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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025000><colcolor=#ece5b6> 후초 초대 황제 의제 | 義帝 | |||
| 출생 | 연대 미상 | ||
| 사망 | 기원전 206년 (향년 미상) | ||
| 후초 침현(郴縣) (現 후난성 천저우시) | |||
| 능묘 | 의제릉(義帝陵) | ||
| 재위기간 | 후초 회왕 | ||
| 기원전 208년 ~ 기원전 206년 | |||
| 후초 황제 | |||
| 기원전 206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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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 | 심(心) | ||
| 묘호 | 없음 | ||
| 시호 | 없음 | ||
| 존호 | 의황제(義皇帝) | ||
| 왕호 | 회왕(懷王) | }}}}}}}}} | |
1. 개요
고대 중국의 진나라 말기와 초한쟁패기의 인물. 초나라의 유일한 황제.[2][3] 성은 미(羋), 씨는 웅(熊), 휘는 심(心)이다. 의제가 군주로서 존재하던 초나라는 후초(後楚)라고도 부른다.2. 생애
시황제에 의해서 초나라가 멸망한 후, 중국을 통일한 시황제와 진나라 조정의 눈을 피해서 웅심은 양치기로 숨어 살고 있었다.초 의제 원년(기원전 208년), 진나라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중국 대륙 전역에서 옛 6국을 재건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초나라의 방계 왕족이자, 귀족 출신인 경구(景駒)가 초왕(楚王)이 되어 팽성(彭城)에서 웅거하자, 강동의 회계(會稽)현 오현에서 세력을 키운 항량(項梁)과 송의(宋義)는 왕실 직계로 정통성이 경구보다 훨씬 앞서는 웅심을 찾아내어 초나라의 회왕(懷王)으로 추대했다. 초회왕은 전국시대 시절 초나라의 왕으로 말년 진나라에 속아 억류되어 고초를 겪다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사망해 초나라 사람들에게서는 '진나라 압제의 희생자'라는 아이콘으로 남았는데, 웅심을 회왕으로 추대하여 초나라 유민들을 끌어모으는 효과를 가질 수 있었다.
경구의 세력을 쓸어버리고 진나라 수도 함양으로 진격하던 중 항량이 죽자 송의가 항량의 죽음을 예견했다는 얘기에 송의를 상장군으로, 항량의 조카 항우를 차장으로 봉하면서 항씨를 토사구팽[4]하려 했으며, 또한 거친 항우의 대체재로 유방(劉邦)을 중용했으나 송의는 항우에게 피살되고, 유방도 관중에서 항우의 공격에 굴복하고 만다.
초 의제 3년(기원전 206년) 정월, 항우는 웅심을 명목상 초나라 천자 의제(義帝)로 높여주었다. 같은 해 2월, 항우가 18국의 제후를 분봉할 때에는 초 의제의 오른팔이 되어줄 만한 유방을 한왕(漢王)[5]으로 임명해 서로 떨어뜨려놓아, 항우에게 실권을 빼앗겨서 이름만 황제였다. 결국은 항우가 자신이 만든 제후국인 서초(西楚)의 도읍을 팽성(彭城)으로 정하였고, 그로 인해서 원래 초나라 도읍인 팽성에서 쫓겨났다. 결국은 항우에 의해서 새로운 도읍인 침성(郴城)[6][7]으로 쫓겨나는데, 항우는 구강왕(九江王) 영포(英布), 형산왕(衡山王) 오예(吳芮), 임강왕(臨江王) 공오(共敖)를 시켜서 강을 건너던 초 의제 일행을 습격했고, 초 의제는 피살되기 전에 스스로 강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다행히 강 건너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이 이를 보고는 밤중에 몰래 초 의제의 시신을 건져내서 장례를 치렀다. 이후 삼진을 평정한 유방이 신성(新城)의 삼로(三老) 동공(董公)에게 의제가 죽은 정황을 듣고 사흘 동안 곡한 뒤 천하에 의제를 죽인 대역무도한 항우를 치겠다고 선포했다.
이후 그의 혈통에 대한 기록은 일부 성씨 문헌을 통해 전해진다.
일반적으로 류(柳)씨는 노나라의 유하혜를 시조로 하는 계통이 널리 알려져 있으나, 『백가성원(百家姓源)』과 『통지(通志)』 등의 성씨 기록에는 초 의제의 후손이 류(柳)씨와 침(郴)씨로 분파되었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이러한 사료를 바탕으로 일부에서는 류(柳)씨의 기원을 초나라 왕족(웅씨) 계통과의 연관성 속에서 이해하기도 한다.
3. 평가
역사가들은 초 의제 시해 사건을[8] 항우의 결정적 몰락 원인 중 하나로 꼽는다.[9] 항우는 신하가 황제를 시해한 역모를 저지른 역적이 되었기 때문에 이 사건 이후로 그 어떤 제후들에게서도 믿음을 얻지 못했다. 진심 어린 충성을 얻지 못하게 되자 제후들이 항우에게 등을 돌리는 경우가[10] 많았으며, 도움을 받으려 해도 지원하는 시늉만해서 골치를 썩여야 했다. 이런 악영향은 항우에겐 어마어마한 타격이었다.당장 진나라의 간신, 역신이자 중국 역사상 최초의 황제시해자 조고가 자기가 모시던 이세황제를 시해한 사건이 아직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인데 항우가 조고처럼 자기가 모시던 의제를 죽이면서 항우는 더 이상 초를 중흥시키고 천하를 구한 영웅이 아니라 조고와 똑같은 역적, 황제시해자로 낙인찍혔을 것이다. 항우의 저러한 황제 시해 행위는 천하에 대놓고 "나는 천하를 망친 진나라의 간신, 역적, 황제시해자 조고와 다를 게 없는 놈이니 나를 어서 토벌해라."라고 천하에 선언하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만행이었다. 자기들이 조고의 폭정 때문에 진나라에 반기를 든 것인데 조고와 똑같은 짓을 했으니 이때부터 항우는 조고처럼 토벌되어야 하는 극악무도한 역적이 되었고 제후들에게는 황제를 시해한 천하의 역적 항우를 죽여도 된다는 매우 좋은 명분을 준 셈이다.
그래봐야 초나라 안에서 벌어진 일인데 왜 다른 나라 제후들이 남의 나라 일을 신경 쓰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초 의제는 말 그대로 초나라를 대표하는 군주이고 다른 나라에 주는 소속감은 미미했다.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 할 사실이 초 의제는 명목상이기는 해도 반진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거기다 다른 나라 제후들도 후초를 형식적이기는 해도 황제국으로 받드는 제후들이기에 완전히 남의 나라 일은 아니다. 이후 한나라만 해도 의제 살해에 동참한 오예와 영포가 평범하게 부귀영화를 누리기도 했다. 하지만 항우는 그 초나라에서, 초나라를 일으키겠다고 일어난 사람이며, 아무리 항우가 실질적으로 천하를 제패한 제1인자 권신이고 의제가 명목상 데려다 앉혀놓은 황제라 해도 일단은 섬겨야 하는 것이 신하된 도리였다. 그 나라의 황제를 그 나라의 신하가 죽였으니 다른 나라 사람이라고 해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거기다 어쨌든 제후국들도 후초를 형식적으로는 황제국으로 인정했으니 황제국 후초를 무너뜨린 항우는 반역자인 것이다.
항우는 이전에도 초 의제를 죽이기 전에 이미 항복한 진왕 영자영을 의제의 허락도 받지 않고 멋대로 죽였다. 그나마 진왕 자영은 개인으로 보면 고작 즉위한 지 46일 만에 항복을 해야 했을 정도로 상황이 막장이었고 이는 본인의 잘못은 아니기 때문에 억울한 케이스는 맞지만 그래도 진나라 지역 외의 제후들이나 그곳의 백성들 입장에서는 넘어갈만 했다. 진왕 자영 개인은 폭정을 저지른 바도 없어서 억울하겠지만 반진 세력 입장에서 진나라는 자기들 조국을 멸망시킨 데다 정복한 지역에서는 가혹한 통치를 벌인 증오스러운 국가였으니 말이다. 약법삼장으로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던 유방조차도 결국은 진나라를 실질적으로 멸망시켰으니 말 다 한 셈이다. 하지만 그 자영도 엄연히 한 나라의 군주인 데다 항복하면 목숨을 건져주겠다는 약속을 깨버린 항우는 이때부터 약점이 하나 생긴 판이었다. 다른 나라의 바지사장이라지만 어찌 됐건 명색이 천하의 맹주인 황제인 데다 반진 세력의 맹주인 것도 사실이었으니 명분상으로나 실리적으로나 제후들이 항우가 초 의제를 죽인 것에 주목하고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결국 자국의 군주마저 멋대로 죽였으니 항우에게는 자신이 공공의 적이란 것을 변명할 여지조차 없어졌다.
고대 세계에선 천하를 통일하고 천명을 이어받은 황제의 정통성은 어마어마하며, 일단 천하에 유일한 군주로서 자리매김하고 그것이 인정된 순간 불가침의 영역에 놓인다. 천자, 즉 하늘의 아들로서 천하를 아우르는 하나의 힘이자 가치관이며, 윤리와 질서가 된다. 간단히 말해, 중국 천하 내에선 신이나 다름 없는 존재가 되며 흔들려선 안 될 천하라는 집의 대들보와 기둥이 되는 것. 황제가 흔들리고 그 권위가 신하에게 침해당하며 침범당하는 순간 천하의 가치관과 윤리는 붕괴되며, 여러 번 역사에서 드러났듯 전 중국은 전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그렇기에 황제와 황족 사이, 그리고 황족과 그렇지 못한 신하 사이의 간격은 어마어마하게 커진다. 당장 자신의 딸이 황제의 귀비나 황후로 들어간 순간 부모가 딸에게 절하며 존댓말을 써야 하고, 제위에 오르지 않았다면 황제의 친아버지마저 황제에게 절하고 예를 갖춰야 했던 시대다. 한참 후의 왕망이나 동탁, 조조, 사마의 등 숱한 권신들이 찬탈을 일삼으며 권력을 빼앗고 황제를 핍박했지만, 이들 입장에서도 금상의 황제를 황제 신분으로 죽이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으며, 시도하지도 않았다. 그만큼이나 황제라는 자리가 주는 정통성과 힘이 컸기 때문이다. 괜히 이후의 권력자들이 제위에 오른 자를 죽이더라도 일단 황제를 다른 자로 바꾸고 나서 역모를 꾀했다고 구실을 씌워 죽이든, 양위시킨 후 신하로 만들어 죽이든 굳이 귀찮게 일을 벌려가면서 황제 자리에서 몰아낸 다음 죽인 게 아니다. 황제는 천자로서, 온 중국을 아우르는 절대자이자 이들을 아우르는 하나의 힘이기 때문이다.
당장 항우가 의제를 죽이고 나서, 괜히 육국이 들썩거리고 유방을 비롯한 반 항우 세력이 들고 일어난 게 아니다. 황제라는 힘으로 천하를 아우르던 상징이 신하에 의해 제거되어 버리면, 저 놈은 불충한 패륜아라고 몰기도 딱 좋으면서도 나는 못할 게 뭐냔 생각을 가진 각지의 실력자들이 들고 일어나기 딱 좋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하게, 몇 백 년 후 한나라의 뒤를 이은 조위의 황제 조모가 백주대낮에 신하인 사마소의 수하 성제에게 칼에 찔려 살해당하자, 그 조위를 쥐락펴락하던 권력자 사마소마저 크게 당황해 멘붕했고 무너진 조위를 이어받은 사마씨의 진나라는 몇 대 가지도 못하며 곧바로 대규모 이민족의 침범으로 오호십육국 시대를 맞아 허무하게 무너져 버렸다.[11]
이는 사마씨가 신하로서 현역에 있는 죄 없는 금상 황제를 죽인 결과 전통적인 이데올로기가 무너지면서 사마씨와 서진은 정통성에 커다란 타격을 입고 끊임없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황제가 신하에 의해 죽어버리자, 그 이후 거리낄 게 없어져 서로 끊임없이 숱하게 황제를 죽이고 제위를 찬탈하는 대혼란기가 벌어지고야 만다. 그만큼, 금상 황제를 죽이는 일은 천하에 굳건히 자리잡고 있던 가치관을 깨부수고 대혼란을 가져오는 일이기에 권력자로서 현 황제를 죽이더라도 새로운 지배자로서 자리를 굳히는 건 요원한 일이 되고 만다. 끊임없는 내부와 외부로부터의 도전과 정통성의 시비, 그리고 "너도 했는데 나도 못할쏘냐"는 반란을 버텨야 하기 때문이다.
일단 항우의 기존 부하들은 대부분이 항우가 그런 인간인 줄 진작부터 알고 있었거나 그의 용맹함 및 패왕 항우의 휘하에서 얻을 이익을 보고 모여든 자들이라, 의제 시해를 이유로 당장 실망하고 바로 항우를 통수치는 부하는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하들에게도 아무 영향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 사례로는 영포가 있는데, 의제 시해 전까지만 해도 신안대학살 등의 악행을 일선에서 수행했던 영포는 유방의 일가족을 놓치자 항우의 신임을 잃었고 유방의 대의명분에 어깃장을 놓으려는 항우가 자신이 죽인 게 아니라 영포가 시해한 것이라며 언플을 하기 시작하자 영포는 이때부터 항우와 유방 사이에서 간을 보기 시작한다.[12] 그러던 중에 유방이 파견한 수하가 "한나라가 져서 망한다고 칩시다. 그런다고 초나라가 잘 돌아갈 리 없지 않습니까. 항우는 의제를 시해한 역적이오. 천하가 항우를 순순히 따르며 두고볼 것 같소?"라고 지적하자 반박하지 못했고, 이후 한나라로 오면 구강 땅의 통치권을 완전히 보장해 줄 수 있다고 제안하자 한군으로 귀순하고 항우를 공격했다. 영포뿐만이 아니라 서초패왕의 부하 장수 중에서 한왕 유방이 쳐들어오자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투항한 경우도 있다. 황제를 시해한 흉악한 역적 서초패왕이 무서워서 억지로 섬기고 있었던 자들은 그 황제의 원수를 갚기 위한 정의로운 군대를 이끄는 아주 매력적인 대의명분을 갖춘 유방이 오자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13]
이렇게 명분이 떨어진 상황에서 그나마 영토 분봉이라도 후하게 해주었다면 세력을 강하게 유지하는 것은 가능했을 터였다.[14] 하지만 항우는 그런 유리한 면마저 스스로 버린다. 항우는 육국을 이전의 판세로 완전히 부활시키지도, 그렇다고 공을 세운 자들에게 영토를 전부 몰아주지도 않는 애매한 분봉을 함으로써 그 누구도 완전히 만족시키지 못했다. 더군다나 항우의 난폭한 성품과 무능한 정치력, 졸렬함은 익히 알려져 있었기에 제후들은 항우를 따를만한 리더로 여기지도 않았다. 때문에 항우는 결국 실리도 명분도 잃고 임금을 시해한 역적으로 전락하여 천하에 고립되어 싸우다가 패망하는 최후를 맞이한다.
사실 이 부분은 항우의 유년기와 이때까지의 행적을 보면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그는 어려서 항량에게 길러질 때 이것저것 배우긴 했지만 전부 곧 흥미가 떨어져 깊이 배우지 않았다. 달리 말하면 그에게 이런 정치적 상황을 고려할 식견은 없었다는 것으로[15] 이렇게 학문이나 정치에 담을 쌓은 인물이 전란 와중에 요직에 오른 것은 비극의 시작인 셈이다.
물론 항우 입장에서도 할 말이나 그런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긴 하다. 위에도 언급되었듯이 한낱 양치기로 살던 의제를 지금의 자리에 올린 것도 숙부인 항량과 항씨 가문이었고, 초나라는 사실상 항량과 항씨 가문이 부활시켜놓은 것인데 그런 항량이 죽고 나니, 항우를 푸대접하고 항씨 가문을 토사구팽하려 한 것은 의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려두면 유방과 손을 잡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이런 항우의 감정도 이해 못할 건 아니긴 하나 이런 상황에서는 의제의 실권을 아예 빼앗은 뒤 허수아비로 만들어 구석에 처박아 버리거나 선양을 받아 본인이 황제에 오르던가 정 죽일 거라면 천하가 어느 정도 안정된 다음에 몰래 독살을 하거나 사고사로 위장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처리를 했어야 했는데 대놓고 죽여버리면서 천하에 내가 반역자라고 스스로 공표한 꼴이 되어버린 게 문제.
4. 기타
- 당시 사람들이 정통성 있다고 널리 인정할 만큼 직계에 가까운 초나라 왕족 혈통인 것은 확실하지만 기록이 정확하지 않아 가계에 대해선 초회왕의 손자 혹은 현손이라는 설과 초나라 마지막 왕 부추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 흔히 그를 명분상의 군주라고 보는 학자도 있으나 그렇지 않다. 그는 후초 황제로서 직위를 실제로 행사하였고[16] 자신만의 세력도 가지고 있었으나 세력이 항우에 비해 미약했을 뿐이다.
- 후손들은 그가 항우에 의해 쫓겨난 곳이 침성(郴城)[17] 땅이었는데 성씨를 웅씨(熊氏)에서 유씨(柳氏), 침씨(郴氏)로 바꾸었고[18] 현재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초의제의 후손들은 실제로 유(柳)씨, 침(郴)씨라 칭했다.
- 류(柳)씨 성을 사용하는 일족은 기원에 따라 춘추전국시대 노나라(魯)에서 유래한 북방계 계통과, 초나라(楚)에서 유래한 남방계 계통으로 나뉘어 서술되기도 한다. 이는 동일한 성씨를 사용하나 혈통적으로는 서로 다른 계통일 가능성을 시사한다는 견해가 있다.
- 일부 성씨 계보 자료에서는 초 의제(楚義帝)의 후손이 북방계가 아닌, 초나라의 핵심 권역이었던 장강 유역(형주 일대)의 남방계 계통과 연결된 것으로 서술되기도 한다.
"柳氏 出自楚國, 楚義帝之後" 류씨(柳氏)는 초나라에서 나왔으며, 초 의제의 후손이다.
『백가성원(百家姓源)』
『백가성원(百家姓源)』
"熊氏,楚王族也,其後有柳氏" 웅(熊)씨는 초나라 왕족이며, 그 혈통의 후대에 柳씨가 있다.
『신당서(新唐書)』 宰相世系表
『신당서(新唐書)』 宰相世系表
“義帝之後,有子孫者,其後分為柳、郴二姓” 초 의제의 후손 가운데 자손이 있었고, 그 뒤에 柳와 郴 두 성으로 나뉘었다.
『통지(通志) 卷二十九 씨족략(氏族略)』
『통지(通志) 卷二十九 씨족략(氏族略)』
- 이후 郴(침)씨가 독립된 성씨로 지속되었다는 기록은 제한적으로 전해지며, 이에 따라 일부에서는 郴이 성씨라기보다 지역명을 가리키는 표현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 초의제가 팽성에서 침성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살해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황제와 일족들이 함께 침성으로 유배되어 이동하는 도중에 항우의 부하의 습격을 받았다는 설이다.
- 조선시대의 문신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이 사람을 기리기 위해 썼다. 물론 이는 항우의 의제 시해를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고 사사한 일에 비유한 것이다. 이로 인해 결국 화를 입었다.[19][20]
- 조선 중기의 의병장 정문부도 초의제를 기리기 위한 시를 썼다가 역모 혐의에 몰려서 사망했다. 그만큼 초 의제는 군주의 역린을 거스르는 주제였던 것이다.
5. 대중매체
정확한 생년월일은 불명이나 항우에게 휘둘린 나약함을 직관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많은 대중매체에서 어린 나이에 시해당하는 소년 군주로 나온다.- 만화 <문정후 초한지>에서는 자신에게 인사를 올리는 항우를 속으로 무섭다고 느끼고 있으며 반대로 패공 유방의 인품은 얼마나 온화하냐고 생각하며 항우보다는 유방이 황제가 되는 게 천하 백성들을 위해 옳은 일이라고 여긴다. 이후 항우와 유방에게 둘 중 먼저 관중에 입성하는 자는 관중왕에 봉할 것이고 늦게 들어간 사람은 신하가 되어야 한다고 공표한다. 항우와 유방은 이에 동의했으나 의제의 바람과는 달리 유방이 먼저 관중에 도착했음에도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결국 항우는 기어이 유방을 파촉으로 쫓아낸 후 관중왕에 올라 결국 유방에게 제위를 넘기려는 의제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는다. 이후 의제는 침주로 쫓겨나는데 사실 그건 항우의 계략이었고 항우의 명을 받은 영포 등이 의제를 습격하여 의제를 해하려 한다. 궁지에 몰린 의제는 항우에게 저주를 남기며 물로 뛰어들어 자살한다. 그는 비극적으로 죽었지만 훗날 해하 전투에서 항우가 죽고 유방이 자신의 뒤를 잇는 천하의 황제가 되면서 유방에게 제위를 넘기려고 했던 의제의 꿈이 이루어졌다.
- 2012년 중국 드라마 <초한전기>에서는 배우 희신목이 연기했다. 의제의 충신으로 나오는 송의를 통해 항우를 견제하려 시도한다. 그의 바람대로 송의는 일부러 의제에게 군사를 동쪽과 서쪽으로 양분하여 진나라를 칠 것을 제안하고 당연히 항우는 반대하나 결국 송의의 제안이 먹혀들어가고 한쪽은 유방이, 한쪽은 송의가 이끄는 항우군이 진격하는데, 가뜩이나 병사들을 재촉해도 모자랄 판에 일부러 군대를 진격시키지 않고 추위를 피할 곳도 먹을 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술판이나 벌이며 군대를 지연시키지만 정작 송의는 제나라와 내통한 죄로 항우에게 끔살당하고 항우가 순식간에 권력을 장악하는 바람에 의제는 고립되고 만다. 이후 유방도 파촉으로 반강제로 쫓겨나자 이번엔 장이, 진여를 시켜 항우에게 맞서려 했으나 오히려 진여는 항우에게 붙고 장이는 달아났으며 모든 일을 의제가 꾸몄다고 자백한 의제의 부하의 혀를 항우가 잘라버리는 한편 그 부하를 직접 죽이라고 검을 쥐어주자 마지못해 그의 심장에 칼을 밀어넣어 죽이고선 곧바로 기절한다. 최후 또한 원 역사에 맞먹을 만큼 비참한데 결국 항우에게 쫓겨나 피난을 가게 되면서 비록 항씨 일족에게 옹립된 황제라고는 해도 한때 황제였던 인물이 추위에 떨면서 옆에 음식이 가득한데도 상한 음식이나 먹으라는 소리나 들으며 그의 호종 군사들에게 물이나 음식 좀 달라고 구걸하고 병사들은 그를 모욕하는 참으로 비참한 처지가 되었다. 이때 웬 군사들이 갑자기 달려와서는 그들을 모두 활로 쏴 죽이자 의제는 마차 밑으로 숨는데 이들은 종리매가 이끄는 군사들이었다. 종리매는 자신이 너무 늦어서 의제가 욕을 봤으니 그 죄가 크다고 하고 의제는 그를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자 의인이라고 치켜세운다. 의제는 일단 배가 너무 고프니 의제를 호의하던 군사들이 먹던 닭고기부터 먹고 말하자며 허겁지겁 닭고기를 먹고 종리매는 다 먹으면 떠나야 하니 천천히 드시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의제는 종리매를 자신을 보위하러 온 충신이라고 생각했기에 떠나야 한다는 말이 항우 곁에서 멀리 도망쳐야 한다 내지는 의제를 지켜 줄 수 있는 유방에게 가야 한다는 말인 줄 알고 닭 좀 먹고 가자던지 여기에 술만 있으면 금상첨화 같은 태평한 소리나 늘어놓았으나 사실 종리매는 의제를 보위하러 온 게 아니라 항우의 명령을 받고 의제를 죽이러 온 것으로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이 남아있던 종리매가 마차밑에 숨어있던 그를 곧장 죽이는 대신 그를 죽이기 전 마지막으로 황제 대접을 해줌과 동시에 마지막 식사를 할 수 있게 해준 것이었으며 닭을 한창 먹고 있을 때 부하를 시켜 뒤에서 활시위로 그를 교살한다. 이때 비명 한번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입에서 닭을 우물거리다 비참하게 사망한다. 이후 유방측이 의제가 살해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유방과 소하 등은 의제의 죽음을 명분으로 전쟁을 결의하는 한편 제사를 지내긴 하는데 정작 의제의 죽음은 구실일 뿐이며 그를 진심으로 애도하는 사람은 없다시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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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손들은 미성 침씨(羋姓郴氏) 또는 유씨(柳氏)[2] 이전의 초나라 임금은 국군, 왕을 칭했고 의제 이후의 초패왕 항우도 왕이었으므로 제(帝)를 칭한 것은 그뿐이다.[3] 중화제국 역사로 치자면 시황제, 이세황제에 이은 세 번째 황제.[4] 양치기로 살던 그를 명목상으로나마 왕으로 옹립해 준 항씨에 대한 이 시도는 결국 그와 항우의 사이에 결정적인 골을 파고 만다.[5] 촉(蜀) 지역과 한중(漢中) 지역의 제후왕.[6] 현재의 후난성 천저우시이며, 한나라 기준으로 형주의 계양군 부근이고 장사군보다 더 밑에 있다. 현재 구글 지도로 봐도 시푸르딩딩한 산과 숲만 많고 사람이 살만한 땅은 별로 안 보이는 판이니, 항우가 의제를 이 지역으로 내몰던 당시 어떤 환경이었는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비록 초나라가 묘족의 나라였지만 오랜 시간 중원 국가의 영향을 받아 중화문명권에는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초나라 기준으로도 깡촌에 가까웠다. 그리고 지금도 후난성 소속이라지만 바로 밑에 광둥성이 있을 만큼 상당히 변두리 취급받는 건 똑같은 듯하다. 참고로 광둥성은 당시 일명 남월(南越)이라 불리며 오스트로아시아어족 계통의 언어를 쓰는 종족들이 살던 이민족의 영역이었고, 당대에도 진나라가 망하자마자 바로 독립을 꾀할 만큼 엄청난 반골의 땅이기도 하다.[7] 참고로 항우의 심복인 임강왕 공오의 영지 내에 있는 지역이었다.[8] 항우가 천자를 죽이는 데에 동원된 왕이 세 명씩이나 되었다는 점에서, 모략에 의한 단순 암살이 아니라 실제로 대규모 전투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경우도 있다.[9] 그 외에도 신안의 갱으로 대표되는 지나친 잔혹성과 항우의 18제후왕 분봉으로 대표되는 끔찍한 인사능력 등이 있다.[10] 심지어 의제 시해에 가담했던 구강왕 영포마저 유방에게 투항한다. 그 이후 영포는 한신, 팽월이 숙청을 당한 뒤 두려움과 황제가 되고 싶은 마음에 유방에게도 반기를 들었다.[11] 항우보다 더 심각한 것은 황제를 수도 한복판 대낮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죽여버린 것이다. 이 사건은 사마의의 후손인 동진의 명제가 부끄러워했을 정도로 항우의 의제 살해보다 더 심각한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12] 정확히는 의제 시해 사건이 있기 전, 영토 분봉 때부터 항우에게 불만이 많았다. 그가 항우의 직속 부하들 중 유일하게 왕작에 오른 인물임에도 불구하고.[13] 이러한 명분의 차이를 극대화 하기 위해, 유방은 출병 전 의제를 추모하는 의식을 치르기도 하였다.[14] 영토 분봉은 당시 제후들이 얻을 수 있는 실리 그 자체였다. 장량도 유방에게 지적하기를 "사람들이 지금 따르는 것은 순전히 땅을 얻기 위해서인데, 그걸 미리 줘버리면 모조리 항우에게 붙을 것입니다."라고 했으며, 젓가락 설교를 통해 역이기의 육국 부활을 저지했다. 왕릉 역시 나중에 비슷한 말을 한다. 당시에 유방 쪽 세력은 의제의 복수를 위해 항우에게 저항할 것을 부르짖기도 했으나 어디까지나 명분이며, 영토 분봉 문제가 실리 중의 실리였다. 유방 본인도 항우를 적대하게 된 계기는 그가 자신의 차지가 되어야 할 관중을 빼앗아 버린 것이었다.[15] 이에 반해 라이벌인 유방도 한량이었지만 말단 관리라도 해본 인물이라 항우보다는 나았다. 거기다 유방은 장량 같은 외부 인사가 들어오면 그들로부터 배우려 노력했고 그들이 하는 말에 대해서도 가능한 한 들으려고 노력했다. 이외에도 유방의 에피소드 중에서는 여러 선비들이 나타나 유방에게 이런저런 충고를 하고 유방이 이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이득을 취하며 또, 이들에게 그에 걸맞은 보상을 하는 것이 많다.[16] 초왕으로서 17~18개월가량, 황제로서 18~19개월가량 재위.[17] 현재의 후난성 창사시(长沙市). 과거의 침성(郴城)은 현대의 후난성 천저우(郴州)가 아닌 창사시(长沙市)에 속해 있었다고 한다. 지금 현대의 지역 관할 관점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있다.[18] 초의제의 본 거지인 현재 창더시의 당시 명칭은 류(柳)지역이었다.[19] 다만 엄밀히 말하면 조의제문 자체만으로 화를 입은 것은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조정에서 선비가 쓴 글 하나하나를 감시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이 조의제문이 문제가 된 것은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이 글을 실록의 사초(史草)에 올려놨기 때문이었다. 엄정하게 과거의 국사를 기록해야 할 사서에 일개 신하, 아니 민간인의 글을 실어놨단 것. 현대의 공문서 내지 국가 편찬 기록물에 일개 개인의 일기나 메모를 실어놓은 격이다.[20] 사실 사초에 일개 개인의 일기나 메모를 적어놓은 것이 그렇게까지 큰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미 실록을 만들 때 '사관은 논한다. ~'는 식으로 사관이 자신의 의견을 늘어놓는 경우는 빠지지 않고 나오기 때문. 문제는 자기가 쓴 글도 아니고 스승의 글을 올려놓은 데다가 그걸로 세조를 비방하는데 써먹었다는 점이다, 만약 조의제문이 사초가 아닌 다른 곳에서 발견되었다면 그냥 말 그대로 의제를 조의하는 글이라고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김종직이 세조를 비방하기 위해 이 글을 쓴 건지는 알 수 없는데도 김일손 이 작자가 제멋대로 사초에 떡하니 박아놓은 탓에 빼도 박도 못하고 반역의 글이 되어버렸고 사림파 전체에 악영향이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