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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9-23 21:45:29

대연(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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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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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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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戴淵
(271 ~ 322)

동진의 인물로 자는 약사(若思). 서주 광릉군(廣陵郡) 광릉현(廣陵縣) 출신으로, 조부 대열(戴烈)은 오나라에서 좌장군을 지냈고, 부친 대창(戴昌)은 회계태수를 지내서 나름 강동의 명문 사족 집안으로 인정받았다. 당나라 고조 성황제 이연(李淵)가 휘가 같아 《진서》에서는 피휘해 그의 자(字)만 기록했다. 동생으로는 대막이 있다.

2. 생애

풍채가 제법 있었고 털털한 성격이라 사소한 일에 구애받지 않았다. 젊은 시절 협객을 좋아해 일반 사대부들의 지조와 품행에 얽메이지 않았다. 이러한 특성 탓에 그는 도적단을 꾸려 회수 일대에서 배를 타고 다니며 선적들을 헛되이 약탈했다. 그렇게 약탈이나 하면서 허송세월을 보내던 와중 우연히 육기를 만나게 되었다. 육기는 대연이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단번에 알아보고는 선실 위에 올라 그를 향해 소리쳤다.
"경(卿)은 이러한 재기를 가졌으면서 앞으로도 계속 약탈이나 하면서 살텐가!"
대연은 깊이 깨달은 바가 있어 눈물을 흘리고 검을 내동댕이 쳤다. 그리고 육기와 더불어 대화하면서 다시는 도적질을 하지 않을 것임을 맹세하고 그와 깊이 교제했다.

대연은 이후 효렴으로 천거받고 낙양에 들어가니, 육기는 조왕 사마륜에게 대연을 추천했다. 사마륜은 대연을 불러 심수현령으로 삼았으나 대연은 이를 취하지 않고 무릉군(武陵郡)으로 가 아버지를 보살폈다. 당시 무릉군에 반경(潘京)이라는 자는 그 지역에서 지식인으로 명성이 자자했는데, 반경의 아버지는 아들을 보내 대연과 교제하도록 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눠본 반경은 그에게 천자를 보좌할 재능이 있음을 깨달았다.

이후 대연은 누차 옮겨져 사마월의 군자좨주를 지내다가 예장태수로 부임했고, 진위장군, 영의군도독(領義軍都督)이 더해졌다. 그는 예주에서 도적 토벌로 공을 세워 말릉후(秣陵侯)에 봉해졌다. 그리고 다시 옮겨져 치서시어사, 표기사마, 산기시랑을 역임했다.

영가 원년(307년), 진동장군 낭야왕 사마예가 난을 피해 건강(建康)으로 도망쳐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대연은 사마예의 부름을 받고 그의 우사마가 되었다.

건흥 3년(315년) 2월, 낭야왕 사마예는 대연에게 전장군을 더해 두도를 토벌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대연이 미처 출발하기도 전에 명장 주방이 먼저 나아가 두도를 베고 난을 평정했다.

건무 원년(317년) 3월, 낭야왕 사마예가 진왕(晉王)을 칭하고 동진 정권을 수립하자 대연은 상서에 제수받았다.

태흥 원년(318년) 3월, 진왕 사마예가 동진의 황제로 즉위하자 중호군에 임명되었다. 이후 조정으로부터 호군장군, 상서복야 등의 관직을 제안받았지만 전부 사양했다.

태흥 4년(321년) 7월, 원제 사마예는 대연을 정서장군, 도독연예유기옹병육주제군사(都督兗豫幽冀雍並六州諸軍事), 산기상시에 임명했다. 대연은 제후왕 산하 관리 1,000명을 군리로 징집하고 양주(揚州)의 백성 중 가노 10,000명을 해방시켜 병사로 편입했다. 그리고 산기상시 왕하(王遐)를 자신의 군사(軍司)로 삼고 이내 출정하여 수양(壽陽)으로 향했다. 출발하기 전, 원제가 대연의 진영을 친히 방문해 술을 하사하고 시를 지어 장병들을 위로했다. 대연은 수양까지 가지 않고 합비(合肥)에 눌러앉아 당시 북벌 중이던 예주자사 조적을 지나치게 간섭했다. 조적은 대연의 통제를 달갑지 않게 여겼고, 왕돈이 유외, 조협과 대립해 정치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한탄해 마지 않았다. 결국 조적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병을 얻어 옹구(雍丘)에서 사망했다.

영창 원년(322년) 정월, 왕돈이 무창(武昌)에서 거병해 반란을 일으키자, 원제 사마예는 외지로 파견보낸 유외와 대연을 건강으로 돌아오게 했다. 원제는 대연을 표기장군으로 승진시키고, 우위장군 곽일(郭逸)과 함께 길목에 큰 보루를 세워 반란군의 진격을 막도록 명했다. 하지만 대연이 보루를 축조하기도 전에 석두성을 수비하던 주찰이 왕돈에게 항복하면서 건강성이 위태로워졌다. 대연은 조협, 유외 등과 군을 합쳐 서둘러 석두성을 탈환하려 했지만 왕돈의 반격을 받고 대패했다. 패전 소식을 들은 사마예는 갑옷을 벗고 왕돈에게 항복했다. 대연은 공경백관들과 함께 석두성으로 가 원제의 항복 문서를 전했다. 왕돈이 대연에게 물었다.
"전날 전투에서 여력을 남기고 싸웠는가?"
대연이 겸손히 답했다.
"어찌 여력이 남겼겠습니까. 단지 힘이 부족했을 뿐입니다."
왕돈이 다시 물었다.
"나의 거병을 천하는 어떻게 생각할 것 같느냐?"
대연이 답했다.
"겉으로 살피기만 한 자는 역(逆)이라 할 것이나, 진실로 헤아린 자는 충(忠)이라 할 것입니다."
이에 왕돈이 웃으며 대연을 칭찬했다.
"경(卿)은 언변에 능하구려."

왕돈의 참군 여의석(呂猗昔)은 글재주가 있었으나 사람됨이 음험하고 간사하여 과거 대연에게 홀대받은 적이 있었다. 여의석은 그때 이후로 대연을 깊이 원망해 왕돈에게 넌지시 말했다.
"주의, 대연 등은 모두 명망이 높아 무리를 현혹시키기에 충분하며, 요즈음 사람들로부터 들리는 말에 따르면 부끄러워 하는 기색이 없었다고 합니다. 공께서 만약 그들을 제거하시지 않는다면 다시 일어나 장래의 우환이 되는 수가 있습니다."
왕돈 또한 평소 그들의 명성을 경계했기에 일리있다 여겨, 등악과 무탄(繆坦)을 보내 주의와 대연을 붙잡아 석두성 남문에서 참했다. 향년 52세. 대연은 인망이 높아 동진의 모든 사대부들이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 했고, 나중에 이를 알게된 왕돈의 장사 사곤도 왕돈의 잔혹함에 경악했다. 훗날 왕돈을 평정한 명제 사마소가 대연의 명예를 회복시켜 우광록대부, 의동삼사로 추증하고 시호는 간(簡)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