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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퀴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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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영국 BBC 방송이 BBC 라디오 4 청취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철학자'를 선정
1위2위3위4위5위
카를 마르크스 데이비드 흄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프리드리히 니체 플라톤
6위7위8위9위10위
이마누엘 칸트 토마스 아퀴나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칼 포퍼
출처 }}}}}}}}}
<colbgcolor=#000><colcolor=#fff>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
파일:89C29334-0B6D-4ACB-8B30-E10B395916DF.jpg
본명 톰마소 다퀴노
Tommaso d'Aquino
출생 1225년
시칠리아 왕국 로카세카
사망 1274년 3월 7일
교황령 프리베르노, 포사노바 수도원
직업 수도자, 신부, 신학자, 철학자
관심 분야 형이상학, 논리학, 신학, 심리 철학, 인식론, 윤리학, 정치 철학, 아리스토텔레스 신학
성향 스콜라 철학
학력 몬테 카시노 수도원
나폴리 페데리코 2세 대학교
쾰른 대학교[1]
파리 대학교(박사 학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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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칭호 교회학자
시성 1323년 7월 18일
교황령 아비뇽
요한 22세에 의함
성인력 1월 28일, 3월 7일
(1969년 이전 로마 달력 기준)
}}}}}}}}}

1. 개요2. 이름3. 생애
3.1. 천재성
4. 신학자이자 철학자로서5. 철학적 사상
5.1. 형이상학5.2. 심리 철학5.3. 윤리학
6. 영향7. 어록8. 성체 찬미가9. 기타10. 다른 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스콜라학의 왕자(王者)이며 스승
레오 13세, 「영원하신 아버지」 22항
성 토마스가 집대성한 철학적, 신학적 종합은 교회와 온 인류의 건실하고 항구한 자산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 「위대한 기도」 1994년 3월 16일, 6항

St. Thomas Aquinas/ Fr. Thomas Aquinas OP[2]

가톨릭교회도미니코회 수사신부[3]로서 중세 그리스도교의 대표적 신학자이자 스콜라 철학자. 또한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토마스학파의 창시자이며 교회학자 35명 중 하나로 이명은 천사 박사(Doctor Angelicus). 가톨릭 성인으로 축일은 1월 28일이며, 'Adóro te devóte'나 'Panis angélicus'와 같은 성 토마스의 성체 찬미가의 지은이이다. 학자, 교수, 학생, 철학자, 서점 직원, 연필 만드는 사람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또한 그가 어렸을 때 같은 방에서 자던 그의 여동생이 벼락에 맞아 숨졌다. 그래서 그는 벼락으로 인해 위험에 처한 사람들과 급사가 위험한 사람들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에 따르면 네임드 뚱보. 뚱뚱해서 책상에 앉기 위해서는 책상에다가 그의 배가 들어갈 수 있도록 반원 모양의 홈을 파둬야 했는데 이 책상이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온다. 그의 뚱뚱함이 얼마나 유명했던지 그레고어 멘델 신부의 체형을 표현할 때 "토마스 아퀴나스와 비슷한데 그것보다 좀 덜 뚱뚱해."라고 할 정도였다.

다만 그가 뚱뚱했다는 정확한 근거는 없다. 도미니코회 수도사제인 토마스 아미어러 신부는 그의 저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원제: Thomas Aquinas Theologiam)》에서 "일반적으로 그는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하며 금발이고 머리가 약간 벗겨진 인물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가 참으로 비만하였는지[4], 또는 그가 과묵하였는지[5] 등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라고 설명한다.[6] 어쨌든 상상화에서도 통통한 편으로 그리는 편이다.

현재는 프랑스 툴루즈도미니코회 총본산인 자코뱅 수도원에 유해와 무덤이 보존되었다.

2. 이름

한국 천주교에서 사용하는 공식 표기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Sanctus Thomas Aquinas)이다. 한국 도미니코회 역시 이 표기를 따른다. 그리고 한국 천주교에서 공식 사용하는 약칭은 '토마스'이다. 가령 이 인물이 지은 성체 찬미가 'Adóro te devóte'를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발행하는 『가톨릭 기도서』(2018)에서는 성 토마스의 성체 찬미가라고 표기한다. 본명은 이탈리아어로 톰마소 다퀴노(Tommaso d'Aquino), 시칠리아어로는 툼마수 다퀴누(Tummasu d'Aquinu)이며, 사람에 따라 토마스 데 아퀴노(Thomas de Aquino),[7] 도마 아퀴노, 영어식 표기인 토머스 어콰이너스 등 다양하게 부른다.

이 모든 이름의 뜻은 '아퀴노의 토마스' 또는 '아퀴노 사람 토마스'이지 그 성이 '아퀴나스'라는 뜻이 아니다. 바로 이 이유로 한국 천주교에서는 이 인물을 간단히 가리킬 때는 '토마스'라고만 쓰는 것이다. 애초에 토마스가 활동한 중세 성기에는 이탈리아 본토 정도를 제외하면 성씨 문화가 없었다.[8]

3. 생애

1225년에 로마와 나폴리 사이의 로카세카(Roccasecca)[9]에서 태어났으며 1274년 3월 7일 교황령(현 라치오주 라티나도) 프리베르노(Priverno)의 포사노바(Fossanova) 수도원에서 사망하였다.

이탈리아 사람이지만 혈통적으로는 게르만계이다. 모계는 노르만이며, 부계로도 노르만 혹은 랑고바르드이다. 물론 문화적으로는 확실하게 이탈리아 사람이며, 그중에서도 남부 이탈리아의 색체가 강하다. 강론은 나폴리어로 하였으며, 라틴어 저작들 역시도 말의 방식과 장단이 남부 이탈리아의 말투에서 나왔다.[10]

아퀴노(Aquino)의 영주였던 란돌포 다퀴노(Landolfo d'Aquino)와 테오도라 갈루초(Teodora Galluccio) 부부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그는 베네딕토회 몬테카시노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아버지는 그를 수도원장으로 키우려고 했는데, 나폴리 대학에서 공부하던 놈이 졸업하더니 갑자기 기대를 배신하고 도미니코회에 입회하겠다고 하였다.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부귀영화를 포기하겠다는 얘긴데, 이 말을 들은 가족들은 "이놈이 미쳤나." 하고는 중간에 납치해서 감금하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가족들이 그를 감금할 때 정말 아름다운 여자(매춘부)와 함께 가두었는데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일설에는 여자가 적극적으로 성인을 유혹하려 했는데 그가 난로에 넣어두는 불쏘시개를 들이밀며 "나가지 않으면 이걸로 너를 지지겠다."라고 위협했다고 한다. 결국 가족들은 그 굳건한 신념에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설교자회'(Ordo Fratrum Praedicatorum), 이른바 도미니코회에 입회하였다. 이는 수도회 설립자와 설립 배경이 설교를 중시했기 때문인데, 이러한 성격은 토마스의 취향에 완전히 들어맞았다. 도미니코회는 지금도 토마스를 최고의 자랑 중 하나로 여긴다. 요컨대 "토마스는 도미니코회 덕에 최고의 신학자가 될 수 있었고, 도미니코회 역시 토마스 덕에 가톨릭 신학의 최고봉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라고 할 수 있다.

이쯤에서 베네딕토회도미니코회나 같은 수도회인데 왜 가족들이 반대했는지 의문이 들 수 있다. 여기에 대해 답하자면, 첫 번째, 토마스의 아버지와 형들은 호엔슈타우펜 황가의 프리드리히 2세 휘하에 있던 궁중 귀족이었기에 교황 편에 서 있다는 혐의가 있는 도미니코회가 좋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두 번째, 도미니코회는 당대 기득권의 견제를 받고 있었다.
결코 잊어버려서는 안 될 것은 토마스의 부계父係뿐만 아니라 모계母係 역시 독일 게르만족의 핏줄이라는 사실이다. 즉, 토마스의 외가는 게르만의 일종인 노르만족이며, 그의 친가는 같은 노르만족이 아니면, 역시 게르만의 일종인 랑고바르드족이다. 토마스가 태어나고 자라난 곳의 사회적 환경은 슈바벤 지방을 거점으로 하는 호엔슈타우펜 황가의 영향권에 들어 있었다. 토마스의 아버지와 형님들은 호엔슈타우펜 황가의 프리드리히 2세 휘하에 있던 궁중 귀족이다.
(중략)
형제들 가운데 막내둥이던 다섯 살배기 소년 토마스는 일찍이 몬테 카시노Monte Cassino 수도원 학교에 보내졌다. ...... 토마스 역시 열아홉 살이 되던 해에, 당시 두 가지 탁발 수도회 중에서 스페인 사람 도미니코가 설립한 탁발 수도회에 들어가게 된다. 이는 물론 갑작스런 결정이었으면서도 아무런 후회 없이 지속된, 그 자신의 선택에 근거한 것이었다. 토마스의 가족은 사전에 이런 선택에 대해 전혀 몰랐던 것 같다. ...... 사실 토마스 자신이 겪은 경우에 있어서도 상당한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의 도미니코회 같은 탁발 수도회는, 황제와 늘 대립되어 있던 교황 편에 서 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폴리의 도미니코회 회원들은 이제 새로 들어오는 청원자 토마스를 그의 가족이나 호엔슈타우펜가 황제의 세도권으로부터 가능한 한 재빨리 빼내는 방법을 간구하며, 아주 교모한 경로를 통하여 파리로 보낸다. 그러나 토마스의 친형제들은, 짐적건대 황제의 협조를 구하여 파리로 가던 토마스를 체포하고, 거의 일 년 동안이나 아버지의 성에다가 가두게 된다. 그러나 토마스는 이 기간마저도 충분히 활용한다. 그라프만이 알아낸 바에 따르면,[11] 토마스는 이때 아리스토텔레스의 어떤 논리학 저술에 관한 초록 내지는 필사본을 만들었다고 한다. 결국 토마스는 풀려나게 되고, 파리로의 길을 재촉한다.
-요셉 피퍼, 《토마스 아퀴나스 그는 누구인가》, 신창석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5), 26-29쪽
이로써 분명해지는 것은 이미 여기서도 탁발 수도회의 첫 세대를 겨냥한 탄압 운동이 있었으며, 이러한 탄압은 그리스도교 자체의, 즉 교회 자체의 내적 위계질서 때문에 일어난 문제라는 사실이다. ...... 일종의 혁명적 운동이 기존 세력에 대한 비판의 불을 당겼을 때, 기대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당연히 탄압밖에 없을 것이다("그러나 탄압이라는 비판을 계속할 수도 없으며, 계속해서도 안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프랑스 남부에서 일어난 카타리파나 알비파 운동을 처리하던 교회의 공식적 과정을 바라보는 도미니코 성인의 반응이었다). 역시 운동으로 성장한 기득권 세력이 자기 자신들을 전복시키고자 하는 운동을 그냥 환영할 리가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중략)
어쨌든 기득권 세력은 탁발 수도회를 아주 단호하게 견제하였으며,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체스터톤은 말하기를,[12] 당시에는 아들이 탁발 수도회에 입회하면, 당대의 훌륭한 가문은 그 아들이 마치 '불가능한' 결혼이나 한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탁발 수도회에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떠돌이 소녀와 결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귀족 가문의 아들들이 이런 떠돌이 소녀를 집으로 데려오는 것이었다.
-같은 책, 109-110쪽
파리에서 대알베르토(Albertus Magnus)의 제자가 되어 지내다가 스승을 따라 쾰른으로 간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수가 되기 위해 강사를 하러 파리로 돌아온다. 그 후 교수 자격을 취득해서 강의를 하다가 이탈리아로 돌아와 아나그니 오르비에토 사비나 수도원 등지에서 활약하던 중,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의 명령으로 리옹에서 열리는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길에 병에 걸려 향년 49세로 사망했다.[13]

유언으로 침대에 누운 채 하늘을 바라보며 말하길
"내 벗인 죽음이여, 어서 오게나... 기다리고 있었네."

1323년 7월 18일 교황 요한 22세 주례로 시성되었고 1568년 교황 비오 5세로부터 교회학자 칭호를 받았다. 한편 토마스 아퀴나스의 시성 심사와 관련하여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인의 격에 어울릴 만한 기적을 행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많았다. 일반적으로 시성되려면 기적이 일어났음을 최소한 2가지를 입증해야 하는데, 토마스는 이를 충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시성 문서 참고. 그러나 이 같은 지적에 요한 22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일축했다고 한다.
그가 문제를 해결할 때마다 그만큼의 기적들을 행한 것이다.

3.1. 천재성

그의 동료 수사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보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얼마나 똑똑한지 소리를 내지 않고도 책을 읽을 수 있다."라고 평했다. 이는 현대인 천재론 등에서 현대인과 중세인 간의 지적 수준 차이를 보여주는 근거로도 활용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시대상을 고려해야 한다. 그때는 책을 읽을 때 소리 내서 읽음이 원칙이었다. 그 당시에는 띄어쓰기와 대소문자 구분이 전혀 없었고, 학자가 말한 걸 소리 그대로 받아 적는 게 책이었기 때문이다. Supercalifragilisticexpialidocious나 pneumonoultramicroscopicsilicovolcanoconiosis 같은 텍스트가 한 페이지를 꽉 채우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이 상황에서 소리를 내지 않고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런 가독성 떨어지는 텍스트를 읽으면서도 머릿속에 저자의 의도와 책의 중심적 내용, 흐름을 완벽하게 파악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로마자 표기의 특성상 띄어쓰기가 없다면 가독성이 저해될 것인데도 말이다. 이는 악보만 보고 머릿속에 오케스트라가 재생되는 수준에 비유할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심지어 고대 그리스 철학 사상을 대표하는 대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을 읽고 이해한 데다가 스콜라 철학을 정립하기까지 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책들은 예나 지금이나 그 난해함으로 정평이 났으니, 토마스가 똑똑하다는 평가를 동료 수사에게 들은 것은 당연하다. 인간의 지식은 쌓여왔지만 자극에 대해 발전하는 뇌의 역량과 지능, 지혜가 현대와 중세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점은 많은 인류학 서적에서 밝혀진 바다. 독서로 천재성을 부각시키는 사례는 그 전에도 있었다. 토마스 시대 수백 년 전에 암브로시우스가 묵독을 하는 모습을 보고서, 역시 서양 지성사의 대가들 중 한 명이었던 아우구스티누스조차 신기하다는 투로 묘사해 놓은 기록이 있다. 고대에나 중세에나, 책을 읽을 때에는 낭독이 기본이었기 때문이다. 괜히 조선 시대에 글 읽는 소리를 좋게 본 것이 아니다.

게다가 중세 유럽의 학자들이나 대학교수들은 현대인 기준으로는 기본적으로 굉장한 암기력을 갖춘 사람들이다. 양피지로 책 한 권을 만들려면 양 수백 마리를 도축해야 하던 시대이다. 아무리 대학생이 희소하던 때라고 하더라도 학생 개개인이 교과서를 갖기란 상상하기 힘들었고, 대학에서 수업을 하려면 학생들이 미리 도서관에서 교재를 어느 정도 암기한 뒤에 수업에 임해야 했다. 물론 양피지 조각 등에 간략한 메모를 하고 긁어서 다시 사용하는 정도의 기록 수단은 있었으나, 지금처럼 학생들이 자유롭게 노트에 필기하거나 개개인이 교과서를 들고 다니면서 보기는 힘들었다. 중세 대학에서 교수 노릇을 하고 학생으로서 수학하려면 오히려 현대 대학생들보다도 뇌의 역량(주로 암기력)이 뛰어나야 했다.

4. 신학자이자 철학자로서

이성을 위하여 어떤 신앙 조목을 포기하는 것은 반역이었다. 그러나 토마스의 눈에는 신앙을 위해서 이성을 포기하는 것도 역시 반역이었다. 참으로 두 경우에 반역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진리인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Fr. 앙토냉 세르티양주 OP[14]
스콜라 철학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며 그리스도교 철학 사상 최대의 먼치킨. 또한 성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가톨릭 철학의 양대 산맥이자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력이 남아 있는 두 학자 중 하나. 주요 저서로는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대이교도대전》(Summa contra Gentiles), 《명제집 주석》이 있다. 그의 사상을 토미즘이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그리스도교 교리를 조화시켰으며, 보나벤투라와 함께 스콜라 철학의 알파이자 오메가. 그 자신이 당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최고 전문가였다.[15] 전통적인 교부 철학은 플라톤 및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만, 당시에는 아랍권을 거쳐 최신 철학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소개되고 있었다. 이는 유럽의 지성들에게 큰 영향을 미쳐, 곧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사 속 특정 인물의 이름이 아니라 '철학자'라는 대명사 자체로 호칭될 정도로 자연 철학의 대가로 인식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아리스토텔레스 학파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탐구한 자연 철학적인 주제와 계시를 통한 신학적 가르침들을 접목시킴으로써 그리스도교 신학을 이성적인 논리로 체계화하고자 했다. 그 결과물 중 하나가 《신학 대전》이다. 간결하면서도 논리적인 구성, 주제의 광범위함으로 인해 스콜라 철학의 바이블로 자리매김한 저서이다.
가톨릭적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은 이미 진보한 사람들만을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에 놓인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도 그의 임무다. 그것은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어린아이들을 대하듯 여러분에게 젖을 먹여주었지 단단한 음식을 먹여주지 않았습니다."(1코린 3,1-2)라고 한 사도의 말씀을 따른 것이다. 이 저서에서 우리가 의도하는 것도 그리스도교에 속하는 것을, 배우기 시작하는 사람들을 가르치기에 합당한 방법으로 전수하는 것이다.
《신학 대전》 머리말 中(정의채 번역)

토마스 아퀴나스 본인의 설명에 의하면, 이 책은 입문자용이라고 하는데, 황당할 정도로 방대한 분량과 철학적 사유 때문에 현대인들 입장에서는 거의 조롱으로 느껴진다.[16][17] 오죽하면 라틴어로 된 원전 전체를 통독하는 사람은 전공자가 아닌 이상에야 드물다고 한다. 수백 페이지나 되는 책이 무려 100권이나 되는 것이 신학 대전이므로, 교양 삼아 읽으려면 정리서를 읽는 편이 빠르다. 내용 전부를 간명한 논리로 정리한 분량만 한국어 번역서 기준 600쪽이다. 원전을 다 읽으려다간 쉬지 않고 읽어도 몇 달이나 지나간 뒤에 책상에서 일어나는 자신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18][19] 독서광이자 박사 학위를 토마스 아퀴나스 연구로 받았고, 라틴어를 자유자재로 읽는 움베르토 에코도 그의 칼럼에서 '이런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 사람은 전문 연구자나 요약본을 만드는 사람들뿐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다만 다른 칼럼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책들을 읽으려면 몇 달은 필요하다'라고 언급한 걸 보면 다 읽긴 읽은 듯하다.[20]

또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시도 때도 없이 여행을 다닌 것으로도 유명한데, 저서의 분량이 상식적으로 여행 다니면서 쓸 수 있는 분량이 절대로 아니다. 그래서 현대의 전공자들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여행 중 비서에게 빠르게 구술하는 형식으로 작업을 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통해 이 말도 안 되는 작업량을 설명하려 한다. 구술 이론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토마스 아퀴나스는 저서의 내용을 거의 쏟아내듯이 읊었을 것이다. 신학 대전 또한 혼자 모든 집필을 한 게 아니라 도와주는 이들이 많이 있었고, 마치 현장 법사가 다수의 불경을 번역한 방식과 비슷하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이 처음부터 긍정적으로 각광받았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그와 반대되는 논리를 주장한 '영민한 박사' 복자 존 둔스 스코투스(John Duns Scotus, 1266~1308)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이 하느님을 이성의 틀 안에 가둬놓을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선이라는 개념이 하느님의 위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적했으며, 이는 잠시나마 토마스 아퀴나스를 단죄받게 할 뻔했다. 하지만 사후에는 반대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위상이 둔스 스코투스와 비교되기 어려울 만큼 높아졌다.[21]

역대 철학자 중에서 가장 왕성한 집필 활동을 벌였지만 신학 대전의 완성을 조금 남겨 두고 절필하는데 그 계기가 흥미롭다. 그는 1273년 12월 성 니콜라오 축일 미사를 마친 후에 절필하였는데, 조수가 이유를 묻자 "나는 계속할 수가 없어." "내가 이제껏 쓴 것들은 내가 보았고 나에게 계시된 것에 비하면 한낱 지푸라기에 불과해"[22]라며 대답하였다.[23]

물론 이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개인적 체험이므로, 중세 철학 전반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서를 읽는 것을 추천한다.[24] 대부분의 저서는 신학적 논증을 위한 것이지만, 간명하고도 철저한 논리의 전개와 군더더기 없는 문장은[25] 개인의 입장과 관계없이 논리적 훈련과 공부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더더기를 줄이고 핵심만 넣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논법은 그 후에 논증 전개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아직도 귀감이 되고 있다.

신학대전의 각 세부 파트는 '질문'과 '해답'편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앞에서는 주로 널리 퍼져 있는 논리를 다루고 뒤에서는 철저하게 그 논리를 공격하여 해답을 내놓는다. 이 전체 과정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불필요한 화려한 수식어를 배제하고 간결하면서도 명쾌한 논리의 전개의 연속만을 보여 준다. 이런 논리적 서술만으로 100권을 채운 것이다. 신학 대전은 궁극적으로 신학의 계시와 철학의 이성적 탐구를 조화시키는 목적에서 쓰여졌지만 닥치고 믿으라는 등의 강요 같은 것은 일절 없다. 오히려 내용 자체는 중세 당대의 철학적 질문들과 삶의 의문들 또한 골고루 포함하고 있으며, 질문과 해답 편에서 드러나는 논리의 전개와 반박 구조 등이 대단히 치밀하기 때문에 중세 철학 전공자뿐 아니라 철학에 입문한 사람이라면 대충 훑어보기라도 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

철학에 대한 발언으로 유명한 "철학은 신학의 시녀다"가 있다. 단, 오해를 하면 안 되는 게 토마스는 이를 '철학은 신학의 심부름꾼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뜻으로 말을 한 게 아니다. 시녀 문서에 기술된 것처럼 시녀는 (하녀와는 달리) 결코 천하지도 않고, 맹목적으로 주인을 섬겨야 하는 노예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토마스의 의도는 신학이 철학보다 중요하지만, 그 신학을 뒷받침하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가 바로 철학이라는 주장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시대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도교의 교리에 적절하지 않다는 비판이 적지 않았는데, 토마스 본인과 그의 스승인 알베르토가 얼마나 아리스토텔레스를 높이 평가했는지를 생각하면, 이 발언은 철학에 대한 옹호이면 옹호이지 폄하는 아니다. 비유컨대, 토마스의 의도는 경제학과 학생들에게 수학 및 통계학을 강조하는 교수님의 마음에 가까웠다.

하느님의 속성을 드러내기 위해 '탁월한'이라는 술어를 사용하였는데, 그때부터 고트프리트 폰 라이프니츠에 이르기까지 서구 철학계에서 하느님은 무엇보다도 '탁월한' 존재가 되었다.

철학자로서의 토마스 아퀴나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또한 신학자라는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토마스는 철학의 독립성을 강조했고 이를 신학의 부속 학문으로 본 것은 아니지만, 토마스 자신의 정체성은 신학자였다. 종교라는 개념 자체에 비판적이었던 버트런드 러셀은 자신의 저서 <서양 철학사>에서 이 때문에 토마스를 다소 낮게 평가했다.[26] 논리를 아래에서부터 쌓아올라가며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계시적 진리를 바탕으로 이의 합리성을 확인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27] 사실 교부 철학부터 스콜라 철학에 이르기까지, 소위 그리스도교 철학이 내포하고 있는 근원적인 포인트가 바로 이것이다. 다만 이는 토마스 혹은 그리스도교 신학만의 특성이라 하긴 어렵고, 플라톤 등 수많은 철학자들이 공통으로 해당하는 것이며, 가령 대화편 속의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다이몬으로 부터 계시를 받았음을 전제하고, 이 계시를 바탕으로 합리성을 확인하려고 하였다. 옥스포드 철학자 앤소니 케니는 러셀 본인도 《수학 원리》에서 1+1=2라는 주어진 진리를 무려 300페이지짜리 책으로 입증하려고 하지 않았냐고 반박했다.
그런데 내가 개인적으로 이런 조언을 하면서 돌아다니고 여기저기 참견도 하면서, 공적으로는 여러분의 무리 앞에 올라와 국가를 위해 조언하는 일에 엄두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 어쩌면 이상스러운 일이라 여겨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는 까닭은, 내가 여러 번 여러 곳에서 그 말을 하는 걸 여러분이 직접 들은 적이 있는 것처럼, 나에게 어떤 신적인 혹은 신령스러운 것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멜레토스가 고발장에 써서 희화화한 것도 바로 이런 것이고요. 내겐 이것이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어요. 어떤 목소리가 생겨나는데, 생길 때마다 늘 내가 하려는 일을 못 하게 말리긴 해도 하라고 부추기는 적은 한 번도 없지요. 내가 정치적인 활동들을 하는 것에 반대한 게 바로 이것인데, 내가 보기에 그 반대는 정말 훌륭한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아테네인 여러분, 이 점을 여러분이 잘 알아 두었으면 하는데, 내가 오래전에 정치적인 활동들을 하려고 시도했더라면 오래전에 이미 죽었을 것이고, 여러분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아무런 이득을 주지 못했을 테니까 말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소크라테스의 발언, 31c-e[28]

물론 현대 철학은 대화편의 소크라테스가 말하던 다이몬을 전제하지 않지만,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철학자라고 불린다면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도 철학자라고 불릴 이유는 충분하다.

5. 철학적 사상


토마스의 사상을 이어받은 스콜라 철학을 토미즘이라고 부른다.

5.1. 형이상학

철학사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장 주요한 작업은 이후 성서 비평학과 그리스도교 신학뿐만 아니라 언어 철학에서도 지속적으로 다루어지는 개념인 유비 개념의 정립이 있다. 유비는 명칭이 대상에 대해 사용되는 방법들 중 하나로, 토마스에 따르면 명칭이 사용될 때는 일의적이거나, 다의적이거나, 혹은 유비적인 방식으로 사용된다.

일의적인 것은 같은 명칭이 실제로도 서로 같은 대상에 대해 사용되는 것이다. 다의적인 것은 같은 명칭이 실제로는 서로 다른 대상들에게 사용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유비적인 것은 서로 다른 대상들처럼 보이는 것에 대한 하나의 명칭이 실제로는 어떤 유일한 것에 대한 서술일 때를 뜻한다. 이때 토마스는 일의적인 것과 다의적인 것 사이의 중간 개념이 유비라고 보았다.

대표적이고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도 쉬운 유비는 '비례성에 의한 유비'가 있다. 이를테면 6:3=4:2라는 비례식이 있다면, 6과 3 사이의 관계와 4와 2 사이의 관계는 비례적으로 동등한 관계가 된다. 4:2라는 명칭은 6:3을 표현할 때도, 8:4를 표현할 때도 사용될 수 있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서로 다른 대상이 아니라 4:2라는 하나의 비례 관계에 대한 표현이다. 따라서 그것은 일의적이지도 않지만(하나의 대상에만 하나의 표현이 사용되는 것이 아니므로) 동시에 다의적이지도 않다(여러 대상들에 하나의 표현이 사용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유일한 대상에 대한 표현이므로). 조금 더 일상적인 예로는 다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A는 얼굴이 예쁘다'와 'A는 마음씨가 예쁘다'에서 두 문장의 '예쁘다'라는 말은 일의적 뜻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의적인 것도 아니며, 서로 다르면서도 어떤 같은 근거 때문에 같은 표현을 갖게 된 것이다. 이때 '유비'가 성립한다.

한편으로는 신학적인 의미에서의 유비 역시 토마스 철학에서는 중요한 개념인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불완전성의 유비라고 불린다. 이는 일견 플로티누스적인 유출 개념과 비슷해보이는 개념으로, 모든 자연의 대상들은 신의 속성을 분유하고 있으며, 신은 불완전한 대상들 속에서 유비적으로만 드러나고, 불완전한 대상들은 실제로는 신이라는 유일한 대상에 대한 유비라는 것이다. 불완전성의 유비는 자연 그 자체가 곧 신이라는 범신론이나 인간과 신이 같은 형상을 취하고 있다는 신인 동형 동성론(anthropomorphism), 혹은 인간은 신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을 극복하기 위해 자주 인용된다. 왜냐하면 만약 [ruby(有, ruby=유)](라틴어: ens, 영어: being)를 일의적으로 파악한다면 신의 [ruby(有, ruby=유)]와 인간의 [ruby(有, ruby=유)]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결론이 도출되어 범신론이 성립하고, 반대로 [ruby(有, ruby=유)]를 다의적으로 파악한다면 신의 [ruby(有, ruby=유)]와 인간의 [ruby(有, ruby=유)]는 완전히 다른 의미라는 결론이 도출되어 감각적·물질적 인식에서 초감각적·비물질적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는 말이 되므로 불가지론이 성립하기 때문이다.[29]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즉 4원인론을 통해 신의 존재 증명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우선 하느님은 형상 그 자체시고 질료가 없으시니 인간의 기본적인 인식 방법(이는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으로부터 소급되는 서양의 전통적인 인식론이다)인 감각-상 형성-종 분류로는 그 본질을 알 수 없다고 전제하고, 대신 '누구나 알 수 있는' 제1원인론(사물의 원인에 원인을 소급하면 결국엔 제1원인, 즉 신이 나온다는 논증. 그러나 제일 원인이 정말 아브라함 계통 종교에서 말하는 야훼인지는 결국 그리스도교 변증론의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에 근거하여 신이 '있다' 라는 사실만은 우리가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후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연 신학을 벗어나 완전히 신학으로 접어드는데, 그에 의하면 성서 속 주요 예언자들인 모세와 엘리야는 신의 '은총'으로 인식이 강화되어 신의 본질에 대한 '단서'를 느꼈고, 이런 성서의 권위를 인간이 '신용' 하면 그/그녀에게 신학이 설명하는 신 인식이 제대로 전달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토마스 아퀴나스 형이상학의 의의는 신앙이 없는 인간도 신이 '있음' 은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5.2. 심리 철학

또한 현대 영미 철학에서 핵심적인 주제인 심리 철학의 문제를 스콜라 철학의 테두리 안에서 다루고 있기도 하다. 신학 대전에서 인간의 영혼에 관한 문제를 다룬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30] 부분은 현대까지도 심리 철학의 역사를 다룰 때 간략하게나마 소개되는 저작이다.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는 근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에 대한 주석이라는 점에서 스콜라 철학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중세의 철학자들이 영혼과 인간의 심리에 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혼론』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필요한데, 『영혼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을 신체의 형상으로 정의하고, 따라서 그것은 그 질료인 신체의 소멸과 함께 소멸하지만, 인간의 지성만큼은 인간의 신체에 속하지 않고 무한히 작용할 수 있는 것으로 신체의 사후에도 불멸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주장을 거의 비판 없이 수용하면서도, 인간의 영혼은 특별한 것이기에 지성은 인간의 영혼 안에 내포될 수 있으며, 지성을 지니는 인간의 영혼은 불멸한다는 논변을 제시한다.[31] 따라서 지성을 지니지 못하는 동물과 식물의 영혼은 육체와 함께 부패하지만, 지성을 지니는 인간의 영혼은 불멸하며 죽음과 함께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신에 의한 부활을 기다리게 된다는 결론을 내린다.[32] 이러한 논변은 인간의 지성 역시 뇌라고 하는 물리적인 기관에 종속된다는 현대적인 반박을 통해 쉽게 부정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토마스 또한 기관을 통하지 않고는 영혼은 (현세에서는) 아무것도 인식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인간이 지성을 지님으로써 다른 동물들과 차별화되는 것은 바로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관념, 영적 실재에 대한 관념 등 '더 상위의 능력'을 가진다는 점이다. 이러한 주장이 현대 과학에 의해 반박될 수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가 지니는 철학사적인 의의까지는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한편으로 그는 순수한 철학자라기보다는 한 명의 성직자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그리스도교 신학을 조화시키기 위해 다소 무리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인간의 지성이 인간의 신체에는 속하지 않지만 영혼에는 속한다는 논변은 스콜라 철학의 체계 내에서도 정합성이 성립하기 어려운 논변이었다.[33] 토마스 아퀴나스가 철학자로서는 상대적으로 저평가받는 까닭이 있다면, 아마도 이러한 신학자로서의 면모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5.3.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대로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즉 윤리적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믿었다.

세상의 법은 영원법, 자연법, 실정법, 신법으로 나뉘어진다고 주장했다. 영원법은 신적인 섭리, 자연법은 인간이 이성을 통해서 자연 속에서 찾아내는 규범, 실정법은 인간이 필요에 의해 만든 법, 신법은 계시에 의해 인간에게 가르침을 주는 법칙이다.

정치학에도 영향을 주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이어 받아 군주제가 가장 훌륭한 정치 체제라고 생각했으나 해당 군주가 폭군일 경우 최악의 정치 체제가 된다고 생각하였고, 무정부 체제로 이어지지 않는 선에서 모두의 의견이 일치한다면 폭군을 몰아내고 심지어는 죽여도 된다고 주장하는 저항권을 주장하였다.[34] 그리고 세속 위에 서는 교황의 존재가 폭군을 어느 정도 방지한다고 생각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윤리학의 기본 전제는 '인간은 최선을 의욕한다'이다. 인간이 최선을 욕구하므로 결국은 최선 그 자체이신 신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이 정욕, 즉 육체적인 쾌락에 이끌리는 '악한' 경향이 있다고 보고, 인간의 목적인 최선에 다다르기 위하여 감각에 이끌림을 최대한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플라톤처럼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선 욕구 능력을 이성으로써 최대한 제어할 수 있다고 보았고, 이는 개신교의 부정적인 인간론과도 상반된다. 그의 낙관적인 윤리학은 이후 가톨릭의 인간 이해에 큰 영향을 끼쳤다.

6. 영향

그리고 ‘스콜라 학자들’이라고 불리는 중세의 박사들은 대단한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곧 교부들의 방대한 저술들 속에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던 풍부한 가르침들을 끈기를 가지고 수집해서 후대인들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거의 한곳에 모아 놓았던 것입니다.
(...중략...)
그러나 모든 스콜라 박사들 가운데에서도 분명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단연 두드러지기 때문에 당연히 그를 스콜라학의 왕자이며 스승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그는 가예타노가 말하고 있듯이 “고대의 거룩한 박사들에 대한 지극한 존경심을 품고 있었기에 어떤 점에서는 그 모든 이들의 지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35] 성 토마스는 그들의 가르침들을 마치 흩어진 지체들을 한 몸으로 모으듯 수집해서 놀랄 만한 방식으로 배열했고 또 상당히 많은 부분을 보충 완성시켰습니다. 그러기에 가톨릭교회의 영광이며 비상한 보루라고 평가받는 데 조금도 손색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천품이 유순하고 통찰력이 날카로우며 무엇이든 쉽게 틀림없이 기억했으며, 더할 나위 없이 순결한 일생을 살았고 오직 진리만을 사랑하여, 신적 학문과 인간의 학문을 두루 관통하여 통달하고 있었으며, 마치 태양처럼 자신의 높은 성덕으로 세상을 뜨겁게 하고 자기 학문의 광채로 세상을 두루 비추었습니다. 그가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지고 철저하게 다루지 않은 철학의 분야란 하나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학문의 규범들, 신과 영적 실체들, 인간, 감각적 사물들, 그리고 인간의 활동들과 그 원리들을 광범위하고 철저하게 다루었으며, 그래서 더 이상 방대한 어떤 문제들의 집약이나 더 적합한 문제 배열, 더 나은 방법이나, 더 이상 탄탄한 어떤 원리나 논증, 더욱 명쾌한 논술 방식이란 있을 수 없으며, 여하한 문제에 대해서도 토마스보다 더 쉽게 이야기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중략...)
그리고 그는 이성과 신앙을 날카롭게 구분했습니다. 그러나 이 양자를 조화시켜 각각 자신의 권리와 품위를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성은 성 토마스의 날개 위에 올라탔기 때문에 더할 수 없는 위대함의 절정에 오를 수 있었고, 신앙도 이미 성 토마스와 함께 얻을 수 있었던 것보다 더 크고 강력한 도움을 이성으로부터 받을 수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중략...)
거의 모든 수도회 창립자들은 자기 회원들에게 성 토마스의 가르침을 연구하고 그 테두리를 벗어나지 말라고 명했으며, 그 어느 누구도 이토록 위대한 스승에게서 조금도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강조했던 것입니다. 이 최고의 스승 때문에 영광을 누리는 도미니코회는 말할 것도 없고, 베네딕토회, 가르멜회, 아우구스티노회, 예수회와 다른 많은 수도회들이 이런 비슷한 회헌 규정을 정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 중시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선임 교황들께서 한결같이 토마스 데 아퀴노의 지혜를 격찬하며 증언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실상 클레멘스 6세(칙서 In Ordine), 니콜라오 5세(1451년 도미니코회 회원들에게 보낸 서한), 베네딕토 13세(칙서 Pretiosus)와 다른 교황들께서는 교회 전체가 그의 놀라운 가르침을 통해서 조명되었음을 증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비오 5세께서는, 이 가르침으로 속임수가 노출된 이단들이 더 이상 발붙일 수 없게 되었으며, 세상 전체가 페스트와도 같은 오류들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고 고백하셨습니다. 클레멘스 12세(칙서 Verbo Dei)와 다른 교황들께서는, 교회가 성 토마스의 저술들에서 수많은 선익을 얻게 되었으며, 그에게는 그레고리오,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노, 예로니모와 같은 최고의 교회 박사들에게 돌리는 것과 똑같은 영예를 마땅히 드려야 한다고 천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교황들께서도 성 토마스를 안전하게 따를 수 있는 스승과 모범으로 대학들과 고등학교에 추천하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확인하려면, 복자 우르바노 5세께서 툴루즈 대학에서 행한 다음의 강연을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복된 토마스의 가르침을 진실되고 가톨릭적인 것으로 따르고 그것을 확산시키는 데 전심전력할 것을 간절히 바라며 명하는 바입니다”(1368/8/3 헌장 V). 그리고 인노첸시오 12세께서는 루뱅에서(1694/2/6 서한), 베네딕토 14세께서는 그라나다의 디오니시아노 학원에서(1752/8/12 서한) 우르바노 5세의 모범을 따르셨습니다.

그러나 성 토마스 데 아퀴노에 관한 교황들의 평가 가운데서도 인노첸시오 6세의 증언은 그 백미(白眉)입니다. "성 토마스의 가르침은 (성서를 예외로 친다면) 다른 어떤 가르침 앞에서도 단연 할 말을 가지고 있으며, 힘찬 논증력과 명제들의 진리성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결코 진리로부터 일탈하는 법이 없었지만, 반대로 거기에 대적하는 자들의 주장들은 언제나 그 진실성이 의심스러웠습니다."[36]

(그 속에서는 전세계에서 수집된 지혜의 꽃들이 번득이는) 세계 공의회들은 언제나 다투어 특별히 성 토마스의 탁월함을 강조했습니다. 리옹 공의회, 비엔 공의회, 피렌체 공의회, 바티칸 공의회에 성 토마스는 말하자면 ‘참석’을 했고, 주제 토론과 선언문들을 언제나 ‘주재’하여 그리스인들과 이단자들 그리고 합리주의자들을 거슬러 불굴의 투지로 대적했으며, 결국 승리의 월계관을 받아 썼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토마스의 최고의 영예는, 트리엔트 공의회 교부들이 중앙 제단 위에 성서와 교황들의 선언문들 사이에 토마스 데 아퀴노의 「신학대전」을 놓아 두고 의견과 근거와 해답들을 구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다른 어떤 가톨릭 교회의 박사들에도 허용된 적이 없는 유독 토마스만의 특전이었던 것입니다.
AETERNI PATRIS(영원하신 아버지), 레오 13세, 1879년.
교황청 문헌집 Acta Sanctae Sedis (ASS) 12, 97-115면, 1879년

참고로 이 회칙의 원제는 De philosophia christiana ad mentem sacti Thomae Aquinatis Doctoris Angelici in scholis catholicis instauranda(가톨릭 학교들에서 성 토마스 데 아퀴노의 정신에 따라 교육되어야 하는 그리스도교 철학에 관해서)이다. 이미 제목에서부터 교황의 엄청난 빠심이 느껴지지 않는가? 또한 레오 13세의 시대부터 신스콜라 철학이라고 불리는 가톨릭 신학의 조류가 발전하였다. 스콜라 철학을 현대화시킨 신학쯤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신스콜라 철학의 또 다른 이름이 네오 토미즘, 곧 신토마스주의이다. 가톨릭 신학에서 그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이 용어에서도 알 수 있다.

7. 어록

인간 안의 이성은 세상 안의 하느님과 같다.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설명이 필요없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인간의 구원에는 3가지가 필요하다. 믿을 것을 아는 것, 추구할 것을 아는 것, 해야 할 것을 아는 것이다.[37]
조국을 해방시키기 위해 폭군을 죽이는 자는 칭찬과 보상을 받아야 마땅하다.
우리는 우리와 견해를 함께하는 사람도 사랑해야 되지만, 우리가 거부하고 있는 견해를 가진 사람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양편 모두 진리 탐구를 위하여 애쓰고 있으며, 양편 모두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주해서》In duobecim libros metaphysicorum exposito 12,9

8. 성체 찬미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성 토마스의 성체 찬미가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9. 기타

10. 다른 매체에서



[1] 정식 개교는 14세기이지만, 도미니코회 내부의 일반 학원(Studium Generale)으로서는 13세기 중반에 시작했고, 토마스는 이 학교의 개교 당시 극초기의 학생이었다.[2] Fr.은 Friar의 약어로 수사임을, OP는 Ordo Fratrum Praedicatorum의 약어로 도미니코회 소속임을 나타낸다.[3] 남성 수도자를 수사, 여성 수도자를 수녀라고 한다. 수사 중에는 사제나 부제로 서품된 성직수사와, 그렇지 않은 평수사가 있다.[4] 도미니코회수도복, 장기간에 걸친 과도한 작업, 잦은 여행 등에 비추어 볼 때, 거의 그럴 것 같지 않다.[5] 여러 대작들을 동시에 구술할 수 있는 사변적 천품이라는 것이 이러한 선입견을 낳았을 것이다.[6] 지금도 수도회는 청빈을 강조하지만, 토마스 생전의 도미니코회는 사유 재산이 없는 건 기본이요, 끼니는 구걸로 해결하였다. 동시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엄청난 거리를 여행하며 다녔는데, 상식적으로 이런 사람이 뚱뚱하다니 말이 안 된다. 심지어 토마스의 시성 심사 과정에서 증인들은 '특별한 청빈 애호가praecipuus paupertatis amator라고 불렀다.[7] 성무일도에는 이 표기로 나와있다.[8] '시칠리아는 이탈리아가 아니냐?' 할 수 있는데 시칠리아를 비롯한 이탈리아 남부는 로베르 기스카르의 정복 이후 노르만 문화권에 속했다. 성씨를 쓰는 지역은 로마 문화권인 동로마 제국과 원래 동로마 제국의 치하에 있던 베네치아 공화국, 라벤나 일대를 비롯한 북·중부 이탈리아 정도밖에 없었다.[9] 남부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섬에 걸쳐 있던 시칠리아 왕국의 영토였다.[10] 참고: Josef Pieper, 《토마스 아퀴나스 그는 누구인가》Thomas von Aquin: Leben und Werk, 신창석 옮김, 분도출판사, 2005 2판, pp.25-26.[11] (책 속 주석)Grabmann, Mittelalterliches Geistesleben (München 1926) I, 261.[12] Chesterton의 저서 《Tomas Aquinas》에서 인용한 것. 체스터톤은 전문 연구자는 아니지만, 오히려 연구자인 질송(Étienne Henry Gilson)이 해당 책을 "나도 평생 토마스를 연구하였지만, 그 정도의 책은 결코 쓰지 못할 것이다."(요셉 피퍼, 《토마스 아퀴나스 그는 누구인가》, 22쪽)고 말한 바 있다.[13] 성해(聖骸 성인의 유해)가 기적을 일으킨다는 믿음 때문에 시신이 갈갈이 찢겼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실제로는 툴루즈에 고이 안장되어 있다.#[14] 프랑스의 신스콜라 신학자로, 파리의 가톨릭 대학 철학 교수를 역임했다.[15]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에 오늘날 붙어 있는 챕터 제목이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가 각주한 그대로이다! 그래서 최신 연구가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연구하면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향력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관점을 배제하고 원전 자체에 접근하고자 할 때 특히 그렇다.[16] 이 문단의 내용은 다소 오해인 것이 《신학 대전》은 '신학' 입문자를 위한 책이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세의 대학 제도에 대해서 이해가 필요한데 중세 유럽의 대학은 3년 내외의 과정으로 구성된 인문학부를 하위 학부로 두고 7자유학예(liberal arts)를 인문학부에서 가르치고 인문학부를 마친 학생들이 신학, 법학, 의학의 상위 학부로 진학하는 체계였다. 즉 인문학부는 오늘날 대학의 학부에 해당하고 신학, 법학, 의학부는 석박사 과정에 해당한다. 결국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한 입문자라는 표현은 지금으로 치면 최소 학사 학위 이상을 취득하고 대학원에 막 진학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의미의 표현이다.[17] 그런데 중세 당시에 문법 학교나 교회 학교 등 중등 교육을 마치고 대학에 진학하는 나이는 낮으면 만 14세 정도였다. 초-중-고-대학교 과정을 연속해서 밟지 않으면 이상하게 여기는 현대 한국과 달리 중세 대학 교육은 만 30세 정도에 진학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30살이 넘어서 졸업한 학생도 드물지 않긴 했데, 이르면 만 17세에 저런 내용을 달달 외워야 했다는 것이다. 비슷한 걸로 따지면 사서삼경을 달달 외는 조선 시대 선비와도 비슷할 것이다.[18] 한국에서는 서울대교구 소속 정의채 몬시뇰을 중심으로 라틴어-한국어 대역으로 전체 번역을 시도하였는데, 1985년에 1권이 나오고도 2023년에도 아직 완결이 안 되었다. (현재는 한국성토마스연구소 링크 차원에서 번역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참고 1~35권이 번역되었다. 총 75권으로 예정되어 있다. 비그리스도교권 국가 중 이러한 대역을 시도하는 게 최초의 일이었고, 1994년에 당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직접 격려와 축복의 말을 서신에 담아 보냈다. 그리고 당시 주한 교황 대사였던 조반니 블라이티스 대주교는 그 서한을 전달하며 "제가 아는 한, 교회 역사에서 교황이 개인적 번역 작업에 직접 간곡한 말씀과 축복을 내리는 서한을 전달한 일은 처음입니다."라고 말했다.[19] 정의채 몬시뇰은 평양교구 신학생 출신의 실향민으로,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가톨릭대 총장(1988.9.1.~1991.8.31.) 등을 역임한 한국 천주교의 으뜸가는 원로 신학자였다. 그는 2023년 12월에 향년 98세를 일기로 선종했다.[20] 그래도 아예 읽지 못할 책은 아니다. 애초에 신학 대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해야 하는 책이 아니다. 오늘날의 백과사전이나 가톨릭 교리서처럼 필요한 부분을 그때그때 찾아서 읽는 책으로 기획된 것이다. 그리고 이 작은 부분들은 굉장히 간결한 언어로 되어있기에 난해하지도 않다. 한국어 번역에서 한자어가 많은 게 흠이지만, 그것만 잘 극복하면 되는 이치이다. 특히 토마스의 문체는 아우구스티누스와는 달리 화려한 수사 어구를 생략하는 경향이 강하므로, 이 역시도 독해의 난도를 낮춘다. 다만 수사 어구의 화려함을 포기한 덕에, 아우구스티누스의 문체보다는 멋이 덜하다.[21] 본명은 존 둔스인데 스코틀랜드 출신이라고 스코투스라는 접미사가 붙었다. 철학사적으로 본다면 소위 '일급 철학자'의 반열에 드는 사람은 아니며, 가톨릭 교회에서도 토마스 아퀴나스만큼의 위상을 갖진 못한 신학자이지만, 그럼에도 나름 중요한 인물이다. 우선 오컴의 윌리엄에게로 계승되는 유명론이 둔스 스코투스의 사상에서 출발하므로, 유명론적 사고가 주를 이루는 영미 철학계에서는 꽤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또한 들뢰즈는 그를 '철학사의 모계 전통'을 따른 학자로 표현한 바 있으며, 그런 만큼 대륙 철학자들에게도 이름 정도는 알려진 인물이다.[22] Weisheipl, Friar Thomas d' Aquino, p321(이재룡 옮김, 489쪽)에 인용되어 있는 굴리엘모 토코의 증언.[23] 와이스헤이플(Weisheipl)에 의하면 미사 때의 신비 체험이 원인인 동시에, 또한 주의가 산만해지거나 작업할 수 없는 무기력감 등의 증세를 보이는 (과로에 의해서 초래된) 일종의 충격이나 뇌종양이 물리적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을 수 있다고 한다. 사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평생 동안 반대파들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교리에 맞지 않다고 그와 논쟁했고, 동시에 그가 상식을 뛰어넘는 엄청난 분량의 저작을 남겼기에 이러한 일도 무리는 아니다.[24] 다만 토미즘의 핵심인 신학 대전은 아직 국역본이 완결되지 않았고, 여전히 번역 중이다. 그래도 첫 1권 정도만 구매해도 토미즘이 대강 이러이러한 것이구나 하면서 이해할 수 있다.[25] 수사학에 뛰어났기에 온갖 화려한 문장적 기교를 보여준 명대사 제조기 아우구스티누스와 비교해 본다면, 토마스의 글은 열혈로 불타오르는 느낌은 적지만 논리적으로 더 냉철하다. 당장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의 아무 쪽이나 펴놓고 읽어보면, '불꽃의 아우구스티누스'와 '얼음의 토마스'가 느껴질 것이다.[26] "나는 아퀴나스가 그리스와 근대 양 시대의 최고 철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견줄 만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27] 다만 이게 신학에 철학을 끼워 맞춘다는 소리는 아니다. 토마스에게 신학과 철학은 상호 독립적인 학문이었고, 계시는 인간 이성으로 연역할 수 없다고 봤기 따문이다. 가령 삼위일체론이 이성이 아닌 계시에 의해서 알려졌다는 건 토마스도 인정을 한다. 여기서 철학의 역할은 이성으로 삼위일체론을 연역할 수 있다는 허황된 주장을 하는 게 아니라, 이성에 위배되는 불합리함이 없음을 '계시로부터 독립된 논리로' 보이는 것이다.[28] 참고로 이 책의 정암학당 쪽 역자인 강철웅 씨는 "어쩌면 소크라테스는 아주 '중세적'인 인물이었을지 모른다"라고 작품 안내에서 서술했다.[29] 참고: 정의채, 《형이상학》 4판 171-177쪽[30] 신학 대전 1a 75문~89문. 이러한 구분은 토마스 본인의 구분이라기보다는 후대의 연구자들에 의한 구분에 가깝다.[31] 참고로, 아리스토텔레스와 스콜라 철학에서 생명의 기능은 세 단계로 나뉜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생육하는 기능이며, 이것은 식물에서 먼저 드러난다. 다음으로 드러나는 것이 동물의 감각과 운동이고, 마지막으로 오는 것이 인간의 지성이다.[32] 이것은 현재까지도 인간과 다른 생명의 영혼에 대한 공식적인 가톨릭 교리로 남아 있다. 따라서 가톨릭 교리하에서 동물과 식물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없다.[33]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토마스 아퀴나스도 인간이 무언가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감각 기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는 점은 고려해야 한다.[34] 심지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암살을 옹호하기도 했다.[35] 가예타노, In II-II Summa Theologiae, q.148, a.4: Ed. Leoninina, vol. X, n.6, 174면.[36] 인노첸시오 6세, Sermo de sancto Thoma.[37] "Three things are necessary for the salvation of man: to know what he ought to believe; to know what he ought to desire; and to know what he ought to do."[38] 마녀구분을 정의한 학자로 나온다. 오컬트 교주로 취급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