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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1912~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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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བོད་ | Tibet
파일:티베트 국기.svg 파일:티베트 문장.svg
국기 국장
1912년 2월 12일 ~ 1951년 5월 23일
성립 이전 멸망 이후
대청
티베트
중화인민공화국
티베트 자치구
티베트 망명정부
<colbgcolor=#240d70><colcolor=#f5e202> 위치 티베트 고원, 암도(Amdo) 및 캄(Kham)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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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1912년 2월 12일
건국(몽장조약) 1913년 2월 2일[1]
중국-티베트 전쟁 1930년 6월 1일
중국의 티베트 침공 1950년 10월 7일
멸망(십칠조협의) 1951년 5월 23일
망명 정부 수립 1959년 4월 28일
수도 라싸(ལྷ་ས།)
국가원수 달라이 라마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신권정치
언어 티베트어
문자 티베트 문자
종교 티베트 불교 (국교)
민족 티베트인, 한족 일부
1. 개요2. 건국 과정3. 성립4. 미승인국으로서의 한계5. 멸망6. 기타
6.1. 티베트 사회의 어두운 부분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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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세기 티베트의 영토 변화

티베트(བོད་) 왕국은 청 제국신해혁명으로 무너지고 중화민국으로 체제를 전환하자, 1912년[2]티베트인들이 독립을 선언하여 만든 미승인국가였다. 독립하기 전인 청 제국의 번국 시절부터, 중국에게 재흡수되는 1951년까지 티베트 고원 일대를 실효 지배했다.

티베트 불교의 수장인 달라이 라마가 국가의 원수를 겸임하는 일종의 신정 국가였다.

2. 건국 과정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청나라 치하 티베트 문서
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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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달라이 라마 13세 문서
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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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인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티베트 고원의 험난한 지형 덕분에 다른 곳과의 교류가 상당히 제한되어 있었고, 그 덕에 꽤 오래전부터 그들만의 문화와 정체성을 만들어 나갈 수 있었으나, 같은 이유로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9세기 중반 그들의 최대 전성기이자 마지막 전근대의 국가인 토번 제국이 멸망한 이후, 티베트인들은 자신들만의 통일된 민족 국가를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1240년에 몽골 제국에 정복되어 단일 정부에 지배당한 시기가 있었다. 그리고 몽골에게 정복된 이후 이들은 다른 민족과는 확연히 다른 독특한 사회체계를 얻었다.

1240년, 몽골 제국의 통치를 받기 시작한 시점부터 티베트 사회는 신정사회가 되었다. 티베트는 티벳불교의 수장을 자신들의 수장으로 내세우고 그들을 유력한 외세(원나라, 청나라 등)의 명목상 스승으로 만들어 일종의 자치국으로 만들었다. 덕분에 티벳 불교의 지도자이자 티베트 번국의 국왕인 달라이 라마는 황제의 스승이라는 명예와 대제국의 제후라는 권력을 둘 다 얻을 수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티베트를 이끌어 나갔다.

티베트의 자치정부와 사회는 종교계와 귀족, 지방 호족들이 적당히 서로의 선을 지킴으로서 미묘한 권력의 균형을 유지하였고, 이러한 사회구조는 19세기 후반, 서양의 침략이 가속화되기 전까지 그럭저럭 안정되게 이어졌고, 티베트의 지배층은 큰 욕심없이 자신들의 위치에 만족하며 살고 있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부터 청나라가 급격하게 쇠락하자, 티베트의 지배층은 바뀌기 시작했다. 북서쪽에서는 러시아가 남하해 왔고, 남쪽에서는 무굴제국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영국령 인도를 경영하는 인도제국이 자리잡았는데, 러시아와 영국은 척박해서 자원이 없고, 인구가 적어 시장이 작은 티베트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나, 당시 영국과 러시아. 양국은 그레이트 게임에서 이기기 위하여, 유라시아 전역에서 서로 맞서 대치하고 있었고, 이들의 사이에 있는 티베트는 양 국가의 침략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는데, 청나라는 이들을 지켜줄 능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1860년대 이후부터 티베트와 인접한 시킴, 부탄, 네팔이 영국의 영향력 아래로 편입되었다. 티베트의 이웃 국가들을 자신들의 세력권 아래로 편입한 영국은 티베트에도 문호 개방과 통상 교류를 요구했다. 만신창이가 되기 시작한 청나라는 영국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 무렵 청나라와 영국은 통상 조약을 체결하여 국경을 개방하고, 세관을 설치하기로 합의했는데, 티베트의 지배층은 서양세력이 불교 문명을 파괴하고 자신들의 권력을 약화시킬 것으로 간주하여 서양 세력을 강경하게 배척했고, 심지어 무력으로 대응하기까지 했다.

1888년과 1904년, 두차례 영국과의 전쟁이 있었다. 티베트는 일단 청조의 직할 속령이었기 때문에 병력 수가 제한되어 있었고, 정규군이 고작 약 3,000명 정도에 불과했고, 전쟁 중에 필요한 병력은 민병대를 동원하여 보충했다. 정규군의 숫자부터가 매우 적고 그 마저도 훈련과 무장이 매우 열악해서 열강군대를 상대하기에 역부족이었다. 1904년의 전쟁에서는 영국군이 수도인 라싸를 점령했고, 당시 티베트의 지배자인 달라이 라마 13세가 외몽골로 피신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러한 사태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종주국인 청나라는 대영제국과의 마찰이 두려워, 티베트가 짓밟히는 상황을 외면했다. 오히려 청나라는 티베트에 영국의 제안을 모두 받아들이라고 압력을 가했고, 티베트는 영국에 굴복하여 문호 개방과 통상 조약을 받아들이며 치욕스럽게 패배했다. 영국과의 전쟁에서 참패하고 외세의 간섭을 받게 된 티베트의 지배층은 그 자신들의 전통과 불교 그리고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근대화를 이룩해야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자신들을 무참히 버린 청 제국으로부터 자주 독립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편 청나라는 영국-티베트 전쟁이 끝나고, 티베트가 모든 조건을 굴욕적으로 받아들인 뒤, 영국이 돌아오고 나서야, 슬그머니 티베트의 상전노릇을 하러 돌아왔다. 1910년에는 티베트 방위라는 명목으로 청군을 대규모로 증파하여 티베트에 대한 예속관계를 확고히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미 영국과의 분쟁에서 청 조정에게 버려졌던 티베트는 원나라부터 청나라까지 지속해왔던 중화제국의 종속국 노릇을 유지해야 하는 지에 대한 의구심을 계속 키워왔고, 티베트가 외세에 굴복하고 나서야 티베트 땅으로 군대를 보낸 청나라가 티베트 자치정부와 티베트인들에게 강압적인 태도로 나오면서 티베트인들의 청나라에 대한 감정이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결국 청나라는 티베트의 수도 라싸와 주요 거점들을 공격해서 함락했다. 달라이 라마는 청나라가 라싸를 점령하기 전에 빠져나와 영국의 도움으로 인도로 망명했다. 굴종하는 대신 저항을 택하자 청 조정은 달라이 라마 13세에 대한 책봉을 철회했고, 새로운 후계자를 찾겠다는 조칙을 공표하면서 양측의 불화는 격화되었다. 이미 티베트군이 와해되었기에 청나라는 티베트의 지배층에 대해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고, 티베트는 청나라의 직할령으로 편입될 뻔했다.

하지만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의 귀족들에게는 다행히도 때마침 신해혁명이 발발했다. 1911년에 발발한 신해혁명으로 인하여 청나라 전 국토에서 황제의 군대와 관료를 몰아내기 위한 투쟁이 시작되었고, 본토가 위기에 처하자 청군은 더 이상 티베트에 주둔하기 힘들어졌다. 티베트인들은 봉기를 일으켜 신해혁명으로 약해진 청군을 쫓아냈다. 신해혁명은 성공해서 청조를 무너뜨렸지만 내부 수습을 제대로 못한 중화민국이 티베트에 대한 신경을 못쓰는 틈에 영국이 달라이 라마를 티베트의 지배자로 복권시키는데 도움을 주었고, 티베트 번국의 군주로 복귀한 달라이 라마는 혁명 이듬해인, 1912년에 티베트의 독립을 선언함으로서 티베트 왕국을 성립시켰다.

3. 성립

파일:2148384657F18BCF1D.jpg

티베트는 청나라의 제후국(혹은 번국)으로서 청나라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3], 1912년에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무너지자 티베트 측은 청나라 황실과 티베트 달라이 라마 사이의 상호관계가 끝나서 더 이상 중화제국과 티베트 민족에게 기존의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해석했다.

뿐만 아니라 어차피 중국 각지에서 군벌들이 난립하여 중화민국은 티베트를 실효 지배할 역량 자체가 없었고, 중화민국 정부도 티베트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때문에 달라이 라마는 독립을 선포한 1912년부터 수월하게 국가체계를 갖춰나갈 수 있었고, 1913년에는 청나라의 멸망 이후부터 티베트가 더이상 중국에 종속된 지역이 아닌 자주성과 독립성을 가진 주권 국가임을 전 세계에 공표하였다.

이 때부터 티베트는 이민족과 외국의 관료를 배제한 자신들만의 정부를 꾸렸고, 그들의 주권 국가를 지키기 위하여 군대와 경찰을 편성하였으며, 외세와 근대적 외교 관계를 설립하기 위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4. 미승인국으로서의 한계

티베트가 주권 국가로서의 권리를 위하여 동분서주했지만, 대다수의 서양국가들은 티베트를 외면했다. 그들에게 이교인 티베트 불교를 근간으로 한 신정국가인 티베트를 굳이 근대 공화국인 중화민국의 심기를 건드려서까지 인정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티베트는 땅이 척박하고 적은 인구로 시장이 매우 작았기에 그들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다만 영국의 경우에는 영국령 인도의 안정을 위하여 그들과 공식적으로 외교관계를 유지했으며 따라서 영국 영사관이 상주하고 있었고, 어떤 식으로든 티베트에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던 중화민국의 외교공관이 티베트의 라싸에 있었다. 물론 두 나라 이외의 외교공관은 없었다.

티베트는 자국의 국력을 신장시키고, 세계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동시에 자신들의 민족을 통일시키기 위하여, 칭하이성과 캄 일대를 합병하기 위하여 군대를 움직였다. 이 전쟁을 중국-티베트 전쟁이라고 부르는데, 당시 칭하이성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군벌 마부팡과 사천성을 지배하던 군벌 류원후이의 군대와 전투를 했지만 일개 군벌에 불과한 세력들에게 패배하여 확장은 진사강 서안으로 한정되었다. 장제스가 군벌을 흡수통합했지만 금세 일본군&공산당과 싸우느라 티베트는 무풍지대긴 했다.

이렇게 어떠한 힘도 가치도 증명하지 못하고 있는 나날의 중인 1945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종결되었다. 영국령 인도대영제국으로부터 독립을 하게 됨으로서 유일하게 관심을 가져주던 영국마저도 더이상 티베트에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 이는 티베트에 관심을 가지던 이유가 순수하게 영국령 인도를 지키기 위함이었기 때문이었으며, 더욱이 2차 대전이 끝난 이후로도 동아시아의 거점으로서 홍콩을 계속 점유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아무런 이득을 줄 수 없는 티베트 문제로 중국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애 냉전이 시작되어 영국 본토가 국토 재건 및 방어망 구축에 힘써야 했고 1949년 중화민국을 대만으로 밀어내고 마오쩌둥의 중화인민공화국이 등장해서 머나먼 티베트에 신경쓸 계제가 아니었다.

이러한 고립을 돌파하기 위하여 달라이 라마는 1950년 주 인도 미국 대사였던 조지 로버트 머렐(George Robert Merrell)을 티베트로 초빙하여 어떻게든 미국을 위시한 서방 자본진영에 가담하고자 노력하였다. 머렐 역시 티베트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간파하며 워싱턴에 직접 "가까운 미래에 미사일 시대가 도래하게 되면 비교적 높은 고도에 위치한 티베트는 공산주의의 물결로부터 아시아를 지킬 수 있는 보루가 될 것" 이라고 공문을 수 차례 보내기도 하였으나 당시 한국 전쟁에 심혈을 기울이던(한편으론 서유럽 및 인도태평양 방어망 구축이 중요했던) 미국은 티베트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다만 당시 티베트가 정말 국제법상 인정되는 주권 국가인지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 위에서는 티베트가 주권 국가로서의 권리를 위하여 동분서주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티베트가 외교적으로 노력한 나라는 인도. 영국, 미국 딱 세 나라뿐이다. 1933년에 체결된 몬테비데오 협약에 따르면 국가가 국가로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1)상주하는 인구, (2)명확한 영토, (3)정부, 그리고 (4)다른 국가들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티베트는 (4)다른 국가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 현저히 부족했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어떤 자료를 찾아봐도 티베트가 인도, 영국, 미국 외 다른 나라와 적극적으로 외교관계를 맺으려 했다는 근거는 찾을 수 없다.

또한 티베트가 스스로 체결한 조약 역시 발목을 잡는다. 1913년 및 1914년에 체결된 심라 협약(Simla Convention)은 티베트, 영국, 중국 3자가 체결한 협약인데 이 협약에서 티베트는 스스로 "중국의 종주권 하에 있는 라싸의 티베트 정부(Tibetan Government at Lhasa under Chinese suzerainty)"라는 문구에 합의하여 티베트 스스로 중국에 대한 종속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당 문구에 대하여 영국은 2008년까지는 "중국이 티베트에 대한 종주권은 있지만 주권은 없다"면서 티베트의 주권을 옹호하였지만# 2008년엔 입장을 바꾸어 중국이 당시 티베트에 대하여 주권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하였다.#

티베트의 주권에 대한 가장 큰 논거 중 하나인 국제사법재판소의 1960년 판결문 역시 티베트 정부가 "사실상 독립국(de facto independent State)"은 인정하지만 "사실상 독립국인지 혹은 법률상 독립국인지에 대하여는 판단하지 않겠다(The COMMITTEE was not concerned with the question whether the status of Tibet in 1950 was one of de facto or de jure independence)"라고 말하면서 티베트의 독립성에 대해서는 판단을 회피하고 있다. 당시 티베트 정부에는 정부와 행정력, 군대 등을 보유하고 있으니 '사실상 독립국' 인 것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의견을 제기하지 않는다. 문제는 당시 티베트가 법률상 독립국(de jure independence)인지 여부인데, 이에 대해서는 당시 티베트 정부가 해놓은 노력이 그다지 없어서 오늘날 티베트의 주권과 독립을 추구하는 측에서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4]

5. 멸망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중국의 티베트 침공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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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내전이 끝나자 중국 인민해방군이 1950년 10월 7일에 티베트의 국경지대를 무력으로 침공하면서 전쟁이 발발하였다. 그리고 1951년 5월 23일, 티베트는 중화인민공화국에 합병되면서 멸망하게 되었다.

제14대 달라이 라마 등 티베트 지도부는 중화인민공화국 지도부와 타협하여 중화인민공화국 치하에서 광범위한 자치를 누리고자 했다. 1950년대에는 이것이 어느 정도 실현되는 듯 했으나, 공산주의 정권으로서 종교에 적대적인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와 티베트 불교가 민족성의 중요 요소인 티베트는 언젠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중공은 공산주의 실현을 이유로 티베트인들을 탄압했고, 1959년에 제14대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 정부 내각은 인도로 망명하여 현재까지 망명정부로 남아있다.

6. 기타

6.1. 티베트 사회의 어두운 부분

'톰 그룬필드'는 티베트를 다룬 자신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티베트는 유럽의 중세 암흑시대와 놀랍도록 유사하다".[5]
딜라이 라마 통치기에 인구의 95%는 농노였다. 이들에게는 교육과 의료 혜택이 없었고, 많은 농노와 절도범에게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신체 절단, 연좌제, 눈알 뽑기, 혀 뽑기, 가죽 벗기기 등의 고문과 강간이 자행되었다. 고문을 받은 이들 중엔 공산주의자도 다수 포함되었다.
1960년대에 사원에서 양 2마리를 훔치다 잡혔던 농노 '세레 왕 튀이'는 이렇게 말했다. "그 신성한 라마가 제 눈을 뽑아버린 순간 종교는 아무 소용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 일로 인해 두 눈이 완전히 뽑혔고, 손은 잘려나갔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이 불교신자가 아니라고 말했다.[6]
초기 티베트 방문자들은 신권 독재를 언급했다. 1895년에 티베트를 방문한 영국인 'W. L. 워델' 박사는 '참을 수 없는 승려 독재'에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며 그 승려들이 불어넣은 악마적인 미신으로 공포에 떨었다고 기록했다. 1904년 '퍼시발 랜든'은 딜라이 라마의 통치를 '압제의 원동력'이라고 설명했다.

7. 관련 문서



[1] 몽장조약의 채결로 티베트와 몽골이 독립국임을 밝힘.[2] 중화민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해.[3] 즉 청 황제의 제후로서 달라이 라마가 청조에 복속된 상태였기 때문에 청나라에 티베트가 속해있던 것이지, 티베트 정부 조직이 청나라의 정부 조직에 속한 것이 아니었다. 티베트는 자치국이었다.[4] 출처: Bradsher, Henry S. Tibet Struggles to Survive, Foreign Affairs, July 1969 Vol. 47 Issue 4, p.753 "Even today international legal experts sympathetic to the Dalai Lama's cause find it difficult to argue that Tibet ever technically established its independence of the Chinese Empire, imperial or republican..."[5] A Tom Grunfeld, The making of Modern Tibet rev. ed. (Armonk, N.Y. and London: 1996), 9 and 7-33 for a general discussion of feudal Tibet; se also Felix Greene, A Curtain of Ignorance (Garden City, N.Y.: Doubleday, 1961), 241-249; Goldstein, A History of Modern Tibet 1913-1951, 3-5; and Lopez, Prisoners of Shongri-La, passim.[6] Gelder and Gelder, The Timely Rain, 113.