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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빈 박씨(장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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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장조의 후궁
경빈 박씨 | 景嬪 朴氏
출생 연대 미상
사망 1761년 1월
조선 한성부 경희궁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45)
능묘 미상
재위기간 조선 수칙
1757년 ~ 176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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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본관 미상
빙애(氷愛 / 彬愛)
배우자 장조 의황제
자녀
슬하 1남 1녀 [ 펼치기 · 접기 ]
장녀 - 청근옹주(淸瑾翁主, 1758 ~ 1835)
장남 - 은전군(恩全君, 1759 ~ 1777)
봉작 수칙(守則) → 귀인(貴人)[1]경빈(景嬪)[2]
}}}}}}}}} ||

1. 개요2. 생애
2.1. 사도세자의 후궁이 되다2.2. 비참한 최후2.3. 사후
3. 자녀4.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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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사도세자후궁. 궁녀 출신으로 사도세자의 총애를 받아 은전군청근옹주를 낳았지만 그의 정신병으로 인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인물이다.

2. 생애

2.1. 사도세자의 후궁이 되다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 따르면 이름은 빙애(氷愛)이며 숙종의 세 번째 왕비인 인원왕후의 침방 궁녀였다고 한다. 사도세자는 의붓할머니의 궁녀인 빙애를 좋아하여 취했으나 영조는 웃전의 나인을 취하는 건 옳지 않다고 하며 반대했다. 그러다가 인원왕후가 승하하자 사도세자는 1757년(영조 33년) 9월에 빙애를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지만 이 일은 국상 중에 일어났기 때문에 영조가 심하게 꾸짖고 빙애를 출궁시키라고 명했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세자는 이에 굴하지 않고 빙애를 화완옹주의 집에 숨겨두고 다른 궁녀를 '가짜 빙애'로 만들어 대신 출궁시켰으며 이후 화완옹주의 집에 출입하면서 빙애를 만났다. 영조가 자신을 속이려고 했던 이 사실을 알고 빙애를 다시 내치려고 하자 사도세자는 양정합 우물에 뛰어드는 자살 소동까지 벌였다.
가까이하신 것들은 많되 일시만 그리하시고 대수롭게 하시는 일 없고, 자식 낳은 나인이라도 털끝만큼도 더 봐주는 일이 없었는데, 이것에게는 그리 대수롭게 구시더라.
《한중록》
빙애는 종6품 수칙(守則)이 되었는데 양제나 양원 같은 세자의 후궁으로서의 품계는 아니었지만 실질적인 취급은 세자의 후궁이었다. 즉, 승은상궁 같은 위치였다. 다만 영조한테 단단히 찍혔는지 자식을 낳고도 같은 세자의 후궁인 양제 임씨보다 못한 대접을 받았다.[4] 양제 임씨를 동정했던[5] 혜경궁 홍씨도 빙애는 좋게 보지 않았는지 사도세자가 꾸며준 빙애의 방을 "아니 갖춘 세간이 없더라"[6]라고 묘사하는데 성격에 대해서도 "그것의 됨됨이가 요악한지라" 라고 평가하였다.[7]

2.2. 비참한 최후

하지만 혜경궁 홍씨의 기록에 나온 것처럼 사도세자가 그리 대수롭게 굴만큼 총애받았던 빙애의 최후는 비극적이었다. 의대증이 심한 세자에게[8] 옷을 갈아입히려다가 발작을 일으킨 세자에게 폭행 당하다가 심지어 살해당하는 궁인이 한두명이 아니라서 궁인들은 살기 위해 세자의 옷 시중을 피했고, 때문에 자연스레 세자의 옷 시중은 부인 혜경궁 홍씨가 맡았지만, 그녀 역시 세자가 던진 바둑판에 얼굴을 맞는 등 여러모로 난리여서 빙애가 옷 시중을 들게 되었다. 처음에는 빙애가 입혀주는 옷은 세자도 잘 입었지만, 결국 빙애는 1761년(영조 37) 1월 사도세자의 옷 시중을 들던 중 의대증이 도져 버린 그에게 맞아 죽고 말았다. 야사에 의하면 이때 사도세자는 빙애를 폭행해 죽인 걸로도 분이 안 풀렸는지 빙애가 낳은 당시 갓 돌이 지난 아기였던 아들 은전군도 연못으로 던져 버렸는데 다행히 의붓할머니인 정순왕후의 측근의 호위병들이 구해내서 익사를 모면하고 간신히 살 수 있었다.

2.3. 사후

비록 영조는 비천한 궁녀 출신의 며느리를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빙애의 성품만큼은 좋게 본 모양이다. 사도세자가 빙애를 살해한 일에 대해서는 다들 쉬쉬했기에 영조는 이를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나경언의 고변을 통해 영조도 사도세자가 빙애를 살해한 사실을 알자
"왕손의 어미를 네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여 우물에 빠진 듯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였느냐? 그 사람이 아주 강직하였으니, 반드시 네 행실과 일을 간(諫)하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 5월 22일 을묘 2번째 기사
라며 꾸짖었다.
훗날 사도세자의 적자 정조가 즉위한 다음에도 빙애는 취급이 영 좋지 않아서 품계가 오르지 못하였다.[9] 결국 고종 대에 가서야 제대로 된 후궁 봉작을 받았다. 1901년(고종 38)에 사도세자가 장조의 황제로 추존되면서 그녀도 경빈(景嬪)으로 추증되었다.

3. 자녀

소생으로는 아들 은전군과 딸 청근옹주[10]가 있다.

한편 《이재난고》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경빈 박씨가 맞아죽을 때 아들 은전군도 사도세자의 칼에 맞고 연못에 버려졌는데 은전군은 연꽃 위에서 죽지 않고 살아나서 어릴 때 이름이 하엽생(荷葉生)이었다고 한다.

그녀 사후 그녀 소생의 자녀들은 아마 상궁들이 길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자녀들의 일생도 어머니처럼 불우했다. 은전군은 역모에 휘말려 이복형인 정조에 의해 스무살에 사사당했다. 청근옹주는 사도세자의 자식들 중 가장 장수했으나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해 입양을 해야 했다.

4. 창작물에서

파일:한중록 경빈 박씨.png}}} ||
<colbgcolor=#89236A> 〈조선왕조 500년 - 한중록〉의 경빈 박씨(빙애)

[1] 1899년(광무 3)에 종1품 귀인(貴人)으로 추증되었다.[2] 1901년(광무 5)에 정1품 빈(嬪)으로 추증되었다.[3] 궁녀가 공식적으로는 왕을 남편으로 삼아 혼례까지 올리는 왕의 여자라고는 해도 실제로는 왕보다는 자신이 모시는 주인에게 충성하는 측면이 강했다. 따라서 다른 전각의 궁녀를 후궁으로 삼는 것은 대단히 눈치가 보이는 행동이다. 다만 사도세자를 굉장히 아꼈던 인원왕후가 살아 있었다면 꾸중은 하되 그다지 크게 문제삼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4] 아무리 영조가 사도세자의 후궁들은 전원 예외 없이 싫어했지만 궁녀 출신에 자식을 낳은 것까지 똑같은데 박씨는 아예 정식으로 후궁 봉작을 못 받았다.[5] 임씨가 아직 궁녀였을 때 사도세자의 아이를 임신하자 영조에게 혼날 걸 두려워한 사도세자가 임씨의 아이를 낙태시키려고까지 하자 보다못해 임씨를 도와줬다가 영조에게 "남편에게 사랑받으려고 남들이 다 하는 투기도 안한다"는 요지의 꾸중을 들을 정도였다.[6] 요즘말로 "없는 물건이 없더라"[7]한중록〉에서 사도세자가 빙애 때문에 내수사의 돈을 가져다가 펑펑 쓴다고 언급한다. 결국 빙애의 화려한 방은 전부 내수사의 돈으로 꾸며진 것이고 이 일이 알려지면 영조가 또 사도세자를 쥐잡듯이 잡을 게 뻔했기 때문에 혜경궁 홍씨가 빙애를 좋아하지 않았다.[8] 정신병이 중증이었는지 옷을 갈아 입는 걸 광적으로 두려워해서 입고 있는 옷이 다 해져 떨어질 때까지 안 갈아 입고 버텼다는 일화가 있다.[9] 우선 그녀의 친아들 은전군이 정조의 즉위 초반 역모에 연루되어 사사 당한데다 박씨가 죽은 이유가 이유인만큼 정조 입장에서도 거론하기 껄끄러웠으며 정조 본인이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닌 큰아버지 효장세자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하였기 때문에 자기 아버지의 후궁을 추증시킬 권한이 사실상 없었다.[10] 원래 청근현주였다. 왕세자의 적녀를 '군주', 서녀를 '현주'라고 한다. 사도세자가 추존되면서 청근현주도 옹주로 추증되었다.[11]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무수리 출신이다. 극중에도 영조가 세자를 혼내면서 자신이 무수리 자식임을 아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이때 사도세자는 당당하게 안다고 말했고(...) 이에 영조가 빡쳐서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같이 있던 인원왕후(강부자 분)가 말려 겨우 진정한다.[12] 단, 사도세자와 사이가 안 좋은 숙의 문씨(김혜선 분)는 영조에게 고변하려 했으나 어차피 몰래 평양 간 것이 들키면 세자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니 나중에 알리자는 오빠 문성국(이계인 분)의 조언에 따라 조용히 넘어간다.[13] 후궁 소생의 자녀는 후궁보다 신분이 높다는 점을 고증하여 영빈 이씨는 작중에서 딸인 화완옹주에게 존댓말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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