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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2 17:20:09

사코 디 로마

로마의 약탈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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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세기 종교 개혁 주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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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내용
<colbgcolor=#F8F0C3,#191919> 95개조 반박문 마르틴 루터의 면벌부 판매 비판
사코 디 로마 교황권 위기의 상징
슈말칼덴 전쟁 가톨릭루터파 대립
기독교 강요 장 칼뱅의 이중예정설과 직업소명설 등장
수장령 헨리 8세와 잉글랜드의 교황청으로부터 독립
예수회 이냐시오 데 로욜라의 예수회 창립
트리엔트 공의회 가톨릭 교리 재확인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신성 로마 제국루터파 인정
위그노 전쟁 프랑스 가톨릭과 칼뱅파 간의 종교 전쟁
통일령 엘리자베스 1세잉글랜드 국교회 선포
낭트 칙령 앙리 4세의 칼뱅파 인정
30년 전쟁 친합스부르크 세력과 반합스부르크 세력의 충돌
베스트팔렌 조약 개인의 종교 자유 인정
← 중세 교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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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saccodiroma1527.jpg
독일의 용병인 란츠크네히트들이 피난을 간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조롱하기 위해 가마(세디아 제스타토리아)에 가짜 교황을 태운 채 행진하는 모습을 그린 판화이다. 가마꾼 용병들은 어디서 주워왔는지 주교관을 쓰고 그 위에 또 챙모자를 썼다.
1. 개요2. 배경3. 발단4. 전개5. 절정6. 결말

1. 개요

사코 디 로마(Sacco di Roma)는 직역하면 로마 약탈을 의미하며, 역사상 여러 차례 일어났다. 이중 가장 유명하고 일반적으로 '사코 디 로마'로 칭해지는 것은 1527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의 로마 약탈로서, 교황권의 붕괴라는 역사적인 상징성과 더불어 끔찍한 참혹성 덕에 유명해졌다. 물론 독일 지역에 기반을 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긴 했지만, 명색이 로마 황제가 보낸 군대가 실제 로마를 박살내 버린 사건이었으니...

역사가들의 추산에 의하면 타격이 로마 제정 초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네로 시절의 로마 대화재마저 능가한다.

대화재 당시엔 어떻게든 불을 끄려 했고, 후에 재건축과 확장사업으로 원래보다 더 장대한 스케일의 로마를 만들었으나 이 사건은 로마 일대가 완전히 폐허가 된 후에야 끝을 보았기 때문에, 재건축은 개나 줘버린 듯 부서진 잔해와 과장 좀 보태서 타다 남은 재까지 약탈해갔다. 14세기 경의 아비뇽 유수가 교황권 쇠락의 상징이었다면 이 사건은 교황권 추락의 정점이자 몰락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딱히 통일된 용어가 없어 '로마 대약탈', '로마의 약탈', '로마의 침탈'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며, 원어인 사코 디 로마(sacco di Roma)로 부르는 경우도 많다.

2. 배경

16세기 초인 서기 1520년대의 유럽 대륙은 종교개혁의 횃불이 타오른 이래 가톨릭이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상황이었다. 더욱이 동쪽으로는 이슬람 세력인 오스만 제국이 1526년 동유럽 최후의 보루인 헝가리 왕국모하치 전투의 대승을 통해 멸망시키고, 유럽 내륙까지 진출해 있었으며, 교황령이 위치한 이탈리아 반도를 둘러싸고 유럽 최대의 양대 세력인 합스부르크 가문카를 5세프랑스 왕국을 지배하고 있었던 발루아-앙굴렘 가문프랑수아 1세가 치열하게 격돌하고 있었다. 이를 이탈리아 전쟁이라고 하는데, 황제 카를 5세가 스페인의 국왕이기도 했으므로 프랑스 vs 신성 로마 제국+스페인의 구도였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재임하고 있었던 40대의 젊은 교황 클레멘스 7세[1]는 요동치는 국제 정세 속에서 프랑스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 사이를 교대로 오가며 줄타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클레멘스 7세는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합스부르크에 맞서 프랑스 왕국, 잉글랜드 왕국, 베네치아 공화국, 밀라노 공국, 피렌체 공화국를 끌어모아 코냑 동맹을 창설했다. 즉 합스부르크 가문 vs 反 제국 연합의 구도가 형성된 것이었다. 이미 1525년의 파비아 전투에서 제국군에게 국왕 프랑수아 1세가 사로잡히는 참패를 겪은 프랑스는 자력만으로는 제국과 맞설 수 없음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흔쾌히 동맹 제의에 응했으며, 과거 제국과 혼인을 통해 친분 관계를 맺었던 잉글랜드의 왕 헨리 8세 튜더조차 이를 놓칠 수 없는 대륙 진출의 호기라 여겼기에 몇 차례 퇴짜를 맞아가면서까지 기어이 동맹에 가담했다. 다만 의회의 반대를 끝내 꺾지 못해 군대 파견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코냑 동맹은 십자군 전쟁 이래 교황 중심의 동맹 세력으로서는 가히 최대 규모라 할 만했다. 이로써 결성된 코냑 동맹과 합스부르크 제국 간의 전쟁을 코냑 동맹 전쟁 또는 제5차 이탈리아 전쟁이라고 한다.

3. 발단

이렇듯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몸소 프랑스와 손잡고 연합 진영을 구성해 로디를 함락시키는 등 이탈리아 북부를 장악해나가자 신성 로마 제국과 스페인 및 그 식민지 일대를 통치하던 20대의 젊은 황제 카를 5세는 격노했고, 이탈리아로 군대를 투입하여 실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이에 카를 5세는 할아버지이자 선대 황제였던 막시밀리안 1세 이래로 합스부르크 황가에 변함없는 충성을 바쳐온 장군 게오르그 폰 프룬츠베르크[2]부르봉 공작 샤를 3세[3]에게 35,000명의 용병을 고용할 것을 명령하고 전례가 없었던 교황령 침공을 단행했다.

용병이 대부분인 제국군 20,000명은[4] 카를 5세의 명령을 받아 곧바로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지방의 밀라노 공국[5]을 공격하여, 간단히 무너뜨리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황제 카를 5세가 아무리 분개했기로서니 독실한 가톨릭 교도로 알려진 황제의 군사들이 설마 교황령, 그것도 성도(聖都) 로마까지 들이닥치리라 싶었으나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사실 성도고 뭐고 십자군 전쟁 시절에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교묘한 분탕질에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털린 적도 있는 판(제4차 십자군 원정)에 이건 너무나 안일한 생각이었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다만 용병들이 로마로 쳐들어간 것은 루터파 프로테스탄트로서 교황에게 반감이 있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이유에서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경제적인 이유였는데, 애초에 카를 5세가 프룬츠베르크에게 주었던 용병료가 크게 부족한 수준이어서[6] 프룬츠베르크 아내의 보석 장신구와 프룬츠베르크 개인 소유의 은식기까지 모조리 팔아 용병료를 마련했을 정도였던 것이다. 그런 데다가 이탈리아 반도 깊숙히까지 진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밀라노를 함락한 것 이외에는 이렇다 할 전투가 없어 전리품도 없었기에,[7] 부족한 돈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가뜩이나 부족한 용병료에 불만이 컸던 용병들은 돈을 마련할 기회가 없자 쌓였던 분노가 마침내 폭발했던 것이다. 란츠크네흐트의 창설자이자 지휘관이었던 프룬츠베르크는 친자식들처럼 끔찍히 아꼈던 부하들을 달래기 위해 나섰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사태에 절망한 프룬츠베르크는 갑자기 뇌졸중을 일으켜 신성 로마 제국으로 급히 이송되었으나 1년이 넘는 투병 끝에 이듬해인 1528년 8월,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에 따라 부사령관인 부르봉 공작 샤를 3세가 사령관이 되어 이들을 지휘하게 되었으나, 그는 란츠크네흐트를 지휘하기에는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원래 왕족 출신에다 장군으로써의 재능도 괜찮은 편이었지만, 불과 1년전에 프랑스에서 반역을 저지르다 들켜 영지를 잃고 신성로마제국으로 망명한 상태였다. 그는 프룬츠베르크처럼 오랜 기간 병사들과 부대끼면서 쌓아온 정도 없었고, 돈에 움직이는 용병들을 다룰 돈도 경험도 없었다. 결국 휘하 부대를 장악하는 데 실패한 부르봉 공작은 그들이 바라는 대로 로마로 진격할 수밖에 없었다. 일찍이 루터는 교황의 사치스러움과 호사스러움을 비난한 바 있었는데, 용병들이 보기에 사치와 호사를 누린다는 건 곧 쌓아놓은 재물이 많다는 뜻이었다. 즉 로마는, '타락한 도시'인 동시에 '보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도시'였던 것이다. 교황의 허울뿐인 권위 따위는 아웃 오브 안중이었다.

용병 본대가 교황령에 이르는 동안 현지의 방어군은 말 그대로 손을 놓은채 보고만 있었고, 밀려드는 용병군에 맞서야 할 코냑 동맹의 결속력은 그야말로 모래알보다 못했다. 가까운 프랑스는 약간의 병력만을 파견했다. 그나마도 미적거리다가 교황령이 함락당했다는 보고를 듣고서야 부지런히 군대를 움직였는데, 파비아에서의 참패를 어떻게든 복원하여 군대를 재정비하던 참이라 신속한 대응이 어려웠던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베네치아는 자신들의 안전만 확보하면 그만이라 용병군의 목표가 베네치아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자 사실상 손을 뗐다.

동맹군은 거의 없다시피 하니 남은 건 교황군 뿐이었다. 문제는 이 교황군도 제대로 된 군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일찍이 단련된 정규군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르네상스 시기 동안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대부분 각자 용병을 고용해서 전쟁을 벌이는 것을 상식처럼 받아들였고, 그러한 당시의 통념에서 볼 때 국민군을 주장한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매우 급진적인 주장이라 받아들여진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추가로 로마 시의 내부 사정도 좋지 않았기에 교황청은 시민들에게 무기를 쥐어주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염려하기도 했다. 결국 교황청은 단련된 정규군은 커녕 용병군의 침공이 임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서 급하게 끌어모은 잡졸 이하 수준의 병력만을 가지고 있었고, 최고 결정권자인 클레멘스 7세의 우유부단함까지 작렬하여 마키아벨리가 교황군의 상태를 보며 대놓고 비웃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따위 상태에 놓인 코냑 동맹이 저지선을 편다고 한들 용병군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나마 교황군, 프랑스군, 베네치아군을 어떻게든 긁어모아 용병군의 뒤를 추격하기 시작했지만, 모래알 결속력답게 베네치아군은 자국의 안전을 확인한 시점에서 그냥 돌아가 버렸고 교황군과 약간의 프랑스군만이 남아 추격을 계속했다. 다만, 용병군에 합류한 페라라 공국의[8] 신형 대포가 무서워서 용병군과 약 40㎞의 간격을 유지한 채 추격했다. 페라라 공국의 신형 대포라는 건 지대지 미사일이었던 모양이다[9]

용병군이 한 걸음 한 걸음 로마 시로 진군하여 한시가 위급한 와중에 안전거리까지 지키며 추격하던 교황군은 피렌체에서 무려 2일 동안 머무는 놀라운 여유도 부렸다. 당시 교황군의 지휘관은 피렌체인이었는데, 자신의 도시가 용병군에게 약탈당할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2일은 대형 참사를 막을 최후의 기회를 날려버렸다. 얼마 뒤, 로마까지 딱 2일을 남긴 곳에서 로마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이다.

교황군이 비난받을 짓을 많이도 저지르긴 했으나,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교황군으로서도 할 말은 있었다. 로마 시가 너무 빠르게 함락되었다는 점이다. 과거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테오도시우스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긴 했지만, 최소 100,000명, 최대 300,000명에 달하는 오스만 제국의 강력한 군대를 상대로 불과 몇 천 명의 방어군에 여성과 아이들의 손을 더한 것만으로 약 50일을 버텼다. 그런데 아무리 지형 조건이나 방어시설이 콘스탄티노폴리스만 못했다 하더라도 약 55,000명의 시민이 살고 있었던 로마에서는 단 한 번의 전투에서 패배한 것만으로 그대로 노출된 것이다. 로마 시민들이 얼마나 큰 패배감과 무력감에 빠져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점이다. 당시 기술 수준을 감안하면 40㎞는 대포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난 수준이 아니라 부대가 전력으로 기동해도 하루안에 주파하기 힘든 거리, 즉 실수로라도 본대간의 교전이 벌어질 수 없는 거리였다. 포격 위험에 대한 안전거리를 확보한 수준이 아니라 교전 자체를 회피한 상태로 추격만 하고 있었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당시 용병군이 핵심적인 전략 목표인 로마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고 교황군(코냑 동맹군)은 이를 추격하는 입장이었음을 생각해본다면 교황군의 입장에서는 용병군의 로마 진입을 적극적으로 막을 의사 자체가 없었다고 봐야 한다.

이 정도로 수동적인 반응을 보인 이유를 굳이 짐작해 보자면 용병군과 직접 교전을 벌여 진격을 저지하기에는 전력이 너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일단 용병군이 로마에 도착할 때까지는 추격만 하다가 로마를 직접 공격하여 수비대와 교전하기 시작하면 그때 협공하여 격퇴하는 것을 노렸다는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전후의 사정에서 자꾸 2일이라는 숫자가 눈에 밟히는 것[10] 역시 '직접적인 교전은 회피하되 추격의 끈 자체는 놓치지 않고 상황이 전환되면 바로 개입할 수 있는 거리'로써 2일 거리를 두고 용병군을 추격한 것이라고 보면 앞뒤가 맞으며, 마침 40㎞ 간격이면 중근세 군대의 기동력으로 대략 2일 거리에 해당한다. 문제는 용병군에게 공격당한 로마가 사실상 저항도 안 한 것과 다름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초고속으로 함락당하면서 주력군의 협공 파트너 역할을 담당하기는커녕 주력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무너지는 바람에 이 전략적인 구상이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이지만... 현대 같은 강력한 화력의 병기가 있었던 것도 아닌 전근대의 특성상, 인구가 100,000명에 가까운 대도시가 전력으로 방어 국면에 들어가면 그래도 어느 정도는 버텨줄 수 있을 것이라고 계산했더라도 완전히 말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때보다도 더 절망적이었던 상황으로 서게르만계 랑고바르드족의 침입이 있었는데, 해당 사건은 동•서 대분열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사건으로 안 그래도 성상파괴주의 때문에 균열이 생긴 로마에 결정타를 먹였다. 제아무리 로마 교회가 기적적으로 야만인들을 개종해 왔어도 서로마는 대규모 침공으로부터 스스로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어 동로마의 가호를 받아야 했으므로 내심이야 어쨌건 라벤나 총독부에 복종했다. 그런데 랑고바르드족의 침입에서 라벤나 총독부는 서로마를 지켜주기는 커녕 본인들이 먼저 얻어맞고 망해버렸고, 동로마 본국도 이슬람의 공세에서 간신히 벗어난데다가 성상파괴운동으로 정신이 없다면서 지원을 포기해버렸다. 결국 동로마 대신 프랑크 왕국을 끌어들여 겨우 랑고바르드족을 막아냈지만, 프랑크군이 도착할 때까지는 어떻게든 민병대를 끌어모아 로마 시를 지켜냈다는 것을 생각하면 사코 디 로마 당시 교황 클레멘스 7세와 로마 시민들은 저항조차 안 해 보고 독일 용병에게 항복해 버린 셈이었다.

물론 용병군이 당시로서는 최신 무기인 화포를 여러 기 보유하고 있었으나 이때의 화포는 사석포로, 근현대의 화포라기보다는 일종의 강화판 투석기에 가까웠고, 여러 화포가 성벽에 집중적인 공격을 가하면 성벽을 일부 무너뜨려 수비군을 피로하게 하거나 공격군이 진입할 기회를 만들어주는 유용한 도구 정도였지, 포격만 조금 한다고 성벽을 완전히 무력화시킬 수 있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고, 성벽이 일부 붕괴되었더라도 민병대를 모아 결사적으로 항전한다면 적어도 단기간은 충분히 저항할 수 있었다. 아니, 이 시대 화포의 성능을 고려하면 그냥 문닫고 가만히 있기만 해도 성벽의 일부를 무너뜨리고 진입하는데 며칠은 소모해야 했다. 그 정도 시간조차 벌지 못했다면 사실상 공성전을 하지 않았거나, 할 수 없는 상태여서 그냥 입성을 허락했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4. 전개

이때 로마는 이탈리아 최대의 패권 가문인 메디치 가문이 지배하고 있었는데,[11] 교황령을 사수하기 위해 메디치 가문의 군대가 피렌체를 빠져나가 치안 유지에 공백에 생기자 불만을 가졌던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메디치 가문은 용병군이 아닌 봉기한 피렌체 시민군에게 몰려 아레초로 피난을 갔다. 가뜩이나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 정치력 부재까지 겹친 것이다.

역사상 로마가 몇 번 침공당하기는 했어도 그리스도교의 군세에 침공당해 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로마 시민들은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황령 접경에서 용병군이 차츰 모습을 드러내자 로마 교황청과 시민들은 그때서야 상황의 심각함을 깨달았고, 로마는 스위스 용병 500명과 시민군 5,000명을 모아 필사적으로 방어에 나섰다. 1527년 5월 6일, 부르봉 공작 샤를 3세가 인솔하는 20,000명의 용병군 본대가 바티칸 언덕을 넘어 들어오면서. 약 5,500명의 로마 수비군과의 전투에 돌입했다.
파일:external/s3-eu-west-1.amazonaws.com/M169434.jpg
전투 중 저격을 당해 죽은 샤를 3세.
치열한 전투 중 수비군으로서는 기적일 수 있었지만 사실은 비극이라고 부를 일이 일어났으니 용병군 지휘관 샤를 3세가 저격당해 전사하고 말았다. 지휘관이라 전용 흰색 망토를 착용했는데, 이것이 교황군의 이목을 끌어모으는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화약무기로 지휘관을 저격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며, 무기로는 화승총이 쓰였다[12]. 이제 지휘관을 잃은 용병군이 스스로 붕괴되기를 기다릴 차례였고, 실제로 용병군의 지휘체계는 이것으로 완전히 붕괴되었다. 단지 지휘체계의 붕괴가 무질서한 후퇴가 아니라, 절제되지 않은 폭력으로 이어졌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상술했듯이 황제 카를 5세의 군대는 용병들이었으나, 프룬츠베르크가 사망한 이후 그들은 부족한 용병료 때문에 불만이 단단히 쌓여 통제가 거의 불가능한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샤를 3세가 용병들에게 끌려다니면서도 리더십을 발휘하여 군대 비슷한 모양 정도는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런 샤를 3세가 전투 중 죽어버린 것이다. 샤를 3세의 뒤를 이어 필리페르트가 사령관의 자리를 이어받았으나, 이미 지휘체계가 무너지고 규율있는 강도떼가 되어버린 용병들에게는 손도 대지 못했다. 용병들은 지휘관의 죽음에 사기가 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샤를 3세의 죽음에 분노하여 있는 거 없는 거 전부 다 쏟아부으면서 총력을 다해 로마를 공격했다.

거기에 원래부터 란츠크네히트는 올곧은 충성을 다하는 스위스 용병과는 달리 꽤나 자유로운 체계에 노동조합과 유사한 제도까지 있어서 명령에 따르고 죽는 엄격한 규율의 용병과는 그 모습이 사뭇 달랐기에 지휘선의 붕괴는 생각보다 큰 타격이 아니었다.

그래서 로마 수비군이 단 하루만에 약 1,000명을 잃으며 패주하는 것으로 방어선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용병군은 적의 시체를 짓밟으며 성난 물결처럼 로마 시내로 밀려들었다. 오직 스위스 용병들만이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지키기 위해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이어지는 길목을 막고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이전의 파비아 전투때 그랬듯이 거의 몰살당했다. 모두 전사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189명의 스위스 근위대 중 147명이 성 베드로 대성당 계단에서 사투를 벌여 전원이 용병군에 학살당해 주검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사태를 초래한 장본인이자 스위스 근위대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 한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지레 겁을 먹고, 147명의 근위대가 사투를 벌여 시간을 버는 동안 남은 42명의 호위 아래 바티칸을 버린 후 산탄젤로 성으로 도망갔다. 수비군도 없고, 교황도 도망간 로마 시내는 용병들이 들이닥쳤을 때 이미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가톨릭의 본거지다운 엄숙함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무질서함만이 팽배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을 막을 적도, 자신들을 통제할 지휘관도 갖지 못한 용병들은 로마를 현실에 나타난 지옥으로 만들었다.

5. 절정

"에스파냐, 에스파냐! 죽여라! 죽여라!"[13]
《로마, 약탈과 패배로 쓴 역사》/ 매슈 닐 지음/박진서 번역/ 마티

카를 5세의 용병들은 죽은 지휘관 샤를 3세의 복수라는 명분하에 본격적으로 로마를 침탈했다. 우선 포로로 잡힌 1,000여 명이 로마가 함락된 직후 공개처형당했다. 그리고 지휘관의 복수라고 볼 수 있는 행동은 이것이 전부였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l_Saco_de_Roma.jpg
로마의 성당 재산들은 남김없이 약탈당했고, 건립된 지 고작 50년도 안 되는 유명한 시스티나 소성당 역시 예외가 되지 못했다. 남자들은 군인이건 사제건 따지지 않고 고문을 받다가 참혹하게 살해당했고 여자들은 어리건 아니건 수녀건 뭐건 강간당하고 살해당하며, 성벽에 못박히는 등 그야말로 지옥에 가까운 참극이 벌어졌다.

용병들의 상당수는 루터교 신자들이라 로마를 적그리스도의 본거지 정도로 여기고 있어 어떠한 양심의 가책도 없이 침탈에 몰두했다. [14]

루터교인들은 교세가 확장되기 이전까지 종교재판을 통해 이단으로 판정받아 개종하지 않으면 갖은 수치와 고문을 받다가 화형당하기도 했다. 당장 루터의 등장 이전에도 얀 후스 같은 인물이 생명 보장 약속을 어기고 끔찍하게 처형당하기도 했으며 이로 인해 보헤미아인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을 정도로(그 결과가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이었다.) 가톨릭측은 더러운 짓을 많이 해왔다. 어떻게 보면 사코 디 로마는 참혹하고 막나가던 종교재판의 대가를 톡톡히 치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대가는 고스란히 아무 죄도 없는 민간인들에게 몇 배로 돌아갔다. 그리고 가톨릭측이 박해를 했다고 가톨릭 신자들을 학살, 강간한 것이 정당화되는 것도 아니다.[15] 물론 이탈리아 출신 용병들은 루터교인이 아니었지만, 프룬츠베르크가 쓰러져 죽고 샤를 3세도 전사한 마당에 이미 종교가 어쩌니 할 계제가 아니었다. 그나마 이탈리아 용병들은 강간은 해도 죽이지는 않았으며, 약탈은 해도 불은 지르지 않았다고 한다.

살아남은 추기경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피신하거나 돈을 구해 바쳐야 했는데 친 합스부르크파 추기경도 예외가 아니었다[16]. 이때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적대하던 폼페오 콜론나 추기경이 용병들에 호응하기 위해 휘하 세력을 이끌고 로마에 입성하기도 했는데, 로마에 벌어진 지옥도를 목도한 추기경은 교황이라는 공통의 적이 있음에도 살아남은 로마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고 나섰을 정도였다.

이런 로마의 상황이 사방에 알려지자 코냑 동맹에 가담했던 이탈리아 각 도시국가들은 걷잡을 수 없는 공포에 빠져버렸다. 지금은 용병들이 로마를 집어삼키는 중이었지만, 만약 저들이 로마만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 다음은 자기들이 똑같은 꼴을 당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천만다행으로 이들의 공포는 현실이 되지 않았는데, 코냑 동맹군이 용병들을 모두 물리쳤다거나 용병들이 로마를 집어삼킨 것으로 만족했다거나 하는 이유가 아니라, 교황령을 침공하라는 명령을 내린 카를 5세 본인이 사태 수습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17]

더욱 비극인 점은, 이런 용병들의 로마 점거가 장장 6개월이나 이어졌다는 것이다.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로마의 피해는 두 눈 뜨고 볼 수가 없을 정도로 참혹해졌다. 로마 인구 55,000명 중 12,000명이 학살당했고, 살아남은 자들은 유린당하거나 그저 신의 도움만을 기다리며 숨거나 도망쳐야만 했다. 이전까지 로마에 세워진 르네상스풍의 건축물들도 무참히 파괴될 정도로 로마의 피해는 심각해졌고, 피신해 있었던 교황은 로마의 소식을 듣고 비통해했다. 사실 클레멘스 7세도 말이 피신이지 사실상 용병들에게 포위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로마가 온갖 굴욕을 당하는 사이 교황을 구하고 로마를 수복하고자 이탈리아 각지의 의용군들이 속속 로마로 향했다. 그러나 강대한 용병들을 당해 내기엔 역부족이어서 오는 족족 깨져나갈 뿐이었다. 그나마 희망이 남아있었던 코냑 동맹군의 일원인 프랑스 왕국은 국왕 프랑수아 1세가 또 패배하며 굴욕적인 협상을 맺고 물러나버렸다. 이후로도 두 차례 카를 5세와 전쟁을 벌였지만, 번번이 힘이 미치지 못하여 불리한 강화를 체결했다.

로마는 폐허가 되었고 프랑스는 물러나 버렸다. 이제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남은 건 단 하나. 카를 5세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뿐이었다. 결국 교황은 1년 만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며 울트레흐트 교구의 재산을 합스부르크에게 넘겨주는 등[18]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며 간신히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물론 그 동안의 침탈 행위를 모조리 감당해야 했었던 로마는 완전히 초토화된 이후였다.[19]

배상금을 지불하고 로마로 돌아오기는 했으나 교황은 더 이상 카를 5세에게 적대할 의욕을 상실했다. 제국과 맞서 싸우기는커녕 용병들이 다시 로마로 처들어올까 불안해했고, 마침내 권위고 뭐고 다 팽개치며 직접 볼로냐까지 나아가 카를 5세와 만난 후,
로마에서 발생된 침탈행위를 용서하고, 카를 5세를 제국의 공식적인 황제로 인정하며 제관을 씌워 준다.
는 서약을 맺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로써 카를 5세는 교황으로부터 황제의 관을 받은 최후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었고, 클레멘스 7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 관을 씌워준 마지막 교황이 되었다.

6. 결말

이렇게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야심차게 결성한 코냑 동맹은 완벽하게 와해되었다. 그나마 피렌체만이 항전을 계속[20]했으나, 외부에서 결성된 지원군이 1530년 가비나나 전투에서 1주일 간의 격심한 교전 끝에 용병들에게 패배하여 외부로부터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결국 항복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역시 55세의 나이에 피렌체에서 무너진 성벽을 복구하는 것을 감독하는 식으로 종군하기도 했다.

피렌체로서는 다행스럽게도 로마와 같은 참극은 면할 수 있었다.[21] 사실 사코 디 로마는 애초에 부족하게 지급된 용병료 + 용병을 주축으로 한 군대 결성 + 급료 체불+ 용병대장의 죽음 + 그나마 권위가 있었던 지휘관의 전사가 모두 겹쳐 일어난 예외 중의 예외인 사안이었다. 기본적으로 용병은 오늘의 적이 내일의 고용주가 될 지도 모르기 때문에 사생결단을 내면서 약탈하지는 않는 편이다. 어쨌든 피렌체에는 오늘날까지 르네상스 시대의 고건물들과 예술품들이 즐비하게 남아있어 피렌체 사람들을 먹여 살려주고 있다.

코냑 동맹의 붕괴와 함께 교황의 권위는 과거와 같은 권력은 꿈도 꾸지 못할 '이빨 빠진 호랑이' 수준으로 떨어졌다. 교황의 영향력은 정확히 교황령 안으로 축소되었고, 종교적인 탄압은 교황이 아닌 세속 군주들의 차원에서 벌어진 데다가[22] 그나마 종교적인 문제 또한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했다. 30년 전쟁 이후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고 나서부터는 명목상의 권한마저 축소되어 잇몸(...)까지 빠져버리고 말았다.

이 사건은 16세기 근세로 이행하는 격변기 속에서 황제권이 교황권을 역전한 이래 가장 확실한 쐐기를 박은 사건으로 그 이전에도 그 이후로도 교황이 세속 군주로부터 이렇게까지 굴욕을 겪은 바는 없었다. 이에 비하면 카노사의 굴욕은 사실 굴욕 축에도 끼기 어려울 정도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카노사의 굴욕 사건에서 굴욕을 당한 쪽은 황제였던 하인리히 4세이니 사코 디 로마와 일대일로 비교하기가 좀 뭣하고, 카노사 성에서의 굴욕을 참고 견딘 대가로 황권을 회복한 하인리히 4세의 복수, 즉 그레고리오 7세의 편에 섰던 교황파 제후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동로마의 알렉시오스 1세와 군사 협력까지 맺어 그레고리오 7세를 폐위하고 산탄젤로 성에 유폐시켜버린 뒤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를 옹립했던 사건과 비교하는 것이 더 적당할수도 있겠다. 그나마 그레고리오 7세는 동맹세력(군사적 협력자)이던 노르만족 로베르 기스카르의 이탈리아 복귀로 유폐에서 풀려났지만 이번에는 기스카르의 거점인 살레르노에 사실상 감금되어 1년 후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던 것. 하지만 그레고리오 7세 개인은 패배했을지언정 그가 원했던 교황권의 신장을 위한 각종 개혁들은 그 후 1세기동안 그의 후임 교황들에 의해 대부분 이루어졌고, 그래서 후세의 역사가들은 그레고리오 7세와 카노사의 굴욕을 (본래 황제권에 종속된 하위 권력이던) 교황권이 황제권과 대등한 위치까지 성장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 첫 번째 징후로 해석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카노사의 굴욕이 교황권 전성기의 시작을 상징하는 사건이라면 사코 디 로마는 교황권 전성기의 끝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또한 그리스도교 군대가 교황령을 침공하여 궤멸적인 타격을 초래했던 극히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권력의 정점을 상징하는 사건인 동시에 교황권의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한편 잉글랜드의 왕 헨리 8세에게도 엉뚱한 불똥이 튀었다. 1527년 국왕 헨리 8세는, 앤 불린과 재혼하기 위해 첫 번째 왕비인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혼인을 무효[23]로 하기 위하여 교황 클레멘스 7세의 허락을 구했는데, 여기서 문제는 아라곤의 캐서린이 카를 5세의 이모였다는 것이다. 클레멘스 7세는 같은해 로마에서 온갖 수모를 다 겪으며 볼로냐까지 마중 나가 굴욕적인 협정을 맺었고, 카를 5세가 헛기침만 해도 벌벌 떨어야 하는 처지까지 내몰린 그는 헨리 8세의 요청을 딱 잘라 거절해버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헨리 8세가 난처해졌는데, 힘으로 카를 5세를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교황이 있는 로마로 쳐들어갈 수도 없었다. 설령 그게 가능했다고 해도 잉글랜드에서 로마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베리아 반도 옆을 통과해야 했는데,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을 차지하는 스페인은 카를 5세의 땅이었고 당시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최강이었다. 여기서 헨리 8세는 겸사겸사 [24] 교황의 허락을 받지 못하면 자국민들이 허락하면 된다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생각해내어, 가톨릭과의 인연을 끊어버리고 성공회를 탄생시켰다. 앤 불린의 정실로서의 지위나,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들에 대한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반역죄로 다루겠다는 법까지 승인한 것은 덤이었다. [25]

교황 클레멘스 7세 본인도 로마에서 입은 트라우마를 죽을 때까지 해소할 수 없었다. 그는 당시의 비극을 잊지 않고자 1534년 과거 시스티나 소성당 천장에 <천지창조>를 그렸던 당대의 거장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를 다시 초빙하여 성당 벽에 <최후의 심판>을 그리도록 했다. 그러나 클레멘스 7세는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선종했고, 다음 대 교황인 바오로 3세 때에 가서야 완성을 보았다.

15세기 유럽의 문예를 주도했던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이 사건으로 사실상 마침표를 찍었다고 평가된다. 이 사건과 전후의 이탈리아에서의 격렬한 전쟁은 대부분의 도시국가들을 피폐하게 만들었으며, 다른 이탈리아 공화국들과 거리를 두던 베네치아 공화국만이 번영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오늘날 로마에 르네상스 당시 양식의 건물을 찾기 힘든 반면 후대 바로크 양식의 고건물이 즐비한 것도 그 영향이다. 실로 역사적인 도시 하나를 송두리째 뒤바꿔놓은 것이다.

이 사건은 스위스 용병들의 활약상 중 1792년 8월 10일 봉기 당시 튈르리 궁에서 혁명군에게 전멸당한 786명의 스위스 근위대와 더불어 가장 장렬한 사수전을 보여준 일화로서, 최악의 상황에서도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위해 끝까지 충성을 바친 것에 감격한 교황청은 이후 스위스 근위대를 영원히 교황청 근위대로 쓸 것을 약속했으며, 현재까지 교황청에는 창을 든 스위스 근위대가 복무하고 있다.[26] 그리고 지금까지도 매년 로마가 용병군에게 함락당했던 5월 6일마다 성 베드로 대성당 부근에 주둔하는 신참 스위스 근위병들은 1527년에 장렬하게 최후를 맞은 수백 명의 선배들을 기리며 충성 서약의 의식을 치른다. 비록 패배했음에도 그 용맹에 그 경의를 바치는 것이니 빈사의 사자상과 비슷한 의미인 셈이다.


[1] '위대한 로렌초'라 불리는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의 동생 줄리아노 디 피에로 데 메디치가 파치 가의 음모에 휘말려 살해되기 전에 관계하던 여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나마도 줄리아노 사후에 태어난 사생아였지만, 백부인 로렌초가 그를 조카로 인정하여 아들들과 함께 키웠다.[2] 유명한 란츠크네흐트 용병대의 창설자로, 이탈리아 전쟁 시대 신성 로마 제국을 대표하는 장군이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겸 스페인 국왕인 카를 5세의 명령에 따라 프랑스와 대결한 장군들은 거의 대부분 스페인이나 저지대 국가, 이탈리아 출신들이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프룬츠베르크는 눈에 띄는 존재였다.[3] 원래 프랑스인으로, 몽팡시에 백작 질베르의 아들이었지만 아내 쉬잔느가 부르봉 공작 피에르 2세의 딸이었기에 부르봉 공작령을 상속받았다. 하지만 군자금에 쪼들리던 프랑스 국왕이 《살리카 법》을 적용하여 샤를의 영토를 몰수한 후, 정확히는 자신의 모후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선언해 이에 반발하여 반역 음모를 꾸미다가 이것이 발각되자 국외로 도망쳐 카를 5세의 신하가 되었다. 규율이 잡힌 군사들을 통솔하는 데는 뛰어났던 무장이기는 해도 딱히 신임받았던 것같지는 않다.[4] 20,000명중 14,000명이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고용한 용병이었고, 6,000명은 스페인의 정예 병력이었다.[5] 파비아 전투로 끝난 1521~1526년의 제4차 이탈리아 전쟁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의 신하국이 되었지만, 당시 밀라노 공국의 공작이었던 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는 황제 덕분에 공작이 된 것은 고맙지만 내정 간섭은 극구 사양하겠다고 선언하여 사실상 독자 노선을 걸었다.[6] 사실 전근대의 국왕과 귀족들은 그렇게 부유한 편이 아니었기에 용병들에게 용병료를 많이 주지 못했다. 특히 황제 카를 5세는 국가 재정이 부유하지도 않은데 전쟁을 자주 벌여 재정을 거덜냈기에 용병들한테 충분한 보수를 주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이 당시 용병들은 약탈을 안 할 수가 없었다.[7] 당연하지만 약탈도 전투가 있어야 할 수 있다. 태생적으로 용병인 이상 신뢰는 중요했고 그러려면 적어도 전투도 없는데 약탈하는 미친 짓거리는 하지 말아야 했다. 그나마 전장에서의 약탈이 허용된 것은 용병이라도 돈 잘 받는 것도 아니었고, 어쨌든 목숨을 걸고 일한 것인 만큼 보상의 개념으로서 허용한 것으로 그나마도 너무 심해지지 않게 기한을 정해주었다. 물론 용병에게 약탈을 허용하지 않은 경우도 있긴 했지만 이 경우 용병이 고용주를 향해 반기를 들곤 했다.[8] 페라라 공국은 전통적으로 친프랑스 정책을 내세웠으나 페라라 공국의 공작 알폰소 에스테가 이를 파기했다.[9] 당시 서양의 대포 사거리는 2km 내외였다. 이것도 대형 대포의 기준이었고, 중소형 대포들은 1km 미만의 사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중세의 보병대가 하루에 최대 속도로 행군하면 40km 정도 이동할 수 있었는데, 교황군은 사실상 제국군이 두려워서 싸울 생각 자체가 없었다고 봐야 할 지경이다. 현대 미군의 155mm 견인포인 M777의 사거리가 대략 22km정도이며, 현대에도 30㎞ 정도면 전술적으로 적 포격 위협에서 벗어났다고 본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휴전선과 서울의 거리가 약 40km이다(...).[10] 용병군의 약탈을 막기 위해 피렌체에서 머무른 기간이 2일, 로마 함락 당시 교황군과 로마 사이의 거리도 2일 거리였다.[11] 왜냐면 클레멘스 7세 본인이 메디치 가문이었다.[12] 유명한 화가이자 금세공사인 벤베누토 첼리니자서전에 따르면, 자기가 부르봉 공작을 저격한 바로 그 사수였다고 한다.[13] 로마에 들어선 스페인(에스파냐) 출신 테르시오 병사들이 외친 구호[14] 약탈에 있어서도 민족별로 차이가 있었는데, 주로 스페인 출신인 테르시오 병사들은 귀족이나 부자들을 납치하고 그들한테서 몸값을 받아냈다는 영수증을 꼬박꼬박 작성한 반면, 독일 출신인 란츠크네히트 병사들은 그런 영수증 작성을 귀찮아해서 거의 안 쓰고 그냥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납치해서 고문과 협박을 가해 몸값을 뜯어냈다고 한다(...)[15] 앞서 언급했지만 이들은 어른 뿐 아닌 아이들도 봐주지 않았다.[16] 왜냐하면 황제군 병사들은 친 합스부르크파 인사라고 해도 몸값을 내지 않으면 몸값을 낼 때까지 고문을 했기 때문이다.[17] 카를 5세는 군대가 로마에서 무자비한 학살, 약탈, 강간, 방화를 저질렀다는 보고를 듣고는 놀라며 당황할 정도였다.[18] 그 외에도 많은 영지를 넘겨주기로 서약했으나, 결과적으로는 모데나만이 합스부르크의 영토가 되었다.[19] 특히 함락 이전에는 55,000명이었던 로마의 인구가 함락되고 나서는 5분의 1인 10,000명으로 줄어들었다.[20] 피렌체 공화국의 최고 의결기관인 10인 위원회에서 '교황에게 항복하는 형태로 용병군에게 항복하자'라고 결의하기도 했다. 즉, 용병군에게 항복하는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21] 물론 무차별적인 약탈과 학살, 강간이 없었을뿐 여기서도 저항한 인사들에 대한 학살 자체는 조직적,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다만 용병들이 한 것이 아니라 카를 5세가 직접 주도한 점이 달랐다.[22] 물론 명목상으로는 교황을 내세우기도 했지만, 실질적인 주체는 엄연히 세속 군주들이었다.[23] 여기서 혼인 무효는 사실상의 이혼으로 가톨릭은 교회법으로 이혼을 허락하지 않으므로, 혼인을 무효로 돌리는 것만이 가능하다.[24] 대표적으로, 가톨릭 수사들에 대한 교황청의 통솔 부재 문제가 있었다.[25] 토마스 모어나 존 피셔 등이 바로 이때 숙청당한 인사들이었다.[26] 다만 이 언약을 맺은 것은 사코 디 로마로부터 10년 후인 1537년으로 사코 디 로마에 휘말린 클레멘스 7세 본인이 선종한 뒤 후임 교황인 바오로 3세 때의 이야기이다. 사코 디 로마 직후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의 요구로 스위스 근위대를 독일인 용병으로 갈아치워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