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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디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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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령 식민지 Crown Colony는 1982년 법령 개정에 따라 영국 속령 British Dependent Territory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이후 2002년 다시 명칭을 영국 해외 영토 British Overseas Territories로 개정하여 현재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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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팔 왕국1923년까지 영국령 인도 제국 정부에게 외교권을 통제당하여 외무는 오로지 영국 통감(British resident)에 의해 행사되었지만, 다른 토후국들과는 달리 내부 행정에 대해서는 완전한 독립을 유지하였던 보호국이었다. 그러나 완전히 독립한 1923년 이전까지는 간혹 인도 제국의 토후국 목록에 이름을 올리기도 하였다. Imperial Gazetteer of India(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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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디지아는 일방적으로 식민지 남로디지아가 자치령을 선포한 것으로, 영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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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란 제국1941년 대영제국과 소련페르시아 침공 협공으로 점령되어, 영소군 각각이 각 점령지에 주둔하였고 또한 각각의 점령지를 통치하는 분할 통치가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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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디지아 (1965~1970)
Rhodesia
로디지아 공화국 (1970~1979)
Republic of Rhode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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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Sit Nomine Digna
그 이름에 걸맞게 하소서
상징
<colbgcolor=#064a2e> 국가 God Save the Queen (1965~1970)
로디지아의 목소리를 상승시키리 (1974~1979)
영토
파일:로디지아.png
로디지아 공화국의 영토
1965년 11월 11일~1979년 6월 1일
성립 이전 멸망 이후
남로디지아 식민지 짐바브웨 로디지아
상징
위치 남아프리카
수도 솔즈베리
면적 390,580 km²(1978)
인문 환경
총 인구 693만 명 (1978)
{{{#white 인종 구성
(1969년 기준)}}}
흑인 93.09%[1], 백인 6.49%[2], 컬러드/아시아계 0.47%[3]
언어 영어
군대 로디지아 보안군
정치
정치 체제 의원내각제, 입헌군주제 (1965~1970)
의원내각제, 공화제 (1970~1979)
국가 원수 군주 엘리자베스 2세 (1965~1970)[4]
대통령 클리퍼드 듀폰트[5] (1970~1975)
대통령 존 래솔[6] (1976~1978)
대통령 권한대행 헨리 에버러드[7] (1978~1979)
수상
(정부 수반)
이언 스미스 (1965~1979)
경제
통화 로디지아 파운드 (1965~1970)
로디지아 달러 (1970~1979)
1인당 GDP 628$ (1978년)[8]
1. 개요2. 역사
2.1. 남아프리카 회사령 로디지아2.2. 로디지아 니아살랜드 연방2.3. 독립2.4. 짐바브웨 로디지아
3. 현대의 인식4. 기타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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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디지아1965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건국되어 1979년까지 존속했던 남부 아프리카의 국가이다. 냉전 당시 이웃한 나라였던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마찬가지로 국민의 다수를 이루던 아프리카 흑인을 차별/배제하고, 소수의 유럽계 백인들이 정치 권력을 독점한 국가로 악명이 높았다.

영국령 남로디지아 시대부터 농업으로 유명하였으며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각종 상품 작물을 재배하여 각지로 수출하는 나라였다[9]. 농업이 주산업이었으나 백인 소유의 생산성 높은 대규모 농장은 현지인 소비를 위한 식량 작물보다 담배 등 수출을 위한 상품 작물 재배가 많았으며 현지인 소비를 위한 식량은 상당량 수입하고 있었다.[10]

2. 역사

2.1. 남아프리카 회사령 로디지아

파일:vFJCR13.png
"모든 너의 아프리카 나에게 귀속하다" 를 외치고 있는 세실 로즈
파일:영국령 남로디지아 국기.svg
영국령 남로디지아의 국기
1850년 이전의 역사는 짐바브웨/역사 문서 참고.

1850년대에 탐험가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해당 지역을 조사하면서 영국에 널리 알려졌다. 케이프 식민지 총리였던 세실 로즈보어인 정착민 국가인 트란스발과 오렌지 자유국에 대해 압력을 가하고 북방 지역을 개척할 목적으로 1889년 대영제국 남아프리카 회사(BSAC)를 설립하고 이듬해에 이곳에 위치했던 마타벨레랜드 왕국과 마쇼나랜드 왕국으로부터 광산 개발권을 획득하여 광산 개발을 시작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두 국가를 보호령으로 만들었다가 끝내 영국령 식민지로 병합시켰다. 식민지화 과정에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무장 항쟁이 있었지만 영국군에 의하여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1890년에는 북쪽으로 진출하여 현재 잠비아 남부인 파로체랜드 왕국의 광산개발권을 획득하고 이 지역도 영국령 식민지로 병합시켰다.

1898년 세실 로즈는 남아프리카 회사 이름으로 병합한 지역에 대해 자신의 이름을 따서 로디지아(Rhodesia, 로즈의 땅)라고 명명했다. 이에 따라 지금의 잠비아는 '북로디지아'가 되었고 지금의 짐바브웨는 '남로디지아'가 되었다.

한편 말라위도 영국령 식민지가 되면서 영국은 잠비아, 짐바브웨, 말라위 지역을 통틀어 '영국령 중앙아프리카'라고 통칭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당초 목적이었던 광산 개발은 기대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지체되어 BSAC은 플랜테이션 위주의 식민지 방침으로 전환했다. 흑인 원주민 반란을 진압하면서 남로디지아(현 짐바브웨)를 중심으로 백인 정착민에 의한 식민화가 진행되었다. 1923년에는 백인들만의 주민투표로 남로디지아 자치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듬해 북로디지아(현 잠비아)는 영국령 직할 식민지가 되었다.

2.2. 로디지아 니아살랜드 연방

파일:로디지아 니아살랜드 연방 국기.svg
로디지아 니아살랜드 연방(중앙아프리카 연방)의 국기
북로디지아 개발이 진행되면서 남로디지아 백인 정착민들은 남북의 로디지아에 니아살랜드(Nyasaland, 현재의 말라위)를 포함한 통합을 요구했다. 이에 1953년에 로디지아 니아살랜드 연방[11]이 수립되었다. 당시 남로디지아는 충분한 기술과 자본을 가지고 있었고 니아살랜드는 싼 값의 노동력이 풍부했기 때문에 이를 통하여 로디지아 전역을 개발할 계획이었다.

한편 제2차 세계 대전 후 전세계적으로 퍼진 독립 열풍과 흑인 원주민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하여 나름 흑인에 대해 이전보다 유화적인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흑인참정권은 허락되지 않았으며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 조건으로 착취당하는 상황이었기에 지속적으로 흑인 원주민의 항쟁이 일어났다. 결국 흑인 중심의 독립투쟁 끝에 1963년에는 연방이 해체되었으며 이듬해인 1964년 북로디지아와 니아살랜드가 각각 잠비아말라위로 독립했다.

2.3. 독립

백인 정착민의 집권 의지가 강한 남로디지아에서 흑인 저항 운동이 격화되면서 1961년 12월 7일 소련의 지원을 받는 짐바브웨아프리카인민연합[12]이, 1963년 8월 8일 중국의 지원을 받는 짐바브웨아프리카민족연합[13]이 각각 결성되었다. 당시 소련과 중국의 대립은 심각했고 이들은 제3세계 국가를 대상으로 영향력 확대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한편 흑인 저항 운동에 반대하는 백인 정착민[14], 특히 플랜테이션 농장주를 주축으로 여러 백인 우익 정당이 통합되어 1962년 3월 1일 '로디지아 전선(Rhodesian Front, RF)'이 결성되었으며 1962년 12월 14일 총선 결과로 로디지아 전선이 집권하게 되었다. 1962년 총선 직후 윈스턴 필드가 총리를 맡아 영국과 독립 협상을 시작했으나, 2년간의 협상이 실패하면서 1964년 4월에 총리직을 내려놨다. 필드의 후임으로 이언 스미스가 남로디지아 식민지 정부 총리에 취임했고, 흑인의 저항 운동을 철저하게 탄압할 것을 천명하였다. 이에 흑인 저항 조직들은 전국적인 테러와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당시 클레멘트 애틀리가 이끌던 영국 노동당 정부는 국제사회의 압력과 식민지 원주민의 독립 요구로 식민지들을 독립시키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북로디지아와 니아살랜드가 독립하였다. 남로디지아도 흑인의 참정권 보장 형태의 독립을 요구했으나 이언 스미스의 백인 우익 정권은 이를 거부했으며[15] 결국 1965년 11월 11일 일방적으로 로디지아라는 이름으로 독립을 선언했다.[16] 로디지아의 독립 선포 시각이 영국 제1차 세계 대전 전몰자 추모 시각과 같았는데 이는 당시 로디지아 독립을 선포한 이언 스미스가 의도한 것으로 '우리는 제1차 세계 대전 때 목숨 걸고 도와줬는데, 이런 식으로 배신할 거냐?'라는 의미라고 한다.

이후 로디지아 백인 정권은 독립 선언 당시 자국을 일종의 자치령(dominion)[17]으로 간주하여 일방적으로 엘리자베스 2세를 로디지아의 여왕으로 취급하였다가 1969년 개헌 투표를 거쳐 1970년 공화국으로 전환했다. 물론 자치령이든 공화국이든 영국과 영국 왕실, 그리고 국제사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계속 영국령 남로디지아로 간주했다.

영국은 당연히 일방적인 독립 선포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반발했다. 독립 직전 이미 영국 노동당 정부의 총리가 흑인에 의한 아프리카의 통치라는 대세를 거스를 순 없다고 발언하며 차후 있을 독립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표명한 바도 있었다. 그러나 독립 후 그에 따른 제재는 실질적이기보다는 솜방망이에 가까웠다.[18] 한편 유엔 차원에서 이를 비난하고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로디지아의 국가 승인을 거부하는 결의를 채택했으며 1966년에는 부분적 경제제재를, 1968년에는 전면적 경제제재를 결의 및 시행했지만 로디지아 정부는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로디지아 정부는 로디지아와 똑같이 소수 유럽계 백인에 의한 통치와 인종차별 정책을 펼치던 이웃나라 남아프리카 공화국[19]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모잠비크 등의 도움으로 버틸 수 있다고 판단했고 실제로 10여 년간 큰 무리 없이 버틸 수 있었다.

이렇게 국제 왕따로 지내던 1969년 로디지아는 백인 팀으로 1970년 FIFA 월드컵 예선에 나갔는데 원래 아프리카 팀으로 나갔어야 하는데 아프리카 축구연맹의 반대로 제3대륙으로 분류되어 아시아 팀과 플레이오프를 치렀다. 1차 예선 상대는 한국,일본,호주인데 3개국 전부 로디지아 선수들의 비자 발급과 로디지아 원정을 거부하여 우선 서울 동대문에서 1차 예선을 하고 우승을 차지한 팀이 로디지아와 제3국에서 2차 예선을 치르는 것으로 했다. 당시 한국은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주동이 되어서 결성한 양지 축구단이 국대의 주축이었다. 양지팀은 중앙정보부 소속으로 당시로서는 최신식 잔디구장과 소위 계급 봉급, 군복무 경력 인정 등의 특혜를 받았고 예선 직전에는 서유럽 등으로 수개월간 전지 훈련도 하는 등 온갖 정성에도 불구 호주전에서 임국찬 선수의 패널티킥 실축으로 무승부가 되어 결국 탈락했다. 한국을 이기고 올라간 호주는 마푸토에서 로디지아와 대결해 이겨 이스라엘과의 최종 예선에 진출했으나 이스라엘에게 패해 본선 출전권을 내주었다. 이 사건 이후 피파는 로디지아의 회원 권리를 정지하기로 하였다.

한편 로디지아 정부는 백인 지배 체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기존의 인종차별주의와 다수결 원칙을 기초로 한 헌법을 개정할 것을 추진했다. 그리고 1969년 신헌법 초안을 사실상 전 국민의 5.47%에 불과한 백인만이 참여할 수 있는 국민투표에 부쳐 투표자 중 73% 지지도를 얻는 데 성공했으며 의회가 헌법 개정을 인준하여 1970년 3월 2일 로디지아는 영연방 소속 입헌군주국에서 벗어나 공화국으로 전환했다.[20]

이에 따라 흑인 저항 운동도 더 격렬해졌다. 로디지아 정부는 포르투갈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원조와 더불어 용병을 적극적으로 고용하여 흑인 게릴라와 내전에 돌입했다. 도심에서는 흑인들의 시위와 폭동이 빈발하여 종종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1974년 포르투갈에서 일어난 카네이션 혁명의 여파로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이 종식되었고, 포르투갈령 모잠비크모잠비크 인민공화국으로 독립했다. 이 신생 국가는 로디지아의 흑인 게릴라를 지원했다. 이에 국제 제재의 장기화로 점차 피폐해지던 로디지아의 군사력과 경제는 점차 더 피폐해져 갔으며, 마찬가지로 고립의 확대와 오랜 제재의 여파로 피로가 누적되던 남아프리카 공화국 백인 정권도 원조를 삭감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지원은 같은 백인 정권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포르투갈령 식민지들의 존재 때문에 큰 무리 없이 지원을 할 수 있었던 이유도 있었는데, 방패 역할을 하던 포르투갈령 식민지들이 사라지자 부담이 가중된 데다 이미 남서아프리카의 분리독립 운동과 소웨토 항쟁을 비롯한 자국 내 흑인들의 저항 운동 등 다른 문제로 국력이 계속 소진되고 있었던 상황이라 지원을 그대로 유지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2.4. 짐바브웨 로디지아

결국 미국과 영국의 중재로 1979년 국명을 '짐바브웨 로디지아(Zimbabwe Rhodesia)'로 개칭하고 흑인 참정권을 인정했다[21]. 그러나 정부 각료의 상당수가 백인[22]이었고 군권 또한 백인이 장악하고 있는 등[23] 백인 특권이 보장된 상태였기 때문에 완전한 평등을 기대하던 흑인 대중과 흑인 저항 세력은 반발했고 오히려 전투가 격화되었다. 또한 미국 지미 카터 민주당 정부도 이 중재안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에 미국과 영국은 다시 중재에 나서서 동년 '랭커스터 하우스 협정'으로 신헌법을 제정하기로 합의했다. 일단 1979년 12월 12일 영국령 남로디지아로 잠시 돌아간 후 1980년 4월 18일 짐바브웨로 공식 독립했다.

3. 현대의 인식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의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더불어서 당시 반인종주의와 탈식민주의라는 시대 흐름을 거슬러 블랙 아프리카의 백인 식민지 정착민 특권과 지배권 방어를 위하여 수립된 국가라 역사적 평가는 박하다.

짐바브웨 독립 직전에 총선에 승리하여 독립과 함께 이언 스미스로부터 정권을 넘겨받은 로버트 무가베가 나중에 타락하면서 나라를 크게 말아먹기는 했지만 로디지아 역시 15%도 아닌 5%의 백인을 위한 나라였고 나머지 흑인은 무시했다. 로버트 무가베가 독재를 펼치고 국가 파탄과 학살에 책임이 있다고 하지만 이언 스미스의 로디지아 정부도 집권 내내 1당 독재를 유지했으며 도시에 경찰 감시망을 촘촘히 조직했고 대(對) 흑인 게릴라 작전에서 수많은 흑인들을 죽임은 물론 화학무기까지 사용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로버트 무가베가 짐바브웨를 가난하게 만들었다지만 로디지아 시절의 흑인 주민은 가난에 시달렸으며 사회복지에 있어서도 차별받았다.

이언 스미스의 로디지아 독립 당시(1965년) 경제 지표가 좋았다지만 이는 영국 본토의 지원과 그 당시 전세계적 경기 호조로부터 기인한 면이 적지 않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내전이 유발되어 경제 발전과 민생에 큰 악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내전으로 인한 경제 타격은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포르투갈 및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지원이 끊기거나 감소하면서 더욱 심해져 이언 스미스 정부가 어쩔 수 없이 협상에 나서게 하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로디지아 시기는 내전으로 농업이든 공업이든 산업을 안정적으로 육성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24]

이언 스미스는 로디지아 멸망 이후 "나는 흑인 정권 수립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공산당 정권의 수립에 반대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변호하였다. 그러나 이언 스미스는 로디지아 총리 재임 시기에는 "로디지아를 만든 것은 백인이고 로디지아의 주인은 백인이며 백인이 계속해서 로디지아를 지배해야 한다"고 표명한 바 있으며 1966년 영국이 다수 통치(흑인 통치) 시행을 세기 말까지 연기하는 첫 번째 양보안을 제시하자 이를 거부하고 1971년 영국이 다수 통치(흑인 통치) 시행을 2031년까지 연기하는 두 번째 양보안을 제시했음에도 이조차 무산시킨 바[25] 그와 로디지아 정권의 목적이 백인 독재나 백인 우위 독재에 있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1976년 이언 스미스는 포르투갈령 아프리카 식민지 붕괴와 그에 따른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강한 타협 권고 등 정권 어려움이 가중되는 상황에도 "나는 절대로 다수 지배(흑인 지배)에 동의하지 않는다. 천년이 지나도."라는 말을 남겼다. 저 발언이 있은 뒤에 그는 "우리는 로디지아가 흑인백인의 국가가 될 것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흑인과 백인이 대립하면 안 된다"고 발언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들어 스미스가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었다는 변호론도 있지만 그의 이전 발언을 종합해 보면 진실된 발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26] 당시 한국 언론에 소개된 이언 스미스와 로디지아에 관한 내용을 보아도 그들에 대해 인종차별이라는 범주에서 설명하지 반공주의자였을 뿐이라는 서술은 찾아보기 힘들다. #, #, #[27], #, #, #[28]

인구의 5%인 백인이 나머지 95%의 흑인을 지배하던 나라라 지금도 백인 우월주의자들 사이에서 백인 우월주의의 상징이자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이상향처럼 여겨진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 교회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인 백인우월주의자가 인터넷에서 마지막 로디지아인이란 아이디로 활동한 바 있고 로디지아의 국기를 가슴에 달고 있는 사진도 있다.

서양권 네티즌들 중에서는 '무가베가 로디지아를 망쳤다'는 여론도 있다. 예시 물론 대개 식민지 수혜론급의 주장이라 주류적인 것은 아니며, 일부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나 먹히는 말이다. 서양권에서는 "그놈이나 그놈이나" 식 양비론이 주류 여론이라고 할 수 있다.

4. 기타

5. 관련 문서



[1] 쇼나족이 약 80%를, 은데벨레족이 나머지를 차지했다.[2] 참고로 아파르트헤이트를 시행했을 당시 남아공의 백인 인구비율이 최소 15%에서 최대 22%는 되었다. 비록 1990년대 이후 백인이 80만씩이나 빠져나가면서 비율이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남아공 백인 인구는 노르웨이 인구 정도는 되며 당대 로디지아보다 훨씬 많다.[3] 구자라트인과 벵골인이 다수이며 소수의 중국계도 있었다. 컬러드는 말레이인과 코이산족 혼혈.[4] 자신들을 영연방 내 자치령으로 간주했던 남로디지아 백인 정권에 의해 일방적으로 추대(?)된 것으로 엘리자베스 2세 본인과 영국 정부, 국제 사회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남로디지아 백인 정권도 1970년 공화제로 전환하면서 더 이상 엘리자베스 2세를 자신들의 국가원수로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5] Clifford Dupont.[6] John Wrathall.[7] Henry Everard.[8] #, 2021년 기준으로 $2,664.08[9] '아프리카의 곡물창고'라는 별명은 내전이 끝나고 '로디지아'가 '짐바브웨'로 바뀌고 나서 1980년대 식량 작물 생산 증진으로 농업을 다변화시킬 때 붙은 별명이다. #[10] 현지인 소비를 위한 식량 작물은 오히려 농업에서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은 흑인 소농에 의해서 주로 생산되고 있던 상황이었다.[11] Federation of Rhodesia and Nyasaland. 영국에서는 중앙아프리카 연방(Central African Federation)이라고도 했다.[12] Zimbabwe African People's Union (ZAPU)[13] Zimbabwe African National Union (ZANU)[14] 이들은 스스로를 White African이라고 칭하기도 한다.[15] 상술했듯 스미스의 전임자이자 온건파였던 윈스턴 필드는 영국과의 협상 결렬로 인해 실각했고 스미스는 강경파의 지지로 총리에 오른 인물이었다.[16] 국호에서 '남(南)'을 뺀 것은 이미 북로디지아가 잠비아로 개명하였기 때문.[17] 현재 널리 쓰이는 용어로는 영연방 왕국(Commonwealth realm)에 해당한다.[18] 사실 영국은 로디지아의 석유 수입을 차단하기 위해 로열 네이비를 동원해 로디지아행 석유가 주로 거치는 포르투갈령 모잠비크의 베이라 항구를 봉쇄하는 등 마냥 립서비스로 일관하진 않았다. 비록 로디지아가 남아공을 통해 물자를 우회 수입하면서 효과가 줄었으나, 봉쇄는 1975년 모잠비크가 독립할 때까지 계속되었다.[19]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로디지아를 독립국으로 인정할 경우, 인종차별 문제로 말미암아 남아공과 로디지아 두 나라가 국제사회에서 외교적 고립과 제재가 더욱 심화될 것을 우려해 로디지아를 독립국가로 인정하거나 공식 수교조차 하지 않았으나 둘 다 아프리카에서 인종차별과 백인 통치의 역행으로 고립되었던 왕따 국가 처지였기에 대표부를 두며 로디지아를 지원했다.[20] "1968년 이언 스미스의 로디지아 정부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면서 헌법 내용을 총리 자신이 밝힌 바에 따르면 '다수 통치라는 개념에 종언을 고하고', '정부를 교양 있는 로디지아인의 수중에 영원히 놓아둘 수 있는'으로 작성했다." 《아프리카의 운명》, 마틴 메러디스, 이순희 역, 휴머니스트, 2014[21] 물론 짐바브웨 로디지아 역시 세계 각국이 국가로 승인하지 않았고 계속 영국령 남로디지아로 취급되었다.[22] 이언 스미스 본인도 무임소장관으로 정부에 남아 있었다.[23] 기존 게릴라 지도자들의 군 진출을 거부한 결과였다. 다만 로디지아군은 이미 1977년부터 흑인의 장교 임관을 허가했기 때문에 경력 있는 흑인 부사관이 장교로 승진하면서 흑인이 대다수였던 병사들의 지지를 얻은 것은 물론 대학물을 먹은 젊은 흑인 엘리트들이 장교 임관을 선택함으로서 백인정권 편으로 넘어오는 효과를 가져왔다. 반면 백인들이 전쟁으로 황폐해진 로디지아를 탈출하면서 백인의 입대는 줄어들었고, 그 결과 79년에 이르면 일부 백인으로만 구성된 부대를 제외하면 흑인 중대장이 근무하는 광경이 일상화되었다. 즉 로디지아 정부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군권은 서서히 흑인에게 넘어가고 있었던 셈.[24] "1978년 3월, 두 사람(이언 스미스와 아벨 무조레와)이 합의에 도달했을 때 고립된 수 많은 농촌 공동체가 처한 곤경은 절망적인 수준이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보건 및 가축 보건 서비스가 마비되었고, 흑인이 이용하는 초등학교의 4분의 1가량이 문을 닫았다. 도로변 매복 공격이 일상화되어 전국 주요 도로의 야간 통행이 위험해졌다. 백인의 집단 탈출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아프리카의 운명》, 마틴 메러디스, 이순희 역, 휴머니스트, 2014[25] "그러나 이 제안(영국 정부가 제시한 두 번째 양보안)에 대한 여론조사 임무를 맡은 영국인 판무관은 다수 흑인 주민들이 이 제안을 결코 용인할 수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결국 이 합의안은 무산되었다. 반대 여론을 주도한 감리교 감독 아벨 무조레와 목사(훗날 잠시 '짐바브웨 로디지아'의 총리로 재임한 인물.)는 흑인 주민들 사이에 '억눌린 공포감, 언제 깨질지 모르는 침묵, 강요된 인내와 감춰진 증오' 등의 깊은 원한이 서서히 커져 가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스미스는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저항에 주의를 돌릴 생각은 하지 않고 도리어 보복 조치로 응수했다. 그는 흑인 주민들에게 합의를 무산시킨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며 더욱 가혹한 차별 정책을 시행했다." 《아프리카의 운명》, 마틴 메러디스, 이순희 역, 휴머니스트, 2014[26] 1976년 망언 뒤 오래 지나지 않아 이언 스미스는 우선 온건파 흑인 세력과 협상이라는 '내부' 해결책에 들어갔다. 하지만 협상 대상자 아벨 무조레와 목사조차도 "그러나 아벨 무조레와 주교는 스미스의 시도를 비웃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런 상황을 환영하는 듯이 꾸미게 하지 마라. 안타깝게도 내게는 아무런 선택권이 없다. 권력을 넘기겠다는 약속을 내놓지 않으면 전 세계에 있는 우리 친구들(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로디지아를 버리리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아프리카의 운명》, 마틴 메러디스, 이순희 역, 휴머니스트, 2014[27] 로디지아 독립 시기 언론 기사들로 로디지아 국가의 인종차별성을 언급한다.[28] 로디지아가 해당 기사의 주제는 아니고 지나가며 언급하고 있긴 하지만 로디지아를 인종차별과 결부시켜 언급하고 있는 언론 기사들 외에도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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