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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23:38:21

유신론적 진화론

유신진화론에서 넘어옴
1. 개요2. 여러 변형
2.1. 초자연적 창조 이후 자연적 진화2.2. 옴팔로스 가설2.3. 상대성 이론
3. 반창조과학적 입장4. 단순한 개인적 고민인가?5. 명칭에 대한 비판6. 현황
6.1. 한국 개신교의 유신론적 진화론
7. 오해
7.1. 창조과학이 원류?7.2. 성경무오무류설?7.3. 완전 축자영감설?
8. 유신론적 진화론에 대한 반발
8.1. 무신론적 관점8.2. 그리스도교적 관점8.3. 과학적 관점8.4. 유신론적 진화론 측의 반론
9. 관련 인물
9.1. 과학자들9.2. 철학자 및 신학자들
10. 관련 문서

1. 개요

, theistic evolution
2014년 영화 노아에 나오는 천지창조 장면이다.[1]

유신진화론이라고도 한다. 이는 신학적 개념으로서 과학적 관점이 아니라 종교적 관점에 해당하며 그 출처는 학계가 아니라 기독교에 있다. 진화론이라는 이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진화적 유신론, 진화적 창조론(Evolutionary Creationism)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창조론 계열 중 과학과 충돌하지 않는 신학적 프레임이며 진화와 같은 명백한 사실을 수용함으로써 많은 기독교 과학자에게 지지받는다. 창조론과 진화론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다. 이에 유신론적 진화론은 신이 우주를 창조할 때 자연계에 진화 능력을 부여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다양한 생명체가 생겨날 수 있었다고 설파한다.

진화론이 과학적 사실임을 인정함과 동시에 유신론적 관점을 유지하려는 창조론의 한 종류이며 신학의 흐름 중 하나. 유신론적 진화론도 엄연히 '창조론' 가운데 하나다. 다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유사과학적 의미의 창조론인 '진화를 배제한 창조론'과는 전혀 다르다. 나무위키의 다른 문서들에서 창조론이라고 하면 거의 언제나 유사과학적 의미의 창조론을 의미한다. 이 문서에서도 '창조론'이라고 적힌 것은 대부분 '진화론을 완전히 배제한 창조론'을 일컫는다.

교계에서 진화 자체를 부정하는 학자들은 창세기의 6일창조를 문자적으로 초자연적 창조로 간주하지만 유신론적 진화론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6일을 시대별로 해석하기도 한다. 유신론적 진화론은 창세기의 천지창조 내러티브를 비유적으로 해석하며 하나님이 진화를 통해 인류를 창조했다고 보는 것이다.

주로 기독교에서 다뤄지는 경우가 많으며 유대교이슬람에서도 간혹 토론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중세 시대부터 유신론적 진화론과 비슷한 주장을 한 신학자들 및 철학자들이 있었다. 아브라함 계열이 아닌 종교에서는 종교와 과학 사이의 관계에 대해 아직 깊은 논의가 부족한 상황이다. 유신론적 진화론은 근래에 들어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주장으로, 과학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겠다는 발상과 다르고, 진화론과 종교가 충돌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다는 신학적 관점이다.

여기서 '공존'을 '양립'이라고 표현할 경우 상호분리론 이라 불리며, 무신론 진영에서는 호교론(護敎論)적 관점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유신론적 진화론도 여러 관점이 있으므로 딱 잘라 말하기 어렵지만 다수의 유신론적 진화론자의 말로 판단하면 상당히 정확한 평가다.

한편 여기서 '공존'을 '조화'라는 단어로 표현할 경우에는 과학과 종교가 근본적으로는 서로 같다는 동역적 관점을 표방함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종교와 과학이 모두 미지의 영역을 알려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다만 비판적인 사람들에게는 과학의 입장이 고려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 지적받는다.

나무위키에 한하여 임의로 다시 새롭게 분류할 경우 절대자의 창조를 인정하면서 그와 동시에 점진적 진화를 받아들이는 입장을 소위 진화적 창조론 또는 창조적 진화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 반면, 아예 종교의 창조교리에 대하여 문자적 해석을 지양하는 방향에서 '진화 메커니즘 역시 절대자의 섭리 중 하나' 라는 관점을 취하는 입장이 가장 정통적이다.

결국 본문에서 다루는 유신론적 진화론의 개념정의 역시 나무위키가 임의로 분류한 것이다. 그래서 타 매체와 어휘 정의가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는 '유신론적 진화론'이 아닌 '유신진화론'으로 표현한다. 또한, 아래에서 보듯 나무위키는 '유신론적 진화론'과 '진화적 창조론'을 다른 것으로 구분한다. 반면 한국어 위키백과는 진화적 창조론을 '보수주의적 기독교인의 반감을 고려하여 돌려말한 표현'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당연히 나무위키의 '진화론적 창조론'과 위키백과의 '진화론적 창조론'은 그 내용이 다르다.

유신론적 진화론은 초기에는 단순히 생물학적 주제에만 국한된 논의를 하였으나, 점차 현대과학이 발전하면서 그 논의는 과학의 발전이 종교를 소멸시킬 것이라는 비종교주의의 논리에 반대하는 방향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즉, 과학을 익힌 이성적인 현대인에게 종교 교리가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지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추세.

국내에 소개된 관련 도서들로서, 《신의 언어》, 《다윈주의자가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가》, 《신과 진화에 관한 101가지 질문》, 《쿼크, 카오스, 그리고 기독교》,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종교 전쟁》, 《진화는 어떻게 내 생각을 바꾸었나》 등이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창조와 진화론이 대립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고, 인간이 진화하면서 사명을 완수하도록 하셨다', '진화 역시 하느님이 예상하신 일'이라고 말하며 유신론적 진화론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천주교에서는 개개의 모든 성경 구절을 문자 그대로의 실제 역사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부 강경한 전통주의자들을 제외하면 진화론을 대체로 배척하지 않는다. 반면 개신교교파마다, 목사마다 입장이 다르다.

2. 여러 변형

'진화 메커니즘 역시 절대자의 섭리 중 하나'라는 골자는 유지하되, 대진화를 받아들이느냐, 혹은 성경상의 지구 나이를 믿느냐에 따라 다음과 같은 변형도 존재한다.

2.1. 초자연적 창조 이후 자연적 진화

성경의 내용에 진화론을 도입한 주장이다. 본문에서 다루는 유신론적 진화론과 어느 정도 공통점이 있지만, 종교와 과학 중 어디에 더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구분된다. 비록 곳곳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진화적 창조론을 표방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그 영향력이 없다고 보기 어렵다.

진화적 창조론은 6천년 전에 초자연적인 창조가 있었고, 그 이후로 현대 진화론이 밝힌 사실에 위배되지 않는 자연적 진화가 이루어져 왔다고 본다. 여기서는 성경의 구절 중 "그 종류대로"라는 부분에 집중하고 있다. 소진화는 인정해도 대진화는 인정할 수 없다는 이야기.

2.2. 옴팔로스 가설

창조설의 한 분파인 옴팔로스 가설(Omphalos hypothesis)[2], 내지는 성숙 창조론에 따르면 세상은 A급의 브랜드-뉴 상태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나름의 역사를 지니고 오래된 상태로 창조되었다. 창조 당시부터 그랜드 캐니언이 있었고, 광자가 우주 공간을 가로지르고 있었으며, 전 지구상에 지층과 공룡 화석이 분포했고, 지구의 나이는 45억년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모든 주장은 반증이 불가능하다. 무엇보다도 여기서부터 이미 하나님의 모습과 크게 어긋난다.

이에 따라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 그리고 그 세계에 대한 모든 개인적 경험과 과학적 지식이 바로 얼마 전에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냐는 철학적 소급도 가능하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지난 주 목요일 가설(Last Thursday hypothesis)이라고 한다. 반증도 입증도 불가능한 특성이 위의 옴팔로스 가설보다 더 잘 드러나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버트런드 러셀은 《The Analysis of Mind》에서 철학적 회의주의를 소개할 때 더욱 극단적인 사례인 5분 가설(Five-Minute hypothesis)로 설명하기도 했다. 다만, 러셀은 우리가 지각하고 사고하는 모든 것이 환상이나 강요된 것에 불과할 가능성도 있고, 철학적으로 모순도 없다고 밝힌 바 있다.

2.3. 상대성 이론

MIT의 Walter HG Lewin 교수는 지구의 나이는 45억년인 데 반해 성경에서 지구는 6일만에 만들어졌으므로, 이를 통해 하나님이 은하 중심의 거대 블랙홀에서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를 측정하기도 했다.

3.창조과학적 입장

앞서 소개했듯 유신론적 진화론은 기본적으로 창조설지적설계에 비판적이다. 다른 무신론적 배경의 진화론자와 달리, 그들에게는 과학적이고 합당한 이유 외에도 그들의 신앙적 신념과 양심에 관련된 동기가 존재한다. 그들이 믿는 신은 그런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유신론적 진화론은 "박쥐처럼 이쪽 저쪽 양다리 걸치고 모두를 만족시키려 한다"라고 비판받곤 한다. 특히 창조설 측은 "하느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유신론적 진화론도 이러한 행태에 반대한다. 그들은 하느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창조론의 유사과학성을 끊임없이 고발하며, 동일한 판단에 따라 과학에 입각한 무신론자들의 종용에도 신앙을 버리지 않고자 한다. 즉, 같은 신앙적 동기에 의해서 한쪽은 창조론, 한쪽은 유신론적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상황이라는 것.

이 맥락에서 유신론적 진화론의 한계가 노출되었다는 의견이 있다. 교리적으로 유신론적 진화론이 근본주의적 관점보다 옳다고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우리 쪽 의견이 진짜 신의 뜻'이라는 이야기는 창조설 측도 똑같이 할 수 있다. 결국 어느 쪽도 '신의 뜻'이 무엇인지 확증할 수 없으니, 자기 의견이 옳다고 끝없이 대립할 수밖에 없다. 또한, 여기서 유신론적 진화론을 채택하는 것은 결국 신학이 과학에게 의존해야만 발전 가능하다는 것을 함의할 수도 있다. 성경이 기본적으로 수천년 전의 텍스트이므로 그 사회문화적 맥락을 고려하여 그 역할을 한정하려는 취지를 강조한다면, 이 부분은 신학적으로 큰 문제거리는 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신학계에서 따로 논의할 만한 흥미로운 떡밥인데, 유신론적 진화론을 좁게 이해하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창조 기사를 현대 진화론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게 더 바람직하다고 주장하면 창조설에 비해 신학적으로 우월한 학설이라는 인식을 얻기 어렵다. 그런데 유신론적 진화론을 소극적으로 해석해서 "진화론은 성경의 내용과 모순되지 않는 것으로 보이며 문자적 창조론에 의해 거부될 수 없다"는 결론만 이끌어내면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소극적으로 주장하는 건 현실적으로 의미가 없으니 문제. 결과적으로 창조라는 주제에 대해 방대한 스펙트럼의 학설의 난립을 허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4. 단순한 개인적 고민인가?

한편, 유신론적 진화론을 개인의 고민해소 차원으로 여기는 시각도 있다. 이들의 관점에서 신앙과 종교의 "문제"란 근본적으로 신앙과 종교를 가지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동성애자의 경우 본인의 교리와 성 정체성 사이의 괴리를 체험하고 "문제 의식"을 품게 될 것이다. 이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은 할 것이다. 종교를 버리거나 심하게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해결책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진지한 고민은 무종교인과 불신자에게 그저 "불필요한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더불어 종교의 교리가 현대 사회의 도덕과 규율에 불합치하는 경우도 생겼기 때문에 이러한 고민이 특별한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결국 유신론적 진화론을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이는 종교에서 말하는 진리 탐구가 아니라 개인적인 고민 해소의 차원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신학이 시대의 질문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씨름했다면, 유신론적 진화론은 나름대로 시대적 상황에 적응하려는 고민이다. 물론 타종교와 무신론자 측에서는 불필요한 시도일 것이다. 역으로, 그럼 기독교에서 유신론적 진화론을 고민하지 말아야 될 이유는 뭔데?라는 의문도 생겨날 수 있다. 유신론적 진화론자의 절대다수가 종교인이라고 볼 때, 유신론적 진화론은 종교와 같은 문제점을 공유한다. 다시 말해 유신론적 진화론을 고민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유신론적 진화론을 사실로 믿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다른 학문의 개념과 이론을 수용해서 신에 대한 개념이나 종교성을 더 풍부하게 만들기도 했다.

5. 명칭에 대한 비판

진화생물학 문서에서 설명하듯 진화론은 과학계 내부에서 논쟁[3]이 끝난 과학적 사실[4]이다. 종교가 있는 과학자는 대부분 유신론적 진화론자다. 생물학자의 절대다수가 진화론자다. 생물학자를 가리켜 진화론자로 일컫는 것은 물리학자를 상대성론자라고 칭하는 것과 비슷하다.

진화론은 상대성 이론양자역학처럼 세상을 설명하는 수많은 이론 중 하나인데 유독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냐는 말이다. '유신론적 지구 구형론'으로 뉘앙스를 짐작할 수 있다. 저기다 '-론자'를 붙이면 더욱 어색해진다.

호남신학대학교 신학자인 신재식 교수는 '유신론적 진화론'이라는 용어보다는 '진화론적 유신론'이라는 용어가 더 적합하다고 지적하였다. 진화론에 유신론을 갖다 붙인 게 아니라 신이 있다는 주장을 그대로 유지하며 진화론을 갖다 붙인 것이기 때문. 실제로도 진화론적 유신론 또는 진화론적 창조론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하며 이를 표방하는 사람들도 많다. 국제적으로 이 분야에서는 캘빈 컬리지의 하워드 밴 틸 천문학 교수가 유명한데, 이 사람은 "신의 능력으로 충만한 창조론"이라는 표현을 쓸 것을 제안하고 있다.

한편으로, 명칭이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편향적이라는 비판이 있다. 즉, 명칭이 서구중심주의적이며 마치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가 유신론 전체를 대표하는 것마냥 왜곡한다는 것. 힌두교는 명백한 유신론이지만, 생명의 기원이 별로 중요하지 않아 진화론을 반대하지 않는다. 유신론적 진화론에서 주장하듯 유신론과 진화론이 딱히 대립하는 것도 아니다. 해당 주장대로 신이 모든 생물의 공통 조상을 창조했다고 하면 될 문제다. 게다가 신이 생명체를 창조했다고 봐야 하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는 그 신이 창조주라는 보장도 없다. 일부 이신론 분파처럼 신은 세상만 창조했고 생명체는 자연발생했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으며, 대부분의 다신론 신화의 창조신을 제외한 대부분의 신처럼 창조 능력이 없는 신이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교리 탓에 굳이 이런 명칭이 만들어져야 할 필요가 있냐는 주장이다.

이런 문제는 기독교, 한국 한정으로 특히 개신교가 유신론을 과잉 대표하기 때문에 일어난 문제로 보인다. 흔히 인터넷에 보이는, 혹은 책에서 보이는 유신론 권유는 대다수가 기독교 전도로 이어지며, 그렇지 않은 유신론은 보기 힘들다. 진화론이 유신론을 위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대다수도 기독교 신도이며, 유신론자=종교인이라는 편견도 만연하다. 만약 창조능력이 없는 신이 주신인 다신교나 유일신교를 믿으면서 유신론자를 자칭하는 사람이 '유신론적 진화론'이라는 명칭을 들으면 어이없을 것이다.

6. 현황

미국의 경우 2014년 조사 결과 유신론적 진화론을 지지하는 비율이 일반인은 24%, 현역 과학자는 7% 정도로 나온다. 비율이 낮다고 느낄 수 있으나, 미국은 종교인이 대다수임에도 자연 선택에 따른 진화에 응답한 인원 수가 매우 많았으며 과학자도 그런 경향을 띄기에 섣불리 단정짓기는 무리다. 과학자 중 유신론자의 비율은 생각보다 낮다. 저 정도로 나오는 것만 해도 높게 나온 수치다. #

6.1. 한국 개신교의 유신론적 진화론

의외로 역사가 깊다.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평양신학교에서 강의하던 선교사 어드먼(W.C.Erdman; 어도만)과 레이놀즈(W.D.Raynolds; 이눌서)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 중 어드먼이 평양신학교 신학논문집 《신학지남》에서 유신론적 진화론을 소개한 것이 무려 1920년의 일. 어드먼은 북장로교 출신 선교사로서 구약신학을 공부했고,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깊은 관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한편, 당시 신학 권위자였던 박형룡 역시 초기에는 유신론적 진화론에 상당히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어차피 위에서 보았듯이 그쪽 학파에서조차 워필드, 메이천 등이 성경의 계시와 과학의 발견이 조화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못박아 놓은 상황이었기 때문.

문제는, 창조론자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인물인 맥레디 프라이스의 저작물을 접하게 된 것이다. 프라이스는 헨리 모리스와 함께 1세대 창조론자로 자주 거론된다. 그는 노아의 홍수를 과학적으로 밝히겠다고 "홍수지질학"이라는 유사과학 분과를 만들기도 했다. 프라이스의 저작을 접하면서 박형룡이 점차 반진화론 입장으로 기울어졌다.

그 후 한국창조과학회가 창설되고 창세기의 창조 기사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자 내부적으로 교통정리가 이루어졌고, 한국의 유신론적 진화론은 씨가 말랐다. 심지어는 "처절한 영적 전쟁을 치르는 말세의 교회에 양의 탈을 쓴 이리가 들어왔다", "세상과 타협한 유신진화론의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된다" 는 등의 비난을 받았다. 격렬한 논쟁도 의외로 거의 없었다. 가능성이 타진되지 못해서 사람들이 생각을 못 했을 뿐.

그러나 최근 10년 사이에 다시 신학교, 신학계에서는 유신론적 진화론이 널리 수용되기 시작했다.

7. 오해

7.1. 창조과학이 원류?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교파만이 정통 교단이라는 이야기.

그리스도교는 밀라노 칙령을 통해서 공인되기 한참 이전인 2세기에 이미 오리게네스가 알레고리 해석법을 성경에 도입했다. 물론 오리게네스는 관할 주교의 허락 없이 다른 주교에게 서품을 받은 문제 때문에 당시에는 영 좋지 않은 대우를 받았지만, 그의 후계자라 할 수 있는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알레고리적 성경 해석법을 발전시켰고, 교부 시대의 가장 명성있는 학파 중 하나로 이름을 날렸다. 물론 이런 관점은 교부 신학을 계승한 스콜라 신학에도 이어졌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 1권 1문제 9절 및 10절에서 다음과 같이 논증했다. 첫째, 성경은 은유적, 상징적 화법을 쓰고 있다. 둘째, 성경은 한 구절안에서 문자적, 알레고리적, 도덕적, 전의적, 신비적 의미 등을 동시에 내포할 수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진화론을 포용하고 창조설을 거부하는 사람은 현대주의자고, 사후 지옥 불구덩이에 떨어진다"는 이상한 결론이 나온다. 다만 과거에는 실제로 문자주의적인 관점이 지금보다 더 주류이기도 했고, 현재에도 신학계를 벗어나서 현실을 보면 이쪽 관점을 받아들이는 교파가 상당히 많기는 하다.

교회에 한 번이라도 가 본 사람은 알겠지만, 우선 지옥에 가는 사람들이라 하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죽을때까지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이지 특정 과학이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근본주의 교파들의 신자들은 특정 과학이론과 상반되는 내용이 신의 가르침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쪽 신자들 역시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다만 무엇을 믿을 것인가에서 차이가 날 뿐.

예수천국 불신지옥에서 예수천국만큼은 기성 교단의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이러한 주장이 이단적인 주장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다. 미국의 어떤 창조론 지지단체에서 만든 과학 교과서에 정말로 그런 글귀가 인쇄되어 있었던 것.

7.2. 성경무오무류설?

유신론적 진화론 수용은 곧 성경에 오류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관점.

자유주의 신학을 중심으로 실제로 이와 같은 주장이 많이 있어 왔다. 그들은 제한적 무오설과 같은 주장을 통해서 과학적, 역사적 사실과 관련된 성경의 내용에 한해서는 유오하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결국 성경은 부분적으로 여기저기 흠결이 많기 때문에 읽는 사람의 합리적 판단에 따라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신론적 진화론이 제한적 무오설의 전매특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특히 1977년 시카고 성경무오 성명서의 제12조에서 "과학적 진술들이 성경의 무오함을 전복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부인한다"고 아예 못박아 놓았다. 여기서 더 나아가 제13조에서는 자연 만물을 보이는 그대로 고대인의 시각에서 서술했다는 것이 성경의 무오함을 훼손하지 않는다고 밝혀 두었다.

7.3. 완전 축자영감설?

유신론적 진화론은 성경의 완전한 영감을 부인하는 주장이라는 말.

그러나 창세기는 오늘날 21 세기를 살아가는 개신교인들에게도, 오늘날의 교회 공동체에도 '신의 음성을 정확히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 곧 유신론적 진화론이다. 유신론적 진화론은 성경의 완전 축자적인 권위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들이 부정하는 것은 창세기에 대한 독단적인 해석 요구이다. 그들은 오히려 성경을 그런 방식으로 거칠게 해석하는 것이 그것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성경은 창조설이 성경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고결하고 가치로우며 높은 권위를 지닌 신의 말씀 그 자체이다. 유신론적 진화론은 창세기를 과학으로 편입하려는 모든 시도에 대해서 '신의 언어'를 인간의 설명으로 어설프게 왜곡하는 행태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점은 반박받을 수 있는 것이, 유신론적 진화론자 자신도 성경을 인간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으면서 정작 그 인간의 해석신의 권위를 똑같이 부여하는 모순을 범하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영은 "성경이 과학 교과서는 아니지만, 성경이 과학적 사실을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 한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그 전에 인간이 성경의 텍스트 속에서 과학적 사실과 그렇지 않은 다른 비유적 표현을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을 갖고 있는지 살펴볼 일이다. 유신론적 진화론은 "바로 이 구절이야말로 진정한 과학적 사실입니다!" 라고 외치는 목소리에 반대하는 신학적 노선이다. 다시 말해 성경 속의 과학적 사실들을 과학자들이 밝혀낼 때까지 기다리자는 주장.

8. 유신론적 진화론에 대한 반발

들어가기 전에, 반발이 있다고 무조건 틀린 이론이라는 말이 아니다. 또한 해당 학계가 전부 유신론적 진화론을 부정한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각 관점에서 어떤 면에서 반발이 나오는지를 서술할 뿐이다.

8.1. 무신론적 관점

가장 큰 문제는 유신론적 진화론은 신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 신이 있다는 사실은 입증되지 않았다. 즉, 신이 있다는 사실을 먼저 입증해야 한다는 이야기. 또한 신의 존재를 그렇게까지 애써가며 굳이 가정해야할 이유가 있는가 하는 점도 주요 비판점이다. 한 술 더 떠서 신을 우회적으로 과학 이론에 도입하려 든다고 비난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에겐 부당한 비판이다. 유신론적 진화론은 진화생물학과 특정 종교의 교리 혹은 유신론이 양립 가능하다는 주장이지 과학임을 자처하는 주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첫째로 노벨상을 수상한 물리학자 스티븐 와인버그(S.Weinberg)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에 대하여 "요정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수준"이라고 평가했으며, 또 다른 무신론자인 프랜시스 크루스(F.Crews)는 유신론적 진화론을 두고 "이들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신의 자리를 마련해 주는가이다"라고 비판한 적이 있다. 둘째로는 "과학으로써 신의 존재를 입증하려는 시도"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철학적 논의들과 같이 실제 존재한다는 식으로 주장하기 어려워 진다는 비판이다.

이것을 비판하려면 종교 자체를 따지고 들어야 한다고 하는데, 이거 비판하는 사람들 중엔 종교 자체, 좀 더 정확히는 유신론 자체를 문제 삼는 사람도 있다. 또한 이런식의 합리화는 다른 국가나 민족들에 대한 창세신화 역시 동일한 수준에서 취급할 수 있다는 정당성이 부여된다는 문제도 있다. 다른 종교 역시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스스로의 창조교리를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혹 유신론적 진화론이 틈새의 신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다. 신이 자연적인 과정을 통해 개입해선 안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니 딱히 신의 자리를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 유신론적 진화론이라는 이야긴데, 사실 앞뒤가 안맞는 이야기다. 굳이 신의 자리를 만들 필요가 없다면 유신론적 진화론을 주장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진화론에 굳이 필요도 없는 신의 개입을 얹으려는 것이 바로 전형적인 틈새의 신 논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체는 아니지만 상당수의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다른 건 양보해도 생명의 기원만은 반드시 신의 개입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은 틈새의 신 논리에 더더욱 민감하다.

또한 스스로 절대적인 진리를 자처하는 종교에서 과학의 발전에 발맞춰 주장이 바뀌는 것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에 대해 신의 행동이 변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철학적 해석이 바뀌었을 뿐이며, 이는 모든 학문에서 공통된 내용이라는 반론도 나온다.

그러나 이 반론에는 헛점이 많을 수밖에 없다. 첫째로 종교는 일반적인 학문과는 크나큰 차이가 있으니, 학문에서는 근거와 증명을 통해 주장을 한다. 물론 학문에서도 인문학이나 예술처럼 그런 쪽과 거리가 있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종교와는 달리 그런 학문에서는 어떤 사실을 믿으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종교에서는 증명할 수 없는 것을 믿으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즉 학문에서 후대에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면 내용이 변경되는 것이 당연한 이유는, 애초에 자신들의 주장이 절대적인 사실이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종교에서 실질적으로 믿음의 대상이 되는 교리가 인간의 철학적 해석일 뿐이라면, 그것을 적절한 근거나 증명없이 믿으라는 건 말이 안된다. 만약 유신론적 진화론측에서 인간의 해석이 바뀌는 것이 당연하다 여긴다면, 애초에 교리에 대한 믿음 역시 그렇게 신앙의 영역이 되어선 안된다는 것이다. 믿으라고 할 때는 신의 뜻이라면서, 곤란할 때는 사실그건 인간의 해석이라고 한발 물러선다면, 설득력이 없다. 다시 말해 특정 교리가 인간의 해석일 뿐이라면, 신이 존재한다는 등의 가장 중요한 교리조차 인간들의 해석에 불과하다고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8.2. 그리스도교적 관점

가장 강력한 비판 중 하나로서, 개신교 조직신학자 벌코프가 제기한 문제가 있다. 즉 진화론과 기독교 교리 중의 원죄론이 서로 조화되지 않는다는 것. 이런 입장은 영국의 설교자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가 자신의 저서와 교리강론을 통해서 널리 보급하였다. 진화론에 의하면 인간은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종이 아니다. 호미니드는 매우 점진적으로 조금씩 진화해 왔으며, 이 진화의 흐름에서 "과연 어디서부터 인간이라고 말해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것이 난제가 될 수밖에 없다.

특히 아담하와의 정체를 밝히는 것 역시 매우 어렵고, 벌코프가 지적했듯이 인간의 타고난 죄성이 과연 이 진화의 흐름 속에서 언제 생겼는지에 대한 그럴싸한 신학적 설명이 없다. 이에 대해서는 아담과 하와는 신이 선택한 최초의 신앙인이어서 최초의 인류로 묘사한 것이고, 아담과 하와 이전에도 원시인류가 있었으나 신과 상관없는 짐승과 같은 존재라고 해석하는 의견도 있기는 하다. 일부 신자들이 개인적으로 추측하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비종교적인 입장에서는 진화론적 전제하에 인간이 유인원에서 진화하여 어느 시점에 이제부터 인간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최초의 인간은 아마도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에서 비롯된 서양 사상이 전제하는 개인이라기보다 공동체적인 존재에 더 가까울 것이고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그러한 복잡하게 조직화되기 시작한 사회가 타락하기 시작한 모습을 상징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유신론적 진화론을 수용하는 사람들 중에 이신론에 경도된 사람이 많다는 것 또한 지적받을 부분이다. 물론 유신론적 진화론이 곧 이신론은 아니다. 그러나 신이 진화라는 메커니즘을 통해 세상을 창조해 유지하고 있다는 발상이 이신론과도 묘하게 연결된다. 따라서 "그렇게 혼자 팔짱이나 끼고 관전하는 신을 우리가 왜 경배해야 하는가"라는 추가적인 의문이 따라오게 된다. 이에 대해 신재식은 "창조 섭리 중 하나인 지속적 창조의 개념이 바로 진화 메커니즘"이라는 방식으로 부연한다. 창조를 현재진행형의 사건으로 이해하자는 것.

반면 창조설을 주장하는 자들이 이신론자라는 반박도 있다. 창조설은 과학을 통해서 창세기의 기록이 문자적으로 옳음을 입증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유신론적 진화론이 진화론을 바탕으로 성경을 입증하려고 하지는 않는 것과 비교하면, 오히려 신앙의 기반을 과학에서 찾는다는 점에선 창조과학이 이신론과 핵심 사상을 공유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을 수용한 과정신학적인 입장에서는 오히려 범재신론적인 입장을 취하면 자연스럽게 해결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전통적인 기독교 입장에서의 인간 및 피조세계와 구별되는 초월적인 존재로서의 신이나 한번 창조해놓고 내비두는 이신론적인 신과는 다르게 세계 안에 뛰어들어 함께하는 신이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이 경우 전지전능이나 악의 문제를 변명하기 힘들어진다.

마지막으로 이런 식으로 신학적 견해가 수정되면서 일어나는 신자들의 반발이다. 대대로 있던 교부, 성직자, 신학자들의 해석과 너무 많이 달라진 것을 신자들이 수용하기 힘들다. 물론 과학에 대해서 그리스도교가 본질적으로 무조건 적대적인 입장인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전통적으로 자연에 대한 이해는 창조주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된다고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중세 가톨릭 교회는 자연철학의 가장 큰 간섭세력이었다. 당시에 사회 전체가 기독교를 의심할 나위 없는 진리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에서 생각하면 자연에 대해 알면 알수록 기독교적 진리를 드러나게 할 테니 거부감을 가질 이유가 없다. 근세에 과학이 급격히 발전하면서 기존의 기독교적 세계관과 충돌이 생기면서 거부감이 심해진 것이다. 사실 창조과학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들에게서도 이런 경향은 나타난다. 과학이 기독교적 진리를 지지한다 믿기 때문에 과학에 우호적인 창조설 지지자들도 있다.

개신교도 중에서도 마이클 패러데이 등의 과학자들이 배출되었다. 또한 가톨릭은 아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 36에서 "모든 분야의 방법론적 탐구가 참으로 과학적인 방법으로 도덕 규범에 따라 이루어진다면 결코 신앙과 참으로 대립할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신앙과 과학을 서로 배치되는 것으로 여기도록 만들었던 정신 자세를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선언하기까지 하였다. 참고로 이와 같이 세계 공의회를 통하여 신앙과 도덕에 대하여 가르칠 때는 무류성이 성립한다. 즉 가톨릭 신자가 이 가르침에 반발 시, 즉시 이단이 된다. 그리고 애초에 무엇보다도, 가톨릭은 교리적 차원에서 진화론에 반대한 적이 없고 다만 개개인이 진화론을 비판한 과거가 있을 뿐이다. 이는 개신교의 많은 종파들도 해당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원칙적 차원의 이야기이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사목자 혹은 신학자의 가르침'과 '교리'를 구분하지 않으며, 더욱이 많은 사목자들은 오랜 시간동안 진화론에 강한 거부감을 보여왔다. 따라서 일반 신자의 입장에서는 '지적설계'와 '유신론적 진화론'은 대격변급의 상전벽해가 아닐 수 없다. 그나마 전체 그리스도교의 최대 종파인 가톨릭이 '진화는 창조와 모순되지는 않는다'고 인증함으로서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가톨릭 평신도, 성직자, 수도자 중에서 진화론에 비판적인 사람을 지금 이 순간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된다.

더군다나 적지 않은 사목자들이 여기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기보다는, 그냥 간단하게 언급하고 넘어가는 문제점도 있고. 물론 사목자 입장에서도 좀 난감한게, 진화론이 신앙이랑 모순이 없다는 관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알레고리적 해석에 대하여 말하는 등, 많은 설명이 따라붙는다. 이런 설명을 할머니, 할아버지, 아줌마, 아저씨들을 모시고 상세히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그걸 신자가 받아들이는건 또 별개라서, 복잡하게 생각하느니 그냥 간단히 창조설 비스무리하게 생각하고 끝내기도 한다.

이는 창조설과 비교할 때 불리한 점이다. 일반 신자들 입장에서는 과학으로 확실히 증명된 창조설과 확실히 증명된 것도 없이 복잡한 이야기나 늘어놓는 유신론적 진화론 사이에서 양자택일 하는 셈이니 말이다. 배경지식이 충분하지 못한 일반인 입장에서 창조설을 지지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태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상기 서술한 내용 외에도 여러 방향에서의 비판이 가능하며, 이와 같은 난점들은 유신론적 진화론이 그리스도교계 내부에 정상적으로 안착되는 데 최대의 장애물이 되고 있다. 다만 성직자, 신학자, 그리고 평신도들이 과학적 연구결과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대하여 건설적인 토론을 시작한다면 이 문제도 언젠가는 해결될 수 있을지도 모르며, 확실한 점은 이것이 진화론에 대한 무조건적인 혐오를 보였던 과거와 비교할 때 매우 큰 진보라는 것이다. 또한 어느 정도 전통 신학적인 관점과는 서로 맞지 않는 부분들이 있어서 전통 신학에 대한 과감한 재해석이 필요한 측면도 있다.

그 외에도 주로 창조설자들 중심으로 진화론은 필연적으로 무신론을 지지하며 유신론적 진화론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들은 무신론자들과 진화론에 대한 견해가 동일하다. 다만 그러므로 기독교는 거짓이다라고 주장하면 무신론자고, 그러므로 진화론은 거짓이다라고 주장하면 창조설자가 된다.

8.3. 과학적 관점

위에서 말했듯이 과학은 철저하게 반증가능한(falsifiable) 것만을 그 대상으로 한다. 예를 들어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주장(천동설)은 그 주장하는 바가 명백하므로, 그러한 주장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사례를 찾아낸다면 반증이 가능하다. 그리고 실제 그러한 반증을 통해 천동설은 무너졌다. 또한 '생물은 진화한다'는 주장 역시도 그 주장하는 바가 명백하므로 반증을 시도할 수 있다. 그리고 진화론은 이러한 반증시도들을 오늘날까지도 모조리 물리치고 있으므로 좋은 이론으로 평가된다. 즉 과학은 반증가능한 것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다. 반면에 그리스도교 신학은 '반증할 수도, 반증할 방법도 없는 신'을 전제로 한다. 쉽게 말해서, 신학 자체가 반증이 불가능한 영역인데 과학은 반증 가능한 것만을 대상으로 하므로, 유신론적 진화론에 대해서 과학측이 지지를 한다거나 지원을 한다는 사태는 일어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괜히 현 과학계에서 불가지론이 대세인 게 아니다.

8.4. 유신론적 진화론 측의 반론

신의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야말로 틈새의 신에 해당한다. 신이 자연적인 과정을 통해서 이 세상에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법은 없다. 신은 자연적인 과정을 통해 개입할 수도 있고, 초자연적인 과정을 통해 개입할 수도 있다. 즉, 신이 진화 과정에 자연적 방식으로 개입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신의 자리를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게 유신론적 진화론의 입장이다. 애초에 신의 존재와 개입이 과학으로 증명이나 반증을 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면, 신학 이론이 아니라 과학 이론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유신진화론이 과학 이론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철학적 해석을 세운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기반으로 삼은 과학 이론이 잘못된 것은 물론 아니다. 만약 지적설계처럼 잘못된 과학 이론 위에 성립된 신학 이론이라면 과학으로 반박할 수 있다. 그러나 유신진화론은 종교적 신념으로 과학 이론의 사실 유무를 재단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신학 이론이다. 다시 말해서, 과학 이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게 유신론적 진화론이다. 그런데, 유신진화론을 과학적으로 반증할 수 있다는 주장이 가능한가? 따라서 유신론적 진화론을 비판하는 건 철학 이론이 될 수 밖에 없다.

유신론적 진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서 인간 원리도 같이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은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게 유신론적 진화론이라는 신학 이론이 인류 원리와 같은 이론인 것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유신론적 진화론은 '신이 진화 과정을 통해 이 세상의 생물들을 창조할 수 있다'라는 신학 이론 그 이상 이하도 아니므로, 유신론적 진화론과 인류 원리는 어디까지나 별개의 이론이다.

즉,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이신론일 수도 있고, 유신론적인 관점을 취할 수도 있다. 신이 생물 스스로 진화할 수 있도록 자연법칙을 만들었다는 주장을 할 수도 있고, 신이 자연 법칙도 만들고 진화 과정에도 개입했지만 이걸 과학으로 증명이나 반증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입장이 유신론적 진화론이라는 신학 이론을 규정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인류 원리를 비판한다고 해서 유신진화론이 반증되는 것도 아니다.

또한, 신학 이론이 어디까지나 구세대적 과학 이론을 기반으로 삼으라는 법칙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지금까지 그래왔으니 앞으로도 그러해도 된다는 식의 논리는 잘못되었다. 그러나 그게 신학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시대에 뒤쳐진 이론을 폐기하거나 시대에 맞게 변경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모든 학문은 시대에 맞게 이론을 변경하거나 폐기할 권리가 있다. 신학만 이 흐름에서 예외가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애초에 성경을 문자 그대로 역사적이거나 과학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견해는 현대에 갑자기 설정 뒤집기 식으로 생긴 견해도 아니며, 일찍이 오리게네스, 아우구스티노 등 수많은 교부들도 주장한 바이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4개의 복음서에 모순이 생긴다거나 하는 문제는 2000년전의 그리스도교 신자들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즉 다윈의 자연선택설은 교회의 역사에서 지극히 최근에 생긴 과학 이론인 것이 맞으나, 그러한 과학을 받아들이는 신학적인 해석법 즉 유신론적 진화론의 근거는 매우 전통적이며 정통적인 교회의 해석법이다. 따라서 창세기를 무슨 신문기사 마냥 해석하는 것이야말로 비전통이며 비정통이다.

자연선택설이 처음 나왔을때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엄청난 혐오를 받은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혐오는 창세기에 근거한 것도 있었으나, 오직 창세기 때문에 이런 취급을 받은 것은 아니다.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에 의하면 이데아는 불변인데, 당시 사람들은 특정한 종의 이데아가 변하고 새로 생성된다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였다고 봐야한다.

또한 '그러면 아담은 누구고, 하와는 누구임? 창세기는 어떤 의미를 가짐'이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는데, 창세기의 창조 에피소드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등에 대한 연구는 이미 2000년전부터 이미 수많은 성서학적 성과가 있다. 그런데 이 수많은 성서학적 성과 사이에서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관점' 단 1가지만 가져와서는, '이거랑 모순이 있네?'라고 하는 것은 매우 부당하기 짝이 없는 평가이다. 루이스처럼 상당히 신화학적인 관점을 빌릴 수도 있고, 호트처럼 원죄의 개념을 신과 인간이 단절된 상태로 이해할 수도 있다. 특히 호트의 원죄에 대한 개념은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원죄 해석이다.

그리고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학문의 발전에 따라 신의 행동이 변화한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다만, 과거에 있었던 신의 행동에 대한 '자신들의' 철학적 해석이 시간에 따라 변화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의 발전에 따라 신의 활동이 변했다'는 비판은 타당하지 않다.

9. 관련 인물

유신론적 진화론 또는 진화론적 창조론을 지지 또는 인정하는 잘 알려진 인물로는 다음과 같다.

9.1. 과학자들

하나님에게 구태여 변론이 필요할까? 하나님은 우주 법칙을 창조하지 않았던가? 하나님은 가장 위대한 과학자가 아니던가? 위대한 물리학자는? 위대한 생물학자는? 더 중요하게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마땅히 하나님의 창조에 관한 엄밀한 과학적 결론까지 무시해야 한다고 말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명예롭게 하려는 자들일까, 욕되게 하는 자들일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신앙이 자연에 관한 거짓에 기초할 수 있을까?
프랜시스 셀러스 콜린스
나는 하나님이 돌발적이며 신비한 방식으로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하거나, 하찮거나, 극적이거나, 평범하거나, 모든 사건을 통해 활동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테오도시우스 그리고로비치 도브잔스키
나는 인자하고 동시에 성실한 신은 독립성과 안정성이라는 한 쌍의 능력을 창조 세계에 주셨다고 믿는다. 이런 생각은 우주의 진화사에 우연과 필연이 풍성하게 상호작용한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존 찰턴 폴킹혼 경
보수적인 종교인에게 유기체의 진화이론이 가져온 새로운 사실의 핵심은 창조가 오래 전에 이미 끝난 것이 아니라, 믿기지 않을 만큼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창세기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우리는 현재 여섯째 날 이른 아침을 보내고 있는 것이며, 신은 아직 그의 일터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아직 '매우 좋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로널드 에일머 피셔 경
우리가 앞으로 과학을 통해 훨씬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자. 그리고 이 새로운 지식들이 창조주의 존재를 가리킨다고 하자. 하지만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원하고,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로 하여금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고, 성경 혹은 이외에도 신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방식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 것들을 우리가 행하기를 기대하는 그러한 창조주에 대해 과학이 무엇을 말해 줄 수 있는가를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윌리엄 대니얼 필립스

9.2. 철학자 및 신학자들

9.2.1. 기독교

이러한 나의 관점은 물질에 존재하는 우연성과 필연성 간의 작용에 대해 자크 모노가 주장한 입장에 어느 정도 가깝다. 물질의 경우에 초기 국면에 미리 설정된 것은 하나도 없다. 거기에는 단선적인 인과관계도 없고, 미리 설정된 목적에 다다르는 과정을 결정하는 궁극성도 없다. 다만 거기에 가능한 수많은 변수들의 존재와, 그 변수들의 수많은 가능한 조합들이 있을 뿐이다. 그 조합들은 우연히 발생한다. 대부분의 조합들은 실패로 그쳐서 사라지고, 그 중의 한 조합이 어쩌다가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성공하면서부터 그 조합은 존재의 필연성이 인정되어 우주에서 자신의 역할을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곧바로 자유의 충일한 기쁨이 아니라 필연성의 법칙에 얽메이게 된다. 그 필연성의 법칙은 그 구성 요소들과 우주에서의 역할에 의해 수립된다. 가능한 수많은 조합들 중에서 우연적인 작용으로 유일하고 지속가능하고 안정적이고 일정한 하나의 조합이 생겨나는 그 순간부터, 그것은 자신을 지속하게 하는 법칙에 따르게 된다. 그러나 그 법칙은 그 조합이 다른 것으로 변화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우리가 과학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필연성이다.
자크 엘륄 「개인과 역사와 하나님」p.39~40 김치수 번역. 대장간 역간.
인간에게 고유한 것은 인간이 하는 일만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창의력과 독창성이며, 또한 자신이 만든 창조물에 대해 자신이 적응해야하는 인간 조건이다. 거기에 물질주의적 결정론이나 기계론은 없다. 인간의 역사는 언제나 열려있는 것이고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인간의 의지적인 산물인 것만은 아니다. 인간은 자신도 모르면서 자신이 한 일들로 인해서 자신의 주변 환경이 되어버린 그 주변 환경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것과 함께 해야 한다. 나는 거기서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인간을 창조했다는 성서적 계시가 말하는 것과 어긋나는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어떤 형태의 진화 이론은 창세기의 계시를 반박하거나 그 계시와 모순을 일으키는 것으로 볼 수가 없다는 것이 내 최소한의 입장이다.
스토트 [Understanding the Bible]
넷째,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죽음을 대신하신 것이다. 즉 그분의 죽음과 우리의 죄가 연결된다면, 그 연결은 단순한 결과적인 연결뿐 아니라, 형벌의 연결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죽음은 죄에 대한 정당한 대가로 죄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성경은 어느 곳에서든지 인간의 죽음을 자연적인 사건이 아니라 형벌의 사건으로 본다. 죽음은 하나님의 선한 세계에 침입한 이질적인 요소이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원래 의도의 일부가 아니다. 화석 기록을 살펴보면, 인간 창조 이전에 동물계에는 약육강식과 죽음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을 지닌 인간을 위해서는 더 고귀한 종말을 의도하신 듯한데, 아마 에녹과 엘리야가 경험하였던 '옮겨 감'(translation) 혹은 예수님이 오실 때 산 자들에게 일어날 '변화'(transformation)와 비슷한 종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를 통하여, 죽음(육체적, 영적)은 인간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된다.
스토트 [그리스도의 십자가] p.120~121 제1부 십자가를 향하여 3장 심층적 진리 中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성의 진실, 철학의 진실, 과학의 진실, 역사의 진실, 비평의 진실에 반감을 가져서는 안 된다. 빛의 자녀인 우리들은 모든 빛에 조심스레 열린 태도를 취해야 한다. 그러니 오늘날의 연구 결과를 당당히 마주하는 용기를 기르자. 우리는 다른 누구보다도 더 그것에 열광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누구보다도 빨리 모든 영역에서 진실을 식별해야 하고, 더 적극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며, 그것이 어느 곳으로 향하든 더 충실히 따라야 한다.
워필드
극단적 형태의 진화론, 예를 들어 진화론에서 말하는 무목적성과 무작위성을 배제한다면 진화의 방도는 하나님께서 자연세계를 섭리하시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워필드 [Evolution or Development]에서 인용
성경에는 과정에 의한 창조와 과정 없는 창조가 명백히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적 창조 진리와 과학에서 기술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포함하는 사상 사이에는 원칙상 아무런 괴리가 없다. 둘 다 하나님의 주권 행위이다. 많은 비그리스도인들은 생물학적 진화론을 '진화론'과 연계하려고 시도했으나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7] 그렇지만 비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시도를 해왔기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진화라는 이름 아래 제시되는 모든 이론들에 반대하게 되었다.
제임스 이넬 패커
과학은 성서를 기록한 사람들의 문화에서는 아주 미미한 한 부분에 지나지 않아 도저히 독자에게 과학적 진리를 가르치는 것을 시도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학생들에게 창조 이야기를 과학적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요구는 비종교적일 뿐만 아니라 시대착오적이기도 하다. 역설적이게도 창조론자들이 과학수업에서 성서의 창조 이야기를 가르쳐야 한다는 데 열성적인 이유는 오직 하나, 그들이 근대 과학을 진리에 이르는 유일하게 권위 있는 길이라고 암묵적으로 이미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성서의 저자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그런 제한된 틀 안에 강요하는 현재의 세태에 대해 극도로 당황할 것이다.
존 호트

* 볼프하르트 파넨베르크 Wolfhart Pannenberg(1928~2014)
최근에 등장한 개신교 사상가. 현대 개신교 신학의 마지노선, 과학과 신학 사이를 중재했던 20세기 마지막 개신교 신학자. 신정통주의가 앞서 말했듯 신학과 자연과학이 서로 별개의 의제와 방법론을 지녔다고 생각한 데 반해, 판넨베르크는 두 학문 사이에 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두 영역의 독특성을 주장하면서도 두 학문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으며 서로에게 유익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책 <신학과 하나님의 나라> 와 <창조와 진화>, <종교와 과학>, <학문이론과 신학>(Wissenschaftstheorie und Theologie), <신학은 어떤 의미에서 학문인가>[8] 등등에서 이 주장의 논리적 근거들을 찾아볼 수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현대 과학과 성서의 가르침에 충돌하는 부분은 없다. 나는 우리가 성경을 잘못 해석함으로서 성경이 원래 의도했던 것과 다른 이야기를 하게끔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실수는 우리가 성경을 과학책이라고 오해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본다.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고 구원에 관한 책이다. 물론 나는 창조를 믿는다. 그게 진화라는 과정을 거친 것이든, 특정한 시점에 직접 인간에게 영혼을 불어넣어 창조한 것이든 간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인간이 어떤 존재이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어떠한가에 대해서 바뀌는 것은 없다.
빌리 그레이엄, Doubt and Certainties (1964)
천주교 인천교구 사제이자,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와 미래사목연구소 소장.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서 성서신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우리는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3차원에 살고 있다. 그런데 하느님은 3차원 너머에 계신 초월적인 존재다. 그러니 하느님의 창조는 3차원에서 이뤄진 게 아니다. 4차원이나 5차원, 아니면 6차원 너머에서 이뤄졌을지도 모른다. ‘하느님이 실제 진흙으로 인간을 빚었다’는 이해 방식은 3차원적 사고에 갇힌 거다. 그런 생각은 신앙적으로 더 큰 잘못이다. 초월적 존재의 하느님을 인간의 3차원적 사고 안에 가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그걸 떠나 계신 분이다. ‘하느님이 흙으로 인간을 빚었다’는 건 단지 은유적 표현이다. 오랜 세월에 걸친 진화의 과정을 ‘흙으로 빚었다’는 말로 축약했다고 봐도 된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대립적 관계가 아니다. 지구의 환경, 우주의 환경은 끊임없이 변한다. 하느님이 창조한 생명체도 변화하는 환경에서 생존하려면 끝없이 진화해야 한다. 그런 진화를 인정한다. 그러나 진화론은 창조론이란 더 큰 울타리 안에 포함된 개념일 뿐이다.
차동엽
그러나 더 근본적인 원인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과학에 대해 가지고 있는 피해의식과 두려움입니다. 신학자이자 목회자인 저는 이런 상황에 심각한 우려를 표합니다.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으니, 우리 신앙은 이제 확실한 토대를 갖추었다고요? 이런 신앙 태도가 교회를 지배한다면 그 결과는 아주 심각합니다. 이건 과학을 신앙의 토대로 삼는 것입니다. 신앙이 과학을 기반으로 정립한다고 했을 때, 그 기반인 과학이 무너지면 신앙은 당연히 함께 무너집니다.
신재식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성서는 다양한 방법을 통해 이해되어 왔습니다. 성서 자체가 여러 문헌이 모인 것으로, 다양한 양식으로 씌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현대 신학자들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 교부들이나,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칼뱅을 비롯해 대부분의 전통적인 신학자들은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기만을 고집하지 않았지요. 오히려 문자적, 역사적, 교훈적, 은유적 방법 등 다양한 관점에서 성서 읽기를 시도하면서 최선의 성서 이해를 추구했습니다. 이게 성서에 대한 전통적이며 정통적인 접근입니다. 창조 과학이 맹신하는 문자적 성서 읽기는 당시 세계상이 반영된 성서를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으며, 오히려 성서의 메시지를 상당 부분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신재식

9.2.2. 이슬람

10. 관련 문서


[1] 감독 대런 애러노프스키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다. 영화 내용도 판타지 요소가 다수 나오는 등 '기독교적'이라고 보긴 어려운 내용이 많다. 엄밀히 말하면 판타지 요소를 첨가하면서도 유신론적 진화론의 경전 해석을 따른 신화 영화에 더 가깝다. 이를 고려하더라도 노아의 경우는 상당히 특이하다고 볼 수 있는데, 무종교 감독과 소설가는 보통 구약성경의 신화적 측면을 부각시키기 때문에 젊은 지구 창조설의 세계관을 따르기 때문이다.[2] Omphalos는 그리스어로 배꼽(navel)을 의미한다.[3] 내부적 논쟁이 아닌, 사실 여부에 대한 논쟁이다. 내부적 논쟁은 단속평형과 점진적 진화가 대립하고 있다. 이마저도 여러 타협을 거쳐 사실상 통합된 상황.[4] 이 과학적 사실이라는 것은 진리가 아닌, 반증될 수 있는 사실을 일컫는다. 예컨데 지구가 구형이라는 지구 구형론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온 세상이 지구가 둥글도록 인식하게끔 트루먼 쇼를 하고 있고 모든 시각적, 직관적 증거들은 우리의 뇌와 눈을 조종하는 악마들에 의해 조종당한 것이며 직접 우주에 나가서 지구가 둥글다는 걸 확인하더라도 이를 악마가 조작한 것이고 건축학도들이 끙끙매는 지구 곡률 문제는 모두 시공간의 왜곡 탓이라는 극단적인 회의주의 가정이 모두 사실일 경우 틀릴 수도 있다. 물론 지구 구형론과 마찬가지로 진화론도 눈으로 관측 가능한 사실이다.[5] 다만 가톨릭에서 인정한 수준과 비슷한 '소진화의 일부 영역'을 인정하고 신학의 영역으로 편입하려는 시도가 한국에 아예 없는 것은 아니며, 교파를 가리지 않는 통합 연구 단체가 몇 개 세워져 있다.[6] 여러 차례 탐사에 참여했고, 북경원인의 발굴과 연구에 관여하기도 했다.[7] 무신론적 세계관이 생물학적 진화론의 패키지 상품이 아니라는 이야기.[8] 독일 현대철학자 게르하르트 자우터와 1대 1로 키보드 배틀을 벌여 말로 무쌍을 찍었으나 끝을 보지 못하고 무승부로 끝낸 스토리를 녹취한 것을 책으로 펴낸 것이다. 이쪽에 관심이 많다면 필수로 읽어볼 것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