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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9 20:53:43

과학전쟁

1. 개요2. 전개
2.1. 과학사회학2.2. 과학전쟁의 발발
2.2.1. 왜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는가?
2.3. 과학 평화
3. 여담4. 비슷한 논쟁5. 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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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과학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지식체계라고 주장하는 과학자들과 과학지식은 객관적인 진리가 아니며 사회문화적 조건의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과학사회학자들이 과학지식의 본질을 놓고 논쟁을 벌인 사건.

2. 전개

2.1. 과학사회학

과학사회학에는 논리 실증주의, 포퍼, , 임레 라카토슈, STS로 이어지는 이론적 배경이 존재하지만 여기서는 과학 전쟁 당시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킨 스트롱 프로그램과 사회구성주의, 브뤼노 라투르의 주장만 서술한다.

본격적인 과학지식사회학(sociology of scientific knowledge, SSK)은 데이비드 블루어(David Bloor), 베리 반즈(Barry Barnes) 등이 소속된 에든버러 학파의 스트롱 프로그램(Strong Program)으로 부터 시작된다. 이들은 쿤의 패러다임 개념을 급진적으로 해석하여 사회과학의 지식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의 지식도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은 4가지 특성을 과학지식사회학의 주요내용으로 삼는다.
(1) 인과성: 과학의 사회적 연구는 신념, 또는 지식의 상태들을 설명해야 한다.
(2) 공평성; 과학지식 사회학은 지식의 참과 거짓, 합리성과 비합리성, 성공과 실패에 대해 공평해야 한다.
(3) 대칭성: 참과 거짓의 신념을 같은 종류의 원인으로 설명해야 한다. "참"인 과학은 자연에서 그 설명을 구하고, "거짓"인 과학은 그 원을 사회에서 찾는 식이 되어서는 안된다.
(4) 성찰성: 과학에 적용하는 것과 동일한 설명을 과학의 사회적 연구에도 적용시켜야 한다.[1]

에든버러 학파는 이 4가지 원칙에 따라 과학 지식이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수많은 사례를 분석하고 이 과정에서 이해 관계와 권위 등 과학 공동체 내, 외의 다양한 사회적 요인들이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2]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예로 양자역학의 성립기에 독일 과학자들이 '몰인과적(acausal)'인 프로그램을 채택한 것은 그 당시의 신비적이고 비합리적인 사회 분위기 때문이라는 포먼(P. Forman)의 논의, 19세기 초 영국 골상학을 둘러싼 논쟁은 당시의 상류 계층과 중상계층 사이의 사회적 갈등으로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셰이핀(S. Shapin)의 논의 등 과학과 사회가 영향을 주고받은 사례들을 참조한다.[3]

이들의 논의, 특히 '대칭성' 원칙은 해리 콜린스(Harry Collins)의 '해석적 유연성'(interpertative flexibility)과 '논쟁 종결기제(closure mechanism)'란 개념으로 발전한다. 콜린스의 '상대주의의 경험적 프로그램'(EPOR)에 따르면 자연에 대한 관찰 증거는 복수의 이론적 해석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에 과학 논쟁의 종결은 관찰 증거 자체가 아니라 과학 공동체의 사회적 협상에 달려 있다. 이 협상 과정을 분석해 보면 과학 지식의 참/거짓, 합리성/비합리성을 판단하는 기준 자체는 외부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 공동체 내부의 사회적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고 적용되는 구성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럴 경우 '과학적인 것'은 합리적이고 '사회적인 것'은 비합리적인 것이라는 전통적인 이분법은 성립되지 않게 된다.[4]

나아가 브뤼노 라투르는 스티브 울거(Steve Woolgar)와 함께 저술한 <실험실 생활>에서 직접 소크 연구소(Salk Institute)라는 유명한 생물학 연구소에서 일하는 과학자들의 실천을 분석하며, 소크 연구소 연구원들이 노벨상을 수상한 TRF라는 호르몬의 발견이 서로 다른 두 연구팀 사이의 절충(negotitation)과 합의(consensus)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 주장한다.[5]

유의해야 할 점은 사회구성주의자들이 과학을 완전히 사회적인 것이고 사실과는 동떨어졌다거나 아예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상대성 이론의 역사를 연구한 사회구성주의의 대가 해리 콜린스는 "상대성 이론의 타당성을 의심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6]라고 말한 바 있고 사회구성주의와는 좀 떨어졌지만 저명한 학자인 브뤼노 라투르도 과학을 이미 정립된 '과학'과 아직 정립되지 않은 '연구'로 나누고 진화론과 같은 '과학'은 연구와 달리 합리적이고 증명된 것이고 누구나 인정할 만한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7]

2.2. 과학전쟁의 발발

이하의 내용들은 '송성수. (2005). “과학전쟁”과 그 함의. 한국과학기술학회 강연/강좌자료, (), 33-51.', '이영희. (2001). “과학전쟁”을 넘어서: 과학기술사회학의 발전방향에 대한 한 제언. 한국사회학회 사회학대회 논문집, (), 411-424', '홍성욱. (2003). 소칼 논쟁, 그 이후. 과학사상, (44), 119-144'을 참조해서 작성되었음을 밝힘.

1990년대에 이르자 이러한 사회구성주의자들의 상대주의적 과학관과 몇몇 극단적인 주장이 팽배해졌다. 일례로 파이어아벤트는 강연 중 대체의학, 초능력이 현대과학과 별 다를 바 없는 동등한 과학이며 자신은 텔레파시가 있다는 주장을 지지한다고 밝힌 바 있다.[8] 파이어아벤트는 사회구성주의 내에서도 좀 극단으로 치우쳤으니 무시하고서라도 페미니즘적 과학학의 거두로서 사회구성주의 안에서 나름 인지도 있는 샌드라 하딩도 실증주의에 기반한 과학적 방법이 전부 남성주의의 산물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9] 하딩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바이마르 공화국 문화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는데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과 일반 상대성 이론은 각각 1905년, 1915년에 발표되었고 바이마르 공화국은 1919년에 수립되었다. 혹자는 이것이 바이마르 공화국 이전 시절에는 상대성 이론이 대중들에게 진리로서 잘 안 받아들여졌다(엉터리라는 둥)가 바이마르 시절의 혼란상으로 인해 대중들이 상대성 이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주장이지 단순한 연도 문제는 아니라고 지적하기도 하지만 이런 관점도 상대성 이론의 유명세를 바이마르 공화국의 산물로 취급할 수 있는 논리지, 상대성 이론의 존재 자체를 바이마르 공화국과 연계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당시 전 세계의 수많은 관련 분야 석학들이 검증과 토론을 통해 시간을 들여 상대성 이론을 이해 및 검증하고 이를 받아들인 시점이 우연히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와 맞물린 것뿐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상대성 이론의 검증과 연구에 무슨 기여를 한 것도 없고 상대성 이론의 전파가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시작했거나 그 중심으로 퍼져나간 것도 아니다. 즉 어떤 관점에서 보든 하딩의 주장은 말 그대로 무리수였다. 그리고 이런 주장은 페미니즘의 입장에 선 사회구성주의자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비록 많은 사회구성주의자들은 과학과 과학적 방법을 인정하지만 위와 같은 반과학적 주장들을 "탁월한 업적이다, 명쾌한 분석이다."라고 칭찬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에 분개한 과학자들은 본격적으로 이에 반격하기 시작했다.[10] 1992년 영국 런던대학의 생의학 교수 루이스 울퍼트(Lewis Wolpert)가 <과학의 비자연적 본질>(The Unnatural Nature of Science)에서 과학에 대한 몰이해가 상대주의적 과학관의 기반이 되었다고 주장한 후 1993년 스티븐 와인버그는 <최종이론의 꿈>(Dreams of a Final Theory)을 출간하며 과학에 대한 철학의 무용론을 내세웠다. 이에 대해 사회구성주의의 선구자인 콜린스와 핀치가 과학의 사회적 성격을 보여주는 <골렘: 모든 사람이 과학에 대하여 알아야 할 것>(The Golem: What Everyone Should Know about Science)[11]을 출판하자 영국의 몇몇 과학자들이 <골렘>이 과학의 이미지를 왜곡했다고 비난하였고 1994년 영국 과학 진흥협회의 모임에선 울퍼트와 콜린스의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후 과학전쟁은 우즈홀 해양생물학 연구소장 폴 그로스(Paul Gross)와 럿거스 대학교 수학 교수 노먼 레빗(Norman Levitt)이 1994년에 <고등미신>(Higher Superstition)을 출판하면서 포스트 모더니스트, 과학 사회학자, 페미니스트 등을 "강단 좌익"(Academic Left)로 규정해 이들이 반과학을 유포시키며 과학을 공격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더욱 격렬해졌다. 이들은 1995년 여름 뉴욕과학아카데미의 후원으로 열린 대규모 학술대회에서 과학사회학에 비판적이었던 사회과학자, 인문학자들과 함께 다시 한 번 과학 사회학을 비판했다.

<고등미신>의 주된 비판의 대상 중 하나였던 <소셜 텍스트>(Social Text)의 편집장 앤드류 로스(Andrew Ross)는 '과학 전쟁'이라 이름 붙인 특집 호에서 과학자들의 공격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거나 반격했지만 이후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와의 인터뷰에서 여기에 실린 논문 중 뉴욕 대학의 수학 교수 앨런 소칼(Alan Sokal)이 쓴 <경계를 넘어서: 양자 중력의 변형적 해석학을 향하여 [Transgressing the Boundaries: Toward a Transformative Hermeneutics of Quantum Gravity]>가 날조된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소칼 사건이다.

스티븐 와인버그는 소칼 사건을 계기로 사회구성주의자들의 주장은 허무맹랑하단 점이 드러났고 과학 법칙이란 객관적으로 실제로 존재한다고 주장했고 이에 프린스턴 대학의 과학사 교수인 와이즈(Norton Wise)가 사회구성주의의 주장은 실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반박했다. 이러한 공방은 1997년 초에 와인버그의 배후 공작으로 와이즈가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 과학학 교수직에 임용을 저지 당하는 "와이즈 사건"으로 이어졌다.

한편 같은 년도 앨런 소칼이 루벵 대학의 물리학 교수인 장 브리크몽(Jean Bricmont)와 함께 문제의 책 <지적 사기>(Fashionable nonsense)를 발간해 프랑스 이론가들과 과학 사회학자들을 비판하고 이에 여러 진영에서 <지적 사기>를 지지하거나 비판하는 움직임을 보이며 과학 전쟁은 점점 더 치열해져 갔다.

2.2.1. 왜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는가?

과학전쟁 당시 과학자들과 과학 사회학자들은 서로의 주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타협점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했는데 홍성욱(2003)은 과학자들과 과학 사회학자들의 서로 다른 글쓰기 스타일과 과학의 본질에 대한 생각에서 그 이유를 찾았다.[12]
홍성욱(2003)에 따르면 과학사회학은 과학철학,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만하임의 지식사회학, 위르겐 하버마스 등의 영향을 흡수해서 만들어진 분야로, 사회학 일반보단 과학사, 과학철학 등 인문학에 더 많은 공통점을 보인다. 인문학자들은 많은 경우 은유적 표현 같은 수사법을 동원해 글을 저술하고 인문학 저술을 읽을 때 '그것이 전부 옳은가' 보단 '그것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가'에 집중하는데 이러한 수사법과 설득력은 글의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는 능력, 맥락화(contextualization)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반면 과학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명제의 진위, '그것이 전부 옳은가'다. 이들은 수사적 표현을 멀리하며 참과 거짓을 분별해 명제의 진위를 논리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다. 따라서 인문학자들의 '맥락화를 통한 이해', '수사법'은 이들의 문화가 아니다.

이들의 차이는 과학의 본질에 대한 생각에서 더욱 두드러 지는데, 과학전쟁에서 과학을 옹호한 과학자들에게는 자연과학이란 객관적 증거와 이성에 의한 합의를 통해 진리에 가까워지는 과정으로, 여기엔 오직 참과 거짓만이 존재할 뿐 정치적 성격의 협상과 타협이 개입할 수는 없다. 반면 과학 사회학자들에게 지식이란 문화의 일부로, 이들은 세상을 참과 거짓이라는 이분법으로 나누지 않는다. 이들이 보기에 과학 역시 구성, 설득, 타협의 과정을 거치며 과학이 밝혀낸 참과 거짓이라는 범주 자체가 역사적으로 형성되었고 끊임없이 변하며 거기엔 사회적 협상과 권력관계가 개입되어 있다.

2.3. 과학 평화

1997년 이후 솔직한 의견 교환이 침묵보다 낫고 근거가 있는 것이라면 과학에 대한 예찬과 비판 모두 환영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과학전쟁을 '과학평화'로 바꾸자는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1994년 영국의 더럼, 1997년 초 미국의 칸사스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는 서로 공격하기 바빴던 지난 시절과 달리 좀 더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과학자들과 과학사회학자, 역사학자들의 논의가 진행되었다. 1997년에 열린 '과학평화 워크숍' 역시 좀 더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과학자들과 과학학자들 간의 의견 교환이 이루어졌으며, 2001년에는 과학자 라빙거(Labinger)와 과학사회학자 콜린스가 공동으로 이전의 주장들과 비판, 반론들을 한데 모은 <하나의 문화?>(The One Culture?: A Conversation about Science)가 출판되기도 하였다.

3. 여담

과학자 에드워드 위튼은 과학전쟁 사태에 대하여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 개념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위튼이 사회구성주의 진영의 편을 들어준 것으로 보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초끈 이론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론이며 과학의 종결이라고 주장했다.

4. 비슷한 논쟁

이런 마찰이 일어나는 또 다른 분야로는 뇌과학 분야가 있다. 이는 간단히 말해 '자유의지가 있느냐?'의 여부에 대한 찬반에 따라 진영이 나눠진다. 당연히 샘 해리스를 위시한 신경과학이나 정신의학 쪽은 자유의지는 없고 인간의 사고와 판단은 생화학적, 전기적 반응의 산물이라고 본다. 다음과 같은 기사에 드러나는 시각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시각에 대해 일부에서는 인간을 단순한 유기체로 격하시키는 이야기라며 우생학이나 홀로코스트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이는 명백하게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을 혼동하는 착각이다. 단순한 유기체이니 함부로 다뤄도 된다는 생각 자체가 이미 뇌과학과는 거리가 멀다 못해 아예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고 자연물에 대한 인간중심주의적 사고방식을 기저로 둔 가치판단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현상은 인류가 새로운 지식들을 밝혀낼 때마다 흔하게 일어나던 가치관의 혼란일 뿐이다. 물론 이로 인해 벌어질 미래의 일들에 대한 우려도 있겠지만 말이다.[13] 이러한 가치관의 혼란은 물론 중요한 문제지만 그걸 가지고 과학에 무작정 태클을 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는 과학자들도 물론 고려해야 하지만 오히려 '자유의지는 없으며 인간의 사고와 판단은 생화학적, 전기적 반응의 산물이다'는 가치중립적 사실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인문, 사회 분야에서 주도적으로 노력하여 해결해야 할 문제다. 그리고 인간의 사고와 판단이 생화학적, 전기적 반응이라는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는 것이지 그것이 인문학적 개념에서 '무엇'인지는 말하지 못한다. 물을 유리잔에 담든지, 플라스틱 컵에 담든지, 그것이 '용기에 담긴 물'이라는 것이라는 관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자유의지란 좀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작용하는 것이다. 미시적이고, 수단적인 것과 거시적인 것을 똑같은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은 인식의 오류를 낳을 수 있다. 요약하자면 환원적 사고의 오류라는 것이다.

수학 분야에서는 구체 vs 추상의 대립구도가 있다. 구체수학이란, 간단히 말해 "현대수학이 형식주의, 연역적 방법론에 빠져 일반화와 추상화를 거듭하다 뇌절하여 현실세계와 유리된지 오래이므로 물리학, 뇌과학 등 보다 현실적인 주제를 위한 수학 연구를 증진해야 한다"는 담론이다. 반면 추상수학은 형식을 지키며 논리적 모순만 없다면 아무거나 다 할 수 있다는 자유로운 수학을 추구하는 진영으로, "수학은 인문학이다! 현실보다 흥미로운 주제가 얼마나 많은데 왜 과학적 얘기만 하라는거냐!"[14] 하는 태도를 보인다. 쉽게 말해 [math(6·9=54)]이기는 하지만, [math(6·9=42)] 같은 터무니없어보이는 식도 대수적 구조를 잘만 정의하면 아무 문제없이 참일 수 있다는 것.

이런 차이는 20세기 냉전시대에는 상호 교류가 제한적이었다가 1990년대에 소련 해체를 계기로 소련 수학자들이 영미권, 중서부 유럽으로 대거 이직하면서 연구현장에서 화제에 오르기 시작했다. 소련 수학계는 대체로 응용수학, 실용수학, 과학적 목적에 부합하며 물리학 및 공학 연구에 기여하는 실용적 학풍을 형성했는데, 이들은 탈냉전기에 여행과 해외 진출이 자유로워지면서 대거 유럽과 영미권과 전세계로 이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서방으로 옮겨간 이들 동구권 수학자들은 니콜라 부르바키에게서 이어진 엄격한 형식주의, 연역논리, 일반화로 점철된 추상적, 철학적 학풍을 이어온 이른바 '프랑스 수학자'들과 직접 교류하며 상당한 컬처쇼크를 받았다. 결국 동역학계, 심플렉틱기하 분야의 대가로서 냉전 이후엔 러시아에서 프랑스 파리로 옮겨 활동하던 블라디미르 아르놀트는 현실로부터 유리된 프랑스 학풍을 프랑스어로 비판하며 "러시아에서는 죽은 사람한테 나쁜 말 하는 건 실례입니다. 그래서 부르바키 얘기는 안 하려고요"하는 불꽃 패드립을 시전했다. 이에 이어지는 反부르바키 저격을 보다못한 대수기하학의 거목이자 역대 최연소 필즈 메달리스트이자 니콜라 부르바키의 코어 멤버였던 장피에르 세르가 비분강개하여 반격에 나서 "아르놀트-세르 논쟁"이라는 수학철학적 키배가 벌어졌다.

5. 관련항목


[1] 김동광.「」20052STS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94p[2] 김환석. (2012). ‘사회적인 것’에 대한 과학기술학의 도전. 사회와이론, (), 43[3] 조인래. (2003). 20세기의 과학 전쟁. 철학사상, 16(spc1-3), 396-397 참조. 그러나 조인래(2003)에 따르면 스트롱 프로그램의 이론적 논변은 독창적이라기 보다 기존 철학계에 등장한 논의들을 자신들의 목적에 맞추어 끌어다 쓴 경우가 많고 이들이 예시로 제시하는 사례들에 대해 전통적 과학관의 논의 역시 없지 않다.[4] 김환석. (2012). ‘사회적인 것’에 대한 과학기술학의 도전. 사회와이론, (), 43[5] 홍성욱. (1998). 과학의 권위와 그 비판자들. 문학과사회, 11(3), 1170[6] Harry Collins 외 1인, '골렘: 과학의 뒷골목', 이충형 역, 새물결, 2005[7] 홍성욱 외 7명, '과학철학: 흐름과 쟁점 그리고 확장', 창비, 2011에서 재인용[8] E. Selinger 외 1인 편집, 'The philosophy of experience',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6[9] Harding, S.(1986), The Science Question in Feminism, Ithaca: Cornell Univ. Press[10] 송성수(2005)에 따르면 과학사회학에 대한 과학자들의 직접적인 공격이 시작된 것은 1990년대 과학에 대한 재정적인 지원이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한 것도 한 몫 한다. ('별들의 전쟁'이라 불리는 전략적 방위 계획의 종말, 대규모 입자 가속기인 초전도 슈퍼콜라이드(SSC) 건설에 대한 지원 중단 등.)[11] 국역본은 골렘: 과학의 뒷골목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12] 홍성욱. (2003). 소칼 논쟁, 그 이후. 과학사상, (44), 130-131 참조[13] 일각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가치관이 종래에는 인간이 다른 생물과 구분되는 특별한 존재라는 일반적인 인식에 기대고 있다가 그런한 인식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에 직면하면서 그 기대고 있던 가치관까지 흔들린 셈인 것이다."라고 하지만 인간이 다른 생물과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라는 인식과 과학적 환원론으로 인해 인간이 더이상 존중받지 못하게 되는 일이 벌어지는 걸 우려하는 인식은 상당히 다른 문제다. 과학자들 중에 후자를 전자로 자꾸 물타기하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글에도 썼지만 이는 결국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타인들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인식을 드러내는 꼴에 불과하게 된다.[14] 허준이 박사와 황준묵 박사의 발언이다. 공교롭게도 두 인물은 모두 물포자 물리학과를 나왔음에도 조합대수기하, 복소기하 등 추상적인 주제를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