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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3 02:34:45

세지마 류조

세지마 류조
瀬島龍三 | Ryūzō Sejima
파일:external/pds.exblog.jp/b0095299_22231893.jpg
<colbgcolor=black><colcolor=white> 출생 1911년 12월 9일
일본 제국 도야마현 니시토나미
사망 2007년 9월 4일 (향년 95세)
일본 도쿄도 다마 지구 조후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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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무 일본 제국 육군
복무 기간 1932년 ~ 1945년
최종 계급 일본 제국 육군 중좌
참전 제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쟁)

1. 개요2. 생애
2.1. 군인 시절2.2. 기업인 시절
3. 성향4. 한국과의 관련성5. 기타6.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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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군인, 기업인, 정치인이다. 2007년 9월 4일 만 95세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소설/드라마 논픽션 <불모지대>의 모델로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지만 후술되어 있듯 정작 드라마 제작진이나 소설 원작자는 이를 부인한 바 있다.

2. 생애

도야마현 오야베시(당시에는 마츠자와무라) 출신이다.

2.1. 군인 시절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44기 차석으로 졸업하고 대본영(일제강점기 일본군 참모본부)에 들어갔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인 1939년부터 6년간 대미 전쟁의 작전문서를 작성하면서 보내다가 1945년 7월 만주에 주둔한 관동군으로 전출되었다. 나중에 그가 자화자찬으로 참모본부 시절과 만주 전출을 떠벌렸지만 실상은 직속상관인 작전과장 핫토리 다쿠시로가 그의 대미작전지도가 시원찮다는 점을 깨닫고 자신이 과장임기 종료 후 관례대로 연대장으로 부임할 때 그를 만주로 쫓아 버린 것이라고 한다.

대만 항공전에서 일본군이 미해군을 전멸 시켰다고 좋아할 때 '맥아더의 참모'라고까지 불린 정보참모 '호리 에이조'가 미군은 멀쩡하다는 전문을 대본영으로 보냈는데 이를 중간에 묵살하고 보고 하지 않은 자가 바로 그다. 이에 미해군이 전멸했다고 착각한 대본영에서는 필리핀에 배치된 일본군을 '루손 결전'에서 '레이테 결전'으로 작전을 바꾸어 전진 배치시켰지만 미해군은 건재했고 루손으로 이동한 일본군은[1] 레이테에서 보급을 받지 못해 굶어 죽는다.

그는 1958년 호리 에이조에게 '실은 이 일 때문에 시베리아 억류 중에서도 괴로웠다. 온 일본이 이겼다며 들떠 있을 때 딱 한 명 반대한 사람이 있었다. 그때 내가 당신의 전보를 묵살했다. 이것이 첩1호 작전(필리핀 방어작전)을 근본적으로 그르쳤다.'고 자백하였다. 세지마 류조 본인은 <세지마 류조:참모의 쇼와사>라는 책에서 호리에와 1958년 나눈 대화에 대해 '동료 사이의 일'이라며 말하기를 거부하였다. 다시 말해 그는 정보를 경시하고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는 정보는 모두 '작전 주도'라는 이름 아래 묵살한 전형적인 대본영 참모였다.

일본이 패전한 뒤 소련군에 의해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끌려가서 1945년부터 일본으로 돌아간 1956년까지 11년간 고생을 했다고 스스로 밝혔지만 알고 보면 정작 그렇게 고생한 것도 아니라고 한다. 사실은 포로수용소의 사무를 돌보는 직위에 있었다고 한다. 그는 극동군사재판에서 소련 검사 측의 증인으로 나왔는데 후에 밝혀진 바로는 동료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대가로 이렇게 편히 지냈다고 한다. 일종의 사법거래이자 동료들 입장에선 한마디로 배신자. 이런데도 정작 소설 및 드라마에서는 을 들고 등골 빠지게 뺑이 친 것으로 사실과 다르게 묘사되고 있으므로 주의할 것. 논란의 여지가 있는 점은 포로의 대우에 관한 1949년 제네바 협약 (제3협약) 49조에는 '장교는 어떠한 경우에도 노동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는 항목과 79조의 '포로가 책임을 지고 있는 수용소의 행정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포로의 노동수용소에는 동일국적의 장교포로를 배치하여야 한다'는 항목이 있어 인과관계 파악에는 알기힘든 부분이있다. 장교는 전쟁포로 신분임에도 타의에 의한 노역을 하지 않는데 다가 영관이라는 계급대에 가능하지도 않아 사법거래를 했든, 협약에 따른 배려를 받든간에 정황상 일반 노역은 안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일본위키의 세지마 류조에 따르면 본인이 강제노역으로 장교신분임에도 건축노역을 하였으나 폐렴으로 반장인 선배장교(아마도 노역감독직의 포로장교)에 의해 건축미장 노역을 배정을 받았다고 본인 스스로 2003년에 방송과 책(일본의 증언)을 통하여 증언했는데 본 나무위키 항목에 적힌 내용은 없고[2] 사실의 은폐, 조작을 하는 정황이 보인다. 즉, 본인의 미화를 위해 꾸며낸 거짓이거나 노망일 가능성이 높다. 드라마든 소설이든 <불모지대>는 결국 '팩션'이다. 심지어 드라마에서는 본 작품은 실제 사건이나 인물과는 관계가 없다고 했으며 소설 원작자인 야마사키 도요코도 공식적으로는 세지마 류조의 증언과는 다르다고 하였다. 참고로 일본 의료계와 경제계, 언론계 및 실제의 사건사고 등의 소설을 낸 야마사키 도요코의 모든 소설은 전부 팩션이기 때문에 소설 내용이 사실이라고 착각하면 큰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소설, 드라마에 나오는 시베리아 전쟁포로/억류자들에 관한 모임과 후원회 등도 사실관계가 밝혀진 바가 없다.

여담으로 이다가키 세이시로의 아들도 장교로서 소련군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공산주의 선전 활동에 참여한 경력이 있었는데 귀국선에서 세지마에게 "네놈이 한 짓은 본토에서 반드시 심판당한다"고 협박을 받았다고 한다.

2.2. 기업인 시절

1956년 포로 신세에서 풀려나 귀국한 후, 1958년 이토추상사[3]에 입사한다. 당초에는 말단에 가까운 촉탁 신분으로 입사하나, 경영진이 군 인맥을 눈여겨 보고 초고속 승진의 길에 오른다. 2년간 거의 무보직으로 있다가 1960년 항공기 사업부장을 거쳐 업무부장(대부분의 기업에서 전략기획실 등의 이름으로 두고 있는 기획부서)에 오르고, 1962년 이사(취체역), 1963년 상무이사, 1968년 전무이사, 1972년 부사장을 거쳐 1982년에는 일본 유수의 종합상사 이토추의 회장 자리에 오른다.

이러한 출세 가도는 1970년대 야마사키 도요코의 인기 소설 불모지대의 모델이 되었다. 다만 실제 경영 실권을 쥐는 사장직은 거치지 않았는데,[4] 본인은 도중 입사라서 그렇다고 변명했다. 실제로는 40대 후반에 입사한 세지마가 사업 일선 경력이 없고 기획통으로만 근무했던 데다,[5] 이토추의 원류이자 주축으로 역대 경영자 대부분을 배출한 섬유부문과의 반목이 심했다는 증언도 있어(#) 사장에 오를 만한 실적과 인망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어디까지나 1960~70년대 이토추 사장, 회장을 역임한 에치고 마사카즈(1960~1974년 재임)의 장기말이었던 셈.

대신 본인의 인맥과 로비 능력을 살려 이토추 자체를 엄청난 정보력과 로비 역량을 가진 조직으로 만들었는데 10.26 사건의 발생을 CIA보다 이토추 상사가 먼저 입수했을 정도다. 또한 제너럴 모터스이스즈 출자 등 국내외 기업의 제휴 중개에 수완을 발휘했다. 이를 바탕으로 후술할 재계 및 정치계 활동에 나서게 된다.

3. 성향

전후 일본에서 우익~극우 세력들을 뒷받침하는 지주 중 하나였으며 실제 우익 정치권과 경제계를 연결하는 흑막으로 활동했다. 본인은 기업가 행세를 하며 전면에 나서는 경우가 적었지만, 언제나 무대 뒤에서 새역모를 비롯한 각종 극우 단체나 미디어를 지원하는 식으로 활동하였다.

다른 일본 우익들도 흔히 그렇듯, 일제의 침략 전쟁이나 식민지배를 미화하는데 큰 거리낌이 없었으며, 일제의 산둥반도침략사건을 최초의 평화 유지군 활동이라고 떠들기도 했다고. 전범들이 포함된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덤.

우익 성향을 띈다고 알려진 아지아대학 이사장도 지냈으며, 나카소네 야스히로 내각에서 행정개혁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개혁안을 작성하기도 했다.

4. 한국과의 관련성

지금은 사망한 지 제법 오래돼서 인지도가 많이 낮고 사실 활동 당시에도 크게 인지도가 높은 인물은 아니었지만,[6] 보통 한일 양국의 언론에서는 세지마 류조를 지한파로 분류하는 편이었다.

다만 여기서 지한파의 의미를 잘 알아둘 필요가 있다. 언론에서 일반적으로 설명하는 일본의 '지한파'는 우익 세력에 한정할 경우에는 아시아주의를 내걸고 한국과의 관계협력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자주 거론된다. 하지만 이들의 실상을 파고보면 일본 제국 시절에 대륙 침략을 위해선 후방병참기지로 조선과 만주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던 부류들로, 2차대전 시기에는 한반도와 만주국에서 수탈과 침략에 앞장섰으며 패전 이후에는 반소반공을 내걸고 공산주의를 막는 방파제로서 한반도가 중요하다고 외치면서 한일 외교관계 복원과 일본기업의 한국 진출에 앞장선 사람들이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자신들과 이념적 색채가 유사하고 몇몇은 친분도 있는 한국의 군부독재 세력과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7] 이들은 제2차 세계 대전까지는 대륙침략을 부르짖다가 패전 이후에는 시대가 달라졌으니 한반도 진출을 부르짖는 것이었다.

세지마 류조도 일본 제국의 괴뢰국인 만주국만주군 장교를 했던 박정희와 교분이 있었다. 박정희가 졸업한 2년제 만주국육군군관학교는 4년제인 일본육군사관학교 시험에서 떨어진 일본인들이나 가는 곳으로 졸업 후 일본육사 편입이 가능하였고, 일부 성적이 우수한 조선인들도 만주군관학교 줄업후 일본 육사 편입이 가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만주 군관 학교 출신들은 일종의 열등의식과 함께 일본 육사 출신들을 경외하는 모습도 보여줬는데 대표적으로 박정희가 국군내에서도 일본 육사 출신에 대해 제법 경외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세지마도 박정희가 대통령이던 시절에 한국에 자주 와서 청와대에서 박정희와 만났다고 한다. 1965년 한일협정 당시에도 이런 분위기로 인해 만주군 소위 출신인 박정희와 만주국 상공대신이었던 기시 노부스케로 대표되는 양국의 소위 만주국 인맥들이 큰 역할을 하였다. 물론 말단 소위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 만주국 당시 박정희는 실권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하여튼 관동군 참모 출신인 세지마 류조도 이런 만주국 인맥의 일원으로 한일양국의 우익세력을 잇는 밀사 역할을 하였다.[8][9] 박정희 정권 시절 세지마 류조는 이토추상사 회장으로 한국시장 진출을 위해서 한국 기업인들과 만나면서 친분을 쌓았다. 예를 들어 재일교포 출신인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과는 친구 사이로 지냈고[10], 박정희의 측근인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과도 친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과도 어느정도 친분을 쌓아 "보통 자기를 만나면 누구던 돈달라는 이야기부터 하는데, 사업 이야기 안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이 회장이 훗날 회고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세지마 류조의 한국내 인맥을 활용해서 이토추 상사는 1기 서울지하철 공사, 포항제철 장비 납품 등 상당한 이권을 챙길 수 있었다.[11]

박정희가 사망한 다음에는 육사 11기 출신인 권익현 삼성고문이 다리를 놔줘서 세지마 류조는 전두환, 노태우의 신군부 세력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 특히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취임하기도 전에 한국을 방문해서 한국의 국가발전과 체제안정을 위해선 올림픽이나 만국박람회 같은 국가적 거대행사를 유치해 국민들의 관심을 돌려보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이것은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도 잠깐 나온 바 있다.[12][13][14]

전두환과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한일정상회담도 세지마 류조가 물밑에서 어느정도 역할을 했다. 그리고 나카소네는 1983년 현직 일본 총리로는 최초로 한국을 공식 방문했다. 나카소네는 방한 기간 동안 노신영 외무부장관과의 밀담을 통해 40억 달러차관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으로 집권 초기 전두환 정권에게 활력을 열어줬다. 당시 전두환 정권이 내세웠던 논리는 소위 안보경협론이었다. 한국은 소련-북한의 공산권을 막고 있는 방파제 역할을 떠맡으면서 국가예산의 1/3을 국방비로 지출하는 등 허덕이고 있는데, 정작 안보혜택을 보고 있는 경제대국 일본은 아무런 기여도 없이[15] 무임승차하고 있다. 그러니 '아무 조건 없이 안보부담금 100억 달러를 내놓으라'는 요구였다. 경제가 엉망이던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도 일본이 한국의 안보에 기여해야 한다면서 이 주장에 공감했지만, 온건파였던 일본의 스즈키 젠코 총리는 안보경협론은 평화헌법, 전수방위 원칙 위반이라면서 단호하게 거절한다. 전두환 정권은 100억 -> 60억 -> 40억 달러 순으로 계속 액수를 내리면서 어떻게든 차관을 얻을려고 매달렸지만, 재정건전화를 목표로 하고 있던 스즈키 정권은 요지부동이었다. 하지만 1982년 말 스즈키가 물러나고 강경우익 성향의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일본 총리로 취임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고, 바로 이때 양국의 우익 세력을 막후에서 연결하는 세지마 류조가 물밑 협상을 진행해서 결국 5년간 차관 40억달러 지원이 결정된다. 하지만 자민당 정권은 공식적으로는 안보부담금이라는 논리는 거부하고, 단지 우호국을 위한 ODA 지원이라고 포장한다. 그리고 1984년부터 1989년까지 들어온 일본 차관 40억 달러는 SOC 투자 등에 쓰이면서 한국경제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16]

1987년 동해상에 표류하다가 일본 해상보안청에 나포된 탈북자 김만철 일가의 행선지를 둘러싸고 일본-한국-북한간의 외교전이 벌어졌을 때도 한일 정부 사이에서 막후협상에 관여했고, 1990년 3당 합당 당시에도 일본 사례를 들어 조언을 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일본의 보수우익들은 한국이 공산세력을 막아주는 최우선 방파제 역할을 해야 일본이 안정된다고 생각했기에, 한국에 강력한 반공우익 그러나 자신들이 컨트롤 할 수 있는 친일 성향의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세지마 류조는 어디까지나 이런 관점에서 한국 정치권에 이런 저런 조언을 한 것이다. 게다가 원래 일본의 보수우익은 어디까지나 아시아의 보스는 당연히 일본이고 한국과 동남아는 일본이 거쳐온 길을 배우면서 따라오는 동생들로 깔보는 서열식 사고방식[17]이 확고했다.[18]

이런 자기의 한국내 인맥을 이용해서 한국 시장에 진출한 일본 경쟁사들을 물먹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이 포항종합제철 1기 건설에서 미츠비시 상사에게 발주가 예정되어 있던 장비를 박정희와의 안면을 이용해서 이토츄 상사로 바꿔버린 것. 여담으로 이런 일화를 보면 애초에 한일협정으로 일본이 낸 금액이 결코 아쉬울게 없는게, 이렇게 국교가 성사되자 실제 전범 기업을 포함한 많은 일본 기업들이 한국에 이런저런 통로로 진출했고, 그 덕에 지금와서 보면 불공정 소리까지 나오는 유리한 사업 계약 등으로[19] 한국 시장에 뿌리내렸다. 거기에다가 21세기 이후로 한국 전자업체들이나 자동차 회사 등이 일본 전자업체나 기타 업체들을 따라잡으며 갑을관계가 뒤집혔음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일본기업들에게 하청을 맡기는 경우가 많았던지라 현재까지도 한국이 일본에게 경상수지 적자를 보게 하는 요인이 된 것을 보면 결코 손해보는 장사가 아니었다.

물론 2019년 일본은 혐한 감정에 치우쳐 이런 산업 구조를 스스로 날려버리는 짓도 하게 되는데, 이런 한일 무역 분쟁 정국 당시엔 이토추 상사가 관할하는 데상트가 국내 불매운동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물론 데상트 입장에선 조금 억울한 점도 있는게, 원래 창업가는 따로 있었는데, 이토추 상사가 통수로 경영권을 뺐는데 성공했다.

5. 기타

허풍이 심한 편이었다고 한다. 자서전에서 자신과 쇼와 덴노와의 막역한 관계를 자랑했다는데, 정작 쇼와 덴노는 세지마를 만난 일도 없었다고 한다(...). 실제 당시 일본에서 덴노는 살아있는 신이었고 세지마는 차고 넘치는 일개 육군 장교에 불과했다는 걸 고려하면 막역한 관계 운운하는건 신빙성이 떨어진다.

하나회 군인들이 그의 일대기를 다뤘다고 알려진 논픽션 소설 불모지대를 탐독했다고 한다. 한국의 기업인들 중에서도 불모지대를 읽고 감명받은 인물들이 제법 있었다고 하는데, 강덕수 STX 전 회장이 대표적이다. 한마디로 한국의 정치인, 기업인, 고위관료 등 높으신 분들 사이에서 원조 일뽕을 양산한 책이기도 하다. 근데 STX는 부도가 나버렸다.

다만 한가지 확실히 해둘 것은, 상술되어있기도 하지만 세지마 류조와 이키 타다시는 엄연히 별개의 인물이라는 점이다. 실존인물을 모델로 했다고 해도 픽션은 픽션일 뿐. 전체적인 줄기만 비슷할 뿐이며 세세한 행보는 차이가 상당히 많다. 실제 이토츄상사의 회장직까지 역임하고 편한 노후를 보낸 세지마와는 달리 이키는 석유발굴을 성공시킨 후에 긴키상사를 퇴직하고 시베리아 억류자 친목회의 회장이 되어 일본군 패잔병의 유골을 찾는 데에 여생을 보낸다.

이런저런 평가를 종합해보면 세지마 류조의 참모로서의 능력은 의심의 여지가 남아 있으며[20], 포로 시절 동료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해서 편하게 지냈다는 점, 인맥을 대놓고 활용하여 불공정하게 기업을 키우면서도 정작 본인은 자칭 개혁가/기업가로서 이름을 날렸다는 점에서 사후 평가가 그리 좋지 못한 편이다.

MBC 드라마 <제5공화국> 25부에 전두환, 노태우가 접견하는 일본 비공식특사로 등장한다. 배우는 이일웅.

6. 같이보기


[1] 만주에서 와 루손에서 대기하다 레이테로 이동한 1사단, 원래 레이테에 있던 16사단. 사단 넘버를 보면 알겠지만 일본에서도 아끼고 아끼던 최정예 사단들이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에서 단대번호가 1부터 20까지인 사단 16개와 근위사단은 이른바 갑종사단이라고 하여 정예부대이었고 이들 사단을 동원하고 남은 예비군과 사각편제를 삼각으로 개편하며 남은 병력을 이른바 을종사단이라고 하는 특설사단 약 31개로 편제했으며 나머지 백수십개 사단들은 다 신병을 모집하여 동원해서 만든 임시사단이다.[2] 사법거래로 사무직을 했다는 어떤 증거를 토대로 그렇게 알려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런 내용은 적어도 일본 사이트에서 찾지 못했다.[3] 오미국(시가현) 출신 상인인 이토 츄베에(伊藤忠兵衛)가 1858년 오사카에 설립한 종합상사.[4] 일본 기업의 풍토상 실세는 사장이고 부회장, 회장은 대외 활동을 주로 하는 얼굴마담에 가깝다.[5] 상기한 소설 불모지대의 영향으로 세지마가 군 인맥을 통해 항공자위대의 전투기 사업을 수주하는 등의 실적을 남긴 것으로 오해되곤 하는데, 실제로는 이토추는 록히드 F-104가 승리한 1차 FX 사업에서 록히드가 아닌 패배자 그러먼의 대리자였으며 그나마도 세지마가 항공기 사업에 발령되기 전이었다.[6] 한국 일반인들은 대부분 모르던 수준이였으나, 2000년대 드라마 제5공화국, 그리고 그에 앞서 2005년 4월 16일, KBS 미디어 포커스에서 '세지마 류조로 본 한일 극우 커넥션과 언론'이라는 제목으로 주제를 다루면서 그 실체가 대중적으로 제법 유명해졌다. 실제 파고 보니 끝도 없었다고 한다.[7] 실제 한국현대사 학자인 서중석 명예교수도 '일본 극우세력과 한국의 군부독재, 친일 세력들은 서로가 매우 밀접하게 친했다'고 평가했다. 성급한 일반화일수도 있지만, 1930년대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게 일본 군국주의 우익 세력이고, 당연히 이 시기의 친일 세력들은 그에 기생했을테고, 이때 일본사관학교에서 길러진 장교 중 상당수가 훗날 한국의 군부독재 세력으로 큰거 보면 그럴듯한 추론도 가능하다. 물론 이건 한국에서 쿠데타로 민간 정부를 뒤집어엎었기에 나타난 결과물일 뿐이라서, 우연의 일치인 측면도 있다.[8] 물론 후술되어있듯 세지마 류조가 뻥카가 심한 인물이었다는건 감안할 필요가 있다.[9] 이 시기에는 물밑에서 한일 양국의 정재계를 연결하면서 각종 이권에 개입하던 브로커 혹은 로비스트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단지 기업인 직함을 가지고 있던 세지마 류조가 언론에 가장 많이 노출됐을 뿐이다.[10] 신격호는 처가를 통해서 일본의 권력층들과 인맥을 쌓았다.[11] 사실 이토추 상사에서 세지마 류조의 역할은 한/일 양국 정치권과의 인맥에 기반한 로비스트였다. 이 때문에 일본 기업문화에서 실질적인 경영자라 할 수 있는 사장에는 오르지 못하고 대신 얼굴마담 격인 회장으로 가게 된 것이다.[12] 이일웅이 류조 역으로 출연했다.[13] 일본도 1960년대엔 전공투처럼 체체변혁을 내세운 극좌 성향의 학생운동, 노동운동이 활발했었다. 그러나 1964 도쿄 올림픽,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의 성공과 자민당 정권의 복지 확대, 토목 공사 정책 등으로 중산층이 형성되고, 한편으로는 좌파가 급진적인 성격을 띄게 되면서 학생운동, 노동운동 모두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세지마 류조가 신군부에 올림픽 유치를 제안한 것은 이러한 일본의 경험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한국도 이후 3저호황에 따른 경제활황 등으로 중산층이 형성되자 체제를 뒤엎자는 급진적인 학생운동은 퇴조하고 체제내의 개혁을 요구하는 시민운동이 성장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6월 항쟁 당시 88올림픽을 앞둔 외신들의 시선때문에 강경진압하지 못하고 전두환은 항복한다.[14] 물론 전두환 정권이 세지마의 조언만 듣고서 올림픽을 추진한 것은 아니다. 한국 정부는 박정희 정권 때부터 수도 이전 계획과 함께 묶여 올림픽 개최를 구상하고 있었다. 자세한 것은 1988 서울 올림픽/유치 과정 참조.[15] 실제 70년대 이후 집권했던 일본의 보수본류는 평화헌법을 유지하여 군비를 절약하는 대신 경제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16]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노신영과 류조의 밀땅을 다루면서 노신영의 뻔뻔한 정도의 협상 요구에 세지마가 놀라 "겉은 잘 길들여진 인데 속은 사자. 한번 붙잡은 먹이는 놓치지 않겠다."라면서 전두환에게 극찬하는 장면도 나온다. 헌데 당시 거품이 빠지기 직전 절정으로 치닫던 일본 경제를 생각하면 사실 저 돈도 일본 입장에선 생각보다 큰 돈은 아니었다.[17] 아카마쓰 가나메(赤松要)의 ‘안행형태론(雁行形態論·Flying Geese Model)’으로 보통 국내언론에선 '기러기 이론', '기러기 편대 이론'으로 쓴다. 보통 기러기떼가 장거리 이동을 할 때는 최선두에 선 두목을 따라서 V자 대형으로 비행을 하는데, 산업의 발전이 이런 형태로 이루어진다는 이론이다. 즉, 아시아경제의 발전은 최선두인 일본을 따라서 그 뒤로 한국, 대만, 홍콩, 태국이 따라오는 형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게 1990년대 초반까지는 어느 정도 들어맞았지만, 그 뒤론 완전히 달라지는데 일본의 우익 세력은 아직도 옛날 기러기 이론에 빠져 있어서 현실과 부조화를 일으키면서 혐한으로 진화하게 된다는 것이다.[18] 이게 어느 정도였냐 하면, 1962년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당시 일본 자민당 부총재 오노 반보쿠 의원은 기자들과의 공개인터뷰에서 "박정희와 자신은 부자지간 같은 사이라면서 아들의 경사를 보러 가게 돼서 기쁘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할 정도였다. 설사 오노 반보쿠가 실제로 박정희와 친분이 있었다 한들, 일국의 대통령에 대해 이런 식으로 공개발언하는건 상대를 무시하는 외교적 결례이다. 헌데 이 발언에 당시 한국의 야당들은 크게 반발했지만, 박정희와 집권 민주공화당은 오히려 침묵했고, 일본에선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만큼 일본 정치권에선 한국을 자신들의 아래로 깔보는 인식이 보편적이었고 박정희 정권은 한일정상화 이후 차관이 절실했다 볼 수 있다.[19] 서울 지하철 사업도 이런 사례 중 하나였다. '원조' 둔갑 8억달러 추적해보니 그 뒤엔 '전범기업'.[20] 육군대학교 차석 졸업만 가지고 능력을 논할 수가 없는 것이, 츠지 마사노부도 육군대학교는 최상위권으로 졸업했었다. 실제 상기되어있듯 세지마 본인도 삽질해서 일본군에 피해를 꽤나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