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광역시 기념물 제7호 | |
<colbgcolor=#315288> 부산진성 釜山鎭城 | Busanjinseong Fortress | |
소재지 | 부산광역시 동구 |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
면적 | 24,198㎡ |
지정연도 | 1972년 6월 26일 |
건축시기 | 조선시대 |
링크 | 공식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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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산광역시 동구에 위치했던 조선시대 수군진 성곽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가장 먼저 침공한 장소로 유명하며, 도시화와 매립으로 성곽이 거의 소실된 지금까지도 부산진구와 동구의 지명 곳곳에 이름을 남기고 있어 부산광역시 주민들은 진(鎭)으로 줄여 부르기도 한다. 조선시대 대일(對日) 외교와 국방의 최전선에 서 있던 곳으로 여타 수군진보다도 그 위상이 높았다.2. 역사
『해동제국기』「동래부산포지도」 | 『부산진순절도』, 변박, 1760 |
1459년(세조 5) 도안무처치사영은 보안을 위해 울산 개운포로 이전하지만, 1466년 진관 체제가 정비되면서 부산진에는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1]가 이끄는 거진(巨鎭)이 다시금 설치되었다. 1483년(성종 14) 부산진 첨사 설순조(薛順祖)가 부산진을 거진에서 주진(主鎭)으로 승격시켜 달라고 요청했지만 거부당했고, 대신 기존에 종3품이던 부산진 첨사직을 정3품 당상관으로 승격시켰다. 또한 고조되는 일본인들과의 마찰을 고려해 연해지방에 있던 수군진에 성곽을 쌓았는데 1490년 8월 목책으로 되어 있던 부산진의 성곽도 석성으로 보강하면서 조선전기 부산진성이 되었다. 1510년 삼포왜란과 1544년 사량진왜변이 발발하자 조선과 일본의 외교관계는 경색 국면에 접어들었고, 결국 1592년 5월 23일 임진왜란의 시작을 알리는 부산진 전투가 터지며 이튿날 부산진성은 함락, 당시 부산진 첨사 정발을 포함한 거의 전 병력이 전사하고 말았다.
부산진에 이어 동래부까지 함락시킨 일본군은 한양으로 진격하는 동시에 곧바로 부산진성을 허물고 후방 본진으로 사용할 부산포성을 쌓는다. 부산진성이 위치했던 증산(甑山) 정상에 본성(本城)을 쌓고는 산비탈 전체를 활용해 진영을 설치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증산 동쪽 범일천 하구에 솟아 있는 해발 36m의 구릉을 중심으로 데지로(出城)를 쌓아 쌍성(雙城) 구조를 갖추었다. 본성과 데지로는 어머니와 자식 같다고 해서 모성(母城)과 자성(子城)이라고도 불리는데, 여기서 자성대(子城臺)라는 지명이 유래되었고 부산포왜성의 데지로는 지금도 자성대왜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 자리는 삼포왜란 당시 부산포왜관이 있던 장소이기도 하다.
『1872년 지방지도』 「부산진지도」 |
『사로승구도』, 변박, 1748 |
新造倭館入接房屋, 已盡完了, 宴享大廳, 今方竪柱。 而或者疑不造於舊基, 恐致失懽而生怨, 臣之所見不然。自前倭館與釜山, 非在一城中者也。 平時釜山在西邊; 倭館在東邊五里許, 今則釜山鎭, 就倭子所築之城, 移設於倭館舊基之傍, 卽東邊也。今造倭館, 又在於西邊五里許, 與釜山相距遠近, 與平時一樣, 基之新舊, 非所當論, 渠何敢生怨?
새로 짓는 왜관의 서로 붙은 가옥들은 이미 다 [건설이] 완료되었고, 연향대청(宴享大廳)은 지금 기둥을 세우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옛터에다 짓지 않아서 혹시 왜의 환심(歡心)을 잃어 원망이 생길까 두렵다고 의심하지만 신의 소견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전부터 왜관과 부산은 한 성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평시에는 부산[진]은 서쪽에 있고 왜관은 동쪽 5리쯤 되는 곳에 있었는데, 지금의 부산진이 곧 왜인(倭人)이 쌓은 성으로, 왜관의 옛터 옆으로 옮긴 것이니 바로 동쪽입니다. 이번에 짓는 왜관도 서쪽 5리쯤 되는 곳에 있어서 부산과의 거리가 평시와 일반이니 옛터이냐, 새터이냐는 논할 바가 아닌데 저들이 어찌 감히 원망하는 마음을 내겠습니까?
선조실록 1607년 6월 20일자 기사
즉 부산포왜관과 조선전기 부산진성의 위치를 서로 뒤바꾼 것이 두모포왜관과 조선후기 부산진성의 관계이고[2], 부산진성은 곧 자성대왜성을 그대로 취해 운용하였다는 의미이다. 부산진은 조선후기에도 줄곧 첨사진의 지위로서 조선의 남쪽 국경을 지켰고, 두모포왜관 및 후대에 이설된 초량왜관과 연계하여 개항기까지도 중요한 군사 요충지로서 기능했다. 특히 조선통신사가 일본으로 향할 때 부산진에서 출항했기 때문에 중국과의 국경도시였던 의주읍성과 비슷한 위치에 있었다.새로 짓는 왜관의 서로 붙은 가옥들은 이미 다 [건설이] 완료되었고, 연향대청(宴享大廳)은 지금 기둥을 세우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옛터에다 짓지 않아서 혹시 왜의 환심(歡心)을 잃어 원망이 생길까 두렵다고 의심하지만 신의 소견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전부터 왜관과 부산은 한 성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평시에는 부산[진]은 서쪽에 있고 왜관은 동쪽 5리쯤 되는 곳에 있었는데, 지금의 부산진이 곧 왜인(倭人)이 쌓은 성으로, 왜관의 옛터 옆으로 옮긴 것이니 바로 동쪽입니다. 이번에 짓는 왜관도 서쪽 5리쯤 되는 곳에 있어서 부산과의 거리가 평시와 일반이니 옛터이냐, 새터이냐는 논할 바가 아닌데 저들이 어찌 감히 원망하는 마음을 내겠습니까?
선조실록 1607년 6월 20일자 기사
오늘날 자성대공원의 모습 |
1972년 박정희 정권의 주도 아래 부산진성은 부산진지성이라는 이름으로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7호로, 부산진성 서문 성곽우주석은 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되었고 1974년 정화공사를 거쳐 동문, 서문, 장대를 재건했다. 그런데 문화재 명칭이 여러모로 생뚱맞은 이름이어서 오랜 시간 지적이 이어졌다.[3] 2020년에 지정문화재 명칭변경 고시를 통해 부산진지성이라는 이름이 부산진성으로 환원되었다. 2021년부터 래추고주민협의체가 부산진성이름바꾸기 100회차 릴레이캠페인을 진행했으며 2021년 7월 7일 부산시가 이에 호응하여 자성대공원 명칭변경을 추진한다고 보도자료를 배부했다. 2022년에 고증을 거쳐 동문의 건춘문(建春門) 현판이 진동문(鎭東門)으로, 장대에 걸려 있던 진남대(進南臺)라는 현판은 승가정(勝嘉亭)으로 환원되었다. 2023년에는 국가지명위원회에서 개정고시를 발표해 자성대공원도 부산진성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어 지금에 이른다.
3. 위치 및 구조
『임진전란도』[4]에 묘사된 조선전기 부산진성 |
『동래부사접왜사도』에 묘사된 조선후기 부산진성 |
여러 점의 회화나 사진자료를 대조해 봤을 때 대개 자성대왜성의 최외곽 석축을 그대로 수군진의 성벽으로 삼았고, 성문과 여장을 조선식으로 개축한 것으로 보인다. 왜성의 외곽부에는 수군진에 소속된 군졸과 주민들의 거주지, 화약고, 시장, 객사 등이 들어서 있었고 주곽부에는 동헌 관아와 군창 등이 존재했다. 성곽의 서문 밖에도 영가대, 굴강 및 부속 관아들이 배치되어 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3.1. 자성대왜성
왜성 倭城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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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aaa> † 자마산성 子馬山城 | }}}}}}}}} † : 멸실된 왜성}}} |
<colcolor=#fff> 자성대왜성 [ruby(子, ruby=チャ)][ruby(城, ruby=ソン)][ruby(台, ruby=デ)][ruby(倭城, ruby=わじょう)] | Jaseongdae Japanese Fortress | |
<colbgcolor=#000> 이칭 | 소서성(小西城) 환산성(丸山城) 만공대(萬公臺) |
형태 | 왜성 |
면적 | 약 24,198㎡ |
건설 | 1592년 (선조 25년) |
아사노 나가마사 • 아사노 요시나가 | |
폐성 | 1598년 (선조 31년) |
주소 |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
부산성도(釜山城圖)의 자성대왜성 부분 |
자성대왜성 추정 구조도 |
자성대왜성은 전형적인 윤곽식 평산성의 형태를 하고 있다. 범일천 하구에 솟은 구릉지 위에 혼마루를 두고, 반시계 방향 나선형으로 부곽을 배치했다. 구루와의 개념이 없었던 조선에서는 주로 주곽부와 외곽부를 이분하여 외성과 내성으로 인식했고, 지금도 이런 인식은 계승되고 있다. 왜성을 이루고 있는 구루와의 수는 4개 혹은 5개를 상정할 수 있는데, 주곽부의 3개 구루와를 내성, 나머지를 외성으로 구분했다. 주곽부는 주로 내탁 기단이 많으며, 최외곽부에서 수군진성을 이루던 성벽은 남측과 서측, 동남측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협축식으로 되어 있었으며 출입구가 3곳이었다. 외성벽의 바깥에는 서측 체성을 따라 길게 해자가 나 있었고, 나머지 삼면은 바다 및 하천과 접했으며 동남측은 암반 절벽 위를 타고 성벽이 뻗어 있어 방어에 유리한 요해지(要害地)였다. 하술할 부산진성의 세부 구조는 공간적으로 자성대왜성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므로, 내성 및 외성 등 조선식 성곽에 통용되는 개념보다는 왜성의 용어를 위주로 서술한다.
3.2. 외곽부(外郭部) ・ 외성(外城)
3.2.1. 금루관(金壘關)
19세기 말 촬영된 금루관 # |
1970년대 콘크리트로 개건된 금루관 |
부산 동구 범일동 1564-2
부산진성의 주출입구 역할을 했던 것은 서문인 금루관이었다. 자성대왜성이었을 당시에는 육지를 향하는 유일한 고구치(虎口)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왜성이었다면 목조 문을 설치했을 출입구 사이를 조선식 성돌로 메꾸어 성문을 설치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옛 사진을 보면 성문 양측의 성돌과 바깥쪽 체성 성돌의 형태와 축조기법이 확연하게 구별된다. 일본식 이시가키로 판단되는 체성 위에 조선식의 여장을 둘러 총안을 낸 이색적인 형태이다. 금루관은 '쇠와 같이 굳센 보루의 관문'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본래 부산진시장 골목길에서 철길 위를 건너가는 육교로 이어지는 도로 측면에 위치했으나, 1916년의 지도에 표기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부산궤도가 부설되면서 서측 성곽이 대부분 헐린 1909년 이미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부산진성공원의 서측에 대강 모습을 재현한 기념물이 세워져 있는데, 19세기의 사진과 비교하면 알 수 있지만 대략적인 형태 이외에는 실제 금루관과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3.2.1.1. 부산진성 서문 성곽우주석(釜山鎭城西門城廓隅柱石)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9호 | |
<colbgcolor=#315288> 부산진성 서문성곽우주석 釜山鎭城 西門城廓隅柱石 Cornerstones at the West Gate of Busanjinseong Fortress | |
소재지 | 부산광역시 동구 |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
수량 | 2점 |
지정연도 | 1972년 6월 26일 |
건축시기 | 조선시대 |
링크 | 공식 홈페이지 |
남요인후(南徼咽喉) | 서문쇄약(西門鎖鑰) |
우주석(隅柱石)은 집이나 성의 모퉁이 경계에 세운 돌기둥을 말한다. 금루관의 좌우 모퉁이에 경사지게 세웠는데, 다테이시즈미(縦石積み) 기법으로 세워진 왜성의 입석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돌 위에는 국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왜적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려는 목적으로 새긴 글귀가 있는데, 동쪽 돌기둥에 남요인후(南徼咽喉)[5]가, 서쪽 돌기둥에 서문쇄약(西門鎖鑰)[6]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국토의 남쪽에 있는 부산이 국방의 요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임을 알리는 문구로 임진왜란 이후 국방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고, 특히 조선전기 부산진이 부산포왜관을 통제했듯 조선후기 부산진은 초량왜관을 통제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금루관이 헐린 뒤 매립지에 세워진 성남초등학교 교정에 보관되어 있다가 1974년 부산진성 정화사업 때 현 위치로 이전해 개건 서문 양측에 배치되어 있다.
3.2.2. 진남문(鎭南門)
부산진성 남문은 바다와 맞닿아 있었다. 일제강점기 부산진성 앞 바다가 매립되면서 남문 위치에 성남초등학교가 자리 잡았다.3.2.3. 진동문(鎭東門)
부산진성 동문은 진동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나 건춘문이라는 이름으로 복원됐다.3.2.4. 구장루(龜藏樓)
부산진성 북문은 구장루(龜藏樓)라고 불렸다.3.3. 장대(將臺)
3.3.1. 영가대(永嘉臺)
1614년 광해군 6년 순찰사 권반은 못을 파고 호(濠)를 만들어서 전선(戰船)을 감추었다. 작은 언덕을 쌓아서 대(臺)를 만들었다. 1624년 인조 2년 이민구가 권반의 고향이 안동이라 안동의 옛 이름인 영가(永嘉)를 가져와 이름을 지었다.
3.3.2. 진남대(鎭南臺)
1974년 부산진성 정상에 장대를 설치하고 진남대라고 이름을 지었다. 진남대는 부산진성 남문인 진남문에서 이름을 가져온 것으로 추정되나 부산진성에 진남대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2022년 9월 진남대 안내판은 승가정으로 교체됐으며 현판도 승가정으로 변경될 예정이다.3.3.3. 승가정(勝嘉亭)
1842년 첨사 이희봉(李熙鳳)은 육우정을 짓고 승가정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육우는 여섯모퉁이라는 뜻으로 여섯 개의 경치를 기록해놨다. '구봉(龜峰)의 저녁 연기각 푸르게 엉기는 것', '크고 작은 섬들에 아침해가 붉게 비치는 것', '강선대(降仙臺)의 높은 자라등', '절영도(絶影島)에 신기루(蜃氣樓)가 일어나는 것' '석추(石楸)에 파도가 울고 흰 물거품을 뿜는 것', 금용산(金湧山) 멧부리가 푸른 하늘에 깍아지른 듯 솟아 있는 것'
영남진지는 승가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해놨다.
"정자(亭子)는 부산의 자성(子城)에 있다. 산이 마치 엎어놓은 가마와 같다 하여 부산(釜山)이라 한다. 그 지형을 따라 돌을 쌓은 것이 성의 형상과 같기 때문에 자성(子城)이라 한다. 그 위는 평평하고 시원하여 수천인이 앉을 만하며 바다와 산의 승경(勝景)이 다 모이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마땅히 정자나 대(臺)처럼 올라가서 경치를 바라볼 만한 곳이 있을 법하나 아직도 이것들이 없는 것은 아마도 기다림이 있는 것 같다. 내가 임인년에 절제사(節制使)로서 이곳에 부임하여 작은 정자를 지었다. 기와를 덮고 여섯 모퉁이에 기둥을 세웠으며 면(面)마다 둥근 난간에 단청을 올렸으니 이로부터 자성(子城)이 갑절이나 광채를 더할 수 있었다.
부산에는 본래 영가대(永嘉臺)가 있어 이름을 온 나라에 떨쳤는데, 내 정자(亭子)가 마침 이루어져 승가(勝嘉)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영가대(永嘉臺)보다 낫게 되기를 힘쓰려 함은 아니다. 승가(勝嘉)의 뜻은 좋은 땅으로 인해 아름다운 정자를 짓는다는 데 있다. 영가대(永嘉臺)는 물가에 있고 승가정(勝嘉亭)은 산의 꼭대기에 있다. 이쪽보다 나은 것이 있고 저쪽보다 못한 것이 있는 것은 황학루(黃鶴樓)와 봉황대(鳳凰臺)의 그것과 같다. 비록 이백(李白)과 최호(崔顥)의 문장으로서도 능히 우여을 가리기 어려울 것이니, 내가 어찌 감히 옛사람이 선편(先鞭)을 잡은 것에 대해 승부를 다투려 하겠는가? 아, 이 곳은 곧 옛날의 전장(戰場)이다. 옛날에 용사(龍蛇)의 난이 있었을 때에 명(明)의 장수가 공을 비석에 새겼는데 세월이 점차 멀어지니 귀두(龜頭)는 깍여져 떨어져나가고 글자의 흔적은 인몰(湮沒)되어 지나가면서 보는 사람마다 발걸음을 멈칫하면서 탄식해 마지 않았다. 그런데 옛날의 황대(荒臺)가 이제 와서는 명구(名區)가 되었으니 이는 흥폐(興廢)에 때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이 정자에 오르면 평평하고 대해(大海)를 굽어보고 대마도(對馬島)를 바로 바라볼 수 있으며, 꽃피는 아침과 달뜨는 저녁에 술을 들고 칼에 기대고 있노라면 매양 강개(慷慨)하여 옛날을 생각하는 정을 금할 수 없으며, 산수(山水)의 뛰어남과 풍물(風物)의 아름다움이 여섯기둥의 주련(柱聯)에 갖추어져 있다. 나는 무인(武人)인지라 문사(文詞)로써 울릴 수 없어, 진경(眞境)을 그려내는 것에 이르러서는 후인(後人)을 기다리려 한다. 만약에 나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나를 이어 그것을 고쳐 지을 것이며, 또한 내가 승지(勝地)로 해서 가정(嘉亭)을 지은 뜻을 알 것이다."
[1] 줄여서 첨사(僉使)라고 부른다.[2] 실제로는 두모포왜관이 조선전기 부산진성보다 조금 더 서남쪽에 위치했을 것으로 비정한다. 대신 후대의 지도를 보면 과거 부산진이 있었던 자리에는 개운포진이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3] 지성(支城)은 곧 본성에 딸린 작은 보루를 뜻하는 단어이지만 자성대공원 자리에 위치했던 부산진은 지성이 아닌 본영이었으며 조선전기의 부산진으로 소급해도 지성을 둔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부산포왜성과 자성대왜성 사이의 관계를 부산진성에 적용된 것으로 착각하면서 벌어진 일로 추정된다.[4] 1834년 동래부 화사 이시눌이 그린 그림으로, 후대의 상상화이다.[5] 남쪽 국경(南徼, 즉 부산진)은 나라의 목구멍(咽喉)과 같은 중요한 곳이라는 의미이다.[6] 금루관(西門)은 나라를 지키는 자물쇠(鎖鑰)와 같다는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