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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에서 바라본 모습. 가운데가 대아라라트, 왼쪽이 소아라라트
1. 개요
- 영어: Mount Ararat
- 튀르키예어: Ağrı Dağı
- 아르메니아어: Մասիս (Masis), Արարատ (Ararat)
- 쿠르드어: Çiyayê Agirî
- 페르시아어: کوه آرارات
튀르키예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아르메니아 고원에 위치하며 이란 및 아르메니아 국경에서 16km, 아제르바이잔 국경에서 32km 떨어져있는 활화산이다. 마지막 분화는 1840년에 있었다.
높이는 해발 5,137m. 대아라라트(튀르키예어: Büyük Ağrı Dağı)와 소아라라트(3,896m, 튀르키예어: Küçük Ağrı Dağ) 등 두 봉우리가 있다. 1829년 프리드리히 파로트(Friedrich Parrot)와 하차투르 아보뱐(Խաչատուր Աբովյան)이 처음 이 산의 정상에 올랐다.
고대 히타이트와 겨루던 미탄니가 결국 히타이트에게 멸망한 후 그 구성원이던 후르리인들이 정착한 곳이 이 산 근처이다. 그들은 반이라는 도시를 수도로 삼아 번영하였는데, 경쟁 상대였던 아시리아인들에게 우라르투라고 불렸다. 이 우라르투가 '아라라트'라는 지명의 어원으로 추측된다.
창세기에는 노아의 방주가 대홍수 끝에 표류하다가 도착한 곳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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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노아의 방주 추정 유적지
2021년 10월 6일 튀르키예의 이스탄불 대학(Istanbul Technical University), 아그리 이브라힘 체첸 대학(Agri Ibrahim Cecen University)과 미국의 앤드류스 대학(Andrew University)의 연구진들이 아라라트 산과 노아의 방주 연구 팀(Mount Ararat and Noah’s Ark Research Team)을 결성하여 조사를 시작했다. 2022년 첫 탐사가 시작되었다. 응용 지구 물리학과 앤드류 존스(Andrew Jones) 박사와 페티 아흐메트 유크셀(Fethi Ahmet Yüksel) 박사는 3D 스캔 기술을 사용하여 조사하였다.
조사 결과 길이 157m, 너비 26m, 높이 15m 정도 되는 수직 수평 부재로 이루어진 나무 화석으로 추정된다.
이 구조물이 정확히 노아의 방주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자연적으로 형성되는 지질학적 특성의 바위는 아니며 인간이 만든 오래전의 구조물이다.
또한 연구 팀의 토양 샘플 추출 분석을 통해서는 약 BC 5500 ~ BC 3000년 경의 점토 물질, 해양 물질 및 해산물이 발견되었다.
2. 튀르키예와 아르메니아의 갈등
2.1. 아르메니아 민족의 성산
지금은 튀르키예 영토지만 아르메니아에서 한국의 백두산처럼 민족의 성지로 여기는 산이다. 아르메니아 신화에는 신들의 집으로 나온다. 나아가 세계 최초로 기독교화된 국가라는 자부심이 있는 아르메니아로서는 대홍수 후 노아의 방주가 안착하여 인류가 하느님과 최초의 계약을 맺은 곳이 아라라트산이라는 데서 더욱 신성시하였다. 그래서 아르메니아의 국장에는 아예 아라라트산 위에 안착한 노아의 방주까지 선명하게 그려 넣기까지 했지만…아르메니아로서는 현재 아라라트산이 튀르키예 영토라 그저 착잡하게 바라봐야 한다. 애국가에 등장하고 한반도 산의 기원이라는 상징을 갖는 백두산만 해도 중국에 넘어가느냐가 한국인 사이에서 문제가 되는데 여기는 문제가 더 심하다. 현재 튀르키예와 아르메니아는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문제로 사이가 나쁘다.
쿠르드족도 이곳을 성지로 여긴다. 부근에는 쿠르드족이 많이 살고 있으며, 아라라트 공화국이란 나라를 1927년에 이곳에 세웠다가 튀르키예에 가혹하게 탄압당한 일도 있다. 이 아라라트 공화국 국기에도 이 산이 들어가 있다. 이 때문에 이 산의 소유권을 두고 쿠르드족도 터키 못지않게 아르메니아를 적대한다.
2.2. 전근대
중세와 근세 당시 아르메니아인들의 거주지는 아라라트산 동서로 뻗어있었다. 그러나 아라라트산 동부 즉 오늘날 아르메니아 본토에 해당하는 지역은 13세기 이후 몽골인들이 페르시아에 세운 일 칸국의 지배를 받았고, 이후에도 아제르바이잔-이란계 사파비 제국과 카자르 왕조의 지배를 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아르메니아인 인구가 격감하였었다.[1] 19세기 초반 러시아 제국이 캅카스 남부로 팽창하면서 카자르 왕조를 몰아내면서 러시아 제국 영토로 편입되었고, 이후 러시아 제국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의 이주를 장려하면서 다시 아르메니아인 인구 비중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이전의 이슬람 국가와는 달리 기독교 정교를 믿는 세력이었기 때문에 아르메니아인의 저항은 덜 받았다.근세 당시에는 카르스를 비롯한 아라라트산 서부(아나톨리아 동북부 상당수 지역)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 인구가 훨씬 더 많았는데, 근세 오스만 제국에서는 아르메니아인들을 나름 우대도 해주고, 최소한 임의로 강제 이주 시키거나 징발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초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 벌어지자 아르메니아인들은 거리도 가깝도 아르메니아인 이주도 우대해 주는 아라라트산 동부 즉 오늘날의 아르메니아 본토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즉 근세사와 근대사, 현대사를 거치며 아르메니아인들의 주 거주지가 아라라트산 동부와 서부를 오갔던 것이다.
2.3. 현대
아르메니아 국장(가운데에 아라라트산과 노아의 방주가 있다) | 소련 시절 아르메니아 SSR의 국장(지금은 아르메니아 공산당에서 변형해서 사용 중) |
1차 대전 전후하여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모두 붕괴하면서 아르메니아 민주 공화국이 세워지지만, 아르메니아군은 튀르키예 독립 전쟁 당시 튀르키예군을 공격했다가 오히려 패배하면서 아나톨리아 동부 카르스 일대에 해당하는 영토를 상실한 것은 물론 미하일 프룬제가 이끄는 붉은 군대에 멸망하여 소련에 그대로 흡수되었다. 이곳을 포함한 캅카스 방면의 공산주의자들은 캅카스 SSR을 세우고 소련에 가입했다. 소련은 신생 튀르키예 공화국과 영토 분쟁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던 데다가,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은 대학살로 현지에 거의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튀르키예 공화국이 주장하는 이전 오스만령 아르메니아 영토를 튀르키예 영토로 인정했다. 결국 아라라트산은 소련과 튀르키예의 영토 협상 결과로 튀르키예령으로 확정되었다.
아르메니아와 우방인 러시아가 소련 시절인 1923년, 로잔 조약으로 1878년 러시아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게서 빼앗은 카르스, 아르다한 일대를 돌려주면서 아라라트산을 튀르키예 영토로 공식 인정 했다. 아라라트산 일대는 러시아 혁명 이후 생겨난 신생국인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의 영토로 아르메니아는 튀르키예 독립 전쟁으로 튀르키예가 혼란에 빠진 사이 고대 아르메니아 왕국 시절의 영토를 탈환하려 튀르키예 침공을 감행했다가 역으로 공격받은 후 튀르키예가 점령하고 있던 상태였다. 이후 아르메니아는 자캅카스 SFSR로 흡수되고, 당시 소련의 지도자였던 이오시프 스탈린은 외교적으로 고립 상태였던 소련의 상황을 개선하고, 당시 튀르키예 점령지에는 아르메니아인 대학살로 아르메니아인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 및 튀르키예의 당지 실효 지배를 인정했고, 소련가 튀르키예는 1920년대에 우호 관계를 맺었다.
이 캅카스 지역에는 사해 동포주의를 주장하는 사회주의 이념으로도 서로 묶일 수 없이 사이가 나쁜 여러 민족이 살고 있었다. 소련은 1930년대 지역 전체를 아우르던 자캅카스 SFSR를 민족별 공화국으로 분리했다. 이를 주도한 것이 대러시아주의자이자 조지아인인 스탈린이다. 스탈린이 소련 내 여러 민족주의 운동을 탄압하고 이들을 러시아인으로 동화시키려 했지만, 그래도 현지에 살았기 때문에 이들 캅카스의 여러 민족들이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르메니아 SSR, 아제르바이잔 SSR, 조지아 SSR로 분리했다. 문제는 이곳의 민족 분포는 경계선으로 그을 수 있을 만큼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사이가 극히 안 좋은 아르메니아인들과 아제르바이잔인들의 민족 분규를 차단하기 위해서 각 민족 다수 지역을 각 민족이 주체가 된 공화국으로 넘기는 월경지를 두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나고르노카라바흐이며 당시에는 그저 행정 구역 재편에 불과했지만, 소련 붕괴 이후 국경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한편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에 소련이 튀르키예 견제용으로 카르스와 반을 비롯한 튀르키예 동부 지역 땅을 내놓으라고 했다. 이는 튀르키예가 독소 전쟁 초반에 독일에 가까운 행보를 보이면서 독일의 소련 점령 영토에 자주 군사 고문단을 파견하기도 했기 때문에 소련은 튀르키예에 대해 감정의 앙금이 남은 탓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터키 편을 들어서 소련은 한발 물러섰다.
아르메니아인들이 아라라트산에 품은 애착은 대단해서 국장에 여길 집어넣음은 물론 수도 예레반 남쪽에 아라라트주라는 이름의 행정 구역도[2] 있고, 현지 유명 와인 및 맥주 상품에도 아라라트라는 이름을 단 맥주 및 와인이 있다. 소련 시절에 튀르키예에서 아라라트산을 아르메니아 공화국의 국장에서 빼라고 소련 측에 요구하자, 크렘린에서는 이렇게 대응했다.[3]
아라라트산에서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은 매우 가깝다. 예레반에서 아라라트산이 뚜렷하게 보일 정도.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당시 튀르키예가 비상령을 내려서 아라라트산 근처에 군 장비를 배치하여 아르메니아에서도 무척 긴장했다.
3. 관광
1998년에서야 관광이 공식적으로 허용되었다. 그동안 튀르키예군이 주둔해서 외부인 출입을 금지했는데 그 이유는 현지 쿠르드인 저항군과 갈등 및 아르메니아와 국경 대치 때문이었다.이 근처를 걸어서 여행하던 프랑스인 여행자가 천막 치고 밤을 지내다가 군인들에게 걸려 내쫓긴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여행자가 민가도 없고 숙박업소도 없고 늦은 밤에 어찌 지내냐고 하소연하니 터키군이 막사 마당을 내줘서 거기서 하루 동안 머물렀다고(...) 한다. 외국인이라 그런지 무척 친절하게 대하고 물도 마음껏 쓰게 하고 같이 식사도 해줬다고 하지만 터키군들은 여긴 볼 것도 없거니와 국경이라 분위기도 안 좋고 치안도 안 좋으니 다음에는 오지 말라고 주의를 줬다고 한다.
방문이 가능한 지금도 교통이 불편하다. 관련 영상
물론 아르메니아 쪽에서는 직접 관광이 불가능하다. 다만 수도 예레반이 산과 가깝기 때문에 아르메니아 쪽에서도 바라볼 수는 있다. 직접 관광이 아니라 단순히 바라보며 감상할 거면 차라리 이쪽이 더 편할 수 있다.
[1] 오늘날 아르메니아 본토에 해당하는 지역은 내륙 산악 지역에다가 이웃한 이란인/아제르바이잔인들의 과도한 공물 요구 및 납치(사파비 제국에서 아르메니아인 수십만여 명을 이스파한으로 강제 이주 시킨 사례도 있거니와, 근대 카자르 왕조에서도 하렘의 후궁 거의 대부분을 이 지역에서 강제 징발 한 아르메니아인 처녀들로 채우다시피 했다.)가 극심하여 아르메니아인 인구가 남아나지 않던 상황이었다.[2] 이 일대의 지형 이름이 아라라트고원인 점도 있다.[3] Louis, Victor and Jennifer. The Complete Guide to the Soviet Union. New York, 1976. p. 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