 탑 투수로 자리매김한 임창용 역시 1998년 방콕 아시안 게임 대표팀에 당연히 선발된다. 커리어 첫 A대표팀 합류였다.
임창용은 팀의 불펜투수로서 2경기 등판해 팀의 금메달 획득에 기여한다. 또한 병역특례를 받게되어 커리어 꽃길을 걸을 수 있었다.
본인은 이 시기에 삼성으로 갑작스럽게 트레이드가 되어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8.2. 1999 서울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2000 시드니 올림픽 진출이 걸린 대회로 우승하고 진출권도 따냈다.8.3. 2000 시드니 올림픽
경기 | 선발 | 타수 | 이닝 | 방어율 | 승 | 패 | 홀드 | 세이브 | 피안타 | 실점 | 자책점 | 4구 | 삼진 | 상세 |
3 | 0 | 12 | 2⅔ | 0.00 | 0 | 0 | 0 | 1 | 5 | 0 | 0 | 1 | 2 |
임창용은 예선리그 호주전 1사 1, 2루의 위기상황에서 구원등판했다. 하지만 승계주자 실점에 허용하며 송진우를 패전투수로 만들었다. 이후 본인 역시 1사 1, 3루 위기상황에서 강판됐지만 이승호가 병살을 유도해 결과적으로 무실점을 기록했다.
이후 예선리그 네덜란드전에 마무리 투수로 등판했다. 대한민국이 2:0으로 간신히 리드중인 9회에 등판해 1이닝 1K 0실점의 완벽한 투구로 세이브를 수확했다.
바로 다음날 일본과의 경기에서 임창용은 다시 구원등판했다. 구대성이 1사 만루를 만들고 강판된 상황에서 등판했지만 승계주자 2명의 실점을 허용했다. 이후 귀신같이 2아웃을 잡아내면서 본인의 실점은 허용하지 않았다.
표면적인 기록은 3경기 2.2이닝 무실점, 1세이브로 좋지만, 네덜란드전을 제외하면 매경기 승계주자 실점을 허용하며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이 때문에 팀의 마무리 투수로 낙점된 선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등판기회를 잡지 못했다.
다행히 대한민국이 3, 4위전에서 일본을 잡고 사상 첫 올림픽 메달을 획득하면서 임창용의 부진이 덮혀졌다.
여담으로 이 당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선수들이 도중 도박 파문에 연루되었는데, 이 때 이승엽을 끌여들이는 바람에 둘의 사이가 나빠졌다고 한다.
8.4.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경기 | 선발 | 이닝 | 방어율 | 승 | 패 | 홀드 | 세이브 | 피안타 | 실점 | 자책점 | 4구 | 삼진 | 상세 |
4 | 0 | 6⅔ | 1.35 | 1 | 0 | 0 | 0 | 3 | 0 | 1 | 9 | 2 |
당시 대회에서 임창용은 4년전보다 훨씬 발전한 모습을 보여줬다.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6.2이닝동안 단 1실점만을 허용했다.
특히 대만과의 결승전에 1:2로 뒤지고 있던 상황에 구원등판했다. 이 경기 임창용은 대만타선을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팀의 4:3 승리에 기여했다. 특히 임창용의 등판 이후 공격찬스에서 대한민국이 홍성흔, 김종국의 연이은 장타에 힘업어 역전에 성공하면서 결승전 승리투수로 기록됐다.
8.5.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2004 아테네 올림픽 진출이 걸린 대회였으나 탈락했다.8.6.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경기 | 선발 | 이닝 | 방어율 | 승 | 패 | 홀드 | 세이브 | 피안타 | 실점 | 자책점 | 4구 | 삼진 | 상세 |
5 | 0 | 5⅓ | 3.38 | 0 | 1 | 0 | 2 | 4 | 2 | 2 | 2 | 4 |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결승전 때 10회초 2사 2,3루의 상황에서 스즈키 이치로와의 맞붙어 정면 대결하였고 결국 결승타를 맞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우승을 아깝게 놓치게 되자 한국에서 욕을 좀 많이 먹게 되었다.[65] 더구나 9회 그래서 붙었던 별명이 임완용, M창용. 덕분에 한일양국에서 언론의 주목을 많이 받았다.[66]
당시 상황에서 김인식 감독이 고의사구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 알려지고[67], 임창용의 감독으로 있었던 김응용, 선동열이 관련 인터뷰에서 임창용이 지시를 무시하고 고집을 부려 승부를 한 것처럼 말하는 바람에 더더욱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그러나 2014년에 나지완을 거르지 않고 상대하다 역전타를 쳐맞는 것을 보고 이 부분은 재조명받게 되었다
참고로 실제로 결승타를 맞기 직전 2사 1,3루 상황에서 1루수가 베이스에서 떨어져서 1루 주자가 견제 없이 2루로 뛰게 놔두었고, 도루 상황에서 포수도 2루로 공을 던지지 않았다[68]
훗날 하일성 전 KBO 사무총장이 KBS 아침마당에 출연, 당시 상황을 회고하며 김인식 감독에게 어떻게 지시했냐고 묻자 그가 말하길 "내가 일어서서 적극적으로 거르라고 지시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모두 내 탓이다."
하지만 김인식은 이후 아침마당에서의 발언에 대한 인터뷰에서 "위기의 상황, 1루가 비었고 상대가 강타자야. 상훈이도 알겠지만 두가지 방법 중 하나를 택하잖아. 볼을 던지다가 상대타자가 말려들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거르는 거고, 포수가 완전히 일어나서 고의사구를 던지게도 하지. 임창용에게 볼넷 사인을 냈다. 양상문 투수코치한테 확인도 했어. '창용이가 사인을 본 거지'라고 물었더니 '확인했습니다'라고 답하더라고. 그런데 공이 한복판으로 가네. 사실 이해가 잘 안됐어. 그런 상황이라면 벤치에서 '거르라'는 사인이 안나와도 공을 뺄 것 같은데. 당시 언론에는 밝히지 않은 얘긴데…. 불펜에 (좌완)류현진이 있었으니까, (좌타자)이치로를 상대하게 하려 했어. 그 다음에 임창용을 내세우려고 했지. 그런데 임창용이 굳이 이치로부터 던지겠다고 한다는 거야. 본인에게 직접 확인은 못했어. 감독으로서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는데 임창용의 뜻을 따랐지. 결승전이 끝나고, 다음날 아침 창용이를 불렀어. 커피한잔 하자고. '사인을 봤냐'고 물었는데 창용이는 '못봤습니다'고 답하더라. 지금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네. 확실한 건 '포수보고 일어나서 공을 받으라'는 지시를 안했으니까. 내 잘못이라고 한 거지. 감독이 책임져야할 부분이고."라고 말했다. 임창용이 이치로와 승부를 하고 싶어 했다는 것.
일본의 "카리스마 백서"라는 프로그램에서 이 사건을 분석한 프로그램을 방영하였고, 그 프로그램에 의하면 당시 투수코치인 양상문이 감독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임창용에게 고의사구 사인을 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져 또다른 논란을 낳았다. 하지만 당 프로그램에 출연한 김인식 감독과 양상문 코치는 프로그램이 자신들이 실제로 한 이야기와는 많이 다른 방향으로 방송을 했다며, 통역이 말을 잘못 전한 것이거나 일본 취재진이 내용을 왜곡한 것이라며 반박하였다.#
양 코치는 "내가 감독님의 지시를 어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이야기했으며, 김 감독은 "양 코치에게 어렵게 승부하라는 지시를 두번이나 내렸고, 이 내용이 전달됐는지 확인까지 했다. 고의볼넷을 내주라는 의미는 아니었으나, 승부가 여의치 않을 땐 정면대결을 피하고 볼넷을 내주라는 의미도 있었다."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강민호가 3년이나 지나서 자기 잘못이라며 자백했다.
비록 결승타를 허용해 일본에게 우승을 넘겨준 대역죄인으로 욕을 먹었지만, 결승전 이전 4경기에서 3.1이닝 무실점 2세이브를 거둔 대표팀의 필승조였다.[69]
8.7.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2014년에는 인천 아시안 게임에 선발되었고, 2015년에도 프리미어 12 최종 엔트리에 선발이 되었으나 그 사건으로 결국... 쨌든 여론의 호전에 힘입어 KIA 타이거즈로 복귀하게 되면서 태극마크를 다시 달게 될 가능성이 생겼다.일단 금메달을 따면서 70점의 연금점수가 쌓였으며 월정금 75만원이 나온다고 한다.기준표
8.8.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경기 | 선발 | 이닝 | 방어율 | 승 | 패 | 홀드 | 세이브 | 피안타 | 실점 | 자책점 | 4구 | 삼진 | 상세 |
1 | 0 | 1 | 9.00 | 0 | 1 | 0 | 0 | 0 | 1 | 1 | 1 | 0 |
9. 연도별 성적
9.1. KBO
역대 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1995 | 해태 | 14 | 29⅓ | 0 | 2 | 0 | - | .000 | 5.83 | 37 | 0 | 8 | 16 | 19 | 19 | 1.43 |
1996 | 49 (4위) | 114⅔ | 7 | 7 | 0 | - | .500 | 3.22 | 91 | 8 | 44 | 78 | 48 | 41 | 1.13 | |
1997 | 64 (4위) | 135 | 14 (3위) | 8 | 26 (4위) | - | .636 | 2.33 (2위) | 93 | 6 | 42 | 120 | 44 | 35 | 0.97 (2위) | |
1998 | 59 | 133⅔ | 8 | 7 | 34 (1위) | - | .533 | 1.89 (2위) | 90 | 4 | 42 | 141 | 35 | 28 | 0.90 (1위)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1999 | 삼성 | 71 (4위) | 138⅔ | 13 | 4 | 38 (1위) | - | .765 (3위) | 2.14 (1위) | 91 | 10 | 36 | 141 | 33 | 33 | 0.87 (1위) |
2000 | 52 | 88⅔ | 5 | 4 | 30 (3위) | 0 | .556 | 1.52 | 58 | 2 | 31 | 95 | 19 | 15 | 0.90 | |
2001 | 30 | 184⅔ (5위) | 14 (3위) | 6 | 1 | 0 | .700 (4위) | 3.90 | 169 | 25 | 79 | 136 (4위) | 88 | 80 | 1.25 (3위) | |
2002 | 36 | 204⅓ (2위) | 17 (3위) | 6 | 2 | 0 | .739 (3위) | 3.08 (3위) | 188 | 24 | 58 | 160 (4위) | 82 | 70 | 1.09 (1위) | |
2003 | 28 | 147 | 13 (3위) | 3 | 1 | 0 | .813 (2위) | 3.55 | 141 | 15 | 59 | 85 | 63 | 58 | 1.26 (5위) | |
2004 | 61 | 67 | 2 | 4 | 36 (1위) | 0 | .333 | 2.01 | 51 | 4 | 26 | 67 | 19 | 15 | 1.09 | |
2005 | 29 | 91⅓ | 5 | 8 | 0 | 3 | .385 | 6.50 | 110 | 11 | 51 | 70 | 67 | 66 | 1.60 | |
2006 | 1 | 2 | 1 | 0 | 0 | 0 | 1.000 | 4.50 | 3 | 0 | 1 | 0 | 1 | 1 | 2.00 | |
2007 | 40 | 119 | 5 | 7 | 0 | 3 | .417 | 4.90 | 138 | 9 | 54 | 62 | 68 | 65 | 1.53 | |
2014 | 49 | 44⅔ | 5 | 4 | 31 (2위) | 0 | .556 | 5.84 | 50 | 4 | 25 | 52 | 33 | 29 | 1.59 | |
2015 | 55 | 54 | 5 | 2 | 33 (1위) | 0 | .714 | 2.83 | 45 | 2 | 16 | 71 | 17 | 17 | 1.07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2016 | KIA | 34 | 35 | 3 | 3 | 15 | 0 | .500 | 4.37 | 45 | 5 | 14 | 38 | 18 | 17 | 1.57 |
2017 | 51 | 50 | 8 | 6 | 7 | 9 | .571 | 3.78 | 51 | 3 | 27 | 58 | 22 | 21 | 1.46 | |
2018 | 37 | 86⅓ | 5 | 5 | 4 | 4 | .500 | 5.42 | 92 | 16 | 40 | 84 | 54 | 52 | 1.40 | |
KBO 통산 (18시즌) | 760 | 1725⅓ | 130 | 86 | 258 (3위) | 19 | .602 | 3.45 | 1543 | 148 | 650 | 1474 | 730 | 662 | 1.18 |
완투, 완봉 기록 | ||
연도 | 완투 | 완봉 |
2001년 | 1완투 | 1완봉 (4위) |
2003년 | 1완투 | 1완봉 (3위) |
KBO 통산 | 2완투 | 2완봉 |
9.2. NPB
역대 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2008 | 야쿠 르트 | 54 | 51 | 1 | 5 | 33 (5위) | 0 | .167 | 3.00 | 55 | 6 | 11 | 50 | 18 | 17 | 1.31 |
2009 | 57 | 57 | 5 | 4 | 28 (3위) | 5 | .556 | 2.05 | 40 | 4 | 21 | 52 | 15 | 13 | 1.11 | |
2010 | 53 | 55⅔ | 1 | 2 | 35 (2위) | 6 | .333 | 1.46 | 32 | 3 | 18 | 53 | 9 | 9 | 0.88 | |
2011 | 65 | 62⅓ | 4 | 2 | 32 (5위) | 4 | .667 | 2.17 | 40 | 2 | 25 | 68 | 15 | 15 | 1.04 | |
2012 | 9 | 7 | 0 | 0 | 0 | 3 | - | 0.00 | 6 | 0 | 2 | 7 | 0 | 0 | 1.14 | |
NPB 통산 (5시즌) | 238 | 233 | 11 | 13 | 128 | 21 | .458 | 2.09 | 173 | 15 | 77 | 231 | 57 | 54 | 1.03 |
9.3. MiLB
- 한 연도에 동일 구단 산하 여러 레벨의 기록이 존재할 경우, Rk → A- → A → A+ → AA → AAA 순으로 서술.
역대 기록(투수)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2013 | AZL 컵스(Rk) | 5 | 5 | 0 | 0 | 0 | 0 | - | 3.60 | 5 | 0 | 0 | 4 | 2 | 2 | 1.00 |
데이토나 컵스(A+) | 4 | 5 | 0 | 0 | 0 | 0 | - | 1.80 | 2 | 0 | 3 | 6 | 1 | 1 | 1.00 | |
테네시 스모키스(AA) | 1 | 1 | 0 | 0 | 0 | 0 | - | 0.00 | 1 | 0 | 0 | 2 | 0 | 0 | 1.00 | |
아이오와 컵스(AAA) | 11 | 11⅓ | 0 | 0 | 0 | 3 | - | 0.79 | 5 | 0 | 4 | 12 | 1 | 1 | 0.79 | |
2013 시즌 합계 | 21 | 22⅓ | 0 | 0 | 0 | 3 | - | 1.61 | 13 | 0 | 7 | 24 | 4 | 4 | 0.90 | |
MiLB 통산 (1시즌) | 21 | 22⅓ | 0 | 0 | 0 | 3 | - | 1.61 | 13 | 0 | 7 | 24 | 4 | 4 | 0.90 |
역대 기록(타자)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출루율 | 장타율 | OPS |
2013 | 테네시 스모키스(AA) | 1 | 0 | .000 | 0 | 0 | 0 | 0 | 0 | 0 | 0 | 0 | .000 | .000 | .000 |
아이오와 컵스(AAA) | 11 | 0 | .000 | 0 | 0 | 0 | 0 | 0 | 0 | 0 | 0 | .000 | .000 | .000 | |
2013 시즌 합계 | 12 | 0 | .000 | 0 | 0 | 0 | 0 | 0 | 0 | 0 | 0 | .000 | .000 | .000 | |
MiLB 통산 (1시즌) | 12 | 0 | .000 | 0 | 0 | 0 | 0 | 0 | 0 | 0 | 0 | .000 | .000 | .000 |
9.4. MLB
역대 기록(투수)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fWAR | bWAR |
2013 | CHC | 6 | 5 | 0 | 0 | 0 | 0 | - | 5.40 | 6 | 0 | 9 | 5 | 3 | 3 | 2.60 | -0.1 | 0.0 |
MLB 통산 (1시즌) | 6 | 5 | 0 | 0 | 0 | 0 | - | 5.40 | 6 | 0 | 9 | 5 | 3 | 3 | 2.60 | -0.1 | 0.0 |
역대 기록(타자)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출루율 | 장타율 | OPS | fWAR | bWAR |
2013 | CHC | 6 | 0 | .000 | 0 | 0 | 0 | 0 | 0 | 0 | 0 | 0 | .000 | .000 | .000 | 0.0 | 0.0 |
MLB 통산 (1시즌) | 6 | 0 | .000 | 0 | 0 | 0 | 0 | 0 | 0 | 0 | 0 | .000 | .000 | .000 | 0.0 | 0.0 |
[1] 후일 김성근 감독이 밝히기를, "창용이가 밖에 있는 거 같았는데 어느 순간 조용해져서 진짜 간 줄 알고 쫓아가야 되나를 계속 고민했다"고 한다.[2] 본인 말로는 무릎 꿇고 앉아있던 임창용에게 일본 사탕 하나 주면서 다독였다고 한다.[3] 당시 깡마른 체형이었던 임창용에게 구위를 올리려면 체격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며 식사량을 늘리도록 지시했고 한번 많이 먹으면 삼겹살 3인분, 곱창전골에 밥 2공기까지 먹었다고 한다. 더군다나 훈련이 모두 끝난 밤에는 테니스 라켓을 이용해 섀도우 피칭을 시켰다고 한다.[4] 일요일 낮경기에, KBS 지상파 중계였다.[5] 당시 최고의 해설가로 평가받았다.[6] 하지만 실제로 당시 타이거즈에서 최고의 패스트볼을 던진 선수는 이대진으로 평가받았다. 최해식이 까마득한 후배의 성장을 위해 베풀어준 립서비스인 셈. 하지만 실제 임창용이 어떻게 성장했는지 보면 단순한 립서비스로 보기엔 어렵다.[7] 다만 최해식의 인터뷰가 95년 당시 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은퇴하고 한참 뒤 인터뷰에서 회상하면서 말했던 거라고 한다. 어쨌든 95년에 이 말이 나왔다고 알려져 있었을 때, 이 말 한마디에 당시 아직 현역으로 군림하고 있던 선동열이 질투를 느꼈었으며, 이 때문에 선동열-임창용 간의 오랜 반목의 씨앗이 되었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이는 사실상 후대에 이르러 누군가가 선동열을 까기 위해 날조한 에피소드이다. 해당 에피소드에서 선동열이 임창용을 거르고 김정수를 지목한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 당시 포수였던 최해식이 팀 내에서 가장 좋은 패스트볼을 던지는게 임창용이었다는 인터뷰때문에 열폭해서였다고 하는데, 언급되었듯이 이 인터뷰는 최해식이 은퇴한 후 한참 지나서 회고 형식으로 한 것이라서 당시의 선동열이 그걸 듣고 열폭할 일 자체가 없었다. 무엇보다 임창용의 데뷔 시즌 성적을 보면 선동열의 뒤를 이을 마무리 후보가 임창용이었다는 사실 자체가 넌센스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4경기에 등판에 29와 1/3동안 37피안타를 얻어맞고 0승 2패 0세이브 평균자책점 5.83 WHIP는 1.43이었다. 어디까지나 구위가 눈에 띄는 유망주에 지나지 않았고 무엇보다 당시 해태는 임창용을 선발투수로 육성하려 했다. 그래서 데뷔시즌 시범으로 2경기를 선발로 등판했고 2년차였던 이듬해 1996년은 5월까지 선발투수로 뛰다가 프라이머리 셋업으로 보직 변경을 해 대박을 친 후 자연스레 김정수와 자리를 맞바꾸고 마무리를 물려받게 된 것이 실상이다.[8] 사실 이해 시즌 초 임창용의 등판패턴은 선발로 2이닝 정도 던지고, 이틀 뒤 계투로 1이닝 약간 안 되게 던졌다가 이틀사흘 후 선발로 다시 2이닝 조금, 다시 이틀사흘 후 계투로 1이닝 정도 던지는 식으로 오프너(당시에는 땜빵선발)를 겸하는 계투와 같은 느낌이었다. 어쨌든 선발로 나올 당시도 전천후는 전천후였다는 뜻. 실제 선발등판 경기 중 임창용이 선발로 5이닝 이상을 던진 건 1경기뿐이었다. (96년 5월 5일 광주 한화 DH 2차전, 7.1이닝 10K 4실점 무자책 패전) 여담으로 당시에 대해 본인의 말로는 선발로 나오면 하도 승운이 안 따라서 셋업으로 포지션을 바꿔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실제 해태 시절까지 임창용은 선발승이 하나도 없었다.[9] 여담으로 이 승리는 임창용의 개인통산으로는 2승째였다.[10] 나머지 3경기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1999년 플레이오프 7차전과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결승 한일전과 2017년 705 문학대참사.[11] 1997년 시즌 당시 정규 1위를 놓고 해태와 LG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LG가 해태를 상대로 10승 8패로 근소하게 우위였을 정도로 LG의 전력이 만만치 않았다.[12] 스탯 상으로 커리어 하이는 삼성 이적 첫해인 1999년이지만, 여러 매체에서 임창용 본인은 해태 시절 97~98년을 자신의 커리어 하이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실제로 지나친 혹사로 인해 99년 포스트시즌에 참사가 일어나기도 했다.[13] 심지어 임창용 이후 최초의 구원왕인 정해영은 이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다.[14] 이 시즌의 에피소드로, 해태에서의 마지막 경기에서 에드가 캐세레스에게 빈볼을 던져 퇴장당했다고 한다. 임창용이 해태에서 마지막으로 던진 공이 빈볼인 셈이다.[15] 1996년 114⅔이닝, 1997년 135이닝, 1998년 133⅔이닝.[16] 1998년 10월 4일 광주 OB전. 이 경기는 1998 시즌 최종전으로 당시 해태와 OB는 4위 자리를 두고 시즌 마지막까지 다투고 있었다. 다만 이때 임창용을 조기 투입하고도 OB에게 털리는 바람에 현대 정명원에게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내주게 되었고, 해태는 5위로 떨어지면서 가을야구 진출에 실패하게된다.[17] 대략 30억원으로 알려졌다.[18] 마찬가지로 특급 중무리였던 진필중도 1999년 최다 세이브포인트 경쟁에서 이겼을 때 규정 이닝에 조금 모자란 114이닝을 던졌고, 구대성도 다를 바가 없었다. 참고로 1999년 임창용 이후 선발 등판 없이 규정이닝을 채운 선수는 존재하지 않는다.[19] 심지어 당시 아시야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 및 한일 슈퍼게임 대표팀으로 차출되기도 했다. 시즌 중 리그를 스톱하고 치러졌던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와 시즌이 끝나고 개최된 한일 슈퍼게임까지, 임창용으로써는 정말 원없이 던졌던 1999년이었다.[20] 이 시기에 30-30 클럽 선수가 3명(이병규, 제이 데이비스, 홍현우)이나 나왔고 홈런왕 이승엽이 54홈런을 기록했으며, 해태 타이거즈는 팀홈런 210개로 2003년 삼성 라이온즈의 213개가 나오기 전까지 당시 한 시즌 최다 팀 홈런 신기록을 달성했다.[21] 근데 그나마 관리받은 게 88⅔이닝이었다.[22] 만약 임창용이 2000년마저 1999년처럼 철저히 굴려졌으면, 일본프로야구나 메이저리그 진출은 고사하고 아예 재기불능 상태로 망가져 버렸을 지도 모른다.[23] 2001 시즌 중반까지 21세이브를 올리며 잘 나가다가 개인사로 시즌 중 임의탈퇴되었다. 김진웅이 벤 리베라를 대신해 마무리를 맡았고, 2002 시즌부터는 노장진이 마무리를 맡게 되었다.[24] 이 당시 삼성은 임창용의 이적료로 최소 300만 달러 정도를 희망했고, 그 정도 이상 나와야 포스팅을 수용할 것이라고 밝혔다.[25] 놀랍게도 2012년 류현진이 2,573만 7737 달러라는 포스팅 금액 기록을 세우기 전까지는 임창용이 기록한 65만 달러가 KBO 출신 선수 중 포스팅 최고액 기록이었다.[26] 당시 부인의 말에 따르면 팬티 한 장까지 명품이냐 아니냐를 따졌다고까지 했고 이에 대한 세간의 비난도 엄청났다. 하지만 임창용 선수 측은 부인이야 말로 지나치게 명품만 고집하며 8개월에 1억을 쓸 정도로 사치를 부렸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서로가 상반된 주장을 하며 진흙탕 싸움을 했다. 그럼에도 성적이 곤두박질치지는 않았다.[27] 사건 하나 터지면 멘탈에 상처를 입어 성적이 눈에 띄게 하락하는 2010년대 선수들을 생각해보면 재판이 석연치 않게 끝난데다 임창용의 부인 측이 지나치게 언플을 활용하다 모순되는 말을 했다는 점, 등 간통 여부에 대해선 아직 논란 점이 많다.[28] 비슷한 시기에 간통을 저지른 김동주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묻히는데, 그 이유는 2009년 이후 프로야구의 부흥기 때 임창용은 해외리그에서 뛰었던지라 약간 관심 밖이었던 것도 있고, 거기다 김동주는 전처와 자식들에게 한 언플도 있고 간통 관련 사실이 밈화되어 널리 퍼지기도 했기 때문에 김동주에 비하면 묻히는게 당연하다고도 볼 수 있다.[29] 2004년부터는 기존 방식인 구원승과 세이브를 합친 세이브포인트로 구원왕을 매기지 않고 순수 세이브로만 기록을 따지며 수상 명칭이 세이브왕으로 변경되었다.[30] 임창용은 전술 했듯 29경기 선발 + 7경기 구원 등판의 기록이지만, 켈리는 31경기 모두 선발 등판의 기록이다.[31] 대신 라쿠텐은 그해 삼성에서 뛰었던 케빈 호지스, 두산에서 뛰었던 게리 레스를 데려갔다.[32] 훗날 임창용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라쿠텐이 나름 좋은 계약안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종 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라쿠텐이 당시 막 창단했던 신생팀이었던지라 임창용 본인과 계약을 주선한 에이전트 모두가 내키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2007년 야쿠르트와 고작 연봉 3,000만엔에 계약을 맺을 때에는 라쿠텐이나 지바 롯데가 제시한 금액에 비해 10분의 1 정도의 수준이었던지라 그 때 계약하지 않았던 걸 상당히 후회했다고 한다.[33] 애틀란타는 1년 250만달러를, 보스턴의 경우 샤이닝 보너스와 옵션을 포함해 5년 950만달러를 최종적으로 제시했지만, 두 건 모두 메이저리그 보장계약이 아닌 메이저와 마이너 옵션이 다른 스플릿 계약이었다고 한다.[34] 임창용에 따르면 그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해외진출 에이전트를 너무 많이 선임했다고 한다. 여러 명의 에이전트가 너도나도 본인이 임창용의 에이전트라며 주장하고 각자 다른 계약 조건을 들이밀었고, 이로 인해 임창용만 허공에 붕 떠버린 셈.[35] 선발 10승 혹은 마무리로 30세이브 이상 거두지 못하면 연봉 5억 중에서 2억을 구단에 반납하는 마이너스 옵션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36] 선수가 임의탈퇴 신분이 되면 원 구단은 물론 다른 구단으로 들어가는 길이 완전히 봉쇄되어 프로 무대에서 뛰지 못하게 된다. 사실상 선수 생명이 끝나는 셈.[37] 2005년 시즌 중반까지만 해도 권오준이 마무리를 맡았으나, 마무리로 나와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후반기부터는 그해 입단한 대졸 신인 오승환이 마무리를 맡았다.[38] 한국시리즈 3경기 등판하여 총 1.2이닝 동안 2홀드를 올렸다.[39] 이 당시 선동열 감독과의 사이로 인해 일부러 태업을 했다는 소문이 있다.[40] 한편, 태업이라고 하기에는 선발과 불펜과의 성적 차이가 제법 났었다. 특히 시즌 중 불펜 전환 이후 총 19경기에서 1승 3홀드를 기록하는 동안 평균자책점도 2.93이었고, 피안타율도 0.230에 WHIP도 1.23이었던 것을 봤을 때 선발로써는 수명을 다한 상태였는데도 팀 사정상 무리하게 선발을 맡겼다가 결과가 좋지 않았던 것 일 수도 있다.[41] 그래도 선동열과 김응용이 모두 팀을 떠나고, 프런트 수뇌진과 감독이 바뀐 이후로는 삼성과의 관계도 양호해진 듯하다. 삼성의 스프링캠프에도 자주 찾아오고 같이 훈련도 받으면서 류중일 감독님과 같이 야구하면 야구할 맛 나겠다는 등의 표현까지 하였고, 2014년에 실제로 복귀를 하였다.[42] 여담으로 이 삼진이 NPB 데뷔 후 첫 탈삼진이었는데, 이로 인해 두 사람의 사이가 벌어진 것이라는 소문도 돌곤 했었다.[43] 료타는 이후 임창용이 마무리로써 완벽히 연착륙함에 따라 셋업맨으로 보직 전환하여 임창용의 앞을 잘 책임졌다. 이 해 야쿠르트는 마츠오카 켄이치-오시모토 타케히코-이가라시 료타-임창용의 막강 필승계투진을 구축했다.[44] 피안타 5개, 볼넷 1개, 탈삼진 9개, 그리고 팔꿈치 통증이 완벽히 사라지면서 자신감이 완전 붙자 이 9경기에서 던진 총 138개의 공 중 속구가 무려 120개(!!)였다.[45] 나중에 오타니 쇼헤이와 사사키 로키가 둘 다 165km/h로 경신했다. 이후 티아고 비에이라가 166km/h를 기록하며 NPB 최고 구속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일본 출신 투수들 중에선 후지나미 신타로의 165.1km/h가 최고 구속이나, 후지나미는 NPB가 아닌 메이저리그 진출 후 저 구속을 기록했다.[46] 그 뒤 바로 팀 동료 이가라시 료타가 재경신하긴 했다.[47] 007 제임스 본드 테마 음악이다, 김연아가 피겨 스케이팅에서 쓰던 배경음이다. 정확히는 James Bond Theme (Moby's Re-Version)다. 이 음악은 네이버 뮤직에서 MP3로 다운로드만 가능하고 스트리밍은 안된다.[48] 이 해 WHIP는 0.88. 아무리 잘 하는 마무리도 1점대 초반임을 감안하면 4자범퇴보다도 3자범퇴가 많았다는 뜻이다.[49] 정확히는 2+1년.[50] 이때 그의 이탈로 야쿠르트의 1군 쿼터 한 자리를 낚아챈 선수가 바로 2010년 한국-타이완 클럽 챔피언십에서 SK 와이번스를 상대로 호투했던 올랜도 로만이다.[51] 2015년 야쿠르트의 일본시리즈 진출에까지 공헌하며 활약한뒤 16년부터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뛰게 되며 메이저리그 맛을 보게 되었다.[52] 류중일 감독의 말에 따르면 일전에 이승엽이 일본에 있을 적에 국내 복귀를 두고 지나가는 말로 '복귀하면 좋지'라고 말했다가 그게 실제로 기사로 나오자 난처했다고. 자팀 전력이 늘어나는 차원에서는 좋지만 반대로 현재 자팀 선수가 감독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기에 선수들 사기가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53] 2019년도 드래프트에서 세이부 라이온즈의 3순위로 지명받은 유망주 마츠오카 코키(松岡洸希)는 본래 내야수였으나 투수로 전향해서 149km의 강속구를 뿌려대는 사이드암으로 주목받고 있는데, 본인이 언급하기를 이때 가장 참고가 됐던 투수가 임창용이었다고 한다. 가장 존경하는 선수 역시 임창용이며, 입단식에서는 그를 뛰어넘는 성적을 거두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심지어 별명마저 지명 이전 독립리그에서의 소속팀이었던 사이타마 무사시 히트 베어스의 팀명에서 따온 '무사시의 임창용(武蔵の林昌勇)'. '강속구 사이드암'의 대명사이자 롤모델로 인식될 정도로 임창용은 일본 야구에 강렬한 인상을 안겨준 선수였다.[54] 대부분 외국인 선수들이 미대륙쪽에 거주하고 있어 딱히 임창용외에 부를만한 선수가 없던 사정이 겹쳐서 그런 거긴 하다. 더 좋은 선수도 많았는데(당장 위의 토니 바넷이라던가. 임창용은 못 한 세이브왕을 2회 거뒀다.), 대부분 현역이거나 타 팀 코칭스태프거나 등등의 사정으로 부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55] 이혜천의 경우엔 성적보다도 주니치 모리노와의 벤클이 일본내에서 훨씬 더 유명하다. 이혜천의 강속구 데드볼을 맞은 모리노가 모자 벗고 인사하라고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지만 일본어를 알 리 없는 이혜천이 '뭔데 임마!'를 시전 마운드로 달려들며 벤클이 일어났다. 한 때 연말 일본의 야구 벤클 모음집의 단골 메뉴로 많이 소개되었다. 정작 시비는 이혜천이 붙었는데 싸움을 말리기 위해 야쿠르트 용병 1루수가 여기저기서 쥐어뜯기고 몸싸움한게 웃음벨[56] 비슷한 식으로 오승환, 이승엽, 김태균 등의 일본에서 꽤 주전으로 오래 나왔던 선수거나 이대은 같이 그나마 최근에 1군에서 모습을 많이 보였던 선수는 인지도가 높지만 1군 경험이 드문드문했던 김무영이나 아예 1군 경험이 없었던 신성현이나 송상훈, 차승 백을 아는 사람은 거의 드물다.[57] 이로 인하여 삼성 라이온즈 갤러리에서는 임창용을 다크 나이트라고 불렀다.[58] 1억5천을 두 차례에 걸쳐 딴 걸로 알려져 있다.[59] 40세 4개월 6일.[60] 이전의 타이거즈에서 마지막 세이브는 1997년 10월 23일 1997년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기록.[61] 등록상으로는 1주일 차이, 실제 양력으로는 1개월 차이.[62] 임창용에 따르면 다음 시즌은 선발로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63] 올림픽 동메달 40,아시안게임 금메달 3개로 30[64] 그리고 이 사진은 이사만루 시리즈에서 98시즌 국대 카드로 쓰이는 사진이다.[65] 야구에 만약은 없다지만 이때를 무실점으로 넘어갔더라도 대표팀의 열악한 마운드 사정과 대주자 교체로 약해진 공격력 등을 감안한다면 한국이 패배했을 가능성이 높다.[66] 그 후로 12년 후 한일전에서 고우석이 어이없는 실수를 저질러 대한민국에서 평생까임권을 획득했다.[67] 다만 바로 거르라고 한것이 아닌 유인구로 승부하다가 안되면 거르라는 뜻이었다.[68] 당시 1루 주자였던 이와무라는 "고의4구를 내는 분위기라면 굳이 자신이 도루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밝힌 바 있다.[69] 대회때 컨디션이 좋았던 봉중근, 정현욱, 류현진, 윤석민 등의 투수들은 모두 소진된 상태였고 남은 투수가 김광현, 이재우, 임태훈, 이승호, 장원삼, 정대현, 오승환 등이 있었지만 모두 선발투수이거나, 일본전에 내기에는 수준미달, 혹은 정상적인 컨디션이 아니었다.[70] 공식적으로는 운전면허를 갱신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국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처리되었다. 원래 진짜 무면허는 50만엔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