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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찬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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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 <colbgcolor=#ffffff,#191919> 1 심유호 · 11 이현민 · 13 최종완 · 20 선성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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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찬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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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찬엽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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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90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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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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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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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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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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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청룡 / LG 트윈스 등번호 30번
이국성
(1988)
<colbgcolor=#000><colcolor=#fff> 노찬엽
(1989~1997)
박연수
(1998~2003.4.25.)
LG 트윈스 등번호 96번
김영덕
(1997~1998)
노찬엽
(1999~2008)
차화준
(2009)
한화 이글스 등번호 76번
김호
(2006~2008)
노찬엽
(2009)
김민재
(2010~2012)
LG 트윈스 등번호 96번
지승환
(2011)
노찬엽
(2012~2013)
김우석
(2014~2022)
LG 트윈스 등번호 91번
김기태
(2012~2014)
노찬엽
(2015~2016)
이병규
(2018)
}}} ||
}}} ||
파일:연천노찬엽.png
<colbgcolor=#2F3081><colcolor=#fff> 연천 미라클 No.91
노찬엽
盧燦曄 | Chan-Yeup Noh
[1]
출생 1965년 1월 15일 ([age(1965-01-15)]세)
서울특별시 성동구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한양초 - 배재중 - 배재고 - 고려대
포지션 외야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87년 1차 지명 (MBC)
소속팀 농협 야구단[2] (1988)
MBC 청룡-LG 트윈스 (1989~1997)
지도자 LG 트윈스 육성군 수비코치 (1999)
LG 트윈스 1군 작전·주루코치 (2000~2001)
LG 트윈스 2군 타격코치 (2002)
LG 트윈스 2군 작전·주루코치 (2003)
LG 트윈스 1군 작전·주루코치 (2004~2006)[3]
LG 트윈스 1군 타격코치 (2006)[4]
LG 트윈스 1군 작전·주루코치 (2007~2008)
한화 이글스 1군 수비·주루코치 (2009)
LG 트윈스 2군 감독 (2012~2013)
LG 트윈스 1군 타격코치 (2015)[5]
LG 트윈스 육성군 총괄코치 (2015~2016)[6]
연천 미라클 타격·주루코치 (2017~2019)
연천 미라클 수석코치 (2020~)
경력 KBO 육성위원 (2014)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4. 여담5. 연도별 주요 성적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야구 선수. 現 연천 미라클의 수석코치. 선수 시절 포지션은 외야수.

2. 선수 경력

파일:LG4인방.jpg
왼쪽부터 정삼흠, 노찬엽, 김용수, 김상훈

1987년 MBC 청룡의 1차 지명을 받았으나, 1988 서울 올림픽 참가를 위해 실업 농협에 입단했다. 아마 시절 노찬엽은 강기웅과 더불어 최고의 타자였으며, 1988 서울 올림픽에서도 대표팀 4번타자로 활약했다.

올림픽을 마친 후 1989년 MBC 청룡에 입단하였다. 이해 신인왕 경쟁은 박정현, 이강철, 류명선, 송진우 등의 투수들이 강세였는데, 노찬엽은 강기웅과 함께 신인 타자의 대표 주자로 활약했다. 데뷔 시즌부터 MBC의 중심 타자로 맹활약한 그는 1990년, 한대화, 이강돈과 사상 초유의 시즌 막판 타격왕 경쟁을 하며 주목을 받았지만,[7] 타격왕은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이강돈을 불과 1만분의 1 차이로 제친 한대화가 차지했다. 연말에는 지명타자 골든글러브 후보로도 올랐지만, 그 해에 홈런 3위를 기록하며 뒤늦은 전성기를 맞이한 삼성의 베테랑 박승호가 골든 글러브를 차지하였다.

그 다음해인 1991년에 2년 연속 3할을 치며 잠실야구장 우중간을 가르는 2,3루타가 트레이드 마크로 '서울의 검객' 이라는 별명이 지어졌다. 그러다 1993년 5월 해태의 투수 양승철에게 머리에 맞는 사구를 당했는데, 이 부상으로 공이 두 개로 보이는 후유증을 겪으며 2달 동안 1군에서 제외되었다. 프로 데뷔 이후 최악의 시즌이었다.[8] 그래도 OB와의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는 4번타자로 출장하였다. 1993 시즌 최고의 활약은 삼성과의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나왔다. 0-0으로 시소게임을 벌이던 중, 6회초 삼성 투수 박충식으로부터 결승 2타점 적시타를 뽑아내며, 팀의 2-0 승리를 이끌었다.

1994년에는 주로 5번 타자로 활약하며[9], 데뷔 후 처음 두자리수 홈런(10개)을 기록하는 등 주장으로서 팀을 잘 이끌며 팀의 완전 우승에 기여하였다. 그리고, 본인도 생애 첫 골든글러브(외야수 부분)를 노려볼만 했으나, 3할대 초반까지 올라갔던 타율이 막판 대부진으로 하락(.279)한 바람에 쌍방울 박노준(.303)에 밀려 수상에 실패했다. 당시는 3할타자가 1년에 10명정도 밖에 안나오던 시절이라 투표권을 가진 기자들이 3할 타율에 매우 민감했었다. 노찬엽 개인으로선 1990년과 1991년에 이어 아쉽게 골든글러브 수상에 실패한 셈.

1995년에는 또 다시 헤드샷 부상을 당했고, 결국 이렇다 할 수상 실적 없이 1997년에 은퇴하였다.

팀의 장시간 침체기였던 시기에 주포로 활약한 외야수로, 리즈 시절인 1990년대 초반엔 한대화와 더불어 찬스에 강한 타자로 불려졌으며 노쇠화와 부상이 있던 시기를 제외하면 50타점 이상을 꾸준히 올렸다. 3루타 순위에 있어서도 1989, 1993~1994년 1위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1990년 기록한 0.333의 타율은 역대 LG 우타자들 중 최고 타율이다.[10] 수비 또한 송구능력만 제외하면 준수한 편이었다. 통산 BB/K 비율도 1이 넘을 정도로 준수한 선구안도 가진 타자였다. KBO 단일시즌 BB/K 기록 보유자로, 1989년에 3.79의 기록을 남겼다. 다만 유리몸저질체력이어서 한시즌 100경기를 간신히 넘길 정도로 내구력이 약했다. 안면사구 이후에 정교함도 퇴색되긴 했지만, 원체가 내구성이 떨어지는 몸이라 기량 하락도 급격히 진행됐다.

3. 지도자 경력

은퇴 후 작전코치, 주루코치, 타격코치 등 LG에서 코치직을 맡았으나 이 시기부터 실적은 하나도 못 남기고 6668587667 시기가 진행중이었던 2008년 경질되고 5886899가 시작되던 한화 코치로 영입되어 김인식 감독 밑에서 3루 베이스 코치[11]를 하다가 한대화가 감독을 맡게 되면서 물러났다. LG 트윈스가 코치진을 프랜차이저 출신들을 많이 기용함에도 다시 부름을 받지 못하고 있다. 사실 코치로서도 확실하게 실적이 없 다보니... 게다가 한화 팬들은 '09시즌 주루코치 시절 김태균을 무리하게 돌리다가 홈에서 포수랑 부딪히고 뇌진탕 부상으로 아웃된 것 때문에 금지어 수준으로 취급했다.

그런데 2011년 11월 4일부로 LG 트윈스 2군 감독으로 선임됐다! 하지만 어째 신통치 않아서 팬들에게 욕을 잔뜩 먹고 있다. 감독으로 있던 2012 시즌 2군에서 4할대 승률로 고전하였고, 2013 시즌에도 5할대 근처에 머물렀다.

일신상의 사유로 2013 시즌 후 LG 트윈스 2군 감독직에서 물러났다가 2015 코칭스태프 재편과정에서 1군 타격코치로 팀에 복귀하였다. 양상문 감독의 인터뷰를 보면 2군 선수진들을 알고 있어서 다시 친정 팀으로 돌아왔지만, 팬들은 능력도 없는 철밥통이 돌아왔다고 부정적으로 본다. 그나마 LG팬들이 위안을 삼는 점은 신경식처럼 쓸데없이 우타자를 좌타나 스위치로 바꾸는 행위를 하지 않고, 선수의 타격 폼을 웬만하면 안 건드리는 주의라는 점은 그래도 환영받는 편이긴 하다.

2012년 차명석이 1군 투수코치를 맡았을 때 투수들 제구력 잡는다고 구속이나 10km씩 떨구지 말라고 기대도 못 받았었던 상황을 본인의 철저한 노력과 공부로 LG 팬들에게 최고의 투수코치로 발돋움했듯이 노찬엽 코치도 공부하는 자세로 노력을 해서 좋은 결과를 이끌어낸다면 평가가 달라질 수 있긴 하다.

하지만 시즌이 시작되고 LG 타자들이 집단 슬럼프를 겪으면서 부진하자, 말그대로 미친 듯이 까이고 있다. 특히 경기 중에 보이지도 않고, 신인급 타자들은 오히려 작년보다 퇴보한 모습을 보이면서 타격코치는 대체 뭘 하는지 모르겠다는 반응. 하다못해 서빙고라고 욕 먹은 서용빈이 낫다는 말까지 나왔다.[12]

인터뷰에서는 여전히 선수 자신감 탓+사이클 탓+잠실구장 탓를 대며 무능코치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루빨리 떠나 달라는 분위기.[13]

덧붙여 노찬엽이 강조한 선구안 장착과 신중한 접근법 또한 문제가 되고 있는데, 치려는 공을 보려고 너무 기다리다 보니 팀 피삼진이 많아졌다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게다가 타격 상황에서 양상문 감독이 직접 지시하는 장면까지 방송에서 잡히면서 비난이 거세지고 있다.

결국 2015년 6월 15일에 서용빈과 보직을 맞바꿔 육성총괄코치로 내려갔다.

그래도 육성군에서는 그럭저럭 하는 모양.
파일:external/imgnews.naver.net/20161008184531657899_99_20161008185604.jpg
2016년 10월 8일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두산과의 최종전에 시타자로 등장하여 이날 시구자 이상훈과 함께 LG의 예전 원정 유니폼인 검정색 유니폼을 입고 인사를 나누며 오랜만에 팬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14]

2016 시즌 종료 후 구단과 재계약을 하지 않게 되었다.

2017년부터 연천 미라클의 타격/주루코치를 맡고 있다가 2020년부터 수석코치로 승격되었다.

4. 여담

5.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rowcolor=#fff>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9 MBC-LG 102 352 .287 101 18 6
(1위)
1 56 54 13 54 .381 .374
1990 105 327 .333
(3위)
109 11 6
(3위)
5 51 47 8 43 .450 .403
(2위)
1991 115 417 .317 132
(4위)
22 8
(4위)
3 58 45 12 52 .429 .388
1992 109 405 .272 110 21 2 6 50 52 6 53 .378 .354
1993 73 234 .244 57 5 8
(1위)
2 20 27 4 26 .359 .317
1994 107 340 .279 95 13 6
(1위)
10 59 53 7 45 .441 .357
1995 99 293 .253 74 14 0 9 41 38 4 27 .392 .310
1996 105 305 .243 74 11 2 5 28 37 5 41 .341 .328
1997 69 115 .226 26 6 0 2 17 15 0 14 .330 .308
KBO 통산(9시즌) 884 2788 .279 778 121 38 43 380 368 59 308 .396 .346

6. 관련 문서


[1] 단 한화 코치 시절 입었던 유니폼에는 CHAN YUB이라고 적혀 있었다.[2] 1988 서울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프로 진출이 유보되면서 임시로 몸담았다.[3] ~7월 17일[4] 7월 18일~[5] ~6월 14일[6] 6월 15일~[7] 이때 규정 타석을 간신히 채운 노찬엽은 결혼식을 하고 난 뒤 경기에 출전하였으며 해당 경기가 끝난 후 신혼여행을 가 버렸다. 거기다 결혼식날은 자신의 타격왕과 LG의 정규시즌 1위가 달려있는 마지막 경기였는데, 팀은 이겼지만 OB의 고의사구 2개에 힘입어 무안타에 그치며 타격왕을 날렸다. 이날 OB는 시즌 최하위가 이미 확정된 상태였는데, 라이벌팀에서 타격왕이 나오는걸 막기 위해 4차례 타석중에 딱 1차례밖에 타격기회를 주지 않았다. 나머지 3차례 타석은 거의 고의성 볼넷이었다. 그나마 그 1번의 타격기회도 투수 구동우를 상대로 제대로 맞은 라이너 타구를 날렸으나, OB 좌익수 곽연수의 믿기지 않은 호수비에 걸려 아웃되었다. 이게 빠졌다면 타격왕에 등극했을 수도 있었을 듯하다.[8] 결국 노찬엽은 그 해 73경기 출전에 그쳤으나 3루타 8개로 공동 1위를 마크했다[9] 줄곧 지키던 우익수 자리에는 1992 시즌 중 태평양에서 이적한 박준태가 1993년부터 주전을 맡아왔던 탓인지 중견수를 봤는데 전년도 신인으로 주전 중견수를 차지한 김경하가 방위 복무로 출전이 불가피해지자 어쩔 수 없이 포지션을 변경했다.[10] 단일시즌 기준 역대 13위. 뒤로는 18채은성(.331, 16위), 14정성훈(.329, 18위), 82이종도(.324, 24위), 10조인성(.317, 30위)이 이어진다. statiz 기준 wRC+는 차례대로 142.0, 137.5, 144.4, 145.2, 140.0.[11] 기존에는 유지훤 수석코치가 3루코치를 겸했다.[12] 적어도 서용빈은 메인 코치로 있었을 때 2010년 팀 타율, 팀 홈런 3위를 찍었다.[13] 같이 잠실구장을 사용하는 두산 베어스는 이미 팀 타율 3위에 평균득점 4위를 하고 있어서 설득력이 떨어지며 싸이클로 따지자면 LG 트윈스는 4월부터 5월까지 쭈욱 못 치고 있다. 게다가 작년에 1군에서 가능성을 보여준 최승준, 채은성 역시 폭망하면서 자신감 탓으로도 보기가 힘들다.[14] 노찬엽과 이상훈은 LG의 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고 노찬엽은 우승 당시 팀의 주장이었다.[15] LG 트윈스의 구단주였으며 야구단에 관심이 많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16] 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 당시 주장이었다.[17] 해당 제품은 미국에서 보 잭슨의 'Bo Knows' 광고로 유명한 Cross Training Footwear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