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BE0529><colcolor=#fff> 부산포왜성 [ruby(釜, ruby=プ)][ruby(山, ruby=サン)][ruby(浦, ruby=ポ)][ruby(倭城, ruby=わじょう)] | Busan Japanese Fortress | |
형태 | 왜성 |
면적 | 약 80,000m² 이상 |
건설 | 1592년 (선조 25년) |
모리 데루모토 • 모리 히데모토 | |
폐성 | 1598년 (선조 31년) |
주소 |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 범일동 |
1. 개요
부산포왜성의 상징이 된 고구치의 이시가키(2021년 9월경 촬영.) |
2. 역사
임진왜란 때 왜군이 한반도에 1차적으로 지은 왜성들 가운데 하나로, 정유재란이 끝날 때까지 왜군의 총사령부, 구심점이자 최후의 보루로서 기능했던 성이다. 본래 이 지역은 부산진성(釜山鎭城)[1]이 있던 곳이다. 임진왜란 최초의 전투인 부산진 전투가 일어났던 곳으로, 정발(鄭撥) 장군이 지키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몇 달 되지도 않은 1592년 9월 1일에 이순신이 올린 장계에는 이미 부산포왜성의 존재가 드러난다.
咸聚釜山城內 官舍盡數撤去 築土造家己所巢穴多 至百餘戶 城外東西山麓 閭閣櫛比 連穡接屋 亦幾三百餘戶 皆是倭人 自作之家 其中大含層階 粉壁有若佛寺 原其所爲痛憤
부산진성 안을 취하여 관아를 모두 헐어 버리고 그 자리에 흙을 다져 지은 집이 많아 일백 호에 이르렀습니다.
성 밖 동쪽과 서쪽의 산기슭[2]에 집이 즐비한데 담장[3]을 이어 접한 가옥 또한 3백여 호입니다.
모두 왜인(倭人)이 스스로 지은 집인데, 그 가운데 가장 높은 층계 위에 들어선 것[4]은 벽에 분을 발랐고 마치 불당 같았습니다.
그곳을 보니 통분하였습니다.
부산진성 안을 취하여 관아를 모두 헐어 버리고 그 자리에 흙을 다져 지은 집이 많아 일백 호에 이르렀습니다.
성 밖 동쪽과 서쪽의 산기슭[2]에 집이 즐비한데 담장[3]을 이어 접한 가옥 또한 3백여 호입니다.
모두 왜인(倭人)이 스스로 지은 집인데, 그 가운데 가장 높은 층계 위에 들어선 것[4]은 벽에 분을 발랐고 마치 불당 같았습니다.
그곳을 보니 통분하였습니다.
이 기록을 보면 1592년 4월 옛 부산진성이 함락되고 곧바로 축성을 시작하여 불과 약 4개월 만에 기본만 축성한 것으로 보인다[5]. 그러나 일본 쪽 기록을 보면 축조는 1593년 3월부터 8월까지 약 5개월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이 성에는 1만여 명인 왜군과 배 400여 척이 상시 주둔하였다고 하며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가 주둔한 적도 있다고 한다.
1598년 8월 18일 히데요시가 사망하여 전쟁을 계속하기 어려워지자, 10월 15일 다섯 다이로(大老)는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앞으로 명령서를 보내 '울산이 공격당할 때는 서생포를 단단히 지킬 것, 비상시에는 서생포성을 버리고 부산성으로 빠져나갈 것'을 지시했다.
10월 27일, 다섯 다이로 중 하나이자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영향력을 넓히기 시작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구로다에게 명령서를 내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협의 하에 서생포왜성에서 부산포왜성으로 퇴각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11월 24일 가토와 구로다는 부산포왜성을 소각(燒却)하고 일본으로 귀국한다.
왜란이 끝난 후 현재 좌천동에 있던 부산포동첨절제사영(釜山浦同僉節制使營)은 부산포왜성의 데지로인 자성대왜성에 다시 설치된다. 그리고 본래 부산포왜성의 본성이었던 증산(甑山)의 성곽은 버려지게 된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 한반도를 점령한 일본인들 자기들 조상이 쌓은 것이니만큼 증산왜성은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존되었고, 이는 해방 이후에도 큰 문제 의식 없이 유지됐다. 1963년 1월 21일에는 부산일본성(釜山日本城)이라는 이름으로 사적 제35호로 등재되었다. 하지만 1969년 8월 1일 '보존가치가 없다.'는 사유로 사적 지정이 해제됐다. 그 이후 문화재 등급을 부여받지 못하고 별다른 보존 조치 없이 대체로 방치되어 오다가, 현재는 산노마루 부분까지가 증산공원(甑山公園)이 되었다. 가장 아래의 곡륜(曲輪) 위에는 좌천시민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부산포왜성을 쌓은 산의 모습이 마치 떡시루나 솥뚜껑같이 생겼다고 하여 증산(甑山), 부산(釜山)이라는 명칭이 여기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전부터 이미 이곳의 포구 이름은 부산포(富山浦)였다. 왜란 직전 부산포(釜山浦)로 바뀌기 때문에 맞는 해석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와전의 역사가 짧지 않은지, 1872년 군현지도에도 증산왜성이 부산고기(釜山故基)로 표기되어 있다. 일부 학자들은 부산(富山)이라는 이름이 고려시대 때부터 이곳에 있었던 부산 부곡(部曲)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한다.
3. 위치 및 구조
규슈 제국대학 도서관 소장 『부산성도(釜山城圖)』. |
한국에 남아 있는 왜성 가운데 그 범위가 가장 넓은데, 동래왜성(東萊倭城), 박문구왜성(迫門口倭城)[6], 영도왜성(影島倭城), 자성대왜성을 지성(支城)으로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지성을 제외하고서라도 좌천동 행정복지센터에서 구세군 부산영문교회 언저리까지를 감싸는 무지막지한 넓이의 소토구루와(外郭)를 운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아 있는 증산왜성만 따지면 윤곽식 산성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미 소실되고 없는 여러 곳의 데마루(出丸)와 데지로(出城)들을 합하면 평산성의 성격을 지닌다. 부산포를 끼고 자성대를 둘러싼 채 동천(東川) 하구까지를 긴 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로 감싸 왜군 본영(本營)다운 규모를 보여 준다. 대부분 내탁(內托)을 다졌으나, 니노마루와 산노마루의 북서측 방면은 협축으로 쌓아 긴 도베이(土塀)와 야구라(櫓)가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규슈제국대학(九州帝國大學)에서 제작한 부산성도(釜山城圖)를 보면 본성의 서북측 바깥에 데지로(出城)가 설치된 것으로 보이므로 서북측의 육로로 쳐들어올 조명연합군의 동선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이시가키는 자연석을 그대로 쌓은 노즈라즈미(野面積み)이자 석축의 열을 맞추어 쌓은 누노즈미(布積み)이다[7].
그러나 구한말부터 도심으로 개발되기 시작하여 많은 부분의 이시가키가 파괴되었고, 그마저도 1950년대 이후 난개발이 이루어지면서 본성 이외의 부가적인 시설물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또한 본성도 증산공원으로 꾸며지면서 협축(夾築)으로 쌓았던 부분을 삭평(削平)하거나 고구치(虎口)를 메워 버리는 등 상당한 변형이 이루어졌다.
3.1. 욘노마루(四の丸) ・ 내성 대수구(內大手口)
현재 좌천아파트와 좌천동 체력단련장이 들어서 있는 곳은 한때 증산왜성의 전면 방어를 맡았던 곡륜 자리였다. 현재는 콘크리트 기초와 성토(盛土)로 인해 그 윤곽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지만, 좌천어린이집의 옆에 5m가량 높이의 이시가키(石垣)가 그대로 남아 있다(왼쪽 사진). 이 이시가키는 욘노마루로 진입하는 앞쪽 고구치(虎口)의 우측 석축이며,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길이 좁아 꽤 위압감을 준다.
좌천체육단련장 콘크리트 기단 아래에는 욘노마루의 우각부가 남아 있다(오른쪽 사진). 왜성의 모서리에서 자주 보이는 산기즈미(算木積み)가 뚜렷하게 남아 있어 한눈에 관찰할 수 있다. 이곳은 작은 등산로의 옆으로 내려가야 볼 수 있고, 밭으로 활용되는 부지 바로 옆에 있기 때문에 답사에 주의해야 한다.
3.2. 산노마루(三の丸)
부산포왜성의 산노마루는 동측과 서측으로 나뉘어 있다. 가운데의 욘노마루에서 양쪽의 산노마루를 거쳐 니노마루로 올라가는 구조를 하고 있는데, 동측 산노마루는 현재 좌성초등학교가 자리한 큰 골짜기를 감싸듯이 증산 동쪽 봉우리까지 길게 뻗어 있어 이 골짜기가 일종의 해자(堀, ほり) 역할을 하게 한다. 지금은 매립되었지만, 이 골짜기는 좌천동의 이름의 유래가 된 좌자천(佐自川)이 발원하는 곳이기도 하다. 양 산노마루의 끄트머리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와 부산포왜성의 외곽을 이루던 노보리이시가키는 현재 소실된 상황이나, 1950년의 위성사진을 보면 당시까지는 육안으로 확인가능할 정도로 명확하게 유적이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3.2.1. 동측 산노마루
부산포왜성의 동측 산노마루는 그 흔적을 찾기 쉽지 않다. 성의 동쪽 부분으로 길게 돌출되어 동구도서관이 있는 봉우리의 정상까지 뻗어 있었던 산노마루는 주차장과 동구도서관을 조성하며 그 이시가키가 대부분 묻혔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은 극히 일부분이며, 그마저도 아주 유심히 봐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동구도서관 방면의 증산공원 입구로 들어서면 우측에 니노마루로 올라가는 나무 데크가 있는데, 그 나무 데크 기둥 아래에 완전히 수풀로 뒤덮여 석축인지 분간하기조차 어려운 고구치의 좌측 이시가키가 남아 있다(왼쪽 사진). ㄷ자로 꺾여 있는 이 석축은 협축으로 되어 있으며 산노마루와 니노마루가 만나는 경계점이자 산노마루로 들어오는 고구치의 기단 역할을 했다. 그리고 동구도서관 좌측에 있는 나무 데크를 타고 도서관 앞 전망데크로 나가면, 데크 아래 기단에 남아 있는 산노마루 끄트머리의 이시가키를 관찰할 수 있다(오른쪽 사진).
동구도서관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을 타고 내려가 우측으로 꺾으면 풀이 무성하게 자란 등산로가 나오는데, 이쪽을 따라가다 보면 산노마루 남측 이시가키를 비교적 잘 관측할 수 있다. 이곳이 유일하게 산노마루의 흔적을 거의 온전하게 관찰할 수 있는 장소이다.
3.2.2. 서측 산노마루
부산포왜성의 서측 산노마루는 현재 족구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석축 위로 족구장 주변을 도는 산책로와 나무 난간이 설치되어 있으며(왼쪽 사진), 정말 일부이지만 고구치의 우각부도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오른쪽 사진). 족구장의 서쪽에는 비교적 온전하고 높이도 꽤 높은 이시가키가 일부 구간 남아 있다(아래 사진). 그러나 이곳은 통하는 길이 없기 때문에 증산 둘레길 옆으로 빠져 수풀을 헤치면서 가야지만 볼 수 있다. 겨울에는 겨우겨우 볼 수 있겠으나 여름에는 우거진 수풀과 진드기, 거미가 득실대는 곳이며 경사도 꽤 있기 때문에 다칠 수가 있으므로 되도록이면 무리하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
3.3. 니노마루(二の丸)
부산포왜성의 니노마루는 현재 증산공원의 중심부로서, 게이트볼장, 원형 광장, 각종 운동기구 등이 올라앉아 있다. 이렇게 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원래 니노마루 안쪽으로 마스가타(枡形)를 두었던 고구치를 새로 석축을 쌓아 막아버리고, 협축으로 쌓아올렸던 야구라다이(櫓台)와 도베이(土塀)의 기초를 삭평해버린 흔적[8][9]이 곳곳에 남아 있으나 대체로 이시가키가 다른 부분에 비해 상당히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 공원 위에서는 가장자리에 난간이 둘러져 있고 수풀이 우거져 있기 때문에 관찰하기 어렵고, 니노마루를 한 바퀴 도는 증산 둘레길에서 장대한 이시가키를 관측할 수 있다.3.3.1. 치(雉) ・ 막힌 고구치(虎口)
부산포왜성에는 조선식 성곽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치(雉)가 서너 군데 존재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 부산포왜성의 치가 남아있는 곳은 니노마루 북측이 유일하다. 이러한 모습은 서생포왜성과 웅천왜성 등 여러 왜성들에서 나타난다. 본래 니노마루로 들어가는 내승형(內枡形) 고구치의 좌측에 연이어 돌출되어 있는 치형 야구라다이(櫓台)는 현재도 그 모습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고구치는 공원의 조성과 함께 현대의 마름모꼴 석축으로 메워져 버려 그 흔적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 지점은 왜성이 조선식 성곽의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경관이라고 할 수 있다.
3.3.2. 스미야구라다이(隅櫓台)
니노마루의 서측 모서리에는 규모가 큰 야구라다이가 남아 있다. 증산 둘레길을 돌다 보면 이 야구라다이가 암반 위에 올라앉은 장대한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이 부분도 부산포왜성의 상징과도 같은 모습으로, 증산왜성을 찍은 사진을 보면 자주 등장하는 시설이다. 이 역시 원래는 공원 바닥보다 높이 솟아 있었을 것이라고 예상되나, 현재는 삭평된 채 남아 있다.
3.3.3. 정삼품 통정대부 부령김씨지묘(正三品通政大夫扶寧金氏之墓)
니노마루 위에는 놀이터 한가운데에 뜬금없이 무덤이 한 기 조성되어 있다. 묘비에 적혀 있는 바에 따르면 명예관직인 통정대부(通政大夫)라는 직함을 가진 부령 김씨의 무덤인데, 묘의 주인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밝혀진 바가 없는 것 같다. 왜성들이 폐성이 되면서 이렇게 성 위에 무덤이 올라앉은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극단적인 예시 중 하나가 구포왜성. 성 위에 무려 90기가 넘는 무연고자 묘가 자리하고 있다. 오죽하면 파묘 및 이장을 권유하는 광고 플랜카드가 산 곳곳에 걸려 있을 정도.
방송에 따르면 묘비의 주인은 부안 김씨 김재성이라 한다. 본래 무덤은 용두산공원 자리에 있었는데 1920년대에 그 자리를 개발하면서 이곳으로 옮긴 것이라고.
3.4. 혼마루(本丸) ・ 천수(天守)
부산포왜성의 혼마루는 삭평되어 현재 너른 모래 운동장과 농구장이 자리하고 있다. 높이 솟아 있던 천수 기단이 깎여나가고 동남측의 고구치는 메워졌지만, 니노마루와 마찬가지로 이시가키가 꽤 잘 남아 있는 편이다. 농구장이 있는 서측 귀퉁이가 천수 기단이 있던 자리였으며, 60년대까지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니노마루와 마찬가지로 서북측을 향해 도베이와 천수가 향하고 있었다.[10] 수백 명이 주둔할 수 있을 정도로 널찍한데, 천수가 있었던 곳의 반대편을 향해 3층짜리 증산전망대가 세워져 있다. 전망대의 모습이 어딘가 일본 중세 성곽의 야구라(櫓)를 닮았다는 게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
4. 가치
부산포왜성은 왜군의 병력과 물자보급 및 본국과의 연락 등 일본 본토와 조선을 잇는 중요한 병참 기지로서 왜성 중 가장 먼저 축조되었다. 본래 왜군의 헤드쿼터로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던 왜성이었으나, 지속적인 난개발로 인하여 현재는 극히 일부분밖에 남아 있지 않은 실정이다. 그러나 좌천동 체력단련장 아래에 남아 있는 이시가키에서 정연하게 맞춰진 산기즈미(算木積み)의 모습을 확연하게 확인할 수 있고, 니노마루의 북측에 조선 성곽의 치(雉)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야구라다이(櫓台)가 남아 있는 등 왜성의 특징이 여실히 나타나므로 중요한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왜군이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한 이순신의 부산포 해전이 있던 곳으로 그 의의가 크다.5. 교통
지하철로 갈 경우 좌천역에 내려 5번 및 3번 출구로 나오면 된다. 정공단을 지나 골목길을 거쳐 제일아파트까지 올라가면 거기서부터 증산공원까지 2차례에 걸쳐 경사형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다. 다만 거기까지 올라가는 길은 부산 원도심의 여느 동네와 같이 산복도로가 나 있는 미친 듯한 경사를 자랑하기 때문에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버스를 탈 경우 일반버스 38번이나 22번을 타 금성고등학교, 문화아파트, 나웅하이빌 중 한 곳에 내리면 된다. 금성고등학교 및 문화아파트 정류장에 내리면 바로 경사형 엘리베이터를 타고 좌천어린이집이 있는 아래쪽 구루와로 올라갈 수 있고, 나웅하이빌 정류장에 내리면 마찬가지로 가파르지만 비교적 짧은 계단을 올라 동구도서관이 있는 산노마루로 올라갈 수 있다.
6. 여담
부산포왜성의 이시가키는 증산공원의 현대 석축과 뒤섞여 있기 때문에 알아보기 어려울 수 있다. 간단히 정리하면 돌이 마름모꼴로 쌓아져 있거나, 모르타르가 심하게 발라져 있어 돌의 표면을 확인하기 어렵거나, 일정한 작은 크기의 돌이 거의 수직으로 쌓여 있는 석축은 싹 다 현대의 석축이며 왜성 유적이 아니다. 부산포왜성의 이시가키를 이루는 돌은 대개 큼직큼직해서 그 점만 알아둔다면 어느 것이 왜성의 석축인지 비교적 쉽게 구별해낼 수 있을 것이다.7. 외부 링크
8. 관련 문서
[1] 조선 초기부터 왜란까지의 부산진성은 현재 일신기독교병원 주변을 감싸는 방형의 작은 성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조선 후기의 성은 부산포왜성의 데지로인 자성대왜성(子城臺倭城)을 약간 개축하여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2] 조선 전기 부산진성 터로 추정되는 정공단(鄭公壇)의 동쪽에 자성대가, 서쪽에 증산이 존재한다.[3] 穡은 墻의 오기(誤記)로 보인다.[4] 아마도 천수(天守)를 말하는 듯하다.[5] 웅천왜성(熊川倭城) 역시 축성에 4개월 정도가 소요되었다고 알려져 있다.[6]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7가에 있었던 용미산(龍尾山)에 자리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주변 지형이 깎여 나가 찾아볼 수 없다.[7] [8] [9] [10] 여기에서 천수(天守)의 기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히메지 성, 오사카 성, 구마모토 성 등 유명한 일본의 성들을 보고 천수가 영주의 위세를 과시하는 역할의, 일종의 랜드마크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천수는 그저 중심의 대형 망루의 역할을 하는 시설이다. 따라서 그 내부는 어둡고 난방도 되지 않아 주거에 적합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과 달리 다이묘(大名)가 거주하던 시설은 천수가 아니라 고텐(御殿)이었다. 만일 부산포왜성의 천수가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서북향이 아닌, 왜성의 안쪽을 향해 남향으로 지어졌어야 했다. 굳이 왜성 내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서북향을 택한 것은, 서북쪽 방향에서 육로로 쳐들어올 조명연합군을 의식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