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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0-03-07 01:48:04

과학만능주의

1. 개요2. 과학주의3. 기술만능주의4. 유사품5. 관련 문서

1. 개요

"사회적 합리성이 없는 과학적 합리성은 공허하고, 과학적 합리성 없는 사회적 합리성은 맹목적이다.”
-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위험사회 – 새로운 근대(성)를 향하여』中

과학지상주의라고도 한다. 만능주의의 하나로서 이하의 다소 다른, 때로는 혼용되기도 하는 개념 두 가지를 포함한다.

2. 과학주의

Scientism
"굳이 필요한 일이 아닌데도 과학이 모든 가치 있는 질문의 대답을 알고 있는 것, 또는 설령 모르더라도 곧 알게 될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 그리고 과학적인 대답을 허용하지 않는 질문은 어떤 의미에선 얼간이 혹은 숙맥들이나 묻고 대답하는 질문 같지도 않은 질문이라고 치부하는 것. 이것보다 더 빠르게 과학을 망신시키는 일은 없다."

- 《젊은 과학도들에게 드리는 조언》(Advice to a Young Scientist), 피터 메더워(P.Medawar)[1]

영미권에서는 일종의 신조어로, 국내에는 "사이언티즘" 이라 하여 그 발음을 그대로 가져오는 경우도 있다. 본 항에서 다루는 과학만능주의 혹은 과학주의는 과학에 대한 일부 집단 및 개인의 극단적인 태도와 사유체계를 다루며, 자연과학 더 나아가 과학 일반의 쓸모나 가치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는다.

과학적 방법경험적이고 실증적인 주제에서뿐만 아니라, 추상적(ideal)이고 비경험적인 연구분야나 인간생활의 가치함축적 측면들에까지 적용할 수 있고 또 해야한다는 주장. 다시 말하면 "과학적 방법 만능주의" 내지는 일종의 과학부심. 과학주의의 추종자들은 과학을 진리에 이르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길이라고 여긴다. 철학자 톰 소렐(T.Sorell)은 과학주의를 "자연과학을 다른 학습이나 풍습의 갈래와 비교하여 지나치게 높게 치는 태도"라 정의한 바 있고, 이에 따르면 과학주의는 좁은 의미에서는 자연과학 만능주의로 이해될 수 있다. 과학철학에서도 진지하게 논의된 바 있는 '과학의 위계'[2] 개념은 그 좋은 사례이다. 반과학과는 완전한 대척점에 있다.

넓은 의미에서 과학주의는 멀게는 계몽주의 및 논리실증주의와 연관이 있으나, 해당 이념들이 반드시 과학주의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며 이들에 선행하였는지도 불명확하다. 과학주의는 어떤 사조의 영향을 직접 받았다기보다는, 뉴턴 이래 자연과학의 놀라운 성공을 기술의 발전을 통해 체험할 수 있었던 인류의 당연한 반응으로 처음 출현했다고 보는 것이 차라리 타당할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을 거치기 전까지 과학주의는 사회 저변에 깔린 일반적인 분위기에 가까웠고, 그것은 당대 지식인과 많은 대중에게 상당히 '옳은' 것으로 여겨졌으며, 공산주의와 파시즘 모두 과학주의적인 태도를 (반지성주의적인 면모와 함께) 깊게 내재하고 있었다.[3] 이런 영향은 예술에까지 미쳐 미래파 등이 기술만능주의에 가까운 과학주의를 내비치기도 했으며, 사회학에서는 사회적 진화론(social darwinism)이 등장하는 배경이 되고, 종교도 이런 흐름에 자유롭지 못하여 기독교 과학(Christian Science)같은 단어들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잘 알려진 작가인 러브크래프트나 에드가 앨런 포의 작품에 과학주의에 대한 비판이나 과학적 방법으로 분석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공포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역으로 그 시기 과학주의가 얼마나 사회에서 보편적인 기류였는지를 방증한다.

광의의 과학주의는 오늘날에도 사회 기저에서 면면히 이어지고 있고 이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과도한 주장일지 모른다. 반면 본 항목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신조어로서 사이언티즘은 과거의 개념과 다소 유래와 성격이 다르며, 극단주의의 하나로 분류할 수 있다. 새로운 과학주의는 종교 지지자 및 포스트모더니스트 해체주의자들이 촉발한 논쟁 과정에서 그 반향으로 입지를 굳힌 개념으로, 과거의 과학주의를 보다 강경한 언어로 채색하여 리바이벌한 것이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자연과학에 우호적인 신합리주의 계통의 현대 무신론 지지자들이 과학주의적 입장을 띄는 경우가 흔하며, 한국에는 반종교, 무신론, 환원주의, 유사과학 비판, 여성주의와 해체주의 비판 등등의 떡밥들이 얽히고설킨 채 쏟아져 들어오는 무렵에 함께 업혀서 들어왔다.

시간을 거슬러 다시 돌아온 과학주의 지지자들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의 주장이 지나치게 과격하고 강경하기 때문. 과학적 방법 항목에도 있지만 과학은 인류에게 충분히 유용한 지식축적 도구이다. 그러나 흔한 만능주의극단주의가 다 그렇듯 과학주의 역시 호응을 받기 힘들 만큼 과격하고 비현실적인 측면이 있기에 문제가 되는 것. 이들의 이런 과격성은 "과학을 모르는" 기타 집단에 대한 멸시 및 선민의식과 결합하여 주위 모든 학문 분야를 물어뜯는 형태로 구체화된다. 이런 행태를 지켜본 물리학자 이안 허친슨(I.Hutchinson)은 과학주의자들에게 "여타 학문들을 촉진하기는커녕 위험에 처하게 하고, 최후에는 그들의 오만함과 지적 따돌림(intellectual bullying)의 대가로서 다른 학문 공동체들로부터 방어적이고 공격적인 반응만이 되돌아오게 될 것" 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 심지어 《회의주의자 사전》의 저자 로버트 캐롤은 "과학주의는 과학적 주장이 아닌 자가당착적 관점, 거짓이거나 무의미하다" 라고까지 하면서 혹독하게 깠다.[4] 과학주의의 근거는 정작 과학적이지 않다는 뜻.

공통된 적을 둔 까닭에 과학과 종교 관련 논쟁의 최전선에 서 있는 과학적 회의주의(scientific skepticism)와 자주 혼동되는데, 이것이 단지 인식 측면의 혼란인지, 아니면 존재적으로 과학적 회의주의가 성찰성의 가면만 걸친 과학만능주의 그 자체인지는 평자마다 의견이 다르다. 과학적 회의주의자들의 주장에 의거하자면 과학적 회의주의란 "과학적 방법을 통해 얻은 지식에 자신의 지성을 최대한 의존하면서, 검증되지 않은 주장에 대해서는 건전하고 건설적인 의심을 유지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과학적 회의주의자들에게서 건전하고 건설적으로 의심하는 방법이란 곧 과학적 방법을 의미하기에 과학주의와 다를 게 뭐냐는 비판이 있으며, 실제로 이들에게서 과학적 회의주의와 과학주의가 뒤섞여서 나타나는 경우는 흔하다. 이런 혼동 속에서 명시적으로 과학주의를 배격하여 인문학의 가치나 계량화, 수량화, 환원 등의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과학적 회의주의자들도 물론 있다. 예를 들면 《사이비 사이언스》의 저자 아서 위긴스(A.Wiggins) 같은 경우에도 과학의 적용범위에 대해 선긋기를 하는 모습이 종종 나타나며, 하술될 다른 회의주의자인 로버트 캐롤(R.T.Caroll) 역시 과학주의에 매우 비판적이다.

과학주의의 대표적인 지지자가 작가이자 신경과학자인 샘 해리스(S.Harris)이다. 그의 저서 《도덕의 풍경》에서 가치판단을 내릴 때 과학이 관여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도덕적 판단을 내릴 때 과학적 방법이 적용되며 또 누군가 말하지 않아도 사회는 일상적으로 늘 그러고 있음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고등 동물의 경우 고통의 정도의 단계가 세부적으로 존재하고 또 그걸 충분히 계량화할 수 있을 정도로 지식이 축적돼가고 있으며, 애초에 고통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 또한 뇌과학과 신경과학을 건드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도덕적 판단에는 과학 지식과 과학적 방법이 작용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인문학의 시대는 끝났다"느니 어쩌니 하는 도발적 슬로건을 내세워 세일즈하는 사람들도 이런 축. 이들은 과학의 교도권(Magisteria)이 지금보다 더 확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일 유명한 사람이라면 무신론자로 잘 알려진 리처드 도킨스일 것이다. 그러나 리처드 도킨스의 경우 그간 발언에 비춰볼 때 과학의 방법이 적용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겠다는 쪽에 가까워서 회의주의자로 평가하는 것이 타당해보인다. 그는 알 자지라 인터뷰 중 자신은 (자연과학의 차원에서) 다윈주의자이지만 (사회과학의 차원에서) 반다윈주의자(Anti-Darwinian)라고 밝히면서, "과학과 과학적 방법은 자연을 설명하고 사실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체계이다. 따라서 과학(적 방법)이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제대로 설명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뭐가 (도덕적으로) 옳고 그르냐에는 관심이 없다. 내게는 무엇이 사실인지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차라리 윤리적 회의주의자로 까이면 까였지 과학주의자라 하기는 애매하다. 물론 과학주의가 윤리적 회의주의가 쌍생아라 비판한다면 그 역시 일리가 있지만.

과거 과학전쟁 이래 잦아들었던 인문학 대 과학의 구도가 다시 일부 강경한 과학자들의 과학주의에 의해 불붙을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 특히 과학주의자들이 인문학을 넘어 사회과학에 대해 경성과학적 편견[5]을 가지고 대하는 데 대한 반감이 사회과학 내부에 상당한데, 이들로부터 논란이 점화될 수 있다는 예상이다. 많은 사회과학자(와 졸지에 연성과학자로 끼인 일부 자연과학자)들은 본인들의 학문이 자연과학보다 덜 굳어져있고 정형화되있지 않다는 전제를 지닌 경성-연성의 구분 자체가 (일부) 자연과학의 배타성을 드러내는 것이라며 용어 자체를 비판한다. 그렇다해서 최근 과학주의자의 대두가 새로운 분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주장 자체는 기우인 것이, 이미 사회과학은 자기 자신이 과학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매우 오랜 기간 고민해왔고 분과에 맞는 과학적 방법론을 발전시켜왔다. 만약 과학주의에 근거한 분쟁이 사회과학을 둘러싸고 일어난다면, 그건 새로운 불길이 아니라 그저 사회과학 내부에서 매일같이 일어나던 일상의 한 연장선상에 놓인 사소한 에피소드에 가깝다.

사회과학 내부에서 과학주의자들로부터 가장 크게 위협받고 있는 것이 이른바 질적연구자나 '썰방' 연구자로 불리는 이론가들이고, 이들이 과학주의자들과 싸워온 역사는 이미 수십년에 달한다. 경성과학 지지자들은 소위 질적 자료나 질적 방법론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며, 사회철학이나 사회이론 연구에 대해서는 그것이 과학도 아니라는 입장을 시종 유지한다. 질적 연구자/이론 연구자들이 볼 때 이런 과학주의자들은 답이 딱 떨어지지 않는 골치아픈 인문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도 마치 수학문제에서 x값 구하듯이 답을 찾으려 하는 기계적 환원론자이며, 사회를 바라보는 거시적 안목 자체를 거부하고 자신이 익숙한 미시적 수준에서의 분석에만 고집스럽게 천착하는 수리모형 오타쿠이다. 사회과학 안에서 과학적 방법론을 전폭적으로 수용한 대표적인 분야로는 심리학경제학이 있는데, 과학주의 비판자들은 이를 매우 위험한 경향이라 비판한다. 그들이 보기에는 경제학이나 심리학이 과학적 방법론으로 해결할 수 없는 많은 문제를 다루면서도 스스로 과학을 자처함으로써 과학주의에 적극 봉사하는 한편, 자기 자신을 과학으로 보이기 위해 과학적 방법론이 적용되지 않은 부분에서까지 과학인 척 호도하느라 유사과학 내지는 이데올로기와 쉽게 결합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학 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을 대중적으로 다룬 작품들로는 아라카와 히로무강철의 연금술사, 헐리우드의 아바타(영화), 매트릭스 트릴로지, 쥬라기 공원 시리즈 등이 있다.

고전 문학 작품들 중에선 후술할 지킬박사&하이드, 프랑켄슈타인과 3대 디스토피아 소설1984, 우리들, 멋진 신세계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걸리버 여행기에서도 등장하는 가상의 국가 라퓨타를 통해 과학만능주의를 풍자한다.

3. 기술만능주의

"현대 사회는 기술이 가져다 주는 안락함에 감격하고, 기술의 편리함에 매료되며, 기술이 제공하는 꾸준한 오락에 중독되고, 기술이 그려 주는 미래의 전망에 매혹되어, (그 결과) 기술의 힘과 속도에 압도되어 가는 시대이다."

- 존 나이스비트(J.Naisbitt)
만능주의의 한 갈래. 과학기술로 모든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위의 과학주의와는 다르니 주의. 한국에서는 과학(science)과 기술(technology), 공학(engineering) 등의 개념들이 서로 비슷비슷하게 통용되기 때문에, 주로 과학만능주의라고 하면 이것을 가리킨다.

의외로 그 기원은 상당히 오래 되었는데 이미 16세기 계몽주의에서부터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으며 19세기에 벨 에포크만 보더라도 과학기술이 발달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으며 이러한 믿음은 제2차 세계 대전 시기까지 지속된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고 세기가 바뀌면서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과 진보에 따른 문제점이나 부작용이 속속 발견되고, 결정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환경오염의 심각성에 대한 경각심이 일깨워짐에 따라 점차 위축되어 가며 반대 주장이 목소리를 얻기 시작하였다. 사실 기술만능주의가 지배적이었던 당대에 출간된 프랑켄슈타인이나 지킬 박사와 하이드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기술만능주의를 불신하는 풍조는 어느 정도 있었다.

그렇지만 기술만능주의는 다른 만능주의나 제일주의에 비해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발전에 따른 대부분의 문제를 또다시 과학기술을 발전시킴으로써 해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엔진 개발! → 근데 연비가 나빠서 환경오염이... → 엔진 개량! → 아직도 매연이... → 필터 개량! → 근데 가격이... → 싸고 좋은 신소재로 변경!" 같은 식으로. 또한 과학기술이 점점 발전하면서 이전에는 전혀 예상도 못한 일들이 가능해지기 시작했다는 점도 한몫 한다. 바닷물로 비행기 연료를 만들고 잘린 손가락을 재생시키고 핸드폰으로 컴퓨터와 TV를 겸용한다는 이야기를 20년 전에 했다고 상상해보자. 아마 비웃음 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 발전이 이루어지는 동안의 희생은...

그리고 우리가 한 가지 알아둘 것이 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학기술은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 과학기술로 축적해온 문명 역시 과학기술에 의해서 혹은 과학기술이 쌓아올렸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실제로는 인간이 그 과학기술을 이용한 것에 불과하다. "과학이 인간성을 결핍시킨다"거나 "과학에 의해 인간이 부품화된다" 등의 이야기를 들어 봤을 것이다. 이것은 과학기술을 부정적으로 보는 자들의 의견인데, 사실은 아돌프 히틀러우생학을 들먹이며 유대인들을 학살시켰던 것처럼 과학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활용하기 나름인 도구이다. 교양과학 서적을 많이 읽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데이스 홍(홍 원서)의 《로봇 다빈치, 꿈을 설계하다》의 마지막에서도 잘 나와있는데, 자기가 만든 구조로봇에 소화기 대신 총을 들게하고 투척용 소화기 대신 수류탄을 들게 하면 순식간에 군사로봇이 된다며[6] 과학기술이라는 것은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는 사람이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효과가 극명하게 달라진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내용이 있다. 다시 말해 세간에서 흔히들 과학의 폐해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것을 악용한 인간이 문제인 것이지 과학기술 자체의 단점이나 결함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과학기술을 유용한 도구로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과학기술만이 인류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의 해법이라고 생각한다거나, 과학기술의 발전은 절대적으로 옳은 명제라고 여기는 주장들은 이미 도구성을 넘어서 하나의 이념화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즉 과학기술 자체는 1차적으로는 도구일 뿐이고 가치중립적이므로 과학기술에 대한 편협한 비난은 분명 옳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과학기술을 도구로 여기는 것을 넘어서 목적화시킨다면[7] 그 때는 도구라는 변명으로 비판을 회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8] 그리고 이러한 사례는 현대사회에서 매우 흔하게 보이고 있다.

또한 과학은 도구일 뿐이라고 해도, 기술은 과학과 달리 분명히 누군가의 의도와 목적성에 의해 개발되는 것임은 분명하며, 더더욱이나 현대의 과학기술처럼 어마어마한 비용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사회적 자원의 배분과 관련된 정치경제적 문제와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애초에 과학기술만 생각하지 말고, 그 과학기술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자원을 대 주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자. 다른 곳에 투자할 수 있는 자원을 희생하고 과학기술에 돌린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과학기술이 마치 모두에게 '균등히 혜택이 갈 것'이라고 착각하지만 과학기술은 저절로 생기는게 아닌만큼 그 혜택에 있어서도 균등하긴 힘들다.

그리고 기술 만능주의는 사실 제도권 교육 등을 통해서 기본적으로 현대사회에서는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면이 있다. 즉 우리가 겪는 여러 문제는 기술발전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암암리에 주입받아 왔고, 특히나 한국 같은 개발도상국에서는 경제성장 만능주의와 쌍을 이루어 왔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당연시되는 가정에도 여러가지 입장에서 의문과 비판이 가해지고 있는데, 환경문제에 대한 지적 등을 떠올리기 쉬우나 환경문제에 대한 지적은 그중에 이해하기 제일 쉬워서 자주 인용될 뿐 그것말고도 많은 지적들이 있다. [9]따라서 정치 사회적으로 신념화된 과학기술 만능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적지 않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믿음이 보편적인 해답이 되기는 힘들다. 애초에 만능주의 문서를 보면 알듯이, 뭔가 하나에 모든 것을 의지해 버리는 것은 뭔가 하나에 모든 책임을 돌리는 것 만큼이나 위험하다. 과학기술은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에 크게 공헌하였고, 확실히 인류의 평균수명을 늘렸다. 이것은 과학기술이 중요하다는 의미이지, 만능주의로 빠져서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앞으로도 STS (과학-기술-사회)적 측면에서 이러한 주제들에 대해서는 깊게 고찰해볼 의미가 있고 계속 화두로 제기될 것임은 부정할 수 없다.

과학 기술이 언제나 원하는 방향으로 발달하는 것은 아니고, 그 기술의 이용과 연구 개발이 악용될 여지를 완전히 막을 수 있진 않으므로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이런 문제가 생길거야."라는 말에 "과학이 그것을 극복할 수 있어."라고 막연히 대답하는 건 과학이 미처 알아내지 못한 요소에 대한 항구적인 상실과 현 세대 및 미래 세대의 피해를 줄 사건들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과학은 결코 이념화되어 남들을 탄압해선 안된다.

기술만능주의자들은 과학기술이 끊임없이 발달할 것이라고 말하고 기대를 걸지만, 그 반대편에 사회가 준비하지 못하고 상태악화의 일로를 걸을 위험성은 결단코 부정한다.

서구에서 기술만능주의를 반대하는 대표적인 사상가들로는 프랜시스 후쿠야마(F.Fukuyama)나 자크 엘륄(J.Ellul) 등이 있다.

기술만능주의가 정치‧사회적인 신념이 된다면 기술을 이용하는 자들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강요하게 되는 꼴이기 때문에, 옳지 않을 수 있다. 비판론자들도 이런 태도를 지양하자고 할 뿐이지 기술 그 자체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않는 중이다.[12]

4. 유사품

기술관료(technocrat), 혹은 전문가의 역할을 강조하고 이념, 정치성, 민주성을 경시하는 사상이 유사하다.

기술관료를 중시하는 사상은 꽤나 오래전부터 있어왔는데, 마크 마조워의 「암흑의 대륙」에 따르면 나치 독일 역시 우두머리들은 파시즘의 격정과 투쟁에 젖어 있었으나 의외로 실무자들은 무미건조하고 기계적이며 탈가치적일 뿐만 아니라 보수적이기까지 한 기술관료들에 가까웠다고 한다.[13] 특히 사회주의 붕괴 이후 다니엘 벨이나 후쿠야마 등의 보수적 미래학자들이 역사의 종언, 이데올로기의 종언 등을 거론하였고 많은 이들이 그에 동조하였는데,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이런 관점 하에서는 이데올로기, 이념, 좌우논쟁 등은 무의미하고 비효율적인 것에 불과하며, 하나의 주어진 미래상 혹은 국가의 목표 하에 가장 효율적인 수단을 선택하는 것만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는 합목적적 도구주의가 더욱 강조되게 되었다. 한국과 같이 정치성이라는 것이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곳에서는 더더욱 강조되게 된다.

이러한 주장들은 탈이념을 주장하지만, 사회의 발전방향이 하나의 목표로 정해질 수 있으며 서로 상충하는 사회적 갈등이나 계급의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극단적 관점을 내재하고 있다는 점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사회의 발전방향을 방향성의 문제가 아니라 시험 성적 잘 받듯이 효율성의 문제로만 보는 것에 치우쳤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는 것이다. 흔히 하는 "정치인은 정당 이런거 다 필요없고 능력있는 사람을 뽑아야 해"라는 사고방식이 결국 이러한 점에서 어불성설인 것.[14]

기술관료 및 전문가주의는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이념 즉 과학성이 약하고 인문학적 토대가 필요한 부분을 경시한다는 점에서 1번 단락의 과학주의와 통하는 바가 있다. 또한 결과적으로 기술관료주의가 제시하는 하나의 목표는 경제와 과학기술의 발전 등의 성장주의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2번 단락과도 통하는 바가 있다. 다만 과학주의, 기술만능주의 등과 일치하는 개념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1번 단락이나 2번 단락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문서 자체도 지지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쓸데없이 이념논쟁할 시간에 뭔가 '효율적'으로 '발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정서가 강하다. 물론 그들의 '효율'의 정의나 '발전'이 무엇인가는 그냥 기술만 발전하면 장땡.

5. 관련 문서


[1] 생물학자로 1960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이다. 노화가 진화적으로 유리할 가능성을 제기하였다.[2] 상대적으로 현상적인 분야를 연구하는 학문과 본질적인 측면을 탐구하는 학문이 구분 가능하며 그 사이엔 위계가 있다는 주장. 과학의 위계를 지지하는 이들은, 보통 물리학>화학>생물학>심리학>사회학 순으로 더욱 본질적인 대상을 탐구하는 과학이며 하위 분과는 상위 분과에 궁극적으로 포섭 가능하다고 본다.[3] 마르크스가 기존의 사회주의와 자신의 주장을 구분짓기 위해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표현을 쓴 것을 떠올려볼 수 있겠다.[4] R.T.Caroll, pp.654~655.[5] 흔히 물리학, 화학, 분자생물학 등 과학적 방법론이 적용된지 오래되었고 패러다임이 보다 확고하게 성립된 과학 분과를 '경성과학(hard science)'으로, 심리학과 사회학 등 보다 인문사회적인 차원에 집중하는 분과를 '연성과학(soft science)'으로 칭한다. 사회과학의 제 분야는 경제학을 제외하고는 보통 모두 연성과학에 속한 것으로 본다. 강경한 경성과학 지지자들은 생태학이나 진화생물학 등의 자연과학도 지나치게 거시적이라는 이유로 연성과학에 포함시키기도 하며, 사회학 등은 아예 과학이 아닌 인문학으로 치부한다. 경성과학적 편견이란 경성과학이 연성과학에 비해 더 세계의 본질을 탐구하며 그 연구법 또한 더 낫다고 보는 태도나 그런 태도 아래에 연성과학을 대하는 편향된 의식으로 정의할 수 있다.[6] 물론 그는 군사로봇 프로젝트에 많은 러브콜을 받음에도 전부 거절할 정도로 오직 사람을 구하는 로봇을 만드는 것에 집중하는 사람이다. 오해하지 말자. 그리고 군사로봇을 만들지 않는 이유는 그냥 만들기 싫을 뿐이라고 한다. 사상적인 부분도 있겠지만 군사로봇 하나 만드는데 투자하는 시간은 어마어마한데 그의 성향은 다양한 기술을 만들고 전 세계가 공유하고 힘을 합치는 것을 좋아한다. 진짜로 오해하지말자.[7] 어떤 특정 개인은 과학기술 분야에서의 진리 탐구를 인생의 목적으로 할 수 있고 그것은 멋진 일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자신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목적으로 강요하는 태도를 말한다.[8] 이미 "과학기술은 ~~다." 라고 말한 순간 가치판단이 개입된 것이다.[9]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더글라스 저 등을 참조할 것[10] 환경문제를 쉽게 떠올릴 수 있으며, 그 뿐만 아니라 현대인들, 특히 선진국 국민들이 겪는 대다수의 중한 질병들은 과학기술의 발전과 밀접한 관계가 아닌지 의학적으로 문제를 제기해 볼 수 있다. 실제로 생각해보면 의외로 정말 대다수의 질병이 직접적인 환경오염 뿐만이 아니라 진화론적으로 영양섭취비율의 변화, 혹은 도시화와 산업화에 따른 생활상의 변화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광범위한 영역의 황폐화와 생태계 파괴, 그 외에도 만성 질환과 신체 기능 이상 등을 일으킬 수 있는 대기오염이 있다. 대기오염을 해결할 방법은 해결책을 도모하기 위해 꾸준한 기술 발전을 병행하는 것도 있지만, 과도한 생산(계획적 구식화 등)과 환경파괴적 장치들을 전지구적인 법안으로 완전 규제하려는 기색이 없으므로 실질적으로는 인구 성장을 늦추고 어떻게든 모두가 함께 경쟁을 그만두는 수밖에 없다. '드러나는 환경파괴'만 신경쓰고 챙기다간 나날이 더 나빠지고 인류에게 적대적이게 되는 환경 때문에 인류가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유전체 편집 기술의 적극적 도입과 초인본주의가 논의되고 있지만, 그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기에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11] 이를테면 폴더블 스마트폰이 개발된다고 해도 전쟁으로 기아로 죽어가거나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그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다.[12] 당장 반과학을 외치는 에코파시즘과 기술이 실용적이라고 판단하는 에코모더니즘은 서로 같은 환경보존을 주장하고 있음에도 그 실상이 다르다. 마찬가지로 기술이 모든 사람을 아무 이유 없이 구원할 수 있으리라고 미래가 도래하기 전에 일찌감치 판단을 내리는 기술만능주의는 그 이상적인 결과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정확한 고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비현실적인 고려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근대의 사상에서의 무차별성을 띄는 자유의지 개념을 지금까지 끌고온 자유지상주의와 닮았다고도 할 수 있다.[13]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지적한 것과 일맥상통한다.[14] 한국에서는 전두환이 경제는 전문가에게 다 맡겨놓은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지금 대통령들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나, 국가의 목표를 '경제살리기'라는 하나로 정해놓고 다른 목표는 우리 살림살이와 관계없거나 쓰잘데기 없다고 생각한다던지 하는 식의 사례를 흔히 볼 수 있다. 괜히 ~하면 어떠냐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지라는 담론이 나온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