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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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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최후의 선지자
무함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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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수니파에서는 무함마드의 얼굴을 그리는 것을 금기시하기에 이슬람 서예를 이용해 무함마드를 나타낸다.
파일:depiction_of_muhammad_in_medieval_persia.png
반면 수니파가 아닌 종파는 무함마드의 얼굴이 묘사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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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 흰 천을 덮어쓴 모습의 무함마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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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천사 지브릴을 영접하는 무함마드 }}}}}}}}}
<colbgcolor=#009000><colcolor=#ffffff> 본명 아불카심 무함마드 이븐압둘라 이븐압둘무탈리브 이븐하심
(أَبُو ٱلْقَاسِم مُحَمَّد ٱبْن عَبْد ٱللَّٰه ٱبْن عَبْد ٱلْمُطَّلِب ٱبْن هَاشِم)
[3]
이명 카심의 아버지(أبو القاسم / Abū al-Qāsim)
성사(聖使, رسول الله / Rasūl Allāh)
출생 570년
아라비아 히자즈 메카
(현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주 메카)
사망 632년 6월 8일 (향년 62세)
아라비아 히자즈 메디나
(현 사우디아라비아 메디나주 메디나)
재임 기간 메디나 기반 집단 최고지도자 (움마의 성사)
622년 ~ 632년 6월 8일
부모 부 - 압둘라 이븐압둘무탈리브
모 - 아미나 빈트와흐브
배우자 하디자 빈트후와일리드 외 12명
자녀 아들 - 카심, 압둘라, 이브라힘, 자이드 이븐하리사(입양)
딸 - 자이나브, 루카이야, 움쿨숨, 파티마
종교 이슬람교

1. 개요2. 이름
2.1. 실명2.2. 표기
3. 생몰년월4. 위상5. 생애6. 연표7. 후손8. 오해: 창시자? 신?9. 주요 평가10. 논란
10.1. 군벌10.2. 사생활10.3. 메카 거주민들에 대한 습격과 학살10.4. 유대인 문제
11. 이야깃거리12. 매체에서의 모습

[clearfix]

1. 개요

하나님이 보낸 자[4]
사람들이여! 하나님도 한 분이요, 우리의 선조도 한 분으로 우리 모두는 아담의 자손입니다. 알라께서 보시기에 가장 훌륭한 인간은 정의롭고 평등한 사람으로, 아랍인이 비아랍인에게 우월한 것 없이 모두가 평등합니다.
이슬람의 창시자. 아라비아 반도의 제부족을 이슬람의 기치하에 통합함으로써 이슬람 정복의 초석을 세운 상징적 인물이다. 이슬람에서 파생된 드루즈교, 시크교, 알라위파 등에서도 존경받는 예언자이다.

아라비아 반도의 부족들에 의해 통치자로 추대되어 군주와 같은 직위에 있었으며 아라비아 반도 상당수를 통치 영역에 두었다.[5] 사후 아부 바크르칼리파가 되었으며 국가는 정통 칼리파 시대로 이어졌다.

2. 이름

2.1. 실명

일부의 주장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실제 사용한 이름이 아니라 자칭이며, 실제 이름은 쿠삼(قُثَم / Quṯam)이라는 설이 존재한다. 관련 글. 당시 아랍 기독교계에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라는 복음서 구절(요한 14,16)을 두고 '협조자(παράκλητος, 원문상에는 παράκλητον)'를 '무함마드'라 번역하고, 이름을 '무함마드'라고 하는 선지자가 오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6]

즉 스스로 '무함마드'라고 자칭함으로써 자신이 예수가 말한 그 협조자라고 할 의도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극히 일부분으로써 하나님의 기적이라고 여겨지는 성 쿠란을 연구해온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의 이름을 의심하지 않는다. 무함마드가 유아였을 때 한 유대인이 그(무함마드)의 신체에서 무엇인가를 목격하곤 성경에 예언된 선지자임을 알아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무슬림들은 성경 또한 하나님께서 내린 말씀을 기록한 성서라는 것을 믿지만, 자신들의 혈통에서 선지자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유대인들이 무함마드를 질투해 성경의 내용을 지우거나 변형하여 지금의 성경은 하나님께서 내린 그대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2.2. 표기

영어식 표기로는 마호메트(Mahomet)가 관례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라틴어 표기인 마호메투스(Mahometus)에서 유래한 것이다. 다만 오늘날에는 아랍어 원어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무함마드(Muhammad)도 많이 쓰인다. 아랍 문자로는 محمد라고 쓰며 모음을 붙여 쓰면 مُحَمَّد(Muḥammad, [muˈħammad])로 표기된다.

한국어권에서도 2000년대까지만 해도 영어식 표기를 차용하여 마호메트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 국립국어원에서는 마호메트와 무함마드 두 가지 표기를 다 인정하며, 점차 아랍어를 반영한 무함마드라는 표기가 정착되고 있는 편이다.

무슬림들은 '마호메트'라는 표현에는 그를 '악마'로 여기는 서구의 경멸적 시각이 담겨있다고 여긴다. 유럽에서 말하는 악마 바포메트가 무함마드의 이름이 약간 변형된 것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무슬림들의 이런 생각과 달리, 유럽에서 무함마드를 마호메트라고 표기하게 된 것은 무함마드의 오스만어 표기 '메흐메트(محمد / Mehmet)'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튀르키예오스만 제국 시절부터 유럽 대륙에 직접 발을 걸치고 있던 이슬람 국가였으며, 유럽에서는 주로 튀르키예를 통해 이슬람 문화를 받아들였다. 사실 십자군 전쟁을 제외하면 유럽이 이슬람 세력과 직접 접촉하게 된 것은 16세기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를 침공한 이후였다. 또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는 15세기 이래로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이슬람권 인물이었다. 사실 같은 이슬람권이라 해도 레반트 일대나 이란에서는 튀르키예인을 비롯한 튀르크인들을 무척이나 고깝게 보기 때문에 저런 주장이 나오는것도 마냥 이상한 일은 아니기는 하다.

명사》에서는 모한맥덕(謨罕驀德)이라는 음차 표기로 소개되어 있다.

3. 생몰년월

전승에 따라 무함마드의 대략적인 생몰년도와 날짜를 571년 4월 22일에서 632년 6월 8일 정도로 추정하지만 정확한 날짜는 장담할 수 없다. 특히 생년은 더욱 불확실하여 앞뒤로 1–2년 정도 오차가 있을 수 있다.[7]

수니파 전승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코끼리의 해 라비 알아우왈 달(이슬람력 내에서 행진) 12일에 태어났다고 하고 시아파 전승에서는 동년 동월 17일에 태어났다고 한다. 코끼리의 해를 보통 서기 570년이라고 보지만, 568년이나 569년, 혹은 571년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또한 라비 알아우왈 달 12일을 환산한 날짜도 4월 20일이라고 하기도 하고 22일이라고 하기도 한다. 또한 수니파 내부에서도 무함마드의 생일이 라비 알아우왈 달의 12일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어서 환산하기가 더욱 어렵다.

무함마드의 정확한 사망일자도 확언할 수 없지만 사망년도가 632년임은 분명하다. 하디스에 따르면 무함마드의 처 아이샤 빈트 아비 바크르에게[8] 친정 아버지 아부 바크르가 "선지자께서 돌아가신 날짜가 언제인가?" 묻자, 아이샤가 "월요일입니다."라고 답했다 한다. 아이샤조차 요일만 기억할 뿐 날짜는 몰랐다.

수니파 전승에서는 무함마드가 죽은 날이 이슬람력으로 라비 알아우왈 달이었다고 말한다. 대중적으로는 라비 알아우왈 달 12일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역시 수니파 전승에서 무함마드의 생일로 여기는 날짜이다. 대중적인 속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무함마드는 자기 생일에 죽은 셈이다. 그러나 라비 알아우왈 달의 다른 날짜를 지목하는 이슬람 학자들도 많고, 시아파는 아예 그 달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무함마드가 양력으로 6월 8일에 죽었다는 설명은 수니파의 대중적인 통설에 따라 서기 632년의 라비 알아우왈 달 12일에 죽었다고 가정하여 환산한 것이다.

코끼리의 해에 탄생하였다고 하는데[9] 코끼리의 해라 부름은 그해에 메카가 에티오피아 악숨 왕국 코끼리 부대의 침공을 받아서라고 한다. 그런데 무함마드가 태어난 해는 친할아버지도 모른다고 한다. 저쪽 사람들 문화가 태어난 해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보통은 무함마드가 서기 570년에 태어났다고 간주하고 나이를 헤아리지만, 실제 나이는 그보다 한두 살 정도 많거나 적을 수 있다.[10][11]

4. 위상

이슬람을 타 종교로 보는 비무슬림 입장에서야 쉽게 '이슬람의 창시자'라고 하지만 이슬람 기준으로는 무함마드가 종교를 '창시'한 것은 아니므로 무슬림들은 결코 저런 식으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이슬람에서는 이슬람이 우주가 창조될 때부터 있었으나, 잘못된 방법으로 인류에게 전달되었고, 이를 정리하기 위해 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내려보내었으나 이후 다시 종교가 기존의 순수함을 상실하자 그를 바로잡기 위한 최후의 예언자로서 무함마드를 내려 보냈다고 가르친다.[12]

이슬람 기준으로 알라의 25번째 예언자이자 14번째 사도이다. 꾸란에서는 무함마드를 마지막으로 더이상 예언자나 사도가 없다고 선언하였다.[13]

5.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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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연표

571년: 무함마드 탄생
576년: 어머니 아미나 사별
583년: 상인이 되어 로마령 시리아 방문
595년: 카디자와의 결혼
610년: 대천사 지브릴의 계시받아 이슬람 전도 시작
614년: 메카 귀족들의 무슬림 박해 시작
615년: 일부 무슬림들의 에티오피아 피신
616년: 우마르의 개종
619년: 아내 카디자와 숙부 아부 탈리브의 별세
620년: 야스리브[14]가 분쟁 조정자로 무함마드 초청
621년: 미라즈 (무함마드의 승천 기행)
622년: 헤지라 (성천: 마카야스리브)
623년: 봉쇄에 대항하여 무슬림들이 메카의 카라반을 습격, 이후 메카 군대가 야스리브의 가축을 약탈.
624년: 바드르 전투 (승) [15]
625년: 우후드 전투 (패) [16]
627년: 한다크 (참호) 전투 (승) [17]
628년: 후다이비야 협정 (메카 - 무슬림 간 휴전)[18]
629년: 문다 전투 (패)[19]
630년: [20] 메카 입성, 후냔 전투 (승)[21] 아무타스 전투 (승)[22], 타이파 포위[23], 타북 함락[24]
631년: 1차 두마툴 잔달 원정[25]
632년: 마지막 순례 여행 후 영면

7. 후손

파일:summit.jpg
하심 가문 알라위 왕조
요르단 국왕 모로코 국왕
압둘라 2세 무함마드 6세

역사상 수많은 귀족 가문들과 이맘들이 무함마드의 후예로 알려져 있거나 스스로 주장해왔다. 무함마드의 아들들은 다 요절하여 부계 자손들이 내려오지는 않고 있다. 따라서 후손들은 다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와 무함마드의 사촌동생이자 사위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사이에서 나왔다. 이 둘 사이에서는 장남인 하산 이븐 알리와 차남 후세인 이븐 알리가 있고, 역사 속에 큼직한 발자취를 남긴 후예들은 대부분 이 둘의 후손이다. 파티마를 통한 무함마드의 후손은 '샤리프(شريف, sharif)'라고 불리는데, 이 호칭은 하산의 후손들에게 자주 붙여진다. 후세인의 후손들은 주로 '사이이드(سيد, sayyid)'라고 불린다. 또 무함마드의 후예는 알리의 후손이기도 하므로, '알리 씨족(العلويين, al-ʿAlawiyyīn)'이라고도 한다.
파일:Alid_Interrelationships.png
대략적인 각 세력들의 계보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파티마)
·
(수니파의 제4대 칼리파)
·
(시아파의 초대 이맘)
하산 이븐 알리
·
(수니파의 제5대 칼리파)
·
(시아파의 제2대 이맘)
후세인 이븐 알리
·
(시아파의 제3대 이맘)
파일:Hashemite_Tree_2.png
하심 가문의 계보
파일:Alouids.png
알라위 왕조의 계보
파일:Idrisid_Tree.png
이드리시 왕조의 계보


범무함마드의 후손으로 엘리자베스 2세가 언급되는 경우도 있다.

8. 오해: 창시자? 신?

실로 그대는 경고자[26]일 뿐으로 인간을 감독하며 강요하는 자가 아니라.
쿠란 88장 21~22절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의 선지자로 마리아에게 말씀이 있었으니 이는 주님의 영혼이었노라. 주님과 선지자들을 믿되 ‘삼(3)’을 말하지는 말라.
예루살렘 알 아크사 모스크 벽에 새겨진 쿠란 구절 중에서

이슬람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슬람이 무함마드를 숭배하는 종교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함마드 역시 하나의 인간으로서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27] 무슬림들도 무함마드의 완전성을 믿지 않으며, 그도 인간이기에 몇개의 실수를 하였다고 인정한다.[28] 그리스도교에서 예수가 결점이 없는 신이자 사람이었던 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따라서 둘을 비교하는 것은 양측 종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다. 게다가 극단적인 와하비즘 무슬림들은 무함마드의 부모의 무덤, 심지어 무함마드의 무덤을 폭파하려 시도하기도 하였다. (20세기 초반)

이슬람은 유일신의 권위를 중요하게 여기며 신은 하나(ahad)로, 몇개로 분할될 수 없고 침범할 수 없는 불변의 절대자로 여긴다. 따라서 이슬람의 입장에서 성부, 성령, 성자가 동일한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는 다신교로서 배척해야 하는 사상으로 여긴다고. 오히려 유대교는 일신교로 인정한다. 그리고 원칙적으로는 이슬람에는 성직자 계급이 없으며, 타 종교인에 대한 포교는 원칙적으로 권장하지 않는다.[29] 이슬람은 개인과 신간의 직선적인 연결을 주장한다.[30]

9. 주요 평가

예언자 무함마드는 이 세상의 모든 종교 인물들 중에 가장 성공한 사람이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31]
무함마드 전기 제2권의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나는 이 위대한 생애에 대해 더이상 읽을 것이 남아 있지 않아 슬펐다.
마하트마 간디

10. 논란

10.1. 군벌

여타의 종교지도자와 다르게 무함마드는 확실히 "군벌"이었다. 그것도 상당히 질이 안좋은 군벌이었는데, 어떤 지역을 정주하고 안정적으로 통치하는 지방세력이 아니라 약탈과 노예매매로 부와 세력을 모으는 산적에 가까운 형태의 군벌이었다. 따라서 끊임없이 병력을 모으고 정복하고, 약탈하고, 노예로 잡아 팔고, 학살하는 등의 행태를 보였다.

문제는 무함마드가 모든 아랍인들의 귀감이 되다보니, 이런 행태가 지속적으로 반복된다는 것이다. 종교 지도자의 삶은 그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는 궤적이 된다. 예를들어 불교도의 승려들은 붓다처럼 무소유의 수행자 생활을 하려고 하고, 유교의 유학자들은 공자처럼 선생이자 정치가가 되려고 한다. 기독교의 성직자들은 예수처럼 영적 구원을 위한 "설교자"가 되려고 하는데 무함마드의 제자들은 "군벌"이 되려는 성향이 처음부터 존재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코란에서는 무함마드가 실천한 군벌형성 시도를 독실하고 바람직한 행위라고 보고 있다. 심지어 이런 군벌조직을 어떻게 만들고 어떤 일을 해야하는지 세세하게 다 정해뒀는데 이것이 이슬람 무장조직들이 창궐하는 지역에서 발생하는 학살, 약탈, 강간 등 각종 잔혹행위의 원인이 되었다.

이는 이미 오랜 과거 문제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 문제가 되는데 무하히드 왕조는 기존의 술탄이 독실하지 않다고 여긴 광신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성립된 왕조이며, 사우디 아라비아와하비즘 성직자들을 등에 업은 군벌이 창건한 왕조이다. 이런 역사가 있다보니 술탄의 강력한 통제가 조금이라도 약해지면 사방에서 군벌이 일어나는 일이 상당히 많았다. 전세계에 발흥하고 있는 수많은 이슬람 무장조직도 이런 전통을 따라서 생겨났다.

이러한 무함마드의 행적에 대해 과거의 기준으로는 괜찮은 일이었는데 현대 기준으로 비판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그가 이슬람권 신자들의 롤 모델이고, 그가 생전에 해왔던 행적을 그대로 따라가려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기 때문에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무함마드가 이렇게 하라고 말했는데 무함마드가 잘못했다는 말이냐?"라는 식으로 모든 비판을 가로막고 끔찍한 짓을 반복하는 자들이 전세계에서 직접적인 연계도 없이 코란만 가지고도 고립적으로 숱하게 나타나고 있다.

10.2. 사생활

11번째 아내인 사피야 빈트 후야이는 본디 유대인 부족인 카이바르의 부족장인 케나나 이븐 알-라비(Kenana ibn al-Rabi)의 아내였으나, 정복전쟁의 일환으로 카이바르를 점령한 무함마드는 케나나를 고문해서 살해하고 아내 사피야와 결혼한다. 샤피아는 자기는 이슬람으로 개종하겠다고 했고, 무함마드는 그녀와의 결혼을 통해서 우호적인 세력을 늘렸다. 역사가 John L. Esposito는 이 결혼을 마치 알렉산더 대왕다리우스 3세의 딸 스타테이라 2세와 결혼한 것처럼 유대인 부족과의 화해를 위한 일종의 정략결혼으로 해석했다.

양자의 부인이었다가 9번째 아내가 된 무함마드의 사촌 여동생 자이납 빈트 자흐시의 경우, 역사가 William Montgomery Watt는 자이납이 이왕이면 무함마드 본인과 결혼하고 싶어했던 야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무함마드의 의붓아들 자이드와 자이납의 부부관계는 별로 좋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의붓아들 자이드는 이를 눈치채고 아내와 이혼하기로 했다고 하자 주위의 시선이 두려워 체면상 일단 거절하는데, 눈치 빠른 자이납은 이후 남편에게 대놓고 개기며 순종하지 않았고, 이혼당한 뒤 무함마드에게로 바로 가서 결혼한다.

또한 3번째 아내 아이샤가 6살일 때 결혼했다. 이는 첫째 아내인 카디자가 사망하자마자 한 결혼이었다. 6살 아동과의 결혼은 현재까지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슬람권의 악습으로 꼽히는 조혼을 정당화하려는 극단주의자들이 무함마드와 아이샤의 사례를 근거로 들이밀기 때문이다. 아이샤와의 결혼에 대해서는 무함마드의 정략적 의도라고 하는 해명도 있다. 아이샤의 아버지는 무함마드가 천사 지브릴에게서 알라의 계시를 받아온 직후에 개종해 무슬림이 된 인물이자 무함마드 사후 초대 정통 칼리파로써 움마(이슬람 공동체)를 이끌게 되는 아부 바크르인데, 이슬람의 전파에 그의 재력과 인맥이 크게 도움이 되었던, 무함마드의 최측근으로 활약했던 인물이었다. 더욱이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자신을 가장 가까이서 지지하던 아내와 부족장 삼촌이 이틀 간격으로 죽고 새로 부족장이 된 사람은 사이가 안 좋아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절박한 상황이 된 무함마드로서는 현실적으로도 기댈 데가 아부 바크르밖에 없었다고 할 수도 있다. 한 마디로 정략결혼.

역사가 Colin Turner에 의하면 미성년자 조혼이 많던 당시 시대 가치관으로는 별로 충격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무함마드 시대에서 5백 년이 넘게 흐른 서유럽 사회에서도 조혼이 있었다. 안티오크 공국의 레몽 드 푸아티에는 보에몽 2세의 딸인 콩스탕스와 결혼하였는데, 당시 그는 30대였고 그녀는 9살이었다.[32] 그리고 중세 기사의 표본으로 불리는 윌리엄 마셜 (1190년생)도 1224년에 존 왕의 9살배기 딸인 엘레노어 (1215년생)와 결혼, 1231년에 그가 죽을 때까지 적극적인 성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근대에 들어서는 18세기 프랑스의 저명한 과학자 라부아지에가 13세 소녀와 결혼하기도 했다.[33]

쿠란주의자 에딥 유크셀(edip yuksel)[34]는 10가지 증거를 가지고 아이샤가 9살이 아니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 . 주장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Taberi, Hisam ibn Urwah, Ibn Hambeli 및 Ibn Sa'd에 따르면 Aisha는 7세에 결혼하여 9세에 선지자와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그러나 또 다른 연구에서 Al-Taberi는 Abu Bakr의 네 자녀가 모두 이슬람 이전 아내 두 명에게서 태어났다고 보고합니다. 아이샤가 620년에 결혼하여 623년에 선지자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면 이는 그녀가 613년에 태어나 선지자와 함께 살기 시작했을 때 9세였음을 의미합니다. 알-테베리(Al-Teberi)의 계산에 따르면, 수치는 아이샤가 계시가 있은 지 3년 후인 613년에 태어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Teberi는 또한 Ayşe가 이슬람 이전 시대에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이 경우 아이샤가 이슬람 이전 시대, 즉 610년 이전에 태어났다면 선지자와 함께 살기 시작했을 때 적어도 14세였을 것입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테베리가 자신과 모순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약하면, 역사 증거와 쿠란을 보면 9세에 결혼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다만 무함마드가 진짜 권력자가 되었을 때 취한 여자들이 전부 성인이었음을 생각하면, 무함마드의 성적 취향은 어린 아이가 아니었던 듯하다. 아니, 자기 양자의 며느리를 취한 일이나 위에서 이야기한 샤피아의 사례를 보건데 오히려 성숙한 유부녀 취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미드 압둘 사미드 박사는 저서 <무함마드 평전>에서 무함마드의 성적 취향이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은 경험'에 근거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무함마드가 나이 많은 여자들을 좋아한 것은 '어머니를 대체하려는 무의식적 욕구', 아이샤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상받으려는 욕구'의 대상이었다는 주장으로, 하미드 박사는 무함마드가 아머니 아미나를 무의식중에, 어쩌면 '의식에서도' 미워했으리라고 본다.

코란에서는 아내를 구타해도 된다고 하고 (쿠란 4:34)[35] 어린이의 결혼을 허용하는 구절도 있다.(쿠란 65:4)[36]

10.3. 메카 거주민들에 대한 습격과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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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호 전투 당시 배신한 바누 쿠라이자에 대한 처벌

메디나에 있던 시절, 초기 무슬림들은 타 부족에 비해 생계 유지가 어려웠는데, 이를 본 무함마드는 메카인들을 습격해서 약탈하고, 시리아를 오가는 무역 대상들의 상품을 습격해서 약탈하는 것으로 재산을 축적했다. 또 무함마드는 이슬람화 되기 이전의 메카에 있는 꾸라이시 부족과 싸워 승리한 후 꾸라이시 부족과의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죽어가는 이웃 부족민들에게 꾸라이시 부족을 어떻게 할지를 물었는데, 그는 다 죽이라는 말을 했고, 무함마드는 이를 신의 판결이라며 옳다고 칭송한 뒤 대학살을 자행했다. 역사가 William Montgomery Watt에 의하면 이는 가족 내지 부족 단위로 무언가 피해를 당하면 이에 대해 대를 물려서라도 보복하는 아랍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고, 인권이 확립되지 못한 전근대 문화권에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수준의 복수를 당연시하는 풍조는 중근동 문화권부터 멀리보면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매우 많았다는 점을 지적하며 현재의 관점에서 볼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10.4. 유대인 문제

유대인 문제를 파악하기 위해선 헤지라 당시를 살펴보아야 한다. 무함마드와 그 일행은 메디나로의 이주 이후, 후이다비야 조약을 체결한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후이다비야 조약에는 메디나 원주민만 당사자가 아니라 그곳에 거주하던 유대인들 역시 포함되어 있다.[37] 무함마드는 유대인의 종교적 자유를 처음부터 인정하였다.

다만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객관적으로 보면 무슬림들의 이주 후 유대인들과 문제가 생겼고, 유대인들이 무함마드에 의해 학살당했다는게 비판의 초점이 되는 것이다.

이전의 서술에서는 무함마드의 자의적으로 변경했다고 인과관계를 왜곡하여 서술하였는데, # 쿠란 2:144~145를 참고하면, 알라의 계시에 의하여 바뀌었다는 사실을 파악 할 수 있다. 메카로의 기도는 이슬람의 관점에서는 알라의 계시에 의한 것임이 명확하다. 자의적인 변경이라고 보려면 정치적인 판단으로 즉 유대인들 때문에 변경했다는 기록이 있어야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또한 유대인들을 학살하였다면서 비판하는데, 우선 이슬람측 기록인 이븐 이스하크나 알 와키디 모두 유대인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다.
물론 이슬람측 기록이니 객관성이 없는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다음 내용을 살펴보자
하느님의 사가 메디나로 오자 모든 유대인들이 그와 화해를 했다. 그리고 그는 쌍방의 합의에 대한 문서(키타브)를 작성했다. 하느님의 사도는 모든 부족을 자신의 동맹자들과 화해시켰으며, 그들 사이에 평화보장(아만)을 확립했으며 그들에게 조건을 제시했다. 그 조선에는 자신에 대항하는 어떤 적에게도 지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하느님의 사도가 바드르(메카의 다신교도)사람들을 제압하고 다시 메디나로 돌아왔을 때 유대인들이 불손한 태도를 보이며 그들과 하느님의 사도 사이에 약정된 동맹(아흐드)를 파기했다.

무함마드가 유대인들에게 취한 조치(남성 살해, 여성,아이 포로화 등)는 오늘날에서 이해하기 힘든 일일지도 모르지만, 우선 그의 행동이 부도덕했다면, 당시(620년대)의 규범을 어긴 것이라면, 긍정적인 묘사에 전념했던 그의 전기작가들은 훨씬 많은 부분을 언급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38]

이전의 서술에서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이 평온하게 비교적 지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5세기에는 아랍계 유대인들에 의한 학살이 일어난 적이 있으며 5세기에 이르러서는 유대인들의 정치적 주도권이 이미 넘어간 상태였다.

또 유대인들이 후이다비야 조약을 먼저 파기한 증거들도 존재한다. 유대인들은 메디나 전투에서 메카의 다신교도들과 내통을 하는등의 행보를 보인적이 있는데 가령 다신교 군대였던 아부 샤피안은 유대인 부족과 내통하여 메카군을 곤란하게 한 경우가 있다. 이는 명백한 후이다비야 조약 위반이다. 지금 현대 관점에서 본다 하더라도, 가령 휴전 중인 대한민국 기준에서도 한국인이 북한과 내통하는 경우는 전시에 사형을 규정하고 있는데, 이 점을 본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아니다. 단지 연좌제로 죽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만 이 또한 시대적 배경을 참조한다면 참작될 여지는 존재한다. 또 다른 행보로는 #가 있다. 주석을 참조해볼 때 어느 한 유대인은 조약을 어기고 무슬림 여성의 히잡을 벗기고 괴롭히는 등 유대인들 역시 무슬림에게 선빵과 비슷한 행보를 행한적은 있다. 이븐 이스하크의 묘사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한 아랍 여성이 자신의 물건들을 가지고 와서 카이누카 부족의 시장에 내다팔았다. 그녀는 한 금 세공사 옆에 자리잡았다. 그곳 사람들이 그녀의 베일을 벗겨 얼굴을 보려고 했지만 그녀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금 세공사는 그녀의 옷깃을 잡고서 그녀의 등뒤로 걷어 올렸다. 그 뒤에 그 여인이 일어서자 그녀의 치부가 드러나게 되었고, 주변에 둘러서 있던 사람들이 그녀를 비웃었다. 그녀는 소리쳤고, 그 소리를 들은 한 이슬람교도 남자가 그 금 세공사에게 달려들어 그를 죽여버렸다.

이 사건이 일어난 뒤 카이누카 일족은 그 이슬람교도 남성을 살해하는 복수를 벌였고, 이것이 무함마드가 카이누카 부족 성곽을 에워싸고 그들을 파멸시킬 결심을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무함마드는 안사르의 지도자인 압달라 이븐 우바이의 권유에 따라 카이누카 부족을 추방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카이누카 부족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아드리아트(시리아)로 이주한다.

무함마드는 또 바누 나디르라는 유대인 부족에 대해서 조치를 취했다. 이븐 이스하크에 의하면 이 조처는 우후드 전투에서 이슬람교도들이 패한 후에 일어난 일인데, 그 계기는 유대인들의 무함마드 암살시도와 메카의 다신교도들과의 협력을 이야기한다. 무함마드는 방어시설을 갖춘 그들의 집을 포위하고, 아랍에서 군사대결을 벌일때 금기시되던 종려나무들을 베어냈던것이다. 하지만 그 전의 바누 카이누카 부족들처럼 바누 나디르 부족도 유대인의 오아시스인 하이바르로 쫓겨났다.

그들에 대한 보복조처가 단행되었는데, 이들에 대한 조처가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조치이다. 그들은 무함마드와의 협약을 어긴것과. 참호전을 치르는 동안 다신교도들과 협력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슬람측에서는 무함마드가 알라의 엄명에 따라 지브릴에게 전달받아 처리했다고는 한다. 이들의 방어시설에 대해 몇 주동안 포위공격이 시작되었고, 무함마드는 바누 쿠라이자족의 생사여부를 바누 아수스족의 일원인 사으드 이븐 무아드의 수중에 맡겼다. 그는 참호전에서 심한 부상을 입었고, 죽음을 눈앞에 둔 자였다. 그는 모든 남자는 처형하고 여자와 아이들은 포로로 받아들이고 모든 재산을 나누어주도록 명령하였다.[39]

이 두 일화를 참고해보면, 이전 서술인 무함마드가 유대인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는다고 살해했다고 서술한건 명백한 사실관계, 인과관계 오류임을 알 수 있다. 특히나 아랍 여성에 대한 성추행의 경우는 현대에서도 충분히 분쟁의 원인이 되는 소지가 있으며, 내통의 경우도 많은 선진국들도 형법으로 처벌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이적죄로 처벌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최대 형벌이 무기징역임을 감안할 때, 무함마드의 조치가 반유대주의에서 나왔다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비판의 소지가 될 수 있는 것은 왜 모든 유대인들을 특히 남자를 살해했는지 정도가 될 수 있지, 유대인에 대해서 사형명령 자체가 단순히 무함마드가 유대인이 자신을 따르지 않는다고 죽였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는 서술이다. 여성과 아이를 포로로 잡아 노예로 삼았다는 것도, 이건 그 당시 중동에서도 흔한 일이였기에 무리가 없다. 신명기에도 적들의 처녀를 가지라, 여성과 아이들을 살려두고 남자들을 죽이라는 내용이 있기도 하기 때문.

이슬람의 통치 아래서 수세기를 살았던 유대인과 기독교인은 엄청난 모욕과 박해를 당했다. 무슬림 지도자의 성격에 따라 그 모욕과 박해의 강도는 달랐지만,[40]유대인과 기독교인은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41] 물론 유대인들은 전근대에는 확실히 기독교보다 이슬람교를 더 지지했다. 즉 기독교도들을 향한 박해가 좀 더 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십자군 전쟁 이후 유럽에서 무슬림들이 살해되고 추방되자 많은 무슬림들이 북아프리카나 서아시아로 도피하였다. 그들 중 일부는 모로코, 이집트, 튀르키예 등지의 관리가 되기도 하였고 일부는 바르바리 해적이 되어 기독교 세력에 복수하였다.

11. 이야깃거리

무슬림들의 기록에 따르면 언변이 뛰어나고 배가 나오지 않고 날씬했던 미남이었다고 한다. 평소에 약간의 대추야자와 낙타유, 채소 등으로 소식을 하고, 고기도 먹기는 했지만 많이 먹지 않았으며. 매달 일정기간씩 단식도 병행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신도들에게 식욕을 통제하라는 충고나 건강 유지를 위해 적게 먹으라는 가르침을 남겼다. 뚱뚱한 게 미덕이던 중세 사회에서는 이례적인 사례였다. 재미있게도 무함마드가 평소에 먹었던 식단과 생활습관이 현대적인 의미의 웰빙에 부합되기 때문에, 비만으로 골머리를 앓는 많은 이슬람 국가에서 다이어트 캠페인을 할때마다 선지자의 식단과 생활습관을 따라해서 체중감량을 하고, 건강을 지켜야된다는식으로 홍보되며, 라마단 기간 중에도 과식을 피하고 절제있게 먹어야된다는 식으로 많이 언급된다.

저서로는 23년간 알라에게 받은 계시들을 기록한 책인 쿠란이 있다. 물론 본인이 직접 쓴 건 아니고 구전되던 내용들을 나중에 모아서 책으로 낸 것.(논어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예수가 신약성서를 기록하지 않은 것과 똑같은 이치. 쿠란의 시적 구조 덕분에 그는 종종 시인이냐는 질문을 받았고 그때마다 아니라고 했다. 쿠란은 아랍이 낳은 최고의 문학 중 하나라고 한다.

단테신곡에서는 기독교를 분리/내분시켰다는 이유로 지옥에 있다. 알리도 와있는데, 아마도 수니파시아파가 분리되게 한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주류 교파의 신자가 사이비 교파의 신자를 보는 느낌인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단 지옥에 있는 게 아니라 사기 지옥에 있다는 것. 이런 서술로 볼 때 그 당시에도 이슬람을 기독교의 연장으로 보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쿠란의 의하면 아내를 4명만을 두라고 했지만, 무함마드는 계시에 따라 13명을 두었다. 다만 동시에 4명을 넘는 경우는 없었다. 결혼이 아니라 약혼까지만 한 여자들은 더 많았다. 이렇게 많은 아내를 두는 통에 다른 사람도 아닌 애처 아이샤가 "무함마드는 기도향수, 여자를 세상에서 제일 좋아한다."라고 말했다는 하디스가 있다. 그래서 그런지 아랍 무슬림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향수를 애용한다. 대신 목욕을 잘 안한다[42]

이중 일부는 정략적인 의미에서(사우다나 6살 난 아이샤), 일부는 과부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얻은 아내들도 있다.

그의 아내 사랑은 당시 아랍의 모범이었다고 한다. 철저히 평등의 이름 아래 매일 밤 여자 한 명씩과 잤다. 그러나 아내들을 공평하게 대우했다는 말도 사실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8번째 아내 마리아 빈트 샤문이 아들을 낳자, 너무 기쁜 나머지 마리아하고만 계속 어울려 다른 부인들의 질투에 큰 문제가 되었다는 언급이 있다. 아이샤가 질투하여 마리아가 이집트 출신 남자 노예와 바람을 피워 아들을 낳았다고 주장하자, 무함마드가 분노하여 마리아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알리가 손수 사형을 집행하려고 하는데 그 노예가 거세되었음을 알게 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기존 아랍의 전통을 깨고 부인을 딱 4명까지만 가지라고 했다. 원래 이슬람은 일부일처제가 원칙인데, 아내들을 모두 평등하게 사랑할 수 있다면 4명까지는 가져도 좋다고 한 것이다.[44][45] 또한 여성의 유산상속권을 종교적 권위로 재확인하였는데 이는 현재까지 이슬람의 규칙으로 남아있다. 여자의 유산상속권은 무함마드의 첫 아내 카디자의 사례에서도 나타나듯, 무함마드가 규정하기 전에도 이미 보장되는 권리였는데, 무함마드는 이것을 재확인한 것이다.

또한 무함마드는 생전에 무에자(معزة)라고 이름 붙인 고양이를 대단히 아꼈다고 한다. 기도를 하던 도중 무에자가 와선 옷자락 위에서 잠이 들자 고양이를 깨우고 싶지 않다며 옷자락을 잘라내곤 자리에서 일어설 정도였다고 한다. 무함마드의 영향 때문인지 현재까지도 무슬림들 중 상당수는 고양이를 애호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고양이가 마시던 물로 손을 씻기도 할 정도이다.

그래서 이슬람교의 율법에서는 예배를 진행할 때 동물을 데리고 들어오면 금기가 되어서 무효가 되고 처음부터 다시 진행을 해야 되니까 절대로 동물을 데리고 들어올 수 없지만, 예외로 고양이는 이슬람 예배를 할 때 데리고 들어와도 상관없다. 그래서, 이슬람교에서는 가끔 예배를 진행하다가 고양이가 난입하는 에피소드가 일어나기도 한다.

그에 반해서 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하게 생각해서 "개가 있는 집에는 천사도 들어오지 않는다" 하고 가르쳤다. 그래서 이슬람에서는 개를 실내에서 키우는 것을 더럽게 여기고, 개가 실내에서 침이라도 흘리면 일곱 번 닦아내야 다시 예배를 드릴 수 있을 만큼 깨끗해진다고 본다. 예배를 드리는데 개가 들어오면 무효가 된다고 할 정도이다. 2014년도에는 이란 보수파 의원 32명이, 애완견을 소유하거나 공공장소에서 개를 산책시킨 사람은 태형 74대를 맞고 벌금(한화로 약 35만~350만 원 상당)을 물어야 한다는 법을 만들어 표결을 추진하다는 영국 신문 가디언의 기사가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같은 경우 오래전, 미국 버스회사 그레이 하운드가 진출하자 회사 상표나 다름없는 개 그림을 지워야 영업을 인정하던 적도 있다. 그러나 모든 이슬람 나라가 그런 게 아니라 튀르키예아제르바이잔이나 유라시아, 동남아 이슬람 다수 나라들은 얼마든지 개를 키우고 개에 대하여 이런 이질감이 없다. 오스만 제국 시절 이스탄불을 여행한 안데르센이나 마크 트웨인도 떠돌이 개랑 고양이가 많아서 신기했고 더더욱 신기한 건 이런 동물들을 맡아 관리하는 공무원도 있다는 점을 기록에 남겼다. 더불어, 무함마드는 목축견은 예외로 여겼기에, 유목민 무슬림이 목축견을 애완동물처럼 거리낌없이 키우는 경우도 많았다. 하긴 유목민들에겐 개는 귀중한 재산인 가축을 돌보고 지키는 만큼 매우 유용했으며 이는 과 같다.

무함마드는 와인과 곡주를 금기시했지만 대추야자로 만든 술은 즐겼기에 대추야자술은 술이 아닌 음료라고 받아들이던 무슬림도 있으며 물이 귀한 사막 유목민들에게는 가축 젖을 발효시킨 술이 물이나 다를 게 없었기에 이들에게도 술은 금지되지 않았다.

무함마드가 이슬람이 아닌 기독교쪽으로 가는 전개의 역사적 가정도 존재한다. 해리 터틀도브대체역사소설 비잔티움의 첩자처럼 아랍 세력이 기독교 문화권에 편입되어 동로마 제국이 유럽과 중동을 제패했을 것이라는 가정도 있지만 대다수의 역사학자들의 의견은 그렇게 되면 아랍 기독교와 유럽 기독교가 서로를 이단이라며 다툼을 벌였을 것이고, 결국 역사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실제로 기독교 내부에서도 종파들간의 격한 분쟁을 자주 빚어왔다. 어느 유럽 대체역사소설에서도 이와 같은 주제를 다룬다. 과거로 간 크리스천 과학자가 무함마드를 만나 첨단 기술을 동원하여 자신이 지브릴이라고 속이고 그가 기독교 교역자가 되게 만든다. 미래가 바뀌었으리라 기대하고 돌아와보니 십자군 전쟁은 그대로 벌어졌으며 이번에는 아랍 기독교와 유럽 기독교가 대립하고 있었다. 9.11 테러도 아랍 기독교 과격파인 탈레반이 일으켰고 미군이 아랍에 주둔하면서 아랍 기독교도들과 갈등을 빚는다. 결국 무함마드를 개종시키더라도 역사를 바꾸지 못한다고 과학자는 절망하며 끝난다.

무함마드의 행적은 순나(سنة, Sunnah)라고 부르며 무슬림이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간주된다.[46] 굉장히 시시콜콜한 것들까지 기록으로 남아 순나로 여겨지고 있는데, 예를 들면 무함마드는 아침식사를 식초를 적신 빵을 먹고 대추야자로 만든 네비즈라는 술을 마셨다고 하는데, 이 대추야자 술은 현재도 할랄 마크를 붙인 채로 생산되고 있다.[47] 그리고 이 순나의 튀르키예어인 쉰네트(Sünnet)는 할례를 뜻하는 용어로 돌려 사용되고 있다. 할례 또한 무함마드가 행한것이므로 모범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다만 무함마드가 좋아하고 행했다는 것 때문에 구태여 이를 똑같이 하려 하는 바리사이파 같은 사례도 있다.

12. 매체에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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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문화권에서 만들어지지 않은 작품 즉, 이슬람이 국교가 아닌 국가에서는 얼굴 묘사를 해야하니까 무함마드가 직접 등장하는 경우가 많고 심지어 몇몇 작품들의 이슬람교 관련 에피소드에서는 무함마드와 여러 칼리파 인물들의 얼굴이 직접적으로 나온 적 있다. 반면 이슬람이 국교인 문화권에서는 '알라 외에 사람을 우상을 하면 안된다.'라는 원칙때문에 신의 대리인이라 평가받는 무함마드라 해도 그 원칙에서 제외되지 않았다. 그래서 초상화나 그의 동상 같은 것은 잘 찾아볼 수 없는 편이며 무함마드가 등장하는 그림이더라도 성스러운 자라는 의미도 담아서 얼굴은 묘사되지 않는 편[48]이 많지만 시아파에서는 수니파보다 이런 부분에서 관대한 편이며, 이란에서는 무함마드를 묘사한 초상화나 우편이 팔릴 정도이다. 이슬람 쪽에서 무함마드 얼굴이 직접 나온 그림이 있으면 십중팔구 시아파에서 그린 그림이다. 중세 시아파 경우 얼굴에 흰천을 쒸운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슬람에 대한 영화를 보아도 무함마드는 화면에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일대기 영화인 The Message[49]에서는 카메라 시점이 무함마드인 것 같은 연출을 사용하여 얼굴을 보이지 않고도 등장인물들과 대화하는 독특한 연출 방법을 사용한다. 화면에 직접 드러나지는 않지만 등장인물들이 카메라를 바라보면서 말을 하는 식으로 연기한다. 무함마드에 우상숭배는 금기이지만, 이슬람교에서 무함마드는 마지막 선지자인만큼 절대적인 존재이다. 쿠란 안니사(여성) 장의 80절을 보면, "선지자(무함마드)에게 순종하는 자 곧 하나님(알라)께 순종하는 자라(من يطع الرسول فقد أطاع الله)"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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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크루세이더 킹즈 2크루세이더 킹즈 3에서는 어떤 직위건 히스토리를 볼 수 있는데, 수니파시아파의 칼리파 직위 계보를 보면 다른 칼리파들은 다 그냥 랜덤생성 얼굴이지만 무함마드만은 정말 종교적으로 적절하게 구현되어, [50] 역설사의 역덕 기질이 정말 잘 발휘되었다.

비잔티움의 첩자에서는 ‘성 무아메트’라는 이름으로 작중 시점에서 이미 고인인 과거의 인물로 언급되며, 이슬람교를 창시하지 않은 대신 사산 제국의 침략을 피해 동로마 제국으로 피난 갔다가 정교회로 개종, 그 뒤로 종교 시인이 되어 많은 찬송가를 썼다고 한다. 그리고 사후 시성되어 작중 동로마 제국에서 상당히 유명한 성인이 되었다.


[1] 해당 그림은 중세 페르시아에서 그려진 그림이다. 정확히는 무함마드가 선대 선지자들인 모세예수, 아브라함 등을 이끄는 모습이다. 이 그림은 확대된 그림의 오른편에 무함마드가 있는 모습이고, 이 그림의 왼편에 모세와 예수, 아브라함 등이 위치한다.[2] 이슬람교알라 외의 사람에 대한 우상숭배를 철저하게 금지하기 때문에 무함마드의 얼굴을 묘사하는 것은 금기시된다. 보통 흰 천으로 덮어놓은 듯하게 묘사하거나 검정으로 덮기도 한다. 아예 두상 자체를 묘사하지 않고 맨 위의 사진처럼 아랍어 서예로 대체하는 경우도 있다.[3] Abū al-Qāsim Muḥammad ibn ʿAbd Allāh ibn ʿAbd al-Muṭṭalib ibn Hāšim[4] 아랍어로는 '라술룰라(رسول الله / Rasūlullāh)'인데, 무슬림의 다섯 가지 의무(이슬람의 다섯 기둥) 가운데 하나인 샤하다(신앙고백)가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이다.(لا إله إلا الله محمد رسول الله)"라는 것은 유명하다. 한국에서는 간단하게 '사도'로 번역하기도 하고, 정수일의 저서에서는 성사(聖使)로 번역되기도 한다.[5] 세력권 지도(영어 위키백과).[6] 실제 아랍어 성경에서는 "وَأَنَا أَطْلُبُ مِنَ الآبِ فَيُعْطِيكُمْ مُعَزِّيًا آخَرَ لِيَمْكُثَ مَعَكُمْ إِلَى الأَبَدِ،ـ"로 번역하며, '위로자'를 위미하는 'المُعزّي'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관련 링크 1, 관련 링크 2.[7] 몰년의 경우 아부 바크르가 2대 칼리파로 취임한 때를 이용하면 대략적인 사망 시기를 추정하는게 가능하다.[8] 결혼 당시 무함마드는 53세, 아이샤는 6세로 사실상 부녀처럼 지냈던 정략결혼 관계였다.[9] 570년에서 전후로 1년에서 2년 정도 오차가 있을 수 있지만, 보통은 570년을 유력하게 본다.[10] 62세 전후라는 말이 된다.[11] 사실 당대의 이슬람권만 그런것은 아니고 한국도 1970년대 초반까지는 영아사망률이 높다는 이유로 출생신고를 늦게하는 경우가 종종있었기 때문에 실제 생년과 주민등록상의 생년이 다를때가 많았다. 훨씬 뒤에도 그랬는데 영아사망률이 높았던 당대에는 말할것도 없기는 했다.[12] 이슬람에 따르면 인류 최초의 무슬림은 아담(آدم)과 하와(حواء)이다. 낙원에서 추방된 이후로 아담과 하와는 아라비아에 정착했으며, 그 뒤로 주요 예언자들이 메카를 다녀갔다고 여긴다. 가령 메카 카바 신전 바로 옆에 있는 '잠잠'이란 우물은 모세가 지팡이로 땅을 내리쳤을 때 생겨났다는 전설이 있으며 카바 사원의 벽 모서리에 박힌 검은 돌은 아담과 함께 내려온 운석이라고 전한다.[13] 예언자(나비)와 사도(라술)는 혼용되어서 쓰이지만 엄밀하게는 두 단어는 의미가 다르다. 사도가 예언자보다 더 좁은 개념이며, 일반적으로 예언자보다는 사도가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 예언자는 이전에 전해진 알라의 말을 확증하는 역할을 한다면 사도는 예언자의 역할과 동시에 알라의 말을 전하는 임무를 맡는다고 한다. 무함마드는 무사(موسى, 모세)의 구약, 다우드(داود, 다윗)의 시편, 이사(عيسى, 예수)의 신약이 전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여 예언자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쿠란을 계시받아 전달하여 사도의 역할을 다했다.[14] 후에 예언자의 도시라는 뜻의 메디나로 개칭[15] vs 메카 쿠라이쉬 기득권 세력[16] vs 메카 쿠라이쉬 기득권 세력[17] vs 메카 쿠라이쉬 기득권 세력[18] 원래 10년 기한이었다.[19] vs 가산 왕국 + 동로마 제국[20] 629년에 동로마 군대가 크테시폰까지 밀어붙인 후, 이 해에 로마와 사산 제국은 평화 조약을 맺었다. 그렇다고 두 세력이 동맹을 맺은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 양국은 아랍 무슬림 세력에 대해 잘 몰랐다. 그들의 속국이자 방패인 가산 왕국과 라흠 왕국의 간곡한 권고를 양측 모두 레반트를 둘러싼 싸움에만 집중하다보니 귀담아 듣지 않았다.[21] vs 베두인[22] vs 산악민족[23] 함락에 실패했지만 이후 주민들이 자진하여 이슬람으로 개종한 후 항복하였다.[24] 10월, 북부 아라비아[25] 서북부 아라비아[26] 쉽게 말해서 예언자다.[27] 이와 관련된 논쟁은 무함마드 사후에 벌어지기도 했는데 무함마드가 죽자 몇몇 이들은 이슬람교는 이제 끝이라고 여기거나 자기가 무함마드의 뒤를 잇겠다며 반기를 드는 일이 일어났다. 하지만 아부 바크르가 '너희 중 누구라도 무함마드를 믿었느냐? 보라, 그는 죽었도다. 그러나 너희가 알라를 믿었느냐? 그는 존재하시고 영원 불멸하시다.' 라는 말로 이슬람교는 끝이라고 말한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즉 이슬람교는 애초부터 무함마드를 숭배하는 종교가 아니었다.[28] 유대교에서 말하는 선지자들의 실책에 대해서도 '과장되었다.', '없는걸 지어냈다.' 식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없는건 아니었다고 인정한다.[29] 선교보다는 초대, dawah라는 개념이다.[30] 즉, 알라와 신자 개인관의 관계이기 때문에 샤하다 하나만으로도 무슬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맘도 단순한 예배 대표자일 뿐이다. 이건 퀘이커나 개신교, 특히 회중교회나 침례회와도 어느정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31] 그도 그럴게 불과 2년만에 사망했다는 점을 빼고 보면 그가 주창한 이슬람교가 뻗어나갈 토대를 당대에 마련했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들이 창시 후 뻗어나가기까지 수백년의 세월이 걸리기도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굉장히 성공한 셈이었다. 비교해보자면 공자도 관료로 어느정도 자리에까지 올라왔지만, 현실의 한계에 부딪혀 당대에는 가르침이 실현되지 않았으며, 예수도 가르침이 인정받지못하고 처형당하는 운명을 맞이했으며, 석가모니는 왕의 아들이라는 고귀한 신분을 가지고있었지만, 속세와는 어느정도 거리를 두었다. 그와 비교해보자면 무함마드는 그의 가르침을 당대에 실현하려 했으니 엄청나게 성공을 거둔 셈이다. 다만 반대로 그럴만한 힘이 있었고 그랬기에 아래에 나오는 논란도 생겼다.[32] 1136년에 결혼했는데 콩스탕스는 1128년생이다.[33] 18세기의 조선 영조만 해도 66세 때에 무려 51세 연하인 15세의 정순왕후와 결혼하기도 했다. 다만 당시엔 대개 초경은 치르고 혼인을 했기 때문에 왕자들이나 명문가의 첫 장가처럼 일찍 장가가는 경우는 대개 아내가 연상이었다. 영조가 51세 연하인 중전을 맞이한 이유는 '후궁은 중전이 될 수 없다'는 숙종의 법안 때문이었고, 당시 명문가의 흠 없는 여식은 초경을 치르고 얼마 안 되어 대개 시집을 갔기 때문에, 중전이 될 만큼 명문가에 건강하고 외모 단정한 처녀 중 시집도 안 가고 흠도 없으면서 나이도 있는 처녀가 존재할 수가 없었다. 사정상 초경 전에 혼인을 한다 해도 잠자리는 초경 이후에 했다. 유럽도 보통은 그렇긴 했었다.[34] 튀르키예/미국 복수국적의 쿠란주의자, 이집트 생화학자 라샤드 칼리파가 쿠란을 수학적으로 분석하면서 내세운 코드 19를 가지고 19.org 라는 쿠란주의 사이트를 운영중이다.[35] 그러나 그 구타가 정말 얼굴을 때리고 하는 그러한 구타는 아니다. 오해가 있는게,주먹으로 후드려 패는게 아니라 팔이나 손 같은 부위를 때려야하며, 때릴 때는 시와크(칫솔)같은 것으로 때려야한다.(출처:탈프시르 앗 따바리 vol8, p315) 참고 시와크는 이쑤시개보다는 조금 크고 각설탕 막대정도 되는 크기이다... 또한 하디스에서는 (무슬림이 수집한 하디스 1218) "여성에 관해 하나님께 두려워 하라, 자국이 남을 정도로 여성을 쎄게 때려서는 안되노라"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볼때, 이슬람에 의도에서는 단순한 경고로 활용하라는 의도였을 것이다.# 다만 이것이 아내를 구타하는 등 무시하는 무슬림들이 많고 이슬람국가들에서 여성의 지위가 낮은 점이 있기에 논란이 되고 있는 구절 중 하나이다. 확실한건 구타라고 보려고 해도, 얼굴을 때리면 안되고, 아프게 때리면 안되는 등 한계를 지정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명확하게 구타 자체를 금기하는 구절이 없다는 점을 비판 할 수 있다.[36] 65장은 배우자간의 갈등으로 인해 이혼이 발생한 경우 무슬림이 지켜야 할 자정기간에 대한 설명인데, 그 설명에서 보면 생리에 이르지 않은 여성도 마찬가지로 이혼이 가능하다는 점으로 보아 혼인 역시 가능하다고 볼 수 있으니, 이슬람에서 조혼이 허락된다는 것 때문에 비판이 되고 있다. 다만 4:19와 같은 다른 구절들을 참고해보면, "여성들을 의롭게 살라"라는 점을 비추어 볼 때, 특히 마으루프라는 아랍어 단어가 '훌륭한'이라는 점을 볼 때 조혼이 권장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다.# 특히나 마으루프가 사회적으로도 용납되어야 한다는 점을 보면 더더욱. 다만 그와 별개로 65:4라는 구절에서 조혼에 대해서 허용한다고 보여지는 구절은 비판 받을 여지가 있다.[37] 무함마드는 이렇게 말했다,하르트무트 보브친 저 2011, p 153[38] 무함마드는 이렇게 말했다, 하르트무트 보브친 저, 2011, p171[39] 무함마드는 이렇게 말했다,하르트무트 보브친 저, 2011, p 164~168[40] 무굴제국의 예를 보아도 악바르 대제는 지즈야를 폐지하고, 힌두교도 공주와 결혼하는 등 유화정책을 펼쳤지만 아우랑제브의 경우는 확실한 원리주의적 정책을 펼쳤다.[41] 다만, 중세의 시대를 감안할 때는 비교적 나은 것일 수는 있는게, 같은 지역 기독교도들은 작센족의 토속신앙을 아예 말살 시켜버렸지만(튜튼 기사단 처럼 발트 신화를 말살 시킨 경우도 덤)무슬림들은 그렇게 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쿠르드 족의 전통 신앙등이 아직까지 남아는 있다. 다만 팔 다리를 짤랐을 뿐이지. 심지어 조로아스터교도 그정도 급으로 말살하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현대 이슬람이 더 중세 이슬람보다 폐쇄적이고 극단적으로 변한 것이다. 유대인들과 기독교인에게 의례행사 제한, 옷착용 제한, 이동수단 제한, 거주구역 제한 및 지즈야를 통해서 숨죽일 필요가 있게 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교회나 시나고그의 크기 제한, 교회의 십자가를 달지 못하게 하는등의 제약도 있었다.[42] 기도하기 전에 손발 얼굴을 씻는 우두는 하루에 5번 하긴 한다[43] 자이드의 결혼 순서상으로 5번째.[44] 그런데 아무래도 사람은 모두를 평등하게 사랑하기는 어렵기에 이슬람 법학자들은 웬만하면 그냥 하지 말라고 한다. 쿠란에서 일부다처제를 허용하는 구절에서도 바로 뒷부분에 너희는 그 많은 아내들을 모두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사실상 하지 말라는 소리. 그래서 실제로 부인을 2명 이상 둔 사람은 약 2%도 되지 않는다. 사실 지참금 문화 때문에 돈을 못 내서 결혼을 못하는 남성들이 이슬람 세계엔 수두룩하다.[45] 현대에 들어와선 일부다처제에 대한 여성들 본인의 반발도 거세다. 튀르키예의 경우 약 98%의 혼인적령기 여성들이 일부다처제를 절대로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응답했고, 이슬람 근본주의로 유명한 사우디조차도 이 응답률은 80%대이다. 또한 일부다처를 하려면 무조건 기존의 아내들의 허락을 받아야만 하는데, 이 또한 문제. 어찌어찌 새 아내를 맞는 데 동의한다 치더라도, 이슬람법상 여러명의 아내를 한 집에 함께 거주하는 것 또한 불법이다. 결국 새 아내를 위한 집과 살림살이도 장만해야 하고, 기존의 아내들에게 자동차가 있었다면 똑같은 자동차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안 그랬다간 아내들이 "남편이 우릴 불공평하게 대한다"라고 법정에 소송을 걸고, 막대한 위자료를 뜯어낼 수 있기 때문. 여기까지만 봐도 웬만큼 돈이 있어선 일부다처를 꿈꾸기도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46] 이 순나를 따르는 자에서 따온 이슬람의 다수파가 바로 수니파이다.[47] 그리고 이 내용을 들어 근대 이전까지 무슬림들은 와인은 술로 여겨 금지했지만, 대추야자술이나 무함마드 시절엔 없던 위스키, 맥주, 코냑 같은 술도 잘만 마셨다. 보수반동주의의 대표주자인 오스만 제국의 압뒬하미트 2세도 위스키와 샴페인을 즐기던 칼리파였다.[48] 보통은 얼굴 대신 불의 형상이나, 빛에 감싼 형태로 그려놓는다. #[49] 한국판 제목은 '예언자 마호메트'. DVD에선 메세지란 원제로 나왔다. 1976년작으로 사막의 라이온 감독이자 할로윈 시리즈 제작자인 무스타파 아카드가 감독했다.[50] 포트레잇이 없고 그자리에 "محمد 무함마드" 라 쓰여있는 심볼이 박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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