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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E0529><colcolor=#fff> 영등포왜성 [ruby(永, ruby=ヨン)][ruby(登, ruby=ドゥン)][ruby(浦, ruby=ポ)][ruby(倭城, ruby=わじょう)] | Yeongdeungpo Japanese Fortress | |
이칭 | 영등포영(永登浦營) 영등적소(永登賊巢) 영등진(永登陳) 당도성(唐島城) |
형태 | 연곽식 산성 |
면적 | 미상 유적 범위 남북 · 동서 약 400m |
건설 | 1593년 (선조 26년, 추정) |
시마즈 요시히로 등 2인 | |
폐성 | 1598년 (선조 31년, 추정) |
위치 |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구영리 산 29-3 |
[clearfix]
1. 개요
임진왜란 발발 후 1593년경 일본군이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구영리의 대봉산(大峰山) 위에 쌓은 일본식 산성이다.2. 역사
- [ 조선왕조실록 보기 · 닫기 ]
- > 수영 내이포로부터 거제에 이르는 수로는 50여 리나 되오니, 만일에 왜적의 변이 있을 때에 쫓아가 구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전자에 영등포만호를 자산도(玆山島)로 옮겨 갔사온바, 청컨대 이제 다시 영등포로 돌아오게 하여 백성들의 생업을 편안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조선왕조실록』, 1418년 8월 19일 기사이보다 앞서 경상우도 도절제사 신수청(辛修晴)이 아뢰기를, "도내 옥포 · 감포 · 영등포 · 산달포는 바로 왜적이 먼저 이르는 곳이니, 청컨대 요해처(要解處)를 골라서 목책을 설치하고 또 거제진(巨濟鎭)을 그 중앙에 옮겨서 방수(防戍)하게 하소서." 하고, (...)
『조선왕조실록』, 1451년 3월 22일 기사영등포의 보를 설치한 곳은 좌지가 동향인데, 둘레가 1천 68척이고, 남북의 길이가 4백척이고, 동서의 너비가 2백 68척이며, 보 안에 두 도랑이 있고, 이 포로부터 서쪽으로 거제현까지는 육로로 43리이고, 동으로 제포(薺浦)까지는 수로로 1식입니다.
『조선왕조실록』, 1485년 3월 25일 기사이달에 쌓은 경상도의 (...) 영등포성은 둘레가 1천 68척이고, (...)
『조선왕조실록』, 1490년 윤9월 29일 기사윤효빙(尹孝聘)·한윤(韓倫)·이해(李海) 등이 보(報)하기를 '초나흗날 군사를 거느리고 웅천현 5리쯤에 치도(馳到)하여 주둔할 것을 약속한다.' 하였는데, 적은 이미 웅천성 밑의 인가에 불을 지르고 또 영등포를 불살랐으며, 적선도 거의 백 척이나 되었습니다. 제포에 치도하여 군사를 합하니 성세(聲勢)를 크게 떨쳤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10년 4월 10일 기사명하여, 웅천현을 승격하여 도호부로 삼고, 제포에 옮겨 두어 군민(軍民)의 정사를 겸하게 하고, 영등포만호를 승격하여 첨절제사를 삼고, 제포의 충군(充軍)을 적당히 덜어서 영등포에 분속(分屬)하여 거진(巨鎭)을 만들고, (...)
『조선왕조실록』, 1510년 6월 11일 기사올해는 진주에서 패전한 적선들이 이 섬에 가득히 밀려 들어 남아 있는 사람들을 다 죽이고 성책(城柵)을 많이 설치한 다음 영등포 · 지세포 · 옥포 등처를 나누어 점거하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3년 10월 16일 기사이제 흉적이 잠깐 물러간 것은 소굴로 돌아가려는 계획이 아닙니다. 그들이 경성을 떠나면서부터 그 연도(沿道)에서 노략질을 자행하는 등 조금도 금즙(禁戢)함이 없었고 대군이 고개를 넘어 진격한 다음에야 서서히 물러가 경상좌우도의 요해지인 (...) 영등포 (...) 수군절도사의 진영이 있는 군읍(郡邑)과 진포(鎭浦) 등처에 둔취하고 있는데 거의 수십 구역이나 됩니다. 흉적들이 여기에다 방옥(房屋)을 짓고 성호(城壕)를 수축하는가 하면 양곡을 운반하고 곡식을 가꾸면서 관병(官兵)에게 큰소리치며 공갈 협박을 가하고 있으니 그 흉모(兇謀)의 소재를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4년 1월 19일 기사4일 묘시에 여러 배로 적진에 돌진해 들어가면서 명화비전(明火飛箭)을 쏘기도 하고 혹은 현 · 승자총통을 쏘면서 도전하고, 정예선(精銳船)을 영등의 적 소굴에 나누어 보내 서로 들락날락하면서 이쪽저쪽을 공격할 기세를 보여 서로 지원하는 길을 끊도록 하였으나 그들은 성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아 섬멸할 길이 없어 분함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4년 10월 8일 기사다만 거제의 수륙 형세를 헤아려볼 때, 적병이 현재 영등 · 장문(場門) 등에 둔거하고 있으면서 책루(柵壘)를 굳게 하고 해안에 임하여 수비를 하며 기계(機械)를 많이 설치해서 느긋한 자세로 지친 상대방을 기다리고 있으니, 공격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 대체로 거제도는, 북변(北邊)의 영등 · 장문에 현재 적의 방비가 삼엄하니 육군으로 선공하기는 불가합니다.
『조선왕조실록』, 1594년 10월 13일 기사각 진영의 왜장 성명을 알리기 위해 모두 그 나라의 향담(鄕談)에 따라 글자를 맞추어 적겠습니다. (...) 영등포에는 사야모은로다유우(沙也毛隱老多有雨)[1],
『조선왕조실록』, 1595년 2월 10일 기사가덕에 이르니 동진의 왜인은 다 도해하고 지금은 영등포의 왜장 의홍(義弘)이 와서 진을 치고 2천여 명이 머물러 있다 합니다. 우리 나라 사람의 집은 1백여 호가 거접(居接)하고 있으며 배의 수효는 60여 척입니다. 거제에 이르러 탐심해 보았더니 영등포 · 장문포(場門浦) · 소진포(所津浦) 등 3진(陣)이 다 불타서 텅 비어 있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5년 11월 2일 기사윤두수가 아뢰기를, "(...) 행장이 바야흐로 강화(講和)를 말하는데 (...) 행장은 '그 적은 나의 무리가 아니다. 조선에서 비록 그들을 죽이더라도 내가 가서 구할 리가 없다.'고 했다 했습니다. 신이 선거이(宣居怡) · 이순신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영등포에 진을 치고 있는 적과 싸우도록 했더니 장문포에 진을 치고 있던 적들이 와서 구원하고, 장문포에 진을 치고 있던 적과 싸우면 영등포에 진을 치고 있던 적들이 와서 구할 뿐 행장의 군사들은 관망만 하고 있으면서 후원할 만한데도 끝내 와서 구하지 않았으니, 역시 오는 대로 격파해야 합니다. (...)" 하니, (...)
『조선왕조실록』, 1597년 1월 27일 기사
영등포는 거제도의 최북단에 위치한 포구로서, 대한해협과 가덕도, 제포를 마주하고 있어 일본과의 국경지대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진해만의 견내량과 부산포로 통하는 바닷길 한가운데를 차단할 수 있는 입지이기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 한산도 대첩과 부산포 해전 등 조선 수군에게 크게 타격을 받은 일본군이 일찍이 진을 쳤을 것으로 추정한다. 기존에 조선 수군이 쌓았던 영등포진성과 배후의 대봉산을 이용해 기지를 조성했으며, 인근의 장문포왜성 및 송진포왜성과 서로 연계되는 이른바 거제삼진(巨濟三陳) 중 하나로 지칭되었다. 특히 같은 장문포 입구에 마주보고 쌓은 다른 두 왜성과는 달리 멀리 떨어져 있기도 했고, 여러 기록에서 '거제의 진영'과 구별해서 칭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거제도 3진의 중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거제도의 왜성들에 관한 기록은 다른 지방에 비해 소략하다. 육로로 직접 타격이 가능했던 여타 왜성들과는 달리 거제도라는 섬 안에 있었기에 왜성에서 바닷길로 나온 일본 수군과 조선 수군이 교전을 벌인 기록이 있을 뿐이다. 다만, 지리상 웅천왜성, 안골포왜성, 합포왜성 등과 연계하여 구산반도와 거제도 사이의 수로를 차단하는 역할을 수행했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1595년 강화 회담이 진행되면서 일본군이 잠시 철군하는 과정에서 모두 철거 및 소각했는데, 정유재란 이후의 기록에 다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재사용한 것으로 본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일본군이 전면 철수를 결정하면서 영등포왜성도 버려졌다.
축성자는 시마즈 요시히로와 그의 아들 시마즈 타다츠네로 알려져 있지만 확실한지는 의문이다. 당시 거제도에는 일본군 제5군의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비롯한 하치스카 이에마사, 이코마 치카마사, 쵸소카베 모토치카, 쿠루시마 미치유키, 쿠루시마 미치후사 등의 왜장들이 먼저 상륙했고 그 뒤를 이어 제4군의 시마즈 부자와 제9군의 도요토미 히데카츠가 합류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접반사 이시발(李時發)의 장계에는 영등포왜성에 주둔하고 있는 왜장을 후쿠시마 마사노리로 기록하고 있다. 다만 1595년 일본군이 순차적으로 철수하면서 장문포왜성 및 송진포왜성에 주둔했던 시마즈 요시히로가 영등포왜성으로, 다시 눌차도왜성으로 군을 물린 것이 확인될 뿐이다.
3. 위치 및 구조
영등포왜성 위치관계도 |
영등포왜성 항공사진 (1967) |
영등포진성 및 구영마을에서 남서측으로 직선거리 약 600m 지점의 야산에 있다.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지만, 높은 산꼭대기에 있어 드나드는 사람이 잘 없다. 정상에 자리한 천수 기단은 제1곽의 서측 경계에 있는데 동향으로 앞에 어긋문(喰違い虎口)를 두었고, 뒤편인 서측으로 살짝 돌출되어 있다. 돌출부 밖으로는 정서측과 서북측으로 이어진 V자의 능선에 오비쿠루와(帶曲輪)가 서너 단 존재한다.
천수 기단을 둘러싸고 있는 제1곽은 동서 약 25m, 남북 약 55m의 규모이며 정북측과 동남측으로 어긋문을 1곳씩 두어 외부와 통하게 했다. 동남측 출입구 바깥에는 약 7단의 부곽과 출입구가 계단 모양으로 이어지는데 망루 기단(櫓台)가 1개소 잔존한다. 천수 기단 서측 오비쿠루와 끝단과 동남측 부곽의 가장 남측 끝단에서부터 서남측의 골짜기를 향해 V자로 모아지는 형태로 수직 토루(竪土壘)와 해자를 배치하여 산 아래에서 등반하는 적을 차단하게 했다.
전체적으로 토축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으나 제1곽, 천수 기단, 부곽 간의 경계부, 출입구 주변에는 잔존 상태가 양호한 석축이 이어져 있다. 자연석을 이용해 줄눈쌓기(布積み) 기법으로 쌓아올렸고, 모서리는 비교적 큰 석재를 이용해 산가지쌓기(算木積み)를 적용했으며 거석(鏡石)도 일부 사용했다.
이곳에서는 구운 벽돌(燒壁)과 기왓조각 등이 유물이 출토되었다. 기와는 요철(凹凸)형식의 기와에서 파도문양과 포목(布木) 문양 등이 복잡하게 각인되어 있고, 기와를 만든 흙은 점토질과 세사(細沙)가 많이 함유된 흙으로 이 지역에서 나는 미세한 마사토를 쓴 것으로 추정한다. 기와를 만들 때 나무로 거푸집을 만들어 휘감아 두드린 후 건조하여 불에 구운 것으로 두께는 1.2 ~ 2.8cm이며 소성(燒成)된 기와는 양호하고 연질의 갈색 도질(陶質)에 가까운 품질이다.
주곽부에서 ㄴ자로 꺾어져 내려오는 길쭉한 산줄기 끝에 외곽부의 부곽이 1개소 잔존한다. 전체적으로 서북향의 장방형 평면구조를 띠고 있고 정북측에 돌출부가, 동남측에 평문(平入り虎口)과 방형 축대가 남아있다. 이외에도 산줄기가 꺾어지는 모서리 부분과 그 바깥 서남측에 위치하는 해발 260.4m 대봉산 정상 봉우리[2]에도 토축 외곽부가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3.1. 영등포진성
경상남도 기념물 제205호 | |
<colbgcolor=#315288> 영등포진성 永登浦鎭城 | Yeondeungpojinseong Fortress | |
국가유산 명칭 | 거제 구영등성(巨濟舊永登城) |
정식 명칭 | 영등포수군만호진성(永登浦水軍萬戶鎭城) |
입지 | 평지성 |
기능 | 수군진성 |
건설 | 1490년 (성종 21년) 윤9월 |
폐성 | 1623년 (인조 1년) |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
면적 | 24,497㎡ |
지정연도 | 1998년 11월 13일 |
건축시기 | 조선시대 |
링크 | 공식 홈페이지 |
소재지 |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구영리 1249 |
영등포진성 항공사진 (1967) |
성은 현재 구영마을 남측 대봉산 기슭의 평지에 오각 원추형의 평면구조로 쌓았다. 출입구는 북문지와 남문지 2곳이 확인되는데 각각 동측과 서측으로 통로를 낸 편문형(片門形) 옹성을 둘렀다. 바닷가를 향하는 북문이 성의 정문 역할을 했으며, 북문 서측으로 성의 서북측 모서리부터 서남측 모서리까지 치가 3곳 잔존한다.
남문 동측의 동남측 모서리와 동측 체성에도 치가 2곳 남아있으며, 동북측 모서리에도 치가 존재했을 것으로 여겨지나 심하게 훼손되어 확인되는 것이 없다. 성 주변으로는 해자를 둘렀지만 대부분의 구간이 주택과 농경지로 개간되어 멸실되었다. 60년대의 항공사진을 확인해 보면 서측 성벽 바깥쪽으로 해자가 일부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는 완전히 경작지화 되어서 확인하기 쉽지 않다. 체성은 거석을 썼으나 대부분 훼손되고 기단만 남아 있는 곳이 많다. 외면석을 자연석으로 쌓고, 내벽은 막쌓기로 올린 뒤 후 그 사이에 크고 작은 채움돌을 넣었다. 이와 같은 축성 방식은 조선전기의 읍성과 같은 것으로, 당시 축성기술에 대한 중요한 연구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북문에서 올라오면 정면에 보이는 성 한가운데의 부지에는 왜성의 석축 형태를 한 축대가 존재한다. 구영2길 34번지의 민가가 올라가 있는데, 서측으로 약 80도 각도의 석축이 완연히 보인다. 주민들 사이에는 이곳이 만호의 거주지로 구전되어 오는 것으로 보아, 영등포왜성의 외곽부로 사용될 당시 산록거관(山麓居館)이 위치했던 자리로 추정하고 있다. 상술했듯 현재 민가, 즉 사유지가 되어 있는 곳이라 세부적인 조사가 힘들고, 성돌이 그대로 남아있었던 2000년대 초반과는 달리 현재는 시멘트가 덧발라져 있어 유적의 느낌을 받기는 힘들다.
영등포진은 1623년 견내량(現 둔덕면)으로 옮겼으며, 기존에 영등포진이 있던 이 지역은 구영(舊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성곽의 이름도 한동안 구영등성(舊永登城)으로 전해 내려오다가 실제 문화재 명칭도 동일하게 등록되었다.
3.2. 군위봉 유적
군위봉 유적 항공사진 (1967) |
3.3. 군위대
군위대 항공사진 (1967) |
군위대 항공사진 (2024, 카카오맵) |
70. 군위대(軍威臺)
○ 소 재 지 : 거제시 장목면 농소리 산 16번지[3]
○ 시 대 : 조선시대 말기
○ 규 모 : 둘레 387.3m, 높이 2.9m, 폭 1.3m
농소마을 앞 군위봉과 노장산(老長山)사이 능선에 있는 일본군인의 포대가 설치되어 있었던 곳인데 이곳에서 보면 대마도와 부산, 진해, 고성항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일제시대 일본군이 36년간 머물면서 축조한 포대로 자연적인 지형을 이용하여 토석으로 축대를 쌓아 군사기지로 만들었는데 언듯 보기에는 성같이도 보인다. 이 왜성에서 서쪽 3km지점의 영등 뒷산에 토성 2개가 있다. 이 성에서는 왜군들이 말 훈련을 하였고, 병사들의 군사훈련장으로 사용했다. 이곳에 임진란 때 축성한 성이 있었는데 부산포에 침입한 일본군이 서해로 빠져 나가면서 거제도에 상륙할 것을 대비하여 축성한 성이다. 노·일전쟁 때 일본 해군기지가 송진포에 있을 때 대한해협과 진해만의 한려수도를 방어하는 포대를 설치하면서 이 성돌을 뜯어다가 포대를 만들었고 한일합방 때 이곳에 포병부대가 주둔했으며 포대 및 산록에는 일본군의 군사훈련장이 있었다. 북서쪽으로 높이 2m의 토석성이 남아 있는데 둘레 88m, 높이 2.9m, 폭 1.3m의 시멘트 콘크리트로 원형축대를 쌓고, 그 가운데 포대를 설치하였다. 주위에는 병사들이 사용한 막사터와 무기고 등의 흔적이 있다. 여기서 보면 거제내륙과 부산, 멀리 대마도까지 보이고 진해, 마산이 발아래 내려다 보이는 듯하다.
『거제시지(巨濟市誌)』「제11편 문화재(文化財)」 p.2403
군위봉 서쪽 노장산의 남측 산줄기 가장 끄트머리 해발 약 150m 지점에 위치한, 일제가 쌓은 포대(砲臺)이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 해군기지가 송진포에 들어서면서 이곳에 포병부대가 배치되었는데, 산기슭에 있던 군사훈련장은 현재 사라진 상태지만 산봉우리 위에 있던 원형의 포대는 아직도 남아있다. 높이 약 2m의 토석성으로 둘레 88m, 폭 1.3m의 시멘트 축대가 있다. 주위에는 병사들이 사용한 막사 터와 무기고의 흔적이 잔존한다고 한다.○ 소 재 지 : 거제시 장목면 농소리 산 16번지[3]
○ 시 대 : 조선시대 말기
○ 규 모 : 둘레 387.3m, 높이 2.9m, 폭 1.3m
농소마을 앞 군위봉과 노장산(老長山)사이 능선에 있는 일본군인의 포대가 설치되어 있었던 곳인데 이곳에서 보면 대마도와 부산, 진해, 고성항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일제시대 일본군이 36년간 머물면서 축조한 포대로 자연적인 지형을 이용하여 토석으로 축대를 쌓아 군사기지로 만들었는데 언듯 보기에는 성같이도 보인다. 이 왜성에서 서쪽 3km지점의 영등 뒷산에 토성 2개가 있다. 이 성에서는 왜군들이 말 훈련을 하였고, 병사들의 군사훈련장으로 사용했다. 이곳에 임진란 때 축성한 성이 있었는데 부산포에 침입한 일본군이 서해로 빠져 나가면서 거제도에 상륙할 것을 대비하여 축성한 성이다. 노·일전쟁 때 일본 해군기지가 송진포에 있을 때 대한해협과 진해만의 한려수도를 방어하는 포대를 설치하면서 이 성돌을 뜯어다가 포대를 만들었고 한일합방 때 이곳에 포병부대가 주둔했으며 포대 및 산록에는 일본군의 군사훈련장이 있었다. 북서쪽으로 높이 2m의 토석성이 남아 있는데 둘레 88m, 높이 2.9m, 폭 1.3m의 시멘트 콘크리트로 원형축대를 쌓고, 그 가운데 포대를 설치하였다. 주위에는 병사들이 사용한 막사터와 무기고 등의 흔적이 있다. 여기서 보면 거제내륙과 부산, 멀리 대마도까지 보이고 진해, 마산이 발아래 내려다 보이는 듯하다.
『거제시지(巨濟市誌)』「제11편 문화재(文化財)」 p.2403
이곳의 다른 이름은 농소리성지이다. 해당 유적에 대한 유일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거제시지(巨濟市誌)』「제11편 문화재(文化財)」는 임진왜란 때 축성한 성을 근대에 일본군이 개축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해당 문서의 기술은 이 지점에서 보일 리 없는 마산과 진해만이 발아래에 보인다[4], 군위봉과 노장산 사이의 능선에 있다는 등 군위대와 군위봉 유적을 혼동하고 있어 이것이 정말 군위대에 대한 정보가 맞는지 의심스럽다. 서측 3km의 영등 뒷산에 토성 2개소가 위치한다는 서술 역시 현실의 공간정보와 맞지 않는 서술이어서, 더욱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다만 만일 이곳에 임진왜란 때부터도 성터가 있었다면 군위봉 유적과 마찬가지로 영등포왜성의 데쿠루와나 영등포진성의 망대가 위치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4. 현황
4.1. 영등포왜성
능선 아래 외곽부의 무너진 석축 |
제3곽 남측 차단 석축 |
제3곽 서남측 석축 |
제2곽 출입구 석축 |
제2곽 서남측 석축 |
다 무너져 능선을 따라 내려가듯 남은 천수 기단 |
천수 기단의 북측 모서리 축조 상태 |
제1곽 서북측 석축 |
수풀에 파묻힌 제1곽 북측 석축 |
완연하게 남아있는 천수의 계단 |
4.2. 영등포진성
양호하게 잔존하는 북측 체성 |
북측 체성 축조 상태 |
서측 체성 잔존 상태 |
서측 체성에 돌출된 치 |
성내에 민가 축대로 잔존하는 추정 왜성 석축 |
추정 왜성 석축의 기울기 |
5. 교통
6. 여담
7. 외부 링크
8. 관련 문서
[1] 사에몬노다유(左衛門大夫)의 음차이다.[2] 현재는 전파 송수신탑이 들어서 있다.[3] 주소가 틀려 있다.[4] 실제로는 마산 및 진해만 방면인 북측에 훨씬 더 높은 해발 218.4m의 노장산과 군위봉이 있기 때문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