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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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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사상
2.1. 인종론2.2. 조선 사회에 대한 혐오, 비난2.3. 비관주의와 현실 순응주의2.4. 정의 사회에 대한 의문2.5. 여성주의에 대한 비판
3. 사상적 배경4. 모순과 비판

1. 개요

구한말, 일제강점기언론인, 정치인이자 개화사상가인 윤치호의 사상을 다룬 문서.

2. 사상

2.1. 인종론

그는 1차 세계 대전과 2차 대전을 백인종 대 황인종의 인종 전쟁으로 봤고, 황인종의 승리를 위해서는 일본을 중심으로 단결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화두를 제기하기도 했다. 그는 일본보다도 미국이나 유럽 유학을 다녀온 친미파나 친유럽파를 더 혐오스럽게 보았다. 좀 더 자세히는 이 사람이 한 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인종관이 형성된 것은 미국 유학 시절 예나 지금이나 미국에서 인종 차별이 가장 극심한 지역인 조지아 주에서 수학한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보인다. 그의 일기를 보면 미국을 인정은 하고 있으나 백인들에게만 좋은 나라라며 미국의 인종 차별을 까는 내용이 종종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인종론은 윤치호 생애의 최대 병크인 부일 협력을 이끄는 요인이 되었다.

또한 윤치호는 미국 백인들이 자신한테 가한 인종차별에 대해서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고 미워하면서, 정작 미국 백인들이 북미 대륙의 토착민인 인디언을 학살한 일에 대해서는 오히려 백인들을 옹호하는가 하면 자신처럼 미국에서 인종차별에 시달리던 흑인들에 대해서는 1893년 2월 17일자 일기에 '(아프리카인들이 미국에 끌려와) 영어를 배운 것만으로도 그들의 노예 생활에 대해 충분히 보상받은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등 모순적인 행태를 보였다[1]

2.2. 조선 사회에 대한 혐오, 비난

독립협회 회원들은 여전히 동요하고 있다. 하지만 나를 가슴 아프게 만드는 것은 일반 대중의 가공할 만한 무관심이다. 대중은 이 투쟁을 독립협회 회원들과 정부의 사적 분쟁으로 간주한다. 몇 백 년 동안 노예 상태에서 억압받아온 이 아이들은 헌의육조가 국가와 국민 모두의 이익과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런 국민한테 희망을 갖다니, 우리가 더 바보였다. 왕이나 국민이나 모두 똑같다! 그들에게 어울리는 것은 노예상태 뿐이다!
윤치호 일기, 1899년 6일 (음력 23일) 일요일

윤치호는 노론 벽파의 후손들은 1930년대까지도 다산 정약용을 혐오하여, 정약용의 책은 사지도, 읽지도 않는다고 지적했다. 윤치호는 또 독립 운동가들 사이에서도 서북파, 기호파 파벌을 나누거나 출신 신분을 두고 갈등하는 것을 비판하며, 지역 감정 하나만 봐도 독립할 자격도 없다고 비난했다.

중국을 다녀온 지인을 통해 들은 상하이 내 7개의 파벌이 있다는 것을 두고도 독립 운동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품게 된다.

조선인의 결혼식, 장례식에 사치를 부리는 것도 윤치호의 주요 비판 대상이었다. 1920년대, 1930년대 당시 결혼 비용과 장례식 비용으로 파산하거나, 이혼하거나, 가정 파탄이 나는 집안들을 일기장에 기록하면서 대차게 깠다. 그는 조선의 관혼상제의 특징으로 슬픔없는 눈물과 허례허식을 지적했고, 사촌들의 사치스러운 결혼식, 고모 장례식에서의 허례허식 역시 비판하였다.

그는 아버지 윤웅렬이 애국심, 개혁을 말하다가 관직에 올라서는 자리 보존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디스했다. 그는 당시 조정의 양반, 고관들이 글도 못읽는 무식한 사람들이 많다고 비판했다. 양심이 없고 매관매직을 일삼는 탐관오리들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글을 모르는 무식한 고위직에 대한 비판에서는 자기 삼촌인 윤영렬도 비판의 대상이 됐다.

몸이 뚱뚱하면서도 걷지 않고 하인들을 시켜서 가마를 타고 다닌 영선군은 양돼지라고 비난했다.

나혜석의 이혼과 박인덕의 이혼을 옹호했다. 남자가 이혼하고, 아내를 내보내고, 첩을 여러 명 두거나 하면서 여자가 이혼하는 것을 비난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윤치호는 나혜석, 박인덕의 이혼을 계속 옹호했지만, 박인덕이 신흥우와 가깝게 지내면서 박인덕에 대한 옹호는 거뒀다. 그는 첩을 두지 않아도, 여러 여자와 잠자리를 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니는 것도 못마땅하게 여겼다.

조선인이 가난하여 굶고 있는데도, 동창생 구영숙이 자기 부인이 모피코트를 사주는 것을 야속하게 생각했다. 구영숙을 야속하게 생각한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가난과 기근으로 고생하는데도, 구영숙의 부인이 모피코트를 선물받은 것을 보고 부러워한 셋째 후처 백매려 때문. 윤치호는 백매려가 하녀들, 하인들을 괴롭히고 구박하는 것, 자기는 움직이기 싫어하면서 하녀에게 팔다리 주무르게 하거나, 일하다 조는 하녀를 소년 하인들을 시켜서 꼬집게 하는 것을 비판했다. 결국 윤치호는 셋째 후처 백매려에 대해 "내 자식들을 낳아 준 여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같이 산다"는 하소연을 일기장에 남기게 된다.

시부모가 며느리 괴롭히는 것, 남편이 아내 괴롭히는 것, 어머니가 자녀들 괴롭히는 것, 주인이 머슴들, 하인들, 노예들 괴롭히는 것도 그대로 일기에 기록해 두었다. 결국 윤치호는 "남자, 여자, 노인, 청년, 인종을 떠나 모든 인간은 사악하다. 다만 힘과 돈과 권력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만이 존재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인간에 대한 환멸을 갖게 된 윤치호는 1930년대에 가서는 심각한 고독과 외로움에 몸부림쳤다. 외로움과 허탈감에 빠진 윤치호는 독서에 탐닉했고, 불면증을 그는 독서로 달랬다. 1930년대 이후 커피가 시중에 보편화되면서 그의 독서량은 더욱 늘었다.

2.3. 비관주의와 현실 순응주의

독립 운동에 대해서는 매우 비관적으로 보았다. 그는 민중이 깨우쳐 일제를 몰아내는 것 자체를 허황된 공상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갑신정변은 둘째치고, 독립협회나 만민 공동회에서 민중 참정권을 주장한 것과, 유럽의 의회제를 도입, 의회를 설치하자는 견해를 고종, 순종에게 불충하는 역적 행위로 매도당한데 대한 실망과, 민중의 맹목적인 보수성에 대한 결론이었다.

비록 개인적 양심으로 독립 운동에 대한 소극적 지원이 없었던 건 아니나 그것 역시 자신에게 해를 부르지 않는 한도였고 적극적인 의지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자신에게 독립 자금을 빌리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에게 독립 운동 한답시고 외국에 나가 편하게 운동하면서 국내에 있는 자기한테 돈 빌려 달라고 하는건 상당히 무책임한 처사라고 일갈한 사람이 윤치호였다.

윤치호의 이런 행동은 그 당시 국제 정세에 대한 예리한 관측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했다. 실례로 3.1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해 한국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제일 먼저 예측했던 사람도 윤치호였고 예상이 맞은 것도 윤치호였다. 대다수 독립 운동가들은 순진하게도 저 말을 진심으로 믿었다. 또한 윤치호는 사람들에 대한 탁월한 관찰력 또한 가지고 있었다.[2] 윤치호의 이같은 행동은 식민지 조선의 장래에 대한 냉소와 체념이 뒤엉켜져 소극적 저항으로 일관하다가 나중에는 '나약한 지식인'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조선일본의 생명선이며, 군사적 힘으로 무리하게 강요하지 않는 한, 후자(일본)는 전자(조선)를 내놓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과 함께 전쟁을 치르고 있는 미국 혹은 영국이 불쌍하고 작은 조선을 독립시키기 위해서 일본과 전쟁을 하려고 하겠는가?[3] 상상할 수조차 없다!
윤치호 일기 1919년 1월 28일

하지만 일제강점기가 지속되면서 이러한 합리주의도 점점 마비되어 갔는데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일본 제국의 전쟁 프로파간다로 인해 서방의 정보가 차단이 돼있었기 때문이었다[4]. 따라서 정확한 정세를 판단할 수 없었으며 그저 하루종일 정부의 선전, 홍보만 접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한국의 독립 가능성을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았고 결국 미국의 국력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커다란 우를 저지르게 되었다.[5]

또한 그는 국제정세에 대해 이승만만큼의 지식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기에서 "왜 일본 같은 훌륭한 나라가 히틀러 같은 건달이랑 손을 잡는 거지?", "무솔리니는 대단한 지도자라고 생각했는데 히틀러 같은 건달에게 나라를 내주다니 실망이다."라고 기록했는데, 이는 영미가 주름잡던 세계에서 대공황 이후 결국 무역 루트를 두고 후발 주자였던 독일과 일제, 이탈리아가 손을 잡을 수밖에 없는[6], 사실을 간과했던 것이다.

윤치호의 일기를 보면 초반부에는 제국주의나 일본을 일부 비판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40년대 이후 부터는 자신이 비난하던 제국주의와 자신이 찬양하던 일본의 모습을 결합시키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는 그가 백인종에게 가지고 있던 깊은 원한과 세상에 대한 회의주의가 결합된 것으로 보여진다.

2.4. 정의 사회에 대한 의문

윤치호는 이상 사회와 현실 사회와의 괴리, 기독교적 사랑의 윤리와 진화론적 우승열패론 사이의 모순 속에서 심각한 갈등을 느꼈다.[a] 그는 이 세상에 정의가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다. 그리고 미국 유학을 다녀온 뒤, 힘이 곧 정의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는 종종 종교에서 말하는 신의 사랑을 의심하였다. 그는 "만약 하느님이 정의롭고 선하다면, 어떻게 온갖 불의죄악을 범하는 들과 황제들 그리고 다른 개인들과 국가들을 용납하거나 심판치 않고 놓아두는가?"[a]라고 절규하였다. 공적으로는 왕들, 황제들, 군주들, 그리고 각종 공직자벼슬아치들이 백성에게, 가정에서의 부모자녀에게, 형제자매가 다른 형제자매에게, 그리고 상대적인 강자들, 그리고 강대국약소국에게 하는 폭력을 왜 반드시 벌주지 않고 가만 두느냐는 것이었다. 이 의문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태고적부터 현재와 미래까지 만연했고, 지금도 만연해 있으며, 앞으로도 만연할 부정과 불의와 사악함에 대하여 읽고, 보고, 들을 때면, 나의 좁은 마음은 영어로 신(God)이라 불리는 존재의 정의사랑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왕이나 황제가 관찰사대신들이 자신의 백성들을 상대로 저지르는 불의나 잔학 행위를 무관심하게 지켜보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약 내가 나의 신하들이 내 관할 아래의 마을 주민들을 때리고, 약탈하고, 살해하도록 허락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나를 비난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판사뇌물매수하지 않는다면, 대단한 것은 못되지만 은 나의 신하들이 저지른 사악한 행동에 대해 나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만약 하나님공정하고 훌륭하다면 왜 왕이나 황제, 개인과 국가가 온갖 불의와 범죄를 저지르게 하며, 그들을 처벌하지 않도록 내버려 둔단 말인가?
윤치호 일기, 1900년 12월 25일

그는 "요컨대 만일 하느님이 사랑과 연민이 없는 비정한 아버지가 아니라면, 특별히 한국에서 일반적으로는 세계에서 승리해 왔고, 승리하고 있는 아버지 하느님의 부정(父情)과, 더욱더 그 부성(父性)에 의혹을 품게 한다.", "약자강자먹이가 되는 냉혹한 법칙으로 세계천지창조되었을 때, 우리의 절대자 하나님은 약자의 이해문제를 고려했는지 의심스럽다."라고 하기도 했다.[a] 이는 국가에서 정치인민중의 관계, 상급자와 하급자의 관계, 부모와 자녀의 관계, 시부모며느리의 관계가 과연 사랑애정으로 이루어진 관계인가에 대한 의문으로 확대되었다.

그는 결국 "이 세계를 실제로 현실적으로 지배하는 원리는 정의가 아니고 힘이다. 힘은 정의라는 것이 이 세계의 신이다."[a]라고 결론 내린다. 현실사회에는 신의 정의는 존재하지 않고, 힘의 정의가 지배하는 사회로, 따라서 정의와 평화가 수립될 수 없는 죄악의 사회로 인식했다. 다만 국가에서만큼은 엄격하고 강력한 법만이 인간의 그러한 폭력성을 강제로 완화시킬 수 있다고 결론짓게 된다.

우월한 강자가 도덕적인 면에서도 어느정도 타락한 피지배 약자보다 더 낫기 때문에, 모든 경우에서 그런 것은 아니지면 대체로 '정의가 곧 힘'이라고도 보았다.
국제적 또는 여러 인종 관계에서 ‘힘이 정의’인가? 그렇다고 나는 항상 생각해 왔다. 그러나 더 신중히 관찰해 본 후 나는 이에 관한 이전의 나의 견해를 수정한다. 어떤 민족이나 인종을 다른 민족이나 인종이 정복하면 정복당한 인종이 도덕, 종교, 그리고 지식 면에서 더 우수하여 정복자보다도 더 정의롭다면 ‘힘이 정의’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국 지배하의 인도와 영국 정복 이전의 인도인들의 여러 정부들과 비교해 보라. 미국인디언들의 지배 아래나 위에 있을 때보다 앵글로 색슨족이 장악할 때 더 좋지 않는가? 정말 어떤 인종이 다른 인종을 지배한 어느 경우만을 이야기하기가 곤란하다.

그러나 우리는 더 강한 인종이 도덕, 종교, 정치에 있어서 더 약한 인종보다 항상 더 우수하고 덜 타락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힘이 정의를 이긴 듯해도 사실은 상대적으로 더 정의롭지 못한 인종을 상대적으로(나는 절대라고 말하지 않는다.) 더 정의로운 인종이 승리했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결국 여러 인종 사이의 관계에서는 물론 이와 다른 예외가 있겠으나 정의가 힘이다.
윤치호 일기, 1892년 11월 20일

2.5. 여성주의에 대한 비판

만족은 의심할 바 없이 행복의 본질이다. 만족이 없는 인간, 특히 여성에게 삶은 지옥이다. 자신이 행하고 제공하는 모든 일에 불만족하고, 불만스러워 하는 사람(여성)은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비참하게 만든다.

나는 가끔 정내미가 떨어져서 불필요하게 “개 같은 자식”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을 하기가 무섭게, 서둘러 그 상상의 개에게 용서를 구한다. 개처럼 착하고 충성스럽고 친절한 소수의 남성과 여성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통의 여성 또는 남성은 당신이 베푼 무수한 친절과 선한 봉사에 감사를 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당신의 조금 진실하지 못하거나 불친절한 행동을 하면 저주를 퍼붓고 꾸짖는다. 이들(그 혹은 그녀)이 개보다 더 선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인본주의자들은 인간 본성이 동물의 왕국에서 가장 고상하다고 말한다!
《국역 윤치호 일기 8》(1932년 8월 2일) #

윤치호는 박인덕, 나혜석 등의 이혼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박인덕과 나혜석의 선택은 개인의 취향이니 존중해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유교의 가부장적인 질서를 비판했고, 남녀차별을 비인간적인 것으로 규정했으면서도 1920년대 도입되기 시작한 여성주의는 상당히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윤치호는 공산주의자이자 여성주의자였던 허정숙을 평하기를
'그(허헌)의 전처 소생(허정숙)은 그에게 골칫거리만 안겨주는 존재라는게 입증되었다'
...라고 비판하였다.

허정숙은 남편인 임원근(林元根)이 조선공산당사건으로 구속중이었을 때, 또다른 공산주의자인 송봉우(宋奉瑀)와 동거하는 등 자유분방한 남성 편력을 선보였을 뿐 아니라, 서대문형무소에 본인이 복역 중에 출산을 위해 한때 가출옥했다가 다시 투옥되어 많은 화제를 뿌렸다. 윤치호는 이를 질타하며 그가 허헌을 속썩이고 있다고 비토했다. 동시에 여성 해방을 주장하며 자유연애를 하는 여성들 역시 가정을 파괴하고 타락을 부추기는 존재라고 봤다. 그는 사회주의 만큼이나 페미니즘을 유해한 사상으로 간주하였다.

3. 사상적 배경

윤치호의 사상은 그가 일본 유학시기에 신학문을 배웠던 인물인 동시에 흑화된 제국주의자 후쿠자와 유키치, 그리고 김옥균에게도 영향을 주었던 아시아주의자이자 일본 극우파의 사상적 배경인 도야마 미츠루의 사상을 자기 나름대로 변형한 것이다. 그러나 안중근조차 천황숭배 논란과 동양평화론에 심취한 것을 보면 저 세대에겐 스스로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이룬 일본과 그 기준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조선은 하늘과 땅의 차이처럼 여겼던 것. 대표적으로 우민멸시, 일본에 대한 긍정적 모습, 인종주의 등을 그대로 보여준다[11].

또한 윤치호는 서구의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아 민주주의 체제에 동경을 가지고 있었고 유림들의 권위 의식을 비판했으나 정작 윤치호는 다른 독립운동가나 지식인, 학생들 중 자신의 사상에 동조하지 않거나 어긋나는 이들은 버르장머리가 없다고 비웃는 꼰대기질을 보이기도 했다.[12] 일기에서 윤치호는 자기 자신을 가장 이성적이고 현명한 조선인이라고 기준을 두고 만사를 평가했고 그의 가치관을 비판하는 이들은 어리석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정작 그가 비판한 '나약하고 어리석은 조선인' 관은 윤치호 본인의 행적에 빗대어 보면 윤치호 자신도 그 '나약하고 어리석은 조선인'에 불과했다.

또 윤치호는 과학기술을 배워 오고 기독교를 전도하는 것을 권장하기는 했으나 철학, 정치학, 경제학 같은 사회과학이나 인문학 쪽은 실용적이지도 않고 싸움만 일삼게 만드는 학문이라는 이유로 무시했다.

그의 일기에는 수많은 일제 시기 당시를 추측할 수 있는 여러 정황 자료가 남아있는데 특히 조선의 문제점을 사회 구조적인 문제 이전에 조선인의 게으름, 편협성, 배타성, 나약하고 어리석은 민족성을 먼저 개선하는 것이 급선무라 보았다. 이 점에서는 안창호와 거의 비슷한 시국관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모습은 서구의 철학과 사상, 행정을 도입하는 것을 등한시해 양무 운동에 실패했던 청나라의 모습이었다.

종교적으로는 원래는 유자였으나 청나라 망명 생활 중 개신교를 접해 개종한다. 그 또한 다른 동시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근대 문명의 상징으로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일부 개신교계에서는 '독실한 기독교인' 윤치호를 띄워주고 있는데, 사실 윤치호의 종교관은 개종했음에도 기독교 교리상 가장 중요시 여기는 사후 심판 등의 요소가 빠져 있는 상태라서 신앙심이 깊었다고는 하나 그가 제대로된 개신교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거나 이해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4. 모순과 비판

특히 윤치호는 자기 자신의 일기에서 조선인들의 구습과 어리석음, 이기심을 비난했지만 정작 그의 일기에는 그 자신이 묘사한 '조선인의 잘못된 인습에 기반한' 행위를 본인 스스로가 매우 당연하다는 듯 하고 있었고, 그것마저도 자신의 잘못을 성찰한다기 보다는 대의를 위해 와신상담하는 모습이라고 자기 자신을 포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는 마치 자식이 부모의 결점을 마구 욕하면서도 정작 자신도 어른이 되어 똑같은 짓을 반복하는 행태와 다를게 없다.

또한 자기 일기에서 히틀러를 마구 욕했다[13]. '손에 대는 것마다 지옥으로 변하게 하는 자'라면서 Hell Hitler[14]라는 별명을 지어서 욕하기도 했다. 1943년 아내 매려가 세상을 떠났을 때 쓴 일기에도 비슷한 투의 서술이 나온다. #

게다가 조선총독부가 조선 민중들이 쓰는 생필품의 생산과 유통을 강하게 통제하여 조선 민중한테 고통을 주는 현실을 두고 일기에서 '일본 천황이 이런 사실을 잘 몰라서 가만이 있는 것이며, 만약 안다면 기필코 이런 행위들을 두고 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우스꽝스러운 대목도 일기에 썼다.#

'약자는 강자한테 대들면 안 되며, 약자라고 해서 선량하다는 보장은 없다.'라면서 정작 미국 유학 시절에 약자인 자신이 강자인 백인들한테 인종차별을 당하자 마음 속에 백인들에 대한 원한을 품었다가 약소국인 일본이 강대국인 미국을 공격하자 이를 열렬히 찬양하며 날뛰었던 점도 영락없는 모순이다.[15] 윤치호의 말대로라면 윤치호 본인이 약자라고 해서 그가 선량하다는 보장은 없고, 강자인 백인들한테 결코 대들면 안 되었기 때문.#

[1] 이런 식으로 따지면 윤치호도 미국 백인들이 자기를 인종차별했다고 미워하는 것도 황당한데, 윤치호 본인은 영어를 능숙하게 사용했기 때문이다윤치호의 사상[2] 독립 운동가 간의 분열을 정확히 예측했다. #을 참고하자. 그런데 해당 기사 자료는 시기나 앞뒤 정황이 맞지가 않다. 이 사료는 1933년 10월 4일자 윤치호 일기에 있는 내용인데, 당시 안창호는 대전 형무소에 수감 중이었고, 여운형은 신문사 사장에 있을 때였다. 실제로 둘 다 윤치호에게 찾아가 상의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윤치호가 보는 '지역 감정' 부분은 맞는 얘기...[3] 미국도 결국 자신들과 이해관계가 틀어질 때에만 전쟁을 한 것일 뿐, 그 전까지 미일은 아주 긴밀한 밀월 관계였다.[4] 다만 일제의 정보 차단은 생각보다 그리 심하지 않아서, 미군이 히로시마에 원폭을 떨어뜨린 일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적, 비인도의 광폭(狂爆)"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었다링크[5] 여운형, 송진우, 임영신 등의 국내 독립파 인사들은 몰래 이승만의 단파 방송을 청취함으로서 바깥 세상에 대한 정보의 유입이 되어서 일제가 패망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6] 지정학적으로도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a] 유영렬,《개화기의 윤치호 연구》, 한길사, 1985, p.258[a] [a] [a] [11] 한 예로 후쿠자와 유키치는 가난한 집안의 학생한테는 교육을 시켜봐야 소용이 없으며 가난한 자들이 지혜를 갖게 되면 국가를 상대로 자기들의 처우 개선을 해달라고 시위를 하여 사회가 시끄러워진다고 우려하여 우민멸시의 사고관을 보여주었다. 또한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인과 중국인을 거지와 천민이라고 혐오하였으며, 인도인과 영국인 모두를 일본의 노예로 삼고 싶다는 글을 남겨 인종주의와 제국주의까지 긍정했다.[12] 그러나 이런 모순과 위선은 다른 독립운동가나 지식인들에게도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없다.[13] 이는 히틀러가 국민 투표로 당선된 자였기 때문인데, 윤치호는 대중들을 어리석고 미개한 집단이라고 극도로 혐오하던 성향을 지녔기에 히틀러를 자연히 혐오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으로 치자면 윤치호의 시각에 히틀러는 대중영합적인 포퓰리스트 정도로 비추어졌을 것이다.[14] 하일 히틀러(Heil Hitler)에서 철자 하나만 바꿨다. i랑 l이랑 매우 흡사하게 생겨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15] 단, 일제의 전쟁 선전에 의해 객관적인 힘의 분석을 제대로 못했을 경우라면 달라진다. 하지만 윤치호 본인이 미국에 대해 전혀 몰랐던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윤치호는 미국에 직접 유학까지 다녀오고 영어를 능숙하게 할 만큼 미국 문화에 대해서 잘 알았다. 게다가 한국인들의 선입견과는 달리 일제 시대에 조선총독부 당국은 2차 대전에 관련한 정보 통제를 그리 심하게 하지 않았고, 히틀러가 자살하고 독일이 연합국에 항복했으며 일본 본토에 미군이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는 사실까지 그대로 식민지 조선에서 발행된 신문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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